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외전) (13/16)

사월의 봄

Chapter 1.

“오늘도?”

“……네.”

원재의 눈이 날카롭게 이채를 띠었다. 앞에 선 남자는 눈동자만 굴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주눅이 들게 됐다. 뒷짐을 진 손가락이 우물쭈물 안으로 말렸다.

“무슨 냄새를 맡았길래 벌레가 계속 꼬여.”

담뱃갑을 위로 짧게 치듯이 흔들자, 안에 굴러다니던 담배 하나가 툭 머리를 내밀었다. 원재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정성도 보이지 않고 입술로 담배 끄트머리를 물었다.

뒷짐을 지고 섰던 남자가 빠릿빠릿하게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치익―. 끝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에 퍼지는 매캐한 향. 꼬고 앉은 구둣발이 느릿하게 까딱였다.

침묵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뿌연 연기가 원재의 주변을 에워쌌다. 안경을 추켜올리던 최 비서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말을 꺼냈다.

“슬슬 정리할까요.”

새롭게 수주한 재개발 건에 질 낮은 깡패 패거리 몇이 얼씬대기 시작했다. 그간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다들 깡패 짓에서 손을 떼 보려는 참이라 조용히 돌려보낸 게 몇 번이었다. 달갑지 않은 방문은 한두 번에 그칠 줄 알았는데.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여러 번, 꽤 시끄럽게 굴고 있었다.

“…….”

짜증 나는 새끼들 면상이나 직접 볼까. 멀쩡한 사람처럼 살아 보겠다는데,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심기를 건드리는 게 도대체 어떤 낯짝들인지. 그러다가도 그딴 별것도 아닌 일에 시간을 쏟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원재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그 사이에서 작게 끄덕이는 움직임을 최 비서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완전 각이 잡혀 뒷짐을 지고 선 남자에게 까딱 눈짓했다.

“정리 후 보고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남자가 곧 집무실을 벗어났다.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지져 끈 원재가 소파에 길게 몸을 파묻었다.

“잘 지켜봐, 형. 같은 얘기 계속 들으니까 거슬리네.”

“오케이. 나도 좀 신경 쓰이네.”

남자가 나간 뒤로는 다시 말이 짧아졌다. 말끝을 길게 끌며 대답한 최 비서는 내려 둔 패드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곤 줄곧 생각했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직접 가 본다고 할 줄 알았는데.”

손을 뗐어도 근방 깡패 새끼들은 성 사장이라고 하면 일단 사리고 봤다. 제아무리 입김 센 패거리라도 금세 꼬리를 내릴 만큼. ‘성원재’는 그 어떤 것보다 빠르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질질 끌기 싫어하는 제 상사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최 비서는 그게 내심 의아했던 참이었다.

“사월이도 못 보는데. 좆같은 새끼들한테 시간을 뭐 하러 써.”

사월이. 입 밖으로 이름을 뱉고 나니 갈증이 더 심해졌다. 벌써 사월을 못 본 지도 며칠이 지났다. 매일 끼고 물고 빨았던 탓에 단 며칠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나 몰라. 원재가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난 오늘도 비는 시간 없어?”

뻑뻑한 눈두덩을 누르던 원재가 물었다. 여상히 던진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예민하게 날이 벼려 있었다. 최 비서는 곤란한 낯으로 빼곡하게 늘어선 서류를 내려다봤다.

재개발 시공까지 들어가면서 일이 부쩍 많아졌다. 최근 며칠은 더 그랬고. 집에 잘 들어가지도 못해 사월과는 근근이 통화만 하는 것 같더니. 조금씩 한계가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갔다 와라, 갔다 와.”

한숨 섞인 허락이 떨어지자 원재는 언제 피곤했냐는 듯이 눈을 번쩍 떴다. 근 며칠 만에 눈에 생기가 도네. 최 비서는 작게 혀를 찼다. 원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데스크 끄트머리에 던져둔 키를 챙겨 들었다.

“너무 늦지 마.”

