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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5화 (45/805)

45화

올 때 길잡이를 맡았던 펠레타 기사가 모든 말들을 다룰 수 있다던 징표를 키시아르에게 주었다.

섬겨야 할 주군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 앞장서겠다고 하면 당연히 말려야 할 텐데, 기사들은 비교적 침착했다. 유더는 그들에게서 키시아르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믿음을 읽었다.

“출발한다!”

그들은 지노 장군을 뒤로하고 남부군 기지를 떠났다. 좋지 않은 일로 갑자기 떠나게 된 것이기에 분위기는 몹시 무겁고 진중했다.

밤의 어둠이 내린 들판 위를 11마리의 안개질풍마가 거침없이 달려갔다. 그 말들은 밤에도 앞을 보는 데 지장이 없었으므로 어떤 장애물도 손쉽게 피해갔다.

진주 가루를 뿌린 듯 빛나는 말들의 몸만이 그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이었다. 유더는 차갑고 소름 끼치는 감각을 참으며 고삐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역시 아무리 편하고 빠른 이동수단이라 해도 자연에서 태어나지 못한 존재는 그와 상극이었다.

키시아르는 올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을 달렸다. 가혹할 만큼 엄청난 속도로 달린 덕분에 날이 밝았을 때는 어느새 산맥을 한참 벗어난 곳까지 와 있었다.

“유더. 잠깐 이야기 좀 해.”

잠시 쉬기 위해 말에서 내린 사이, 유더에게 다가온 가케인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걸었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는 단장님과 함께 그놈들을 쓰러트렸으니 뭔가 더 알고 있지?”

“나도 잘 몰라.”

사실 혼자 쓰러트린 것이었지만 유더는 가케인의 말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굳이 능력을 자랑하여 좋을 것이 없었다.

“상자를 놓고 돌아가려 했을 때 놈들이 나타났어. 공격하기에 쓰러트렸을 뿐이야.”

“어떻게 그렇게 많은 놈들이 미리 이곳에 와 있을 수 있었을까. 붉은 돌을 회수했다는 걸 그렇게 빨리 알아차리다니…….”

“칸나 완드. 이쪽으로 오도록.”

그때, 키시아르가 칸나를 불렀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칸나에게 쏠렸다. 막 물통 뚜껑을 열고 있던 칸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예?”

“쉬는 동안 이 물건들을 읽을 수 있겠나?”

키시아르가 품속에서 몇 개의 물건을 꺼냈다. 찢어진 장갑과 부서진 비수 손잡이, 그리고 깨진 주사위 조각이었다. 유더는 그것들이 죽은 침입자들의 물건임을 알아차렸다.

떠나기 전 잠시 저택 안에 들어갔다 오더니 짐과 함께 그것들을 챙긴 모양이었다.

“물론입니다. 시도해 보겠습니다.”

칸나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그녀는 자신만이 이번 임무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여전히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 다시 한번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심호흡을 했다.

칸나는 우선 장갑을 잡았다. 그녀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손 안쪽에서 미약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주인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만 읽힙니다. 주인이 가진 것 중 가장 질긴 재질이라, 그는 이 장갑을 끼고 자주 전투를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악수를 할 때도 썼네요. 아주 강렬한 기억이었던 것 같아요. 그가 큰 돈주머니를 장갑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돈을 센 뒤 장갑을 벗고 손가락으로 지장을… 찍었네요.”

거기까지 말한 뒤 칸나는 눈을 떴다. 몇 달간 수도 없이 능력을 사용하며 훈련하면서 그녀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에는 읽을 수 없는 물건도 많았고, 대부분 단편적인 단어로 떠오르는 정도의 정보만 읽혔으나 이제는 반드시 뭔가 읽어낼 줄 알았다. 읽을 수 있는 정보도 훨씬 자세해졌다. 대부분은 그 물건과 관련된 가장 강렬한 기억들이었다.

“그 돈을 준 자가 아마 내가 찾고자 하는 자와 관련이 있겠군.”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물건을 내밀었다. 부서진 비수 손잡이였다. 칸나는 그것을 쥐고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했다.

“공포. 이것을 쥔 자가 마지막에 느꼈던 거대한 공포와 후회가 읽힙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원망했군요. 그 사람은… 의뢰를 맡겼을 사람. 본 적 없는 주인. 제국의 귀족.”

“제국 귀족이라니?”

가만히 듣고 있던 가케인이 깜짝 놀라 질문하자 칸나가 눈을 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도 심각한 기색이 가득했다.

“비수를 쥐고 있던 사람이 강하게 생각했던 단어입니다. 아마 의뢰를 맡긴 배후의 정체를 오르 제국 귀족일 것이라 저들끼리 추측했던 것 같습니다.”

칸나의 말로 인해 분위기는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을 깬 것은 여전히 흥미로워 보이는 미소를 잃지 않은 키시아르였다.

