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직원 K 씨의 작업 기록
지현이 사월의 봄에 오기 바로 직전에 일했던 타투 숍 사장은 꼰대였다. 돈 주고 고용했으니 하루 종일 한 일을 업무 보고하듯 적어 내라고 했다. 커피를 사러 나가거나 작업 없는 사이에 뭘 했는지까지. 그게 습관이 되어 사봄에 들어온 초반 일주일 정도 빡세게 작업 기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사월 사장은 지현의 일과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장님이 왜 기록 달라고 안 하시지? 알아서 갖다 바쳐야 하나? 지현은 고민 끝에 쭈뼛대며 기록을 내밀었었다.
사월 사장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이딴 거 필요 없다고 한 뒤로는 그 전 숍이 얼마나 쓰레기통이었는지를 깨닫는 중이었다. 거기가 첫 직장이었던 터라 그게 일반적인 건 줄 알았지.
지금 사월은 원재와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웠다. 뭐 어디 간다고 했는데, 주의 깊게 듣지 않아 어딘지는 모르겠다. 예약도 한 세 시간 뒤에 있어서 지현은 가게를 혼자 독차지하고, 자신이 사월의 봄에 와서 작성한 작업 기록을 들춰 보는 중이었다.
“잉크 새로 깐 건 또 왜 써 놨던 거야. 존나 하타치같이…….”
전 숍에서 얼마나 들들 볶여 살았던 건지. 다시 한번 자신을 뽑아 준 사월 사장님에게 감사 인사를 날렸다.
아무튼 이제는 작업 기록은 그냥 두 사장님의 관찰 일지가 된 지 오래였다. 일단 둘 다 잘생겼고 키가 컸고, 케미가 좋았다.
특히나 지현은 사월 사장을 좋아했다. 사소한 거 하나까지도 신경을 쓴다는 느낌을 주는 완벽한 사장님이었다. 지현은 펜을 들어 작업 기록 위에 글자를 끄적댔다. 소리 내어 글자를 따라 읽는 건 덤이었다.
“사월, 사장님의…… 발리는 점.”
남자 손님이 왔을 때를 예로 들어 보자. 팔이나 목같이 옷을 벗지 않아도 작업할 수 있는 건 지현이 편하게 작업할 수 있게 신경을 딱 끊는다.
하지만 가운이나 속옷만 덜렁 입고 해야 하는 작업이 있을 때. 사월 사장님은 작업대 근처에 서서 작업하는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본다.
지현은 다년간의 눈치로 알았다. 타투 새기는 과정을 보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남자 손님이 허튼 소리 하는 걸 막기 위해 서성인다는 사실을.
마르긴 했지만 키도 크고, 목과 팔 곳곳에 큼직한 타투도 있고, 냉미남에 가까운 얼굴이라 그런지. 아님 찾는 손님들이 다 젠틀한 건지. 아무튼 우려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또 하나. 사월 사장님은 제 앞에서 늘 말조심을 한다.
“씨발아, 그딴 짓 좀 하지 말랬지.”
“좆 까. 지랄이야.”
“씨발, 또 시작이네.”
등등.
큰 사장님과 이야기할 때 종종 욕을 섞어 쓰는 걸 보고 지현은 놀랐다.
‘우리 사장님이 욕을 저렇게 차지게 했단 말이야?’
그도 그럴 것이 사월은 지현과 대화를 나눌 때 거친 언사를 쓰질 않았다. 지현 씨, 지현 씨, 하던 게 ‘지현아’가 될 만큼 편해졌어도 말이다. 큰 사장님이 몰래 말해 준 걸 들어 보면 많이 순해진 거라고 하던데. 그 전에는 얼마나 셌던 걸까. 생각할수록 완벽하다. 아무튼 진짜, 큰 사장님만 없었으면…….
“아, 싸움 존나 전문이시랬지.”
솔직히 큰 사장님을 이길 자신은 없다. 대신 지현은 사월 사장님 이름 뒤에 소심하게 하트를 여러 개 그려 넣었다. 암튼 사장님 좋아. 펜을 내려놓고 종이 몇 장을 넘겼다. 가끔씩 끄적대던 두 사장님의 관찰 내용을 오랜만에 들춰 본다.
날짜 : 목요일인가 금요일인가.
― 사월 사장님이 화났다. 나한테 화난 건 아니고, 큰 사장님한테. 핸드폰이 계속 울리는데 거들떠도 안 보고 소파 위에 처박아 뒀다. 이젠 가게 전화로까지 연락하는 거 같은데, 발신 번호를 보고 그냥 끊어 버렸다. 웃지도 않고 말도 없어. 사장님 화나니까 무섭네.
