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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매그넘 쉐이딩(3권) (8/16)
  • Chapter 7. 매그넘 쉐이딩

    계절이 두 번이나 지났다. 원재가 음지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음습하고 끈적하던 여름이 지나고. 퍼석한 마음과 엇비슷이 메말랐던 가을도 지났다. 더위를 많이 타던 사월이 가장 좋아했던 계절의 한가운데였다. 새하얀 겨울엔 원재의 발길만 외로이 찍혀 있다.

    원재는 더 이상 사월의 생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최종 공판 전까지 김진우 씨 쪽에 사람 붙여. 호텔 전전해도 꼬리 밟히는 거 순식간이야.”

    “네.”

    원재가 서류 한쪽에 만년필촉을 휘갈겼다. 이름과 사인 사이, 선을 대충 죽 긋고는 파일을 덮었다. 그 바로 아래 있던 누런빛 파일을 열었다. 빼곡히 들어찬 글씨에 원재는 피로감을 느꼈다. 엄지와 검지로 눈두덩을 꾹 누르면서 활자에 집중한다.

    “기자가 바뀐 거 같네.”

    “예. 대신 같은 소속 기자입니다.”

    공판에 관해 뿌려질 기사를 훑던 원재가 말했다. 최 비서는 조금 놀랐다. 자신이 보기에는 그 전 기사와 별반 다름없어 보였는데. 원재는 그 미묘한 차이를 예민하게 짚어 냈다.

    “중립 유지만 해도 되는데. 팩트만 나열해도 꿀릴 거 없잖아. 여긴 묘하게 우리 쪽 옹호하는 뉘앙스가 읽혀서. 마지막 문단 수정 요청해 봐.”

    “예. 알겠습니다.”

    종이 맨 아래 문단에 크게 엑스 자를 그은 원재는 다시 파일을 덮었다. 그러곤 최 비서 옆에 긴장한 채 선 남자에게 내밀었다.

    “수정한 건 최 비서 선에서 마무리해 주고.”

    “네.”

    기사를 확인받은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하곤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몇 시간째 눈동자가 쉬지를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로드가 걸릴 만큼 활자로 가득했다.

    이게 매일같이 원재가 하는 일이었다. 쏟아지는 서류를 확인하고 공판 준비를 하고, 여론을 조성하고. 모두 진흙탕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아니, 정확히는 사월을 떠올릴 틈 없이 몸과 정신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광 박사가 의료 법인 출입한 기록은 공판 이틀 전 오후에 풀어.”

    “약물 검사 결과 나온 다음에?”

    “어. 지금은 너무 일러. 대가리 굴릴 시간이 충분해서.”

    성 회장은 약물 검사에서 음성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간 광 박사가 만든 약이 꾸준히 영양제에 섞여 들어갔으니까.

    파렴치한 짓이라도 해도 어쩔 수 없다. 할 줄 아는 거, 배운 게 이따위 짓밖에 없는데. 제 아버지가 더럽게 군 만큼, 똑같이 치졸한 수라고 손가락질해도 아무 상관없었다.

    “알겠어.”

    원재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회사 대신 새롭게 사무실을 세웠다. 성탁 세력 중 원재를 따르는 무리가 대거 떨어져 나와 그리로 갔다. 그래 봤자 대부분 깡패 새끼들이 우글대는 곳이었지만, 나름 출퇴근 시간도 맞추며 그럴듯한 회사로 비춰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나머지는 확인해서 넘길게.”

    “어어.”

    “……더 확인할 거 있어?”

    서류에 집중하려던 원재의 시선이 다시 위로 향했다.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앞을 지킨 채로 입술을 뻐끔거리는 최 비서를 향해 물었다.

    최 비서는 망설였다. 반년째 보고하는 내용은 비슷했다. 변한 게 있다면 원재는 처음과 달리 좌절을 한다거나 상심에 빠진다거나, 집무실을 다 때려 부술 듯이 굴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 비서는 그게 더 두려웠다. 원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읽을 수가 없어서.

    “……행방은 여전히 잡히지가 않아.”

    흐음. 원재는 길게 숨을 뱉으며 만년필을 손에서 살살 굴리기만 했다. 이제 충격에도 무뎌지고 내성이라도 생긴 건지,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애들이 오지 산간 다 들쑤시는데도 영 진전이 없네.”

    “…….”

    반년이나 자취를 감춘 사월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요양 병원과 이어진 산에 있는 산책로를 빠져나오던 모습이 CCTV에 찍혔다. 작정한 건지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뒷모습이. 그때까지만 해도 원재는 사월을 쉽게 잡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다.

    사월은 차분하게 돈을 인출해서 택시와 지하철을 여러 번이나 갈아타며 짧게 루트를 바꿔 움직였다. 마치 원재와 함께 요양 병원에 갈 때처럼. 몇 번이나 이동한 그림자는 밟을 수 있었으나, 어느 지점부터 인파 속으로 사라진 사월은 찾을 수가 없었다.

    “통장 건든 기록도 없고. 혹시나 해서 병원 기록도 다 뒤졌는데, 전혀 없어.”

    도망치기 전에 찾은 돈으로는 몇 개월도 버티기가 힘들 터였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렇게 조용한 거라면……. 원재는 작게 고개를 흔들어 불길한 생각을 떨쳤다.

    “고생했어.”

    “……더 노력해 볼게.”

    노력. 노력으로 찾을 수 있는 거라면, 이미 사월은 제 눈앞에 있어야 했다. 허공에 헛손질을 하듯 하루가 갈수록 허탈함과 좌절감이 몸집을 부풀렸다. 원재는 갑갑한 넥타이를 비틀어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재의 얼굴에서 피로감을 읽은 최 비서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혼자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 담배를 핑계로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하아.”

    피로가 응축된 한숨이 길게 흩어진다.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사월 사장이 뭐라고. 도대체 내가 이렇게 휘둘려야 하는 거지.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 더는 생각 말고 내 길을 가면 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세뇌를 시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월과 함께했던 찰나가 원재에겐 너무 깊고 짙었다.

    “……어디 있는 거야.”

    답답함을 이겨 내지 못한 통탄이었다. 사월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보고는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사실 원재는 평정심을 유지하기도, 태연하기도 어려웠다. 함께한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길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감내하는 중이었다.

    사월이 없어지고 한동안은 미친 사람처럼 지냈다. 복수고 뭐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사월 하나만 생각하고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날은 화가 나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떠난 걸까. 나와 있으면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당했던 게 질려서? 내가 믿음을 주지 못해서? 곁에 있을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내게…… 진심이 아니어서?

    아무리 온갖 가정을 끼워 맞춰 보아도, 다 맞는 말 같았다. 모든 원인은 자신에게 있으리라 원재는 생각했다. 그게 감내하는 이유였다. 자신에게 내리는 형벌과도 같은.

    “……비 오네.”

    원재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요 며칠 이상 기온 탓인지, 눈과 비 사이의 눅눅한 것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원재는 힐끔 핸드폰 액정을 살폈다.

    비가 올 때면 꼭 사월에게 연락이 올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한 원재는 피곤한 눈 위를 꾹꾹 누르며 헛웃음을 쳤다.

    “오늘도 집에 들어가긴 틀렸네.”

    오늘 같은 날이면 사월의 향기가 미약하게나마 남은 집에 발을 들일 수가 없다. 함께 자던 침대에 누울 수도, 나란히 마주 보고 밥을 먹던 식탁에도 앉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제 비가 오는 날이면 원재는 잠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날 못 자.”

    언젠가 사월이 그랬던 것처럼.

    ***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골목에는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떨어지는 빗소리만 기척을 낼 뿐이었다. 원재는 스토크 문을 활짝 열어 두고 현관에 기댄 채였다. 사월이 종종 서서 담배를 태우던 그 자리. 원재의 손가락에도 반쯤 탄 담배가 걸려 있었다.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자리 비웠길래 어딜 갔나 했네. 또 거기 간 거야?

    “조금만 있다가 갈게. 형은 들어가.”

    또 병원을 가 보라는 둥, 약을 빼먹지 말라는 둥 헛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최 비서는 꽤 순순히 전화를 끊었다.

    “후우.”

    원재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빗줄기 사이로 연기가 퍼진다.

    가끔 정말 사월이 너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을 때면 스토크를 찾았다. 그래도 이곳엔 사월의 손길이 남아 있으니까. 원재에게 보여 주었던 도안 스케치도, 원재의 이름이 덩그러니 써진 포스트잇도 벽에 그대로였다.

    담배를 지져 끈 원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곤 익숙하게 테이블 위로 향한다. 여러 권의 크로키 북이 흩어져 있다. 개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을 집어 든 원재가 천천히 종이를 넘긴다.

    거품이 인 생동감 넘치는 파도와 모래사장. 그리고 한가운데 털썩 앉아 있는 남자 하나. 사월이 본 생애 첫 바다 풍경이었다.

    “……바다에 정신 팔린 줄 알았더니.”

    그때 사월은 원재를 꽤 유심히 관찰한 모양이었다. 풀어헤친 단추도, 접어 올린 소매도, 뜨거운 햇살에 한쪽 눈을 질끈 감은 것도. 사월은 원재를 꽤 디테일하게 그려 놓았다.

    애틋하게 그림 위를 조심스레 훑는다. 사월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갔던 곳이지만, 이제 더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원재는 곧 차가운 손끝을 말아 쥐었다.

    지잉.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전화가 진동했다. 방금 통화를 했던 최 비서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액정에 뜬 숫자는 처음 보는 낯선 번호였다. 눈에 익지 않는 지역 번호를 앞에 붙인 숫자의 배열은 한참이나 화면을 밝힌다.

    원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변호사도, 기자도, 김진우 씨도 아닌데. 애초에 이 번호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이 시간에 누구일까. 그렇게 갈등하는 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고개를 기울인 원재가 핸드폰을 뒤집으려던 사이 곧장 또 진동이 울린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시죠.”

    ―성원재 씨 맞으신가요? 여기 자인 병원 응급실입니다!

    원재의 가슴에 불길함이 스쳤다. 이 늦은 시간에 응급실에서 전화가 걸려 올 일이…… 있었던가?

    “응급실이요?”

    ―저장된 번호가 이것밖에 없어서 연락드렸어요! 환자분 핸드폰이 발신 정지 상태라서요.

    다급한 목소리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쏟아진다. 원재의 연락처만 덩그러니 저장된 발신 정지 핸드폰.

    그 이후의 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끝이 저릿저릿하며 피가 돌기 시작한다. 굳어 있던 심장이 이제야 제 역할을 하듯 쿵쿵 뛰어 댄다. 목울대가 울렁인다. 입 안이 퍼석하게 마른다.

    “위치가, 어디죠?”

    ―대천이요, 대천 자인 병원 응급실!

    원재의 시선이 크로키 북에 닿았다 떨어졌다. 예측컨대 원재의 번호만 저장해 둔 환자는 사월이리라. 전화가 걸려 온 곳은 원재와 함께 갔던 바다가 있던 장소이니 말이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킨다.

    “지금…….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가는 길은 대충 머릿속에 그려졌다. 비가 내리는 탓에 얼마나 지체될지 모르겠지만, 빠르면 두 시간 이내로 도착할 수 있다. 시간 계산을 하며 원재는 비를 뚫고 길을 나섰다.

    원재는 생각했다. 비가 오는 오늘, 억지로 약에 취해 잠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

    여름 초입의 해변은 고요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와 비릿한 바람이 사월의 곁을 맴돌았다. 사월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 두고 해변에 한참이나 멀뚱히 앉아 있었다. 현금으로 두둑한 지갑과 꺼진 핸드폰도 옆에 둔 채였다.

    바다는 처음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손안에서 부서지는 모래도, 무섭도록 철썩이는 파도도. 모두 자신처럼 건조해 보였다. 따뜻한 온기도 생동감 넘치던 생명력도. 시커멓고 차갑고 서늘하기만 하다.

    등 뒤로 가끔씩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사월은 바닷속에 중요한 무언가를 두고 나온 사람처럼, 칠흑 같은 파도만 바라봤다.

    “하아.”

    한숨이 터졌다. 애초에 이곳으로 올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월이 갈 수 있는 장소는 손에 꼽혔다. 가 본 곳이라고는 출장을 다니던 나이트, 모텔. 아니면 원재의 집뿐이었다.

    가게는 이미 노출된 지 오래라 돌아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모든 장소를 제외하고 나니, 남은 건 바다였다. 원재와 함께했던 바다.

    지금이 몇 시인 줄도 몰랐다. 꺼 둔 핸드폰을 켤 용기가 없었다. 정신없이 산에서 내려와 이곳저곳을 헤맸다.

    원재의 내비게이션에 찍혀 있던 해변의 이름을 겨우 기억해 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원재가 찾아올까, 묵었던 곳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해변의 끝자락에 다다라 사월은 털썩 주저앉았다.

    사위가 잿빛으로 변해 갈 즈음부터 자리를 지키던 사월의 그림자는 이제 어둠에 뒤섞여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사월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러곤 천천히 파도를 향해 걸었다. 파도가 위협적으로 사월을 향해 입을 벌린다. 새하얀 거품과 모래가 뒤엉켜 사월의 발등을 덮는다. 물에 적셔진 부분의 체온이 식는 기분이 들었다. 푸시식. 김이 나며 뜨거운 체온을 뒤덮듯.

    그 감각이 싫지 않았다. 원체 열이 많고 더위를 잘 타서일까. 점점 무릎 위까지 차고 드는 찬기를 더 느끼고만 싶어졌다. 발바닥 아래로는 까슬한 모래가 밟힌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철썩이는 파도의 소리에 드넓은 바다의 웅장한 기운이 밀려들어 온다. 사월의 허리춤까지 물이 찰랑였다. 물결이 크게 치고 사월이 뒤로 휘청거렸다. 사월을 밀고 지나간 파도는 뭍에 다다라 하얗게 부서지고 만다. 어깨까지 파도가 넘실댄다.

    “안……, 그만……!”

