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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6화 (46/805)

46화

“이름이 마병단이라고 했었나?”

“아마 그럴 겁니다. 안 그래도 키올레가 그들 때문에 얼마나 시끄럽게 굴던지.”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귀가 아플 지경입니다.”

“아. 얼마 전 그곳의 평민에게 모욕을 당했다던 그 사건 때문인가.”

“어쩌다 이 가문에서 그리 멍청한 녀석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앞가림을 하라고 기사단에 넣어 주었더니 얌전히 있을 생각은 안 하고, 평민 따위에게나 모욕을 당하고 돌아와 걱정이 큽니다. 아직도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더군요.”

“상심 말게, 디아카 공작. 모든 자식이 뛰어날 수는 없는 법이지.”

노인, 디아카 공작은 어린 황태자의 냉정한 위로를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요. 이 가문의 피에 흐르는 우수한 능력은 모두 황태자 전하께 간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칭찬이 과하군.”

그들은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황태자의 말들은 처음에 그저 노인이 내보낸 말들을 피해 도망치기에 급급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도망치던 말들이 거짓말처럼 노인의 말들을 쓰러트리고 승기를 점하기 시작했다. 물러서던 것조차 사실은 치밀한 전술이었던 것이다.

결국 게임은 황태자의 승리로 끝이 났다. 황태자는 공작이 놓은 마지막 말을 쓰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이번에 펠레타 공작과 그의 부하들에게 포상을 내리실 것이다.”

“온 대륙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제일 좋겠지요.”

“얼마나 대단한 대장 놀이를 하려 하기에 이리 공을 들이는지 아주 궁금해. 기대가 크군.”

“그것만 궁금하십니까? 그 대단한 돌도 드디어 보게 되시지 않겠습니까. 신은 사실 그것이 가장 궁금합니다.”

황태자는 공작의 말을 들으며 그저 빙긋 웃었다.

“그래. 모두 다 곧 보게 되겠지.”

* * *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는 황제가 내린 비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수도에 돌아왔다. 떠날 때처럼 돌아올 때도 조용했기에 애초에 그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직 키시아르와 그 모든 여정을 함께 한 이들만이 수도에 들어서자마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혹시라도 수도에 돌아오기 전 누군가 또 붉은 돌을 노릴까 싶어 가슴 졸였던 시간은 이제 끝이었다.

“모두 수고했다.”

키시아르는 마병단 숙소 건물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린 뒤 모두에게 간단히 칭찬을 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으나 기꺼이 나를 따라 준 그대들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나도, 폐하께서도 그 노고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늦었으니 곧바로 돌아가 쉬고, 내일 아침 식사 후 내가 묵는 곳으로 올라오도록.”

붉은 돌이 든 상자 때문에 멀찍이 떨어진 펠레타 기사들이 감격한 얼굴로 경례했다. 마병단원들의 얼굴에도 피로와 뿌듯함이 공존했다.

키시아르는 고개를 돌려 숙소 입구를 보았다. 그곳에는 키시아르의 부관, 나단 주커만이 이미 나와 있었다. 그의 시선이 키시아르가 든 작은 상자 위에 머물렀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나단. 안개질풍마들을 돌려주어야 하니 사람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그 뒤에는…….”

유더는 키시아르가 부관과 나누는 짤막한 대화를 뒤로 하고 마병단원들과 함께 숙소 안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린 숙소 건물 안은 규칙적으로 박아 둔 야명석 덕에 다행히 그리 어둡지 않았다. 낮에는 평범한 돌처럼 보이지만 밤에는 등불을 밝힌 것처럼 저절로 빛나는 그 돌은 웬만한 부잣집에서도 몇 개 사용하지 못할 만큼 비쌌다.

그런 것을 숙소 건물 전체에 아낌없이 박아 두었으니 키시아르가 마병단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만했다.

“쉬지도 않고 계속 달렸더니 정말 피곤해. 어서 가서 씻고 자고 싶어.”

“나도. 우리가 없는 동안 청소는 해 주었겠지?”

엘더 남매가 하품을 하며 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에서는 칸나가 가케인과 함께 임무가 잘 끝난 것이 아직 꿈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두 긴장이 풀려 평화로운 분위기였으나 유더만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식으로 홀로 생각에 잠기는 일이 이전에도 몹시 많았었기에 다른 단원들은 그것을 아니꼽게 여기지 않았다. 이번 임무 도중 그가 어떤 놀라운 일들을 해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더. 내일 봐.”

