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2화 (2/805)

거친 천을 대충 기워 만든 싸구려 의복과 너무 커서 발이 불편한 신발까지 너무나 현실감이 넘쳤다. 어디를 보나 11년 전 처음으로 집을 떠나 수도에 왔던 때의 제 모습이었다.2화

설마 지금까지 있었던 그 모든 일이 전부 꿈이었던 걸까? 마병단에 합격한 후 벌어진 그 수많은 일들과 끝내 목을 내리치던 차가운 칼날의 감각까지 전부?

꿈이라면 정말 지독한 악몽이다. 수도에 온 첫날부터 끝장나 버리는 제 미래를 보고 만 것이니까.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자세하고 현실적이었어…….’

꿈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무어라 생각하면 될까. 유더의 마음속에서 격렬한 폭풍이 일었다.

누군가 자신을 11년 전으로 되돌리는 마법을 쓴 것일까? 아니면 제 죽음을 불쌍히 여긴 신의 권능?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그 어떤 힘을 가진 초월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은 그의 종속들을 통해 종종 그의 권능을 보여주곤 했지만, 그중에 누군가를 죽음에서 구해내 과거로 보냈다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11년 전으로 돌아왔다면, 유더에게는 후회했던 일들을 돌이킬 수 있는 많은 기회가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래, 미래!

제가 영영 잃은 줄 알았던 것. 그것을 깨달은 순간 환희와 놀라움으로 손이 떨렸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이 나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힘을 빠르게 키우는 것도, 심지어는 그 지긋지긋한 마병단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그냥 안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어쩌면 세계 변화의 원인을 제대로 알아내 막을 수도 있겠지.’

그래. 마병단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유더는 제가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일들을 떠올렸다.

몇 년 뒤 이 세계에 서서히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후가 변하고 재앙이라 할 만한 자연재해가 몰아치는 것을 시작으로 신의 권능이 점차 자리를 감춘다.

이전에는 없었던 것들이 나타나며 사람들 사이에 맴돌게 될 기이한 광기와 불신. 그 외에도 일어날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유더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살아서 이 세계에 존재했다. 그들에게 말하고 미리 도움을 청한다면…….

‘아니……. 잠깐.’

바쁘게 달려가던 생각이 잠시 멈추었다. 유더는 고개를 저으며 제 생각에 허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전의 유더는 제국의 마병단장으로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과 권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갓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 애송이일 뿐이었다. 그런 이의 말을 과연 누가 들어주려 할까?

‘절대로 안 들어주겠지.’

마병단은 오르 제국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제도였다. 전대 황제 아니, 지금은 현 황제로 있을 이가 각성자들에게 꽤나 유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녔다 한들 이곳보다 더한 대접을 받기는 어느 나라에 가도 어렵다는 소리였다.

마병단이 설립된 뒤 효과를 반신반의했던 다른 나라들은 몇 년이 지나서야 각성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권력과 지위를 주고 부려먹는 것이 무조건 억압하는 쪽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게 비슷한 단체들을 창설했지만 때가 늦어 나라 지도층과 각성자들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골이 생긴 곳들도 있었다.

그런 나라들은 뒤늦게 만든 단체조차 제대로 굴리지 못해 내전의 길로 접어들고는 했다.

때문에 오르 제국의 마병단은 그와 비슷한 어느 단체보다도 강력한 위상과 유명세를 자랑했다.

그곳의 단장인 유더 또한 어디를 가든 언제나 선망과 질시의 시선 속에 있었다…….

과거를 떠올리던 유더는 잠시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그 시절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이곳 이상 좋은 곳은 없어…….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도움을 얻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들도 여기에 제일 많이 있고.’

유더는 제 몸을 맴도는 힘의 크기가 정확히 13년 전 막 각성했던 때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정도 힘으로도 일반 백성들은 꿈도 꾸지 못할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오래도록 한길만 파온 진주탑의 대마법사들에게는 아직 비할 바가 아니었다.

힘이 강한 이들일수록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건 그렇게 살아 본 유더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당장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재앙과 그 원인을 찾아서 막자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과 지위가 필요했다.

‘그래. 일단 마병단에는 들어가자. 다른 건 어느 정도 조건을 만든 뒤부터 시작해도 되겠지.’

유더는 빠르게 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전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로 했다. 지닌 힘의 크기가 줄어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평민으로 돌아온 것은 그에게 장애가 될 조건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을 되찾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끔찍했던 미래로부터 돌아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유더는 제가 기억하는 정보를 정리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 밤낮을 잊고 여관방에 틀어박혀 보냈다.

그가 방 밖으로 나간 것은 11년 전의 과거로 돌아왔음을 깨닫게 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의 아침이었다.

“이봐, 새로 투숙했다는 손님. 여관 주인이 그러던데 당신도 ‘힘’을 가지고 있다며?”

