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0화 (10/805)

10화

키시아르 라 오르는 유더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마병단장의 자리에 서는 법, 하이에나가 가득한 궁정에서 버티는 방법, 그리고 제2성을 각성한 이후부터는 오메가이자 능력자로서 살아가는 법까지도.

예전에는 일방적으로 너무 많은 짐을 그에게 넘겨받았다고 생각해 원망했던 적도 있었지만 죽을 때쯤 되어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분명 어떤 의지를 가지고 300명이 넘는 단원들 중 유더를 단장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무엇을 바라고 선택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는 유더가 자신의 목숨을 끊으러 오는 사자가 될 것임을 정말 까맣게 모르고 마병단장 자리를 넘긴 것일까? 황실과 귀족들의 사정을 모를 리가 없는 그가 그런 명령이 내려올 줄 몰랐을까?

키시아르 정도의 능력이라면 분명 죽지 않고 미리 도망치거나 반대로 유더를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기에 유더는 왜 그랬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가 내미는 짐들을 받지 않고 그의 뜻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를 이전처럼 죽게 만들지는 말아야 했다.

“이거 마병단 수석 합격자가 대체 언제 오나 했더니, 이제야 오는군. 드디어 과를 정했나?”

키시아르가 미소와 함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고귀한 황족이 평민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나 편안한 말투가 아닐 수 없었지만 유더는 놀라지 않았다. 그가 그런 성격임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네. 하지만 나가시려던 참이라면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딱히 일정이 있던 건 아니었고 잠깐 나갔다 돌아오려고 했을 뿐이니.”

키시아르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며 미소를 지었다.

“들어와.”

유더는 제가 훨씬 더 오래 사용했던 곳에 손님으로서 다시 발을 디디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그곳은 촉박하게 지어졌음에도 황족이 머물 곳임을 감안하여, 기술자들이 최대한 품격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둥근 돔 모양으로 높이 솟은 천장 아래 남부산 최고급 카펫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고, 북부에서 난 마정석을 모아 태우고 있는 중앙 난로는 난로라기보다 아름다운 조각상처럼 보였다.

벽 한 면을 가득 메운 장엄한 책장과 그 아래 놓인 검은색 현암 책상은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위엄을 풍겼다.

오르 제국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신화를 토대로 그려진 명화 십여 점의 아름다움은 또 어떠한가.

그림들이 걸린 흰 환상석 벽은 빛이 없이도 스스로 오색 찬란하게 빛났다. 그 광경을 본 방문자들은 신전 제단 앞에 섰을 때와도 같은 경이로운 감정에 절로 빠져들고는 했다.

물론 이곳 풍경에 너무나 익숙한 유더는 그저 한 번 슥 둘러보기만 했을 뿐, 조금도 놀라움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그가 시선을 둔 곳은 붉고 푸른 빛을 타닥타닥 뿌리며 타고 있는 마정석 난로 위쪽이었다.

허공에 저절로 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투명한 보석을 통째로 깎아 만든 검대와 그것이 받치고 있는 거대한 검 한 자루가 보였다.

‘신검 오르.’

한눈에 보아도 보통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온갖 신성력과 마력, 이종족들의 기술을 모아 만든 검집 안에 담겨 있음에도 풍기는 기운 자체가 남달랐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베일 듯 예리한 기운에 전신의 감각이 곤두서는 듯한 그 검은 바로 이 오르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가 신의 사자에게서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신검 오르였다.

황실의 피가 흐르지 않아도 그 검을 들 수는 있다. 하지만 들 수 있다 해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신검은 사용자의 능력과 자질을 까다롭게 따지기로 유명했다. 역사상 그 검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는 제국의 천년 역사에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키시아르 라 오르는 신검 오르에게 선택받은 당대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 그 검을 들 수 있는 사람은 유더가 죽던 날까지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능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신했던 유더조차도 만질 수 없었던 콧대 높은 신검. 선택을 받은 자 이외에는 아무도 그 검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키시아르 라 오르가 죽은 뒤 그것은 그가 마지막에 머물렀던 펠레타 공작저에 영원히 남겨졌다.

그런 까다로운 사연을 가진 탓에 귀족들조차도 신검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키시아르가 신검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이 밝혀진 뒤에도 그것을 자주 가지고 다니거나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기껏 택한 주인에게 제대로 사용되지도 못할 것이면서 왜 신검은 키시아르를 선택했을까. 그 검이 주인과 그리 빠른 이별을 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과연 같은 선택을 했을까?

