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 핸드 스피드 (7/16)

Chapter 6. 핸드 스피드

―어깨 아직 아파?

“존나 두드려 맞은 거 같은데.”

소파에서 혼자 잠이 들었던 사월이 답답함에 눈을 떴을 땐 모로 누운 원재가 온몸을 결박하듯 옭아매고 있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있던 원재를 밀어내려던 손에 힘을 풀고, 사월은 계속 잠을 청했었다.

―어떡해. 내가 일 빨리 정리하고 가게로 갈게.

사월은 뻣뻣한 어깨를 크게 돌렸다. 비좁은 소파 위에 성인 남자 둘이 몸을 겹쳐 잤으니. 온몸이 뻐근한 건 당연했다.

―벗고 기다려. 만져 줄 테니까.

“……돌았어?”

전화 너머로 원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월은 미간을 찌푸리곤 그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목덜미가 홧홧했다. ‘만져 줄 테니까’. 그 한마디에 온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가끔 원재는 예측할 수 없는 포인트에서 미친 소리를 건네곤 했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았다. 당황하는 건 늘 사월의 몫이었다, 지금처럼.

“미쳤나, 계속 생각나고 지랄이야…….”

원재를 그만 생각하고 싶다. 드문드문 끊긴 어젯밤 단편의 기억들. 달뜬 원재의 얼굴과, 맞물려 흠뻑 젖었던 구멍 주변, 팔뚝보다도 굵게 느껴졌던 그의 것. 모든 게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따위 몸짓으론 생각을 떨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하…….”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사월은 가게의 문이란 문은 다 열었다. 고작 하루 비웠다고 눈에 먼지가 밟히는 듯했다. 깔끔한 성격에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자신에게 계속 정액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다. 섹스하고 나서도 씻고, 아침에 급하게 전화를 받고 호텔을 나서면서도 씻었는데…….

몸 어딘가에 원재의 정액이 가득 차 있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나가면 누가 봐도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만 같았다.

환기. 환기가 필요했다. 머릿속이든 몸이든 가게든, 뭐든.

“그쪽이 사장?”

괜히 호들갑스러운 손길로 가게를 분주히 정리할 때였다. 열린 문 사이로 차가운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들어선 건 남자 셋이었다. 깔끔한 슈트 차림의 중년 남자. 그 양옆으로는 사월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 둘이 서 있었다. 한쪽은 마른 체형이었고, 또 한쪽은 사월이 늘상 봐 오던 깡패와 다를 바 없었다. 이상한 조합이네. 사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방인들을 훑었다.

“……누구.”

“네임 작업을 꽤 한다지?”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중후했다. 가게 안을 훑는 눈은 미묘하게 날카로웠다. 사월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낯설지 않은 인상이었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돈은 얼마든 줄 테니, 이 친구에게 네임을 새겨 줬으면 하는데.”

“…….”

중년 남성은 옆에 선 마른 남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사월이 그 남자를 찬찬히 훑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몸에 새겨야 하는데도, 그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무감해 보였다.

이런 식의 네임 작업 제안은 십중팔구 재벌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보통은 기업 간 관계를 위해 결혼을 해야 할 때. 서로의 네임을 새겨 만든 작위적인 인연을 운명으로 포장한다.

이번에도 그런 작업이리라, 사월은 안일하게 생각했다. 중년 남성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들기 전까지는.

 [元材] 원재 

사월이 한자를 몇 번이고 곱씹어 읽었다. 그러곤 눈만 치켜떠서 중년 남성을 바라봤다. 낯이 익었던 이유가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인상, 날카로운 눈과 뚜렷한 얼굴선. 전체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전부 원재에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내 아들 녀석의 이름이지.”

“…….”

“시세에 다섯 배로 쳐 주겠네. 그 정도면 충분할 듯싶은데.”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사월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그러다 가장 마지막에 떠오른 건 건조했던 원재의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뒤에서 중심 잡아 줄 위인도 아니었고.”

