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9화 (19/805)

19화

“다음은, 유더.”

“유더!”

드디어 유더의 이름도 불렸다. 유더가 줄 밖으로 걸어 나가자 공터 바깥쪽에 몰린 인파 사이에서 눈에 띄는 붉은 머리 청년, 가케인이 한껏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들어 댔다.

이미 성을 가진 마병단원들은 하사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대부분은 가케인처럼 공터 바깥쪽에서 지켜보며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그들만의 잔치라 비웃으며 지나가는 황궁기사단 기사들이 가끔 보였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유더는 가케인 쪽을 한 번 돌아보고는 계속 걸어 단상을 올랐다. 단상 위에는 평소에 입는 흰 제복 위에 황족 예복 망토를 두른 키시아르가 서 있었다.

태양과 같은 금빛 머리칼 아래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마치 신전에 그려진 태양신의 현신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유더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다분히 인간적인 흥미로 빛나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없군.”

“긴장해야 합니까.”

크게 목소리를 높이기 전, 작게 말을 거는 키시아르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하자 그가 더욱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랬다면 내가 자네에게 실망했겠지.”

“그러면 되었군요.”

어차피 모두 다 두 번째로 겪는 일이다. 예전에는 조금 떨렸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든 종이 안에 무엇이 쓰여 있을지 보지 않고도 전부 알았다. 유더의 무표정한 얼굴을 향해 키시아르가 천천히 목소리를 높여 입을 열었다.

“마병단원 유더에게 명예로운 성, ‘아일’을 하사할 것을 명한다.”

“감사합니다. 명을 받듭니다.”

역시 받은 성씨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살던 곳에서 따온 ‘아일’ 그대로였다. 그래도 단장 유드레인 아일이 아닌 단원 유더 아일은 나쁘지 않은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유더는 키시아르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단상을 내려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가케인이 활짝 웃으며 축하의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유더! 축하 파티가 열릴 거야. 우리도 가야지.”

하사식이 모두 끝난 후, 숙소로 향하는 유더를 쫓아 달려온 가케인이 어깨를 감싸며 밝게 소리쳤다.

“…어디서?”

“황궁기사단 부지 바깥에 있는 술집으로 가기로 했어. 후안이 이미 연락해서 전부 비워 놨다고 하더라. 3층짜리 건물이라니 사람이 모자랄 일은 없을 거야. 다들 이미 갔어.”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지만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유더는 잔뜩 들떠 무어라 계속 떠드는 가케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이전에는 안 간다고 뿌리치고 혼자 수련을 했었던 것 같은데.’

마병단에 들어와 얼마 안 되었던 시기의 유더는 눈치를 보며 친분 관계에 매달리는 동기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제 힘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힘을 키우는 것 말고는 재미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때도 누군가 했던 권유를 뿌리치고 하루 종일 훈련장에서 수련만 했다.

지금도 술자리나 사교모임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장이 된 이후 황제의 명으로 질릴 만큼 불려 다닌 탓에 세상에는 싫어도 가야 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했다.

그때 참석했던 온갖 더러운 모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와 지금은 내 목표도 다르고.’

현재 유더의 목표는 마병단 내에서 최대한 많은 인재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여 미래의 재앙에 대비하는 것이지, 제 힘을 더 키우는 것이 아니었다.

‘능력을 키우는 건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어. 하지만 사람은 한 번 잃어버리면 끝이라는 걸 알았지.’

“그러니까 너도 가자, 유더. 재미있을 거야.”

“알겠어. 가자.”

유더는 한참 떠들던 가케인의 마지막 말에 이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자 가케인이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잘 생각했어! 혹시 안 간다고 할까 봐 사실 좀 걱정했거든.”

“…….”

누군가에게 끌어안겨 본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낯선 기분에 유더가 눈만 깜박이자 가케인이 흠칫 놀라 안았던 팔을 도로 놓아주었다.

“아, 미안. 불편했어?”

“아니. …괜찮아.”

“좋아. 그러면 어서 가자. 다들 기다릴 거야.”

가케인이 씩 웃으며 유더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유더는 마병단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황궁기사단 부지를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수도 거리는 여전히 떠들썩했고 머리가 아플 만큼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케인은 인파를 놀랄 만큼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마치 옆에도 눈이 달린 사람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를 보며 유더는 조금 감탄했다.

“여기야. 검은 고래뿔! 여관도 겸하는 곳이라고 하더니 정말 크지?”