“밥 먹는 것만 보고 올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충 던진 대답.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나갔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에휴. 그렇게 좋나.”

졸지에 혼자가 된 최 비서가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위에 올렸다. 상사가 자리를 비웠으니 잠깐 눈이라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그는 몸을 소파에 축 늘어트렸다.

***

“어? 큰 사장님!”

페이퍼 타월로 손을 닦아 내는 지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월 사장은?”

“샌드위치 사러 가셨어요. 예약이 쭉 있어서 제시간에 못 먹었거든요. 오늘만 그렇고 지금까지 계속 잘 챙겨 드셨어요! 식사 거르진 않으세요!”

당연하단 듯이 변명이 줄줄 따라붙었다. 매번 올 때마다 끼니 확인을 해 대서 생긴 습관이었다. 웃긴 상황임에도 원재는 꽤 진지하게 지현의 말을 경청했다. 샌드위치라는 말이 좀 걸리긴 하지만, 밥 걸렀다는 얘기보다는 나았다.

“그 친구는?”

원재의 날카로운 눈이 조용한 내부를 슥 훑었다.

“제하요? 사장님이랑 같이 갔어요.”

제하는 사월의 봄에 새롭게 들어온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최근 예약 손님이 많아지면서 관리할 게 늘어난 탓이었다.

사월이 직접적으로 손이 부족하단 말은 건넨 적이 없었지만, 퇴근 시간이 점차 늦어지자 원재가 먼저 움직였다. 물론, 원재와 최 비서가 뽑고 난 뒤에 사월에게 통보한 거였지만.

그가 사월의 봄에 들어온 지도 네 달이 조금 넘었다. 보통은 예약을 관리하고 타투 결과물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리는 일을 도맡아 했다. 때때로 시간이 남으면 사월에게 타투를 배우기도 했고. 그는 무리 없이 사월과 지현에게 섞여 들었다.

“같이?”

“네네. 어? 오셨다.”

지현은 원재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유리문이 열리고 곧 익숙한 향이 훅 끼쳐 왔다. 원재는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머릿속이 따가울 만큼 날카롭던 신경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 언제 왔어.”

“안녕하십니까.”

사월이 놀란 표정으로 원재를 올려다봤다. 쓸데없이 바쁘다고 앓는 소리를 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는데. 어떻게 여기 와 있는 거지.

“일이 손에 안 잡혀서.”

원재의 커다란 손이 먼저 마중을 나갔다. 마른 몸이 품 안에 들어차면서는 큰 풍족함을 느꼈다. 원재는 고개를 기울여 사월의 목덜미에 슬쩍 입술을 댔다.

“뭐, 뭐 해.”

애들이 다 보는데. 뒷말은 작게 흘렸다. 눈을 크게 뜬 사월은 어깨를 움츠렸다. 얼굴에 분홍빛이 도는 걸 내려다보면서 웃음을 삼켰다. 이제야 좀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별일 없지?”

두어 뼘의 거리가 생기자 사월은 뒷걸음질 쳐 품에서 벗어났다. 괜히 머쓱한 표정으로 직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현은 익숙한 듯 못 본 척을 했고, 제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사월은 헛기침을 한번 하곤 태연한 척 말을 꺼냈다.

“없어. 넌 자리 비워도 돼? 최 비서한테 또 한소리 들으면 어떡하려고.”

“돼. 오늘 일정 중에 이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사월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자연스럽게 원재가 옆자리를 차지했다. 제하는 종이봉투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제하는 지현과 사월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딱딱한 태도로 일관했다. 군대에 온 것처럼 바짝 군기가 든 모습이었다. 지현이 묘한 시선을 하고 두 남자를 번갈아 봤다.

“했지. 다들 얼른 먹어.”

마른 어깨 위에 턱을 걸친 채라, 원재가 말을 할 때마다 작은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사월은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찔끔 옆으로 자리를 옮기려다 등을 가로지른 손이 허벅지 쪽을 꽉 움켜쥐는 바람에 꼼짝없이 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살 빠진 거 같은데.”

