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14/16)

Chapter 2.

사월의 봄 직원들의 휴가 첫날. 사월은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야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팔을 뻗었다. 부드러운 시트가 손바닥에 닿았다. 아무리 더듬대도 뜨끈한 체온은 느껴지지 않는다. 새벽녘에 들어와 옆에 눕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벌써 나간 건가.

“엄청 바쁜가 보네.”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사월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몸을 세웠다. 머리맡에 나뒹구는 휴대폰을 들었다. 이미 여러 개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발신인은 대부분 지현이었다. 하지만 사월은 몇 시간 전 원재에게 온 연락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

일어났어? 나갈 준비 해도 세상모르고 잘 자더라.

사월은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느릿하게 답장을 써 넣었다.

방금. 회사 갔어?

원래는 잠귀도 밝고 푹 잠들지도 못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게 싹 사라졌다. 사월은 그게 원재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삶 깊은 곳에 번져 들어와, 지워지지 않았다. 살결 위에 남은 잉크 자국처럼. 사월은 습관처럼 손목 위에 새겨진 네임을 매만졌다.

바쁜 건지 답장이 너무 늦은 탓이었는지. 원재는 아직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사월은 그 바로 아래 있는 직원들 단체 방에 들어갔다.

(사진) 공항 출발~ 다들 휴가 잘 보내세요~

(사진) (사진) 제주도 도착!!

(사진) 우리 숙소 뷰 보소. 거의 하와이

(사진) (사진) 날씨 개쩌러요!! 다들 집에 있지 말구 밖으로 나가욧!

제법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사진과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찍은 셀카들이었다. 사월은 작게 웃으며 손가락을 옆으로 밀었다. 제하는 뭘 하는지 ‘와’, ‘좋다’ 따위의 짧은 리액션만 남겼다.

조심히 놀다 와.

사월은 키패드를 꾹꾹 눌러 글자를 완성했다.

감귤 초콜릿 사 갈게요♥

두 사람은 휴대폰만 쥐고 있는 건지 금세 대화를 띄웠다. 사월은 귀여운 대화를 지켜보다 몸을 일으켰다.

휴가는 앞으로 일주일이었다. 원재가 흘러가듯 휴가를 같이 보내자는 말을 하긴 했었지만. 지금 상황으론 잠깐 시간 빼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원재가 없는 휴일. 사월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뭐 하지.”

예전엔 뭘 하고 살았었지. 사월은 원재를 만나기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쉬는 날도 딱히 없고, 취미랄 것도 없었으니. 그냥 그림이나 끄적댔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일도 꼭 해 보고 싶은 일도 없었고. 그게 공허한 건지도 몰랐다. 비교할 행복한 기억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행복을 조금은 알 듯도 했기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응. 일찍 갈게.

“……회사나 가 볼까.”

원재에게 답장이 온 뒤에야 목적지가 설정됐다. 사월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날씨도 좋다고 하니까 씻고 천천히 산책 삼아 가 봐야지.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려 댔다.

원재가 없는 휴가의 첫날. 사월이 정한 목적지는 원재가 있을 그의 회사였다.

가는 길에 목이 말라 커피를 한 잔 사 들고 계속 걸었다. 플라스틱 컵 안을 가득 채웠던 얼음이 녹아 부대끼며 덜그럭 소리를 냈다. 원재의 회사로 향하는 길은 익숙하면서 또 낯설었다. 차를 타고 오갈 때와는 확연히 달랐으니까.

매장에서 틀어 둔 음악과 통화하며 지나치는 사람들. 빵빵 경적을 울리는 소음. 여러 소리가 뒤섞였다. 사월은 거리의 풍경을 구경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던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어느덧 시야에 익숙한 건물이 잡히기 시작했다. 신호등 한 개만 건너면 입구였다. 사월은 빨간불이 켜진 건널목 앞에 섰다. 무감하던 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크게 뜨였다. 건너편에 줄지어 세워진 차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인영이 익숙한 탓이었다.

“어디 가나.”

사월이 혼자 중얼대며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손길은 다급했다. 이대로 놓칠까, 서둘러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통화 목록 가장 위에 있는 번호를 누르려던 손이 멈칫했다.