드디어 목적지가 나타났다. 가케인이 가리켜 보인 말끔한 목제 건물을 향해 가까이 다가갈수록 왁자한 웃음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이미 많은 이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 왔어! 유더도!”

유더의 팔을 잡은 가케인이 문을 가슴으로 밀며 안으로 들어서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가케인이 결국 유더를 데려왔네!”

“내기 결과가 나왔으니 진 사람들은 다들 동전 던져 줘!”

“에이, 난 끝까지 안 오는 쪽에 걸었는데.”

누군가 투덜거리며 동으로 만든 동전을 던졌다. 2층을 넘어 3층에서도 거침없이 쏟아지는 동전을 모자 든 이가 하나도 흘리지 않고 전부 받았다.

단순히 운동신경이 좋은 것이 아니라 바람을 일으키는 능력을 간단히 사용한 것이었다. 웃음소리가 술집을 가득 메웠다.

“가케인. 유더! 이쪽!”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칸나가 손을 흔들었다. 유더는 가케인과 함께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얼마 전 황궁기사단 1수련장에서 했던 훈련 때 만난 에버와 이전에 룸메이트였던 곰 같은 인상의 쿠르가, 그 외에 두어 명이 원형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꽤 많은 요리와 함께 술병이 여럿 올라온 상태였다.

“나는 유더가 올 거라는 데 걸었었어. 배당금이 좀 짭짤할 것 같아서 벌써 기대된다.”

칸나가 밝게 웃자 주변에서 아쉬운 목소리와 기쁨의 동조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너무 그러지 마. 다음에 안 온다고 하면 어쩌려고 다들 그렇게 대놓고 내기를 해?”

“아뇨. 황궁기사단의 바보 귀족들도 신경 안 쓴 유더가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지는 않던데요. 그렇죠?”

가케인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유더의 앞에 밀주잔을 밀어주었다. 유더는 가케인의 말에 반박하며 고개를 내민 에버 쪽을 향해 대충 “네.” 하고 짧게 대답해 주었다.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거봐. 가케인 넌 유더를 너무 조심스럽게 대해. 하지만 덕분에 돈을 벌었으니 오늘만은 고맙다고 해야 하나?”

“칸나…….”

가케인이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자. 그러면 이제 여기에 올 수 없는 어린 동료와 사정이 있는 동료 빼고는 다 온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축하합시다! 성을 하사받은 동료들을 위해 축배의 한 잔!”

“와아.”

마병단원들이 일제히 잔을 들어 올렸다.

“황제 폐하의 영광과 우리의 고귀하신 단장님을 위해 건배!”

“건배!”

그리고는 왁자지껄한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테이블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마음껏 마시고 먹는 동안 모든 곳에서 밝은 웃음과 행복만이 떠돌았다.

떠돌이 악단 출신이라는 술과의 누군가가 가게 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현악기와 피리 하나로 그럭저럭 신나는 음악을 연주해 대자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유더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동료들이 하나둘 다른 테이블로 떠나가거나 춤을 추러 빠져나갔다. 유더는 가케인이 누군가에게 끌려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제법 멋진 춤을 추는 것을 지켜보며 벽에 기대어 술을 마셨다.

예전에 자신이 이곳에 오지 않았을 때에도 이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파티를 했었을까. 지켜만 보고 있어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닌데 그때는 왜 안 왔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쓴웃음이 나왔다.

‘구역질 나는 귀족들 파티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 말이야.’

비록 유더에게 대놓고 말을 거는 이는 거의 없었으나, 눈이 마주친 동료들은 누구나 가벼운 미소와 함께 멀리서라도 잔을 들어 건배의 의사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눈 속에 유더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이틀 전 황궁기사단 훈련장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던 덕이었다.

마병단원들은 갑자기 가지게 된 강대한 힘과 괴리된 원래의 세계 인식 사이에서 각기 어느 정도 혼란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 누구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저보다 약한 귀족 기사들 앞에서 자꾸만 기가 죽었다.

각성자 중에도 높은 신분을 지닌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들은 마병단에 지원하지 않았거나 들어와서도 평민 출신 단원들과 어쩔 수 없이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 와중 유더가 일으킨 사건은 모든 이들에게 각기 엄청난 자극과 시원한 대리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평민 출신 마병단원이 힘 하나만으로 당당히 공작가 출신 기사에게 맞섰고, 단장 키시아르는 출신이 어떻든 마병단원이라면 누구나 그가 보호할 것임을 몸소 표했다.

출신이 어떻든 이제부터는 마병단이라는 소속이 우선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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