원재에게 결핍을 야기한 남자였다. 눈앞에서 그 당사자를 목도한 사월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한참 생각했다.

“성에 차지 않는 표정이군.”

“…….”

“열 배. 아니, 원하는 만큼 주겠네.”

원하는 만큼 돈을 줄 테니, 먹고 떨어져라. 남자의 요지는 그거였다. 사월은 원재의 타액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한 입 안을 혀로 훑었다.

“설마. 돈이 부족한가?”

이 남자는 모든 걸 다 알고 부러 찾아온 것이다. 원재가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네임 작업을 요구한 게 분명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오히려 머리가 가벼워진다. 할 수 있는 대처는 단 하나였다.

“좆 까.”

사월이 들고 있던 종이를 내던졌다. 한없이 가벼운 종잇조각은 팔랑이며 바닥에 떨어진다. 가게 안 모두의 시선이 추락한 이름 위에 닿았다. 사월은 손바닥 사이즈보다 작은 종이를 발로 지르밟는다.

“당연히 부족하지.”

“…….”

성 회장의 낯이 서늘하게 굳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원재의 가정사는 잘 모른다지만, 원재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다. 아니. 원재가 알았다고 한들, 자신의 이름으로 네임을 새기라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웃기게도 이제 그런 신뢰쯤은 노력하지 않아도 생기게 됐다. 사월은 조소를 터트렸다. 그냥 전부 다 우스웠다.

“그게 얼마짜리 이름인데.”

누구든 움츠러들게 하는 성 회장의 형형한 눈빛. 허나 사월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전혀 두려워하거나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이다. 성 회장이 고개를 기울이곤 사월을 빤히 바라본다.

“작업 안 하니까 다른 사람 알아봐.”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혼잣말처럼 작게 읊조린 말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청소고 뭐고, 담배가 절실해졌다. 거친 손놀림으로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낸 사월이 담배를 들고 열린 문으로 나갔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간 사월의 등 뒤로, 성 회장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서 있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폐 깊숙이 집어넣어 안정을 찾은 순간, 사월의 발치에 그림자가 졌다. 비스듬히 고개를 올렸다. 성 회장 옆에 서 있던 덩치 커다란 남자가 사월의 앞을 막아섰다. 서늘한 눈이 날카롭게 남자를 쏘아본다.

“시간 좀 내주시죠. 회장님께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좆 까라 그래.”

손가락 사이에 걸쳐진 담배를 툭 쳐서 재를 떨어낸다.

아마 그에게도 사월은 겪어 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일 터였다. 거친 깡패라면 차라리 힘과 지위로 짓누를 텐데. 사월에겐 그 어떤 방법도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어떤 것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성정으로 보였다.

양 비서는 잠깐 주저했다. 그러다 결심한 듯, 쭈그려 앉아 담배만 펴 대는 사월을 무작정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끼익―. 아스팔트 위에 타이어가 길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귀가 찢어지듯 날카로운 소리에 양 비서가 얼굴을 찌푸렸다. 사월의 고개도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익숙한 차였다.

벌컥, 다급하게 열린 차 문 사이로 더 익숙한 얼굴이 내렸다. 쾅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문을 닫은 원재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손 치워.”

스토크 주변에 사람을 심는다고 했던 이야기가 정말이었구나.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음에도 단숨에 찾아온 걸 보면 말이다. 고작 그딴 생각을 하며 사월은 느릿하게 가게 주변을 훑었다. 당연하게도 눈에 보이는 그림자는 없었다.

“……사장님.”

“누구한테 손을 대, 지금?”

단 몇 걸음만에 원재는 사월의 앞을 막아섰다. 사월은 입 안에 고인 연기를 한숨처럼 길게 내뿜었다.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는 평소 원재에게서 들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웃기게도 원재의 차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불쾌하고 두렵던 감정들이 티끌도 남지 않았다. 오직 쿵쾅대는 가슴과 설레는 감정만이 정신을 지배했다.

“회장님 개 노릇 하더니 주제넘는 짓 많이 하네, 양 비서.”

