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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4화 (34/805)

34화

“방금 떠난 이처럼 만용을 부리지 마라. 조금이라도 이상 증세를 느끼면 즉시 말해라. 혼자서 걸을 수 없어 보이는 자는 방금 전처럼 힌 엘더와 핀 엘더가 보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제 네 명 남은 펠레타 기사단의 눈빛이 비장해졌다. 정체 모를 푸른 바람에 휩싸여 어디론가 날려 보내지는 건 그들도 싫었으리라.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펠레타 기사 두 명이 손을 들고 압박감을 견디기 힘들다고 호소해 밑으로 내려갔다.

점차 주변 풍경이 삭막해지며 우거진 나무와 풀이 사라지고 바위만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쯤에는 한 명이 더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펠레타 기사단 한 명과 마병단원 다섯, 그리고 키시아르와 지노 장군이었다. 여태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는 마병단원들과 비교해 단 한 명 남은 펠레타 기사는 슬슬 힘들어지는지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유더는 그가 여기 오는 동안 길잡이를 맡았던 기사이자, 다른 기사들이 ‘부단장’ 이라 불렀던 이임을 알아차렸다. 그가 이번에 온 펠레타 기사들 중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이인 모양이었다.

‘실력도 개중 제일 나은 모양이고.’

소드마스터인 지노 장군이나 키시아르는 그렇다 치고, 마병단원 다섯이 전부 아무렇지도 않은 건 과연 우연일까. 유더는 제 주변을 흐르는 기운을 계속 살피며 올라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크게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가케인. 상태가 어때.”

“난 괜찮아. 오히려 돌이 있는 곳으로 갈수록 기운이 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돌이 우리를 각성시킨 것이라 그런 걸까 생각하고 있었어.”

질문을 들은 가케인이 제 팔다리를 살피며 대답했다. 유더는 그의 생각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 여겼다.

“거의 도착했습니다. 저 위로 올라가면 이제 그 돌이 떨어지며 생성된 거대한 구덩이를 한번에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나무가 점점 사라지고 마침내 대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진 오르막에 다다랐을 때, 지노 장군이 키시아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그, 세상의 배꼽인지 뭔지 하는 거창한 별명이 붙은 곳 말이군. 어떤 모습일지 아주 기대가 돼.”

세상의 배꼽이라. 유더는 그들이 나누는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제가 아는 과거의 정보를 뒤적였다.

과거의 유더는 붉은 돌 회수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죽기 전 붉은 돌과 관련된 정보를 찾을 때 그 돌이 떨어지면서 생긴 거대한 구덩이에 대한 짧은 정보를 읽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날아와 아이리크 산맥 중간에 떨어진 붉은 돌은 그 즉시 주변의 모든 나무와 땅을 파괴하며 거대한 구덩이를 생성했다. 그때 만들어진 구덩이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거의 도시 하나를 채울 정도만큼의 삼림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 돌이 회수된 뒤에도 그곳에는 어떤 나무도, 풀도 자라나지 않았다.

일행은 드디어 오르막 끝에 섰다. 그리고 아찔할 만큼 거대한 낭떠러지가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마치 산을 누군가 거대한 수저로 한번 푹 퍼낸 것처럼 파인 곳이 그곳에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구덩이는 구덩이가 아니라 골짜기나, 분지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았다.

“어쩐지 여기서부터는 공기가 다른 것 같아. 오싹한데.”

가케인이 코끝을 찡그리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유더 또한 어지러울 정도로 거대한 구멍을 보며 그와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 이 기분이었어.’

오래전, 키시아르가 회수해 온 붉은 돌을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 느꼈던 기묘한 기운. 마치 보이지 않는 공기가 사방에서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이 바람에 실려 은은하게 느껴졌다.

“시원한 풍경이군. 그러면 이제 내려가 볼까.”

키시아르가 남다른 감상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전한 길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내려가야 했다. 저 거대한 구덩이 한가운데 그들이 찾는 붉은 돌이 있기 때문이었다.

“전하. 저, 저는… 이 이상 다가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막 적당한 곳을 찾아 아래로 내려가려 하는 키시아르에게 마지막 남은 펠레타 기사가 말했다.

“숨을 쉬기가 힘듭니다.”

“그래, 알겠다. 그러면 여기서 조금 멀리 떨어져 대기하고 있도록.”

“죄송합니다. 끝까지 전하의 뒤를 따라야 하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니 괘념치 말도록.”

마침내 마지막 남은 기사도 떨어져 나갔다. 마병단원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차올랐다.

그들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발을 디디며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압박감도 점점 더 강해져서, 바닥에 다다를 때쯤에는 수천 개의 바늘이 전신을 따끔따끔 찌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병단원들은 전원 비슷한 상태인 것 같군……. 역시 우리가 각성자인 탓인가.’