    물기 어린 파장 사이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그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뒤에서 훅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허리춤과 팔뚝을 잡아끄는 손길. 사월은 물속에서 발버둥을 쳤지만 바닷물에 짓눌려 속절없이 끌려갔다.

    물을 먹어 축 늘어진 온몸이 모래 위에 털썩 쓰러졌다. 머리맡에서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월의 몸이 잘게 떨린다. 젖은 어깨 위로 작은 주먹이 몇 번 닿았다 떨어진다.

    “하이고야. 안 돼, 안 돼. 그러지 말어.”

    사월은 아무 감정 없는 사람처럼 텅 빈 눈으로 고개를 틀었다. 오십은 훌쩍 넘어 보이는 부부였다. 남자는 사월과 똑같이 온몸이 젖은 채로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아 있다. 여자는 붉어진 눈시울을 하곤 사월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면서도 꾹 잡은 옷소매는 놓지 않는다. 사월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목숨 그렇게 쉽게 버리면 안 되지……. 가족들이 얼마나, 얼마나 슬퍼하겠어.”

    여자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아마 사월이 목숨을 끊기 위해 바다를 헤집고 들어간 걸로 아는 듯했다. 전부 맞는 말은 아니지만, 또 틀린 것도 아니었다.

    사월은 애초에 삶에 대한 미련이 별로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미련이 없기에 주위에 관심 또한 없었다. 살필 여유가 없다는 쪽이 더 정확한 말이었다.

    그래서 소주 이름이 그대로 써진 앞치마를 벗지도 못하고 달려온 부부가 이해되지 않았다.

    “반나절을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게 영 이상하다 했어! 이럴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총각?”

    말끝에는 울음이 잔뜩 엉겨 붙어 있다. 사월은 여자의 말에 조금도 동조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자신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해 보이는지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사월은 낡은 가방에 크로키 북과 연필을 욱여넣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어중간한 때였다.

    겨울 횟집 장사는 애매했다. 겨울 바다를 보기 위해 들른 뜨내기손님이 주였다. 그마저도 저녁 장사가 조금 더 잘됐다. 근처 숙박업소에 머무는 사람들이 저녁을 먹으며 한잔하기엔 더없이 좋았으니까. 그래서 이 시간이면 사월은 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곤 했다.

    반년을 지내면서 굳어 버린 패턴이었다.

    “사월이 또 어디 가?”

    “방파제.”

    식탁에 앉아 지루한 표정으로 드라마 재방송을 보던 아주머니가 일어난다.

    반년 전, 파도를 헤치고 들어가던 사월을 구한 부부였다. 부부는 사월을 방 안에 들였다. 달달 떠는 사월에게 약을 주고 밥을 차려 주고, 따뜻한 옷을 내어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줬다.

    “아저씨는 5시쯤에 들어와.”

    “알았어.”

    부부가 사월에게 절박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부부에겐 사월 또래의 아들 하나 있다고 했다. 빚더미를 끌어온 뒤, 수년째 연락이 되지 않는. 간혹 해가 바뀔 때 연락이 오는데, 필리핀인지 중국인지 하도 말이 바뀌어 정확하지도 않다고 했다.

    날로 몸집을 불리는 이자는 오롯이 부부의 몫이었다. 거기까지 듣고 사월은 현금이 든 지갑을 부부에게 내밀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걸 보고 아주머니는 오열을 했었다. 사월은 아직까지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늦지 말구. 조심히 갔다 와.”

    사월은 그날 이후 이 집에 머무르게 됐다. 불편해하는 사월 탓에 물론 조건이 덧붙여졌다. 부부가 내건 조건은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만.

    사월의 조건은…….

    “갈게.”

    원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그게 말처럼 쉽게 될 리가 없다.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뜻대로 되지를 않는 걸 보면. 차라리 죽어 버려 아무 생각도, 자각도 없다면 쉽지 않을까. 사월은 가끔 황망한 사념에 휩싸인다.

    그래서 오늘도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에, ‘다녀오겠다’는 대꾸 대신 ‘갈게’라고 대답할 뿐이다.

    사월은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을 뚫고 달렸다. 아저씨의 자전거를 타고 조금 떨어진 방파제까지 향했다. 낚시를 하거나, 근처 횟집에서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해 오는 곳이었다. 그래 봤자 열 명도 채 되지 않아 조용한 곳이었다.

    자전거를 한적하고 바람이 덜 드는 곳에 세우고, 그림을 그린다. 생각을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이만한 게 없었다.

    요양 병원에 있는 동안 재활이 꽤 잘된 턱에, 오른팔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움직였다. 무거운 것을 들거나 팔을 쭉 펼 때 뻐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연필을 쥐고, 미세한 터치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사월은 안도를 느꼈었다.

    “다 써 가네.”

    벌써 꽉 찬 크로키 북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손이 가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이제 남은 종이는 세 장뿐이었다.

    시내에 들러야겠다. 다 낡아서 따뜻해 보이지도 않던 아저씨 목도리도 하나 사고, 갱년기라 열이 갑자기 오른다고 한겨울에 부채질을 하던 아주머니에게 드릴 영양제도 사야겠다.

    그러고 나서 돈이 되면 크로키 북을 몇 권 더 사 두고……. 사월은 가방에 들어 있을 현금 내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지갑이 잘 닫히지 않을 만큼 두둑하던 현금은 반으로 줄었다. 식비도 숙박비도 받지 않는 횟집 부부 덕분이었다. 오히려 일손을 도우면 일당을 챙겨 주기까지 했다.

    사월은 그 돈을 그림을 그리는 데, 그리고 나머지는 부부를 위해 썼다. 마땅히 그럴 돈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깝지도 않았다.

    “아저씨가 5시에 온다고 했나…….”

    퇴근이 5시일 때도, 5시 반일 때도 있어서 늘 헷갈렸다. 어찌됐든 그 전에 도착하려면 슬슬 움직여야 했다.

    사월은 가방에서 구닥다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4시를 막 넘어간 시간이었다. 전화를 걸 수도 받을 수도 없지만, 늘 충전을 하고, 어딜 나갈 때면 소중하게 들고 다니는 거였다.

    충전기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아저씨가 어디서 간신히 얻어 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영영 켜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잊고 싶기도, 잊고 싶지 않기도 한 단 한 사람의 연락처가 담겨 있는.

    “얼마 안 남았네.”

    아대를 낀 오른쪽 손목 위를 습관처럼 매만지고, 서둘러 가방을 챙긴 사월은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처음 아저씨에게 자전거를 빌려 탄 날에는 방파제 한구석에서 엄청 울었었다.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이유를 무감히 설명하던 원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자전거를 타며 몇 번 더 원재를 그렸지만, 이제는 울지 않는다.

    “…….”

    서늘한 코끝이 찡해졌다. 사월은 찬바람 탓이라 스스로 세뇌하며 페달을 밟았다. 완만한 곡선 커브를 천천히 돌 때였다.

    끼익― 쿵!

    인적이 드문 곳이라 속력을 높이고 달려오던 차에 그대로 자전거가 부딪힌다. 차체 앞이 푹 파이고, 자전거 앞바퀴는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아…….”

    사월의 흐릿한 시야로 급하게 후진하는 하얀 차가 보였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자전거의 뒷바퀴, 바닥에 흩어진 크로키 북과 연필, 그리고 매일 충전해서 들고 다니는 낡은 핸드폰. 희미해지는 감각 사이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냄새. 사월은 눈을 감았다.

    그 와중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잘 갔다 올게’가 아닌, ‘갈게’라고 대꾸한 것에 대해.

    부모도 집도 버리고 나간 아들을 기다리듯. 횟집 부부가 또 저를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아마도 꿈이지 싶었다. 선명하지 않은 시야의 경계는 안개가 낀 듯 뿌옇다. 풍경은 익숙했다. 매일 보는 그 바다를 사월이 혼자 거닐고 있었다.

    걸음을 멈췄다. 반짝이는 윤슬에 시선을 빼앗긴다. 적당히 짠 내와 눅눅함을 지닌 바람이 사월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린다.

    “뭘 그렇게 정신을 놓고 봐.”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깨 위로 품이 큰 재킷이 걸쳐진다. 순식간에 뜨거운 온기와 은은한 향기가 사월을 뒤덮는다.

    사월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꿈이다, 이건 꿈이다. 그를 놓지 못한 나머지 꿈속까지 나타나는 거다. 스스로를 인지시켰다. 그러곤 잘게 떨리는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시야에서 걷어 내며 여상히 대답한다.

    “예쁘니까.”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볼이 따가울 만큼 올곧이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이 와닿았다. 사월은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아무리 꿈속이래도 원재를 마주하기는 힘들 거 같아서.

    “왜.”

    “…….”

    “할 말 있어?”

    원재가 고개를 젓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마 위로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흩어지겠지. 보지 않아도 사월의 눈앞에는 원재의 모습이 고스란히 그려졌다. 사월은 목덜미를 주무르며 혼잣말처럼 작게 웅얼댄다.

    “그럼 뭘 그렇게 빤히 봐…….”

    “예쁘니까.”

    결국 사월은 스스로를 이기지 못한다. 그렇게 잊고 싶던, 아니 사실 잊고 싶지 않던 얼굴을 마주한다.

    입매에 걸린 작은 웃음. 사월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철썩철썩. 파도가 요란스럽게도 친다. 두 사람은 그런 소음 따위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닿은 시선을 놓지 못한다.

    “그때도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때라면 자신과 함께 왔었던 날을 뜻하는 걸까. 사월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간 메마르고 갈라져 황무지였던 마음의 갈증을 채워야 했다.

    물을 정신없이 빨아들이는 식물의 뿌리처럼 사월은 원재의 모든 것을 담았다. 올곧은 다정한 시선도, 입술 끝에 걸린 웃음도, 뺨을 만지는 단단한 손끝도. 부드러운 목소리도.

    이거면 됐다. 이거면 또 반년은 살아갈 수 있으리라, 사월은 생각했다.

    ***

    원재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급하게 걸려 온 최 비서 전화에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실핏줄이 다 터진 눈은 새빨간 잉크가 섞인 듯 붉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오래 방치된 채로 있었던 거 같아요. 체온도 많이 떨어져 있었고, 출혈도 꽤 심했고요.”

    사월은 자신과 함께 왔던 바다 근처에 머물고 있는 중인 듯했다. 원재가 직접 내려가 이 잡듯 뒤졌는데도, 왜 놓친 걸까. 원재는 자괴감으로 속이 썩어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였다.

    자신이 놓쳐 버린 사월은 인적이 드문 방파제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언제 사고가 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서너 시간은 길 위에서 방치됐을 거라 했다.

    추위가 한풀 꺾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저체온으로 쇼크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원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정말 사월을 영영 잃을 수도 있었다는 충격이 온몸을 거세게 덮쳐 왔다.

    병실로 옮겨진 사월을 보곤 또 한 번의 충격에 휘청댔다. 눈에 띄게 마른 몸과 까칠해진 얼굴 때문은 아니었다. 링거가 꽂힌 오른 손등을 따라 시선을 쭉 내리면 보이는 손목뼈. 요양 병원에 있을 무렵부터 아대를 차던 위치였다. 그 아래로 그어진 십 수 개의 획.

    元材.

    원재의 이름이었다.

    물론 원재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의 네임일 수도 있다. 사월 손목에 발현된 글자가 자신의 이름이라 확언할 수는 없다. 이미 자신의 옆구리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원재는 왜 사월의 손목에 제 이름이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다만, 왜 지금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왜. 왜 지금. 사월이 자신을 떠난 뒤에. 하필이면. 더 일찍일 수는 없었던 걸까.

    눈을 뜨지 않는 사월의 곁을 지키며 원재는 내내 생각했다. 눈에 가장 잘 띄는 손목 위. 그곳에 네임이 발현됐을 때. 사월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걸 내려다봤을까. 네임을 핑계로 내 곁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걸까.

    엄지손가락이 이름 위를 부드럽게 매마진다. 마른 손목 위에 새겨진 글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찰나였다. 사월의 손끝이 경련하듯 짧게 떨렸다. 원재는 숨을 멈췄다.

    “……사월아.”

    이름이 드디어 주인을 찾았다. 그간 어디에도 닿지 못해 허공에 흩어져 버리기만 했던 부름. 생경한 감각에 원재는 입 밖으로 사월의 이름을 몇 번이나 발음했다.

    “사월아. 내 목소리 들려? 사월아.”

    눈꺼풀이 바르르 떨린다. 눈두덩 위로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이는 윤곽이 드러났다. 원재는 침착하게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사월의 손끝을 조심히 쥐었다.

    “정신 들어?”

    “…….”

    이윽고 눅눅한 바닷가에서 헤매기만 하던 사월이 드디어 뭍으로 올라왔다. 코끝에는 소독약 냄새가 느껴졌고, 손끝에는 찬바람 대신 따뜻한 온기가 머문다. 매섭고 차가운 파도가 아닌 가습기의 뿌연 김이 시야에 들어찼다.

    그럼에도 사월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중이라 단정 지었다.

    “……나, 보여? 누군지 알겠어?”

    “…….”

    원재는 애가 탔다. 겨우 깬 사월이 다시 눈을 감을까 봐. 눈앞에 있는 자신을 외면할까 봐. 절박하게 눈을 맞추고 체온을 옮긴다. 그럼에도 사월의 눈은 그저 느릿하게 감겼다 떠지길 반복할 뿐이었다.

    “아직……, 꿈이야…….”

    힘이 없이 흐릿한 음성이었다. 사월은 겨우 그 한마디만 던지고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덜 현실적인 원재를 마주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잠이 쏟아지지 않아도 눈을 꼭 감았다. 칠흑같이 검은 시야에 원재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월아.”

    귓전에 낮은 목소리가 이명처럼 퍼진다.

    눈을 감아도 꿈이었고, 눈을 떠도 꿈속이었다.

    ***

    [재개발 특혜 및 뇌물 청탁, 투약 혐의로 기소된 성탁 건설 성장우 회장 공판이 오는 3일 열립니다. 성 회장이 비리 혐의와 뇌물 청탁 등 얽힌 모든 의혹을 강력히 부인한 가운데. 익명의 공무원이 증인 신청을 하며, 공판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습니다.]

