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애초에 과거의 유더가 특수부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금방 신경을 껐던 이유 중에는 군대의 분위기가 그런 식으로 망가져 있다는 것을 알았던 탓도 크지 않았던가.
눈앞의 병사들은 그들이 가진 힘에 조금도 확신이 없으며,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들이 대체 어떻게 스스로 모여 특수부를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혹시 힘을 가진 누군가가 그들에게 달콤한 대가를 제시하고 몰래 창설을 도운 건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유더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특수부에게 영광을 약속했던 황제 같은 이가 말이다.
유더는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힘은 분명 엄청난 기회가 될 겁니다.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가치를 제대로 알아두세요. 그리고 관련하여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저를 찾아오십시오.”
“당신이 이 힘에 대해 우리보다 잘 아는 것 같기는 하지만… 누군지 알고 찾아가라는 겁니까?”
에몬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유더는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철제 포크를 하나 들었다.
잠시 후 포크 위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회오리치며 아름다운 나선을 그렸다. 그것을 본 에몬과 선즈의 눈이 한껏 커졌다.
“마병단의 유더입니다.”
유더는 일부러 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저들의 호감을 얻기에 더 좋을 터였다.
“저도 이곳에 들어온 지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그리 다를 바 없겠죠. 하지만 저는 이 힘이 변화시킬 미래를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또한 그 가치를 제대로 알기를 바랍니다.”
그저 그것뿐이다. 다른 사심은 없다. 그것을 미리 언급해 둠으로써 혹시나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를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했다.
유더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의 선즈와 에몬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살펴볼 것은 다 보았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마을을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선즈.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
유더는 선즈가 무어라 말을 걸기 전 등을 돌렸다. 구석 테이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젊은 병사들이 크게 떠들며 요란하게 웃어댔다.
그가 나간 뒤에도 등 뒤의 두 남자는 한참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앉아만 있었다.
* * *
다음날, 마병단원들은 펠레타 기사단과 함께 모두 새벽같이 숙소를 나섰다. 키시아르는 어제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지 앞에서 지노 장군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엔 다들 잘 쉬었는지 모르겠군.”
분명 지노 장군과 술을 마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키시아르는 피로한 기색 한 점 없는 얼굴이었다.
“어제 말했던 대로 우리는 오늘부터 붉은 돌 회수를 시작한다. 오늘은 일단 돌의 위치와 우리가 접근 가능한 수준을 파악하고, 정보 수집을 할 예정이다.”
어제 지노 장군은 붉은 돌에서 기이한 기운이 뻗어 나와 평범한 사람은 감히 접근조차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오러를 쓸 줄 아는 수준의 사람, 특히 지노 장군은 거의 근접한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고 했으니 마병단원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동 도중 그 돌이 일으킨다는 이상 현상 때문에 접근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경우, 해당자는 그 이상 걷는 것을 그만두고 내게 보고한 뒤 하산하도록 하라. 하산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조차도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하긴. 옆에 소드마스터인 지노 장군이 있으니 걸리적거리는 이들을 굳이 달고 갈 필요는 없겠지.’
유더는 키시아르의 말을 제 시점대로 재해석했다. 무슨 말을 하든 적당히 잘 포장할 줄 아는 키시아르의 화술은 여전히 놀라웠다.
만약 유더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직설적으로 걸리적거리는 놈은 필요 없으니 즉시 내려가서 얌전히 박혀 있으라고 말했을 것이었다.
‘혹시라도 내려가는 도중, 혹은 내려가서 사고를 친다면 돌아와서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도 같이 덧붙였겠지.’
“자, 이동한다.”
많은 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키시아르는 본인이 제일 앞에서 걷겠다고 말했다. 지노 장군을 바로 뒤에 두겠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그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펠레타 기사단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능력을 알았기에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그보다… 적당히 때를 봐서 이야기를 하러 가고 싶다고 말해야 할 텐데 언제쯤 가능할지.’
키시아르는 미리 길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나아갔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가벼운 걸음이었다. 허리춤에 성검이 매달려 있는 것만 아니라면 정말 그렇다고 해도 납득했으리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걸었던 흔적이 서서히 사라졌다. 나무 위에서 지저귀던 새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저 울창하게 우거진 숲과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남은 전부가 되었다.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유더는 주변을 감싼 기운을 예민하게 주시하려 노력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었으나 고된 훈련을 이어 온 마병단원들은 아무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산을 올랐다. 유더에게는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어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하긴, 같은 산맥 안에서 자라왔으니 집에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오랜만에 걷는 아이리크 산맥 안의 청명하고 웅장한 기운이 유더를 환영하는 듯 느껴졌다.