시야에 들어찬 원재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는 사월의 앞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겨진 미간과 날카로운 눈매가 위압적이었다. 그의 뒤에 선 남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원재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건지 짧게 말을 던지고 나서 곧장 뒷좌석에 올랐다.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사월이 있는 이곳까지 전해졌다.

액정이 까맣게 변할 때까지, 검은 차 여러 대가 나란히 출발할 때까지. 사월은 멍하니 서 있었다.

“…….”

타이밍이 좀 안 좋았나. 너무 바빠 보이는데.

예민하던 원재의 얼굴이 잔상처럼 머리에 남았다. 사월은 머뭇대다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역시 말을 안 하고 오는 게 아니었어. 그냥 집에서 조용히 기다려야겠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모든 사람이 앞으로 향할 때, 사월은 몸을 돌리고 왔던 길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음은 어느새 녹아 손톱만 한 크기로 줄어 있었다.

예정에 없던 운동을 한 기분이었다. 두 시간을 넘게 걸었더니 종아리쯤이 뻐근했다. 씻고 나온 사월은 소파에 두 다리를 올리고 꾹꾹 지압하듯 눌러 댔다.

밖은 벌써 어둑해졌다. 조용한 집 안을 느릿하게 훑은 시선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진동을 울리는 휴대폰 액정에 원재의 이름이 떴다.

“응.”

―사월아. 밥 먹었어?

“아직. 이제 먹으려고.”

사월은 귀에 휴대폰을 댄 채로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걸음으로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냉장고를 열자 평일에 다녀가는 이모님이 해 두신 음식이 보였다. 사월이 좋아하는 불고기는 데우기 좋게 소분까지 되어 있었다.

가끔 마주치는 이모의 눈에 마른 사월은 걱정거리였다. ‘키는 큰 게 말라 가지고, 같이 사는 사장님만 좋은 거 먹고 다니니?’ 매번 하는 말이 그거였다.

―점심엔 뭐 먹었는데?

“……불고기.”

사월은 소분된 고기를 꺼내 냄비에 담았다. 커피 한 잔 먹은 게 다였지만 굳이 얘기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뭐 먹게.

“불고기.”

전화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꼭 불고기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은 듯한 대답 때문이겠지.

―맛있겠네. 잘 챙겨 먹어.

이러니까 이모님이 불고기만 줄기차게 해 두시지. 누군가의 보살핌에 익숙하지 않은 사월이 타인의 호의를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꽤 있었다. 원재는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그래도 남은 휴가를 같이 보내려면 오늘내일 사이에 일을 확실히 정리해야 했다.

“……바빠?”

―조금. 오늘은 뭐 했어? 휴가 첫날인데.

사월은 열이 올라 치익 소리를 내는 냄비를 내려다봤다. 불고기를 뒤적대는 손길이 느릿해졌다. 전화 반대편에선 고요한 숨소리만 넘어왔다.

“산책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사월은 감흥 없이 일과를 전했다. 회사 앞까지 찾아갔었다는 말은 꾹 삼켰다. 원재는 단정한 음성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냥 쉬었어.”

마침표를 찍는 사이에도 전화 너머가 요란해졌다. 여러 명의 기척이 뒤엉켰고, 그 사이에 원재를 부르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월은 전화를 끊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맛있는 냄새가 코끝에 스쳐도 입맛이 돌 기미는 없었다.

“너 찾나 본데.”

―그러네. 오늘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고기를 휘적거리던 젓가락질이 딱 멈추었다. 내일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움에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른 정리하고 갈게.

“……그래, 알겠어.”

―잘 자.

급해 보이는 상황임에도 원재는 먼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느긋한 어투로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잘 자라는 말을 들어 봤자 원재 없이는 그러지 못할 것을 알기에 사월은 알겠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불고기가 익어 가는 소리만 작게 들릴 뿐. 식사를 거를까 생각했던 사월은 꽤 정성스럽게 식탁을 채우기 시작했다. 밥을 잘 챙겨 먹으라던 원재의 부탁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

원재는 피곤한 눈두덩을 꾹 눌렀다. 열이 오른 채라 손끝이 닿는 곳이 전부 뜨끈했다. 생각지도 못한 날파리가 사월의 봄에 기웃거린 탓에 일정이 틀어져 버렸다. 공사 방해하러 알짱대는 거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지들이 모시던 형님이랑 똑같이 멍청한 모양인지, 겁도 없이 사월의 가게로 움직였다.