“그래? 세 끼 다 먹는데…….”

그것 또한 제하의 역할 중 하나였다. 밥시간만 되면 거의 알람시계처럼 식사를 챙겼다. 해서 제하가 온 뒤로 늦게 먹은 적은 있어도 빼먹지는 않았다. 체중이 줄었다고 느껴 본 적 없는데. 사월은 샌드위치를 오물대며 여상히 생각했다.

“빠졌어. 그건 내 손이 제일 잘 알지.”

큰 손이 사월의 허벅지와 엉덩이 쪽을 가늠하듯 더듬댔다. 이럴 때 벗겨서 확인해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는데. 원재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저어, 큰 사장님. 먹을 때는 조금 자제해 주시는 게 어때요? 저 썸남이랑 끝나서 우울하거든요?”

“하고 있잖아, 자제.”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티가 안 나나. 두 직원이 없었다면 아마 곧장 옷부터 벗기고 봤을지도 모르는데. 뒷말은 삼킨 원재가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마른 어깨에 이마를 기대자 지현이 눈을 찌푸렸다. 제 딴에는 혼잣말인 모양인지, 입 안에서 소리가 웅얼거린다.

“커플 진짜 싫다.”

“다 들린다.”

웃음기 섞인 원재의 일갈에 지현은 샌드위치만 우걱 베어 물었다. 제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이거 더 먹어.”

사월은 포장지를 뜯지 않은 샌드위치 하나를 제하에게 밀었다. 막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고 봉지를 구기던 제하가 눈을 깜빡댔다. 그는 대답 대신 눈동자를 굴려 원재를 힐끔댔다. 꼭 먹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사장은 난데 왜 얘 눈치를 봐. 사월은 제 어깨에 기댄 반듯한 머리를 내려다보다, 샌드위치를 재차 건넸다.

“먹어, 제하야.”

“……잘 먹겠습니다.”

“뒤에 예약 많이 찼어?”

제하와 원재의 목소리가 거의 엇비슷하게 맞물렸다. 사월은 다음 예약이 몇 시였는지를 떠올렸다.

“한 40분 남았습니다.”

사월이 예약 시간을 떠올리기도 전에 제하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운 원재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사월의 허벅지쯤을 잡은 손은 풀지도 않은 채로.

“40분.”

한 시간도 채 안 되지만 원재에게는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선 제 곁의 사월을 꼭 껴안은 채 딱 10분만 눈 감고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 정말 모든 피로가 하나도 남지 않고 풀릴 거 같았다.

욕심이 치솟았지만 원재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사월이 샌드위치를 꼭꼭 씹어 삼키고 커피를 마시는 것까지 턱을 괴고 꽤 흥미롭게 지켜봤다. 이것도 원재에겐 꽤 재밌는 구경이었다.

겨우 한 개만 먹고 손을 터는 사월을 보고 슬며시 미간이 구겨졌지만, 별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요즘 40분이면 진짜 여유 넘치는 거예요. 근래 들어서 너무 바빴거든요. 휴가 가서 앓아눕게 생겼잖아요.”

여름이 되기 전, 사월의 봄 식구들은 일주일간 이른 휴가를 보낼 계획이었다. 휴가 기간을 피해 예약을 받다 보니 일정이 꽤 빡빡해진 참이었다.

“넌 휴가 어디로 갈 건데.”

“친구들이랑 제주도요! 제하는 집에서 쉰대요, 재미없게.”

“푹 쉬는 게 휴가지, 뭐.”

“노는 사진 계속 보내야지, 부럽게. 사장님들은요? 어디 가기로 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꽤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휴가는 다가오는데 원재가 바빠도 너무 바빴으니까. 전에 흘러가듯 휴가를 같이 보내자고는 했었는데…….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어딜 가자고 말하기도 좀 그랬다. 쉴 틈 없는 거 빤히 아는데 놀러 가자고 조를 수는 없으니까. 이번엔 아쉬워도 그냥 제하처럼 집에서 푹 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까지 하고 있던 참이었다.

