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화 (3/805)

“아이리크? 설마 리크 산맥 근처의 그곳 말이야?”3화

“아이리크? 설마 리크 산맥 근처의 그곳 말이야?”

유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가케인은 그저 그의 고향 이름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아?”

“모를 리 있나. 붉은 돌이 떨어진 곳이 리크 산맥이잖아!”

그랬지. 유더는 피식 웃었다. 붉은 돌이 떨어진 곳은 유더가 살던 곳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이라 직접 그 광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늘 전체가 붉게 물들며 천지가 으스러질 만큼 큰 굉음을 들을 정도는 되었다.

그때는 세계가 갑자기 멸망하는 줄로만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붉은 돌이 떨어진 여파로 인해 유더가 자주 나무를 팔러 다니던 작은 마을들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었다.

“그러면 넌 혹시… 붉은 돌을 봤어?”

나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거든. 가케인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유더는 과거의 일을 더듬으며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봤단 말이야?”

가케인이 펄쩍 뛰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물들었다. 유더는 그제야 11년 전의 자신이라면 못 봤다고 대답해야 맞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고개를 끄덕인 뒤였다.

“지금은 황제 폐하의 기사들이 그 주변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끔 진을 만들고 지키고 있다던데, 어떻게 봤어? 혹시 네가 사는 곳 근처에 떨어졌던 거야? 그 돌의 생김새는 봤어? 크기는?”

“잠깐. 나는…….”

유더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붉은 돌을 봤느냐고? 그야 당연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그가 마병단에 들어간 이후이므로 지금 시점에서는 미래의 일이었다.

그 돌은 마병단이 설립된 이후 당시 단장이 직접 수거해 왔고, 이후 진주탑의 대마법사들이 1년에 걸쳐 불순물을 깎아내고 정제했다.

그 뒤부터 그 돌은 ‘세계구’라고 불렸다. 세계를 지탱할 만한 힘을 지녔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가 죽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 그 돌을 생각하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세히는 못 봤어. 네 말대로… 기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하지만 뭔가는 봤을 테니 봤다고 한 것 아냐?”

가케인은 끈질겼다. 어떻게 해서든 꼭 듣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혹시 비밀로 해야 한다면 다른 곳에는 절대 말하지 않을게. 검의 맹세, 성전의 맹세, 어머니의 이름을 건 맹세, 어느 것이든 시키면 다 할 수 있어.”

가케인 볼룬발트가 저런 녀석이었나? 유더는 희미하게 가지고 있던 가케인에 대한 인상이 상당히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김새가 멀끔하다 한들 그는 아직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어린 청년이었다. 유더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 맹세까지 해서 들어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야.”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말해 줘도 되잖아.”

어차피 지금 듣지 않아도 마병단에 합격하고 나면 알게 될 일인데, 끈질긴 녀석.

그렇게 생각한 뒤 유더는 붉은 돌이 수거되어 세계구가 되어 돌아왔을 때쯤 가케인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의 청년이 약간 불쌍해져 희미한 동정심이 일었다. 유더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평범한 돌이야. 겉보기에는 다른 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색이고 크기도 주먹 정도밖에 안 돼.”

이 정도는 말해 주어도 상관없으리라. 유더의 말에 가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작아? 그러면 그게 붉은 돌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난 당연히 붉은색이라서 붉은 돌일 줄 알았어.”

유더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들 그와 같은 착각을 한다. 유더도 11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붉은 돌의 이름이 붉은 돌이 된 이유는 그것이 떨어질 때 하늘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돌을 마주하면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으므로, 누구나 그것의 정체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기운에 짓눌려 다가가지조차 못하는 돌이었으니까.

“그건 나도 몰라.”

“하긴 그렇겠네. 정말 궁금하군. 마병단에 들어간다면 알 수 있게 되겠지?”

“…….”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튜를 먹었다. 가케인도 다행히 그 질문에 대한 답까지는 바라지 않았던 듯 입을 다물어 주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시험 접수는 했어? 마병단 입단 시험을 보려면 접수를 해야 해. 방법은 알고 있어?”

식사를 마칠 때쯤 가케인이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예전에는 몰랐다. 음침한 인상을 지닌 가난한 시골뜨기에게 그런 것을 자세히 알려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시험 접수를 따로 받는다는 것도 접수가 끝나기 전날에야 겨우 알았다. 접수 받는 장소를 찾으려다 드넓은 수도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바보 같은 시절의 기억이 생생했다.

“푸른얼룩 관까지 가야 해. 내가 접수할 때 가 보니 여기서 걸어가기엔 꽤 멀더라고. 가다가 길을 잃는 것보다는 내 안내를 받는 쪽이 훨씬 편할 거야. 어때?”