서로 귀찮게 왜 그랬나 모르겠네. 원재는 오랜만에 몸을 써서 뻐근한 목을 양쪽으로 기울였다. 답지 않게 흥분해서 옷 이곳저곳에 피가 튀었다. 찝찝하다는 핑계로 집에 들러 씻고 옷을 갈아입을 셈이었다.

부러 그랬냐는 최 비서의 의심 어린 눈초리가 따라붙었지만, 그런 걸 계산할 여유도 없었다.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 환한 곳에 가게를 마련했어도 불안은 가시질 않아 제하를 심어 둔 거였다. 아마 손을 놓고 있었다면 사월은 또다시 해를 입었을 터였다. 저번처럼 위협당했을 사월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거 같네.”

“예?”

원재는 고개를 젓더니 귀찮은 듯 손을 휘휘 흔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월을 빌미로 고작 구역 몇 개를 따먹으려 했다던 같잖은 수법. 성원재가 호구 다 됐다는 소문이 얼마나 퍼졌으면 그딴 날파리들이 달라붙었지.

열이 오른 눈을 감자마자 진동이 울렸다. 어두운 차 안에 최 비서 이름이 뜬 액정이 빛을 냈다.

“어.”

―아직 가는 중?

“거의 도착. 공사장 정리는?”

제하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던 어제. 원재는 관할 공사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요 근래 공사장 주변을 배회하면서 인부들 겁주고 작업을 방해한다던 것들 면상이나 좀 보려고. 무시하려 했지만 계속해서 얼쩡대길래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던 차였으니까.

―싹 다 처박아 놨어. 같은 집 애들이라 사이좋게 한 방에.

“아―.”

근데 그게 자신의 시선을 교란하려던 얄팍한 수법이었을 줄이야. 너무 유치해서 기분이 다 좆같을 지경이었다.

―멋 모르는 애들 같긴 한데……. 공사도 지연됐던 거 생각하면 또 곱게 보낼 순 없겠고.

“말로 하지 마.”

―어?

원재는 혀로 볼 안을 느릿하게 훑었다.

“일에 손 뗐다고 해서 정신을 차린 건 아닌데. 잘 모르는 거 같아서.”

아직은 말보다 몸을 쓰는 쪽이 편했고, 수가 틀리면 법보다 빠르게 처리할 자신만의 방법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이 아예 발을 빼지 않으면 사월은 내내 누군가의 먹잇감이 될 것이었다. 나이트를 관리하면서도 척을 진 게 한두 무리가 아니었으니.

그래서 겨우 정신 차린 척, 사람 된 척 살고 있는데. 이렇게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다.

―무슨 소린지 알겠어.

최 비서는 눈치 빠르게 원재의 행간을 읽어 냈다.

“씻고 잠깐 눈 붙이고 갈게. 형도 다녀와.”

―알겠어.

전화를 끊고 나니 익숙한 곳에 차가 멈췄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최 비서가 시킨 짓임이 분명했다. 혼자 보내면 한도 없이 집에 붙어 있다 올까 걱정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그래.”

평소 같았다면 돌려보냈을 원재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새벽 공기는 꽤 쌀쌀했다. 옅은 입김이 입술 앞으로 퍼졌다. 원재는 잠깐 담배 생각이 나 주머니를 더듬대다 이내 손을 뗐다. 이건 사월을 보고 나가는 길에 해도 늦지 않았으니까.

익숙한 8자리 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집 안은 고요했다. 사월의 깔끔한 성격답게 흐트러진 곳 하나 없었다. 꼭 아무도 들르지 않은 집처럼.

원재는 조금 이상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느꼈다. 쿠웅― 쿠웅. 깊고 무겁고. 비이상적으로 뛰어 댔다.

얌전하게 닫힌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불 사이로 뒤척임 없이 누워 있는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웃기게도 그제야 비로소 쿵쿵, 심장이 일정하게 움직였다.

“잘 자네.”

원재는 침대가에 서서 평온해 보이는 사월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두 시간을 전부 털어 자는 모습을 눈에 담기만 해도 피곤이 전부 사라질 것 같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뺨에 손을 대려다, 꽤 지저분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다. 원재는 급하게 몸을 틀었다. 곧장 욕실로 향했다.

