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지노 보델리…. 그가 이때 이곳을 담당하고 있었다니.’
제국군은 거대한 제국을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었다. 남부와 북부였다. 남부군과 북부군은 전통적으로 라이벌이었고 여러모로 기강과 분위기가 달랐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남부든 북부든 통솔하는 장군은 반드시 소드마스터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국이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강한 무력을 과시할 수 있는 요소였고, 장군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은 제국의 핵심 세력이 되어 황제의 가장 가까운 신하이자 칼이 되었다.
그리고 남부군 장군 지노 보델리는 40년 가까이 구설수가 거의 없이 장군직을 수행하고 있는 청렴결백한 무인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백작가에서 태어나 걷기도 전부터 검을 잡은 그는 다른 귀족들처럼 황궁기사단이나 다른 유명기사단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세상을 떠돌며 검술 수련에 매진했고, 고작 30대의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보통은 장군이 된 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한 권력을 추구하게 마련이나 지노 보델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장군으로서 제국을 지키는 데에만 쭉 힘을 썼다. 그는 모든 검을 잡는 이들의 우상이었고, 그것은 붉은 돌의 힘으로 각성한 이들이 나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오직 황제의 명만을 따르며, 거대한 바위처럼 묵묵히 제국을 지키는 데에만 힘쓰는 장군. 그러나 그는 유더가 단장이 되고 나서 몇 년 뒤 은퇴했고, 그의 부하가 그 자리를 이어 장군직에 올랐다.
‘그가 있었다면 나를 도와주었을지도 모른다고 계속 생각했었는데.’
유더는 재앙의 징조를 파악한 뒤 여러 사람을 찾아가 조언과 힘을 보태줄 것을 요청했다. 지노 보델리 또한 그가 찾으려 했던 이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은퇴한 후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려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와는 이전에 그다지 친분이 없었어. 가능하면 이번을 계기로 어느 정도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몇 년 뒤면 은퇴할 이라 해도 지노 보델리가 가진 위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전 대륙에서 여전히 가장 존경받는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라면 유더가 하는 말 백 마디보다도 가치 있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2년 내내 여기에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도 회수 작전을 앞두고 이곳으로 온 건가. 어느 쪽이든 황제의 명이 있었기에 움직인 것이겠지.’
황제는 하나뿐인 형제이자 마병단장인 키시아르를 직접 이곳으로 보내 붉은 돌을 가져오도록 명령했고, 거기에 더해 지노 장군까지 보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황제가 그 돌을 아주 중요한 것이라 여기고 있다는 것.’
사실이라면 이전까지 유더가 했던 추측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황제가 붉을 돌을 회수해서 한 일이라고는, 그 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 의문인 진주탑에 그것을 맡겨 엉망으로 만든 뒤 ‘세계구’라는 그럴싸한 이름만 붙여 성역에 처박아 둔 것뿐이었으니까.
심지어 박아둔 뒤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찾아가 보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유더는 지금의 황제는 그 돌에 호기심 정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오랜만이군, 지노. 건강해 보여서 기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키시아르가 그것을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황족 혈통의 특징이 확고한 금발에 붉은 눈을 본 병사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평생 가도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람이 진짜 왔다는 것을 확인하니 놀라울 것이다.
유더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안개질풍마에서 내렸다. 키시아르가 그들을 헤치고 제일 앞으로 나아가 지노 장군과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동안 지키고 있느라 고생이 많았어.”
“고생은 당치 않습니다. 당연히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별일은 없었는가?”
“간혹 호기심 때문에 몰래 접근하려 하던 근처 백성들 외에는 크게 신경 쓸 것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방벽 입구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서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길을 넓혀 나머지 일행도 들어갈 수 있도록 터 주었다.
유더는 안개질풍마의 고삐를 잡고 뒤를 따르며 키시아르와 지노 장군이 나누는 이야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현재 이곳에 있는 총 인원은 얼마나 되나.”
“총 300명 정도입니다.”
“생각보다 많군.”
“산 전체를 지켜보아야 하다 보니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능력보다는 눈이 필요했지요.”
“능력보다 눈이라.”
