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어제는 다들 충분히 축하하고 쉬었는가?”
“네.”
다음날, 키시아르는 숙취에 시달리는 기색이 역력한 단원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유더는 멀쩡했지만 양옆에 서 있는 칸나와 가케인은 둘 다 얼굴이 퀭했다.
“유더. 너도 충분히 마신 것 같은데 왜 멀쩡한 거야?”
“혹시 그것도 능력이야?”
“…그런 셈이라고 해야 하나.”
자연을 이루는 모든 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유더는 물과 곡식으로 만들어진 술의 영향 또한 받지 않았다.
그의 몸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진 것뿐이었다.
‘몬스터의 피를 섞어 만든 술에는 취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 술은 본디 누군가를 독살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것을 먹고도 죽지 않고 오히려 취하기만 한 것은 유더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날 죽이려고 보냈던 것 같은데 덕분에 나도 취할 수 있단 것을 알게 되어 신기했었던 기억이 나는군.’
“정말 부러워. 나도 그런 능력을 가졌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칸나가 넋두리를 하는 것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멀리서 목소리를 높여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전날의 여파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마병단에 첫 임무가 내려왔다. 여기 모인 이들 중 5명이 나와 함께 오늘 바로 짐을 꾸려 떠나게 될 것이다.”
“임무? 대체 뭐지?”
“5명이라구?”
키시아르의 말에 주변에서 곧바로 웅성거림이 퍼졌다. 단원들은 모두 숙취조차 잊고 잔뜩 흥분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마병단이 만들어진 이래 처음으로 정식 이름을 걸고 모습을 드러낼 일이 생긴 것이다. 어떤 임무든 간에 누구나 그 5명 안에 제 이름이 불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오늘은 유더 또한 그중의 하나였다.
‘설마 붉은 돌 회수 작전을 발표한 것이 오늘이었다니. 이렇게 빠르게?’
예전에도 성을 하사받은 뒤 붉은 돌을 회수했던 것 같기는 한데 이렇게 빨랐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의 유더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뽑힌 건 술과 2명, 신과 2명, 정과 1명이었어.’
흐릿한 과거의 기억을 열심히 돌이켜 보았다. 그때 키시아르는 강한 능력을 지녔다는 평을 받는 이들보다, 다소 특이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뽑아갔다.
뽑힌 이들은 모두 임무 수행 도중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썼고, 도중에 작은 사고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무사히 붉은 돌을 회수하여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때 일어난 사고 때문에 키시아르 라 오르가 성검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지.’
유더는 그때 자신이 뽑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실망했고, 이후에는 신경을 끊고 수련에만 더욱 신경을 썼다. 키시아르가 성검의 주인임이 밝혀져 떠들썩했을 때도 유더에게는 그저 남의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 후에는 또 술과 부단장으로 뽑혀 정신없이 바빴고, 그러다가 또 갑작스레 단장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키시아르가 은퇴해 펠레타 공작령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다 보니 성역에 안전하게 잠들어 있다 생각한 세계구에는 전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재앙이 현실이 되어 닥쳐왔을 때, 그리고 거대한 멸망의 기운이 세계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오직 저만이 알고 있음을 느낀 순간, 유더는 세계구와 연관된 사건들을 다시 한번 조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붉은 돌을 정제하여 만든 세계구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물건이 이 세상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세계구가 지닌 원래의 힘이 진주탑에서 거친 정제작업 때문에 상당 부분 훼손되고 짓이겨져 거의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진주탑의 마법사들은 분명 붉은 돌에서 불순물을 깎아냈을 뿐이라 말했었는데 까놓고 보니 정반대의 결과였다.
도로 돌려내라 말하고 싶어도 당시 진주탑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유더는 세계구가 만들어지기 전, 그저 붉은 돌이었을 때의 상황을 조사하고 스스로 원래의 힘을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붉은 돌이 발견된 당시부터 회수한 뒤의 상황을 뒤늦게 다시 조사했었지만…….’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에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때 키시아르에게 뽑혀 함께 길을 떠났던 마병단원들이 모두 다 어느새 은퇴해서 사라졌거나 임무 도중 사망했다는 것뿐이었다.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을 얻을 방법도, 힘을 가졌던 이들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 그 힘의 원류를 찾기 위해 과거의 사건을 뒤지기 시작한 유더는 많은 의심과 경계에 노출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유더가 쌓아온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
‘그때 키시아르가 어떤 기준으로 단원을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같다면 그게 나는 아닐 가능성이 큰데.’
