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8화 (18/805)

18화

“어쩌면 이곳에는 그런 이가 더 필요할 수도 있어.”

“나쁜 뜻을 가지고 들어온 이라면 일찍 쳐내는 쪽이 좋습니다.”

“나쁜 뜻을 가지고 들어온 놈이라면 애초에 황궁기사단 앞에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나서지 않았을걸. 그것도 디아카 공작가를 상대로.”

“…….”

그 말에 나단은 입을 다물었다.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 위로 즐거운 기색이 떠올랐다.

“정말 재미있는 광경이었지. 네게도 보여주지 못해 아까울 만큼.”

키시아르가 얼마나 귀족들을, 그리고 4개의 공작가를 싫어하는지 알고 있는 나단은 모처럼 떠오른 진심 어린 주인의 미소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굉장히 마음에 드신 모양이군요.”

“마음에 든다……. 음, 그래. 그런 것 같군.”

아무튼 재미있고 특이하지 않나. 처음부터 시선이 갔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나단, 내가 나갔다 온 사이 온 연락은 없었나?”

“예. 태양궁에서 전갈이 왔었습니다.”

나단은 손님이 오기 직전 제게 날아온 전서구의 다리에서 풀어낸 짧은 편지 한 장을 주인에게 올렸다.

태양궁은 오르 제국 황제만이 머물 수 있는 곳으로, 작게 말린 편지에도 황제의 상징인 태양 문양이 종이를 봉한 밀랍 위에 잘 보이도록 찍혀 있었다.

키시아르는 그것을 받아 봉인을 뜯고 펼친 뒤 빠르게 읽어내렸다.

“흐음. 성 하사식이 끝나는 대로 붉은 돌을 가지고 오라고 성화시군.”

“하사식은 모레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꽤 빠듯한 일정이 되겠지.”

키시아르는 다 읽은 종이를 중앙 난로 안에 던져 넣었다. 오색 영롱한 색으로 타오르는 마석의 불길 속에 던져진 종이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타올라 사라졌다.

“회수해 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다만 아직 이곳 체계가 전부 잡힌 상태가 아니지 않나. 오래 자리를 비우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조금 걱정이군.”

“그래도 무리하셔서는 안 됩니다. 펠레타 기사단이 대기하고 있으니 필요한 인원수를 말씀해 주시면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키시아르가 나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고 작게 웃었다.

“너는 정말 걱정이 많아, 나단.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너보다는 나를 덜 걱정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고 있어.”

“저 말고도 공작님께서 각성하신 이후 모두의 걱정이 큽니다. 혹시라도 그릇이 상하기라도 하신다면.”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

키시아르는 조용히 부관의 말허리를 잘랐다.

“아직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어.”

“주제넘은 말씀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리고 기사단은… 그래. 다섯 정도 준비시키도록 해.”

“다섯은 너무 적습니다. 그러면 저도 함께…….”

“너는 여기서 내 일을 대행해야지. 태양궁에서 연락이 왔을 때 네가 아니면 누가 받아?”

“하지만.”

붉은 돌이라는 미지의 물체를 운반하는 데에 고작 다섯 명의 수하라니. 아무리 키시아르 본인이 나선다 해도 수가 너무 적었다.

“빨리 다녀와야 하니 무겁게 움직일 수는 없어. 그리고 기사만 다섯일 뿐, 여기에서 몇 명을 뽑아 임무에 참가시킬까 한다.”

“여기에서… 말입니까?”

제 주인이 공을 들여 만든 단체임을 알면서도 나단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걱정이 깃들었다. 키시아르가 그 마음을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방금 보았지 않느냐. 시간만 좀 더 주어지면 너도 이길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다. 그동안 살펴보니 꽤 재미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많아. 그 돌로 인해 힘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니 뭔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여러모로 마병단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주인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키시아르는 한번 결정을 내리면 뜻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단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자도 데려가시려는 것입니까?”

“그럴까 한다.”

키시아르는 유더에 대해 말하며 또다시 작게 웃었다.

“데려가서 대체 어느 정도 힘을 지녔기에 그리 자신감이 넘치는지 자세히 두고 보고 싶어졌거든. 귀족이든 황족이든 상관하지 않는 그 태도가 굉장히 흥미로워. 찔러 보면 꽤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부디 지나친 관심으로 발전하시지는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단의 얼음 같은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무언가에 깊이 관심을 두는 일이 별로 없었으나, 그런 만큼 한번 흥미를 끄는 것이 생기면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주인의 그런 성정이 큰 문제를 불러온 적이 없었으나, 방금 만난 평민 출신 사내에게 그 관심이 발휘되어 깊어진다면 처음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 힘을 각성한 이들에 대해 밝혀진 것은 아직도 너무나 적다. 그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 완전히 알 수 없는 이상 주인에게 혹시나 위해가 될 만한 일은 최대한 막아야만 했다.