    병실에는 딱딱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렀다. 원재는 리모컨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앵커의 목소리가 전부였던 병실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김진우 씨의 증인 신청 타이밍은 철저한 계산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새로운 국면이라 표현할 만큼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은 소재였다. 아들이 아버지의 비리를 폭로하고 법적 분쟁을 벌인다는 타이틀만큼이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원재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었다. 재개발이란 민감한 사안에 무력 진압과 특혜가 얼버무려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성 회장은 깃발을 물고 있는 모래 더미 꼴이었다. 아주 작은 손길에도 깃발을 떨구고 와르르 무너져 버릴.

    긍정적인 상황임에도 마음은 영 가볍지가 못했다. 아버지를 제 손으로 기소시킬 때와는 달리 일분일초가 불안하고 초조하고, 애가 탔다. 시간이 지났기에 조금은 초연해졌을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사월은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원재의 감정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

    원재의 시선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는 사월에게 떨어진다. 사월은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현실을 회피하듯, 혹은 원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듯.

    ‘몰라’. 정신이 들고 난 뒤 사월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 그마저도 입술을 떼면 다행이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며 털을 세우는 짐승처럼 사월은 날을 세웠다.

    좆같지만 이유는 꽤 충분했다. 사고의 충격. 충격의 여파. 여파로 인한 단기 손상. 꼬리를 물며 이유들이 하나씩 덧붙여진다.

    “정말 간혹이지만 이런 경우가 있긴 있어요. 드문 일은 아닙니다. 검사상으로 뇌진탕 증세 외에 큰 이상이 없으니, 조금 시간을 갖고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월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낯선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그조차도 오래 마주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간호사와 의사들을 대하듯, 원재에게도 똑같이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의사는 충분히 회복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재도 그래야 하는 이유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손목에 지닌 채, 거리를 두는 사월을 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

    “……만지지 마.”

    한참이나 사월의 손목을 매만지느라, 그가 일어난 줄도 몰랐다. 원재는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찰나일지라도 시선이 마주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었다.

    사월은 손을 비틀어 빼려 했지만, 원재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체념하듯 공허한 눈이 원재를 향하다 이내 새하얀 천장으로 움직였다.

    “여기.”

    “…….”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원재의 손가락이 손목 위를 맴돌았다. 사월의 소지품 사이에 있던 아대는 치워 버렸다. 그걸로 또다시 이름을 감추듯 가려 버릴까 봐서. 네임은 번짐 없이 정갈하게 드러난 채였다. 사월은 고요하게 눈을 깜빡였다.

    “따갑거나 타들어 가는 통증 없어?”

    네임을 만나면 응당 느낀다는 증상을 읊어 댔다. 절박하고 미련이 짙은 음성이 이어진다. 허나 사월은 조금의 틈을 주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는 늘 너를 보면서 느끼고 있는데. 너는 아니구나.

    “……놔, 아파.”

    “아, 미안.”

    순간 손목을 꽉 움켜쥔 탓에, 하얀 살결 위로 붉은 기운이 몰렸다. 원재는 아프다는 말에 황급히 손을 떼어 냈다. 시트 위에 늘어진 사월의 하얀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억을 잃는다고 해서 성정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살가운 성격이 아닌지라 짧은 대화 뒤에는 침묵이 뒤따랐다.

    “머리 아프거나 어지러우면 얘기해. 간호사 불러 줄 테니까.”

    원재는 그렇게 말하곤 의자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젓느라 살짝 흐트러진 사월의 머리칼을 정리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손끝에 남은 거즈의 촉감. 원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길로 향한 곳은 조금 떨어진 자리의 소파였다. 기억에 없는 사람. 혹은 모르는 사람. 지금 원재의 위치는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해서 원재는 모르는 사람이 두어야 할 거리를 벌린 채로 떨어졌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크로키 북을 집어 들었다. 자신을 기억하던 순간의 사월이 남긴 흔적이다. 종이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연필로 그린 그림이었다.

    원재가 익숙한 손길로 몇 장을 더 뒤로 넘긴다. 그 사이에 드문드문 써진 제 이름을 보기 위해서.

    성원재. 성원재. 잊지 않기 위해 그렇게 몇 십 번이고 적어 두었으면서. 왜 지금은 기억하지 못할까. 입 안에서 쓴맛을 빙자한 상실감이 느껴졌다.

    “……나, 사탕 먹고 싶어.”

    “사다 줄까?”

    온 신경을 사월이 누운 베드를 향해 쏟고 있던 원재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사월의 입에서 나온 게 담배나 커피 따위가 아니라 사탕이었다는 게 놀라웠지만, 그럴 틈도 주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소파 팔걸이에 걸어 둔 재킷을 챙겼다. 곧장 달려 나가 사탕을 쓸어올 것처럼 움직이던 원재가 머뭇댔다.

    지금은 최 비서도, 병실 앞을 지킬 사람도 없다. 자신이 나가면 사월은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기억을 잘 못 한다 할지라도, 혹시라도. 만에 하나 혹시라도…….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까지 가는 데는 2분 남짓일 것이다. 왕복이면 채 5분도 되지 않을 테고. 사탕 사고 계산하는 것까지 해도 6분을 넘지 않겠지.

    딱 6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사월을 혼자 두어도 괜찮을까.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원재의 귓가에 옅은 목소리가 와닿는다.

    “박하사탕.”

    할 수 있다면 밖에서라도 문을 잠그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년간 이어진 공백은 원재에게 불안감을 심고 의심을 싹틔웠다. 물론 사월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변수가 있기는 했지만.

    “……어려우면 내가 가고.”

    “아냐. 누워 있어. 어지러우니까.”

    사월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굴자, 원재가 병실 문고리를 잡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 계단을 이용하면 더 단축할 수 있겠지. 편하게 누워 이불을 덮고 있는 사월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곤 원재는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병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상구 문을 열어젖혔다.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 내려간다. 물을 떠다 달라는 거나, 식판을 치워 달라거나. 그런 사소한 부탁도 사월은 하지 않았다. 모든 건 부탁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원재가 해결했으니까.

    그러니까 사탕을 사다 달라는 꽤 깜찍한 부탁은 깨어나고 처음으로 하는 요구였다. 원래도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과는 성격이 멀었던지라, 아주 사소하고 작은 부탁에 굳이 의심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와중에 박하사탕이 사월의 취향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1층 비상구 문을 벌컥 열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원재가 지날 때마다 그 자리에는 바람이 일었다. 권태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르바이트생을 지나 곧장 간식거리가 있는 코너로 향했다.

    박하사탕……. 눈으로 빠르게 사탕 포장지를 훑었다. 형형색색의 포장지 사이에 하얗고 파란 단출한 사탕을 두 봉지 집어 들고 카운터에 올렸다. 여기까지 딱 2분이 걸렸다.

    카드를 빼앗듯이 받아 들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가는 길에 힐끔 본 엘리베이터는 막 1층을 지나 지하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비상구 문을 벌컥 연 원재가 정신없이 계단을 밟아 오른다. 호흡 하나 흐트러질 틈 없이 빠른 움직임이었다.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4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4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건조된 면을 다 익힐 수 있는 시간. 노래 한 곡을 들을 수 있는 시간. 지하철 역 하나를 건너갈 시간.

    “…….”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탓이었다.

    흐트러진 시트는 위태롭게 반쯤은 침대에 매달려 있었다. 캐비닛은 완전히 닫히지 않고 한 뼘 정도 열려 있다. 그 사이로 옷걸이가 비죽 머리를 내밀고 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사월은 보이지 않았다. 빈 베드를 본 원재가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 안에 딸린 욕실 문을 열었다. 두 평 남짓의 작은 공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순간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착각을 느꼈다. 원재는 발밑을 확인했다. 자신이 서 있는 곳 아래에 피 웅덩이가 고여 있을 줄 알았다.

    “……하.”

    사라질 이유가 없다. 사월은 지금 몸도 성치 않고 기억도 온전치 않다. 그런데 왜. 낯선 자신과 있는 게 견디기 힘들어서?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아서?

    호흡이 가빠졌다. 원재는 폭주하듯 날뛰는 머릿속을 애써 잠재웠다. 사월은 아직 환자였다. 그 틈에 멀리 도망가는 건 힘든 일이다. 아니, 도망을 간다 해도 멀리 갈 수는 없다. 침착하게 재킷 주머니를 뒤져 차 키를 꺼냈다. 손끝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서늘한 날을 세운 얼굴로 너스 스테이션으로 향한다. 차트를 들여다보는 간호사 하나와 막 수화기를 내려놓는 간호사까지 둘이 있었다. 원재는 그 앞에 가서 섰다. 큰 그림자가 지자 차트를 보던 간호사가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예. 무슨 일이세요?”

    “303호 환자 여기 지나갔습니까?”

    “아……. 아뇨. 저는 못 본 것 같은데. 혹시, 303호 환자 봤어?”

    “네. 병실에 안 계세요?”

    이곳을 지나지 않았다면 비상구를 이용한 게 틀림없다.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계단을 내려간 거다. 원재가 두세 개씩 밟아 내려갔던 그 길을 똑같이.

    “……아닙니다.”

    원재는 손에 든 키를 꽉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향한 곳은 비상구였다. 멀리 못 갔을 거다. 편의점에 간 자신을 뒤따라온 걸지도 모르니까.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가정하며 원재는 1층으로 내달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아까 전 들렀던 편의점 안을 훑었다. 없다. 역시나.

    늦은 시간이지만 로비는 꽤 붐볐다. 가운 차림의 의사와 간호사들. 환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그 곁에 선 보호자들. 그 사이를 뚫고 사월이 사라졌다. 머리가 지끈대고 귀 뒤의 연한 살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욱신댔다. 인상을 찌푸린 원재가 로비를 가로질렀다.

    도망을 갔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신기하게도 머리가 차분해졌다. 아까처럼 넋 빠진 것처럼 굴지 않고, 침착하게 차를 찾아 시동을 걸고 주변의 길을 떠올렸다.

    병원에서 큰 도로로 이어지는 길은 하나였다. 뒤편엔 높은 담이 설치되어 있고, 흡연실이 자리했다. 사월이 무리하게 흡연실까지 갈 이유는 애당초 없었다. 발견된 사월의 소지품에는 담배가 없었으니까.

    원재는 침착하게 액셀을 밟았다. 끼익. 줄을 맞춰 서 있던 차가 앞으로 튀어 나간다. 어둠을 뚫고 곧장 도로에 끼어들었다.

    큰길로 나와 차를 인도에 가깝게 붙이곤 속도를 늦췄다. 가게 간판과 가로등 빛이 있지만, 혹시라도 사월을 그냥 지나칠까 봐서. 뒤차가 빵빵대며 차선을 바꾸는 것에도 원재는 아랑곳 않고 보행자들을 훑었다.

    50미터를 채 가지 않아 사거리가 나왔다. 원재는 지체 없이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도망칠 생각을 한 거라면 신호등을 기다릴 여유 따위는 없을 테니까.

    “…….”

    예상은 적중했다. 핸들을 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재킷을 걸친 마른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바지는 채 갈아입지 못해, 새하얀 환자복 차림 그대로였다.

    불편해 보이는 걸음은 수고스럽게도 바삐 움직였다. 그 모습에 원재는 가슴이 한쪽이 쓰렸다. 아랫입술을 물고, 비상등을 켰다.

    곧장 차에서 내려 힘겹게 다리를 옮기는 인영 앞을 막아섰다. 신발부터 천천히 타고 올라온 시선과 마주했다.

    사월의 눈이 커진다.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재킷이 구겨진다. 머리칼은 형편없이 흩어져 있었다. 이마의 반을 뒤덮은 거즈는 좀 전과 같았다. 숨이 가쁜지 마른 몸이 들썩인다.

    “…….”

    “…….”

    둘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두 사람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아무 관심도 두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원재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동공을 놓치지 않고 옭아맸다. 사월의 시선에서 낭패감이 스쳤다. 그리고 확신했다.

    “너.”

    “…….”

    “다 기억하는구나.”

    나를 속이고 있었어, 계속.

    반년을 숨어 있었던 사월이었다. 또 한 번 자신을 떠나려고 기를 쓰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4분, 그 짧은 시간을 기회 삼아. 사월의 입술 사이에서 하얀 연기가 흩어졌다. 원재는 절망과 상심 그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원재는 그날 응급실에서 걸려 온 전화를 잊지 못한다. 사월을 다시 찾을 수 있었던 순간이자, 원재의 숨통이 다시 트인 순간이니까.

    하지만 사월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죽은 듯 살던 그 반년의 시간이 더 소중했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 또…….

    “왜…….”

    이제는 의문이 일었다. 왜? 왜 기억을 못하는 척까지 해 가면서 나를 속였어? 나를 방심하게 해 놓고, 도망을 치는 이유가 뭐야? 이제야 겨우 닿았는데, 왜 다시 나를 떠나려고 해?

    그렇게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할까. 입술 안의 여린 살을 베어 무는 사월을 보며 원재는 감히 추측했다.

    한 번 맛본 행복이 두려워 그랬다, 사월이라면 그렇게 대답하리라고. 그래서 원재는 질문을 채 완성시키지 못했다.

    비가 징후도 없이 내린다. 투둑―, 투둑. 회색빛 바닥 위로 검은 얼룩이 하나둘 늘어 간다. 사람들은 다급한 걸음으로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달린다.

    두 사람은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하는 겨울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머리카락과 재킷 위에 매달린 빗물은 투명한 막처럼 두 사람을 감싼다.

    “…….”

    숨을 들이켤 때마다 찬바람이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사월은 작게 기침을 했다. 원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급하게 오느라 재킷도 챙기지 못한 게 아쉬웠다.

    몸도 아픈 사월을 계속 이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아까부터 몸속에서 들끓던 한숨이 겨우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시커먼 허공 위로 하얀 연기가 흩어진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

    “너 이렇게 오래 있으면 안 돼.”

