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2화 (42/805)

42화

“핀. 손가락부터 시작할까? 아니면 발가락?”

“나는 발가락이 좋아.”

“그래. 그러면 발가락부터 으깨자.”

“으으, 자, 잠깐.”

적들 중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기어가려 했지만 힌이 발을 올리는 것이 더 빨랐다.

“말할게. 말할 테니까… 잠깐! 크아아악!”

쿵. 힌이 한 발로 적의 다리를 밟는 것과 동시에 모든 것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살려주……. 말, 말하겠……!”

“잠까, 잠깐……!”

적들이 일제히 숨을 헐떡이며 도리질을 쳤으나 키시아르는 그저 웃을 뿐 엘더 남매를 말리지 않았다.

그 뒤 방 안에서는 몇 번 땅이 부서질 듯한 쿵쿵 소리와 작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 으으……!”

“자. 이제 말할 마음이 들었나.”

전신에 화상을 입고 눈물 콧물을 흘리는 적들을 향해 키시아르가 다시 한번 느긋하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는 황족 시해를 저지르려 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수도로 끌려가 진주탑의 실험체가 되느니 깔끔하게 가는 쪽이 좋지 않겠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보다는 제일 먼저 말한 한 놈만 살려준다고 하시는 쪽이 더 효과가 좋아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힌 엘더가 고개를 저으며 다른 방법을 추천했다. 유더 또한 그녀의 방법 쪽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그러면…….”

“서, 서약서를, 썼습니다…….”

키시아르가 말을 바꾸기 전, 쓰러진 적들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말하지 않기로… 그래서, 말할 수가…….”

“서약서?”

키시아르의 붉은 눈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마병단원들이 붉은 돌 회수 작전에서 있었던 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고 할 때 썼던 것과 비슷한 마법 서약서일 터였다.

서약서는 아주 비쌌기에 어지간히 힘이 있는 이들이 중요한 임무를 하달할 때 이외에는 잘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웬만한 이들에게는 잘 팔지도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배후에서 그들을 고용한 이가 그만한 힘을 가진 존재라는 뜻. 눈을 가늘게 뜬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더. 잠시 갖고 있도록.”

그가 붉은 돌이 든 상자를 유더에게 건네고는 쓰러진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엇을 하려고?’

유더는 의아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키시아르가 강한 능력을 지닌 자이기는 하나, 육체적 능력뿐이다. 유더가 알기로는 그랬었다.

서약서의 힘을 깨는 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고위 마법사나 사제 이외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 본 것은 비밀로 하도록.”

엘더 남매와 유더를 돌아본 키시아르가 장난스럽게 윙크를 한 뒤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나아간 흰 빛이 그들을 감쌌고, 잠시 후 사그라졌다.

‘…저건 설마 신력?’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유더의 표정이 순간 놀라움으로 크게 변했다. 그의 눈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면 방금 본 것은 분명 태양신의 사제들이 부정한 것을 파훼할 때 쓰는 힘이었다.

“피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쓸데없는 힘이지.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군.”

아무것도 모를 엘더 남매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유더는 아니었다. 황가의 피에 신력이 전해 내려온다니. 이전의 생에서 황제를 아주 가까이에서 모셨음에도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전에 키시아르는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죽던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예전에 사제 중에도 각성자가 있기는 했었어. 하지만…….’

그 숫자도 너무 적었고 능력이 있다 하기가 민망한 수준의 힘을 가진 이들뿐이었다. 덕분에 신력과 붉은 돌의 힘은 서로 상쇄한다는 말이 정석처럼 인정받았다.

유더가 죽을 때까지 마병단에 사제 출신 각성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도 그 설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키시아르 라 오르는 각성자 중에서도 대단한 힘을 가진 이였다. 게다가 그는 주인을 까다롭게 고르는 신검에게 인정받기도 했다.

신검이 역대 주인으로 고른 이들은 인정을 받은 당시는 아니더라도, 결국 모두 역사에 남을 만큼 강한 힘을 지닌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소드마스터가 각성자가 된 전례는 아직 없었지만 미래에는 존재했다. 1년쯤 뒤 타국에 있는 소드마스터 중 한 사람이 각성해, 바로 그 사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급은 아니더라도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강한 기사가 각성자가 된 경우도 꽤 있었다. 그래서 유더는 신검의 인정을 받은 키시아르가 각성자가 된 것 자체는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서약서의 힘을 깰 만큼 강한 신력을 가진 이가 강한 각성자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검의 인정을 받을 정도라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키시아르에게 소드마스터가 될 만한 실력이 있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서약서의 힘을 강제로 깰 만큼 대단한 신력을 지녔고, 그것도 부족해 강력한 각성자로 각성까지 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과연 그런 경우가 가능하기는 한가? 5개의 속성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유더에게도 그것은 엄청나게 허황된 일로 느껴졌다.

