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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8화 (28/805)

28화

황제의 명령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함부로 힘을 써서 죽이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살려서 항복을 받아낼 것.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이를 증거 없이 미리 벌하지 않을 것. 마병단 단장인 이상 그 어느 때에도 자신의 안위보다 마병단과 제국을 우선할 것. 대충 그 정도였다.

남들보다 거대한 힘을 가진 이는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다른 이들의 목숨과 인생에 큰 풍파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그런 뚜렷한 기준 없이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마음대로 누군가를 죽이고 패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에서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되, 반드시 힘을 써야 할 때는 압도적으로 휘몰아쳐라.

그 사실을 철저하게 유더의 머릿속에 박아 넣은 것이 바로 지금쯤 지노 장군과 함께 술이나 마시고 있을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지금 선즈를 죽이는 건 쉽지. 하지만 그런다고 특수부대가 생길 미래가 정말 바뀔까?’

유더는 심호흡을 하며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대표는 다른 사람이 되면 그만이야. 하지만 선즈를 살려 둔다면… 그를 통해 군 내 능력자들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고, 특수부가 생기는 미래가 왔을 때에도 훨씬 긴밀하게 연결할 수 있겠지.’

그를 살려서 연결고리를 만드는 편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훨씬 낫다. 그렇게 여러 번 되뇌고 나서야 겨우 갈등이 사라지고 마음이 침착해졌다. 유더는 한결 침착해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투시 능력이라니, 저희 마병단에도 없는 희귀한 능력이군요. 그래서 깜짝 놀랐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선즈가 안심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당신 이외에도 다른 능력자 분들도 있다면 혹시 소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부 다는 불가능한데요. 근무 중인 이들도 있고….”

“지금 마을에서 쉬고 있는 분들 정도만 알려 주셔도 충분합니다.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더는 그가 안심하도록 만들기 위해 미소도 지어 보였다. 선즈는 크게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여러분을 숙소에 안내해 드리고 나면 제 일도 끝나고, 여러분은 자유 시간이시니까요. 저희 군 내에 있는 다른 능력자들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숙소에 짐을 푸신 뒤 저와 함께 가시죠.”

“알겠습니다.”

어차피 붉은 돌 회수 작전은 키시아르가 주도하는 것이니 유더가 신경 쓸 일은 없다. 이곳에서 뜻밖의 연을 발견하게 된 덕에 지루할 일이 사라졌으니 참 다행이었다.

유더는 다른 일행들의 의아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선즈의 안내를 받아 숙소에 도착했다.

“여러분께서 묵으실 곳입니다. 짐을 푸시고 나면 자유롭게 돌아다니셔도 됩니다.”

그들이 묵을 숙소 건물은 총 2채였다. 한 채는 펠레타 기사단이, 그리고 남은 한 채를 마병단이 쓰기로 했다.

그러나 건물이 워낙 작은 탓에 침실이 2개뿐이었으므로 짐을 풀기 전 멤버를 나누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여기, 2성별 각성자 있어?”

힌이 나서서 나머지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나와 핀은 둘 다 미각성자거든.”

“저도 미각성자예요.”

칸나가 대답한 뒤 유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유더는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은 것은 자연히 가케인 뿐이었다. 그는 저를 바라보는 네 쌍의 눈을 보다 당황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알파 각성자야.”

“그래? 그러면 상관없이 1성별만으로 나눠도 되겠네. 방 하나는 나와 칸나가 쓸게. 괜찮지?”

힌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칸나의 손을 잡고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자연히 남은 방 하나는 세 남자의 차지가 되었다.

‘가케인이 알파 각성자였군.’

유더는 방으로 들어서며 새로 알게 된 정보를 곱씹었다. 그동안 주변에서 제2성에 대해 떠들 때 아무 말도 없기에 가케인도 미각성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점이 의외였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군. 혹시라도 나중에 내가 이전과 똑같이 각성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유더는 오메가로 각성했던 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 중 하나였으니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제2성으로 각성하는 것 자체는 고통스럽긴 해도 참을 만했다. 중요한 것은 제2성으로 각성할 때 주변에 반대되는 제2성 각성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그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인데다 각성자들이 가까이 모여 있을 일이 적어 상관없었지만, 마병단이라는 거대한 각성자 집단이 생긴 이후부터는 많은 것이 달라진다.

