49화
키시아르는 나단에게 가볍게 명령을 내리고는 마차의 열린 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장신의 키시아르가 몸을 조금도 숙이지 않고도 탈 수 있을 만큼 큰 문을 보며 가케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황실 마차는 조금의 흔들림도 느끼지 않도록 대마법사들이 일일이 마법진을 그려 설계했다는데 정말일까?”
“타보면 알게 되겠지.”
유더는 정말이라는 말을 조용히 삼키고 그렇게만 답했다.
칸나는 황실 마차를 보면서도 다른 이들처럼 신기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차에 탄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법에 놀라기보다는 내내 엉덩이 밑에 가시가 돋은 사람처럼 초조하게 들썩거렸다.
간간이 창밖을 향하는 시선 속에는 알 수 없는 상념이 어지럽게 회오리쳤다.
평민 출신인 그녀가 황궁에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토록 불안해할 일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유더는 의문스러운 마음에 칸나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럼에도 칸나는 그 빤한 눈길조차 느끼지 못한 듯 정신이 어디론가 계속 팔린 상태였다.
‘붉은 돌 문제도 문제지만, 칸나도 뭔가 이상하군. 일단 도착해서도 저 상태가 계속된다면 유의해서 지켜봐야겠어.’
* * *
오르 제국의 황궁, 라 루마 궁전은 수도의 가장 깊은 안쪽에 세워져 있었다. 고대의 유산들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시절 세워진 그 궁은 천 년간 줄곧 변치 않는 아름다움으로 특별한 명성을 떨쳤다.
시인들은 그곳을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낙원이라 찬양했고, 누구나 사라진 이종족들의 손길이 담겼다는 태양궁 첨탑을 멀리서라도 한 번 보기를 소원했다.
“내가 루마의 7벽을 모두 넘게 되다니, 믿겨지지 않아.”
유더는 가케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의 그도 황궁에 처음 방문하던 날 같은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산골 깊은 곳에 살던 평민이라 해도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를 도왔다는 용사들의 이야기나, 사악한 흑마법사 모달의 전설 정도는 알았다.
그중에는 황제를 도와 직접 새로운 황궁을 세울 장소를 점지하고 그곳을 보호할 7개의 벽을 쌓았다는 대마법사 루마의 이야기도 존재했다.
그 마법사는 황궁을 중심으로 7가지 힘을 지닌 재료에 7가지 마법을 더해 각각 다른 힘을 지닌 7개의 벽을 둘렀다. 가장 중심에 있는 태양궁에 가기 위해서는 그 벽을 모두 통과해야만 했다.
벽과 벽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했기에 황궁에 머무는 이들은 목적이나 신분, 직업에 따라 특정 벽 안 구역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도라고 생각하는 곳은 사실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7번째 벽 안의 평민, 혹은 중위층들이 사는 구역일 뿐이었다.
마병단 숙소가 위치한 황궁기사단 부지가 아주 옛날부터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도 그리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의 가장 바깥쪽에서 외부의 침입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마땅히 황궁기사단이 해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성벽처럼 높이 쌓아 올린 7벽과 달리 6벽부터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벽들이 방문자를 맞이했다. 유더는 마차 차창 너머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들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규칙적으로 높이 솟은 하얀 나무, 12명의 현자들을 조각한 12개의 분수대, 거대한 창을 들고 말을 탄 일곱 기사의 동상,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디든 파고들어 기분을 좋게 하는 향긋하고 특별한 꽃향기…….
그 모든 것이 바로 구역과 구역을 나누는 벽들이었고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마차는 간혹 구역 사이를 지키는 병사들 앞에서 멈추었다가는 곧 다시 달렸다. 황실 문양이 새겨진 마차는 그 자체로 이미 절대적인 통행권이나 마찬가지였다.
“3벽을 통과했으니 곧 목적지에 도착하겠군.”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앉아 있던 키시아르가 창밖을 슬쩍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을 자주 다니다 보면 대마법사 루마가 가엾어진다네. 굳이 벽을 7개나 만들어 두었는데도 결국 인간들은 그 앞에서 스스로 검문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무의미한 노력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농담인 듯 했으나 한편으로는 웃을 수 없는 말이었다. 황궁에서 태어나 자랐을 키시아르가 하기에는 지나치게 대범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눈동자는 그 안에 아무런 의도도 담지 않은 것처럼 나른했다. 누구도 그의 미소 속에서 진심을 읽어낼 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었다.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창문이 열리고 나단의 목소리가 짤막하게 들려왔다.
마병단원들은 일제히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열리는 문을 보았다. 붉은 돌이 든 상자를 한 손에 든 키시아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느긋이 입을 열었다.
