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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9화 (39/805)

39화

“어제는 혹시 회수가 어려울까 싶어 걱정했습니다만, 무사히 성공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상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피해 조금 멀리 앞서 나간 지노 장군이 키시아르를 향해 축하의 말을 건넸다. 걷는 방향을 보니 아무래도 키시아르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고맙네. 다행히 금방 끝나게 되는군.”

“전하 덕분에 저희 남부군도 2년 만에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게 되겠군요.”

“장군도 몇 달 만에 자유를 얻게 되어 기쁘겠어.”

키시아르의 편안한 대꾸를 들은 지노 장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엄숙한 표정만 짓는 줄 알았는데 그도 이곳이 지겹기는 했던 듯했다.

“그런데, 저 돌은 사람이 만지면 터지려 하고 정작 물건 안에 넣으면 괜찮다니 참 괴상한 성질을 지녔군요. 그것을 어찌 추측하셨습니까?”

“정확히는 사람이 만지면 터지려 하는 것이 아닐 거야.”

키시아르의 시선이 유더가 든 상자 쪽으로 잠시 향했다.

“아직까지는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저것이 반응하는 매개체는 나나, 내가 데려온 마병단원들 같은 각성자일 확률이 높다. 직접적인 접촉에도 반응하고, 능력을 사용해도 반응하더군.”

“과연. 그래서 각성자들과 상관없는 삽과 상자를 이용해 옮겨 보겠다고 생각하셨던 것이군요.”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지노 장군이 잠시 후 키시아르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그렇다면 붉은 돌로 인해 힘을 얻지 않은 저와 같은 이들이 만질 경우에는 폭발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겠군요. 그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일반인은 만질 수 있더라도 접근할 수가 없고, 각성자는 접근이 가능하지만 직접 만질 수 없으니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나. 삽으로 떠서 넣어 보는 게 최선이었다네. 통해서 다행이지.”

“기이하군요.”

지노 장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건드리면 터지는 마법 폭탄이 든 것을 보는 양 붉은 돌이 든 상자를 바라보았다.

“장군.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것이다. 이전에 말했던 대로 이곳에 머물던 남부군을 철수시키는 건 우리가 수도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은 이후 시작해 주게.”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내일 인사도 생략하지. 쓸데없이 시선을 끌 수도 있으니.”

내친김에 인사까지 생략하겠다고 말하는 키시아르를 향해 지노 장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만나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 말씀하셨으면서 늙은 장군과 인사조차 하지 않고 가시려 하시는군요.”

“하하. 내가 이틀간 장군과 전술 게임을 몇십 판이나 해 준 것은 다 이때를 위해서가 아니겠나.”

“몇 년 만에 뵈었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겉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 보이지 않았으나 지노 장군이 키시아르를 바라보는 눈빛은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친밀했다.

유더는 청렴하고 과묵하기로 이름난 지노 장군이 검의 길에만 매진하느라 평생 자식을 두지 않았다던 정보를 문득 떠올렸다.

“도착했으니 이제 숙소로 들어가 보아야겠군.”

얼마 걷지 않아 마을 외곽에 위치한 키시아르의 숙소가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허름한 다른 집들과 달리 그곳은 제대로 벽돌을 쌓아 만든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유더는 이런 곳에 그런 숙소가 있다는 데 조금 놀랐으나 아마 예전에 누군가 지어 둔 여름 별장일 것이라 추측했다.

“언제나 건강을 조심하십시오, 전하.”

“나야 언제나 건강하지. 장군이야말로 은퇴가 곧 아닌가? 국경지대를 직접 순찰하는 건 적당히 하고 은퇴 후에는 펠레타로 오게.”

“말씀은 언제나 달콤하게 하시는군요.”

지노 장군은 고개를 내저으며 웃은 뒤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유더 또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으나 당연히도 일개 단원에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유더는 성큼성큼 멀어지는 장군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키시아르가 은퇴한 장군을 제 곁으로 부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정보를 알게 된 것으로 충분했다.

두 사람의 친분이 예상보다 깊은 모양이니 키시아르만 잘 살아 있다면 분명 앞으로 또 만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섭섭하게 생각지 말게. 장군은 보기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야. 각성자들의 가치도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지.”

유더가 장군의 무관심에 섭섭해한다 여겼는지 키시아르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유더는 그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박이다 이내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섭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한 관심을 보이셨다면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진심이었다. 지노 장군처럼 오랫동안 높은 곳에서 살아온 이가 마병단에 막 들어온 햇병아리 같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봐야 얼마나 보이겠는가.

그의 눈에 비친 마병단원들은 그저 남부군에 널리고 널린 일반 병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특이한 능력을 가진 것이 흥미롭기야 하겠지만 그저 그뿐인 자들. 어린 황자 시절부터 보아 왔을 키시아르와 같이 대접해 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유더는 마병단에 들어가 성을 하사받았다 해서 제 위치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높아졌으리라는 착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 점은 한결같아서 좋군.”

