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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8화 (48/805)
  • 48화

    과거에는 딱히 키시아르의 복장에 신경 쓰지 않았다. 특이한 능력을 지녀 이상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단원들도 간혹 있었으니 장갑을 자주 끼는 것 정도는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다시 돌아온 이후 지금까지 키시아르는 한 번도 장갑을 낀 적이 없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머릿속에 어젯밤 꾼 꿈이 스쳐 지나간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정말로 붉은 돌 회수 작전 때 유더가 입은 것과 같은 부상을 입었던 것일까? 그래서 늘 몸을 가리는 차림에 장갑까지 낄 수밖에 없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키시아르와 주기적으로 만나야 했을 때는 언제나 밤의 어둠 속이었지.’

    붉은 돌로 인한 부상을 입었다면 몸 어딘가에 보랏빛 멍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키시아르의 유모를 제외한다면 그의 몸을 가장 많이 보았을지도 모를 유더조차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늘 어둠 속에서 나타나 유더가 눈뜨기 전 사라졌다. 그 점을 이상히 여긴 적이 없었던 것은 키시아르가 죽기 전에는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죽고 나서는 일부러 그 시절을 망각 속에 묻어두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보다 일찍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면, 그래서 그의 상태에 관심을 가졌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고맙다는 인사는 필요 없다고 내 입으로 말했지만, 그래도 그런 표정은 좀 그렇지 않나?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유더의 표정을 본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유더는 그제야 충격과 복잡한 생각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누군가 물어보면 보좌 자리를 받아들인 기념으로 내린 포상이라고 하게.”

    키시아르가 직접 내린 포상이라고 말한다면 매일 하고 다닌다 해도 주변에서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도움이 되는 마법까지 걸린 물건이라니 안 하고 다니는 쪽이 더 이상하리라.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뒤에 서 있던 나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곧 손님들이 방문할 것 같습니다.”

    “다른 단원들이 오나 보군. 나단, 남은 음식들을 치워라.”

    키시아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륙 최고 수준의 소드마스터를 하인처럼 부려 먹었다. 그런 취급에 무어라 할 만도 하건만 나단은 더없이 당연하다는 듯 그의 명에 따를 뿐이었다.

    나단이 빠르게 접시를 층층이 쌓아 안쪽 방으로 사라진 사이 유더는 키시아르에게서 받은 장갑을 착용했다.

    겉보기에는 가죽으로 만든 것 같은데도 착용해 보니 약간 차가운 액체가 손에 달라붙은 것처럼 아주 매끈한 감촉만이 느껴졌다.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아도 가죽 특유의 뻣뻣한 감각이 없었다.

    “예상대로 잘 어울려. 역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

    키시아르가 흐뭇한 표정으로 자화자찬을 했다. 유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의 바른 거짓보다 달갑지 않은 진심 쪽이 더 좋다니 굳이 억지로 동의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단원들 중에는 부상자가 없음을 확인했나?”

    “아, 네. 없었습니다.”

    유더는 돌아오는 동안 틈틈이 동료들에게 개인적으로 부상 여부를 물어보았다. 산을 오르는 동안 약간 긁히거나 근육통이 생겼다는 이는 있어도 유더와 같은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폭발 당시 유더는 붉은 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봤자 고작 두어 발자국 차이였고, 동시에 모든 이에게 방어벽을 쳤다고 생각했지만 그 작은 차이가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만들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냥 처음부터 방어벽을 치고 접근했어야 했는데.’

    늦은 아쉬움에 입 안이 썼다.

    잠시 후 밖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단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기에 유더는 일어서서 직접 문을 열러 나갔다.

    “단장님, 죄송합니다. 유더와 함께 오려고 했는데 그 녀석이 어디를 갔는지 방에 없어서……어…? 유더!”

    “유더, 여기 있었어? 어떻게 된 거야?”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큰소리로 사죄부터 하던 가케인이 유더를 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놀란 것은 다른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배신감과 의문으로 가득 찬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눈짓을 했다.

    “…일단 들어와.”

    들어온 이들이 모두 긴 의자에 앉고 나자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건네었다.

    “간밤에는 다들 편히 쉬었나? 유더는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 내가 따로 먼저 불렀다네. 미리 언질을 주지 못해 미안하군.”

    “아… 그랬군요.”

    가케인이 그제야 깜짝 놀란 표정을 거두고 진정했다. 엘더 남매는 노골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다들 궁금해하는 표정이군. 어차피 곧 알게 될 소식이지만, 먼저 알고 싶은가?”