“글쎄…….”

사월은 자신 없이 말끝을 흐렸다.

“우린 더 재밌게 놀 건데.”

확신을 심어 주기라도 하듯 원재가 픽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은근히 시무룩해진 사월에게 팔을 뻗어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은 더없이 경쾌했다.

“오, 어디 가시게요?”

“비밀.”

사월이 다 먹은 샌드위치 포장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는 손길은 간결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툭툭 턴 원재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캐비닛으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치약을 짜서 칫솔에 묻힌 원재는 사월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 해.”

“야.”

미쳤나 봐. 사월이 당황한 표정으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칫솔을 빼앗는 것에 실패하고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아―.”

“내가, 내가 할게.”

사월은 평소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이미 귓불까지 붉어진 채였다. 샌드위치를 야무지게 씹던 지현의 턱은 움직임을 멈춘 지 오래였고, 제하는 입을 벌린 그대로 굳었다. 그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원재 하나뿐이었다.

“와.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야.”

지현의 경악스러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원재는 큰 손으로 사월의 뺨을 살짝 쥐었다. 당황해서 뻐끔거리는 입술 사이로 칫솔을 밀어 넣었다. 곧 턱을 쥐고 칫솔질을 시작했다. 칫솔모가 구석구석 열심히도 닿았다. 알싸한 치약 향이 올라와 코끝이 찡해질 만큼.

“원래 우리 사월이, 내가 다 씻겨 주는데.”

입에 들어차는 거품 때문에 사월은 무어라 변명하지도 못했다.

원재는 낮은 테이블에 걸터앉으면서까지 꽤 진지하게 칫솔질을 해 댔다. 당황했는지 제 손목을 움켜쥔 사월의 손가락을 보면서는 웃음을 삼켰다. 순해 가지고 힘도 하나 못 주네. 별게 다 사랑스러워 보이고 난리야. 이것도 병 아닌가.

“헹구자.”

힘을 느슨하게 풀자 사월이 단숨에 칫솔을 낚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식 세면대로 뛰듯이 향하는 걸음마다 부끄러움이 떨어졌다. 원재는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기울였다. 그래야 사월의 뒷모습을 보기가 편하기 때문이었다.

“혹시 큰 사장님이 사월 사장님 낳았어요?”

“풉―.”

제하가 입을 틀어막았지만 웃음은 이미 새어 나온 뒤였다. 힐끔 고개를 틀자 원재의 눈길이 그대로 가닿았다. 그러자 그는 긴장한 듯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정렬했다.

“죄송합니다…….”

작게 덧붙는 사과에 원재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당연하게도 사월이 있었다.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뿐인데도, 사월의 음성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아마 욕을 시원하게 뱉고 있지 않을까. 원재는 피식 터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의 추측은 당연하게 맞아떨어졌다. 사월은 연신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씨발, 미친. 쪽팔리지도 않나. 애들 앞에서.

물론 집에선 종종 이런 짓을 해 댔기 때문에 포기한 참이었지만. 보는 눈이 있으면 말이 달라지지.

사월은 거품을 헹궈 내고 얼굴에까지 찬물을 끼얹었다. 물기가 남은 얼굴을 페이퍼 타월로 벅벅 문지르고 휴지통에 버렸다. 드러난 얼굴은 온통 붉어져 있었다. 해가 질 무렵 하늘이 물드는 것과 비슷한 색이었다.

“…너 빨리 가. 최 비서한테 전화하기 전에.”

“형 잘 텐데.”

“얼른 가. 바쁘다며. 일이나 해, 빨리.”

빨리 일하고 집이나 들어와. 대충 그런 소리를 앞뒤 맞지 않게 늘어놓았다. 답지 않게 허둥대는 사월을 보고 원재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힐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한 30분 남았나?”

“…예, 그렇습니다.”

