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5화 (15/805)

15화

“대체, 무슨 사술을 쓴 거냐.”

“사술이 아니라 제 힘입니다.”

잘생긴 얼굴도 흙먼지투성이가 되니 전혀 멋지지 않았다. 유더는 흐트러진 앞 머리칼을 올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저를 올려다보는 키올레에게 친절히 알려주었다.

“자연에서 난 모든 순수한 것들은 저를 따릅니다. 자연에서 난 철을 불로 제련하여 만든 기사님의 검도, 당신보다 저를 따른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번 손을 움직이자 키올레의 검이 허공으로 떠오를 듯 휙 움직였다가는 도로 내려갔다. 키올레는 제 검에 귀신이 들린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돼.”

“더 말도 안 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유더의 손가락이 한 번 더 까닥 움직였다. 그러자 키올레가 든 검 위로 불꽃이 훅 일었다.

“키올레 님!”

키올레는 치솟는 불꽃의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검날 위로 아름다운 불꽃이 활활 타다가 곧 사라졌다. 그러나 실제로 불에 타거나 그을린 것이 아니므로 검날과 손잡이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모든 이들 앞에서 기사의 목숨과도 같은 검을 스스로 팽개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키올레의 벌린 입술 사이로 말이 되지 않는 호흡이 가쁘게 새어 나왔다.

유더는 그가 저를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는 것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죽인다고 달려들면 조금 골치가 아플지도 모르겠군. 적당히 기만 꺾어 놓으려고 했는데.’

“너, 왜 술과로 안 간 거냐?”

뒤에 모여 있던 마병단원 중 하나가 의아하게 물었다. 유더가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보다 먼저 다른 이의 답이 들려왔다.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선택지를 한정할 필요가 없을 테지.”

“단장님!”

어느새 키시아르가 마병단원들 뒤에 서 있었다. 초유의 놀라운 사태 때문에 그가 이곳까지 온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기사들이 일제히 놀란 얼굴로 입구와 키시아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에 띄는 외모에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의 공작이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데 전혀 몰랐다는 것은 황궁기사단의 수치나 마찬가지였다.

기척을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 하는 훈련은 모든 기사들이 종자 때부터 계속 갈고닦는 것 중 하나였다.

“내가 테오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좀 늦은 사이 꽤 재미있는 일들을 하고 있었어.”

키시아르가 천천히 걸어 마병단원들 앞으로 나섰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바닥에 넘어져 있는 키올레 다 디아카와 떨어져 나뒹구는 그의 검, 그리고 유더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유더는 저를 보는 그의 얼굴에 실린 미소를 보며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유더.”

“네.”

“단장님, 유더는 단지 저희들을 위해서 나섰을 뿐입니다!”

키시아르가 유더의 이름을 부르자 등 뒤에서 에버가 소리쳤다. 숨을 삼키고 있던 다른 단원들도 그제야 하나씩 목소리를 높여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저분들이 먼저 저희를 무시하고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유더를 부른 건 혼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야. 벌써부터 동료애가 형성된 것을 보니 나쁘지 않지만, 오해는 자제하도록.”

키시아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앞으로 나섰던 에버의 귀가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관대하게 용서하지. 자, 그러면 유더. 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나섰는지 말해 보실까. 상대가 벌써 의욕을 잃어 내가 처리할 수가 없게 되었지 않나.”

과장된 말투로 농을 치며 윙크를 한 뒤 키시아르는 유더에게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은 결코 그를 혼내거나 타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 반대의 뜻을 말하고 있었다.

기사들 사이에 충격이 떨림처럼 번져 나갔다. 키올레 또한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키시아르를 보고 있었다.

“자, 내 단원의 말대로다. 내가 테오와 직접 이야기를 끝내고 결정한 일에 왜 다른 이들이 말을 보태는 것이지? 테오는 모든 사정을 관대하게도 이해해 주었어. 불만이 있다면 너희들의 단장에게 직접 전하도록 하라.”

키시아르는 황궁기사단장 테오라도 반 타인을 테오라는 애칭으로 아무렇지 않게 불렀다.

그러나 기사들은 존경하는 황궁기사단장이 순순히 중요한 훈련장을 쓰도록 허가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단장님이 대체 왜 그런 허락을 내주신단 말씀입니까? 이곳은 기사들을 위해 마련된 곳입니다. 왜 저놈들 때문에 저희가 훈련할 시간마저 줄여야 합니까? 이곳이 어떤 곳인데…….”

기사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키시아르의 눈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래? 그러면 자네도 여기에서 훈련을 하면 된다. 땅이 모자란 건 아니니 사용하고 싶은 곳을 얼마든지 사용해도 괜찮아.”

단지, 하고 이어 말하는 낮은 목소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키시아르는 저를 향해 소리친 기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단지 훈련 도중 날아올지도 모르는 모든 천재지변에 대한 보상은 없다. 정식 훈련시간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검이 불타든, 땅이 뒤집어지든, 나무가 부서지든…. 용감한 황궁기사단의 일원이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겠지?”