    날카롭게 뻗치려는 음성을 간신히 잠재운 원재가 손을 뻗었다. 마른 팔뚝을 잡는 조심스러운 손길. 사월은 뒤로 한 걸음 무르며 고개를 저었다. 부정 혹은 거절의 표현이었다.

    그 거리를 확인한 원재가 낯을 차갑게 굳혔다. 시야가 뒤틀리며 머리가 차가워진다. 서늘한 시선을 피해 사월은 고집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안 가. 너랑은.”

    사월의 입으로 듣는 거절의 말은 언제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원재는 순간 목구멍이 꽉 틀어막힌 기분을 느꼈다. 뒷목이 뻣뻣해졌다. 차가워진 손끝을 말아 주먹을 꾹 쥐었다.

    엉킨 실을 겨우 풀었더니, 또 하나의 실타래가 손에 쥐어졌다.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담았다 뱉는다. 속 안이 들끓기 시작한다.

    “……가.”

    “싫다고.”

    “설명이든 변명이든 난 들어야겠어. 말 들어.”

    싸늘한 표정과 말투. 그토록 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사월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며 씁쓸함을 삼켰다. 입술에 닿았던 차가운 비 맛이 느껴진다.

    “따라와.”

    반항할 틈도 없이 거친 손길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성큼성큼 앞서 걷는 원재를 버겁게 따라갔다. 열린 조수석 사이로 밀어 넣는 바람에 사월의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다. 쾅. 짧고 굵은 마찰음을 낸 문이 닫혔다.

    뛰듯이 운전석으로 돌아온 원재가 벨트로 사월을 옭아맸다. 병원이 코앞이지만,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할 듯했다.

    무거운 침묵이 공기를 짓눌렀다. 사월은 초조한 낯을 숨기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늘 손목에 차고 다니던 아대 대신 원재의 손가락이 감겨 있는 것을 깨닫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 척, 어설픈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갈 의지도, 아무 미련도, 마음도 없는 사람처럼 굴다 틈을 봐서 도망가려고 했다.

    방금도 횟집으로 가려고 마음먹었었다. 길은 아직 잘 몰라도 물어물어 가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든 가야 했다. 원재에게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반년이야. 내가 사월 사장을 미친놈처럼 찾아다닌 게.”

    “…….”

    “씨팔, 내가 너무 싫어서. 같이 있는 것도 좆같아서 도망친 거라고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돼서. 미친놈처럼 찾았어.”

    음성의 고저가 크게 요동친다. 원재라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갈수록 부자간의 싸움이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걸 보면서는 원재도 이젠 지쳤으리라 여겼다. 자신도 우위에서 밀려났겠다고 단언했고.

    그래서 잠깐 눈을 떴을 때 원재를 보곤 꿈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네가 여기 있다는 전화를 받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 거 같아.”

    “…….”

    “내가 싫은 거면 내 번호를 지웠겠지. 같이 왔던……, 여기로 오지 않았겠지.”

    사월은 원재의 마음을 함부로 재단했던 일에 대해 벌을 받고 있다. 발가벗겨진 채 원재의 앞에 놓인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애써 감추고 숨겼던 마음이 속속들이 들춰진 사람처럼, 원재의 말을 듣고만 있다.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그게 뭐든 이해해 줄 생각 별로 없어. 중요한 건 내가 너를 찾았고…….”

    시동을 끈다. 희미하게 들리던 엔진 소리가 이내 멎었다. 원재가 고개를 돌려 사월을 바라본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시선이다.

    “두 번은 안 된다는 거. 방금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축축해진 사월의 머리카락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거즈를 덧댄 이마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 뺨을 가로지른다.

    ***

    간호사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비를 쫄딱 맞은 두 남자를 보고 놀랐다. 원재는 타인의 시선이 사월에게 닿자 사납게 얼굴을 구겼다. 사월은 밀어 넣듯 병실 안으로 들여보내고, 간호사와 짧게 말을 나눴다.

    사월은 타인의 공간에 들어온 사람처럼 불편하게 몸을 굳히고 서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박하사탕을 발견한 탓이었다. 명치가 찌르르 울렸다.

    손목에 네임이 발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요양 병원에서 지내고도 꽤 지난 무렵이었다. 깁스를 풀어냈을 때, 이름이 새겨진 손목이 온전히 드러나면서 알아챘다.

    상처인 줄로만 알았던 엷은 흔적이 네임이었다. 언제가 성 회장이 다른 사람에게 새기라고 지시했었던 이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줄 알았다. 믿기지 않아 피부가 다 붉어질 만큼 살갗을 부벼 대기도 했다. 하지만 ‘元材’라는 글자는 지워지기는커녕 더 짙어지기만 했다.

    사월은 곧장 아대를 얻어 찼다. 그날 결심했다. 도망을 가야겠다고. 원재를 짓누르는 또 하나의 돌덩이가 될 수 없다고. 안 그래도 자신은 원재에겐 불필요한 짐이니까. 네임까지 새겨진 채 무게를 더할 순 없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원재에겐 아대의 존재를 손목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한 용도라고 속였다. 늘 그렇듯 원재는 사월의 말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도 않았다.

    “따갑거나 타들어 가는 통증 없어?”

    원재가 물었던 그 증상을, 사월은 이미 그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원재를 만날수록 네임은 더 선명해졌고 아대를 찬 손목 위가 내내 근질거렸다.

    왜 자신에게 원재의 이름이 발현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이건 그의 이름이 확실했다. 그래도 끝끝내 발현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벌컥.

    이내 문이 다시 열리고 익숙한 향기가 성큼 다가온다. 곧게 선 사월을 지나친 원재는 딸린 욕실로 들어가 수건을 꺼내 온다. 젖은 머리카락 위에 수건이 푹 덮였다.

    죄인처럼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사월에게 손을 뻗은 원재가 머리칼을 털듯 살살 문지른다. 다행히 비가 많이 오지 않았던 탓에 빗물은 금세 수건에 흡수됐다.

    원재는 일을 빨리 처리해야 하는 사람처럼 두터운 사월의 재킷마저 벗겨 냈다. 그러곤 베드로 끌어 앉혔다. 바닥에 반쯤 떨어진 시트를 잡아 허벅지를 덮었다.

    “…….”

    사월이 시선을 떨어트리자 손목에 새겨진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황급히 시트 안으로 손을 넣었다. 들키면 안 되는 것처럼 서두르는 행동을 원재가 삐딱하게 선 채 내려다봤다.

    “어디서부터 들을까.”

    한층 누그러진 음성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단호했다. 말을 할 때까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앞을 지키고 섰다. 사월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대답이 없자 원재는 몰아붙이듯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먼저 물을게. 이거 왜 말 안 했어?”

    단숨에 시트를 걷어 내고,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손목을 잡아챘다. 이런 일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서로 다른 네임을 갖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벌어지기 어려운 일임에도, 이게 자신의 이름이란 확신이 점점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네임 위로 엄지손가락이 닿은 찰나, 찌릿한 정전기가 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원재의 눈가가 잘게 구겨진다.

    “……다 싫어서.”

    아대를 차면서까지 원재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 산길을 구르고 온몸이 나뭇가지에 찢기며 도망을 쳐야 했던 이유.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처럼 굴면서 빈틈을 노렸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딴 꼴 당한 것도 억울한데, 네 네임이라고 착각해서 발목 잡을까 봐.”

    “……착각?”

    지키고 싶은 게 생기면 그건 원재에겐 약점이 되어 버리니까.

    그때의 원재는 정말 바빴다. 긴히 설명을 해 주는 친절함은 보이지 않았지만 요양 병원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줄어 갔다. 통화를 할 때도 주변은 늘 정신이 없었다. 뉴스에서도 연신 성탁 부자지간의 법정 싸움에 대해 떠들어 댔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숨 쉴 틈 없이 이곳저곳에서 원재를 짓누르는 게 분명했다. 실핏줄이 다 터진 눈을 하고도, 원재는 제 앞에서 웃었다.

    원재의 인생에서 약점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가 지쳐 가는 꼴을 관망해야 했다.

    “더 얽히기 싫어서. 그래서 도망쳤어.”

    이건 사월의 진심이었다. 얽히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네임이 생겼다는 이유로 원재의 발목에 무거운 추를 하나 더 달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원재 옆구리에 새겨진 네임을 가로질러 잉크를 박아 넣을 때에도 사월은 죄의식 따위 느끼지 않았던 사람이다. 네임 상대를 만나도 원재가 그냥 지나칠 수 있게, 그리하여 또다시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기지 않게. 오직 그 하나만 생각했다.

    “모르는 척을 하면 그냥 가지. 왜 자꾸 얼쩡거리는 거야.”

    “…….”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월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원재의 표정은 어떨까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열이 눈가로 몰린다. 혹시라도 눈물이 고일까 서둘러 눈꺼풀을 깜빡인다.

    미친 사람처럼 자신을 찾았다는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도망간 사람 그냥 잊고 살지. 다쳤다는 연락도 그냥 외면해 버리지. 설사 걱정이 됐더라도, 기억 못 하는 사람처럼 굴면 그냥 돌아가지. 왜 하나도 하지 않아. 그렇게까지 했는데, 왜 아직도 나는 너의 짐이야. 사월의 숨소리에 울음기가 섞인다.

    “씨발, 이거 네 이름 아니라고.”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사월은 온몸으로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외치고 있는 중이었다.

    ***

    그날 밤.

    원재는 처음으로 병실을 비웠다. 차마 멀리 가지는 못하고, 병실 앞 차가운 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사월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내내 비가 와, 창문을 간헐적으로 두드렸다.

    “……부탁할 게 하나 더 있어.”

    ―뭔데?

    매일 통화하는 최 비서였다.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 건 알지만, 지금 꼭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었다.

    “사월 사장 과거.”

    ―과거? 보육원이나 병원 기록은 따로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 이전을 말하는 거야.”

    ―이전?

    원재가 딱딱한 의자에 등을 기대며 발을 길게 뻗었다. 늦은 시간이라 조명이 반은 꺼진 채였다. 어두운 복도 한구석에 원재는 그림자를 늘어트리고 한참을 있었다.

    시선을 틀자 동이 트는 푸른빛의 창문 위로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흐르는 길을 따라 동공이 움직이다, 이내 눈꺼풀이 감긴다.

    “사월 사장의 부모는 누군지, 지금 살아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사월 사장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쉽지는 않을 거야. 이불에 달랑 싸여 버려져서, 단서랄 게 없으니까.

    “유흥가 뒷골목이라 지금도 인적이 드문 곳인데, 거기에 애를 버렸어. 오가면서 봐 뒀던 거겠지. 주택가는 거의 없으니까 출퇴근하면서 눈여겨봤을 거고. 우선 근방 산부인과 진료 기록하고 업소 근무했던 사람들 대조해 봐. 출생 신고한 해랑 전해 연말쯤 출산한 사람 알고 있는지도.”

    아이가 아예 발견되지 않길 바랐다면 그곳에 두고 가지 않았을 터였다. 누군가 발견하고 데려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길 한구석에 아이를 버렸겠지.

    그럼 그 장소는 오가면서 봐 두었을 확률이 크다. 분명히 아이를 데려갈 법한 사람이 있거나, 반드시 발견될 위치라든가.

    ―……정신없지만 시도해 볼게. 뭐라도 나오겠지, 뭐.

    최 비서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렇게 답하지 않으면 원재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생길까 봐 그런 거였다.

    “응. 최대한 빨리 부탁해.”

    전화는 곧 끊겼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원재는 사월의 지워진 기록을 찾아야 했다. 옆구리에 새겨진 이름이 사월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생겼다.

    지금은 죽고 없는 김 사장이 대충 지어 준 이름 말고. 사월의 부모가 배 속에서부터 불렀을 그 이름. 그걸 알아야 한다. 사월이 자꾸만 운명을 부정한다면. 애초에 부정할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그게 원재의 방식이었다.

    밤을 지새워 뻐근한 눈을 꾹 눌렀다. 지금까지도 꽤 잘 버텼다고 생각했다. 반년간의 공백 따위는 사월을 다시 만나면 모조리 사라질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지난밤 모든 게 보기 좋게 박살 나 버렸다.

    “씨발, 이거 네 이름 아니라고.”

    그래서 원재는 사월의 같잖은 믿음 또한 박살 내 줄 생각이었다.

    ***

    사월은 날이 밝자마자 간호사를 불렀다.

    “저 사람 보내. 보호자 따로 있어.”

    “……예? 환자분 보호자 연락처가 생각나신 거예요?”

    그간 보호자며, 개인 정보며 전부 모른다는 말로 일축했던 사월이었다. 간호사는 화색을 띄우며 되물었다. 사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린 문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원재를 힐끔 확인한 간호사가 포켓에서 펜을 꺼냈다. 교대한 선배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이 밤에 비를 맞고 들어왔다던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문에 기대선 남자의 표정이 아주 서늘했다.

    “보호자 님께 제가 연락드려 볼게요.”

    사월은 빈 약봉지 위로 펜을 꾹 눌렀다. 반년을 살았던 곳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거침없이 써 간다.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고 여겼을 이방인을, 횟집 부부가 반갑게 받아 줄까. 사월은 가게 전화번호의 마지막 숫자를 남기고 갈등하다, 결국 7을 써 넣었다.

    주머니에 약봉지를 조심스럽게 넣은 간호사는 쭈뼛대며 원재에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 잠시 병실 밖으로 나와 주시겠어요?”

    원재는 할 말이 남은 얼굴로 사월을 빤히 바라본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병실. 중간에 선 간호사만이 난처한 기색이었다. 뜨거운 시선을 못 이긴 사월은 결국 침대에 누워 등을 돌려 버린다. 잠시 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하…….”

    도망은 실패로 끝났다. 네임이 생겼다는 사실도 들켜 버렸다. 이제 원재를 선 밖으로 밀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시뿐이었다. 사월은 있는 힘껏 그를 밀쳐 낸다. 정이 다 떨어질 만큼, 다시 다가오고 싶지 않을 만큼.

