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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3화 (33/805)

33화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야.’

그리고 유더 또한 키시아르와의 짧은 대화 속에서 새삼 그의 능력에 감탄을 느꼈다.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자마자 보이는 빠른 행동력과 결정력. 가벼워 보이지만 아마도 마병단의 미래를 내다보고 결정했을 특혜. 신분을 신경 쓰지 않고 보인 스스럼없는 태도. 남의 말을 진심으로 편견 없이 받아들여 생각할 줄 아는 머리.

같은 마병단장 자리에 머물러 보았기에 키시아르의 능력이 더욱 선명히 느껴졌다.

유더는 마병단장 자리에 있는 동안 오르 제국 황제를 포함해 국내외 수많은 왕과 귀족, 존경받는 능력자들을 만났다.

전 대륙의 높은 이들을 거의 다 만나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힘이 있고 지위가 있다 해서 그것이 현명함까지 갖추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힘과 지위가 있는 자들은 타인을 불신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주변을 경계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었다. 거기에서 벗어난 이들은 속세에 관심이 없거나, 모든 것에 초탈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키시아르는 그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아. 막연히 상상하던 황족의 이미지와 달라서 놀란 적이 많았었지.’

“…….”

갑자기 입맛이 썼다. 그런 키시아르가 너무나 빨리 죽었던 이유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자, 다시 출발한다.”

유더의 상념이 더 먼 곳으로 향하기 전에 키시아르가 휴식이 끝났음을 알렸다. 흩어져 있던 이들이 모두 모여 다시 대열을 이루었다. 물을 마시러 갔던 가케인도 그에 따라 유더의 곁으로 돌아왔다.

“유더. 대체 단장님과 무슨 말을 한 거야?”

가케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별말은 하지 않았어.”

“아무리 그래도……. 너는 그분이 정말 하나도 어렵지 않은가 보구나.”

“죄지은 일도 없는데 무엇이 어렵겠어.”

“그야 그렇긴 하지만.”

가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서 나가는 키시아르의 단단한 등을 바라보았다.

“나는 저분 앞에만 서면 자꾸 두려워져. 겁이 많아서겠지.”

마지막 말은 거의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유더의 귀에는 제대로 들렸다.

‘겁이 많다고? 그 사교적인 가케인 볼룬발트가?’

지나가던 개가 웃을 법한 소리라고 여겼으나 의외로 가케인은 진심인 듯 보였다.

가케인 볼룬발트는 330명의 마병단원들 중에서도 키가 훤칠하고 체격이 유달리 좋은 편이었다. 이름 있는 집안 출신에 밝은 성격, 화려한 외모까지 갖추었고 어제 들은 바로는 심지어 알파 각성자이기도 하다.

살아만 있다면 앞으로 펼쳐질 길이 탄탄대로일 텐데 겁이 많다니. 스스로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자기비하를 하는 성격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렇다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앞으로 마병단은 승승장구할 일밖에 남아있지 않으니 가케인도 거기에 적응하고 나면 달라질 것이다.

예전 기억 속에서 온갖 임무에 불려 다니며 마병단의 얼굴처럼 활약했던 그를 떠올린 유더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가케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가케인이 알파 각성자라는 것을 들은 이후 생각난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제2성 각성자들과 관련된 부분은 아직 키시아르에게 말하지 못했어.’

그래도 아까 키시아르가 했던 말이 있으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앞으로 편히 찾아와 이야기해도 괜찮다 했으니 언제든 여유만 있으면 관련하여 말을 전할 수 있으리라.

* * *

붉은 돌이 있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산 속은 점점 더 고요해졌다. 처음에는 짐승이나 새의 기척만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벌레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쯤 처음으로 몸의 이상을 호소한 이도 나타났다. 펠레타 기사 중 한 명이었다.

“허억……. 헉……!”

“룩!”

기사 한 명이 비틀거리다 무릎을 꿇자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부축했다.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쓰러진 기사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고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무슨 일이지?”

“죄, 죄송합니다, 전하. 갑자기 뭔가가 머리 위에서 짓누르는 것 같아서…….”

키시아르가 다가가 묻자 기사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정말 무언가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또다시 나동그라졌다. 그의 얼굴도 더욱 창백해졌다.

“윽…….”

“억지로 움직이려 하지 마라.”

손을 뻗어 기사가 움직이려 하는 것을 막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지노 장군을 쳐다보았다. 장군은 침착한 얼굴로 기사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군요. 제 부하들보다는 오래 버텼습니다만, 슬슬 탈락자가 나올 겁니다.”

“모두 다 이렇게 물리적인 압력을 느끼는 듯이 반응하던가?”

“네, 비슷합니다. 다만 저 기사는 너무 참은 것 같군요.”