얼굴을 씻기 위해 내려가던 도중, 누군가 유더의 뒤에서 말을 걸었다.

“황궁에서 열릴 시험을 치려고 온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정보를 공유할 동료가 있으면 편하잖아? 우리 통성명 좀 할까?”

고개를 돌린 유더는 저도 모르게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아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지금이 아니라 과거에 말이다.

남부 출신다운 붉은 머리칼과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 마치 장미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생김새가 눈에 띄었다.

몰락했다고는 해도 과거에는 꽤 이름을 날렸던 가문 출신인 덕분에, 유더와 함께 마병단에 합격했던 이들 중에서도 빠르게 유명 인사가 되었던 남자.

제법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마병단에 들어와 1년이 막 지났을 때쯤 몬스터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다가 그만 사고로 죽고 말았다. 아까운 인재가 일찍 죽었다고 말이 많았었다…….

“나는 가케인 볼룬발트. 너는?”

그래. 그런 이름이었었지. 유더는 되살아난 기억 속에서처럼 싱싱하게 빛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더.”

“좋아, 유더. 나는 이제부터 아침을 먹을 생각인데 너는?”

내가 예전에도 가케인과 이곳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던가? 유더는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11년이나 된 일이라 흐릿했지만 분명 그때는 그와 마주친 적이…….

‘아. 있기는 했었지.’

마병단 시험을 준비하며 방 안에 있었을 때 찾아온 그가 한 번 지금과 비슷한 말을 하며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유더는 쓸데없이 접근해 오는 타인과 말을 섞은 경험이 거의 없어 단칼에 거절했고, 가케인은 무안해하며 돌아갔다. 그 후에는 그가 죽을 때까지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그때는 언제 곧 집에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슨 꿍꿍이를 지녔을지 모르는 타인을 대하는 것이 싫었다.

난생처음 본 거대한 수도는 조용한 산속에서 혼자 살던 유더에게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불쾌함과 경계심만 잔뜩 안겨 주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 다시 보니 가케인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듣고 성이 없는 평민임을 알았을 텐데도 꺼리는 티를 내지 않는 것도 그렇고, 성을 물려받을 정도의 가문 출신인 자가 이렇게 낡고 후미진 여관에 자진해서 묵는 것부터 흔한 일은 아니었다.

11년 전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저 녀석이 가진 능력이 뭐였지. 꽤 괜찮은 능력이었던 인상만 남아 있고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

“좋아.”

유더는 가케인과 함께 식사를 하며 그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과거로 돌아온 후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지금은 흐릿하기만 한 과거의 기억도 좀 더 살아날 것이다.

“나는 닭고기 스튜와 빵을 시킬 생각인데, 너는?”

유더의 나이를 모를 텐데도 가케인은 스스럼없이 반말을 했다. 언제나 제 앞에서 주눅이 들어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익숙해져 있던 유더는 그의 그런 태도에 꽤 신선한 감명을 받았다.

“나도 같은 것으로.”

“좋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여기 주문 받아요!”

가케인이 주문한 메뉴는 그의 장담만큼 꽤 괜찮은 맛을 자랑했다. 이렇게 낡은 여관에서 어떤 재료를 써서 만들었는지도 모를 요리인데 제법 맛이 있었다.

“어때? 맛있지?”

가케인이 쾌활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유더는 스튜를 떠 입에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곳 메뉴를 다 먹어 봤지만 이 조합이 제일 낫거든. 고기도 많이 넣어 주고 빵도 매일 아침 직접 구워서 쫄깃하다고. 동지를 만나서 기쁘군그래.”

뭔가가 먹을 만하다는 생각은 아주 오랜만에 했다. 낯선 기분이었다.

“나는 남부 울란 출신이야. 이곳에는 일주일 전에 왔지. 시험을 보러 가기 전까지 아는 사람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되었는데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 생각해.”

가케인은 사교성이 상당히 좋았다. 먼저 출신지를 말한 뒤 유더에게도 답을 바라는 초록색 눈동자를 보니 입을 다물고 있기가 부담스러웠다.

“나는… 중부에서.”

“중부? 어디? 퀀? 벨렉? 아니면…….”

“아이리크.”

유더는 실로 오랜만에 고향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가 과거처럼 마병단에 합격한다면 받게 될 성 ‘아일’은 고향의 지명을 딴 것이었다.

300명이 넘는 합격자 중 성이 없는 합격자들에게는 모두 성을 하사했는데, 그러다 보니 대부분 작명에 성의가 없었다. 이후 마병단장이 될 때 원래 이름과 비슷하도록 신경을 써서 짓고 하사받은 ‘유드레인’ 쪽과는 정성의 깊이가 달랐다.

‘이번에는 마병단장이 될 일이 없을 테니 그 이름을 다시 받을 일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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