“긴장할 것 없다. 오늘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폐하를 만나는 것도 잠시뿐이다. 그 뒤에는 나만 남아 폐하를 독대할 것이니 부관 나단을 따라 대기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네.”
마차를 탈 때는 몰라도 내릴 때는 대개 가장 높은 이가 제일 나중에 내리는 법이다. 안쪽에 앉아 있던 키시아르를 두고 마병단원들이 차례차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유더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곧바로 내리지 않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일부러 다른 단원들이 먼저 내리도록 교묘히 시간을 끌었고, 이제 마차 안에 남은 사람은 유더와 키시아르 단 둘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는 동안 생각한 결과 키시아르에게 잠깐이라도 의견을 전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지금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장님. 그 상자는 오늘 황궁에 전달하시는 것입니까.”
유더가 아주 작고 빠르게 말을 걸자 키시아르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가늘어졌다.
“그건 왜 묻지?”
“회수 작전 때 칸나의 능력으로 돌을 살피려 하셨었지요.”
“그랬었지. 불가능했지만.”
“한 번 시도하여 불가능했다는 이유로 포기하기에 그 능력은 너무 아깝습니다. 혹…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유더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의견을 밝혔다. 유더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파악하려는 듯 살피던 키시아르가 잠시 후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 끝을 가만히 들어올렸다.
“글쎄……. 접촉이 아예 불가능한데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고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키시아르의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진주탑에 돌을 보내기로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단호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그렇다면 협상을 위해 내보일 것은 하나뿐이었다.
확신.
“가능하도록 만들겠습니다.”
“흐음, 곤란하군. 곧 폐하께 보여드려야 할 상황에 이런 제안이라니. 이거야 원, 갑작스러워.”
말과는 달리 입술 아래쪽을 문지르며 미소를 지은 키시아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더는 그가 혹시나 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어 차선책을 갈구해야 하는가 하는 기로에 빠졌다.
그로부터 몇 초 뒤, 마치 천년처럼 느껴졌던 짧은 순간이 지나고 키시아르가 다시 눈을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본래는 오늘 상자를 넘기고 올 계획이었지. 폐하께서 그것을 너무나 궁금해하시기도 했고, 나는 살필 만큼 살폈다 여겼으니.”
“…….”
“하지만 잘해 주겠다 몇 번이나 꼬드겨 겨우 손에 넣은 보좌가 처음으로 내게 준 요청이니… 이건 따라줄 수밖에 없겠군. 긴 시일은 안 되겠지만, 한 번 뱉은 말이니 반드시 성공해 주게.”
정 안 되면 복면을 뒤집어쓰고 황궁에 침입해 직접 훔칠까 고려까지 했던 유더의 머릿속에서 흉흉한 계획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는 느른한 미소 사이로 흥미로움을 감춘 키시아르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무얼. 이 정도로. 나는 내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라네.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유더는 한시름 놓은 기분으로 빠르게 마차에서 내렸다. 뒤를 이어 키시아르도 우아한 걸음으로 바닥에 내려섰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눈이 부시도록 희게 빛나는 궁 앞이었다. 단지 햇빛을 반사하여 빛나고 있을 뿐, 그 어떤 화려한 꾸밈이 없음에도 그곳은 앞에 선 사람을 절로 작아 보이게 했다. 그토록 거대하고 멋져 보였던 황실 마차조차 그 궁의 신비한 위엄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최고의 화가가 흰 종이 위에 오로지 굵은 직선만을 이용하여 그려낸 것처럼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 궁이 바로 황제가 머무는 태양궁이었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수도 없이 방문했던 그 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황제가 부르면 유더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반드시 이곳에 와야 했다.
그는 이 신비한 궁 안에 숨겨진 수도 없이 많은 비밀 통로 중 상당수를 알고 있었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손바닥 보듯 기억했다.
목이 잘리던 순간에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었는데, 운명은 너무나 빨리 그를 다시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그것이 기묘했다.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랑 안쪽에서 걸어 나온 노인이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머리는 눈이 내린 듯 하얗게 세었지만 허리가 여전히 꼿꼿하고 눈빛이 날카로운 이였다.
‘겉보기와 달리 실력이 상당한 자군.’
유더는 그가 붉은 돌을 든 키시아르와 생각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인사를 하면서도 괴로운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그는 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이 으레 그렇듯 허리에 특수한 매듭을 지어 묶은 띠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띠의 색과 매듭 개수를 보면 대충 지위를 짐작할 수 있는데, 노인의 띠는 바다처럼 깊은 푸른색에 다섯 개의 매듭을 지은 것이었다. 그 끝에 달린 황금빛 술을 본 유더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