간혹 궁금해지곤 했으나 그것은 키시아르의 뜻만큼이나 영원히 답을 알 수 없었던 사항이기도 했다.

“그 검이 신기한가?”

오로지 신검 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말을 걸었다.

“보통은 이 방의 다른 부분에 시선을 먼저 빼앗겨 거기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않는데 말이야.”

하긴. 평범한 평민이 보일 만한 반응은 아니겠지.

유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검이 전설의 신검이라고는 하나, 겉보기에는 그저 지체 높은 분들이 들 만한 평범한 예장용 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실제로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검처럼 보이지 않는 데다 주변이 워낙 크고 화려하니 보통은 검에 시선을 먼저 주는 이가 없을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도 저 검이 제일 신경 쓰였었어.’

유더는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신검의 생김새와 능력, 그것에 얽힌 미래의 사건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시선이 그쪽으로 간 것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돌아오기 전, 그저 애송이 마병단원이었던 시절에도 유더는 그 검을 제일 먼저 보았었다.

검의 기운을 감추는 검집의 방어벽마저 뚫고 그 안을 얼핏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마력을 느끼는 감각이 예민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키시아르는 당시 그런 유더에게 처음으로 큰 흥미를 보였었다.

유더는 그제야 겨우 신검 오르에서 시선을 떼고 키시아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뜻을 알기 어려운 눈빛으로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유더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평균적인 모습에서 약간 벗어난 유더를 흥미로워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저 그뿐인, 그런 시선이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드는 검인 듯해 시선이 갔을 뿐입니다.”

“심상치 않다? 어느 부분이 말이지?”

이때의 키시아르는 아직 제가 신검의 소유자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상태가 아니었다. 그가 신검의 소유자임을 밝히는 것은 얼마 뒤 붉은 돌을 수거해 가져오는 극비 임무를 맡게 되었을 때다.

그러니 지금은 적절히 모른 척을 하면서도 키시아르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 중요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저를 노리는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검집이 그것을 막고 있지만 완전히 감출 수는 없나 보군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도 전신이 따끔따끔할 정도로 검에서 흘러나오는 예리한 기운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어쩐지 예전에 느꼈던 것보다도 훨씬 강한 기운 같은데… 착각인가?’

예전에도 검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전신이 아릴 정도는 아니었다.

과거 유더는 세계에 더 이상 적수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강한 능력을 지녔었다. 시간을 되돌린 것에 영향을 받아 감각이 본래 수준보다 더 예민해진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더의 말을 들은 키시아르의 시선이 검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잠시 후 유더를 향하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스윽 줄어들었다.

“흠. 기운이 줄어든 것도 느끼나?”

유더의 어깨가 흠칫 굳은 것을 보았는지 키시아르가 재미있어 하는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군.”

“저런 힘을 지닌 검은 처음 봅니다.”

“아니지.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

순간 혹시 키시아르가 무언가 눈치챈 것인가 싶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더는 잠시 긴장했다.

“초대 건국황제와 그의 성검 오르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야.”

“……아.”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 검이 설마 그 성검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정확히는 내가 12번째 소유자라고 할 수 있겠지. 손길을 허락한 사람 이외에는 움직이려 들지 않는 까다로운 녀석이거든.”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더는 처음 듣는 사람처럼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시아르는 그 반응을 딱히 의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여태까지 붉은 돌의 힘으로 각성한 많은 이들을 보았지만 자네처럼 기운을 민감하게 느끼는 이는 처음이야. 각성한 이후부터 그랬나? 아니면 이전에도 일상생활을 하다 다른 이들보다 스스로 마나나 다른 기운에 민감한 편이라 느낀 적이 있었나?”

“각성한… 이후부터입니다.”

“그렇군.”

키시아르가 입술 밑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자네가 423번으로 처음 마병단 시험을 치러 왔을 때 나도 시험관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네. 혹시 그것도 알고 있나?”

“가장 오른쪽에 있었던 분이셨죠.”

“그래. 과연 기운에 민감하여 그런지 정확히 구분하는군. 보기 드문 재능이야.”

유더가 그를 알아본 것은 기운에 민감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전에 그 모습으로 변한 키시아르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인 것이 컸으나 딱히 진실을 밝히지는 않기로 했다.

“그때 나는 자네의 재능이 드물게도 신과와 술과 두 곳에 모두 적합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굳이 택한다면 술과 쪽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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