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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6화 (36/805)
  • 36화

    유더가 친 방어벽을 미처 보지 못한 단원들이 어리둥절해했지만 키시아르만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훌륭하군. 그 짧은 순간에 혼자의 몸만 지키려 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능력을 발휘하다니.”

    “아닙니다.”

    유더가 고개를 저었으나 키시아르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서 오래 머물렀다.

    “돌을 건드린 것만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예상보다 이동시키는 것이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더 또한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을까? 그러면 어떻게 가져온 거지?’

    이전에 키시아르는 붉은 돌을 회수해 제 손에 들고 마병단에 돌아왔다. 황궁에 가져갈 때도 직접 가져갔으니 이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동안 키시아르는 엘더 남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혹시 저 돌을 사이에 두고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거리는 짧아도 좋으니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음……. 해볼게요.”

    그러나 그 시도는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갔다. 힘겹게 나아가 붉은 돌을 사이에 둔 남매가 손을 맞잡고 힘을 쓰려 하자마자 붉은 돌에서도 또다시 기운이 터져 나오려 했기 때문이었다.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뭔가에 반응하는 건 확실하군.”

    결국 키시아르는 이 이상 시도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듯, 도로 내려가자고 말했다.

    일행은 왔던 길을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단원들은 모두 심각한 표정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수고가 많았다. 첫날부터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나리라 생각지는 않았으니, 일단 쉬고 내일 다시 모이도록. 혹 오늘 본 것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다면 늦은 시각이라도 나를 찾아오도록 하라.”

    그렇게 말하는 키시아르의 시선이 은밀히 유더 쪽을 향했다. 유더는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며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나라고 모든 답을 다 알 수는 없으니까.’

    미래를 살았던 기억이 있다지만, 그때 몰랐던 것을 지금이라고 알 리 없었다.

    유더는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붉은 돌이 내뿜는 기이한 힘, 마병단원들만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 그 돌이 폭발을 일으키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과거와 지금 달라진 점은 어떤 것이 있는지…….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며 빠른 속도로 비교와 분석을 반복했다.

    ‘일단 제일 큰 문제는 돌을 이동시킬 수가 없다는 거겠지.’

    과거에 키시아르는 꽤 빠르게 돌을 회수해 돌아왔다. 중간에 작은 사고가 있어 그가 성검의 주인임이 밝혀지긴 했으나, 그것도 결국은 돌을 회수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즉 회수작전 자체는 바깥에 알려질 만큼 크게 지연되지 않고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생각하는 쪽이 옳았다.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진 걸까.

    물론 키시아르가 뽑은 단원들이 모두 달라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큰 차이가 생기지는 않을 텐데…….

    곰곰이 생각하던 유더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 키시아르가 붉은 돌을 가져왔을 때, 돌을 직접 손에 쥐고 있지는 않았어.’

    처음 붉은 돌을 봤을 때, 과거의 키시아르는 그것을 아주 두꺼운 천 안에 넣어 보이지 않도록 꽁꽁 싸맨 채 가져왔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투명한 마정석을 깎아 만든 상자 안에 넣은 상태였다.

    모두 직접 손에 닿게 하지는 않았다.

    혹시 그것이 답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시도해 보아서 나쁠 일은 없어 보였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옆 침대에 유더와 마찬가지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누워서 생각에 잠겨 있던 가케인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잠깐 생각 좀 정리하고 오려고.”

    유더는 가케인이 함께 가자고 말할까 싶어 재빨리 숙소를 벗어났다. 해가 진 이후라 숙소 주변은 어둡고 조용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유더는 제 근처에 놓여 있는 돌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작기는 해도 일단 저것을 붉은 돌 대용이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감싼다.’

    유더의 손끝에서 나아간 힘이 돌 아래의 땅을 움직였다. 스르륵 기어 올라온 모래가 돌을 두껍게 감싸 둥근 공처럼 만들기 시작했다.

    유더는 적당한 크기가 되었다 싶을 때까지 돌을 흙으로 감싼 뒤, 이번에는 허공에 손을 저어 물을 불러냈다. 흙덩이 쪽으로 날아간 물은 잠시 후 그 위를 감싼 뒤 새하얗게 변하며 얼어붙었다.

    유더가 지닌 능력은 자연계 속성을 자유로이 쓰는 것이었다.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 온도조절 또한 가능했다. 커다란 얼음 공처럼 변한 그것 가까이로 다가가 들어 올리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평범한 돌이라면 이렇게 쉬운데.’