“…….”

기사의 얼굴이 모욕과 공포로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곧 훈련을 시작한다. 자신이 있는 자들은 모두 이곳에 남으라. 아니라면 돌아가도록.”

침묵이 흐른 뒤, 황궁기사단 기사들이 물러났다. 유더는 저를 노려보던 키올레가 종자의 부축을 뿌리치고 제 발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네놈, 기억해 두겠다.”

그러나 키올레가 검을 주워 사라지자마자 유더는 곧 그에 대해 잊었다.

‘곧 사라질 사람을 기억해서 뭐 하겠어.’

“유더, 괜찮아요?”

기사들이 사라지자 뒤로 물러나 있던 마병단원들이 일제히 유더에게 달려왔다. 그들은 유더가 당한 일을 제 일처럼 분해했고, 기사들을 욕하며 전보다 상승한 동료애를 다졌다.

“유더… 정말 대단했어. 내가 좀 더 나섰어야 했는데 미안해.”

유더는 풀죽은 대형견처럼 입을 꾹 다문 가케인의 등을 대충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그래도……. 난 네 친구 자격이 없어. 정말 부끄러워.”

“괜찮다니까.”

어차피 나서 보았자 큰 도움은 안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서 준 것 자체만으로도 신기한 일이 아닌가. 유더를 위해 누군가 나서 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번 말이 없기에 재수 없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다시 봤어.”

가케인이 물러나자 그 뒤에 있던 다른 단원이 엄지를 내밀며 웃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훈련 내용을 조금 바꾸어야겠군. 검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졌는지 파악하는 건 더 중요하지. 이곳의 훈련장 중 땅 전체에 보호 마법을 건 곳은 이곳뿐이니 참지 않아도 괜찮아. 대마법사 에스트의 마력으로 새긴 보호 문양이 숨 쉬고 있다. 안심하고 참여하도록.”

유더는 그제야 왜 키시아르가 굳이 이곳을 훈련 장소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키시아르의 지시에 따라 서로의 능력을 제대로 꺼내 알려 주었고, 최대 출력과 최소 출력을 비교하며 능력을 조절하는 훈련을 했다.

유더는 어렵지 않게 성공했지만 단원들 중에는 생각했던 방향의 수업이 아니라 어설픈 이들이 더 많았다.

“우리의 능력은 전에 없었던 것이다. 즉 스스로에 대해 잘 알수록 그것이 너희의 자산이 된다. 그것을 명심하도록.”

훈련을 진행할 때의 키시아르는 평소의 나른한 미소 대신 또렷하고 단호한 말투를 사용했다.

누군가 거대하게 변한 손을 바닥에 휘두르자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땅 전체가 흔들거렸다. 그래도 보호 마법을 걸어 두었다는 것은 사실인지 훈련장 밖 건물들까지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

“유더. 훈련이 모두 끝나면 밤에 잠시 내 숙소로 오도록 하게.”

훈련이 끝나기 전, 키시아르는 유더의 훈련 진행을 봐 준다는 이유로 가까이 다가와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남겼다. 유더는 그를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슨 일로 부른 거지. 역시 그 애송이 기사 건 때문인가?’

훈련이 모두 끝나고 씻은 뒤 유더는 홀로 계단을 올랐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키시아르가 그를 몰래 부를 만한 이유로 짐작 가는 것은 그뿐이었다.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라… 속이 짐작이 가지 않아.’

신과를 택하면서 유더의 현실은 바뀌었다. 이전에는 없었을 일들이 늘어났으니 그가 가진 미래의 정보가 쓸모없어지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지금도 그랬다.

키시아르가 머물고 있을 꼭대기 층 앞에 서서 사자 머리를 한 문고리를 잡고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 밤 방문하시기로 하셨다던 분이십니까.”

“…….”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과거에 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유더는 얼음 같은 표정의 미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는 잠시 일이 있어 나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테니 그동안 앉아 계십시오.”

오랫동안 검을 잡아 온 이 특유의 근육 위로 가느다란 흉터가 가득했다.

남국 특유의 연한 붉은색 피부를 가진 그 남자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유더를 테이블로 안내한 뒤 미리 끓여 둔 듯한 찻잔을 내밀었다. 큰 손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도자기 찻잔이 아이러니했다.

“드십시오.”

“…….”

할 일을 모두 끝낸 뒤 그는 묵묵히 책장이 있는 쪽으로 물러나 기립했다. 그냥 서 있는 것 같지만 언제든 이 방 전체의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위치였다.

‘과연 소드마스터다 이건가.’

유더는 그런 그를 향해 내심 가벼운 호승심을 느꼈다.

그가 바로 키시아르 라 오르를 따르는 부관이자 숨겨진 소드마스터, 나단 주커만이었다. 출신은 제국이 아니라 남쪽 나라 어딘가라고 들었지만 잊었다.

그는 오직 키시아르만을 맹목적으로 따랐고, 그가 죽은 뒤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져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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