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5화 (35/805)

35화

“다들 상태는 어떠한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돌을 살피던 키시아르가 나름대로 판단을 끝냈는지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이전에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곳에서 멈췄습니다. 대충 그 정도가 신이 육체를 보호하며 버틸 수 있는 한계입니다.”

지노 장군이 제일 먼저 대답했다. 겉보기에는 침착해 보였지만 돌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소드마스터의 움직임을 제한할 만큼 강한 압력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는, 피부가 좀 아프지만 그래도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요. 뭔가가 얼굴을 찌르는 것 같긴 해도 참을 만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칸나의 답에 이어 힌과 가케인도 대답을 했다. 핀은 어차피 제 누나와 같은 의견일 테니 남은 것은 유더뿐이었다.

“저도 같습니다.”

“나도 자네들과 같아. 꽤 불쾌하긴 해도 견딜 만은 하군. 다섯 명 모두가 같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건 각성자여서 그럴 확률이 높겠어.”

키시아르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붉은 돌이 있는 쪽을 흘긋 바라본 그가 다시 나아가기 전 지노 장군을 향해 짤막한 명령을 했다.

“장군은 굳이 한계까지 따라올 필요가 없으니 거기에 그대로 서 있게. 나와 마병단원들이 다녀올 테니.”

“…알겠습니다.”

그들은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그 돌은 정말로 넘어지면 손이 닿을 수도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돌과 가까워질수록 피부를 찌르는 압력도 더욱 강해졌고, 한 걸음 한 걸음의 무게가 비교할 수 없이 무거워졌다. 마치 거친 풍랑이 이는 깊고 깊은 바닷속을 억지로 거니는 것처럼.

하지만 그래도 피를 쏟으며 쓰러질 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버틸 만해 놀라울 정도였다.

“모두 그만.”

그리고 마침내 키시아르가 더 나아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선언했을 때, 그들은 돌과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위치에 도달한 상태였다.

‘저것이 바로 붉은 돌.’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유더는 얌전히 반쯤 파묻혀 있는 붉은 돌을 내려다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저 돌일 뿐이지만……. 혹시 모르니 방심하지 말자.’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겼군.”

키시아르가 붉은 돌을 바라보며 모두가 똑같이 하고 있을 생각을 입에 올렸다.

“그러면 이제……. 칸나 완드.”

“네? 네.”

설마 제 이름이 여기서 불릴 줄은 몰랐는지 칸나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키시아르는 그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능력을 써서 저 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나?”

키시아르의 말에 유더를 제외한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데려온 거구나.’

다른 이들은 전투에 유용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칸나만은 그렇지 않다. 그런 그녀를 택한 이유가 바로 붉은 돌의 정보를 읽게 하기 위해서라면 납득이 갔다.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대단히 놀라운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 붉은 돌에 대한 정보는 예전에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으니까.’

유더는 키시아르가 칸나를 택한 것을 본 후부터 그가 이 일을 시킬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었다. 그가 단장이었더라도 칸나와 같은 능력을 지닌 이가 있었다면 반드시 시도했을 테니까.

애초에 칸나를 꼭 마병단에 합격시켜야겠다고 생각해 조언을 준 이유도 바로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기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어. 모든 부분에서 그랬지.’

과거의 유더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이미 모든 것이 많이 늦은 뒤였다. 세월이 지나 사라진 사람과 사라진 정보들은 무슨 짓을 해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칸나가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만질 수 있고 읽어낼 수 있다면 말이겠지만.

“글쎄요. 만질 수 있다면…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가능할지…….”

칸나의 능력은 정보를 읽어낼 대상을 직접 만지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근처에 선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엄청난 압력을 뿌리는 저 돌을 과연 오랫동안 만지고 있을 수 있을까? 부상을 입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가 가케인 쪽으로 향했다.

“옳은 말이야.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겠지. 가케인 볼룬발트?”

“예!”

가케인이 놀란 얼굴로 크게 대답했다.

“자네의 그림자를 움직여 먼저 저 돌에 접촉해 보도록.”

‘…과연. 이건 나도 생각지 못했는데.’

유더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가케인의 능력은 그림자를 불러내는 것으로, 주로 연락책으로 부리거나 전투를 도왔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붉은 돌 같은 위험한 물건을 먼저 접촉해 보게 할 생각을 하다니. 기발하면서도 결과가 기대되는 지시가 아닐 수 없었다.

