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8화 (8/805)

8화

‘아직까지는 과거와 달라진 건 없어.’

물론 유더의 방 룸메이트나 칸나의 합격 여부는 과거와 달라졌지만, 그때 룸메이트였던 이들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인 데다 칸나 한 명의 합류 정도는 아직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현재 마병단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대개 유더가 알고 있는 대로 흘러갔다.

푸른 머리 쌍둥이 남매가 걸걸한 입으로 지나가던 기사들과 말싸움을 일으키거나, 훈련 도중 누군가 일으킨 능력 폭주 때문에 잠시 소동이 일어나거나 하는 작은 사건들뿐이었다.

‘그리고 아마 이제 곧 숙소가 바뀌겠지.’

그들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황궁기사단 기숙사 건물에서 새로 완공될 마병단 전용 건물로 옮기게 될 것이다. 그곳이 유더가 붙잡히기 전까지 오래도록 그의 진짜 집이 되었다.

단장이 된 뒤 남들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황제가 집을 몇 채 하사해 주었지만 유더는 그곳에 정이 가지 않았다.

그의 집은 언제나 마병단원들이 머무는 숙소 건물의 제일 꼭대기 층 구석의 작은 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장이 되지 않을 테니 그 방에는 결코 묵을 수 없으리라.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그곳이 묘하게 그리워서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유더, 설마 네가 벌써 힘든 건 아니겠지?”

옆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가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는 뛰어난 외모와 사교성으로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마병단 내의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유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유더가 반응이 없어도 언제나 개의치 않고 옆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걸어왔다. 그런 그를 대하다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사실상 유더가 다시 돌아온 뒤 가장 많이 바뀐 것을 꼽자면 그것은 바로 가케인과의 관계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케인은 앞으로 1년 정도가 지나면 임무에 나갔다가 사고에 휘말려 죽게 된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느꼈던 그 사건이 요즘은 때때로 유더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일단 능력 있는 자가 죽는 건 최대한 막을 생각이니 가케인 볼룬발트의 죽음도 막을 생각이지만…….’

가능할까. 아직 죽을 운명이었던 이를 살릴 만큼 크게 뭔가를 비튼 적은 없었다. 노력한다 해서 성공할지, 아닐지도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는 알 수 없으므로.

“나는 괜찮아.”

유더는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지우고 다시 일어났다.

“그래. 그래야 너답지.”

나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똑같이 행동한 것 같은데도 예전에는 아무도 유더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가케인은 그를 아무 생각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묘하고 이상했다.

* * *

1개월이 지나 마병단원들은 임시숙소에서 벗어나 제대로 마병단을 위해 만든 새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은 황실기사단 부지 바로 옆에 있었다.

그곳에서 훈련받을 것을 예상하여 만든 것이었지만 기사들은 벌레처럼 싫어하는 마병단원들이 저들보다 더 좋은 숙소를 가졌다는 사실에 분통해 했다.

유더의 룸메이트는 이전 그대로였지만 방은 이전보다 훨씬 더 커져서 각자 침대에 누우면 서로의 공간이 분리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는 유더의 기억대로 계속해서 방식을 바꾸어 가며 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낙오자는 없었지만 부상자는 가끔 나왔다.

놀라운 것은 단장인 키시아르도 그들과 같은 훈련에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단원들은 놀랐지만 유더만은 놀라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기 때문이었다.

‘훈련방식을 확정하기 위해 제일 높은 자가 직접 움직이다니, 보통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서로 전우애를 다지는 단원들과 달리 키시아르는 훈련만 끝나면 곧바로 사라졌지만 그가 함께 훈련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가 고무되었다.

그렇게 3개월을 보냈을 때, 드디어 키시아르가 또다시 마병단원들을 불렀다.

그들은 이전과 같으면서도 달라진 모습으로 단장 앞에 섰다.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공식적으로 지급받은 검은 제복이었다.

키시아르의 흰 제복과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훨씬 간단한 생김새를 한 그것을 300명이 넘는 이들이 모두 입고 모이자,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잔뜩 고조되었다.

“우선 그동안 받은 훈련에 체계가 없었는데도 잘 따라와 준 너희에게 감사를 표한다.”

키시아르는 제일 먼저 간략하게 인사를 한 뒤 본론을 꺼냈다.

“3개월간 나는 너희들의 한계를 시험했다. 그 이유는 마병단의 체계를 잡아 완성하기 위해서였고, 이제는 끝이 났다. 때문에 너희는 그간 훈련받은 경험을 토대로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이요?”

