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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7화 (37/805)
  • 37화

    키시아르는 유더의 찡그린 표정을 보며 웃었다. 황족도, 귀족도 전혀 어렵다 여기지 않는 간 큰 평민이 고작 이런 일에 싫은 티를 숨기지 못하는 것이 재미있다 생각되었다.

    “알겠습니다. …만약 붉은 돌을 이대로 회수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여쭈려 했습니다. 되었는지요?”

    “회수할 방법이라.”

    키시아르는 유더의 가시가 살짝 돋친 말투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나?”

    뭐, 하기는 첫 임무이니 걱정이 되기는 했겠군. 알아서 중얼거리며 유더의 뜻을 짐작한 그가 붉은 눈동자를 움직여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아니. 그 돌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았던 날로부터 계속해서 붉은 돌의 동태에 대해 보고를 받아왔다. 우리만큼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이는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다른 이들이 그 돌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 오늘은 말 그대로 그저 살펴보려 했을 뿐이야.”

    “그러면 내일은 그것을 회수할 자신이 있으시다는 말씀입니까?”

    어떻게? 의문을 숨기지 않는 유더의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났다. 키시아르는 곧바로 대답해주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궁금한가?”

    “당연히 궁금합니다.”

    “그러면 신과의 부단장 자리를 받아들이는 건 어떤가.”

    “싫습니다.”

    “알고 싶다며?”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알게 될 텐데 몇 시간 빨리 알겠다고 굳이 그리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현명한 대답이었다.

    “다른 이들은 윗자리를 제안하면 곧바로 받아들였을 텐데 자네는 참 만만치가 않군. 대체 왜 싫다는 거지?”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런 자리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듣기에도 참으로 냉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유더는 키시아르가 저를 이상하게 여기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부단장 자리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일반 단원은 죽어도 단장이 될 수 없지만, 부단장은 단장 자리를 넘겨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안 되었다. 유더는 절대로 이전처럼 단장이 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그 단단한 각오를 읽었는지 키시아르가 흐음 하고 긴 숨을 흘렸다.

    “내일 가서 몇 가지 방법을 더 시도해 보고 안 된다면, 그때는 아예 돌 주변의 땅을 통째로 파내어 상자 속에 넣어볼 생각을 하고 있다. 직접 닿지만 않으면 괜찮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물리적으로 차단하여 이동시키는 방법. 유더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결국 같은 지점이었다.

    “우스운 방법이라 어이없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침착하군.”

    “우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방법 쪽이라면 제가 가진 능력으로 도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니 퍽 든든하군.”

    키시아르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내일 잘 부탁하지.”

    “…….”

    한 가지 화제가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 키시아르가 말할 차례였다. 가만히 바라보는 유더의 시선을 향해 키시아르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낮에 내게 말해주었던 건.”

    낮에 유더가 그에게 말했던 것이라 할 만한 건 하나뿐이었다. 붉은 돌을 지키는 남부군 일반 병사들 사이에 각성자가 유달리 많이 나오고 있다는 정보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설마 벌써 그걸 알아보고 왔나?’

    “찾아보니 사실이더군.”

    키시아르가 유더의 짐작이 사실임을 곧바로 답해 주었다.

    “게다가 그걸 알면서도 전혀 중요한 사항이라 생각지 못하고 있었어. 알면서도 말이야…….”

    평소의 느른한 웃음이 아니라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밴 미소가 키시아르가 느꼈을 감정을 짐작케 했다.

    “이거야 원.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 돌아갔다면 어쩔 뻔했나.”

    어쩌기는. 몇 년 뒤에 갑자기 나타난 특수부 창설 소식에 뒤통수를 맞았겠지.

    유더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키시아르도 비슷한 예상을 하고 있을 테니까.

    “자네의 그 눈과 판단력이야말로 지금의 마병단과 내게 가장 필요한 능력일지 몰라.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자꾸 싫다고만 하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몹시 고민스러워. 언뜻 듣기에는 농담 같은 중얼거림이었으나 진담이 담겨 있었다.

    “어찌하실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제 능력이 필요하시다면 이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가까워지는 것도 싫다, 부단장 자리도 싫다, 자꾸 벽만 치는 이를 내가 어디까지 믿을 수 있겠나?”

    “…….”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막 만든 마병단을 이끌어야 할 단장의 입장에서는 유더의 거절이 그렇게 느껴질 만도 했다.

    유더는 어떻게 말해야 그를 납득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키시아르가 내뱉은 말로 인해 그 진지한 고뇌는 곧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래. 밤이라도 함께 보내 보겠나? 내가 그 면은 또 자신이 있지. 시간을 잊을 만큼 잘해줄 수 있다네.”