가케인도 설마 그런 지시를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듯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내 두말없이 능력을 썼다.

그의 발밑에 드리워져 있던 검은 그림자가 꾸물꾸물거리며 일그러지더니 잠시 후 쑥 하고 일어나 가케인과 같은 모습을 지닌 검은 인형 같은 형상이 되었다.

‘연습할 때도 잘 사용하지 않아서 제대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실생활에서 유용할 것 같은 능력임에도 가케인은 평소 그것을 잘 쓰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사용하는 자의 역량에 따라 날카로운 칼이 될 수도, 무딘 칼이 될 수도 있는 종류의 능력이기에 그렇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역시 괜찮은 판단력이야.’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은 가케인의 뜻대로 움직인다. 그것은 즉 본체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똑같은 칼을 일반인과 소드마스터가 각각 휘둘렀을 때 같은 위력을 발휘할까? 그렇지 않다. 뛰어난 이가 휘두르는 검은 그 자체로 산을 없애고 바다를 가른다.

가케인의 능력도 그와 비슷했다. 본체가 지닌 전투감각과 실력이 높을수록 그의 능력 또한 빛을 발한다. 그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스스로의 능력을 먼저 늘리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케인은 이미 훌륭했다. 일찍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시도해 보겠습니다.”

짤막하게 답한 가케인이 제 분신을 바라보자, 분신이 조심스럽게 붉은 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몇 발짝 걷지 않아 돌 바로 앞에 당도한 분신이 천천히 무릎을 꿇고 손을 뻗었다.

소드마스터조차 닿지 못한 곳에 그림자 분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간 것이다. 그림자가 뻗은 손끝이 막 돌에 닿는 순간을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파지직!

“읏!”

그러나 손이 돌에 닿았을 때, 눈이 멀 만큼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생전 처음 느끼는 기이한 기운이 뻗어 나와 몸을 뚫으려 하는 것을 느끼며 유더는 순간적으로 제 힘을 발휘해 물과 바람으로 만든 방어벽을 모든 이들 주변에 쳤다.

엄청난 광풍이 몰아치고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며 놀라는 소리가 났지만 그것에 반응할 시간이 없었다.

기운이, 세상 전체를 덮을 것처럼 거대한 기운이 방사형으로 쭉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건……!’

방어벽을 유지하기 힘들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유더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은 채 힘을 유지했다. 제 몸 주변에서 움직이는 기운과 돌에서 뻗어 나온 새로운 기운이 맞물린 채 서로를 밀어내고 침식하려 싸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기운을 막아내려 애를 써도 방어벽 여러 개를 유지하며 집중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잠시 후, 피부를 통해 느껴지던 압력이 도로 훅 줄어들었다. 유더는 그제야 방어벽을 거두고 앞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만 붉은 돌을 만지려 했던 손부터 시작해 상반신의 절반이 터져 나간 것처럼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림자 분신이 터져 나갔다고?’

저기 있는 것이 진짜 사람이었다면, 칸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방금까지 필사적으로 막아냈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제 몸을 뚫고 지나갔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끔찍한 상상에 갑자기 입술이 말랐다. 유더는 모두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며 가케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케인. 괜찮아?”

“……괜찮, 은 것 같아.”

가케인의 낯빛은 창백했지만 분신이 입은 타격을 함께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손을 살짝 휘두르자 상체가 반 사라진 그림자가 도로 땅으로 스며들어 곁으로 되돌아왔다.

“…미리 만져보게 해서 다행이군. 하마터면 사람이 다칠 뻔했으니 말이야. 그런데 방금 앞을 막았던 벽은 뭐지?”

그 환한 빛 사이에서도 용케 눈을 감지 않고 방어벽을 본 듯, 키시아르의 시선이 유더 쪽으로 향했다. 이미 누가 했는지 짐작하고 있다면 숨겨 보았자 소용없을 터였다.

“제가 했습니다.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자네의 능력은 무기에 속성을 싣는 것만이 아니었나?”

“…최근에 깨닫게 된 활용법입니다. 아직까지 제대로 써 본 적은 없었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필사적으로 힘을 썼습니다.”

“뭐야? 유더가 뭔가 했어?”

유더의 답은 약간 억지스럽긴 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새로운 능력 활용법을 갑작스레 깨닫는 일이 많았었다.

‘이럴 일이 생기면 변명하려고 미리 생각해 두길 잘했군.’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