    침대에 걸터앉아 문밖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운 지 20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문이 다급하게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선다. 가게에서 바로 온 건지, 물이 잘 빠지는 슬리퍼 차림이었다.

    “하이고. 무, 무슨 일이야! 어디서 사고가 났던 거야?”

    “좀 침착해. 애 놀래겠어.”

    “아유, 어째. 다친 것 좀 봐. 어째…….”

    횟집 부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한걸음에 달려와 링거가 꽂혀 있던 손등이며, 큰 거즈가 붙은 이마를 매만졌다.

    “……별로 큰일 아니야.”

    “이게 큰일이 아니야? 얼마나 다쳤길래……. 하이고.”

    아주머니의 손가락이 이마 근처를 더듬었다. 굳은살로 딱딱한 주름진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좀 찢어진 거야. 아픈 데도 없고. ……갈 때 나 좀 데리고 가.”

    “뭐? 퇴원하겠단 거야?”

    사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쳤던 곳은 이제 아프지도 않다. 네임이 새겨진 손목에만 싸한 감각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건 사월에게 울리는 경보였다. 원재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선생님이 그래도 된대?”

    “…….”

    “얘 좀 봐. 그럼 더 있어. 안색도 안 좋아 보이는데, 뭘 그렇게 급하게…….”

    사월은 부부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무작정 캐비닛으로 향했다. 부부가 짐짓 놀란 눈빛으로 사월을 살폈다.

    사월은 환자복의 단추를 풀고, 급하게 열어젖혔다. 사고 날 때 입었던 옷을 다시 꺼내려던 손길이 일순 멈추었다.

    옷걸이에 걸린 두터운 재킷 아래로 쇼핑백 하나가 보였다. 어젠 겉옷만 정신없이 챙기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 안에는 태그도 떼지 않은 옷이 정갈하게 개어져 있다.

    “……씨발.”

    어디에도 자신이 입었던 옷은 없다. 아대를 찾느라 옷장을 헤집었을 때까진 분명 있었는데. 아마 원재가 어디론가 치우거나 버린 듯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그의 손길이 닿았음을 느끼자, 온몸의 힘이 풀리는 기분이다. 캐비닛 문을 잡아 겨우 버티고 섰다.

    며칠 더 경과를 보는 게 좋겠다 설득을 해도, 사월은 꿈쩍하지 않았다. 거의 생떼와 다름없었다. 당장 퇴원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사람처럼 연신 날카롭게 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저씨는 묘한 표정을 했다.

    혹시…… 병실 앞에 있었던 그 청년 때문인가. 병실 문을 지키고 선 것처럼 앉아서는, 저들을 샅샅이 살피듯 주시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날 서고 매섭던 그 눈이.

    덩치가 크고 인상이 매서운 걸 보면 궂은일을 하는 사람 같긴 한데, 사채업자나 빚쟁이는 또 아닌 듯싶었다. 그런 거라면 병실 밖에서 조용히 기다릴 리가 없으니까.

    가족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해 보였다. 그 청년을 피하고 싶어 그런 걸까. 아저씨는 잠깐 고심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사월이 원하는 퇴원 수속이 목적이었다.

    홀로 남은 아주머니는 위태롭게 선 마른 몸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꼭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구는 사월이 이상하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였다.

    “뭐가 그렇게 급해. 치료 다 받고 의사 선생님이 가라고 할 때…….”

    “안 돼. 지금…….”

    지금이어야 해.

    사월은 지금 떠나지 않으면 아마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직감했다.

    ***

    “이미 수납되셨어요.”

    아저씨는 재차 확인했다. 수납이 완료되었다는 말에 의아함을 품고 올라왔을 때. 다시 그 청년과 마주했다. 아까와 똑같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아저씨는 그때 확신했다. 그 찰나 먼저 수납을 마친 사람이 이 청년임을. 아저씨는 병실 앞에 서서 원재를 지그시 쳐다봤다.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의외로 원재였다.

    “차 가지고 오셨습니까?”

    “…….”

    아직 원재에 대한 경계가 풀리지 않은 상태라 말을 아꼈다. 관찰하듯 저를 살피는 아저씨를 보고 원재가 말을 덧붙인다.

    “안 가지고 오셨으면 모셔다 드리고 싶은데요.”

    “……친구인가?”

    사월과 원재는 친구라기엔 너무 가깝고, 연인이라기엔 확신이 부족한 사이였다. 원재가 아랫입술을 물며 망설이는 틈에 아저씨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혹시 자네가, 성원재?”

    “……그렇습니다.”

    “아.”

    아저씨의 얼굴 위로 느낌표가 떴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 친구가 성원재라면, 경계를 세울 까닭도 호의를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사월이 짐이 없어서 오래는 안 걸릴 듯한데.”

    아저씨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원재가 이미 봤을 거란 생각은 못 하고, 크로키 북을 가득 채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숨기기 급급한 티를 내며. 이 남자의 관심은 오로지 사월을 데려다줄 수 있는지 없는지에만 쏠린 듯하니. 화두는 당연히 그거였다.

    원재 또한 남자가 말을 어설프게 돌린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넘어가 주었다. 중요한 건 오직 사월이었으니까.

    “나갈 때 약만 받아 가면 돼.”

    “그럼 먼저 가서 정문 앞에 있겠습니다.”

    “왜. 사월이랑 같이 내려가지 그래?”

    “그럼……, 안 타려고 할 겁니다.”

    아저씨는 원재에게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를 읽었다.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일까.

    다 쓰고도 버리지 않은 사월의 크로키 북을 집사람과 함께 들춰 본 일이 있다. 그 안에는 일상의 풍경이 조각조각 그려져 있었다. 하루가 멀게 자전거를 타고 나가더니, 곳곳의 풍경을 많이도 그린 듯했다.

    부부의 시선을 잡은 건 정체 모를 남자의 얼굴과, 손, 뒷모습 따위였다. 그 아래 낙서처럼 새겨진 글자 또한.

    성원재. 성원재. 성원재……. 사월은 몇 십 장의 종이를 채우는 내내 애처롭게 이름의 주인을 불렀다.

    “금방 내려가겠네.”

    원재가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금세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는지, 비상구로 달려가는 모습을 아저씨는 여러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원재가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친구가 아닌 건 확실하군.”

    친구냐는 질문에 그렇게 머뭇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저씨는 조수석 문을 열고 사월의 등을 슬쩍 밀었다. 상황을 모르는 아주머니도 대기하듯 정문에 세워진 차를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빨리 타. 바깥바람 많이 쐬면 안 돼.”

    사월은 발이 얼어붙은 듯 미동 없이 서 있다.

    “어서, 타.”

    “……뭐야, 이거.”

    횟집 부부와 병실 밖으로 나오면서 힐끗 주변을 둘러봤다. 원재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씁쓸함을 집어삼킨 게 5분도 지나지 않았다.

    병원 로비에서 이어진 정문 바로 앞에 세워진 익숙한 차를 보곤 양가감정이 일었다. 떠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그냥 서울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

    “지갑도 안 가져왔고, 날이 추워서 택시 잡는 것도 한참이야.”

    아주머니가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저 사람 누군데?’ 아저씨는 눈 한쪽을 대충 찡그리며 눈짓했다. 대충 가만히 있으라는 뜻 같아서 어색한 상황을 찬찬히 관망하기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추운데 계속 서 계시게 할 거야?”

    결국 원재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핸들을 쥐고 초조한 듯 검지를 두드리다, 결국은 참지 못한 거였다. 단어를 뱉는 입술 사이에서 하얀 입김이 퍼진다. 사월의 시선이 팔을 붙잡은 아저씨의 손끝으로 향했다. 찬바람에 뭉툭한 손끝이 붉어져 있었다.

    “데려다주기만 하고 난 올라갈 거야.”

    “…….”

    원재가 목적지를 알게 되면, 그간 숨어 지냈던 것들이 모조리 소용없어진다. 도망칠 공간마저 없어지는 거다. 원재가 자꾸 찾아온다면 또 알지 못할 곳으로 떠나야 한다. 계속, 계속…….

    “타.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자신의 관심을 스스로 귀찮음이라 표현하자 입 안에 쓴맛이 돌았다. 허나 지금 당장 사월을 설득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얼른. 이제 곧 점심 장사 준비해야 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마지막 말에, 사월은 걸음을 디뎠다. 떠밀리듯 조수석에 앉았다. 뒷좌석엔 횟집 부부가 타고, 원재도 운전석에 올랐다.

    삐삑―, 차 내에 경보음이 울렸다. 사월은 다급하게 벨트를 끌어와 채웠다. 당연히 뻗어 오리라 생각했던 원재의 손길이 없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어쩌면 그토록 기다렸으면서도,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일지 몰랐다.

    사월은 시선을 창밖으로 두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20분 남짓 가는 내내 숨소리를 크게 내기도 버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주소로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오고,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사월에겐 나름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탁.

    사월은 곧장 조수석에서 내렸다. 원재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든 사람처럼. 미련도 없이 자리를 뜬다. 어색한 웃음을 짓던 아주머니가 운전석에 앉은 원재의 어깨를 툭툭 친다.

    “……식사 때가 지났는데, 밥이라도 뜨고 가요.”

    “괜찮습니다.”

    “환자보다 간병하는 사람이 원래 더 힘들어. 내내 사월이 봐줬을 거 아니에요.”

    사월의 이름을 뱉는 게 퍽 자연스러웠다. 원재는 룸미러로 아주머니를 잠시 응시했다. 어떤 사람들일까. 사월이와는 어떤 사이일까. 어떤 관계이기에 사월이 보호자라고 부를 만큼 가까워진 걸까?

    정작 공들이고 진을 쏟아 부은 자신에게선 도망치지 못해 안달인데. 원재는 어금니에 힘을 주어 물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은 질투였다.

    “날이 이러면 점심 때 좀 지나야 손님이 와요. 횟감 들어온 거로 한 끼 먹구 가. 정신없기 전에 들어와요, 얼른.”

    아주머니가 제 할 말만 내뱉고 훌쩍 내렸다. 원재는 시트에 몸을 깊게 묻었다. 갈등이 됐다. 마음 같아서는 사월을 끄집어내 서울로 끌고 가고 싶었다. 싫다고 발버둥을 치든 울고불고 난리를 치든. 어떻게 해서든 곁에 묶어 두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분명 사월이 이러는 까닭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조금씩 곁을 돌며 그 이유를 찾는 게 원재의 목적이었다. 결국 시동을 끄고 단층짜리 좁은 횟집으로 들어섰다.

    “사월이는 생각이 없대서……. 드셔 봐, 얼른.”

    원재의 앞에 숭어회 한 접시가 놓였다. 사월과 함께하는 식사가 아니란 소리에 원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아주머니는 어색한 웃음을 걸고 큰 손에 억지로 젓가락을 쥐여 줬다.

    “사월이는 어차피 회 못 먹으니까. 끼니는 안 거르게 할 테니, 걱정 말아요.”

    “……회를 못 먹는다고요?”

    젓가락을 쥔 손이 순식간에 굳었다. 무지와 괴리 사이의 선이 희미해졌다.

    “으응. 생선 날것은 아예 못 먹겠대요. 회랑 초밥 같은 거. 식감이나 맛이 다 이상하구, 입 안이 간지럽다나……. 그래서 명색이 횟집에 살면서 우리 집 거 한 번도 못 먹어 봤어.”

    문득 머리에 어떤 조각 하나가 스쳤다. 병원에 머무를 때, 무릎에 앉혀 두고 초밥을 먹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땐 집어 주는 대로 잘 받아먹고…….

    아.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비운 뒤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던 모습이 뒤늦게 생각났다. 명치 쪽에 뜨거운 물이 쏟아부어진 듯이, 뜨겁게 따끔댄다.

    “왜에? 총각도 회 안 좋아해?”

    “……잘 먹는 줄 알았습니다.”

    “응?”

    싫다는 말, 안 좋아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아서 몰랐다. 당연히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왜 사월은 먹지도 못하는 생선살을 씹어 삼켰을까.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도 왜 자고 가라는 말만 내게 했던 걸까.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하나뿐이라, 다른 이유는 떠올리지도 못하겠다. 원재는 고개를 저었다.

    “……사월이 서울 데려갈 거예요?”

    “그러고 싶은데, 아직 원하지 않을 겁니다.”

    아주머니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티슈를 괜히 끌어와 끄트머리를 비벼 대거나 접으면서 손을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손님이 오지 않아 가게 안에는 내내 둘뿐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처음 바다에서 사월을 구하곤, 내내 곁에 두었던 부부였다. 사람 하나를 찾는다고 험상궂은 사람들이 몇 번 가게 앞을 오가는 걸 보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사월에겐 필시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거라고 여겼다. 팔 할은 자신의 아들이 사월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부부는 어느새 사월을 자신의 아들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제넘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꺼내야 했다.

    “애 아빠가 가만히 있으래서 그러려고 했는데…….”

    아주머니가 말끝을 늘인다. 원재는 젓가락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반년의 공백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확신했다.

    “사월이 많이 앓았어요.”

    “…….”

    “어떤 이유로 여기까지 온 건지는 모르겠다만, 이제 겨우 정신 추슬렀어. 다 잊고 살게 해 줄 수 있으면 데려가구, 아니면…… 속 시끄럽게 하지 말구 그냥 놔둬요.”

    다 잊게 해 줄 수 있을까. 사월이 아프고 힘들었던 이유는 모조리 자신 때문일 텐데.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살면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텐데.

    아주머니 또한 크로키 북을 가득 메운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설거지를 돕겠다며 늘 차고 다니던 아대를 벗자, 드러난 사월의 손목에 새겨진 네임과 같다는 것도. 남편이 넌지시 ‘그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어쩌면 사월이 곧 서울로 떠나리라고 예감을 했을지 모른다.