“그래… 했던 짓을 보면 가능성은 없지 않겠군.”

“하지만 이 나라의 귀족이 어떻게 황족이신 단장님을 상대로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단장님께서 붉은 돌을 회수해 오는 것이 곧 이 나라의 안녕을 위한 일이 아닙니까? 대체 왜…….”

가케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키시아르는 대답 대신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귀족도 귀족 나름이라네. 가케인 볼룬발트. 모두가 자네와 같은 충심을 지녔다면 우리는 지금쯤 아주 편해졌을 텐데 말이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가케인은 깜짝 놀라 괜한 말을 했다고 여긴 듯했으나 유더는 그 말을 듣고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이전 생에서 황제의 명으로 많은 파티와 모임을 돌아다니며 유더는 제국의 권력 구도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백성들은 황제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권력을 지녔으며 그를 보필하는 이들은 모두 진심이 가득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다. 제국의 역사와 함께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4개의 공작 가문은 이 나라에 왕이 4명 더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거만했다.

황실도 제 발아래 있는 양 건방지던 이들의 면면을 떠올리자 키시아르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귀족도 귀족 나름이었다.

“자, 마지막 물건이다.”

칸나는 마지막으로 깨진 주사위를 손에 쥐었다. 눈을 감고 집중한 얼굴에서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깊은 집중력이 느껴졌다.

“이 물건의 주인은… 도박 중독이었습니다. 돈이 아주 많이 필요했군요. 힘을 각성했지만 달라지지 않은 생활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공포와 후회……. 이전에 읽었던 물건들과 비슷합니다.”

칸나는 눈을 뜨고 단장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다. 덕분에 재미있는 정보를 얻었어. 그런데 혹… 상자 안에 든 돌은 읽을 수 없겠는가?”

겨우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 기뻐 환히 미소를 지었던 칸나의 표정이 도로 심각해졌다.

“상자의 내력밖에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참 좋은 능력인데 안타깝군.”

키시아르가 진심을 담아 아쉬워했다. 유더 또한 동감이었다.

칸나의 능력이 직접적인 접촉 없이도 정보를 읽는 것이 가능해질 만큼 발전한 뒤 다시 한번 돌을 읽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재 발전 속도를 보아서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전의 역사와 같이 흘러간다면 키시아르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붉은 돌을 들고 황궁에 갈 것이다. 칸나의 능력이 발전해도 그때는 그 돌이 이미 세계구가 되어버린 다음일 터였다.

‘그걸 막거나 늦출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전에는 멋모르는 진주탑 마법사들이 붉은 돌의 힘을 멋대로 깎아내어 원본을 훼손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임무에 참여하며 붉은 돌 안에 든 힘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유더의 머릿속에서 붉은 돌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다 사라졌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키시아르 본인에게 그 돌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라면 황제를 독대해 돌을 진주탑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말해도 될 테니까.

유더의 시선이 은밀히 키시아르 쪽으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오르 제국 수도 북부의 황궁.

머리가 희끗한 사내와 어린 소년이 마주 앉아 여러 개의 기기묘묘한 형상을 깎아 만든 말을 세워 놓고 전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노인이 어린 손자와 놀아 주는 듯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그들의 관계는 그리 친밀하지 않았다.

노인의 눈빛은 잘 갈무리되어 있되 잔인하고 교활했으며,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소년은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사나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펠레타 공작이 회수에 성공한 모양입니다. 곧 돌아온다고 하더군요.”

노인이 말 하나를 판 위로 움직이면서 중얼거렸다. 대수롭지 않은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가 보더군.”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태양궁의 분위기가 들떠 있다는 소식이 광휘궁까지 들리니 자연히 알 수밖에.”

광휘궁은 황태자를 위해 만들어진 궁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오르 제국 황족다운 금발에 붉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바로 다음 대 제국의 황제가 될 황태자 카치안 라 오르였다.

“그러면 중간에 그것을 노린 이들이 나타나는 사고가 있었다는 말도 들으셨습니까?”

노인이 내보낸 말이 하나 더 늘었다. 공격적인 모습이었으나 황태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능숙하게 말을 옮겨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것도 들었다. 펠레타 공작의 부하들이 능숙하게 해결했다지. 흉수들은 어디서 온 놈들이라던가.”

“아쉽게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래. 참 아쉽군. 어쩌면 우리와 좋은 사이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비정한 뜻을 내포한 말이었으나 황태자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

“펠레타 공작은 결코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멍청한 자가 아니야. 그자는 교활한 방식으로 기어이 그 단체를 만들어냈어.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제 몸 돌보기에도 급급할 자라 여겼는데 이런 발톱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에 공을 세운 이들도 펠레타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아니라 공작이 만든 이상한 단체에 속한 이들이라더군요.”

그 말에 황태자는 처음으로 말을 옮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이름이 마병단이라고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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