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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6화 (26/805)

26화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것뿐이었으나 유더는 그때 몹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천으로 두껍게 감싼 상태임에도 그 안에 거대한 힘을 품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공간을 채운 공기 전체가 공기가 아닌 물이 된 것처럼 무거워졌다. 서늘한 기운이 부지 전체에 차올랐다.

유더만 그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마병단원들 모두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다음날 키시아르는 투명한 마정석을 깎아 만든 상자 안에 붉은 비단 쿠션을 깔고, 그 위에 붉은 돌을 얹어 직접 들고 나타났다.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포장을 했다는 듯싶었다.

키시아르가 마차에 타기 직전, 유더는 제 숙소 방 창문을 통해 그가 든 상자 안에 담긴 붉은 돌을 보았다. 그 돌은 실제로 붉은색이 아니었으며 크기도 생각보다 작았다.

붉은 돌이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겉만 보아서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기이한 기운을 지닌 것치고는 너무나 평범하게 생긴 돌이었다.

그리고 이후 그 돌은 다시 마병단에 돌아오지 않고 곧바로 진주탑으로 향했으므로, 그것이 이전 생에서 유더가 온전한 붉은 돌을 본 마지막이 되었다.

“접근을 시도해 보기는 했나?”

키시아르의 질문에 지노 장군이 “네.”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일반 병사들은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몸에 오러를 쌓기 시작할 정도의 실력이 되는 이들은 그것의 모습이 보이는 곳까지는 다가갈 수 있었고, 저는 그것을 직접 코앞에서 보았습니다.”

“어떤 느낌이 들던가.”

“아주 이상한 물건이더군요. 정확히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쩌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양신의 사제들도 신의 기운과는 다르다고 말했고, 진주탑의 마법사들은 아예 접근을 하기 어렵다 하여 아직까지 직접 와서 살핀 자는 없습니다.”

“그렇군.”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전하께서 그것을 직접 손대셨다 혹여 위험해지실까 걱정이 됩니다.”

여기까지 온 키시아르를 향해 지노 장군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걱정의 말을 내뱉었다.

“억지로 접근을 시도했던 병사들 중 일부는 피를 토하기도 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을 품은 귀물입니다. 전 대륙에 변화를 일으킬 정도의 힘을 지닌 것인데 혹여 귀하신 몸에 피해를 입으신다면 아니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그것을 상하지 않고 가져올 가장 적절한 인물이 나임을 믿어 주셨지. 폐하께서 믿으시는 것을 장군이 걱정하는가?”

“저는…….”

졸지에 황제가 하는 일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된 지노 장군이 곧바로 입을 열자 키시아르가 손을 내밀어 그의 말을 막았다.

“어릴 때부터 나를 보아온 자네의 눈을 믿게. 이 세상에서 그 돌에 지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 정도밖에 없어.”

“…….”

지노 장군의 액면가는 갓 중년에 들어선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실제 나이는 손자를 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키시아르의 말대로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아왔을 것이었다.

키시아르의 말을 들은 지노 장군은 눈을 감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어찌 폐하를 의심하고 전하를 막겠습니까?”

“하하. 그러면서 늘 한 번씩 막는 말을 하지 않나.”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결국 걱정이 앞서는 늙은 신하의 마음입니다.”

“걱정 말게. 그까짓 돌에 질 정도의 몸은 아니니.”

그렇게 말하며 키시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자 주변을 한 번 가볍게 돌아본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출발 전 모두 비밀 서약서를 쓰도록 하지.”

마병단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으나 유더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비단 이번 임무뿐만이 아니라 마병단이 앞으로 처리할 대부분의 임무는 모두 비밀 엄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많았다. 때문에 유더 또한 임무에 나서기 전 서약서를 쓴 것이 셀 수도 없었다.

“많은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전 사용하는, 마력이 담긴 서약서다. 서약할 것을 적고 나서 계약자끼리 서명하고 나면 종이 안에 실린 마력이 서로의 심장을 얽지.”

키시아르는 겉보기에는 더없이 평범해 보이는 종이를 들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적힌 내용은 간단하다. 이 임무 도중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일에 대하여 이 임무를 함께 수행한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허락 없이 발설하는 것을 금지할 것. 어길 시에는 이 서약서에 깃든 마법이 심장을 조여 숨을 쉴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여기 있는 이들이 이 정도 비밀도 지키지 못할 자들은 아닐 것이라 믿지만, 혹시 모르는 일. 자신이 없는 자는 여기서 물러나도 좋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돌려보내 주도록 할 테니.”