    “사월이가 유일하게 그리워했던 사람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원재는 울컥 넘어오는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깨달았다. 숨어 지내던 시간이 더 편했던 게 아니었다. 자신이 싫어서 도망간 것도 아니었다. 아예 잊자고 마음먹은 것 또한 아니었다. 사월은 다만 그리움을 홀로 견뎌 왔을 뿐이라는 걸. 원재는 깨달았다.

    은연중에 사월에게 가졌던 서운함은 모조리 절박함으로 치환된다.

    “금방 데려갈 겁니다.”

    한탄은 이제 멈추어야 했다. 사월이 혼자 견뎌야 할 그리움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

    점심시간이 막 지날 무렵, 원재는 서울로 올라갔다. 사월은 가게 앞에 세워 둔 차가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침대에 털썩 누웠다. 원재와 한 공간에 있느라 알게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던 듯했다. 모든 긴장이 풀리며 사월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습관적으로 손목을 매만진다. 눈을 감고도 네임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사월의 마른 손가락이 원재의 이름 위를 쓸어 댔다. 돌덩이가 얹힌 듯 무거운 마음은 아무리 한숨으로 덜어 내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사월은 눈을 감았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사람처럼 수마 속으로 뛰어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컴컴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간판 빛이 전부였다. 손님이 꽤 있는지, 가게 안은 요란스러웠다.

    사월은 손에 잡히는 셔츠 하나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섰다. 가게를 통하지 않는 뒷문으로 조용히 나왔다. 건물을 빙 둘러 가게 앞을 지나친다.

    안을 들여다보니 테이블 서너 개가 찬 상태였다. 날이 추웠다가 풀리길 반복해서 가게 앞에는 작은 테이블이 아직까지 나와 있었다.

    반년 전, 아마도 횟집 부부는 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바다에 들어가던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반쯤 틀어진 의자를 바로 밀어 넣고는 해변으로 향했다.

    좁은 도로 하나만 건너면 해변이었다. 오늘은 좀 찬바람이 불어 사람도 별로 없었다. 사월은 익숙하게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철썩철썩. 그렇게 추워도 바다는 얼지 않는다. 힘차고 끊임없이 계속해서 물결을 만들어 낸다.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사월은 시커먼 바다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바다에는 파도의 비명밖에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에 온몸이 잠식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등 뒤로 다가온 인기척을 차마 느끼지 못했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이렇게 얇게 입었어.”

    철썩. 쏴아.

    꿈속에서 들었던 그 소리였다. 어깨와 등 뒤로 온기가 내린다. 사월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절대 잊지 못할 향기가 바닷바람에 실려 왔기 때문이었다.

    “…….”

    사월의 옆에 원재가 털썩 자리를 깔고 앉았다. 손바닥에 묻은 모래를 탈탈 털어 내는 동작을 보며, 사월은 오히려 모래사장을 짚었다. 일어나려는 움직임이었다.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 손목으로 강한 힘이 얽혀 왔다.

    “놔.”

    팔을 잡아당겨도 꿈쩍 않는다. 도로 자리에 앉은 꼴이 된 사월이 미간을 구겼다. 손이 닿는 순간, 아대 아래 네임이 쿡쿡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원재는 아무 말도 없이 손목에 채워진 아대를 끌어 내렸다.

    “씨발, 놔. 뭐 해.”

    사월이 어깨를 밀어내고 팔을 떼어 내려고 해도, 원재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사월의 어깨에 걸쳐진 두터운 담요 한쪽만 흘러내렸다. 원재가 거칠게 아대를 벗기자, 하얀 손목 위에 새겨진 검은 선이 뚜렷이 눈에 들어온다.

    “네 이름 아니라고 했지…….”

    당황스러움인지 울먹임인지 사월의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엄지손가락이 이름 위를 느릿하게 문지른다. 원재가 네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손목을 끌어당긴다. 네임 위로 뜨거운 입술이 닿는다. 네임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사월은 고통에 질린 사람처럼 그 광경을 응시했다. 원재는 재차 확인하듯 네임 위로 입을 맞췄다. 추위에 차게 얼었던 사월의 코끝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느껴지는데. 자꾸 아니라고 할 거야?”

    사월의 빨간 입술이 소리 없이 벙긋댄다. 아니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데. 입술마저 꽁꽁 얼어 버린 건지 얕은 숨만 퍼졌다. 입술 앞에 흩어지는 하얀 연기마저 유약했다.

    “사월아, 너도 알잖아.”

    “…….”

    “이거. 나 맞아.”

    철썩.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을 틈이 없다. 파도는 연신 원재에게 사월의 지난 반년을 고한다. 철썩철썩. 쏴아. 그 소리에 파묻혀 내내 울었다고.

    “이게 네 이름이 맞다면…….”

    희미하게 사월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원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맞다면?’ 그런 희미한 말을 더는 넘겨짚을 수 없었다. 사월에겐 어떤 것이든 뚜렷하고 확실하게 보여 주어야 함을 깨달았다.

    “가정은 없어. 확신이야.”

    원재는 꽤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사월의 손목에 생긴 운명의 징표가 한낱 가정일 리 없다고. 사월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미간이 구겨졌다. 어깨 한쪽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던 담요가 모래 위로 툭, 떨어진다.

    “왜……. 왜 네가 확신해? 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 치는데. 왜 넌 그렇게 쉽게 확신하는 거야, 왜.”

    처음으로 선을 긋지도, 벽을 세우지도, 거리를 두지도 않은 사월의 진심을 들여다본다. 그 안은 온통 컴컴하고 차가웠다. 귓전을 울리는 시커먼 파도 소리같이.

    금세 눈가에 눈물이 들어찼다. 붉어진 눈가가 잘게 떨렸다. 원재는 가만히 사월의 얼굴을 살폈다. 대답이 없자 사월은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진심을 쥐어짠다.

    “네 이름 맞으면. 그럼 발목 잡히는 거밖에 더 돼? 씨발,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냐고…….”

    원재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다. 사월이 벽을 깨고 나오는 순간. 파들거리던 말은 채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원재가 사월을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네임이 생기면 내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구나. 그래서 겁을 먹고, 도망친 거구나. 그렇게 필사적으로……. 원재가 뜨거운 것이 치미는 목구멍에 힘을 주어 겨우 울음을 참았다.

    넓은 어깨에 얼굴은 파묻은 사월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보냈다. 짐밖에 되지 않을 네임에, 왜 그렇게 간절하단 듯이 입을 맞추는 건데. 얇은 셔츠의 어깨가 젖어 들어간다.

    “그게 내가 바라던 거야.”

    남은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휘젓고, 진창에 뒹굴더라도 내 옷자락을 끌고 뛰어드는 거. 네 마음대로 나를 휘두르는 거. 그게 너한테 원하던 거라고.

    원재는 사월이 모든 울음을 토해 낼 때까지, 마른 등을 연신 쓸어 주었다. 다 해어지고 찢어진 가슴이 서로 맞닿았다.

    ***

    네임 상대를 만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막연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별로 깊지도 않은 상념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네임이 눈에 들어와 스치듯 떠올려 본 게 전부였다. 네임 따위에 연연하기도 싫고, 괜히 얽혔다간 피곤한 일만 생기겠지. 그저 그뿐이었다.

    “네임은 짐 같은 게 아니야.”

    헌데 이젠 네임에 절박하게 매달리는 꼴이 됐다. 이거라도, 이것 때문에라도 나를 버릴 수 없게. 모른 척하지 못하게.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는 짓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게. 원재는 있는 힘껏 죄악감을 부여한다.

    “…….”

    “네가 아니면 누굴 아끼고 누굴 예뻐해, 내가.”

    집착에 가까운 마음도 당위성을 얻어 애정으로 귀결된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사월의 울음은 어느새 잦아들었다. 대신 원재의 낮은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길 뿐이다. 원재의 손가락이 네임 위로 닿았다. 뜨끈한 체온 탓인지 타들어 가는 감각이 여실히 전해진다.

    “이것만 봐.”

    “…….”

    “여기 누구 이름이 있는지를.”

    어쩌면 사월을 향한 짙은 감정과 염원이 네임을 발현시킨 걸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

    “같이…… 있네?”

    막 치운 테이블 위를 행주로 훔치던 아주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자는 줄 알았던 사월이 가게 앞에 서 있는 것도 놀라긴 했지만, 같이 있는 원재 탓이 더 컸다.

    행주를 대충 싱크대에 던져두고 손을 벅벅 닦았다. 앞치마 위로 뚝뚝 떨어지는 손을 비비며 가게 문을 밀어 열었다.

    “아까 서울 올라간 줄 알았는데.”

    “아…….”

    원재는 말을 늘이면서 사월 쪽으로 시선을 둔다. 아마 서울에 올라갔다 다시 내려온 게 분명했다. 아주머니의 고개가 슬쩍 떨어진다.

    사월을 한 팔로 감싸 안아, 팔뚝 위에 걸려 있는 손이 보였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엉켜 있는. 아주머니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고 다시―.”

    “간다구? 이렇게 늦었는데? 자구 내일 아침에 가.”

    남편이 알면 나이 먹어서 주책이라고 타박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오지랖을 부려도 괜찮은 순간 같았다. 아주머니는 가게 문을 조금 더 젖혀 두 사람이 지나갈 공간을 만들어 줬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피곤하게 뭘 하루에 몇 번을 왔다 갔다 해? 여서 눈 붙이고 내일 아침에 가.”

    원재는 아주머니의 제안이 싫지만은 않았다. 급한 일이 쌓여 있긴 하지만, 사월보다 급한 건 없었고. 사실 내내 하고 있던 생각이었다. 사월과 더 같이 있고 싶다는.

    “……급한 일 없으면 자고 가.”

    사월이 허옇게 드러난 목덜미를 매만진다. 어색한지 손끝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한 번 허물어진 벽은 틈이 많았다. 그 틈으로 원재가 조금씩 스며들어 갔다.

    바다는 더 이상 사월에게 낯설지 않다. 시선을 빼앗던 윤슬도,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파도도. 이젠 언제든 시야에 담을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원재 또한 사월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

    횟집 부부가 아들을 주려고 사 두었다던 새 옷과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창문이 닫혀 있어도 욕실 안에는 바다 냄새가 가득했다. 꼭 바다에서 헤엄을 치다 나온 기분마저 들었다. 거의 마른 머리카락 끝에 맺혀 있는 물방울 하나가 어깨 위로 톡 떨어진다.

    사월이 쓰고 있다는 방은 작고 깨끗했다. 짐이랄 게 없었다. 작은 침대와 낮은 상 하나가 전부였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펴고 앉은 원재가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씻는 사이에 최 비서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말씀하신 부분 얼추 확보됐습니다. 자세한 건 전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전화번호 위에서 손가락이 머뭇댄다. 그사이 씻고 나온 사월이 방문을 넘어선다. 커다란 몸을 구기고 손바닥만 한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중이다.

    “……일 있어? 바쁜데 잡은 거면―.”

    “아니.”

    그래? 사월이 의심의 여지를 남긴 투로 되묻는다. 원재가 핸드폰을 상 위에 놓고는 침대에 등을 기댔다. 원재의 관심과 시선은 깔끔하게 사월에게만 전부 쏟아진다.

    “대리인이랑 유능한 비서 있는데 뭐가 바빠.”

    “……네가 할 일을 그 사람들이 하는 거잖아.”

    “그래. 그게 그 사람들 일이야. 사월인 그 사람들 걱정 말고 나만 신경 쓰면 돼.”

    ……널 신경 쓰니까 걱정도 되는 거지. 사월은 말을 아낀 채로 방을 벗어났다. 사월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원재가 미간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월이 나간 곳으로 따라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열린 방문 틈에서 사월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양팔에는 이불과 베개를 든 채였다.

    이부자리 챙기려고 그런 거구나……. 원재가 그제야 구긴 낯을 풀었다.

    “왜 나왔어.”

    “……이리 줘.”

    이불과 베개를 거의 빼앗듯이 했다. 그러곤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빠르게 깐다. 혹시라도 바쁘면 그냥 가라고 할까 봐, 핸드폰도 끄고 방 한구석으로 밀어 뒀다. 마지막으로 덮는 이불을 펼치는데, 사월이 먼저 요에 털썩 앉았다.

    “침대에서 자.”

    “됐어, 내가 왜. 사월 사장이 위에서 자.”

    사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을 펼친다.

    “이불이나 줘, 빨리.”

    원재도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까 앉아 있을 때 보니, 곳곳이 냉골이었다. 거기에서 사월을 자게 둘 수는 없었다.

    중요한 건 사월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을 듯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고집은……. 그럼 어쩔 수 없지. 같이 자자.”

    “뭐?”

    둘 다 서로 바닥에서 잘 마음이 있으면 같이 자면 되잖아. 답은 명료했다. 벙 찐 사월을 뒤로하고, 원재는 불을 껐다. 창문 틈으로 전해지는 간판 빛에 의존해 몸을 눕혔다. 연이어 이불을 어깨 위까지 덮었다. 여태 멍하니 앉아 있던 실루엣을 끌어다가 안고선.

    “이러면 둘 다 따뜻하잖아. 왜 추운 데서 잘 생각을 해.”

    사월이 살아온 방식은 그랬다. 따뜻한 자리를 내어 주고 찬 곳에 눕는 것. 하나 남은 컵라면을 양보하고 배를 곯는 것. 욕심을 포기하고 행복을 빌어 주는 것.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만 알았다. 세상 모든 걸 통틀어도 자신의 소유였던 것이 없으니,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네.”

    원재를 알고 나서야 사월은 살아온 방식이 어딘가 어긋났음을 알았다. 누구 하나가 포기하지 않아도, 양보하지 않아도, 손해 보지 않아도 모두가 따뜻할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운 걸, 그동안은 왜 몰랐을까. 사월의 목소리 끝에는 허탈한 웃음이 딸려 왔다.

    토닥이듯 등을 쓰는 손길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사월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뗐다.

    “만약에…….”

    사월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방이 워낙 고요해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었다. 원재가 목을 울리며 대답했다.

    “응.”

