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공작님을 모셔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장 앞에 나서서 길잡이를 하고 요리도 주도적으로 한 기사가 그리 말하니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약간 자라났다. 유더는 약속이나 한 듯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마주 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높은 사람을 혼자 만나러 가는 건 모두 부담스럽겠지. 이해하마.’
심지어 키시아르를 보좌하는 부단장이었고 나중에는 제가 그 높은 사람 입장이 되어 몇 년이나 살았던 유더도 그리 내키는 상황이 아니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그래도 10년 정도 더 살다 돌아온 제가 더 젊고 앞길이 창창한 이들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단장님.”
키시아르는 기사들의 말대로 식사 공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냇가 나무에 안개질풍마 고삐를 묶어둔 채로 옆에 서 있었다.
어둠이 내린 곳에 서 있음에도 그만은 신기하게도 밝은 빛을 두른 것처럼 잘 보였다.
‘예전에 그게 무슨 혈통 효과라고 했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안 나는군.’
“식사를 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군.”
키시아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혼자 여기까지 오다니, 10명 중에 자네가 제일 동료들의 신뢰를 받는 모양이야.”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어디에 내놔도 겁을 먹지 않으니 귀찮은 일을 미룰 때는 이만한 상대가 없을 것임을 다들 은연중 눈치 빠르게 깨닫고 있는 것이리라.
사람은 등 뒤에 숨을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자를 눈치 빠르게 알아내니 말이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몇 발짝 앞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먼저 걸었다. 윗사람보다 아예 앞에서 걷거나, 뒤에서 걷는 것이 예의이니 기왕이면 키시아르가 보이지 않는 앞쪽이 낫다 싶었다.
“아까 이름을 지명했을 때.”
그러나 등 뒤에서 말이 들려오면 그것도 결국은 무용지물이다. 유더는 묵묵히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엄청나게 놀란 표정을 짓던데, 혹시 정말 예상치 못했나? 내가 자네를 지명할 거라고 말이야.”
“……제 능력은 미래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미래에 일어났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 일어났던 일이 전부 달라져 버렸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는 해도 키시아르가 그것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단둘이 있을 때 말을 걸 줄은 더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아서 꽤 신선했어. 재미있더군.”
“…그렇군요. 단장님께 재미를 드렸다니 기쁘다고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유더의 목소리는 더없이 싸늘했다. 말투는 공손하나 그 안에 든 뜻은 그와 반대라는 것을 모를 이는 이곳에 없었다.
“하하하.”
키시아르는 웃었다.
“그래서, 나를 따라오게 된 것이 불만스러운가?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어.”
“맡은 바는 반드시 수행합니다.”
유더는 최대한 간결히 대답했다. 키시아르가 좋든 싫든 여기서 돌아가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다. 그에게는 키시아르를, 그리고 붉은 돌을 제 손으로 지켜야 하는 목표가 있었다.
“참 겁이 없어. 그래서 재미있지만.”
“…….”
유더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유더 아일.”
“…….”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혹시 나와 좀 더 마음을 열고 가까이 지내볼 생각은 없나?”
유더는 그만 두 번째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자 속을 알 수 없는 웃는 얼굴이 보였다.
‘왜 이러는 거지.’
전에도 이랬었던가? 아니. 일단 전에는 이런 식으로 함께 작전에 나간 적이 없으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더는 약간의 혼란 속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는 충분히 단장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뭔가 부족하셨다면…….”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죄송스럽게도 그동안 산골짜기에서 홀로 살아온지라 사교와 예의에 서툽니다. 제가 뭔가 잘못 이해했다면…….”
내심 키시아르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겉으로는 변명을 둘러댔다. 키시아르가 또다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싫다는 거군.”
“…….”
“그래, 알겠네.”
“공작님. 이쪽입니다!”
유더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 멀지 않은 곳에서 기사가 그들을 향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말할 기회를 놓친 채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해야 했다.
* * *
이후 이틀이 지나고, 마침내 붉은 돌이 떨어진 아이리크 산맥이 위치한 곳에 도착할 때까지 키시아르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다.
개인적인 말은 걸지 않고, 펠레타에서 온 기사들과 마병단원들 사이를 적절히 조절하는 정도로만 입을 열었다는 뜻이었다.
