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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7화 (47/805)

47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죽고 나서 과거로 돌아온 것부터 이미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더는 두통이 가라앉은 머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창밖이 점차 밝아오고 있었다.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일찍 씻는 쪽이 나을 듯했다.

그러나 방 안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을 본 순간, 유더의 머릿속에 또다시 꿈속의 키시아르가 불현듯 떠올랐다. 책상 앞에 앉아 가만히 유더를 바라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

미련은 없다고 말했으나 누구도 그를 보았다면 그 말을 믿지 못했을 눈빛이었다.

그 눈에 깃들어 일렁이던 감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정말 있었던 일이었을까.

만약 여태 기억하던 것 중 뭔가 잘못되었다면,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누가 감히 유더 아일의 기억에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유더는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거듭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 기억이 사실이라 해도…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지.’

이번에 키시아르 라 오르는 붉은 돌 회수 작전 때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게다가 침입자들이 쳐들어왔을 때도 신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신검의 주인이라는 것은 아직도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거면 된 것이다. 아직까지 유더의 목표는 순조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유더는 일단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마음먹으며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작은 보랏빛 반점으로 물든 쪽 손이었다.

어젯밤 키시아르는 엘더 남매와 가케인, 칸나, 유더를 보내기 전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제가 머무는 곳으로 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더는 마병단원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큰 식당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시작되기 30분 전, 누군가 유더의 숙소 방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언제나처럼 침착한 얼굴의 나단 주커만이었다.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말입니까?”

“네.”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뭔가 급한 일이 생겼기에 임무 수행을 위해 함께 갔던 마병단원들을 모두 불러들인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본 것은 간단한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 앞에 혼자서 느긋하게 앉아 있는 키시아르의 모습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단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왔군. 여기 앉아.”

키시아르가 고기와 야채를 끼워 한입 크기로 썰어낸 빵을 든 채 가벼운 태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장소만 아니라면 소풍이라도 나온 듯 착각했을 법한 모습이었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제 뒤에 선 나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유더 혼자 부른 것이 맞다는 뜻이었다.

유더는 떨떠름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키시아르 쪽으로 향했다. 이 공간 전체에서 붉은 돌이 풍기는 무겁고 저릿한 기운이 느껴졌으나 돌이 든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가장 안쪽 어딘가에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저만 부르신 겁니까?”

“배가 고프니 일단 먹고 이야기하지.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유더는 제 앞에 놓인 접시들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용건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키시아르나 할 법한 행동이기는 했다.

‘어쨌든 먹고 이야기하자고 말한 이상 키시아르는 그 말을 지키겠지.’

유더는 더 말해 보았자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것을 느끼고 그의 앞에 앉았다.

“전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지. 예의 따위는 차리지 않아도 되니 편히 먹도록. 참고로 나는 그 앞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네.”

키시아르가 좋아한다고 말하며 가볍게 눈짓으로 가리켜 보인 것은 곡식 여러 개를 빻아 만든 반죽을 동그랗게 말아 굽고, 그것을 나무 꼬치에 꿴 음식이었다. 안에는 다양한 재료로 만든 속을 넣어 먹기 쉽고 맛도 좋았다.

유더를 기다리는 동안 벌써 몇 개는 먹었는지 키시아르의 앞에 빈 나무 꼬치 몇 개가 접시 위에 깔끔하게 쌓여 있었다.

유더는 그것을 바라보다 천천히 꼬치 하나를 들었다. 어색하게 입을 벌려 잘 구워진 흰색 덩어리를 입에 넣자 뜨거운 온기가 훅 퍼졌다. 유더가 선택한 요리 안에는 짭짤한 맛이 나는 양념으로 버무려 볶은 고기가 들어있었다.

지난밤 꾼 악몽으로 인해 배가 조금도 고프지 않았었는데, 다행히 부담스럽지 않은 맛의 음식들이라 어느 정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히 음식을 씹던 유더는 문득 뭔가를 기대하는 듯 저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맛이 어떤가?”

“…….”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진심으로 맛이 어떤지 듣고 싶어서 하는 질문인지, 아니면 뭔가를 떠보기 위해 한 질문인지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맛있…습니다.”

일단 평범하면서도 무난하게 대답해 보았다. 그러나 진심은 아니었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식탐이란 것을 딱히 느낀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가케인과 처음 만났던 허름한 여관에서 먹은 수프와 지금 먹은 아름다운 꼬치 요리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약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사용했을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성의 없는 대답 말고.”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내 보좌가 되었다는 것은 즉 이제 이런 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어야 함을 말하지. 자, 다시 한번 대답하도록. 맛이 어떤가?”