머리까지 말리고 나온 원재는 이불 끄트머리를 살짝 걷어 몸을 뉘었다. 꽤 오랜 시간 잠들었던 건지 얇은 이불 속엔 온기가 맴돌았다. 사월이 깨지 않게 조심히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베개 밑으로 팔을 넣고 허리를 당기자 가슴팍에 꽤 단단한 사월의 윤곽이 느껴졌다.

“아, 좀 살겠네.”

요즘은 깨어 있는 것보다 이렇게 잠든 모습을 더 많이 봤었다. 까만 눈을 마주하는 게 훨씬 좋긴 하지만. 경계 없이 잠든 모습을 보면 느낌이 또 달랐다.

“후우…….”

자는 건 또 왜 이렇게 예뻐 가지고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지. 미간을 찌푸린 원재는 흐트러진 가운 사이로 익숙하게 손을 밀어 넣었다.

사실 침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아래가 뻐근했다. 잠든 사월에게서 저와 같은 향이 느껴지자 흥분은 속도를 더했다. 원재는 배에 바짝 붙을 만큼 선 성기를 느릿하게 쥐었다. 이미 단단하게 선 기둥은 핏줄의 윤곽마저 여실했다. 얇은 살결을 스치는 지문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느껴졌다.

“아.”

어두운 방 안. 간접 등 하나에 겨우 의존한 원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얌전히 감긴 눈. 기다란 속눈썹. 하얀 살결 위에 피어 있는 검은 꽃. 툭 불거진 뼈들. 사월의 모든 게 원재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탁탁, 기둥을 위아래로 쓸어 대는 손길이 조금 더 빨라졌다. 귀두 끝이 조금씩 젖어 가기 시작했다. 원재는 급하게 고개를 기울여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사월이 깰까 봐 혀도 내지 못하고, 그저 숨만 깊게 들이마실 뿐이었다. 사월의 살 냄새를 담는 호흡이 깊어지고, 원재의 등 또한 크게 오르내렸다.

고요한 밤. 그에 어울리는 물기 어린 소리가 침대 위를 가득 채웠다. 원재는 이를 억세게 물었다. 턱에 바짝 선 근육이 단단해졌다.

“하아, 사월아…….”

요 며칠 사월을 떠올리면 갈증이 먼저 느껴졌다. 매일 끼고 살았던 탓에 잦은 부재가 버거운 건 원재도 마찬가지였다. 온 정신과 신경을 앗아 간 사월이 곁에서 숨 쉬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발정 이유는 꽤 타당했다.

원재는 얼얼하기까지 한 아래를 쓸어 대며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가운에 가려진 귀두가 사월의 골반쯤을 쿡쿡 눌렀다. 옆에서 자위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사월은 평온하고 고른 숨을 내쉴 뿐이었다.

“으, 읏.”

사월의 목 아래 둔 팔을 빼서 머리맡에 구부렸다. 잠든 이를 완전히 품에 두고 내려다보는 모양새였다. 팔꿈치로 상체를 버티고 선 채, 눈동자로 하얀 얼굴 곳곳을 더듬거렸다. 원재의 형형한 시선은 음습하고 끈적했다.

뜨거운 숨결이 닿아 간지러웠는지 사월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입술이 몇 번 오물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원재는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는 손을 빠르게 흔들어 댔다.

겨우 얇은 가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월의 하체와 원재의 좆이 몇 번이고 맞부딪쳤다. 그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터졌다. 저릿한 쾌감이 허리 아래를 휘감더니 툭, 정액이 터졌다. 좆을 쥐고 있는 엄지와 검지 위로 뜨끈한 감각이 늘어졌다.

“후.”

가운이 겨우 걸쳐진 원재의 너른 어깨가 오르내렸다. 남은 흥분을 털어 내듯 크고 빠르게. 나른하게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리자, 사월의 이마와 가볍게 맞닿았다. 원재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굴곡진 콧대와 입술을 훑으면서는 잠깐 고민도 했다.

깨울까. 그러다가도 어차피 자신은 곧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차라리 잠들어 있을 때 나가는 게 마음이 편했다. 사월도 아마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원재는 가운에 손을 슥슥 닦고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들춰 보니 다행스럽게도 가운만 축축할 뿐 시트는 멀쩡했다. 더 발정이라도 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원재는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도 않은 다리를 침대 밖으로 뻗었다.