펠레타 기사들은 황궁기사단 소속 기사들과 달리 마병단원들에게 그 어떤 적대감도 내비치지 않았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흠잡을 곳 없는 태도였다.
마병단원들은 그것이 그들의 주인인 키시아르 라 오르도 각성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유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것 때문만이라면 이 정도로 깔끔하게 굴지는 않겠지.’
펠레타 기사단은 키시아르 라 오르가 공작 작위를 받고 난 뒤 제일 먼저 만든 곳이다. 때문에 그가 죽은 뒤 황명으로 제일 먼저 해체된 곳도 그곳이었다.
‘상당히 맹목적으로 주인을 따르고 있어.’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그들이 키시아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키시아르 라 오르 공작은 단순한 주인을 넘어서 모든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진짜 ‘주군’이었다.
이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이 느껴지는 이들이 어째서 과거에 키시아르가 죽었을 때에는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해체되는 데 동의했을까.
‘뭐, 지금은 충성을 바치고 있다 해도 2년 정도나 되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으니.’
어쨌든 이번에는 그들의 주인이 죽어서 해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기! 주둔 중인 군대 깃발이 보입니다.”
그때, 맨 앞에서 달리던 펠레타 기사 한 명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대로 멀지 않은 곳에서 나무에 높이 묶인 채 휘날리고 있는 붉은색 바탕에 금색 사자가 그려진 깃발이 보였다. 오르 제국 군대가 사용하는 제국기였다.
“곧 도착할 테니 속도를 줄여 주십시오.”
여기저기서 길게 휘파람 부는 소리가 났다. 유더도 휘파람을 불어 제가 타고 있던 안개질풍마의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안개질풍마는 정말 대단한 이동수단이었다. 살아 있는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와 지치지 않는 체력도 대단했지만, 발굽소리도 없이 모든 것을 성큼성큼 뛰어넘으며 달리는데도 탑승자의 몸에 무리가 거의 가지 않는 것이 제일 놀라운 능력이었다.
3일간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꼬박 달리기만 했음에도 일행들의 얼굴에 피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그 능력을 대변했다.
아마 진짜 말이나 마차를 타고 왔다면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얼굴에 묻어났으리라.
일행은 길잡이 기사를 따라 천천히 산맥 아래쪽에 진을 친 제국군 임시 기지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통나무를 박아 둔 방벽과 창을 든 채 삼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 나타났다.
“누구냐. 어디서 왔는지 소속을 밝혀라!”
“우리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다. 여기에는 황제 폐하의 아우이시자 마병단의 단장, 펠레타 기사단의 주인이신 키시아르 라 오르 공작 전하가 계시다.”
기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병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식을 전하였으니 곧 안에서 맞이하러 나오실 것입니다!”
유더는 제가 탄 안개질풍마가 푸르릉거리며 차가운 숨을 내뱉는 것을 느꼈다. 연기처럼 흔들리다 사라지는 그것의 갈기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차가운 얼음이 닿은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자연적으로 태어나지 않은 생명체이기에 몸이 저절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어지간해서는 이 말을 타지 않았었다.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기분이 안 좋아.’
유더는 어서 맞이하러 온다는 이들이 나타나 말에서 내릴 수 있기를 바랐다.
“전하. 어서 오십시오. 명을 받은 뒤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안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갑옷을 걸친 군사 여럿을 이끌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가 키시아르를 보자마자 손을 들어 절도 있게 경례를 했다.
‘……저자는 분명 남부군 장군, 지노 보델리 백작이 아닌가?’
유더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붉은 돌이 떨어진 이후 황제가 보낸 군대가 그 주변을 막고 철저히 지키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장군씩이나 되는 이가 직접 이곳에 와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과거의 유더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지노 보델리는 병사들과 달리 갑옷을 걸치지 않았다. 군복 어깨에 황제가 하사했을 황금사자 브로치를 달고 거기에 이어 푸른 망토를 둘렀을 뿐이지만, 풍기는 기운만은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도 무겁고 강렬했다.
겉보기에는 고작 40대나 되었을까 싶은 인상이었지만 유더는 그의 나이가 실제로는 보기보다 적어도 20살은 더 먹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