역시나 각 잡힌 대답이 돌아왔다. 원재는 칫솔을 캐비닛에 넣고 세차게 문을 닫는 사월의 뒤로 가서 섰다. 뒤이어 움직이지 못하게 와락 껴안았다. 곧 뒤뚱대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얘 오늘 왜 이래, 진짜. 문으로 가는 30초도 안 되는 시간이 사월에겐 억겁처럼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그가 이끄는 대로 발을 내딛기만 했다.

“그럼 우린 데이트 좀 하고 올게.”

“큰 사장님! 아니, 잠시만요!”

입에 있는 걸 넘기지도 못한 지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전화하면 실례인 거 알지.”

“잠깐, 늦으면 안 돼요! 아셨죠?”

닫히는 문 사이로 지현의 당부가 비집고 들어섰다. 원재는 그런 것 따위에 귀를 기울일 틈도 없었다.

문을 벗어난 뒤에야 원재는 품에 안긴 몸을 놓아주었다.

“미친, 애들 앞에서 그러지 좀 말라니까.”

“알겠어, 알겠어.”

또 대충 대답하네. 사월이 쯧, 혀를 찼다. 원재는 다급하게 사월을 당겨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잡아 태웠다. 공교롭게도 안에는 사람이 타 있었다.

계단으로 갈 걸 그랬나. 껴안지도 못하겠네. 원재는 쥐고 있는 손목만 애타게 매만질 뿐이었다. 살갗을 훑던 엄지손가락이 맥박이 뛰는 곳을 지그시 눌렀다. 하얀 피부가 분홍빛으로 억눌렸다. 아닌 척하곤 있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까진 숨기지 못했다.

1층에서 사람이 내리고 엘리베이터는 한 층 더 아래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원재가 성큼 앞서 걸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이끄는 대로 끌려가던 사월이 문득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주차장에 왔다는 건 차를 타겠다는 뜻이고, 차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까.

“……나 자리 오래 못 비워.”

원재는 별말 없이 걸음만 옮겼다.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채였다. 뒷좌석 문을 연 원재가 고개를 까딱였다. 먼저 타라는 행간을 읽어 낸 사월이 머뭇댔다. 물론 며칠 만에 만나 반갑고, 더 닿고 싶고, 뭐 그렇긴 하지만…….

섣불리 차에 타지 못하고 주저하는 기색을 읽은 원재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무슨 생각하는데 얼굴이 그렇게 빨개지지.”

작게 덧붙는 물음에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사월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어 씹었다. 손목을 잡고 있던 원재의 손길이 떨어져 입술 사이로 향했다. 엄지손가락이 사월의 아랫입술을 누르며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치아를 스쳐 지난 손끝이 뜨거운 혀에 다다랐다. 원재의 눈길이 삽시간에 진득해졌다. 혀 아래에 침이 고이는 것 같았다. 끈적한 시선이 빨간 입술 사이에 짙게 머물렀다.

“난 그냥 둘만 있고 싶어서 온 건데. 뭘 바라고 이렇게…….”

야하게 올려다봐. 뒷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사월의 마른 몸이 거의 떠밀리다시피 뒤로 기울었다.

문이 닫히는 동시에 큰 덩치가 덮쳐 왔다. 입술 사이를 거칠게 파고든 혀가, 입 안을 휘저어 댔다. 뜨거운 점막끼리 닿을 때마다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채웠다. 사월의 고개가 뒤로 기울었다.

“읍, 으읍.”

원재는 볼이 파일 만큼 혀를 세게 빨아 올렸다. 사월이 눈을 구기며 눈앞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주차장이 조용한 터라 야릇한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고개가 힘없이 밀려나자, 원재가 한 손으로 사월의 뺨을 쥐었다. 단단히 잡고 꾹 눌러 입을 더 벌어지게 했다. 뾰족하게 세운 혀가 입천장을 훑으며 안으로 파고든다. 꼭 목구멍에 삽입이라도 하듯. 사월은 꼭 펠라를 할 때 느꼈던 버거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원재를 밀어낸다거나 얼굴을 틀지는 않았다. 여유 없는 이 키스는 사월도 꽤 기다렸던 일이라서.