정액으로 엉망이 된 가운을 벗어 던진 원재는 다시 샤워기 아래에 섰다. 쏟아지는 찬물을 고스란히 맞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더 있다간 자는 애를 깨워서 일을 치를지도 몰랐다. 당장이라도 이불을 거둬 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거칠게 숨을 뱉었다.

“씨팔, 앞에 두고도…….”

눈을 감아도 앞에 사월이 아른댔다. 이거 진짜 중증 아닌가. 사월이를 몰랐던 때에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거지? 정말 기억도 나지 않는 지난 시간을 가늠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아래가 다시 빳빳하게 고개를 든 탓이었다.

원재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에야 욕실에서 나왔다. 정신없이 던져두었던 가운도 치워 놓았다. 그러곤 드레스 룸으로 가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었다. 시계까지 찬 뒤, 사월이 잠든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같은 공간임에도 사월이 있는 곳은 공기마저 특별했다. 차지도 덥지도 않고,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드는 이상한 공기.

“잘 자, 사월아.”

허리를 숙인 원재가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췄다. 혼자만의 인사를 건넨 원재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현관 밖으로 나갔다.

사월은 무슨 꿈을 꾸는지 뒤척임 한 번 없이 새벽을 지새웠다. 둘의 휴가 첫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

휴가 둘째 날이 되었다. 사월은 눈을 뜨지도 않고 팔을 뻗었다. 새벽 사이 혹시라도 올까 했는데. 역시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온기 없는 시트 위를 만지작대는 손길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예 못 들어왔나.”

바쁠 시기임은 알고 있지만, 잠을 잘 시간도 없는 건 너무하지 않나. 매번 과보호에 가깝게 자신을 챙기면서 정작 쉬지도 못하는 원재를 떠올리니 마음이 조금 아팠다. 저번에 봤을 때 살이 좀 빠진 듯하던데. 입술도 텄던 거 같았지? 며칠을 못 보았는데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원재의 얼굴을 하나하나 되뇌었다.

“생각하니까 보고 싶네…….”

사월은 베개 위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겨우 몸을 일으키고 휴가 둘째 날 아침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일과는 어제와 똑같았다. 쌓여 있는 지현과 원재의 메시지에 답장하고, 침실을 정리하는 것.

다른 게 있다면 오늘은 조금 특별한 하루를 보내 볼 생각이었다. 보아하니 원재가 오늘 사이로 오기는 무리가 있어 보였고, 온다고 하더라도 피곤하게 밤을 새운 이는 푹 쉬게 두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전에 지현이 혼자 해 보면 좋을 것들을 추천해 준 적이 있었다. 휴일도 제대로 못 즐기고, 항상 원재와 함께 다니는 사월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리란 게 이유였다. 사월은 휴대폰을 뒤져 한참 전에 왔던 메시지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1. 혼자 영화관 가기. ★팝콘은 치즈 반 캐러멜 반★

영화관이 근처에 있나. 사월은 어색한 손길로 주변에 있는 영화관을 검색했다. 10분도 걸리지 않는 위치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맞이하는 휴가의 두 번째 날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영화관은 원재와 몇 번 와 본 적은 있는데, 혼자서 온 건 처음이었다. 표를 끊는 일도 영화를 고르는 일도 사월 혼자서 하기엔 어려운 것투성이였다. 대충 포스터만 보고 액션 영화 같은 걸 고르고 나니, 상영 시간까진 10분도 남지 않았다.

7관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은 사월이 주변을 둘러봤다.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커다란 팝콘 박스를 안고 있었다.

저렇게 큰 걸 혼자 먹을 수 있나. 사월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심지어 무슨 맛을 반반으로 먹으라고 했는데…….

아침인 탓에 별로 배도 고프지 않고, 시간도 없다는 핑계를 만들어 냈다. 나중에 지현이랑 제하랑 같이 와서 먹으면 되지. 사월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매점을 그냥 지나쳐 갔다.

▶│ 나 영화관 왔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는 원재에게 보낼 메시지를 써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보냈던 연락은 아직 읽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행적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애써 채웠던 글을 다 지워 버렸다. 괜히 바쁜 사람한테 연락 많이 해 봤자 불편할 테니까. 사월은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욕심도 없던 평범한 일상 속에 녹아들어 갔다. 다른 또래들에게는 지겨우리만치 흔한 일일지도 몰랐지만. 작게 두근대는 가슴을 숨기며 사월은 크게 호흡을 뱉었다.