― 큰 사장님이 가게에 쳐들어왔다. 전화 안 받아서 그런가 봐. 요즘 바쁘시다더니……. 사장님이 눈길도 안 주니까 가서 막 손잡고 빌고 난리 났다. 사장님이 저리 가라고 밀어도 하나도 안 밀린다. 이 와중에 피지컬 오져. 근데 나 있는 거 까먹으셨나. 막 뽀뽀하려고 입술 들이미시네, 저분……. 화났을 때 그렇게 하면 더 화나는 거 모르시나.
― 헉. 아니야. 풀렸어. 뽀뽀로 풀렸어. 대박. 사월 사장님 마음 하해와 같다 정말. 저걸 받아 줘?
날짜 : 뻑킹 월요일
― 비 온다. 출근하기 존나 싫었지만 사장님 하나만 보고 폭우를 뚫었다. 근데 웬걸. 사장님이 지각했다. 연락도 따로 없었고, 받지도 않아서 걱정했다. 평일이라 오전 작업 없는 게 다행이지.
― 사장님은 점심 지나서 출근했는데, 큰 사장님을 달고 왔다. 둘한테 약간 술 냄새 나. 그리구……. 셔츠 사이로 물고 빤 자국 다 보여. 존나 심해. 울 사장님 괜찮은 거죠? 안 괜찮으면 당근 흔들어요…….
― 사장님이 자기 손목 보고 깜짝 놀라서 아대 찾아서 찬다. 저 아대는 어디서 자꾸 나오지? 큰 사장님이 갖다 버리면 또 있고, 버리면 또 있네. 사장님이 힐끔 내 눈치를 본다. 이미 깨물린 자국 다 봤어요. 이제 와서 가리면 뭐 해요, 바부야. 사장님 슬랙스 입었는데 발에도 자국 있네. 이야. 둘이 뜨밤 보낸 거 존나 알고 싶지 않은데 잘 알겠다. 사월 사장님이 앉을 때 얼굴 찡그리니까 큰 사장님이 달려와서 막 허리 쓰다듬고 엉덩이 주물대고 난리, 난리. 얼굴 빨개져서 밀어내니까, 입맛 다셔. 보기 좆다ㅎㅎ.
― 근데 큰 사장님은 또 땡땡이인가 봐. 이따 최 비서님 쳐들어 오겠당.
날짜 : 오랜만에 작업 없는 목요일
― 출근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했다. 난 사장님 얼굴로 월급 받는 월급쟁이니까. 근데 그냥 오지말 걸 그랬나 후회 중. 하루 종일 초음파 사진 같은 걸 들여다보신다. 울 거 같은 표정으로. 사장님이 임신했을 리는 없고, 누가 어디서 사고를 친 것도 아닐 텐데. 저거 도대체 뭘지 궁금해. 뭔 글자도 써 있는데 보이지 않아서 못 보겠네. 사장님 슬퍼하지 마세요……ㅜㅜ. 아, 큰 사장님한테 문자해야지.
― 큰 사장님이 자꾸 사월 사장님 상태를 말해 달라고 한다. 근데 답장은 계속 똑같아. 그냥 사진 들여다보고 있어요. 내가 힐끔대는 것도 못 느끼시는 거 같은데. 무슨 일이지. 너무 걱정된다…….
― 사장님 운 거 같아. 큰 사장님한테 문자했는데, 답장 없는 걸 보면 지금 오시는 중일까. 도착하시기 전에 대충 눈치 보다 들어가야겠다.
날짜 : 몰라! 안 중요해.
― 이건 꼭 기록해야 함. 어제 퇴근하고 가게에 주혜 선물 산 거 놓고 와서 다시 갔음. 주차장에 큰 사장님 차가 있었음. 아직도 퇴근 안 하셨나? 하고 그냥 가게 들어감. 근데 아무도 없었음. 뭐지? 하고 다시 주차장 내려갔음. 차가 아직도 있었음. 큰 사장님 차가 아닌가? 근데 이 근방에 이런 비싼 차 없는데……. 그런 마음에 번호판 확인하려고 근처로 갔음. 그.런.데.
― 차 왜 흔들려? 그 비싸고 쿠션감 좋은 차가 왜 자꾸 들썩대. 안에서 뭐하는데. 선팅 왜 짙은데. 뭔 소리 들리는 거 같던데 그건 차마 못 듣겠어서 귀 막았다. 아무리 밤늦은 시간이고 구석 자리라고 해도. 둘이 안에서 뭐 했는데. 하……. 좋은 시간 방해될까 봐 존나 도망쳐 나왔다. 진짜로, 진심으로 두 분 행복하세요. 근데 차는 좁아서 힘들던데……. 내일 우리 사장님 출근하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