툭. 진득하게 맞닿았던 혀가 살짝 떨어진 참이었다. 사월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짧은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 소리에 원재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제 아래에 깔린 사월이 보였다.

쪽쪽. 몇 번 짧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원재가 상체를 일으켰다. 언제 그런 건지 사월의 셔츠는 한참이나 말려 올라가 있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마른 몸을 일으켜 앉혔다.

“더 하면 못 멈추겠다, 그치.”

사월은 대답 대신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가락을 느끼면서도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보드라운 머리칼 사이를 헤집던 손끝이 젖은 입술로 내려갔다.

“빨개졌네.”

“네가 너무…….”

네가 너무 빨아서 그렇잖아. 사월은 뒷말을 채 이어 가지 못했다. 그렇게 말했다간 또 원재가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다. 집이었다면 상관없겠지만 자신은 곧 다시 숍으로 올라가야 했다.

“너무?”

“…오늘은 들어올 수 있어?”

스스로 느끼기에도 말을 돌린 티가 너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불룩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원재의 아래를 겨우 외면하는 중이었으니까.

“내가 들어갔으면 좋겠어?”

원재는 이렇게 종종 확인받기를 원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럴 때마다 붉어지는 사월의 얼굴을 보는 게 좋은 거였다. 그게 꼭 사월다운 대답이라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월은 굳이 입술을 달싹여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온몸으로 대답하는 중이었다. 네가 오늘은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원재는 붉게 물든 귓불을 지그시 눌렀다. 나지막한 음성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럼 나도 이름 불러 줘.”

“…이름?”

“나도 다정하게 좀 불러 줘 봐. 이제하 부르듯이.”

눈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당황한 사월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차 안을 배회했다. 이름 부르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이런 분위기에 이렇게 멍석까지 깔아 주니까, 왠지 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른.”

주저함을 지워 내듯 원재가 쪽― 입을 맞추고 멀어졌다.

“…….”

쪽. 다시 한번 침묵을 가르고 낯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원재는 사월의 입술만 빤히 내려다봤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참지 못하고 또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원재야.”

원재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뜨거운 호흡이 고스란히 사월에게까지 닿았다.

“원재야…, 오늘은 들어와.”

“응. 일찍 들어갈게.”

마침표와 함께 두 입술이 맞닿았다. 어슷하게 맞물리고 혀가 틈을 가르고 들어갔다. 원재의 입꼬리는 내내 보기 좋게 휘어졌다.

차 안은 고요했지만, 또 소란했다. 축축한 살결이 뒤엉키는 소리, 두 사람의 셔츠가 구겨지는 소리, 거칠어지는 숨소리.

그리고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 소리. 정신없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사월과 원재는 서로밖에 없는 것처럼 숨결을 나눴다.

***

제하는 볼이 파일 만큼 깊게 담배를 빨았다. 뿌연 연기가 흩어지는 사이, 눈앞으로 불쑥 쇠파이프 하나가 툭 떨어졌다. 까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파이프가 발치에 나뒹굴었다. 제하는 담배를 문 채로 눈만 치켜떴다.

“거, 같이 좀 핍시다?”

꽉 끼는 셔츠를 입은 남자 셋이 나란히 맞은편 벤치에 앉았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였는데, 시커먼 문신이 팔을 온통 휘감고 있었다. 그들은 동작을 맞추기라도 한 듯 양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가 어정쩡하게 구부려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덩치를 과시하듯 몸을 잔뜩 부풀린 모양새에 제하는 필터만 잘근 씹을 뿐이었다.

“라이터 있냐?”

“갖고 다니겠냐. 어이, 불 좀 빌려주지?”

가장 끄트머리에 앉은 남자가 턱짓하며 제하에게 말을 붙였다. 제하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로 셔츠 앞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잡힌 라이터를 툭 허공으로 던졌다. 덩치 하나가 허겁지겁 그것을 받아 챘다. 볼멘소리는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거, 좋게 좀 주지.”