“7관 <헌터 더즌> 입장 도와드리겠습니다.”

일전에 와 봤던 경험을 떠올렸다. 표를 보여 주고 적힌 좌석을 찾아가 앉았다. 어색하긴 해도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평범한 삶이라는 것은.

넓은 극장에 사람은 몇 없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시간에 맞춰 시작했다. 원재에게 혹시라도 연락이 올까 휴대폰은 손에 꼭 쥔 채였다.

2. 혼밥하기. 추천 메뉴 <햄버거>

3. 쇼핑. ★포인트★ 꼭 안 사도 됨. 아이 쇼핑 꿀잼임.

두 시간에 달하는 영화를 보고 나니 허기가 졌다.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수제 버거집에서 세트 메뉴를 해치웠다. 아마 원재가 있었다면 먹지 못했을 메뉴였지만.

혼자 밥을 먹고 백화점 근처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꽃집도 지나치고 옷가게도 지나쳤다. 그냥 보기만 해도 쇼핑이랬으니까. 어설프기 그지없는 아이 쇼핑이라는 것도 모른 채 사월은 꽤 뿌듯해했다.

4. 감성 카페 가기. 추천 메뉴 <얼.죽.아>

마지막이 가장 쉬웠다. 카페는 혼자더라도 꽤 자주 들렀던 곳이니까. 복잡하던 번화가를 벗어나자 작은 카페가 보였다. 전면이 유리라 그런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인테리어가 사월의 봄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사월은 고민 없이 카페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

존댓말은 아직 입에 잘 붙지도 않고 어색했다. 해서 사월은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할 때면 대부분 말끝을 흐렸다. 서늘한 인상에 짧은 말꼬리가 더 위압감을 준다는 건 아마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때 쥐고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현이었다. 원재의 연락일 줄 알았는데. 사월의 얼굴에는 언뜻 서운함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반가운 움직임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계산 도와드릴게요.”

어깨와 고개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채 지갑을 뒤적여 잡히는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사장님!

“어. 잘 놀고 있어?”

―네네. 지금 저 바다 보이는 카페 왔거든요? 사장님이 주신 휴가비로 친구들한테 커피 쐈어요. 야, 빨리 인사드려. 빨리!

―잘 마실게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멀찍이서 큰 소리로 들리는 인사에 사월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미 주인이 바뀐 돈이라 굳이 연락해 주지 않아도 됐는데. 아마 지현이라면 돈을 쓸 때마다 전화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카페 직원이 결제된 카드와 영수증을 내밀었다. 사월은 그걸 챙겨 들고 창가 자리로 향했다. 가게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또 좋은 향이 풍겼다. 창가에 앉자 은은한 햇볕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커피 말고 맛있는 것도 사 먹어.”

―저녁에 갈치 조림도 쏠려고요. 애들이 사장님 최고래요.

그걸로 최고는 무슨. 사월이 작게 웃으며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장님 밖이죠? 노랫소리 들리는데? 큰 사장님이랑 있어요?

“아니. 혼자 카페 왔어.”

―왜요. 바쁘시대요?

아직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엄청 바쁜가 봐. 카페 직원이 커피를 들고 다가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투덜거릴 뻔했다.

“맛있게 드세요.”

―사장님 커피 나왔나 보다!

“어.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와.”

빨대로 잔을 휘휘 저었다. 얼음이 부딪히며 커피 위에 물결을 만들어 냈다.

―네에! 사장님도 저녁 맛있는 거 드세요.

정신없는 통화가 끝났다. 사월은 어수선하던 전화 너머의 소음에서 멀어져 다시 한산한 카페로 돌아왔다. 가사 하나 없는 연주곡이 부드럽게 흘렀다.

커피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다시 진동이 울렸다. 또 지현인가 싶었는데 이번엔 원재였다.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카페엔 혼자 갔어?

“……어떻게 알았어?”

사람이라도 붙였나. 이제 그런 건 안 한다고 했는데. 사월은 내심 긴장한 눈초리로 폴딩 도어 밖을 바라봤다. 수상한 사람이나 따라붙는 차는 당연히 없었다. 전화에서 원재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카드 썼길래. 뭘 했나 했더니.

사월은 대충 주머니에 찔러 둔 카드와 영수증을 꺼냈다.