    과연 붉은 돌에도 이런 방식이 통할까? 혹시 모르니 아예 두꺼운 천도 함께 준비해 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유더는 내일 짐 안에 적당한 천을 하나 넣어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들고 있던 얼음공을 떨어트리고 한번 더 손을 휘젓자, 단단했던 얼음과 흙덩어리가 동시에 깨지고 녹아 도로 자연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최초의 돌멩이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문득 유더는 키시아르가 붉은 돌을 단단히 감싸야 했던 이유가 있다면 그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그것이 발하는 기운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였을 것 같은데.’

    그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강력하다. 그것을 정통으로 맞은 가케인의 그림자가 터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방어벽을 쳤음에도 몸 안쪽으로 뚫고 들어오려 하던 무형의 기운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게 고작 작은 돌 하나에서 나온 힘이라니.’

    유더는 천천히 제 손바닥 쪽을 내려다보았다.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는 몰랐지만, 숙소로 돌아온 이후 살펴보니 손등 쪽에 뭔가에 꿰뚫린 듯 불그스름한 자국이 생긴 상태였다.

    마치 안에서 뭔가 터진 것처럼 피멍이 든 그 자국은 대체 언제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니 문득 기억이 났다.

    ‘방어벽을 치기 직전에, 돌에서 뻗어 나온 힘 일부가 손을 뚫고 지나갔었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미세했지만 이상한 감각이었다. 만약 그 힘 때문에 정말 피부 안쪽에서 이런 자국이 생긴 것이라면, 역시 그때 방어벽을 친 건 옳은 선택이었던 듯했다.

    ‘그 힘이 머리나 심장, 마나 홀 쪽을 뚫고 들어갔다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군.’

    기껏해야 손바닥이니 이 정도로 끝난 것이다. 각성자의 신체는 일반인보다 훨씬 강인했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었다.

    특히 배꼽 아래에 위치한 마나 홀은 평소엔 존재감이 없지만 아주 중요한 기관으로, 그것이 파괴당하면 능력을 내지도, 기운을 감지하지도 못했다. 유더는 지금으로부터 1년쯤 뒤 알려질 예정인 그 기관을 떠올리며 제 아랫배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별로 각성 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도 각성자들의 육체는 사실 많은 변화를 거친다. 이 변화는 과연 교황과 황제가 발표한 대로 신이 예비한 자연스러운 변화일까.

    그들의 말이 전부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죽기 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사는 데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아 딱히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붉은 돌의 원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돌아오니 어쩐지 그 작은 돌이 발하는 힘 하나로 저를 포함한 수없이 많은 이들의 육체가 바뀌고, 없던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 몹시 기묘하게 여겨졌다.

    유더는 내려다보던 돌을 발끝으로 툭 찼다. 굴러가던 돌은 누군가의 발에 맞아 멈추었다. 고개를 들자 놀랍게도 키시아르 라 오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밤 산책을 하고 있었지. 그런 자네는?”

    “저도… 같습니다.”

    사실은 붉은 돌과 관련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지만 대충 얼버무렸다. 하필 이런 곳에서 키시아르를 또 만날 것은 무언가.

    유더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가려 했으나 키시아르가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이 한 발 더 빨랐다.

    “그러면 만난 김에 잠시 함께 걷겠나?”

    일개 단원이 어찌 단장의 명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산책을 청했으면서 키시아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유더는 제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은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단장님께서는.”

    “자네는.”

    이런. 공교롭게도 마음먹고 꺼낸 말이 겹쳐 버렸다. 유더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내려다보는 키시아르를 바라보며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먼저 말씀하십시오.”

    “아니, 별 것 아니었으니 먼저 하게.”

    “아닙니다. 저도 중요한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키시아르 사이에 개인적으로 사이좋게 나눌 화제 따위는 없었다. 일단 오늘 있었던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 보고, 그 다음에도 할 말이 없거든 제2성과 관련된 말을 던져 볼 생각이었다. 유더가 고개를 젓자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그 말대로 중요한 말이 아니라면 먼저 해도 상관없을 텐데. 단장의 명으로 먼저 말하라 해도 싫은가?”

    ‘이 치사한…….’

    유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단장의 명이라는 무적의 핑계를 대고 부하들에게 비슷한 일을 해 왔던 자신의 과거는 머릿속에서 잠시 사라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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