유더는 찡그린 표정으로 천천히 걷고 있는 단원들의 면면을 살폈다. 압박감을 느끼고 있기는 해도 호흡이 곤란해 보이는 자는 없었다.

“장군.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최대한 구덩이의 가운데로 향하십시오. 돌은 무척 작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야만 보입니다.”

키시아르의 질문에 지노 장군이 답했다. 그도 여기까지 다다르자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지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표정에 변화가 없는 이는 이 중에서 오직 키시아르와 유더뿐이었다.

‘세계구는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을 내뿜지 않았었어.’

유더는 붉은 돌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 제가 수도 없이 보아왔던 세계구를 떠올렸다.

성역의 숲에 처박힌 채 오래도록 보관된 그것은 가까이 다가가면 약간 묘한 기분을 주기는 했으나 이렇게 거칠고 강렬한 기운을 내뿜지 않았다.

‘역시 진주탑에서 했던 정제 작업으로 인해 붉은 돌이 지닌 힘이 깎여 사라진 게 분명해. 그놈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하려 한 걸까.’

붉은 돌을 정제하여 세계구로 만든 진주탑의 마법사들. 유더는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리 좋은 목적은 아니었을 것 같다 여겼다.

‘거기서 저지른 쓰레기 같은 연구가 어디 한둘이었어야지.’

진주탑은 본디 대마법사 피엘레 마이스가 그 어떤 정치적 목적에도 휘둘리지 않고, 순수하게 마법 수련만을 원하는 마법사들을 이끌고 만든 곳이었다.

이물질을 품은 조개가 수백, 수천 겹의 진액을 덧발라서야 비로소 만들 수 있는 한 알의 진주. 그처럼 수없이 마법을 쌓고 쌓아 정수를 이루겠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대로 그들은 오로지 마법에 미쳐 마법을 위해서만 살았다.

처음에는 배척도 당했다지만 시일이 흐르며 상황이 달라졌다. 진주탑은 수많은 대마법사를 배출했고 뛰어난 연구결과를 몇 개나 내놓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마법사라고 하면 오직 국가를 위해 일하는 궁정마법사 이미지가 강했지만 진주탑의 마법사들은 누군가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롭게 연구하고 수련을 했다.

국가에 매여 권력층을 위해 움직이는 부자유스러운 이들과 자유롭게 수련하는 이들이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몇백 년이 지나자 모든 나라들은 더 이상 진주탑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은 모든 마법사를 대표하는 단체로 성장했다.

문제는 그 최초의 좋은 취지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오직 마법만을 위하겠다는 취지는 어디로 가고, 현재의 진주탑은 여러 나라의 권력층과 달라붙어 그들을 위해 힘을 쓰고 온갖 비인륜적인 연구를 일삼았다.

안개질풍마를 만든 것 정도는 그들이 한 연구 중에서는 그나마 덜 비인륜적인 편이었다. 적어도 그것은 마물과 짐승을 잡아다 연구하여 만든 결과물이었으니까.

진주탑의 마법사들은 붉은 돌의 힘으로 각성한 이들이 나온 이후 그들이 가진 힘을 잃지 않으려 끝까지 발버둥쳤다. 유더는 그들이 붉은 돌을 정제하여 세계구로 만든 것도 그 발버둥의 일환이 아니었나 강하게 의심했었다.

‘잘 부서졌지. 내가 한 건 아니었지만.’

유더는 제가 사형당할 때 죄목 중 하나로 들어가 있던 진주탑 괴멸 사고 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저기 돌이 보입니다.”

그때, 지노 장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과거를 헤매던 유더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지노 장군이 쳐다보고 있는 곳에는 땅에 반쯤 박혀 있는 주먹만 한 크기의 돌이 있었다.

그 돌은 너무나 평범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이 황량한 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돌만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게 붉은 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약간 거무스름한 색에, 울퉁불퉁하지만 전체적으로 둥근 형태를 지닌 돌.

아직 꽤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해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 그 돌의 생김이 아주 잘 보였다. 일행은 모두 각자의 감정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는 경외를, 누군가는 두려움을, 누군가는 그저 신기함을 보였다.

유더 또한 그 돌을 보는 순간 아주 묘한 기분을 느꼈다. 다만 그가 느낀 것은 남들과 같은 경외심, 공포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저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제 운명이 바뀌었다.

평범한 평민 소년이었던 유더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되었고, 끝내는 그 돌에 손을 대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다. 살고 죽는 것이 모두 그 돌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철저히 살펴보고 지켜야 할 돌이기도 하지.’

이전에는 깎여 나가기 전의 돌을 자세히 살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유더는 제가 다시 얻은 기회를 누구보다 알뜰하게 사용해 주겠노라 결심했다.

“다들 상태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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