“…….”

양 비서는 원재의 등장에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머뭇대며 말을 고르는 사이, 스토크의 열린 문 사이에서 성 회장이 걸어 나왔다. 옆엔 호리호리한 남자도 함께였다.

이윽고 부자가 마주했다. 허나 둘 중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씨팔, 저 노인네가 노망났나. 원재는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화를 삭였다. 그런 원재의 등을 사월은 그저 올려다볼 뿐이었다. 시선엔 팽팽히 벌어진 셔츠 등판만 보였다.

“쯧. 이렇게 형편없을 줄이야.”

“형편…….”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원재는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성 회장은 탐탁지 않다는 시선으로 원재를 한 번, 뒤에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사월을 한 번 쳐다봤다.

“잊지 말거라. 천박함은 순식간에 물드는 법이다.”

담뱃재를 털던 사월의 손길이 순간 멈추었다. 원재는 입술을 거세게 짓씹었다. 눈에 보이는 걸 다 때려 부수고 짓밟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지만 지금 흥분했다가는 그간 준비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겨우겨우 터지는 욕지기를 참고 싸늘하게 일갈했다.

“천박한 건 내 핏줄 아닙니까?”

“네놈마저 이러는 걸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성 회장은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바람이 일며 값비싼 명품 향수 냄새가 풍겼다.

사월은 담배를 땅바닥에 지져 껐다. 바닥은 담뱃재에 의해 거무튀튀한 회색빛을 띠었다. 누군가 자신을 닮은 색깔을 꼽으라고 한다면, 딱 이 빛깔이 아닐까. 사월은 그렇게 생각했다.

***

“씹…….”

원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잠재울 수 없었다. 자신에게 건넨 경고가 통하지 않으니, 겁을 주기 위해 스토크를 찾은 게 분명했다. 노인네가 원하는 건 딱 하나다. 입맛대로 휘둘리는 아들. 아버지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 준 회사를 위해 삶이고 행복이고 다 개나 줘 버린, 등신 같은 아들.

원재는 10년을 그렇게 살았다. 아버지의 개로, 인형으로. 모든 건 아버지를 무너트릴 그 하루를 위해서였다. 지금 섣불리 움직였다간 쌓아 온 전부가 무색해진다. 원재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지만, 열이 뻗치는 건 참기가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건 안정이다.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마른 인영을 품에 끌어안았다. 달큰한 살 내음과 묘하게 깃든 담배 냄새. 조금 높은 체온이 품에 안기자, 거짓말처럼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원재는 사월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노인네가 뭐라고 했어. 아니, 뭐라고 했든 일단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 다시 나 밀어내지 마. 원재의 요는 그거였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맞닿은 가슴에 진동이 일었다. 목소리의 울림인지, 가슴이 뛰는 건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네가 왜?”

“나 때문이니까.”

아버지란 작자가 도대체 사월에게 어떤 말을 지껄였을지. 원재는 머리가 다 아찔했다. 겨우 자신에게 연 마음을 닫아 버릴 만큼, 사월에게 질 낮을 소리를 해 댔을지 몰랐다. 태생이니 집안이니 그딴 걸 존나게 따지는 분이시니, 그걸 꼬투리 잡았을 수도 있고.

“몰라. 기억 안 나는데.”

덤덤한 목소리에 가슴이 욱신댄다. 어떤 말이든 사월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말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생겨 먹기를 그렇게 생겨 먹은 노인네라, 평범한 말로도 사람의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니까.

“네가 미안할 필요 없다고.”

“…….”

악의를 품고 이곳까지 기어 온 걸 보면 분명, 고운 말이 나오지는 않았겠지. 원재는 팔에 힘을 주어 사월을 더욱 꽉 껴안는다.

“그것보다, 혹시…….”

“응.”

자신 없는 목소리는 끝을 흐리며 작아진다. 원재는 말꼬리를 놓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네임 작업 지금, 오늘……, 아니. 너무 급하면 내일…….”