말이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이지, 사실상 죽는다는 뜻이다. 유더는 모두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키시아르가 품에서 꺼낸 서약서를 향해 제일 먼저 나아갔다.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먼저 찍겠습니다.”

“그러게.”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진주탑에서 직접 만든 서약서였다. 즉, 전 대륙의 그 어느 곳보다도 가장 공신력 있고 위력이 강한 서약서라는 뜻이었다.

서약을 하기 위한 다른 준비물은 필요 없었다. 내용을 읽고 손가락 하나를 서약서에 대면 저절로 종이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몸을 감싸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났다.

유더가 아무렇지 않게 서약을 끝내고 뒤로 물러서자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가케인도 결심한 얼굴로 목울대를 한 번 꿀꺽 울리고는 뒤이어 나섰다.

“다음은 제가 하겠습니다.”

별것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인 듯, 다른 이들도 차례차례 손가락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지노 장군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찍고 나서 키시아르는 서약서를 말아 도로 품에 넣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가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하지.”

“묵으실 곳을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장군에게는 그동안 있었던 일도 좀 더 천천히 듣고 싶군. 이제 만나면 언제 또 볼지 모르니 말이야.”

키시아르의 말에 딱딱했던 장군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마침 이 지역에서 나는 좋은 술을 하나 마련해 두었지요. 가지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키시아르는 지노 장군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떠났다. 펠레타 기사단과 마병단원들은 장군의 지시를 받아 나타난 어느 젊은 병사를 따라 기지 근처의 작은 마을로 향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왠지 낯이 익은데.’

유더는 안내하는 젊은 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병단원이 아닌데도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알던 사람 중 이런 곳에서 마주칠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이름을 듣는다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제가 기억하는 시대로부터 무려 11년이나 전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일단 계속 살펴보자. 계속 보다 보면 기억이 날 수도 있겠지.’

고작 10여 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는 마을은 이런 산속에 있는 곳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다른 이들은 깜짝 놀란 것 같았으나 유더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아마 본래는 채집과 사냥을 해서 연명하던 평범한 마을이었겠지.’

아이리크 산맥은 대륙의 척추라는 별명에 걸맞을 만큼 무척 범위가 넓다. 이 마을도 유더가 본래 살던 곳과는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모습이야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는가. 산속에 위치한 마을들은 그 특성상 거주하는 이들의 수가 적고, 영주의 손길도 별로 닿지 않는다.

하지만 2년 전에 붉은 돌이 근처에 떨어진 이후 수많은 병사들이 몰려오면서 상황이 바뀌었을 것이다.

군대는 결코 공짜로 움직일 수 있는 단체가 아니다. 그 많은 이들이 무려 2년 동안 한곳에서 전투를 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한 활동을 하지도 않은 채로 계속 머물러만 있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머무는 장소를 제공하면서 이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돈이 돌고 활기가 넘치는 곳이 되었으리라.

‘물론 붉은 돌을 키시아르가 회수해 간다면 그 영광은 곧 사라지겠지.’

붉은 돌을 회수하면 더 이상 군대가 이곳에 머무를 이유는 없다. 때문에 유더의 눈에는 이 마을에 도는 활기가 그리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긴 왜 이렇게 사람이 많죠?”

“대부분은 쉬고 있는 병사들입니다. 넓은 산맥에 흩어져 힘든 감시 임무를 교대로 수행하는 대신, 쉴 때는 이곳에서 술도 마시고 다른 이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쉴 수 있습니다. 지노 장군님의 배려죠.”

칸나의 질문에 안내하는 병사가 유더의 짐작과 똑같은 답을 해 주었다.

“뭐야 선즈. 낯선 분들을 데리고 어딜 가는 거야?”

그때, 젊은 병사의 근처에서 왁자하게 떠들며 야외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던 이들이 손을 크게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젊은 병사는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군인다운 엄숙한 표정을 슬쩍 거두고, 그 나이 청년다운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온 이들을 돌아보았다.

“임무 수행 중이야. 장군님을 찾아온 손님들을 숙소까지 안내해 드려야 해.”

“그래. 끝나면 여기로 와. 선즈 네가 없으니 카드 게임 흥이 덜 살거든.”

“그런 이야기는 여기서 말고 나중에 해.”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사복을 입은 병사들이 술에 취해 크게 웃었다. 젊은 병사는 약간 멋쩍은 얼굴로 유더와 일행들에게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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