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화 (1/805)

1화

“죄인, 유드레인 아일은 들으라.”

머리 위에서 추상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인은 마병단장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잊고 감히 세계를 위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으로 역모를 꾀하였고, 또한 금지된 성역에 침범하여 세계구를 훔치려 했다. 9년 전 일어난 전 펠레타 공작 살해사건, 7년 전 일어난 진주의 탑 괴멸 사고와 5년 전 일어난 붉은 들판 폭동, 그 외에도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건과 연관되고도 입을 다물다 진실이 드러나자 뻔뻔히 타국과 손을 잡고 도주를 시도한 것을 인정하는가?”

유더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줄줄이 늘어놓으니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만한 대단한 죄인이다.

이미 정해진 답을 읊고 있을 뿐인데 진실을 알고 싶은 이가 과연 이곳에 존재하기는 하는가?

어차피 그들이 믿고 싶은 것은 세상이 곧 존속위기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현실이 아니라, 천한 평민 출신의 반쪽짜리 오메가가 감히 역모를 꾀하려 했으니 죽이면 모두 해결된다는 믿음일 뿐이었다.

그동안 유더는 몇 년이나 세상을 떠돌며 제 말을 제대로 듣고 믿어 줄 사람을 찾으려 했다. 아주 많은 징조들이 이 세상에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유더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는데,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괴팍하고 날카로운 성격에, 가족도 인맥도 없이 외부로 떠돌기만을 반복한 유더는 미쳤다는 평을 받으며 철저히 고립되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는 혼자였다.

차라리 옆 제국에서 오라고 했을 때 정말 갔다면 이런 꼴은 겪지 않았을까. 유더는 하나 남은 눈을 움직여 멀리 위치한 단상 위 옥좌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 비친 황제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한때는 대신들 대신 유더만을 의지한다 속삭이며 공개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주문했던 황제는 유더가 붙잡히자 그를 외면했다.

대신 옥좌 곁에는 한 남자가 붉은 마정석을 박은 검은 가시나무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지팡이는 유더의 것이었다. 그가 입은 마병단장 제복도, 옥좌 바로 옆에 설 수 있는 권한도 모두 유더의 것이었다.

한때 그는 유더의 아랫사람이었다. 예전에는 유더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이가 지금은 그의 자리를 빼앗았다. 지팡이를 든 태도가 사뭇 당당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대의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었다. 언제 죽어도 후회 따윈 없을 줄 알았는데 정작 죽음 앞에 서니 그렇지 않았다. 많은 것들이 뒤섞여 머릿속에서 마구 소용돌이쳤다.

저를 지탱해 온 고집과 자존심.

아직 해야만 하는 수많은 일들.

답을 찾지 못한 문제.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

제가 없어진 뒤의 미래.

그리고…… 그간 억지로 억눌러 왔던 누군가의 얼굴.

“…….”

“역사상 죄인과 같이 간악한 이는 여태 없었다. 죄인은 황제 폐하의 신뢰, 나아가 제국민 전체를 이용하려 하는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명예와 책임을 모르는 자를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올렸다는 충격으로 병을 얻으셨다. 그리하여 그 죄의 무게에 걸맞은 처벌로 사형에 처하니, 오늘 이 자리에서 참수형을 집행하노라. 관대하신 황제 폐하께 영원한 축복을! 이상!”

와아아. 꽃잎이 날리며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유더는 병사들의 팔에 끌려 드높은 제단 위에 올랐다.

대역죄인을 처벌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그 제단 위에는 목이 잘리는 광경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만든 거대한 단두대가 새파란 칼날을 빛내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 고문으로 인해 다진 고기처럼 으스러진 몸이 힘없이 칼날 아래 내동댕이쳐졌다. 마나홀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언제나 지고지순한 기운에 감싸여 느낄 일이 거의 없었던 생경한 고통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엄습해 왔다. 유더는 눈앞이 희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헐떡였다.

보통 사형을 당하는 죄인에게는 유언을 남길 기회를 주지만 유더에게는 당연히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유더는 마지막으로 눈이 시릴 만큼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피눈물을 흘릴 만큼 억울해야 할 것 같은데,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곧 이 지긋지긋한 모든 일에서 해방될 수 있다 생각하면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했다.

그래, 곧 죽어 사라질 자가 미래를 걱정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피맺힌 경고를 듣지 않은 것은 저들이지 유더가 아니었다.

아, 그렇군. 나는 사실 지쳐 있었던 거야…….