    가슴 쪽에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사월은 어색하게 힘을 주었던 팔을 원재의 허리 위로 올렸다. 옷자락을 꾹 쥐었다. 마지막이다. 이건 사월이 내보이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나중에라도, 내가 많이 버거우면. 그럼 내려놔도 돼. 원망 안 해. 그런 걸로 상처도 안 받아.”

    이 방어선을 넘으면 정말 아무것도 없다. 티끌 하나, 손 하나 타지 않은 공간에 원재가 오롯이 들어차는 거였다.

    “나는 받아.”

    원재가 짧게 답했다. 숨을 크게 담은 가슴이 부풀었다가, 바람이 빠지듯 줄어든다. 숨은 전부 긴 한숨으로 치환된다.

    “…….”

    “사월아. 네가 그런 말 하면, 나는 상처받아.”

    원재는 알고 있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신을 생각해서 건네는 말이라는 걸. 그래도 스스로를 낮추고 배제시키는 꼴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월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걸릴까. 사월을 이기적이고, 자기주장밖에 할 줄 모르고, 아집과 고집만 내세우는 자신과 똑같이 만들려면. 아무리 가늠해도 이 생 안에는 해내지 못할 듯싶었다.

    “날 더 버겁게 해 줬으면 좋겠어. 숨 막히게 옭아매고, 하고 싶은 대로 이용하고 휘둘렀으면 좋겠어.”

    “…….”

    “다들 호구 새끼라고 손가락질할 만큼.”

    그게 뭐 좋은 거라고. 사월은 손끝이 얼얼할 만큼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감당 안 될 만큼 날 의식하면 좋겠어.”

    원재의 가슴에서 시작된 작은 울림이 사월의 귓전에 닿는다. 말도 안 되는 요구 가운데 사월이 해낼 수 있는 거라곤, 온 신경을 세워 원재를 의식하는 것뿐이다.

    원재가 처음 네임을 지워 달라고 무턱대고 명함을 쥐여 주었을 때, 밤낮없이 무작정 가게를 찾아왔을 때부터 쭉 그래 왔던 것처럼.

    “내가 이미 그러고 있는 것처럼, 너도.”

    마지막 방어선마저 모조리 허물어지고 만다. 있는 힘껏 원재에게 벽을 세우는 일도, 관심을 애써 숨기는 행동도, 괜찮은 척하는 연기도 이젠 모두 할 수 없으리라.

    “그럴게.”

    사월은 겸허하게 무너지는 경계를 바라본다.

    ***

    사월의 숨이 일정해졌다. 머리 아래에 받쳐 둔 팔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상체를 일으킨 원재가 내려간 이불을 끌어다 사월의 몸 위로 덮었다.

    품 안을 채우던 온기는 식기도 금방 식는다. 이불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 흘러내린 앞머리가 콧대를 간질이는 것처럼 보여, 머리칼을 넘겨 줬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바닥에 던져둔 겉옷을 챙기고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다. 새벽 찬바람만 가게 앞을 서성였다. 원재는 횟집 앞 빈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꺼냈다. 가로등 불빛 하나가 겨우 있을 뿐이라 사위는 어두웠다.

    불을 붙이고 시커먼 바다를 보며 연기를 뿜었다. 그러곤 꺼 둔 핸드폰을 다시 깨운다. 시간이 늦어서 받을까 모르겠지만, 별 주저 없이 전화를 걸었다.

    ―성 사장님. 어디신데 이제야 전화를 하셨어.

    “사월 사장 있는 곳. 일이 빨리 진행되네?”

    원재는 사월이 대천의 한 횟집에 있다는 사실을 최 비서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말해서 좋을 거 없겠단 판단이 들었다.

    예전처럼 사람을 붙여 감시를 한다든지, 사월 사장의 케어를 부탁하는 짓은 이제 평생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 눈과 제 감각만 믿기로 했다.

    ―여기 워낙 고인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근방 쑤셨을 때 몇 추려졌어. 그즈음에 출산한다고 했다가 말없이 사라졌는데 애는 없는 케이스가 좀 있더라고.

    “그 사람들 위치는 확보됐고?”

    ―지금 총 여섯 추렸어. 아직 동네에 사는 사람 하나, 이미 죽은 사람 하나. 둘은 지방으로 옮겨서 살고. 남은 둘은 위치 찾는 중.

    최 비서가 추린 여섯 중에 사월의 부모가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마 저 중엔 없을지도 몰랐다. 그럼 범위를 넓혀서 또 들쑤셔야겠지. 원재는 사월의 부모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월의 진짜 이름을 알아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니까.

    “형은 동네에 있는 사람은 한번 만나 봐. 다른 지역에 사는 둘은 내가 만나 볼게. 아이 행방이나, 그게 어려우면 이름에 대해서…….”

    ―어어, 알았어. 그럼 주소는 정리해서 문자로 남길게. 그리고 납골당까지는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 거 같은데……. 그쪽도 해 봐?

    납골당에 간다고 단서가 있을까 모르겠지만 원재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단서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것도 내가 가 볼게.”

    ―오케이. 주소 바로 넣을게. 아침엔 오지?

    “응. 출근 시간 전에는 도착할 거야.”

    ―그래. 얼른 쉬고 아침에 보자.

    전화를 끊자 곧바로 문자가 날아온다. 끝과 끝 지역의 주소가 하나씩 찍혀 있다. 서울에서 대천까지 오가느라 시간이 충분치는 않지만,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발로 뛰어야 했다. 사월의 원래 이름 같은 건 서류상으로 남는 자료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시간이 더 지나 기억이 바라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원재는 담뱃재를 빈 깡통에 털었다. 하얀색에 가까운 재가 바스라져 흩어진다.

    “여기서 담배 피면 안 되는데.”

    “어, 깼어?”

    아마 통화를 하는 내내 가게 안쪽에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원재는 주소가 띄워진 액정을 꺼 버렸다.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사월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얇은 잠옷 차림으로 나온 사월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채였다.

    “추운데 왜 나왔어.”

    잠결에 옆자리를 더듬었을 때, 마땅히 느껴져야 할 온기가 없었다. 잠이 다 달아난 사월은 옷을 챙길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달려 나왔다.

    가게의 투명한 문 너머로 원재의 뒷모습이 보이고 나서야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전부 다 꿈인 줄 알았다. 당황해서 쿵쾅대는 가슴 위로 손바닥을 꾹 누르곤 태연한 낯을 했다.

    “……없길래. 난 별로 안 추워.”

    짙은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 위로 사월이 털썩 앉았다. 찬바람이 머물렀던 곳이라 냉기가 느껴졌다. 원재는 겉옷을 벗었다. 안은 달랑 반팔 한 장뿐이었다. 사월이 원재의 손목을 밀며 거절 의사를 비쳤다.

    “됐다고.”

    “입어.”

    “너 반팔 입고 있는 건 자각하고 있어?”

    원재는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곤 겉옷을 테이블 위에 툭 올려 뒀다. 사월의 무릎 뒤로 손을 넣고 어깨를 감싸 들었다. 몸이 들리며 중심을 잃은 사월이 원재의 목에 팔을 감았다. 발버둥을 치자 원재가 담배를 끼고 있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

    “야.”

    “움직이면 데어. 담배.”

    “내려놔, 그럼.”

    “쉿. 다 잘 시간이야.”

    그걸 누가 모르냐고. 사월은 체념한 듯 버둥대던 몸짓을 멈추었다. 담뱃재가 날려 종아리 부근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곧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은 꼴이 됐다. 무릎은 가지런히 모여 팔걸이 위에 걸쳐졌다. 슬리퍼 한 짝이 발끝에서 달랑이다 툭 떨어졌다. 원재는 겉옷을 끌어다 사월을 감쌌다. 꼭 세 살배기 어린애가 안긴 모양새였다.

    “금방 까먹었지, 또. 둘 다 따뜻할 수 있다니까.”

    작은 키도 아닌데, 원재 품에 폭 안겨 있으니 유난히 체구가 작아 보였다. 원재는 사월을 단단히 감아 안았다. 멀리서 파도가 철썩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넌 안 자고 왜 나와 있어?”

    “옆에서 네 숨소리 들리니까 못 자겠어. 자는 애 막 더듬을 거 같아서.”

    말끝에는 웃음기가 엉겨 붙어 있었다. 사월은 말없이 어깨를 기울였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원재의 목덜미 위로 이마가 닿았다.

    허리를 받치고 있던 원재의 단단한 팔이 느릿하게 타고 내려왔다. 이내 엉덩이 아래로 손을 불쑥 밀어 넣는다.

    “……손이 왜 거기로 가는데.”

    “아, 이거는 만지는 게 아니고 손이 시려서 그래.”

    재를 툭 덜어 떨어내곤 담배를 물었다. 입술 끝에 걸린 담배는 원재가 웃을 때마다 흔들렸다.

    “한 대 필래?”

    사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옷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탓에 손이 자유롭지 않았다. 팔을 꺼내려고 버둥대자, 입술 사이로 담배가 훅 파고들었다. 필터 끝이 조금 젖은 담배였다. 입 앞에 담배를 대 주고 있는 곧은 손이 있다. 사월은 까딱하지 않고 입술에 힘을 주어 숨을 들이켠다. 매캐한 연기가 몸 안에 흐르기 시작한다.

    고개를 살짝 뒤로 물러 숨을 뱉자, 하얀 연기가 흩어졌다. 연기 사이로 자신을 향한 원재의 지긋한 시선이 느껴진다.

    필터가 다시 입술 위를 톡톡 두드린다. 사월은 명령어가 입력된 대로 움직이는 로봇처럼 다시 담배 끝을 물었다.

    “……후우.”

    호흡이 빌 때마다 원재의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훔친다. 사월의 입술이 손가락 힘에 따라 이리저리 밀린다.

    “뭐 묻었어?”

    “안 지워지네.”

    뭐가 묻은 거냐고 물으려던 사월이 입을 딱 다물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왼쪽 허벅지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 입술을 짓누르는 손가락. 샅샅이 핥아 내리는 시선. 사월은 눈길을 애매하게 떨어트리며 애꿎은 담배만 빨아들였다.

    짧아진 담배를 지져 끈 원재가 사월을 고쳐 안았다. 몸을 작게 들썩이자, 사월은 허벅지에 닿아 오는 감각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안고 들어갈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이제 비켜.”

    입꼬리를 올린 채, 사월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겉옷을 반쯤 거둬 냈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팔걸이를 잡아 몸을 일으켰다. 하얀 맨발이 다시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이러다 해 뜨겠다. 얼른 들어가자.”

    원재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사월은 걱정스런 시선을 힐끔 던졌다. 몇 시간 눈도 못 붙이고 가야 하는데, 괜찮을까. 이럴 때 자신이 운전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바깥과 비교해 훈훈한 방 안에 들어선 뒤에도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찬바람에 식었던 뺨과 목덜미를 매만지는 체온에 온몸과 정신이 녹아내렸다. 사월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얼마나 눈을 붙인 걸까. 창밖이 어슴푸레하게 밝았다. 품을 파고든 사월을 한번 끌어안고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벽에 걸린 시계는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최 비서 출근 시간 전에는 서울에 도착해야 했다. 서둘러 준비하면 얼추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재는 기척을 죽이곤 방 밖으로 나왔다. 어제 씻었던 욕실로 가기 위해 거실을 가로지르던 중, 아저씨와 마주쳤다.

    “어젯밤에 왔었다는 얘긴 들었는데. 일찍 일어났구만.”

    “예. 서울 가 봐야 해서요.”

    “지금? 아침이라 서두르는 게 좋을 텐데……. 아, 얼른 씻게.”

    욕실 불까지 켜 주는 친절을 보인다. 원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욕실로 향했다. 사월이 꺼내 준 새 칫솔로 양치질을 하면서 세면대 쪽에 멀뚱히 시선을 두었다. 벽에는 칫솔 세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단란한 가족의 그것처럼.

    “…….”

    코끝이 따가웠다. 단지 알싸한 치약 때문이라고, 원재는 자위했다. 그 후로도 손이 시릴 만큼 찬물로 세수하면서 울렁이는 마음을 달랬다.

    자는 사월의 옆에서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이불에 파묻혀 깊이 잠이 든 사월의 머리를 한번 쓸었다가, 뜨끈한 뺨을 쥐었다가, 반듯한 이마 위로 입을 맞춘다.

    사월은 눈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떨어지기 싫어 미련이 남은 손길로 사월을 연신 어루만지다, 고개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다. 원재는 한쪽 구석에 있는 종이에다 글씨를 꾹꾹 눌러 썼다. 눈을 뜬 사월이 빈자리를 보고 놀라지 않게. 새벽처럼 자신을 찾아 찬바람에 맨발로 뛰어나가지 않도록.

     이따 봐. 

    쪽지를 머리맡 잘 보이는 곳에 두고는 문고리를 잡고 섰다. 뚝뚝 떨어지는 아쉬움을 남기며 원재가 방에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총각, 밥 먹고 갈 시간은 돼?”

    원재가 손목을 털어 시계를 돌렸다. 7시 반을 향해 가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평일이래도 일정이 촉박했다.

    “아뇨. 조금 빠듯할 거 같습니다.”

    “으응, 그래? 그럼, 잠깐 있어 봐요.”

    재킷에 팔을 꿰어 넣은 원재가 제 구두를 찾았다. 벗어 둔 곳이 아니라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구두를 보고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내, 어제보다 더 윤이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두를 신으며 원재는 명치 아래가 또다시 울렁이는 감각을 느꼈다.

    “이거. 가면서 차에서 먹어. 먹기 좋게 잘랐어.”

    앞치마 위에 물기를 슥슥 닦아 건넨다. 손바닥 크기의 도시락 통에는 과일이 먹기 좋게 담겨 있었다. 원재가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자, 아주머니는 도시락 통을 작게 흔들며 채근한했다.

    “아침이라 차 막혀. 늦기 전에 얼른 가.”

    “……감사합니다.”

    “뭘. 그보다……, 사월이한테는 간다구 얘기했지?”

