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유더는 정체 모를 의뢰자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돈도, 권력도 있으며 무척이나 철저한 자였다. 아마 의뢰자는 꼬리를 밟혀도 자신에게는 타격이 오지 않도록 하려고 용병을 택했을 것이다.
각성자를 열 명도 넘게 모아서 보냈으니 아마 키시아르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상대하고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리라.
키시아르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았다면 십수 명 정도로는 소용없을 것을 알았을 텐데, 우연히도 유더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그자의 패인이었다.
“의뢰인에게 대리자도 있었다고 했지. 그와는 어떤 방식으로 접촉했지?”
“그, 그자들은 늘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오르 제국에 들어온 이후로는 한 번도 대리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편지로만…….”
“편지는 당연히 모두 태웠고 말이지.”
“…예.”
키시아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유더가 들고 있는 상자로 향했다. 붉은 돌이 든 상자는 여전히 무겁고 날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발산하고 있는 중이었다.
“좋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희가 회수에 성공할 경우 향하려던 그 장소는 어디지?”
산을 교대로 정찰하며 붉은 돌을 지켰던 수많은 제국군의 눈을 피해 십수 명이나 되는 이들이 숨어 있을 수 있었던 그 장소는 어디일까.
모두의 시선이 침입자의 입으로 향했다.
“그곳, 은, 이곳에, 서…… 어…억?”
그 순간, 말을 하려던 남자가 갑자기 욱 하고 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크, 웨엑. 우우욱. 으, 아아아!”
남자의 몸이 보라색으로 변하며 빠른 속도로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눈알이 터질 것처럼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유더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방어벽!’
본능적으로 모두에게 물과 바람을 뒤섞은 방어벽을 두르자마자 남자의 몸이 말 그대로 폭발했다. 검은 덩어리가 사방에 비산하며 독기를 머금은 기운이 좁은 공간 안에 퍼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폭발이 가라앉은 뒤, 핀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드러난 상황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그나마 살아 있었던 나머지 침입자들마저 순식간에 모두 숨진 상태였다.
방 안도 천장, 바닥 할 것 없이 독기로 인해 녹아내려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유더가 재빨리 방어벽을 치지 않았다면 그들 또한 같은 신세가 되었을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가……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라 문을 연 가케인이 방 안의 풍경을 보고 기겁했다.
“나야 멀쩡하지. 모두 괜찮은가?”
키시아르도 이번만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던 듯 찌푸린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괜찮습니다.”
“저희도 괜찮아요.”
유더와 엘더 남매가 대답한 뒤 키시아르의 시선이 붉은 돌이 든 상자로 향했다. 유더는 그것도 멀쩡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의 손안에 있는 한 붉은 돌은 안전했다.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군. 설마 서약서의 금제를 이중으로 걸어놓았을 줄이야.”
“서약서의 금제요? 그건 단장님이 풀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하나는 확실히 풀었었지. 그런데 설마 그쪽에서 서약서를 서로 다른 종류로 2개나 썼을 줄은 몰랐거든.”
힌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피식 웃었다. 정말로 우스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적이 미처 거기까지 하리라고 예상치 못한 것이 어이없는 것처럼 보였다.
“본래는 한 번에 한 개의 서약서밖에 못 쓰도록 되어 있지. 하지만 간혹 불법으로 만든 서약서를 가지고 이중 금제를 거는 경우가 있다네. 금제가 강해질수록 어겼을 때의 대가도 끔찍해지니 악랄한 수법이지. 한 방 먹었군.”
유더도 단장 시절, 이중 금제를 걸어 사람을 부리는 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이들은 보통 자신에게 걸린 금제를 잘 알고 있어 절대로 비밀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갑작스레 죽어버린 그자들은 서약서의 금제가 이중으로 걸렸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는 듯 보였다. 알았다면 키시아르가 한 번 힘을 써서 금제를 풀었다 해도 그렇게 쉽게 입을 열지 않았으리라.
‘…설마 일부러 이런 상황이 되기를 노린 건가?’
금제 때문에 부풀어 올라 산산조각이 난 남자의 몸에는 스치기만 해도 즉사할 만큼 강한 독기가 배어 있었다. 그것이 동료들이나 키시아르를 스쳤다면 죽지는 않았더라도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유더는 놀라울 만큼 키시아르를 향한 무언의 악의를 느꼈다. 지금이야 유더가 이곳에 있었기에 멀쩡히 막아낼 수 있었다지만, 돌아오기 전의 세상에서는 어땠을까. 그때의 키시아르도 이런 공격을 마주했을 텐데 정말 괜찮았을까?
“단장님. 혹 짐작 가는 배후는 없으십니까?”