푸른 머리 쌍둥이 중 누나 쪽인 힌이 물었다. 기사들이 이곳에 있었다면 감히 공작 전하에게 반문을 한다며 눈을 부라렸겠지만 지금 여기에는 오직 키시아르와 마병단원밖에 없었다. 키시아르는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병단 내부에서 나누어질 분과를 선택하는 거다. 선택지는 총 셋. 하나는 신과, 둘째는 술과, 셋째는 정과다.”

오래전 유더가 들었던 설명이 또다시 반복되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마병단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3개의 작은 집단으로 분리했다. 육체적 능력을 중심으로 한 이들을 모은 신과, 유더처럼 마법과 흡사한 능력을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한 술과, 그리고 그 이외의 이들을 모은 정과였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선택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일주일 뒤까지 의견을 정리하여 내게 알려주도록.”

키시아르는 새로운 마병단 숙소 건물의 제일 꼭대기 층 전체를 홀로 사용했다. 모두 대답하고 나서야 공지는 끝이 났다.

“유더. 어디로 갈 거야? 당연히 술과인가?”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가케인이 유더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지금 당장은 그럴 것이라 확언할 수 없었기에 유더는 대신 대답의 방향을 돌렸다. 다행히 가케인은 유더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곧바로 방향을 돌려주었다.

“난 신과. 술과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여태 훈련을 받으면서 이 능력이 여기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면… 아마 신과 쪽이 맞을 것 같아.”

유더는 순간 조금 놀라 가케인을 바라보았다. 마병단에 들어온 지 고작 3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본인의 능력이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고? 대단히 빠른 발전이었다.

아직 각성자의 능력이 노력과 조건 여하에 따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학계에서 발표하지도 않을 만큼 이른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일찍 죽어서 몰랐지만, 사실 가케인의 재능은 유더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났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유더는 고민에 빠졌다. 3개월간 얌전히 훈련을 받는 동안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며, 정말로 잘만 하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과거의 그는 망설임 없이 술과에 들어가 곧바로 술과를 대표하는 부단장이 되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과거와 그다지 달라질 것이 없다. 이미 정해진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결과는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남는 건 신과뿐인데.’

신과……. 신과라. 유더는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의 가장 큰 능력이 모든 자연 속성을 다루는 것이라지만, 그를 통해 무기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으므로 신과에 간다 해도 뒤처지지는 않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이전처럼 부단장까지 오르지는 못할 수 있지만, 그건 오히려 유더가 바라는 바였다.

‘그리고 신과에 가면… 키시아르 라 오르와 좀 더 자주 볼 수 있겠지.’

유더는 키시아르 라 오르의 능력을 떠올렸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의 능력은 분류하자면 신과에 특화된 것이었다.

‘힘과 속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뛰어난 육체 통제력을 토대로 물리 및 속성공격 방어에 뛰어난 자.’

그중 제일 특별한 것은 바로 ‘육체 통제력’ 부분이었다.

이전에 술과로 갔을 때는 부단장으로서 제 아래 녀석들 뒤처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 단장인 키시아르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나중에는 규칙적으로 만나게 되기는 했지만, 그건… 유더가 원했던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과에 간다면 다를 것이다. 키시아르는 예전에 신과에 속한 단원들을 자주 직접 돌보며 훈련 방향을 잡아주고는 했었다.

키시아르는 인정하기 싫어도 몹시 뛰어난 단장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돌아와 보니 그 점은 더욱 명백하게 느껴졌다.

그는 단순히 짧은 단기적 판단만으로 이 마병단이란 단체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미래의 일들이 겹쳐지며 할 말을 잃게 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대체 왜.’

왜 그때 키시아르 라 오르는 유더에게 단장직을 넘겼을까.

그것도 아무런 고민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

유더는 역시 신과에 가서 그 이유를 찾아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대부분의 마병단원들은 3일이 되지 않아 각자 어느 과에 속할지 선택을 끝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던 자라도 지난 3개월간 받은 훈련과 교육은 어느 정도 제 능력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내리게 하는 데 충분했다.

육체적 능력이 강하게 발현된 이들은 신과로, 마법과 비슷한 능력을 발현한 이들은 술과로 향했다.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이들은 정과를 택했는데, 그런 이들은 전체 단원 330명 중 채 10명도 되지 않았다.

“유더! 유더! 잠시만 기다려요.”

그리고 지금 유더를 불러세운 칸나 또한 그 10명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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