“조금이라도 힘들면 곧바로 내려가라고 하지 않았나.”

키시아르의 말에 기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제일 먼저 뒤쳐지게 된다고 생각하니…….”

기사의 시선이 멀쩡한 얼굴의 키시아르와 지노 장군, 그리고 그 옆의 마병단원들로 차례차례 향했다. 유더는 그의 쓸데없는 고집이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장군. 거리가 도로 멀어지면 괜찮아진다고 말했었지.”

“네. 거짓말처럼 낫습니다.”

“혼자 내려갈 수 없어 보이니 누군가 도와야겠군.”

키시아르가 찬찬히 주변을 살피다가는 엘더 남매 쪽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힌 엘더, 핀 엘더.”

“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만 쓸 수 있다던 능력, 지금 쓸 수 있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은 두 남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으나 마병단원들은 모두 그 남매가 술과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인지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침착했다.

“아까 쉬었던 샘이 있는 곳 근처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힌이 거리를 가늠하며 그렇지? 하고 묻자 동생 핀이 ‘응.’ 하고 대답했다.

“좋다. 지금 바로 시도하도록.”

“알겠습니다.”

엘더 남매가 쓰러진 기사 쪽으로 다가가자 기사가 조금 겁을 먹은 듯 움찔거렸다.

“무, 무슨 능력입니까?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습니다. 굳이 이러시지 않아도…….”

“걱정 마요. 별 것 아니니까.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뭘 혼자 갈 수 있단 거예요?”

“아까 있었던 샘터까지 금방 보내 줄 테니까, 거기서 조금 쉬다가 돌아가요.”

기사의 반항을 말 한 마디로 쉽게 억누른 남매가 그를 사이에 두고 앞뒤로 감싸듯 마주 보고 섰다.

“이동 능력을 개발하려고 술과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직접 쓰는 걸 보는 건 처음이네. 잘 될까?”

유더의 곁에 다가온 칸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유더는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시전할 때 이런저런 제약이 있긴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문제가 없겠지. 전투 중인 것도 아니고,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니까.’

엘더 남매는 그들 사이에 끼운 물건이나 생명체를 그들이 함께 밟은 적이 있는 땅에 한해 이동시킬 수 있었다.

다만 이동시킬 수 있는 거리가 짧은 데다 시전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이동하면서는 사용할 수 없어서 그리 쓸모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임무는 주로 전투력이 필요한 곳에 파견하고, 이동 능력은 뒤따라가는 후발대에게 작전 지시를 보내야 할 때나 사용했다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유더는 이전에 한 번도 그들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 적이 없었다. 단장이 된 이후 몇몇 임무에 보내본 적은 있어도, 직접 얽힌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지금 보는 풍경이 꽤 새롭게 느껴졌다.

‘어디, 솜씨나 좀 볼까.’

키시아르 또한 같은 생각인지 가볍게 팔짱을 낀 채 남매가 기사를 사이에 두고 손을 맞잡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눈을 감은 힌과 핀이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하자 기사가 더욱 겁이 나는 눈빛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공작님. 부단장님. 제가 알아서 내려가겠습니다. 창피하다는 이유로 고집을 부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시끄럽네. 이제 다 됐으니 얼른 가요!”

그때, 눈을 뜬 핀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남매가 맞잡은 손 위로 새파란 기운이 회오리처럼 일어났다. 그 기운이 기사를 감싸자 순식간에 작은 돌풍이 일며 기사가 기절할 것처럼 숨을 삼켰다.

“이게 뭡니까?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

그러나 그는 말을 전부 끝내지 못했다. 푸른 돌풍이 그를 완전히 감싼 순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바람도 가라앉았고, 일렁이던 푸른 기운은 남매가 맞잡은 손 사이로 도로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마치 고대에 사용했다는 이동 마법 같군.”

그 모습을 지켜본 지노 장군이 조용히 평을 내렸다. 지금까지 내내 침착했던 그가 처음으로 흥미로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엘더 남매의 얼굴 위로 뿌듯한 감정이 번졌다.

“너무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라 의아했는데, 이럴 목적으로 데려오신 것입니까?”

“그것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셈이지. 저 둘의 진짜 능력은 공격 쪽에 특화되어 있으니 말이야.”

지노 장군의 시선이 마병단원들을 훑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다른 이들은 무슨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 궁금해지는군요.”

“그 나이에도 호승심은 여전하군.”

“그렇게 보였습니까? 싸우고 싶다기보다는 단순히 호기심입니다.”

키시아르의 말에 지노 장군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원. 아닌 척하지만 내 눈에는 다 보인다고.”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다른 이들을 향해 이제 다시 출발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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