유더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보좌가 할 일이 고작 음식 맛이 어떤지 답하는 건 아닐 텐데.’

장난을 치고 싶은 것인가? 아무튼 그가 그런 ‘성실한’ 답을 원한다면 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유더는 그럴싸한 말을 있는 대로 갖다 붙여 아주 길게 내뱉었다.

“모양은 간단하지만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것이 느껴집니다. 맛이 담백하고 깔끔하니 아침 식사로 섭취하기에 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음식을 단장님과 함께 먹을 수 있어 얼마나 크나큰 영광인지 모르겠습니다.”

자, 되었나? 원하는 대로 해 주었으니 적당히 하고 그만할 줄 알았는데 키시아르는 잠깐 웃음을 참는 듯 어깨를 떨더니 뜻밖에도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실망이군. 내가 원한 것은 그런 답이 아니야. 아직 모르겠나?”

대체 맛이 어떠냐는 질문에서 무슨 뜻을 파악하란 말인가. 예전에 유더가 그의 부단장이었을 때는 이런 이상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물론 그때도 키시아르는 아주 이상한 인간이었지만, 적어도 부단장이 된 첫날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유더는 약간의 답답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날 때부터 음식의 맛을 느끼는 데 둔합니다. 제 혀에는 풀죽과 최고급 요리의 차이가 거의 없으니 무어라 말해도 단장님의 마음에 차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만…….”

“바로 그거야.”

“예?”

“그 솔직함을 원했다.”

유더는 그제야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키시아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래 씹는 표정으로 음식을 먹는 이에게 설마 진짜로 맛있다는 답을 듣길 원했겠나?”

“…….”

“맛없다면 맛없다고 말하고, 식욕이 없다면 없다고 말해. 나는 내 보좌에게 그런 것을 듣길 바란다.”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한 무게를 실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더는 그제야 키시아르가 계속해서 물었던 질문의 뜻을 깨달았다. 그는 대충 꾸며낸 예의 바른 답이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유더가 세운 벽을 부수고 그 안의 진심을 끌어내기 위해 식사라는 가볍고도 예상치 못한 수단을 사용한 것이다.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가벼운 질문 속에 그런 뼈가 들어 있었을 줄이야. 사람을 순간적으로 방심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주 대단했다. 기가 막혔지만 동시에 진심으로 감탄스러웠다.

‘키시아르가 그런 방식을 잘 쓴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방심했어.’

유더는 눈을 깜박이다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전 이제 그만 먹겠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요.”

“하하핫. 마음대로 하도록. 그래도 저 주스만은 먹도록 해. 나단이 우리를 위해 직접 갈아낸 것이니까 말이야.”

키시아르가 크게 웃으며 탁자 한편에 놓인 두 개의 잔을 가리켰다. 야채와 과일을 섞어 갈아 만든 주스였다.

유더는 뒤에 시립한 채 침착한 표정을 지키고 있는 나단을 보고는 잔을 들어 한 번에 전부 마셨다. 초록색 주스라 몹시 이상한 맛이 날 것 같았지만 그것은 예상외로 달콤했다.

“보좌가 된 첫날부터 대단한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이것을 알려주려 절 먼저 부르신 겁니까?”

“설마. 진짜 용건은 이쪽.”

자신도 식사를 마치려는지 입가를 흰 천으로 우아하게 닦은 키시아르가 나단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나단이 거대한 책상 쪽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들고 다시 되돌아와 그 손 위에 공손히 올렸다.

그것은 한 쌍의 검은 장갑이었다.

순간 유더의 표정이 일변했다.

“놀랐나 보군. 상처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니 가려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은 착용자의 피부에 달라붙어 생기를 북돋아 주는 마법이 걸린 특별한 장갑이다. 낀 채로 물이나 피에 닿아도 상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착용하도록. 나를 보호하려다 입은 부상이니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장갑을 하나 따로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일부러 나가서 살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다행이었지만, 유더는 그것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도 종종 저런 장갑을 낀 적이 있었다. 그가 끼고 다녔던 장갑 중 눈앞의 것과 똑같이 생긴 장갑도 분명 있었다. 왜 잊고 있었는지 모를 만큼 선명하게, 갑자기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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