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허억.”
체통을 잊은 행위였지만 아무도 그들을 탓하지 못했다. 그만큼 놀라운 광경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물이다. 유더는 검 주변에 씌운 기운을 바꾸었다. 그러자 불이 녹아내리며 순식간에 소용돌이치는 물줄기가 검날 전체를 감싸고 돌았다.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칠 때 나는 소리 같은 것이 작게 방안에 울려 퍼졌다.
유더는 그 검을 쥐고 마찬가지로 몇 번 휘둘러 본 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보여드리는 것은 이 정도만 하고 이것이 진짜 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만져보실 분 계십니까?”
유더는 시험관들이 체면과 공포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제가 보지 못한 것을 두려워한다.
검기를 씌우는 소드마스터와 속성마법을 다루는 대마법사는 본 적이 있겠지만, 그 두 개가 합쳐지면 아무리 알고 있다 여겼던 것이라도 갑자기 낯설어지는 법이었다.
시험관들은 하나같이 말을 잃었다. 아무도 선뜻 그러겠노라 나서는 자가 없었다. 유더가 기다리다 결국 검을 거두려 했을 때, 처음으로 맨 오른쪽에 앉아 있던 시험관이 입을 열었다. 마법으로 만든 가짜 얼굴을 뒤집어쓴, 바로 그 남자였다.
“아무도 없다면 내가 해 보지.”
“안됩니다. 전……!”
순간 황궁기사단의 부단장이 기겁한 얼굴로 소리치다가는 핫, 하고 입을 다물었다.
‘흐음. 역시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지.’
부단장은 맨 오른쪽 시험관의 정체를 남에게 들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말을 참은 모양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유더에게 확신을 더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심하라고. 나는 ‘그것’이지 않나, 에시.”
맨 오른쪽에 앉은 시험관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저를 말리는 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유더가 아닌 다른 이가 여기 있었다면 그가 시험관 중 제일 여유가 넘쳐 보이는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으리라.
그의 말에 황궁기사 부단장이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벌렸지만,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럴 생각이야. 모처럼 재미있는 게 들어왔잖나?”
물줄기를 감싼 검을 겁도 없이 만지려는 자와 그를 말리는 자. 한쪽이 황궁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아무 의미 없이 넘겼을 모습이지만 알고 있는 자에게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황궁기사단은 대부분이 지체 높은 귀족가 자제로 이루어져 있다. 대대로 황실에 봉사해 온 무인 가문에서 태어나, 수저보다 검을 먼저 쥐면서 열심히 연습한 이들만이 어려운 시험을 거쳐 겨우 올라올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그곳이었다.
당연히 진급도 실력과 가문 둘 모두를 갖추었다고 판단될 때만 이루어졌다. 거기서 황궁기사단의 부단장 자리까지 오른 자라면 적어도 백작가 이상은 되는 집안의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이들이 유일하게 숙이고 물러서는 상대가 과연 누구일까. 답은 간단했다. 그들이 모시는 이, 즉 태양신이 가진 빛의 힘을 타고났다는 황실의 핏줄, 황족이었다.
황족은 모두 눈에 띄는 외모에 빛과 같은 금발, 붉은 눈을 타고난다. 눈앞의 시험관은 바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 외모를 평범하게 바꾸는 마법을 썼을 것이다.
세상에는 그럴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변용 마법이란 것이 있었다. 물론 아주 어려운 마법이기에 그 마법을 써서 모습을 바꾼 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유더는 그것을 제 마음대로 쓰고 다니는 황족을 예전에 한 명 알고 있었다.
수시로 외모를 바꾸고 다녔던 기묘한 황족. 유더도 그가 변장한 모습을 다 알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몇 개는 확실히 알았다. 그중 하나가 눈앞에 있는 시험관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완전히 짐작하기는 어려웠겠지. 오랜만에 봐도 정말 정교한 마법이군.’
그는 바로 유더의 전임자, 초대 마병단장이었던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유더가 사형 직전 들은 수많은 죄목 중에는 그를 죽였다는 죄목도 있었다. 펠레타 공작 살해사건은 오랫동안 유더를 따라다닌 가장 큰 의혹 중 하나였다. 유일하게 스스로 마음의 짐으로 남겼던 사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정말로 유더 자신이었으니까. 황제의 밀명을 받아 처음으로 수행했던 임무였다…….
제 손으로 죽인 남자를 이렇게 다시 빨리 만나게 될 줄이야. 마병단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야 할 상대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시험관으로 와 있을 줄은 몰랐다.
유더는 복잡한 기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에게 제가 든 검을 내밀었다.
“검날이 아니라 주변을 감싼 물만 만지시길 바랍니다.”
예의는 차렸지만 감정을 지나치게 죽인 탓에 다소 건방지게 들릴 법한 말투가 되었다. 시험관들도 그렇게 생각한 듯 평민 주제에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유더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뻔뻔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제가 아는 그 남자가 확실하다면, 그는 결코 이 정도로 화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재미있어하면 모를까…….