깨닫는 순간 머리 위에서 칼날이 떨어졌다.

죽음은 달콤하지도, 그렇다고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 * *

유더는 오르 제국 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한 후 조부 아래서 자랐지만 조부도 그가 13살일 때 세상을 떠났고, 이후는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지며 나무와 약초를 캐다 팔며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런 삶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18세 때, 어느 날 하늘에서 거대한 붉은 돌 하나가 떨어져 세상 전체를 놀라게 한 이후부터였다.

천만다행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오르 제국 중부의 산맥 한가운데 떨어진 그 돌은 순식간에 땅 전체를 뒤집고 세상을 기이한 기운으로 가득 채웠다.

그날 이후부터 평범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이상한 힘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칼 한 번 잡은 적 없는 아이가 나뭇가지 하나로 바위를 가르기도 했고, 평범했던 마을 처녀가 마을을 덮치려 했던 몬스터 전체를 손가락 하나로 전부 죽이기도 했다.

그 모든 힘의 기반에는 붉은 돌이 떨어지며 세상을 새롭게 채운 기이한 기운이 있었다.

그 상황을 무어라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세상을 새로 채운 기운을 마나의 일종이라 믿기로 했다.

이전까지의 세상에도 마나라는 것은 존재했었다. 단지 그때는 극소수의 선택받은 재능을 지닌 이들만이 아주 오랫동안 수련해야만 그것을 느끼고 쓸 수 있었다는 차이가 존재했을 뿐이었다.

탑에 소속되어 몇십 년간 연구만 한 마법사나, 고된 훈련 끝에 검기를 쓸 수 있게 된 기사 등이 바로 그 극소수에 해당했다.

하지만 새로이 힘을 각성한 이들은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제가 가진 능력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았다. 태어나서부터 손과 발을 처음부터 쓸 수 있었던 것처럼 그 힘 또한 그러했다.

그저 힘을 각성한 것만으로도 처음부터 강력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로 인해 이전까지 천 년이 넘게 변화 없이 흘러갔던 세상의 구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권력과 힘을 틀어쥐고 있던 이들과 새로이 힘을 지닌 이들 사이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맴돌았다.

시간이 흘러 힘을 가진 이가 특정 조건을 채울 시, 처음 각성한 수준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긴장감은 날로 더해만 갔다.

각국의 권력자들은 새로이 힘을 가지게 된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유더가 살고 있었던 오르 제국은 일찍이 전국에 공고를 내어 힘을 지닌 이들을 끌어모아 새로운 단체를 만들겠다는 선택을 한 곳이었다.

[힘을 지닌 이들이여, 누구든 황궁이 있는 수도로 오라. 그대가 지닌 힘이 진실함을 증명하고 오직 나라와 황제를 위해 그 힘을 쓸 것을 맹세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마병단에 들어올 자격이 주어지리라!]

그 소문은 날개가 뻗친 듯 날아 순식간에 모든 곳에 퍼졌다. 심지어는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홀로 살던 유더조차 알 수 있을 만큼.

붉은 돌이 떨어진 이후 이상한 힘을 얻은 이 중에는 유더도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도끼를 쓰지 않고도 나무를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발을 적시지 않고도 시내를 건널 수 있었다. 장작이 없이도 난로에 불을 지필 수 있었고, 맹수나 몬스터를 피하지 않고 손가락 하나로 돌을 움직여 그것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을 굳이 남에게 보일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평생 할아버지와 살았던 작은 오두막에서 홀로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시장에 나무를 팔러 갔다 들은 소식에 갑자기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황궁에서 힘을 지닌 자들을 모은다니. 평범한 평민은 꿈도 꾸지 못할 기회였다.

할아버지는 유언으로 욕심을 내지 말고 살라는 말을 남겼으나, 그때의 유더는 아직 어렸다. 소년티를 벗지 못한 그에게 그 공고는 빛나는 성공과 가슴 뛰는 모험의 기회처럼 보였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그리고 제가 그런 것들과는 그다지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것도 아직 몰랐던 시절이었다.

유더는 짐을 챙겨 집을 떠났다. 만약 그가 그 마병단이란 곳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그냥 곧바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난생처음 밟아본 수도에서 힘들게 구한 가장 허름한 숙소.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주제에 거인의 잠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그 숙소에서, 분명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었을 유더는 다시 눈을 떴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때가 탈 대로 타 더러운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안에 보이는 모습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유더는 거울 속에 보이는 제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 음침하게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 잘렸을 목은 실금 하나 없이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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