    아주머니는 원재의 차까지 따라왔다. 아침 바닷바람은 더 매섭고 차가웠다. 원재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가슴팍에도 오지 않는 아담한 체구를 여상히 바라봤다. 얇은 옷차림이 신경 쓰여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아유, 내가 주책이지? 사월이가 놀랄까 봐…….”

    원재가 불쾌해서 인상을 썼다고 생각했는지, 아주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민망한듯 콧잔등에 주름이 질 만큼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원재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지난 사월의 반년이 그렇게 춥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는.

    “예. 메모도 남겨 놨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 아유, 잘했어.”

    친근하게 등을 쓰는 손길이 사월에게도 닿았으리라 생각하자 안도감이 스쳤다. 부모의 사랑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알지 못하는 사월을, 마음 둘 곳이 없어 늘 불안 속에서 부유하던 사월의 시간을 이렇게 따뜻하게 매만져 주었을 테니.

    자신이 한겨울 속에 살았던 것은, 이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

    “대리 변호인은 성 회장이 범죄 전력이 없고, 건강상 문제로 도주 염려 또한 없으니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길 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사를 읽던 최 비서가 핸드폰을 소파에 던지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린다. 원재는 미동도 없이 서류를 훑어 내린다.

    참고인 진술을 인정할 수 없다, 건강상 문제가 심각해 의사 소견서를 받아 올 것으로 보인다……. 성 회장 쪽에서도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갖은 수를 다 쓰는 중이었다. 원재의 눈에는 그게 꽤 우습게 비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참 정성스럽게들 하네.”

    “그러게.”

    어머니는 어린 아들들을 두고 이혼도 하지 못한 채 혼자 버림받아 죽어 갔고, 형은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의 원인은 모두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성 회장이었다.

    공금횡령, 공무원 청탁 알선, 약물법 위반. 이딴 건 죄목으로 쉽게 올릴 수 있는데. 두 사람이 죽은 일에는 아무 죄목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가진 건 돈밖에 없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처발랐을지 몰라. 우린 휩쓸리지 말고 준비한 대로만 하면 돼.”

    “어어. 근데 성 회장님도 대단하다. 빨간 줄 하나 안 그으셨네.”

    칭찬과 비아냥 어디쯤에 걸쳐진 말이었다. 제 핏줄을 욕보이는 말임에도 원재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최 비서와 같은 생각마저 했다.

    “이번에 그어 주면 돼, 우리가.”

    “예쁘게 그어 드리지, 뭐. 어깨가 무겁네.”

    최 비서가 픽 웃으며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익숙하게 오늘 자 스케줄을 띄웠다. 점심이 지나면 법원에 출석해야 했고, 간 김에 검사와 면담도 해야 하고, 주먹만 쓰던 깡패 새끼들이 양복 입고 출퇴근하는 사무실에도 한번 들러야 했고. 사월의 부모로 추정되는 몇몇을 또 만나 봐야 했다.

    “오늘 오후 일정이 좀 빡빡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저녁에 또 가?”

    “어. 간다고 했으니까 기다릴 거야.”

    사월을 다시 찾았다던데 도대체 어디 있는지도 통 알려 주지를 않는다. 처음에 연락 온 곳이 병원이라던데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다쳤는지도 비밀에 부친다. 그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름을 들어서 정이라도 든 건지. 최 비서는 내내 사월을 염려했다.

    “근데 사월 사장은 언제 서울 와?”

    “……왜?”

    “아니, 그냥. 계속 거기 있진 않을 거 아냐. 언제 오나 해서.”

    원재가 시선만 들어 최 비서를 응시했다. 형이 왜 그딴 걸 궁금해하지? 딱 그런 눈빛이었다.

    “그 뭐냐, 가게도 정리했는데……. 사월 사장 일도 시작해야 할 거고, 그럼 준비를 또 해야 하고…….”

    “형.”

    변명처럼 이유를 덧붙이던 최 비서의 말을 딱 막아섰다. 스토크가 있는 건물은 원재의 소유가 됐다. 허름하고 낡고, 오가는 사람 없는 건물을 사 놓고선 하염없이 사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토크 안에 사월의 손길이 남은 물건은 그대로 둔 채로.

    “말이 나와서 그런데, 가게 차릴 목 좋은 자리 하나 없을까.”

    “뭔 가게. 사월 사장 거?”

    “어.”

    사월만 동의한다면 스토크가 있던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쌓아 올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사월의 가게는 새로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

    손때 묻은 곳에서 사월이 자꾸만 지난 세월을 떠올리는 게 싫었다. 그 공간에 머물면 자신이 마땅히 버림받아도 되는 존재라는 인식을 바꾸지 않을 거 같기도 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성원재의 손길이 닿은 공간.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사월을 보고 싶었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굳건히 세워진 울타리 안에서.

    “가게도 새로 차리고, 일하는 사람도 하나 붙여 주고.”

    “은근슬쩍 살림도 차리고?”

    “그럼 더 좋지.”

    원재가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스토크를 정리할 예정이니 사월이 머물 곳도 없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면 연고 없는 사월이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공간은 단 한 곳뿐이다. 원재의 곁. 생각만으로 아랫배 부근이 저려 왔다.

    “물어는 봤어?”

    “아직.”

    “그런 건 너 혼자 결정하지 말고 물어봐, 좀. 그렇게 대화도 트고 속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원재는 사월이 거절할 거란 선택지는 딱히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싫다 해도 억지로 성원재의 목줄을 쥐여 주면 기꺼이 받아 주리란 믿음이 생겼다.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는 원재를 보며 최 비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잉―.

    원재의 전화였다. 액정에 뜬 숫자는 저장되지도 않은 번호였다. 평소라면 잘 받지 않았을 텐데, 기다렸단 듯이 곧장 전화를 집어 들었다. 최 비서가 의아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 좀 나왔어?”

    불편한 사이는 아닌지 대화가 스스럼이 없었다. 원재는 읽고 있던 서류철을 덮고 한쪽으로 쌓아 올리며 통화에 집중했다.

    “홍콩에서 확인된 게 언젠데? 아. 목숨은 붙어 있는 거네, 그럼.”

    홍콩? 목숨? 누굴 또 찾는 거지. 최 비서는 원재의 통화 내용에 온 신경을 쏟았다.

    “빚이 얼만데. 그래서 현금 챙겨서 가면 딜 칠 수는 있고?”

    알겠어. 여기 정해지면 연락할게. 통화는 길지 않게 마무리됐다. 최 비서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곧장 물었다.

    “뭔데. 홍콩은 또 뭐고, 빚은 뭐고.”

    “애들 중에 여권 있는 애 있나.”

    “여권? 그건 뭐, 한 명쯤 없겠냐. 아무튼 그건 왜?”

    “휴가 보내 주게.”

    최 비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휴가라는 말에 여권을 어디 두었나 빠르게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인간적으로 휴가는 내가 가야지.”

    “그럴래? 대신 올 때 사람 하나 데려와야 돼.”

    “아…….”

    최 비서가 맥 빠진 표정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다. 완벽하게 관심이 사라졌다는 제스처였다. 사람 하나 데려온다는 말은 그냥 일하러 간다는 뜻이구만, 뭘.

    “휴가비도 넉넉히 쥐여 줄 거야. 안 넘어올 것 같으면 형이 잘 알아서 꼬셔 봐.”

    “머리 큰 애들 쪽 쑤셔 보면 한 명쯤은 얻어 걸리겠지, 뭐. 근데 누군데, 데려올 사람이?”

    최 비서가 곧장 문자를 써 내려가면서 물었다. 보통 사람을 찾거나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면 최 비서를 통했다. 사월이 머물 곳을 찾는 것도, 사월의 부모를 찾는 것도, 가게 옮길 자리를 알아볼 것도. 그런데 누구기에 원재가 다이렉트로 연락을 해서 사람을 찾는 걸까. 심지어 휴가비까지 쥐여 주면서?

    “그냥, 아는 착한 횟집 주인네 아들.”

    “……그거 남 아니냐?”

    올라오는 길에 지시한 내용인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위치가 파악된 거면, 어느 정도 원재의 손이 닿는 범위라는 뜻이었다. 횟집 주인 아들은 홍콩과 마카오를 오가면서 도박 빚을 쌓아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약 심부름이나 소매치기 따위를 하면서 빚을 갚고 있는 듯했다.

    반년이란 시간 동안 사월을 친아들처럼 챙겨 주었을 부부를 위해, 원재는 평생 해 본 적 없는 오지랖을 부렸다. 웬만큼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라 더 주저하지 않았다.

    “남이긴 하지. 나 담배 좀.”

    원재는 담배와 전화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번 떠올리니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집무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비상구로 향하는 발걸음은 다급했다. 그 짧은 시간도 아까워 움직이면서 전화를 건다. 이미 다 외워 익숙해진 번호를.

    달칵,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느라 원재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어깨 사이에 낀 핸드폰에서 귀를 떼지 않는다. 숨소리 하나도 그냥 흘리고 싶지가 않았다.

    “밥은?”

    ―먹었는데, 너는?

    “이제 먹어야지.”

    아……. 사월은 말끝을 늘이기만 하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순간 전화가 끊긴 건가 생각했지만, 간간히 들리는 바람 소리에 아직 통화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진짜 이따 올 거야?

    “일 대충 정리되면 저녁에 갈 거야. 왜, 보고 싶어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원재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눈앞에 선연했다.

    ―응.

    “……아.”

    담배를 낀 손가락으로 눈썹 위를 살살 문질렀다. 매캐한 냄새가 코앞에서 느껴져서 그런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보고 싶어서.

    “이번엔 안 까먹었네. 둘 다 따뜻해지는 법.”

    원재는 꼭 사월을 품에 깊이 안고 있단 착각을 느꼈다. 그건 아마 사월도 마찬가지리라.

    ―이렇게 해도 된대서. 그래서…….

    “맞아, 잘했어. 얼른 가서 칭찬해 줘야겠다.”

    예전처럼 모난 말 대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예쁜 입술 위에, 입을 맞추고 싶다. 덕분에 따뜻해진 마음을 불어넣어, 충만한 온기로 채워 주고 싶었다.

    ―……나 아주머니가 부른다. 끊어.

    “이따 봐.”

    부끄러운 건지, 원재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전화는 끊겼다. 원재는 한참이나 끊긴 전화를 내려다봤다. 핸드폰에 입이라도 맞추고픈 심정이었다.

    오늘 아침 내내 느꼈던 울렁거림이 다시 도졌다. 물컹대는 땅을 밟는 사람처럼 정신이 다 휘청댄다. 감정을 내비치는 법을 익힌 사월이 얼마나 심장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원재는 이제야 몸소 깨달았다.

    ***

    “아, 기가 다 빨리네.”

    법원을 나서며 최 비서가 앓는 소리를 한다. 반쯤 남은 아메리카노를 입 안에 털어 넣는다. 다 식어 빠져 미적지근해졌다.

    “다음엔 같이 안 가도 돼. 쉬어, 형도.”

    “어떻게 그르냐.”

    최 비서가 뻣뻣한 목을 주무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오른 듯,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꺼냈다. 장갑을 입에 물고 다시 벗어, 핸드폰을 열심히 두드려댔다.

    “주소 하나 보냈다. 그 어제 말한 납골당 주소야.”

    “연고가 있나 보네. 납골당에 안치한 거면.”

    “같이 일하던 식구들이 장례부터 다 해 줬다나 봐. 나이트 주방에서 일하던 주방 보조였는데, 꽤 두루두루 잘 지냈었나 보더라고.”

    날이 갑자기 쌀쌀해졌다. 최 비서가 말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입에서 나오는 말도 더없이 추웠다.

    “일하다 웨이터 하나랑 눈이 맞았대. 결혼 약속해 놓고, 웨이터는 뭔 개싸움에 휘말려 죽고. 주방 보조는 애 때문에 죽지 못해 살았나 보지. 애 낳고 몇 개월 좀 버티는가 싶더니 하루아침에 죽어 버렸대. 애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어서 아직까지 행방을 모르고. 아, 너 사무실로 들어갈 거야?”

    짧게 간추려 듣는 것만으로도 비참한 삶이었다. 뒷골목에서는 흔히 벌어질 법한 이야기. 들은 얘기 중, 해피엔딩은 없었다는 게 원재는 조금 마음이 아렸다. 바로 옆에 있는 최 비서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니. 여기로 바로 갔다가 퇴근할게.”

    “그래. 난 사무실 들렀다가 슬슬 돌아보고, 연락 남길게.”

    사월의 부모가 아니더라도, 뒤늦은 명복은 빌어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원재는 끝내 국화를 사 들고 왔다. 허탕을 치더라도 빈손으로 올 수는 없었다.

    “여긴가.”

    안내받은 장소를 찬찬히 살피던 원재의 시선이 한곳에 닿았다.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 한 장. 생전에 행복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놓이는 게 보통인데, 거기 놓인 것은 달랐다. 검은색에 하얀 얼룩이 번져 있는 모양처럼 보였다.

    원재는 걸음을 재촉해 그 앞에 섰다. 주먹보다 조금 큰 하얀 항아리와 앞에 놓인 사진. 원재는 꽃다발을 꾹 쥐었다.

    꽃을 감싸고 있는 비닐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린다. 잉크가 반쯤 새겨진 옆구리가 아파 오는 듯했다.

    원재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핸드폰을 꺼냈다. 시선은 검은 사진에 고정된 채다. 정말, 꼭 광활한 우주 같았다.

    ―예에, 사장님. 도착하셨습니까?

    “형. 안 만나 봐도 돼.”

    ―왜? 나 지금 거의 다 와 가는데…….

    초음파 사진. 그리고 그 아래 써진 작은 글씨를 따라 눈동자가 찬찬히 움직인다.

    “찾은 거 같아.”

    너는 우리의 우주♥

    “이 사람들이 일했던 곳이…… 어디라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구질구질한 뒷골목에서 해피엔딩을 꿈꿨을 평범한 두 남녀가. 자신들에게 찾아온 생명을 온 세상과 치환했던 그 사람들이. 사월의 부모였다.

    원재처럼 부모를 원망할 수도, 탓을 할 수도 없게 그들은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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