11년 전의 유더에게는 몇 달 만에 돌아온 것이겠지만, 현재의 유더는 아주 오랫동안 고향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살다 죽었으므로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에 겪는 것이었다.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런 산을 홀로 쏘다니며 나무를 하고 약초를 캤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해가 지기 전 집으로 돌아와 쉬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혼자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아마 없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몬스터와 맹수가 돌아다니는 산속에서 홀로 살 수 있느냐 물었으나 유더는 한번도 산이 무섭다 느낀 적이 없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났기 때문이리라.
닳고 닳은 지금보다야 훨씬 순진하긴 했어도 결국 그때의 유더도 본질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정을 모르고 오직 자신만 아는 소름 끼치는 인간.’
유더는 단장 시절 다른 이들이 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일컫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저를 두려워하여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이들은, 지금의 마병단과 유더를 향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저기 샘이 있군.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다.”
묵묵히 산길을 걷기 시작한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키시아르가 한 곳을 가리켜 보이며 휴식시간을 선언했다. 그의 말대로 앞쪽에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둔 샘터가 있었다.
사람이 다닌 흔적은 없는데 인위적으로 만든 샘터는 남아 있다니. 그것은 즉 붉은 돌이 떨어지기 전인 2년 전까지는 이 근방에도 인간이 어렵지 않게 돌아다녔다는 증거였다.
일행은 각자 바위나 나무 그루터기 등을 찾아 앉아서 쉬었다. 몇몇은 샘터로 다가가 물을 마시기도 했다. 칸나가 엘더 남매와 함께 떠드는 것을 보며 유더는 어젯밤 숙소를 같이 쓴 덕에 칸나와 힌이 꽤 친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키시아르는 지노 장군과 함께 품속에서 꺼낸 지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붉은 돌을 회수하고 돌아올 때까지 그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만한 틈이 생길까? 만약 적당한 틈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대놓고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유더.”
그때 유더의 곁으로 가케인이 다가와 앉았다. 빠른 속도로 계속 산을 올랐지만 그는 아직 땀방울 하나 비치지 않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어때? 뭔가 느껴져?”
“아니.”
“나도. 다들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은데 말이야.”
정말 저 위에 붉은 돌이 있기는 한 걸까? 가케인이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
“네가 살던 곳은 어디야? 여기서 많이 멀어?”
“글쎄……. 며칠은 가야 할 것 같은데.”
“멀구나. 가까우면 일이 다 끝나고 잠깐 들러볼 수도 있었을 텐데.”
유더는 아쉬워하는 가케인의 얼굴을 보며 잠시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단순히 제가 사는 곳에 놀러 오라고 말하던 것의 연장선인 것일까.
유더 자신은 딱히 이전에 살던 곳에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가케인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휴가를 받는다면 갈 수야 있겠지만 그건 집을 정리하기 위해서일 뿐이리라.
예전에도 그는 마병단장이 될 때쯤 적당히 본래 살던 집을 정리한 뒤 평생을 마병단 숙소 건물에서 지냈다. 이전에 살던 집에 대한 그리움은 전혀 없었다.
“별로… 볼 것도 없는 곳인데.”
“그래도 네가 살던 곳이잖아. 돌아가서 잠깐이라도 보고 싶은 것들이 있지 않아?”
여기서 없다고 말하면 가케인이 무어라 생각할까. 유더는 그런 생각에 잠겨 그들의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평소보다 늦게 눈치챘다.
“어딜 돌아간다는 거지?”
“단장님.”
가케인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 것을 키시아르가 손을 들어 막았다. 어느새 지노 장군과 이야기를 끝냈는지 혼자였다.
“임무 말고 다른 볼일이 있었나?”
“아, 아뇨.”
가케인은 단장인 키시아르를 꽤나 어려워했다. 유더는 그가 도움을 청하듯 저를 보는 것을 보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제 고향이 이곳에 있습니다.”
“흐음. 고향?”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 위로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렇군. 많이 가까운 편인가 보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이리크 산맥은 넓으니까요.”
“그래서 가까운 곳이라면 방문해 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가.”
말을 잇던 키시아르가 드디어 가케인과 유더 사이에서 오간 이야기 내용을 완전히 추리해냈다.
“네.”
“그래……. 유더. 가족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향이 그립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