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9화 (9/805)

9화

“유더! 유더! 잠시만 기다려요.”

유더는 지겨운 글 읽기와 쓰기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육장을 빠져나가려다 그녀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었다.

유더가 죽기 전의 세상에서는 마병단에 없었던 사람이지만 칸나는 그 누구보다도 현 마병단에 잘 적응한 이 중 하나였다.

신분과 나이, 성별에 출신 지역까지 다양하기 짝이 없는 마병단원들 사이에서 모든 사람과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보통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특수능력을 지닌 대신 육체 능력 자체는 그리 뛰어나지 않은데도 고된 훈련에 힘든 소리 한 번 하지 않은 것 또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지나치게 긴장해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마병단원으로서의 칸나는 사교적이고 유능하다는 평을 받았다.

칸나는 저를 마병단에 합격시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유더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인원별로 나뉜 훈련시간이 겹치지 않아 만날 일이 거의 없기는 했지만, 가끔씩 마주칠 때마다 늘 친밀한 인사를 건네고는 했다.

칸나와 가케인이 유더가 해 준 마병단 시험 조언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신비한 경험처럼 떠든 덕에 유더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동료들의 우호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말수도 적고 재수 없다는 이유로 같은 힘을 가진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거의 혼자 다녔었는데 아주 이상한 경험이었다.

“어휴. 얼굴 한 번 마주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유더를 불러세운 칸나가 숨을 헐떡이며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별 건 아니에요. 혹시 아직 과를 정하지 않았다는 말이 정말인가 해서요.”

유더는 칸나의 푸른빛 눈동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단장님이 궁금해 하시더라구요.”

그 말에 유더는 잠시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단장?”

여기서 키시아르 라 오르의 이름이 왜 나오는가.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하는 유더의 얼굴에는 칸나가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미묘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아까 과 선택 보고를 하겠다는 조디와 함께 단장실에 갔었거든요. 그런데 그분께서 혹시 유더는 어느 쪽을 택할지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는 말을 하셔서.”

“…….”

“사실 유더라면 당연히 선택 첫날에 술과로 정했을 줄 알았어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요? 정보를 읽는 데에는 자신이 있으니 뭔가 조언이 필요하다면 뭐든 말해도 괜찮아요. 필요하다면 공짜로 도와줄 테니까요.”

칸나는 간혹 동료 단원들의 부탁을 받아 능력을 사용했다. 물건의 정보를 읽는 능력은 의외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잊고 있던 것을 다시 찾거나, 본인도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끔 해 주는 능력은 마치 점술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많은 이들이 돈을 주고서라도 직접 보고 싶어 한 것이 당연하다 싶을 만큼 신기한 힘이었다. 모든 것이 유더가 예상한 대로였다.

“아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유더가 그녀에게 도움을 청할 일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그에게 현재 제일 중요한 것은 과거에 잊고 지나갔던 유용한 인적재원들을 다시 잃는 바보짓을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의도는 좀 신경 쓰이는데….’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칸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분이 혹시 그 말 외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말요?”

칸나는 잠시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굴리다 고개를 저었다.

“딱히 기억나는 건 없어요.”

“알겠습니다.”

“아마 제가 그나마 유더와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별 뜻 없이 물어본 것 같아요. 어차피 내일까지만 정하면 되는 거니 부담 갖지는 마세요.”

칸나는 그렇게 말했으나 유더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키시아르 라 오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단원들은 대개 힘든 훈련을 함께 하고 공정한 태도를 보이는 키시아르에게 밑도 끝도 없는 믿음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리 공정한 사람은 아니다. 알고 나면 오히려…….

유더는 몇 가지 기억을 떠올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 남자와 관련된 기억들은 대개 그리 뒷맛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제일 먼저 살려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사람이 그 남자라는 것도 변함없지.’

과거에 제 손으로 죽인 남자라지만 이번은 아니다. 아직 그는 죽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살아서 마병단장 자리도 계속 유지해 주어야만 했다.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유더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칸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뜻을 전하자 그녀의 얼굴에 잠시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 그런데 마침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요…….”

“예.”