사월답지 않은 화법이었다. 길을 잃은 말이 짧게 토막 나 엉성하게 이어진다. 원재가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아마 아버지가 네임에 관한 이야기를 했겠거니 추측한다.

“길바닥에서 태어났으니, 네 옆구리에 새겨진 걸 제 이름이라고 우기면 그만일 테니.”

분명 저에게도 그딴 쓰레기 같은 말을 지껄였으니.

“하고 싶어.”

“……아냐. 너무 급하니까, 내일…….”

“싫어. 나 사월 사장 불안한 거, 너무 싫어.”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사월이 불안해할 요소는 모두 제거해야 했다. 사월이 신뢰와 믿음을 차근차근 쌓는 내내, 작은 이물질도 끼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하고 싶어.”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사월이었지만, 재촉을 하는 사람은 원재였다. 결국 서로를 이기지 못하고,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작업일을 한참 앞당긴다.

***

옆구리 한 면을 채우는 라인 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원재의 전화가 끝없이 울어 대서였다. 상의를 벗어 드러난 원재의 옆구리는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피부에 새겨진 잉크들. 꽃 모양을 이룬 그것을 신기한 듯 손끝으로 살살 매만지며 전화 너머 목소리에 집중한다.

―프로필 보는데. 성탁이랑 뭐 전혀 접점이 없는데?

아까 아버지와 양 비서 틈에 껴 있던 사람이 자꾸 거슬린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의심 많은 성 회장이 아무나 끼고 다니지는 않을 테고, 분명 사월에게까지 데려온 이유가 있을 거다.

사월을 통해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게 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사월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게 진심일 리는 없으니 구태여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일 치려고 섭외한 걸지도 몰라. 최근 접촉한 사람 다 캐 봐. 특히 양 비서, 그 새끼.”

아까 전, 함부로 사월에게 손을 뻗는 모습에 하마터면 차로 들이받을 뻔했다. 정말 액셀과 브레이크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사월을 보고 간신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요즘 좆같이 구는 데 도가 텄어.”

―오케이. 뭐 좀 나오면 파일 보낼게. 근데…….

통화 내내 원재의 시선은 사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활짝 열린 문가에 서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붉은 입술에 물린 새하얀 담배. 입이 벌어져 새빨간 점막이 보이기 시작하면 뿌연 연기가 시야를 흐린다. 고작 담배를 빠는 모습인데도, 애가 닳는다. 원재는 마른침을 삼킨다.

―사월 사장 가게 계속 나가게 할 거냐?

“……가둘까. 역시 그게 좋겠지.”

―아니, 이 미친 사장 놈아. 주둥이는 둬서 뭐 해. 설득을 하라고, 설득을. 깡패 아니랄까 봐 감금부터 생각하냐.

원재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사월이 고개를 돌렸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사월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뿌연 연기 사이에서도 마주친 시선은 끊어지지 않았다.

“몰라. 끊어.”

얼핏 들리는 내용으론 일적인 통화 같았는데. 불친절하게 전화를 끊는 원재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원재는 성큼 사월에게 다가간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빼앗다시피 해서 불을 껐다.

“……뭐 해?”

“사월 사장. 여기 꽃 옆에 사월 사장 이름 쓰는 거 어때.”

원재가 손가락으로 네임 위를 덮은 꽃을 가리킨다. 아직 네임은 온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네임 위를 가로질러 스며든 잉크를 보며 사월은 혀를 찼다.

“……헛소리하지 말고, 통화 다 했으면 가서 누워.”

“…….”

대답은 없다. 사월이 먼저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보다 빨리 원재가 고개를 푹 숙인다. 갑작스런 행동에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원재는 자신의 바지를 한 번, 사월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시선을 던졌다.

“섰어.”

“…….”

이번엔 사월이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아닌 듯, 검은 슬랙스 중앙이 볼록 튀어나온 채였다. 이래 가지고 남은 작업을 할 수나 있나……. 사월은 긴 한숨을 뱉었다.