“아…….”

사월의 지갑에 꽂혀 있지만 좀처럼 긁힌 일 없는 카드였다. 아까 지현에게 전화가 오며 정신없이 통화하느라 카드를 잘못 꺼낸 듯싶었다.

―혼자 뭐 해.

“저번에 지현이가 혼자 꼭 가 보라고 했던 데 가 봤어.”

―어디. 어디 또 갔었는데.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구경도 하고…. 이제 커피만 마시고 집으로 가려고.”

누가 들으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과를 꽤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원재는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휴대폰 확인을 하자마자 사월이 카드를 쓴 내역이 뜨길래 곧장 전화를 걸었다. 그냥 카페만 혼자 간 줄 알았는데. 제가 없는 하루를 꽤 알차게 쓴 듯했다. 그게 기특하기도 하면서 또 미안했다. 갑자기 생긴 일에 모든 일정이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까.

사월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그가 너무 불안해할 것 같았으니. 끝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원재는 잔뜩 구겨진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 안 보고 싶어?”

사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휴가를 맞추기 위해 그간 꽤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휴가 이틀째가 되어서도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는 신세일 뿐이었다. 애가 타는 건 원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

전화 건너편에선 사월의 조용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원재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빨리 오라고, 안 해?”

아마 사월이 그렇게 말했다면, 일이고 뭐고 다 제쳐 두고 찾아갔을지 모른다. 그런 원재를 잘 알고 있는 사월이라면 쉽게 꺼낼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재는 넌지시 이야기를 건넸다. 침묵은 꽤 길었고, 원재는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공사장에 찾아오는 새끼들도 다 잡아들인 거 같은데. 그냥 알아서 처리하게 맡기고 갈까. 수주 건이고 경찰 조사고, 최 비서를 대리인으로 보내 버릴까. 아―, 그럼 형 다 때려치우고 도망갈지도 모르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념을 끊어 낸 건 사월의 음성이었다.

―……할까 말까 고민 중이야.

“고민을 왜 해. 너는 그런 거 필요 없는데.”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린 원재가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피곤하고 머리도 지끈대고, 담배와 피 냄새가 온몸을 휘감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사월의 온기였다.

―일 다 하고 와….

사월다운 대답이었다. 욕심을 내지도 투정을 부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원재는 알았다. 말꼬리가 흐릿해진다는 건 서운하단 뜻이라는 사실을. 단지 자신이 미안해할까 봐 뱉은 말임을.

―다 하고, 빨리 오면 되지.

원재는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휴가를 엉망으로 만든 이들을 만나러 갈 셈이었다. 생각하니까 짜증 나서 안 되겠어. 괜히 알짱대서 심기 거슬리게 하더니, 사월이를 이틀이나 혼자 있게 만들고.

“그래. 금방 갈게.”

―알겠어.

알겠다는 대답은 들었어도 기다리겠다는 말은 끝내 듣지 못한다. 이건 고쳐지지 않는 사월의 습관이었다. 여지를 남기는 말은 쉽게 꺼내지 않는 것. 원재도 몇 번 듣지 못한 종류의 말이었다.

“집에 조심히 들어가고.”

전화를 끊은 원재가 곧장 다른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은 몇 번 가지도 않았다.

―네, 사장님.

“오늘 어디 어디 갔었는지 보내.”

―네. 알겠습니다.

사월에겐 감시 따위는 이제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렇게 말해 놓고 제하까지 가게에 붙였다는 걸 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건 필수 불가결한 행동이었다.

“곧 돌아간다니까, 집 올라가는 것까지만 보고 가.”

―네.

명색이 휴가인데 제하를 붙일 수는 없어서 다른 애를 보냈던 참이었다. 10초도 이어지지 않은 통화가 끝나고 바로 문자가 날아왔다. 집 근처 백화점에 있는 영화관, 그 건물 1층에 있는 식당, 백화점 2개 층 매장, 그러고는 곧장 카페였다. 여러 일을 한곳에서 모두 끝낸 게 너무 사월다웠다.

몇 번이고 문자를 읽은 뒤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가 가장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원재는 손목에 접혀 있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렸다. 이어 익숙한 걸음으로 굳게 문이 닫힌 가장 끝 방으로 향했다.

아마 이곳에서 나오는 순간이 두 사람의 본격적인 휴가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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