붉은 돌에 대해 알려주었기 때문인지 가케인의 표정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그런 조건 없는 순수한 호의를 대체 얼마 만에 받아본 것인가. 무척 어색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유더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좋아.”

“잘 생각했어.”

가케인이 활짝 웃었다. 화려한 미남은 웃는 것도 빛이 났다. 유더는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했다.

* * *

푸른얼룩 관은 황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사실은 파클라만누테이아 관이라는 긴 정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것이 푸른얼룩 관이라는 다소 이상한 별명으로 바뀐 이유에는 꽤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지붕의 일부가 파란색이라서 그렇다는 설, 가장 큰 입구로 들어가는 길바닥에 푸른 장미무늬가 그려져 있어서 그렇다는 설.

그러나 행정관들이 서류에 서명을 할 때 사용하는 도장 잉크가 특수한 푸른색이라 그렇다는 이야기가 그중 제일 많은 지지를 받았다.

고풍스러운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 앞에 선 유더는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저 문 안에서 그의 인생이 처음으로 바뀌었었다.

“오늘은 다행히 줄이 별로 길지 않아. 금방 들어갈 수 있겠어.”

입구 앞에 줄을 선 이들을 살피던 가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을 섰다.

마병단 시험을 치러 온 이들은 접수를 위해 줄을 서야 했다. 접수를 희망하는 자들은 많은 데 비해서 접수관은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유더는 접수가 끝나기 직전에야 운 좋게 뛰어 들어가 접수할 수 있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그들이 줄 맨 끝에 다가가 서자 바로 앞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당신들도 지원자인가요?”

화가 난 것처럼 뚱해 보이는 표정에 말투도 시비를 거는 것처럼 딱딱했다. 유더의 기억 속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 실전에서 쓸 수 없을 만큼 한미한 능력을 지녔거나, 혹은 능력을 각성했다고 착각해 찾아온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번이 첫 마병단 모집이었기에 그런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유더라면 무시했을 질문이었지만 가케인은 친절히 대답을 해 주었다.

“맞아요. 저는 이미 접수했지만요.”

“그래요? 옆의 분을 도와주러 함께 온 건가요?”

“그런 셈이죠.”

여자의 시선이 가케인의 옆에 선 유더에게 살짝 향했다가는 도로 돌아갔다.

“그러면 접수할 때 뭘 답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겠네요. 혹시 알려줄 수 있나요? 그것 때문에 너무 긴장되어서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그제야 그녀의 잔뜩 굳은 표정이 사실은 긴장했기 때문임을 알아차린 가케인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별 것 아니에요. 이름, 나이, 출신지, 혹시 제2성이 있다면 제2성, 그리고 가장 중요한 능력 설명을 하고 나면 끝이죠.”

제2성이란 눈에 보이는 성별인 여자, 남자를 제외한 두 번째 성별을 의미했다.

그것 또한 붉은 돌이 떨어진 뒤 새로이 나타나기 시작한 형질로, 첫 번째 성별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발현되었기에 처음에는 신의 저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후 그 형질 변화가 대부분 능력을 각성한 이들에게만 나타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반응이 달라졌다.

오르 제국 황제와 교황은 공식적으로 그것을 ‘신이 주신 제2의 성별’로 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고, 언제 제 몸도 변화할지 몰라 공포에 질려 있던 일반 국민들은 크게 안심했다.

제1성별이 무엇이든 간에 제2성별이 ‘알파’로 명명된 이는 ‘오메가’로 명명된 이를 임신시킬 수 있었다. 그들도 다른 이들과 짝을 지어 자손을 볼 수는 있었지만, 제2성별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서로에게만 성적인 끌림을 느꼈다.

얼핏 보면 이 간결한 사항 외에는 별 것 없어 보이는 이야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많은 것들이 밝혀지자 그 사이에서 또 새로운 차별이 자라났다.

‘알파’로 확인된 이들은 대개 유난히 체격이 좋고 능력도 강하게 각성하는 편이라 만인의 동경을 샀지만, ‘오메가’로 확인된 이들은 제2성별이 나타나지 않은 일반 각성자보다도 능력이 약했다.

알파와 오메가 모두 주기적으로 발정기를 겪었음에도 상대적으로 조용히 지나가는 알파의 발정기에 비해, 비각성자조차 맡을 수 있을 만큼 강한 향기를 뿌리는 오메가의 발정기는 성욕을 참지 못하는 짐승 같다는 평을 받으며 은근히 멸시당했다.

많은 오메가들은 그 향 때문에 능력자로서 제대로 일하지 못하고 납치되어 귀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성적 노리개로 쓰이기도 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