    “네.”

    큰 대답 사이에서 키시아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자네들은 나와 함께 붉은 돌을 가지고 황궁으로 갈 거야. 폐하께 돌을 보여드리고, 임무를 완수한 포상을 받을 예정이지. 비밀 임무라 많은 이들 앞에서 치하받지는 못하겠지만 직접 폐하를 뵙고 상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 주게. 그리고 나는 겸사겸사 그 자리에서 유더 아일을 마병단장 보좌로 임명할 계획이다.”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 한꺼번에 나왔기 때문에 단원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황궁이요?”

    “폐하를 지, 직접 뵙는다고요?”

    “유더가 단장님의 보좌를요?”

    각자 가장 놀라운 사실을 한 마디씩 외친 단원들이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르 제국의 황궁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귀족으로 태어난 이라 해도 평생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현 황제는 건강을 이유로 몇 년이나 공식 석상에 얼굴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이를 직접 뵙고 상을 받는다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굳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황궁을 셀 수도 없이 들락거렸기에 그런 이유로 굳지는 않았다. 다만 키시아르에게 붉은 돌을 진주탑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설득하기도 전에 황궁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과 이전 생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황제를 직접 보게 될 것이란 말은 상당히 놀라웠다.

    키시아르의 유일한 동복형제인 황제. 이전 생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죽었던 이였기에 건강이 무척 좋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늘 직접 치하를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알려진 것과 실제 상태는 다를지도 몰랐다.

    ‘그건 그렇고, 키시아르에게 붉은 돌을 진주탑으로 보내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틈을 찾기 어렵겠어. 어쩐다.’

    “오늘 간다면… 언제쯤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바로 지금.”

    혹시나 싶어 물은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깔끔하게 답했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준비할 것이 뭐가 있지? 제복을 제대로 입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네.”

    재미있는 질문을 들었다는 듯 미소를 지은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원들도 어설픈 표정으로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유더는 동료들의 면면을 돌아보다, 문득 유난히 창백한 낯빛으로 굳어 있는 칸나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뭐지?’

    단순히 황궁 방문이란 소리에 긴장했다기에는 지나칠 만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았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붉은 돌이 든 상자를 가져오겠다며 안쪽 복도로 향하는 것을 보고 나서 천천히 칸나 쪽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래.”

    “……힉!”

    마치 누군가 일부러 놀라게 하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선 칸나가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미안. 나, 나는. 그게.”

    “칸나?”

    “아, 아. 그게, 나는. 거기에 가면… 그러니까….”

    칸나는 평소의 활달했던 모습은 간 곳 없이 몸을 떨며 말을 더듬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의 연속이었다.

    “왜 그래, 칸나. 어디 아파?”

    걱정스런 표정을 지은 힌이 다가가자 칸나는 더욱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젓는 얼굴에 혼란과 공포가 언뜻 내비쳤다.

    “그게, 나는…… 거기에 안 가면, 안 되겠, 지?”

    “거기라니. 어딜 말하는 거야? 황궁?”

    황궁이라는 말이 나오자 칸나의 낯빛이 흰색을 넘어 아예 새파랗게 질렸다. 누가 보아도 황궁이라는 단어에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중이었다.

    “갑자기 왜?”

    “아니. 아니. 아냐. 아무것도……. 내가 이상한 소릴 해서 미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힌의 옆에 서 있던 핀도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으나 칸나는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화려한 망토를 두른 키시아르가 나단과 함께 복도 안쪽에서 돌아왔기에 그들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자, 그러면 이제 출발하지. 이번에는 마차를 타고 갈 테니 편안할 거야.”

    붉은 돌이 든 상자를 가볍게 안은 키시아르는 상자를 뚫고 나오는 기운 때문에 피부가 꽤 저릿저릿할 텐데도 태연한 표정으로 앞서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나단과 단원들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타고 갈 마차는 일반 단원들이 이 시간에 아무도 오지 않을 후문 쪽에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황궁 문양이 찍혀 있는 마차는 7명이 들어가도 여유로울 만큼 거대한 크기에 금을 아낌없이 사용한 화려함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심지어 붉은 돌의 기운을 일반 말들이 이기지 못할까 염려했는지 마차를 끄는 8마리 말을 전부 안개질풍마로 바꾸어 둔 것까지 보자 단원들의 입에서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굉장하다…….”

    “자, 그러면 나단. 마부 역할을 잘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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