만약 이번에도 뽑히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접 키시아르를 찾아가 뭔가 경고라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키시아르가 천천히 저와 함께 떠날 이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술과의 핀 엘더, 힌 엘더.”
“와!”
모두가 열광하는 가운데 유더만이 충격에 빠졌다.
‘아니야. 그때는 그 이름이 아니었어. 분명 예전에는…….’
이시아스와 에딘이었던가? 아마 그런 이들이 뽑혔던 기억이 났다. 핀과 힌 남매처럼 눈에 띄는 이들은 결코 아니었다.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서 놀라움을 공유하고 있는 핀과 힌 남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요정처럼 말간 얼굴을 지닌 푸른 머리 남매는 육체를 강화하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신과가 아니라 술과를 택해 모두의 의문을 샀다.
사실 그들이 술과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에만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능력인 이동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밝혀졌음에도 많은 이들은 그들의 재능이 신과에서 꽃피웠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유더 또한 그들을 주로 육체적 능력이 필요한 임무에 꽂아 넣으며 같은 생각을 했었다.
‘이동 능력은 쓸모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지. 아직은 능력을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데다 전제조건이 까다로워. 그걸 알면서도 택한 건가? 이전에는 택하지 않았었는데 대체 왜?’
“다음. 정과의 칸나 완드.”
“제가요? 정말?”
칸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또한 당연히 예전에 지목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벌써 세 명째 과거에 확실히 지명 당하지 않았던 사람이 지명 당했어. 그렇다면…….’
다음에 불릴 사람들도 이전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유더는 칸나의 주변에서 은밀히 난리를 피우는 단원들을 무시하며 오로지 단상 위의 키시아르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다음. 신과의 가케인 볼룬발트, 그리고 유더 아일. 이상의 5명은 끝나는 즉시 간단한 짐을 꾸려 내가 있는 곳으로 오도록.”
유더 아일. 그 목소리가 유더의 귀에 깊이 박혔다.
“말도 안 돼…. 우리 둘 다 뽑혔어, 유더. 이게 정말이야?”
옆에서 가케인이 말하는 소리조차 어딘지 멀게 들렸다. 유더는 제 쪽을 짧게 바라보고는 사라진 키시아르의 얼굴을 멍하니 떠올리며 정말로 제가 알던 미래가 바뀌고 있음을 실감했다.
‘뽑힌 5명이 전부 과거와 다르다 못해 정말로 나까지 뽑힐 줄이야.’
키시아르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면담을 신청할 필요는 없게 되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키시아르가 발표를 마치고 사라진 뒤 단원들이 모여 있던 공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이들과 실망한 기색으로 사라지는 이들이 뒤섞여 분위기가 어지러워졌다.
유더는 순식간에 그와 가케인, 칸나에게 무어라 말을 걸기 위해 달려온 이들 사이에 갇혔다.
“대체 무슨 기준이람? 정말 축하해.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키고 돌아와!”
“돌아와서 무슨 일을 했는지 꼭 알려줘야 해!”
아마 비밀 유지 계약서를 쓸 테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를 칸나와 가케인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그러마고 이야기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키시아르 라 오르.’
유더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거와 달라진 키시아르의 마음을 짐작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 * *
짐을 챙기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가지고 있던 짐도 적고, 입을 옷이라고 해 보아야 마병단 제복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더가 작은 가방 하나만 챙겨 키시아르의 숙소가 있는 층으로 올라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나머지 일행들이 보였다. 모두 가지고 있는 짐은 몹시 단출했다.
칸나가 긴장한 얼굴로 눈인사를 하고, 가케인이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키가 작은 두 사람이 곁에서 튀어나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당신이 유더?”
“당신이 황궁기사단 앞에 혼자 나섰다던 그 유더?”
힌 엘더, 핀 엘더. 유더는 다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두 남매를 직접 다시 보았다. 말투는 여전히 무례하다고 느껴질 만큼 직설적이었다.
그들은 과거, 누구도 다가가지 않았던 유더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고는 하던 소수의 동료였다. 다시 만나도 기억과 다름없는 그 태도에 희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래.”
유더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누나인 힌이 나서서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힌이야. 이쪽은 동생 핀.”
“많이 닮아서 구분하기 어려우면 그냥 엘더라고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