“생각은 적당히 하고 푹 쉬어.”

유더는 인사를 건네는 동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람만을 위해 마련된 방은 좁아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깨끗하게 청소된 방 안에 머물지 않았다. 짐가방을 놓기가 무섭게 침대에 걸터앉은 유더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소매를 걷어 제 손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여전하다.’

키시아르의 신력 치료를 받은 뒤에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보랏빛 반점은 이곳에 오는 동안 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유더는 안심할 수 없었다. 오는 내내 끊임없이 고민했음에도 이 반점이 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동안에는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소맷자락을 끌어당기거나 팔짱을 껴서 가렸다. 이유 없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피멍 같은 반점을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쓸데없이 시선을 끌 것이 뻔했다.

언급하지 않기로 서약서까지 쓴 중요한 비밀 임무 도중 입은 부상이다. 쓸데없는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장갑을 하나 따로 마련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리고 이 반점과 비슷한 저주나 질병이 있는지, 치료가 가능한지도 알아봐야겠지.’

수도에 돌아오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들이 참 많았었는데, 반점 때문에 갑자기 일의 우선순위가 변해버렸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 몸이 멀쩡하지 못해서야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유더는 거기까지 생각한 뒤에야 겨우 고민을 멈추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려오느라 누적된 피로가 둑이 터진 강물처럼 마구 밀려들었다.

그는 간신히 제복을 벗고 잘 준비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기다렸다는 듯 곧 수마가 덮쳐 왔다.

‘…미련은 없다. 다만 조금 아쉬워.’

그 목소리에는 힘이 조금도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우아하게 들렸다. 유더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흐릿하게 번진 시야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아름답게 깎은 책상 앞에 반듯하게 앉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초췌하게 빛을 잃은 금발 아래 어둡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유더는 그 미소를 보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 언제인지 깨달았다.

그 남자는 펠레타 공작저에서 죽음을 맞았던 날의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그의 앞에 놓인 책상은 그의 영지 펠레타에서만 나는 특수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고, 의자 또한 그러했다.

투박하지만 멋스러운 마석 난로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안이 텅 비어 몹시 어두웠다. 그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잃지 않은 것은 오로지 난로 위에 있는 투명한 검대 위에 올려진 신검뿐이었다.

모든 것이 현실처럼 선명하지만 이것은 분명 꿈이다. 오래된 기억이 멋대로 다시 한번 펼쳐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자각했음에도 유더는 꿈을 벗어날 수 없었다.

기왕 시작한 악몽이니 끝날 때까지 보라는 안배인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유더는 차라리 어서 빨리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기로 했다. 제 기억에 의하면 이다음에 곧 제가 손을 휘두르고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말입니까.’

다음 순간 유더는 제 입에서 흘러나가는 목소리를 듣고 아연해졌다.

대체 무슨 일인가. 제 기억 속에서는 이런 답을 한 적이 없었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당혹해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또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역시 붉은 돌을 회수했던 그때인 것도 같군.’

‘…….’

‘그래… 맞아. 그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해. 하지만 알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지. 내겐 이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유더의 기억 속에서 그는 죽음을 맞이하며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엄청난 혼란 속에서 키시아르의 말이 끊길 듯 말 듯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돌을 건드리는 바람에 입은 부상이 내 그릇을 깨트리지 않았더라면…….’

‘…….’

유더는 식은땀에 젖은 채 번쩍 눈을 떴다.

익숙한 숙소 천장이 보였다. 드디어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쉽게 진정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이나 숨을 몰아쉬었다. 그럴 만도 했다.

꿈속의 키시아르와 유더가 본래 기억 속에는 없던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붉은 돌 회수와 관련한 부분을.

단순히 망상이 뒤섞인 꿈이라 생각하기에는 지독하게 현실감이 넘쳤다. 마치 원래 알고 있던 기억 쪽이 잘못된 듯 느껴질 정도였다.

유더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꿈속의 키시아르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는 붉은 돌을 회수하던 때 입은 부상으로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며 자조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현재 붉은 돌로 인해 부상을 입은 것은 유더 쪽이었다. 유더는 아직도 크기에 변화가 없는 손등 위 반점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혹시 내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일들이 온전한 기억이 아닐 확률도 한번 생각해 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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