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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9화 (29/805)

29화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죠.”

숙소 밖에서 기다리던 선즈에게 말을 걸자 그가 고개를 젓고는 한결 편안한 걸음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그쪽 분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냥 유더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래요, 유더. 저도 그냥 선즈라고 불러 주시죠.”

직급으로 불리는 건 딱딱해서 싫다며 선즈가 씩 웃었다.

“2년 내내 이곳에 갇혀 있었더니, 간만에 새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좋네요.”

“붉은 돌이 떨어진 이후 계속 여기 있었던 겁니까?”

유더는 내친 김에 궁금한 점도 묻기로 했다. 선즈는 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 셈이죠. 원래 전 아이리크 아래 굴칸 지방 쪽 남부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터진 뒤 가까운 곳에 있던 부대는 전부 소집되었거든요. 이후 계속 조금씩 수가 늘다가, 몇 달 전 지노 장군님까시 오시게 된 거죠.”

“지루했겠군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요즘도 심심할 만하면 누군가 각성하거든요. 새로 각성한 녀석의 능력을 같이 봐 주고, 근무하고 하다 보면 의외로 시간이 금방 가더군요.”

변경에서 근무하며 허구한 날 목숨의 위협을 겪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다며 선즈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유더는 그의 말 속에서 심상치 않은 점을 찾아냈다.

“그 말은 꾸준히 병사들 중에서 각성자가 나온다는 뜻입니까?”

“네. 다른 지역도 그렇지 않나요?”

그야 지역 단위로 보면 그렇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선즈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 흔하게 느낄 만한 비율은 아니었다.

‘…혹시 붉은 돌이 떨어진 곳에서 가까워서 그런 건가?’

유더는 그것이 꽤 가능성 높은 추측이리라 생각했다. 붉은 돌이 떨어진 이후 대륙 전체에서 각성자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제일 많은 수는 오르 제국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중부 지방의 비율이 높았다. 중부지방을 가로질러 붉은 돌이 떨어진 아이리크 산맥이 쭉 뻗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꽤 의미 있는 비율이었다.

만약 그 돌에서 발하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이곳에서 2년간 머문 병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그 힘과 가장 많이 접했던 이들이다.

잊을 만하면 한 명씩 각성자가 나왔다는 말은 어쩌면 그 돌이 가진 힘의 어떠한 증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키시아르는 이 사실을 몰랐나?’

유더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며 선즈를 따라 휴식 중인 병사들이 몰려 있는 마을 중심부로 향했다.

작은 마을답지 않게 술집과 음식점, 상점가가 잘 마련되어 있는 그곳에 한눈에 보아도 마을 주민과는 거리가 먼 장정들이 여럿 보였다.

“여! 선즈. 이제 끝난 거냐?”

“응. 그런데 아까 이쪽에 있던 에몬은 어디 갔어?”

야외 테이블에서 여전히 카드를 치던 이들이 선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면면을 돌아본 선즈가 찾던 이가 없었던 듯 질문하자 곧바로 근처에 있는 건물 하나를 가리켜 보인 누군가가 큰 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 녀석은 카드놀이가 재미없다고 저쪽 술집으로.”

“그렇다고 하네요. 가보죠.”

유더는 선즈의 뒤를 따라 술집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대였지만 안은 제법 북적였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시간대를 막론하고 이곳에 자주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선즈의 설명이었다.

“말만 술집이지, 낮에는 평범하게 밥도 팔고 음료도 팔거든요.”

“네.”

그 말대로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은 사내들이 지루한 얼굴로 마시고 있는 것은 대부분 술이 아니라 평범한 음료였다.

안에 있던 몇몇 이들이 선즈를 보고 또다시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했다. 선즈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짤막하게 설명을 했다.

“저 친구는 1년 전 각성했어요. 힘이 곰처럼 세지는 능력입니다. 저쪽에도 한 명 있네요. 저 녀석은 아마 성벽만큼 높이 점프할 수 있는 능력이었던가……?”

그런 식으로 소개한 이들은 대부분 신체를 강화하는 쪽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더는 그들 중 혹시 과거에 자신을 붙잡았던 이들이 있을까 싶어 자세히 얼굴을 살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아, 그리고 저기 에몬이 있네요. 저와 가장 많이 한 조가 되어 근무하는 녀석입니다. 성격은 좀 거칠지만 나쁘지 않은 친구죠. 에몬!”

“오, 선즈. 드디어 왔구나.”

술집 안쪽에서 다른 이들과 모여 테이블 위에서 주사위 게임을 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 숙소로 가고 있을 때 선즈에게 아는 척을 했던 남자 중 하나였다.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처음 보는데……. 신병?”