유더는 조용히 키시아르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군.”
정말로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예상되는 바는 있지만 굳이 단원들에게까지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자들이 숨어 있던 장소를 듣지 못했으니 지노 장군에게 명해 수색을 펼치라 할 생각이야.”
“지금 말입니까?”
“빨리 찾아야 주동자가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을 찾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나.”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다시 한번 유더의 품속에 얌전히 안겨 있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수색에 참여하지 않고 곧바로 떠나는 것이 좋겠군. 피곤하겠지만 모두 곧바로 짐을 챙겨 나오도록.”
키시아르는 아무래도 더 이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진 듯했다. 그 점은 유더도 동감이었다. 밤중인 데다 펠레타 기사들과 나란히 이동할 수 없을 테니 위험하겠지만, 알 수 없는 배후의 눈이 지척에 있을 이곳보다는 오히려 나을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제히 대답한 단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하나둘 저택을 빠져나갔다.
유더는 아직 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와 깨진 창문, 부서진 천장과 가구들을 보며 저택 주인이 나중에 상당히 피눈물을 쏟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의 우아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유더.”
막 몸을 돌리려던 유더의 등 뒤에서 키시아르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키시아르의 시선이 또다시 붉은 돌이 든 상자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 상자를 단장님께 돌려드리는 것을 잊을 뻔했군요.”
유더는 그 눈빛이 상자를 돌려달라는 무언의 명령이라 여기고 팔을 뻗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 손, 어떻게 된 거지?”
……손?
유더는 상자가 아니라 그것을 든 제 손 쪽이 키시아르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 어제 붉은 돌에서 폭발한 기운이 뚫고 지나갔던 그 부분이……. 음?’
유더의 한쪽 손등에 있던 보라색 피멍이 어느새 커져 작은 새의 알만 한 크기가 되어있었다.
분명 낮에 붉은 돌을 회수하러 갈 때까지만 해도 그 정도 크기가 아니었다. 못으로 한 번 쿡 찍은 것처럼 작은 멍이었는데 대체 언제 이만큼 커진 것일까?
고통도 없었고 멍이 커지는 기색은 더 느끼지 못했기에 유더는 의아하게 그 멍을 내려다보았다.
‘기분 탓이라 보기에는 확실히 커졌는데.’
“표정을 보니 이제야 발견한 모양이군.”
유더의 표정을 보고 사정을 지레짐작한 듯 키시아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기는 했지만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그러기를 바라지는 않았어.”
“아닙니다. 아프지 않아서 몰랐습니다.”
“그리 말하면 자네에게 잘해 주겠다고 말한 내가 뭐가 되나.”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유더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마치 춤을 권하듯 손바닥을 위로 한 자세였다. 이곳이 반파된 저택 안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우아한 움직임에 유더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치료해 줄 테니 손을 여기 올리게. 혹시 반발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상자는 내려놓도록.”
“…신력을 쓰시려는 겁니까?”
“그거 말고 뭐가 있겠나.”
혹시나 싶어 묻자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키시아르가 정말로 신력을 확실히 쓸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호기심도 강했다.
유더가 머뭇거리며 상자를 내려 놓자 키시아르가 곧바로 멍이 든 쪽 손을 잡았다.
유더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굳혔다.
“안심하게. 불순한 의도 따위는 없는 순수한 접촉이니까.”
그 움직임을 느꼈는지 키시아르가 눈을 휘어 웃으면서 낮게 속삭였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하하하.”
유더의 딱딱한 대답에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래도록 혼자 살며 일을 하느라 마디가 불거지고 곳곳에 흉터가 남은 유더의 손과 달리 키시아르의 손은 희고 매끄러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손은 사실 보기보다 몹시 단단하고 서늘했다. 손끝마다 못이 박인 검사의 손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 손의 감촉이 유더의 기억을 자꾸만 억지로 불러일으키려 했다.
유더는 입술을 깨물며 쓸데없는 생각을 도로 내리누르려 노력했다. 키시아르의 손안에서 흰빛이 흘러나와 유더의 손등을 부드럽게 뒤덮었다. 직접 느끼니 더욱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신력이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태양신의 사제들 중에서도 고위급 수준인데…….’
“내가 신력을 쓰는 게 그리 신기한가?”
키시아르가 나직하게 물었다. 유더는 순간 제 속을 읽힌 줄 알고 조금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긴, 이 사실은 대외적으로 아는 이가 거의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단장님 말고도… 황제 폐하께서도 이런 신력을 쓰실 수 있는 겁니까?”
“물론 쓸 수 있고말고.”
맥이 풀릴 만큼 쉬운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