    순간 유더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방금… 제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

    “밤을 보내다니. 무슨 의미이십니까?”

    “말 그대로야. 신분도, 벽도 침대 위에서는 모두 의미가 없어지니 괜찮은 관계 개선 방안 아닌가. 아니면… 설마 그 나이를 먹도록 누군가와 밤을 보내 본 적이 없나?”

    그건 좀 의외인데. 키시아르가 유더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상대가 키시아르 라 오르만 아니었다면 숨기고 있던 힘이든 뭐든 끌어내어 두드려 팼을 법한 행동이었다.

    유더는 간신히 그 충동을 가라앉히며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키시아르 라 오르. 당신이란 자는 대체….’

    유더의 충격은 단순히 윗사람이자 고귀한 신분을 지닌 이가 별것도 아닌 이유로 가장 사적인 관계를 제안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마 살아서 저딴 제안을 하는 것을 두 번 보게 될 줄이야.’

    유더의 감은 눈 안에서 과거에 들었던 누군가의 말이 짤막하게 떠올랐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겠나. 나는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니 절대 내칠 생각이 없어. 그저 필요한 때에 밤을 나누는 정도면 되는 것 아닌가?…….

    ‘젠장!’

    입 안으로 삼킨 욕설과 함께 과거의 기억이 흩어져 사라졌다.

    이번에는 절대로 저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려고 친 벽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제 손으로 죽이고 난 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과거의 키시아르는 도대체 한 번을 유더의 예측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유더는 한낱 평민 출신 남자에게 진지하게 밤을 나누는 관계가 되자고 제안을 하고 있는, 황족 출신 공작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지 않다.

    어쩌면 지금이 예전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예전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관계가 바뀌었다는 이유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도 아니었다.

    대충 평범하게 가까워져 간단한 조언을 해도 받아들여질 만한 부하 정도가 되는 것이 목표였을 뿐인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니야. 아직이다. 늦지 않았어. 지금 한 말은 단순히 던져 본 것에 불과해.’

    유더는 심호흡과 함께 충격을 가라앉혔다. 도대체 침대를 함께 쓰자는 제안과 부단장이 되어달라는 제안이 한 선상 안에 오를 수 있는 말인가 싶지만… 그가 아는 키시아르라면 가능하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냥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자.’

    “안 됩니다.”

    유더는 딱 잘라 거절했다. 평민 출신의 일개 단원이 키시아르 라 오르의 가장 사적인 관계 제안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광경이었다.

    “왜지? 혹시 남자끼리 그런 관계는 용납할 수 없다는 고리타분한 쪽인가? 아니면 열성적인 태양신 신자? 아, 그것도 아니면 고향에 연인을 두고 왔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키시아르가 황족이자 공작, 그리고 마병단장으로서 힘과 지위를 내세워 관심이 가는 평민 출신 남자를 취하려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이해나 해 보겠다. 하지만 아니지 않은가.

    “딱 한 번만 해 보자고 해도?”

    “싫습니다.”

    “가차 없군.”

    다행히 키시아르는 더 권유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말 육체 따위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제안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타인에겐 큰 의미로 다가갈 수 있는 제안이란 걸 분명히 인식하고는 있으니.’

    그러니까 더 질이 나쁘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미래를 보는 눈이 대단하다 해도 역시 키시아르 라 오르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예전부터 그랬다.

    “나는 자네의 얼굴이나 몸도 꽤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군.”

    “…제가 스스로 퇴단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그만해 주십시오.”

    유더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키시아르가 나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안 되지. 알겠네. 하지만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도 좋아.”

    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말은 잘한다. 오메가에게만 끌릴 알파 각성자면서.

    대외적으로 크게 알려진 사실은 아니나 키시아르 라 오르는 알파 각성자였다. 미각성자나 타 1성별과도 몸을 섞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알파 각성자는 오메가 각성자에게만 선명한 욕구를 느끼고는 했다.

    즉 현재 제2성을 각성하지 않은 유더에게 알파 각성자인 키시아르가 욕망을 느낄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뒤 유더는 차라리 그쪽으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런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각성자들 사이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제2성과 관련된 문제를 먼저 생각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직 확실히 수면 위로 드러난 문제는 아니라 확신적으로 말하면 안 되었다. 유더는 일어날 문제라고 말하려던 것을 간신히 돌려 말하며 이것도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제2성과 관련된 문제?”

    그런 게 있느냐는 듯 키시아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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