키시아르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노 장군도 소드마스터답게 보통 체격을 한참 넘는 꼿꼿한 장신이었으나 키시아르는 그런 그보다도 눈에 띄게 더욱 컸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다른 세상을 보는 듯했다. 유더는 병사들이 공작과 장군이 함께하는 모습을 신기해하는 만큼, 그 뒤를 따르는 펠레타 기사단과 마병단원들에게도 흥미를 보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직 마병단의 존재는 세상에 정식 공표가 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 존재를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제복은 입었으나 기사단은 아니고, 진주탑의 마법사들과도 다른 기운을 풍기는 남녀가 섞여 있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별일이 없다면 병사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넘어가게 되리라.
“들어오십시오.”
지노 장군이 그들을 기지 한가운데 위치한 건물로 안내했다. 본래는 사냥꾼들이 머무는 산장이었을 법한 작은 건물은 나름대로 고치고 증축해 그럴싸한 겉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모든 상황보고를 받고 지휘를 합니다. 오시느라 힘드셨겠지만,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짐을 푸시는 대로 여기서 상황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노 장군의 말을 들은 키시아르의 시선이 펠레타 기사들과 마병단원들 쪽으로 향했다.
“이 중에 피로한 자가 있는가?”
“저희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펠레타 기사들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고, 그에 질세라 가케인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노 장군을 향해 도로 눈을 돌렸다.
“그렇다니 바로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보고와 붉은 돌 관련 사항은 전하께서만 들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마병단원들과 함께 듣겠다. 그리고 브루그 경.”
“네!”
여태 맨 앞에서 길잡이를 맡아 왔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경도 함께.”
“알겠습니다.”
펠레타 기사 네 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지노 장군을 따라 더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 안에는 거의 벽 한 면만 한 지도가 붙어 있었고, 통일성 없는 디자인의 낡은 의자 여러 개가 주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죄송하지만 높으신 분을 맞이할 만한 시설이 없습니다. 부서지지는 않을 터이니 편히 앉아 주십시오.”
“의자란 앉을 수만 있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키시아르는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가까이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모두들 앉도록.”
그의 말에 제일 먼저 힌과 핀 남매가 얼른 앉았고, 그 뒤를 따라 다른 이들이 어설픈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유더는 맨 마지막으로 모두를 잘 볼 수 있는 가장 뒤쪽 의자에 앉았다.
모두 앉고 난 뒤 지도 앞으로 다가간 지노 장군은 지도 한가운데 위치한 검은 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현재 위치가 바로 이곳입니다. 제국 중부를 가로지르는 척추라 불리는 아이리크 산맥이지요. 그중에서도 정확히는 북서부에 위치한 곳입니다.”
군사용 지도는 상단이나 귀족들이 이용하는 그저 그런 지도와는 정확도 자체가 달랐다. 지노 장군이 보여준 것이 바로 그 군사용 지도의 일부였다.
산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초록색으로 칠하고 높이에 따라 등고선을 표시한 지도는 처음 보는 이라 해도 금방 주변 지리를 알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산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군사들이 어느 위치에 얼마나 주둔해 있는지도 간단한 그림 표시를 위에 붙여 표시해 두었다. 군사용 지도를 처음 보는 마병단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붉은 돌은 2년 전 이 부분에 떨어졌습니다. 저희가 있는 곳에서 몇 시간 정도 올라가면 있는 산골짜기지요.”
장군이 현재 위치라고 짚은 곳에서 조금 더 아래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곳에는 붉은색 점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것이 떨어진 이후 주변은 초토화되었고, 아무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장소. 유더는 그 말 속에서 중의적인 의미를 읽어냈다. 군대가 지키고 있으니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겠지만, 붉은 돌이 가진 힘 때문에 정작 지키고 있는 군대도 접근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유더는 예전에 아주 잠깐 본 적이 있는 붉은 돌과 관련된 기억을 떠올렸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오기 전, 붉은 돌 회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키시아르를 다른 단원들과 먼발치에서 구경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가 데려갔던 마병단원들의 상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눈에 띄는 부상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아마 다들 제 발로 걸어서 올 정도는 되었을 터다.
그때 키시아르는 드물게 몹시 지친 표정을 지은 채 붉은 돌을 쥐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돌을 몇 겹의 두꺼운 천으로 감싼 뭉치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 맞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