“하하. 설마 내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서?”

“…그런 일은 없으실 것을 압니다만, 만의 하나라는 것도 있습니다.”

“걱정 마라, 나단. 나를 해할 수 있는 것이 그리 흔했다면, 이 고생을 할 이유도 없었겠지.”

키시아르가 나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차피 무엇이든 잡아 강제로라도 안에 쌓인 것을 발산해야 하는 지겨운 생이다. 그에 비하면 이것은 자연스럽고 흥미롭지.”

자, 그러면 이제 너도 들어가 쉬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는 주인을 향해 고개를 숙인 나단은 숙소에서 물러나 그를 위해 마련된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충직한 부관이 사라진 뒤에도 키시아르 라 오르는 침대에 들지 않고 타닥타닥 타오르는 중앙 난로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무를 태워 만든 붉은 불꽃과 달리 마정석을 태우며 내는 불은 신비한 오색을 내며, 어떤 그을음과 재도 뿌리지 않고 한 줌의 돌로 꼬박 열흘이 넘는 시간을 타오른다.

게다가 환기구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니 이토록 아름다운 형태의 난로를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 발명되었을 때에는 나무를 태우는 불에 익숙한 이들과 마법사들에게 사술로 취급당했으나, 이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 된 그 존재.

그렇기 때문에 키시아르 라 오르는 그 난로를 제가 머물 장소의 가장 중앙에 설치하도록 특별히 지시했다.

과연 제가 이곳에서 만들어낼 결과물이 이 불처럼 여겨질 수 있을까. 답은 아직 알 수 없었다.

* * *

이틀 뒤, 마병단원들이 머무는 숙소 앞 공터에서 마병단 전체 인원의 절반 이상이 참여하는 성씨 하사식이 열렸다.

천 년이 넘는 제국 역사 중에도 몇 번 열린 적 없는 특별한 식이었다. 황제가 직접 내린 성을 받게 된 단원들의 얼굴에 감격이 가득했다.

‘현실은 초라하지만 말이야.’

유더는 그들 중 한 명으로서 검은 제복을 입고 서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하사식 같은 행사에는 성이나 이름을 내릴 황제가 직접 참석해야 한다.

그러나 하사해야 할 사람 수는 너무 많았고, 황제는 건강을 이유로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도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된 상태였다.

때문에 하사식 장소는 황궁이 아니라 마병단 건물 앞의 작은 공터가 되었고, 황제 대신 그의 직인이 찍힌 칙서를 든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가 단상 위에 섰다. 평소 단원들을 모아 두고 공지를 말할 때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단원들은 충분히 감격했다. 성을 받는다는 것은 즉 평민에서 벗어나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평민이 지는 많은 고된 의무에서 해방되었고, 많은 혜택이 주어졌으며 성을 가족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즉 가문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지와 작위를 가진 귀족과 같지는 못하더라도 달리 말하자면, 그것까지 갖게 된다면 그들도 귀족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평민이 거의 유일하게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직업인 기사가 되어 ‘경’의 칭호를 받았을 때는 그 칭호를 가족에게 물려줄 수 없으니 이는 비교할 수도 없이 더욱 좋은 혜택이었다.

성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 내리는 성이잖아. 세상에 정말 말도 안 돼.”

차례차례 이름이 불리며 앞으로 나가는 가운데 유더의 옆에 있던 칸나가 감격한 얼굴로 뺨을 감쌌다.

“우린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정말 이런 대우를 다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당연히 받아도 된다. 나중에는 굵직한 임무를 해치우고 올 때마다 더 많은 포상을 받는 데 익숙해질 테니까.

단장이었던 유더의 경우, 황제가 직접 내린 영지와 성도 받아 보았다. 수도 내에 있는 대저택도 몇 채를 받았었던가.

진귀한 보물과 하인, 온갖 명예로운 칭호도 너무 많이 받으니 나중에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이제 와 생각하면 우스운 기억이었다.

“유더. 기쁘지 않아? 좀 더 웃어 봐.”

“……나도 기뻐.”

과거를 떠올리는 유더의 표정이 삭막해 보였는지 칸나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대답을 했지만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정말 기쁜 사람의 표정이야? 아닌 것 같은데…….”

“다음은 칸나.”

“네!”

다행히도 그 순간 칸나의 이름이 불렸다. 유더는 칸나가 단상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병단원 칸나에게 명예로운 성, ‘완드’를 하사할 것을 명한다.”

“가, 감사합니다. 명을 받듭니다.”

칸나 완드. 새로운 성을 받은 칸나가 눈시울을 붉히며 뒤로 돌아 인사를 했다. 그것 하나만이 과거에는 없었던 풍경이었다.

“다음은, 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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