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많이 닮아서 구분하기 어려우면 그냥 엘더라고 불러.”
“구분할 수 있으니 괜찮아.”
“정말? 어떻게?”
“부모님도 우리를 가끔 구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구분하냐고 해도 그냥 내재되어 있는 기운의 차이가 미약하게 다르니 그것을 통해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을 설명한다고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았기에 유더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때, 황금 사자 머리가 달린 문이 열리며 키시아르의 부관, 나단 주커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도착하셨습니까?”
“…….”
“저는 단장님의 부관, 나단 주커만이라고 합니다. 단장님께서 나오시기 전까지 이번 임무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질문은 말이 모두 끝난 뒤에 해 주십시오.”
나단 주커만의 이국적인 용모와 얼음 같은 표정에 모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직설적인 엘더 남매조차도 그랬다.
나단은 그런 시선에 익숙한 듯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임무는 황제 폐하의 직명에 의한 것이므로 몹시 중요합니다. 단순히 붉은 돌을 회수하여 수도로 돌아오는 것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 돌에 숨겨진 힘을 아직 모두 알지 못하니 만에 하나를 대비해 철저히 준비해야만 합니다. 가능성은 낮습니다만, 어쩌면 중간에 붉은 돌을 노린 제3의 세력이 끼어들 수도 있죠. 때문에 이런 임무에 능숙한 펠레타 공작가 소속 기사 5인이 여러분과 공작님… 아니, 단장님을 모시고 이동할 예정이니 여러분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일이 생겼을 때 기사들과 협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관분도 저희와 함께 가요?”
힌이 손을 들고 묻자 나단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이곳에서 단장님의 대리업무를 수행합니다.”
“기한은 얼마나 걸릴까요.”
“단장님께서는 일주일 정도 걸리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일주일이라니. 유더는 예상보다 대단히 빠른 계획에 표정을 굳혔다.
‘설마 이동하는 데에 걸릴 시간은 빼고 말한 것이겠지.’
유더는 붉은 돌이 떨어진 곳 근처에 살고 있던 제가 마병단 입단 시험을 치러 수도까지 오는 데에만 거의 보름에 가까운 시간을 들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는 어렸고 길을 찾는 방법도 잘 몰랐기에 속도가 느렸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리 빨리 이동한다 해도 일주일 안에 임무를 수행하고 오는 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이었다.
‘예전에 키시아르가 전부 끝내고 오는 데 얼마나 걸렸었지? 일주일보다는 더 걸렸던 것 같은데. 붉은 돌 회수 임무를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황제가 준 시간이 그것뿐이었나,’
지금의 황제는 유더가 상대했던 황제의 전대 사람이라 일 처리를 어떤 식으로 시키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유더에게 일을 시키던 황제는 뭔가를 시키면 꼭 정해진 기한 내에 해 오기를 바랐다.
지금 황제 자리에 있는 이도 그런 성격이라면 이렇게 빨리 움직이려 하는 것도 납득할 수 있을 법했다.
“이런. 내가 제일 늦은 모양이군.”
드디어 키시아르가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흰 단장 제복 위에 그나마 눈에 덜 띌 만한 검은 망토를 두르고 검을 찬 차림새였다. 망토에는 큰 모자가 달려 있어 원한다면 언제든 얼굴을 가릴 정도는 되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가까이에서 본 그의 남다른 분위기와 우아한 미모에 압도당한 것 같았지만, 유더는 키시아르가 차고 있는 검의 화려한 모습에 제일 먼저 눈길이 갔다.
‘역시 가지고 왔군.’
신검 오르.
하지만 나단과 유더를 제외한 누구도 그것이 전설 속 신검임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빠른 이동을 위해 마차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 중에 말을 타지 못하는 자가 있나?”
말은 가장 보편화된 육지 이동수단이었다. 이 대륙에는 개나 고양이보다 말이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있을 정도였다.
특히 오르 제국은 대부분이 평야로 이루어져 있어 옛날부터 마차가 다니는 길을 아주 잘 닦아둔 것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오르 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부터 말을 타는 법을 배웠다. 산골짜기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자란 유더조차도 걸어 다닐 때쯤부터 말을 타고 수레를 모는 방법을 배웠다.
그것을 익혀야만 열심히 해 둔 나무를 싣고 내려가 마을에 팔 수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탈 수 있습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뒤, 키시아르가 나단에게 눈짓을 했다. 절도 있게 인사를 한 나단이 먼저 밑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탈 말은 일반적인 말이 아니다.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본 적도 있겠지. 우리는 진주탑의 마법사들이 데리고 온 안개질풍마를 탈 것이다.”
“안개질풍마라면…….”
칸나가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유더는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혼종.’
오래전 진주탑의 마법사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기상천외한 실험을 많이 했다. 그 결과물 중 가장 쓸만하다고 평가받은 것이 바로 안개와 폭풍 속에서만 살았던 고대 몬스터와 말을 교배시켜 만든 안개질풍마의 탄생이었다.
‘설마 그걸 탈 줄이야. 생각해 보니 이 시기까지는 아직 그것들이 많이 쓰였겠군. 잊고 있었어.’