키시아르가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유난히 높은 아치형 나무 문은 보통 양손으로 밀어도 열기 힘든 무게를 자랑했지만 키시아르는 한 손만으로 그것을 쉽게 열었다.

“자. 그러면 이제 들어가지.”

오래된 건축 양식대로 유난히 높은 아치형 현관문을 한 손으로 밀어 연 키시아르가 고개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을 표했다.

지노 장군과 함께 우아하게 걷고 있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한량 같은 동작이었다.

“…상자는 어디다 놓으면 되겠습니까?”

“근처 아무 곳에나 둬. 어차피 내일 다시 와서 가져가야 할 것도 자네니까.”

본래대로라면 펠레타 기사들이 할 일이겠지만 그들은 붉은 돌이 든 상자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내일 돌아갈 때도 마병단과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기로 한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유더는 현관 안쪽, 눈에 잘 띄지 않는 기둥 그림자 밑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조금이라도 상자와 멀어지자 피부가 한결 덜 따끔거렸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들고 오느라 고생했는데 그냥 가게 하면 나는 참 매정한 단장이 되지 않겠나. 차라도 한 잔 들고 가도록.”

“아뇨. 저는…….”

“설마 부관도 없이 이틀이나 홀로 밤을 지샌 단장의 명을 매정하게 거절할 셈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아니겠지. 동료와 같은 각성자들을 그토록 깊이 생각하는 유더 아일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 믿네.”

‘언제부터 알았다고 그런 말을 하나.’

유더가 거절하기도 전에 키시아르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어느새 저택 안 응접실에 있는 마석 난로에 불을 피운 뒤였다. 던져 넣은 마석 한 줌이 타닥타닥 타오르며 순식간에 안을 환하게 밝히고 온기를 채웠다.

안이 밝아지자 여름 별장답게 꾸민 저택 안의 풍경이 유더의 눈에 들어왔다.

불이 꺼져 있을 땐 아무도 없이 혼자 묵기에는 너무 오래되고 낡은 곳이 아닌가 싶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호화롭지는 않아도 아늑하게 꾸민 내부 곳곳에 이곳의 본래 주인일 귀족 가문의 상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꽁지깃이 긴 푸른 새가 방패 옆에 붙은 문양이었다.

“내가 직접 탄 차를 마실 기회가 그리 흔치 않을 텐데 그래도 갈 건가?”

키시아르는 고작 2일 밤만 이곳에서 머물렀음에도 마치 원래부터 집주인이었던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유더는 그가 빈 찻주전자에 물을 채워 난로 위에 올리고는 옆에 놓인 선반에서 찻잎 한 스푼을 떠 안에 넣는 것을 보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

결국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키시아르가 가리킨 난로 앞 의자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찻주전자에서 뜨거운 증기가 피어올랐고, 고소하고 향긋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키시아르는 어디선가 꺼내 온 찻잔 2개에 물을 부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놀라지 않는군. 보통 내가 이렇게 하면 다들 놀라던데.”

여기서 당신 차는 옛날에 많이 마셨다고 대답해 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

유더는 옛 기억의 파편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나름대로 놀라고 있습니다.”

“전혀 그런 표정으로 보이지 않아.”

“이 얼굴은 본래부터 그렇습니다.”

음침한 무표정. 감정이 없는 듯 소름 끼치는 눈빛. 시체처럼 창백하고 퀭한 얼굴. 옛날부터 유더가 제 얼굴에 대해 들어 온 흔한 평이었다.

“본래부터 그런 사람은 없어. 연습하면 누구나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지. 거울을 보고 연습해 보는 건 어떤가? 원한다면 도와주지.”

“……괜찮습니다만.”

“사양 말고.”

대체 이런 바보 같은 대화를 왜 키시아르 라 오르와 나누고 있어야 하는 걸까. 절대로 휘둘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음에도 유더는 어느새 그의 어이없는 대화에 꼬박꼬박 대꾸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군.’

“차 맛은 어떤가.”

이전에 마병단 숙소에서 키시아르의 부관, 나단이 타 준 차는 마시지 않고 그냥 나갔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몹시 무거운 돌을 드는 기분으로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자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저는 평민 출신인지라 이런 귀한 것의 맛을 잘 모릅니다.”

“말하기 귀찮다는 뜻이군. 그래도 다 마시도록.”

키시아르가 허를 찔렀기 때문에 유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농담이라네.”

알면서도 상대에게 한 방 맞는 느낌이 좋을 리 없다. 유더는 머리가 약간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차나 최대한 빨리 마시기로 마음먹었다.

“유더. 상자를 들고 오는 동안 어떻던가?”

그러나 한 모금을 넘기기도 전에 키시아르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눈빛을 보니 이번이 본론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뭐가 어떻느냐는 말씀이십니까?”

“어제 그 돌을 처음 보았을 때와 오늘 상자에 넣어 들고 왔을 때. 돌이 발하는 기운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며 어떤 차이를 느끼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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