뭔가 더 할 말이라도? 하는 뜻을 담아 바라보자 칸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단장님도 절 유더와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유더는 저와 아직도 말을 편하게 하지 않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유더는 가케인이나 룸메이트들하고는 말을 편하게 하면서 왜 저하고는 계속 존댓말을 하는 거죠?”

전혀 생각지 못한 말에 유더는 잠시 멍해졌다. 이전의 삶부터 지금까지 통틀어 누군가 그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왜 누구와는 말을 놓고 누구와는 존댓말을 하느냐고? 그야…….

“그쪽에서 먼저 반말을 했으니까 저도 반말을 할 뿐입니다.”

“뭐야. 그러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닌 거네요?”

당연히 의미는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더는 오랫동안 홀로 산에서 살아온 탓인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쌓는 데 지독하게 재능이 없었다.

그런 그가 10년 가까이 한 단체의 수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병단이라는 단체가 오로지 능력의 강함과 약함만을 따져 진급시키는 특수한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전 사실 엄청 신경 썼거든요. 기준이 궁금했어요. 그런데 단순하게 그런 이유라면 나도 이제부터 반말할래. 괜찮지? 어차피 단원들끼리는 다들 조건 상관없이 편하게 쓰는 편이잖아.”

“마음대로 해.”

유더가 천천히 대꾸하자 칸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 진작에 물어볼 걸 그랬어.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럼 나중에 또 봐!”

유더는 사라지는 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후 그를 어렵게 생각해 제대로 말을 걸지 못했던 마병단원 다수가 다음날부터 칸나의 말을 듣고 일제히 반말을 시작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유더의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오늘 일과가 끝나는 대로 키시아르 라 오르가 머무는 곳으로 가서 과를 정했다는 말을 전할 것. 오로지 그뿐이었다.

* * *

마병단의 훈련일과는 해가 질 때쯤 끝이 났다. 유더는 저녁 식사를 끝내자마자 함께 카드놀이를 하자고 달라붙는 가케인을 떼어내고 숙소 건물 위층으로 향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계단을 몇 층이나 빙글빙글 돌아 5층에 도달하자 황금 갈기를 지닌 사자 머리 문고리가 달린 고풍스러운 하얀 문이 나타났다. 황실의 상징인 빛을 삼킨 사자였다.

유더는 그 문고리를 본 순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기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한때는 저 문을 통해 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가 유더에게 단장 자리를 넘긴 뒤 그는 방 구조의 원래 형태를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달라진 것은 그저 키시아르가 높으신 분답게 한 층 전체를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던 것과 달리, 유더는 작은 침실 하나를 뺀 나머지 공간을 공적으로 사용 가능한 곳으로 바꾼 것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죽였다는 소문이 도는 전대 단장의 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것을 소름 끼친다고 여겼다. 하지만 유더에게 이곳은 거의 유일하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숨을 쉴 수 있었던 곳이었다.

저 문을 열면 제가 10년 가까이 사용했던 방이 당장 나타날 것만 같다. 익숙하면서도 아주 낯선 기분이었다.

유더는 그 기분을 가라앉히며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문이 열리며 장신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음?”

“…….”

막 어딘가 나가려던 참이었는지 간단한 사복 위에 긴 코트를 입은 키시아르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는 이내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마주쳤기 때문인가,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고 방문했다 여겼음에도 유더 또한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금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다시 되돌아온 이래 키시아르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것은, 그것도 단둘이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병단 시험을 칠 때는 그가 얼굴에 변용 마법을 쓴 상태라 객관적인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이외에는 300명의 마병단원 사이에서 간혹 스쳐 지나가는 시선 정도로만 겨우 보았기에 크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선을 돌릴 만한 다른 곳도, 그럴 이유도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저를 기다리던 몬스터와 마주한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유더는 키시아르를 올려다보며 가늘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겨우 크게 뛰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상대는 아무런 생각도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자꾸만 불편한 감정과 불필요한 기분이 찾아드는 것은 역시 과거의 기억이 크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키시아르 라 오르. 유더가 그와 알고 지낸 것은 사실 채 2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유더의 인생에서 분명 지울 수 없을 만큼 강한 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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