“하하하. 재미있군.”
그래. 바로 이렇게 말이다.
유더가 묘한 기분을 느끼는 동안 남자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앉아 있었을 때는 몰랐지만 똑바로 선 그는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도 키가 컸다.
변용 마법으로 인상은 바꿀 수 있어도 체격까지 바꾸기는 어렵다. 유더는 제가 짐작한 그의 정체에 확신을 더했다.
유더의 검 따위는 장난감 검처럼 보일 만큼 큰데도 그의 움직임은 조금도 둔하지 않았으며, 놀랄 만큼 느긋하고 우아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검을 감싸고 도는 물줄기에 닿은 순간, 시험관들이 일제히 어깨를 움찔 떨었다.
“…….”
그리고 그의 손에 닿은 물은 평범한 물처럼 출렁이며 사방으로 힘차게 튀었다. 유더의 얼굴에도, 그리고 남자의 손과 옷에도 순식간에 물이 묻었다.
“진짜 물이군.”
“그렇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감히……!”
유더의 말버릇을 참지 못한 이 하나가 결국 큰 소리를 냈으나 남자가 한 손을 들자 찔끔해 입을 다물었다. 유더는 저를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는 남자와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평범함을 가장한 가면 속에서 유일하게 진짜인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
제 손으로 영원히 없앴다고 생각했던 그 붉은 눈동자가 눈앞에서 생생히 빛나는 광경이 낯설고도 이상했다. 과거에 그를 처음 본 순간에도 이러한 기분이 들었었을까?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흥미롭군. 대단한 능력이야. 능력만큼 겁도 없고.”
“겁이 없으면 불합격입니까?”
유더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제 할 말만을 했다. 남자는 유더의 말을 듣고 입술 끝을 올려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 물론 합격이지. 이런 인재를 놓칠 리 없잖나?”
“감사합니다.”
유더는 검에서 기운을 거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나가서 합격자들이 묵게 될 숙소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423번.”
그러나 문을 통해 나가기 직전, 뒤에서 누군가 유더를 불렀다. 붉은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웃고 있었다.
“기억해 두겠네. 또 보자고.”
당연히 또 보게 되겠지. 지금은 당신이 단장이잖아.
유더는 그렇게 대답해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하면서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 * *
마병단이 설립된 후 최초로 이루어진 모집에 합격한 각성자는 모두 330명이었다. 대단히 많은 숫자였지만 최초 모집이었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1회 모집 때는 아직 힘을 각성한 이들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마병단에 필요한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몰랐던 시기였다. 각성자 자체에 대한 정보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런 정보가 한결 쌓이고 시행착오를 겪은 뒤 다시 모집한 2회부터는 합격자 수가 대폭 줄었다.
나중에는 전문 인력을 두고 상시 모집 및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했음에도 한 달에 한 명도 합격자가 나오지 않을 만큼 수가 줄어들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먼 미래의 일일 뿐이다. 최초의 합격자들은 기쁨과 얼떨떨함이 뒤섞인 얼굴로 거대한 실내 훈련장에 모두 모였다. 33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장소는 그곳뿐이었다.
“곧 단장님께서 오실 것이다. 모두 열을 지켜 서도록.”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같은 각성자가 아닌 황궁기사단이었다. 막 만들어진 곳이라 체계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기사단원들은 모여 있는 마병단원들을 향해 혐오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각성자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천하고 더러운 어중이떠중이들에 불과했다.
이제 막 합격한 마병단원들은 그 눈빛에 대부분 주눅이 들었지만, 개중에는 코웃음으로 넘기는 용감한 자들도 있었다.
“저 눈빛 좀 봐. 내가 손 한 번 휘두르면 당장 죽어 나자빠질 놈들이.”
“그러게나 말야. 나와 검을 맞대면 5번도 못 받아내고 죽을 것처럼 생겼는데 귀족이랍시고 잘난 척하기는.”
“약한데 추하기까지 해.”
“제 주제도 모르고.”
들으라는 듯 노골적으로 떠드는 푸른 머리 남녀의 속삭임에 창을 든 채 근엄하게 지키고 서 있던 기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이를 갈았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주눅이 들어 있던 신입 단원들도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다. 모두 다 유더가 과거에 보았던 광경 그대로였다.
‘힌과 핀 남매. 유명했었지.’
푸른 머리칼이 특징적인 그 쌍둥이 남매는 조상 중에 요정의 피가 섞였다는 소문이 도는 가문 출신으로, 뛰어난 외모에 훌륭한 능력을 지녔지만 지나치게 거침없는 성격으로 인해 윗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결국에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마병단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꽃 하나 꺾지 못할 것처럼 청초한 외모와는 달리 무지막지한 육체 강화 능력을 지닌 것이 인상 깊어 유더의 기억에도 남게 된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