“아니. 아까 내가 데려다 드린 분들 중 한 분이야.”

제복을 벗고 있어 아까와 동일 인물이라 생각지 못했던 듯 에몬이란 남자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서렸다.

“아, 그렇군. 알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이곳을 둘러보고 싶어 부탁을 드렸습니다. 곧 돌아갈 겁니다.”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 적당히 신경을 꺼도 된다는 뜻의 답이었다. 에몬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유더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주사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몬이 지닌 능력은…….”

선즈가 에몬의 능력을 설명하려 입을 열었을 때, 갑자기 뒤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구운 소시지가 산처럼 쌓인 쟁반을 든 가게 주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는 이들의 테이블에 쟁반을 놓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 시킨 안주입니다. 드시면서 하세요. 서비스로 말린 육포도 찢어서 넣었습니다.”

“최고다!”, “이곳 주인이 만든 소시지가 나는 제일 마음에 들어.”

주사위 놀이를 하던 이들이 일제히 환호를 지르며 쟁반에 손을 댔다. 순식간에 소시지의 산이 속속 줄어드는 가운데 주사위 놀이는 잠시 휴식시간을 맞았다.

유더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난 에몬이 품속에서 조그만 천주머니를 꺼내 낡은 휴대용 파이프 안에 말린 향초 잎을 채우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소시지를 먹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파이프 안쪽에 부싯돌이 튀는 듯한 작은 불꽃이 팟 하고 튀며 불이 붙었다. 향긋하면서도 매캐한 냄새가 연기에 실려 퍼졌다.

“저게 에몬의 능력입니다. 불꽃을 일으킬 수 있어요. 이곳에서 힘을 각성한 녀석들 중에서는 특이한 편입니다.”

“…그렇군요.”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에몬이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냥 둘러보러 온 게 아니라 각성자를 살피러 온 겁니까?”

“이분도 우리와 같아. 궁금하다고 하셔서 그냥 설명해 드리고 있었어.”

유더가 나서기 전에 선즈가 먼저 대답을 했다. 에몬은 다행히 유더의 정체를 그다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여기에 대단한 힘을 가진 녀석들이 없다는 것도 봤겠군요. 저도 고작해야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 정도의 불꽃밖에 못 내니까요.”

에몬이 피식 웃으며 검지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자 그 위에 작은 불꽃이 타닥 하고 터졌다. 유더는 그것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불꽃, 유지할 수는 없는 겁니까?”

“못 해요. 그럴 수 있었으면 좀 더 쓸모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뭐 없던 게 생긴 거니까 불 없이 아무 때나 향초를 피우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죠.”

“그래도 좋은 능력입니다. 에몬과 함께 한 조가 되어 순찰 임무를 수행하러 산을 오르면 적어도 불을 피우지 못해서 밤새 추위에 떨 일은 없거든요.”

“그래. 나는 네 덕분에 밤에도 몬스터나 맹수가 있을 만한 곳을 피해갈 수 있으니 좋고 말이야. 딱 그 정도지.”

에몬이 선즈의 칭찬에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는 도로 내렸다. 선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유더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들은 아직 자신들이 가진 능력의 가능성을 전혀 모르고 있군.’

아직 이 세계는 각성자가 가진 능력의 가능성과 그들의 특성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 각성자 본인들조차도 그러했다.

한 번 각성한 능력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발전에 따라 끝없이 성장 기회가 주어진다. 별 것 아닌 능력이라 생각되더라도 주인이 어떻게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강한 능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발전시키지 않더라도 충분히 쓸모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 대부분이기도 하고.’

선즈가 소개해 준 병사들은 대개 신체 강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곳에서 싸울 일이란 가끔 길을 잘못 든 맹수나 몬스터를 상대하는 정도라 거의 쓸 일이 없었겠지만, 그런 능력은 전장에 나갔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폭발적인 성장도 덩달아 기대할 만했다.

‘선즈의 투시 능력도 그렇지. 아직까지는 장애물이나 밤낮에 상관없이 앞을 볼 수 있는 정도인 모양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전투에서 큰 이점을 지닐 수 있다. 발전 방향과 가능성도 엄청나.’

에몬의 불꽃도 비슷했다. 지금은 크기가 작고 지속시간도 순간적이지만, 대신 주인이 원할 때 곧바로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마병단에도 불꽃 속성을 다루는 단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러낼 때 시간이 꽤 걸리거나, 유지력이 어중간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에몬의 불꽃은 적과 근접전을 벌이면서도 동시에 기습을 가하기 좋은, 아주 쓸모 넘치는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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