현재까지 제2성을 각성한 이들은 대개 능력을 각성할 때 제2성까지 함께 각성한 이들이다. 그러나 능력을 각성한 이후 시일이 오래 지나서야 뒤늦게 제2성까지 각성하게 될 때. 문제는 주로 그때 발생한다.

유더 또한 마병단 입단 이후 갑자기 각성하게 되면서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해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된 각성자 중 하나였다. 때문에 어떤 문제가 일어날지 치가 떨리도록 잘 알았다.

‘……군 내 능력자들 이야기와 함께 이것도 키시아르에게 미리 전달해야겠어.’

아직까지는 입단 이후 관련 사항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단원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대안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 필요했다.

키시아르가 그 사실을 어디서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적당히 둘러대야겠지만, 그에게 의심을 받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은 꼭 미리 알려둘 필요성이 있었다.

유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방 안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는 동안, 핀은 화장실을 찾겠다며 방을 나섰다.

제복 코트를 벗어던지고 침대에 드러누운 가케인이 휴 하고 길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유더. 갑자기 군 내 능력자들은 왜 보러 가겠다는 거야?”

“그냥. 흥미가 생겨서.”

“그렇다기엔 넌 마병단 동기들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었잖아.”

갑자기 허를 찌르는 말을 하다니. 유더는 가케인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너희들은 이미 다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들은 달라.”

“뭐가 다른데?”

“생각해 봐. 군 내에 우리와 비슷하면서 알 수 없는 능력을 지닌 능력자들이 여럿 있다고 했지.”

유더의 말에 가케인이 소년처럼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능력을 지니고도 마병단에 일부러 지원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만은 아닐 텐데.”

“여기가 군대만 아니었다면 상관없을 수도 있었겠지.”

진주탑 소속 마법사들 중에도, 궁중마법사들과 황궁기사단에도 각성자는 분명 존재한다. 모습을 아직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절대숫자가 적었고, 군대는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지노 장군이 통솔하는 남부군만 해도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했다.

그 중의 일부만 각성했다 해도, 전부 다 모아 보면 마병단에 뒤지지 않는 숫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마병단이 본격적으로 힘을 드러낸다면 그들이 과연 언제까지 지금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 있을까.”

“…군의 높은 사람들이 제2의 마병단을 만들려고 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 힌트만으로도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었는지, 가케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나라도……. 아니, 뭐 그런 생각을 할 것 같기는 한데.”

잠시 설마 하는 기색과 소름 돋는 깨달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가케인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유더를 감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최대한 정보를 알아보려는 거구나. 대단하네. 난 생각지도 못했어.”

대단하다는 말을 들을 만한 이유는 못 된다. 가케인 볼룬발트도 10년 가까이 혼자서 마병단이라는 거대한 단체의 제일 위에서 모든 풍파를 감내해 보았다면 이런 일쯤은 당연히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그라면 방금 전의 나처럼 살의를 일으키진 않았을지도 모르지.’

가케인에게는 재능이 있다. 게다가 모나지 않은 성격, 좋은 외모와 출신까지 갖추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가 단장이 되었을 시 저보다 훨씬 좋은 리더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키시아르는 저를 차기 단장감으로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케인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유더는 그의 능력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아까운 인재가 빨리 죽었다고 안타까워하던 옛 기억 속 타인들의 말에 동의하게 될 줄이야. 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여길 일을 하려는 건 아니고.”

“두 사람은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부터 친구였나 봐요?”

그때 문을 열고 돌아온 핀 엘더가 끼어들어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가케인은 엘더 남매와도 꽤 말을 튼 모양이었지만, 유더는 아직 그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시험을 치기 전에 묵었던 숙소가 같았거든. 유더에게 도움도 받았고.”

“그랬구나. 칸나하고도 그렇게 알게 된 거예요?”

“그건…….”

“나는 이제 나가 볼게.”

유더는 가케인처럼 제복 코트를 벗었다. 그러자 본래 입고 있던 평범한 사복 차림이 되었다. 문을 열고 나서는 그를 가케인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선즈가 곁에 있다곤 해도 조심해, 유더. 내일 일찍 떠나야 하니 되도록 빨리 돌아와.”

“와. 그 나이에 벌써 자식 둔 부모님 같은 소릴 하네요?”

“그런 게 아니라…….”

유더는 핀과 가케인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고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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