안개질풍마는 살아 있기는 하되 아무리 달려도 진짜 말처럼 지치지 않았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갈기 대신 안개 섞인 차가운 바람을 휘날리며 뛰는 그것들은 오로지 몸에 박힌 마정석을 통해 명령하는 마법사들의 말만을 듣도록 만들어졌다.
지치지 않으니 진짜 말보다 훨씬 빨리 이동할 수 있었지만 개체 수가 적어 대부분은 진주탑의 마법사들이나 사용했다.
당연히 안개질풍마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오직 진주탑 마법사들뿐이었다.
‘무너지기 전에 그것을 만드는 비밀을 캐내길 잘했지. 덕분에 그 끔찍한 혼종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기술은 다른 곳에 쓸 수 있었으니….’
오랜 세월 동안 탑 안에 갇혀 고집스럽게 자신들만의 규칙을 지켜 온 늙은 마법사들. 마병단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들은 이 세계에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마병단이 자신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느끼고 가장 크게 반발한 것도 그들이었고, 정도를 넘은 방해와 교묘한 공격을 일삼은 것도 그들이다. 결국은 그 욕심이 화를 불렀다.
탑이 무너진 후 자연히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된 안개질풍마. 유더는 몇 년 뒤 또다시 무너질지 모를 탑과 그곳의 상징 같은 괴물을 떠올리며 키시아르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공작님, 준비해 두라 전해 주셨던 안개질풍마들입니다.”
일부러 사람을 비웠을 입구 앞에 진주탑 소속 마법사임을 알 수 있는 진주 버튼을 단 로브 차림의 마법사 네 명이 안개질풍마 여러 필을 끌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 그 자체였다.
“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안개질풍마를 보지 못한다.
그 말은 회오리바람이 뭉친 곳에 은빛이 나는 가루 한 줌을 뿌려 강제로 그 형체를 눈에 보이게 만든 것 같은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크기 또한 보통 말의 2배는 되어 보일 만큼 거대했다.
형체가 없는 말들을 잡아두기 위해서는 특별한 재료를 넣어 만든 고삐와 마정석이 필요했다.
마법사들이 잡고 있는 붉은색 고삐에 매인 안개질풍마들이 서늘한 투레질을 하면서 발을 구를 때마다 그림자 없는 땅 위로 바람 부는 소리만이 작게 퍼졌다.
유더는 그 짐승들의 새카만 구멍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시 보아도 참 기분 나쁘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하게 생겼어. 은빛이 나네. 밤에도 저렇게 반짝거릴까?”
“응. 하지만 맹수나 몬스터의 시선을 끌 정도는 아니야.”
그것들은 오히려 안개질풍마를 피해 다닌다. 자연스럽게 태어나지 못한 존재는 어디서든 배척당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오로지 인간들만이 그것을 억지로 일그러뜨리고 이용하려 했다.
칸나의 혼잣말에 저도 모르게 답을 한 유더는 잠시 후 제 쪽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느끼고 눈을 깜박였다.
“그걸 어떻게 알아? 예전에 본 적이 있어?”
“……들은 적이 있었어. 지나가다 만난 마법사에게.”
“그렇구나.”
다행히 동료들은 그 답의 진위 여부까지 의심하지는 않았다. 고작 몇 달 전 평생 살던 곳을 떠나 오랫동안 여행해 수도에 온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으니까.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조금 더 기다리고 있자 멀지 않은 곳에서 가벼운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나타나 키시아르의 앞에 부복했다.
번쩍거리는 황궁기사단 갑옷에 비하면 용병이나 다름없어 보일 만큼 조촐한 차림새였지만 그들의 견갑에 찍힌 문양은 펠레타 공작이 사용하는 불꽃 문양과 똑같았다.
그들이 바로 키시아르가 펠레타 공작으로서 거둔 공작령 소속 기사들이었다.
“안개질풍마를 열한 마리나 데려오느라 힘들었습니다. 이놈들은 모여 있으면 서로 싸우려 하는 습성이 있으니 묶어 놓을 때는 꼭 한 마리씩 따로따로 거리를 두고 묶어두어야 합니다. 안장은 없어도 되지만 속도를 조절할 때에는 특정한 소리로 신호를 줍니다.”
붉은 돌을 회수하러 가기 위한 모든 인원이 모인 것을 확인한 뒤 진주탑에서 나온 마법사들 중 가장 높은 이가 말을 다루는 법을 간단히 설명했다.
“속도를 느리게 하다 멈춰야 할 때는 휘파람을 길게 한 번, 빨리 달려야 할 때는 휘파람을 짧게 계속해서 불면 점점 빨라집니다. 휘파람 소리가 꼭 커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녀석들은 위에 타고 있는 인간의 소리를 잘 알아듣도록 만들어졌으니까요. 그 외에는 나무를 태운 불 근처에 녀석들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뜨거운 것에 약하거든요. 녹거나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안개질풍마를 처음 타보는 이들은 그 안내를 몹시 주의 깊게 들었다. 물론 유더는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기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살피는 쪽에 더욱 신경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