그가 아는 한 각성자의 힘, 오러, 신력 3가지를 동시에 가진 인간은 한 명도 없었다. 눈앞에서 키시아르가 신력을 쓰는 것을 보았음에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키시아르가 제 힘을 온전히 쓰지 않는 것은 단순히 리더로서 지휘하는 것을 우선하는 스타일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신력도 쓸 수 있는 데다 그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지.’

전무후무한 능력을 지니고도 숨기려 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유가 키시아르의 죽음과 관련하여 유더에게 남아 있던 의문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순간, 기다렸다는 듯 순순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키시아르 라 오르.

황제 계승권을 노릴 수 없는 이름뿐인 공작이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남자. 그처럼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자가 어째서 황제의 자리를 노리지 않고 그런 위치를 잠자코 받아들인 것인지 예전부터 궁금했었다.

유더가 만약 그와 같은 힘을 가졌고 황자로 태어났다면 결코 그처럼 숨죽이고 살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가면 황실 핏줄에 정말 신력이 내려오는 것이 맞는지, 키시아르와 비슷하게 살다 간 다른 황자 출신 공작들은 어땠는지 조사해 봐야겠어.’

유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도 키시아르는 아무렇지 않게 침입자들을 심문했다.

“자. 이젠 말할 수 있을 테니 대답해라. 누가 너희들을 보냈지?”

“저, 정확히는 우리도 모른, 모릅니다.”

침입자가 고통에 찬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저희는 모두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용병입니다. 의뢰인은 정체를 알리지 않고 언제나 대리자와 편지를 통해서만 저희와 접촉했습니다…….”

“용병?”

엘더 남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유더는 그제야 키시아르와 관련된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직업 암살자는 아닌 것 같더니… 과연. 전부 용병이었나.’

“그래도 의뢰인에게서 사전에 뭔가를 듣기는 했겠지. 너희는 무엇을 알고 온 거냐. 붉은 돌을 빼앗으면 어떻게 할 셈이었지? 아니. 혹시 붉은 돌은 핑계고, 의뢰자가 나를 죽이라 하던가?”

“아, 아닙니다.”

키시아르의 질문을 들은 침입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밑바닥 인생이지만 저희도 그런 짓을 했다가는 곱게 죽지 못하게 될 것은 압니다. 황족 시해라니, 그런 의뢰를 받아들일 리 없지 않습니까.”

“저 녀석들 참 우스운 말을 하네. 황족 시해는 무섭지만 붉은 돌을 빼앗는 건 괜찮고?”

힌이 들으라는 듯 말을 보태자 피투성이가 된 침입자의 얼굴 위로 후회와 분노가 스쳤다.

“…의뢰자는 이곳에 펠레타 공작 한 사람만 머물고 있을 테니 때를 잘 맞추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저희도 설마 다른 사람이 또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공포에 찬 시선이 은밀히 유더 쪽으로 향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침입자들의 눈에 비친 유더는 이미 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더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정보가 완전히 새고 있었군.’

유더는 키시아르의 무표정한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가 이곳에 붉은 돌을 회수하러 오기로 정해진 것은 언제였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 대담한 짓을 계획한 배후는 그 정보를 아주 일찍 접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키시아르가 머무는 곳의 위치까지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배후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굉장히 이곳을 잘 아는 자였나 보군. 그가 너희들에게 말해준 정보가 그것뿐인가?”

키시아르의 말에 침입자들은 앞다투어 조금씩 대답했다.

“아닙니다. 처음에는 오르 제국으로 가서 전령이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했습니다.”

“산맥 어귀에서 며칠간 대기하다 어제 이곳으로 움직이라는 편지가 도착해 이동한 겁니다…!”

“저택을 감시하고 있다가 붉은 돌을 회수해 온 것 같으면 침입하여 빼앗아 오라고 편지에 쓰여 있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저, 정말로 돌만 훔쳐 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회수한 뒤에는 원래 숨어 있던 장소로 돌아가 의뢰자가 접촉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어제 도착한 편지라…….”

키시아르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유더가 생각한 것 정도는 그도 분명 알아차렸을 터였다.

직접 붉은 돌을 회수하러 온 마병단원들조차 붉은 돌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각성자뿐이란 것을 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그러니 침입자들을 보낸 배후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각성자만 모았을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그런데도 각성자만 모아서 보낸 것은 그만큼 강한 힘을 지닌 실력자가 필요하다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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