쯧. 혀를 찬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제하는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그게 또 귀찮아져서 그냥 휴대폰을 꺼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읽지 않은 메시지 몇 개를 눌러 확인했다.

“잔잔바리로 치는 게 낫지 않냐. 요즘 그쪽이 공사 벌인 것도 두세 개 되더만.”

“그러니까. 객기 아닌지 모르겠다. 형님 꼴 나는 거 아니냐?”

“씨팔, 뒤진 형님 얘긴 재수 없게 왜 꺼내.”

걸걸한 목소리들이 대화를 이어 갔다. 제하는 사월의 봄 직원들이 있는 대화방에 들어갔다.

이제하 올 때 아이스크림

사장님은 아아

픽 웃음을 흘린 제하가 ‘ㅇㅋ’ 자음 두 개를 짧게 이어 보냈다.

“평생 약 배달 뒤치다꺼리만 해서 간댕이가 그렇게 작냐? 공사장 휘저으면서 쨉 날렸다간 죽도 밥도 안 돼. 성 사장네도 요즘 이빨 빠진 호랑이야. 새끼들, 양복 입더니만 고상하게 구는 꼴 못 봤냐? 여기 들쑤셔도 전처럼 못 날뛰어. 우리 쪽 애들도 수가 많이 늘었고.”

“하긴. 꼴값 떠는 게 웃기긴 하더라.”

“그 뭐냐, 네임 문신했던 거 불법이라고 들이밀면 찍소리 못 하지 않겠냐. 요즘 번듯한 회사인 척하는데. 책 잡힐 거 생김 알아서 길 거라니까.”

남자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담뱃재를 툭 털어 낸 제하가 힐끔 시선을 들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덩치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 있는 게 보였다.

제하의 눈길이 느릿하게 맞은편 건물로 향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월 사장님 때문에 벌써 에어컨을 틀어놓은 터라, 창문은 전부 꼭꼭 닫혀 있었다.

“애들이 공사장 들쑤시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을 텐데. 여긴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거다.”

구역 따먹기라도 하려는 거 같은데. 대상이 좀 잘못된 것 같았다. 제하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가지고는 있어도 먼저 연락해 본 적 없던 번호를 눌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하는 재떨이에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지져 껐다. 다행히도 신호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좀 와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전화 너머로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그사이에도 무거운 원재의 음성은 고저 없이 차분했다.

―손님이라도 왔나 봐?

“아마도 광 박사네 애들 같은데. 셋 있습니다.”

광 박사. 지금은 뒤지고 없는 제 형님을 부르는 말에 정적이 흘렀다. 담배를 물고 있던 셋의 시선이 나란히 올라갔다. 제하는 고개를 기울여 남자들과 눈을 마주했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쓰읍.

잇새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마뜩잖은 반응임이 분명했다.

―10분? 그 정도만 끌어 봐.

짜증과 귀찮음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제하는 슬금슬금 몸을 움직이는 남자들 쪽으로 자세를 틀었다.

“예.”

전화는 군더더기 없이 경쾌하게 끊겼다.

“뭐야, 이 쥐새끼 같은 놈은?”

“……여기에 사람 심어 놨단 얘긴 못 들었는데.”

당황한 듯한 덩치들 사이에서 제하는 혼자 차분했다. 그는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이 새끼가, 음흉하게 엿듣고. 어? 씨팔! 이게 진짜!”

남자들이 담배를 바닥에 대충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하는 자신의 발치에 있던 파이프 하나를 툭 쳐서 올렸다. 허공으로 뜬 것을 낚아채 쥐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벤치 위를 툭툭 치자 울리는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10분은 좀 긴데…….”

제하는 한 손으로 눈가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댔다. 성 사장님이 사월의 봄 직원으로 꽂아 준 뒤로는 영 몸을 안 썼는데. 시간 끌 수 있을까 모르겠네.

제하가 눈으로 덩치들의 몸을 훑었다. 처맞고 있으면 사장님한테 쪽팔려서 어떡하냐. 그런 걱정을 했던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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