원재는 이제 발기한 좆을 숨기지 않았다. 작업대 위에 길게 누워 팔로 머리를 받쳤다. 볼록 튀어나온 아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말을 이어 갔다.

“작업 다 이렇게 해? 사월 사장이 이렇게 만져 대면서?”

“손 안 대고 타투를 어떻게 해.”

“모르는 사람 만지지 마.”

“별, 미친 소리…….”

사월은 뚫어져라 옆구리의 연한 피부만 바라봤다. 조금만 고개를 틀면 발기한 아래가 보였고, 반대쪽엔 노골적인 시선이 있어서였다.

얼굴이 따가워짐을 느끼면서 옆구리를 당겨 텐션을 준다. 바늘이 피부에 박히면서 잉크가 스며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늘이 떨어져 나가자 생생한 꽃이 피부에 피어난다.

“머리 처박고 있으니까 느낌이 이상해. 꼭…….”

“야.”

결국 머신을 끈 사월이 마스크를 내렸다.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진심으로 흥분한 원재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마저도 쑥 들어갔다.

“……너 헛소리할 거면 입 다물고 있어.”

“더워. 바지 벗고 하자.”

씨발……. 사람 말을 듣는 거야, 뭐야. 원래도 막무가내였지만 오늘은 좀 더 심했다. 그냥 말을 말자. 도안 라인을 그려 둔 전사 위에 바늘을 박아 넣었다. 이제 꽃줄기 하나만 더 그리면 된다. 길게 늘어진 선을 흔들림 없이 새겼다.

잉크 잔해와 피를 닦아 내자, 꽤 풍성한 스토크가 원재의 옆구리에 피었다. 커버업은 후 작업에 꽤 공을 들여야 했다.

네임 위에 그려 넣은 꽃에 색을 채워 완전히 덮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작업 부위가 잘 아물어야 했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가락이 스토크 위로 꼼꼼히 연고를 펴 발랐다.

“라인은 다 땄어. 2주 뒤에 색 채우면 돼.”

“그럼 네임 아예 가려져?”

사월이 고개를 끄덕인다. 원재는 작업대에서 일어나 제 옆구리를 내려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네임 두 글자만 덜렁 그려져 있었던 피부가 화사하게 변했다.

신기하네. 큰 전신 거울 앞에 선 원재는 제 살갗에 새겨진 잉크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거울 너머로 마스크를 벗은 채 작업대 정리를 시작한 사월이 비쳤다. 정확히는 사월의 목덜미에 새겨진 똑같은 디자인의 타투.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제 나 임자 없어.”

“…….”

사월이 랩을 떼다 말고 고개를 틀었다. 거울 너머로 웃고 있는 시선과 마주한다. 뭔가에 홀린 듯,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본다.

“얼른 채 가는 게 좋을걸.”

평소였다면 미간을 찌푸리고 외면했을 말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임자 없어. 그 말은 사월에게 큰 안도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무슨 자격으로 원재가 누구와도 엮이지 않길 바라는 거지.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건데. 왜 그딴 좆같은 기대를 품는 거야.

결국 터진 것은 조소였다.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거울 앞에 서 있던 큰 인영이 뒤를 돈다.

“웃으니까 더 예쁘네.”

발기한 아래는 곧 바지를 찢고 나올 듯, 크기를 부풀린 채였다. 성큼 다가온 원재가 팔을 뻗어 사월의 목덜미를 쥐어 당겼다. 서늘한 눈,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차근차근 입을 맞췄다. 그러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사월을 품에 안는다.

“약 묻어.”

맨 가슴에 닿는 까슬한 앞치마와 라텍스 장갑의 맨들한 촉감. 밀어내는 손길에는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딱 약이 묻지 않을 만큼의 적정한 거리를 둔 채, 사월은 얌전히 서 있는 중이다.

원재는 온몸의 피가 중앙으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착실하게 크기를 불려 나가는 좆을 느끼며, 작업을 앞당기길 잘했다 스스로 생각했다.

옆구리를 바라보던 사월의 얼굴에 내심 안도감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사월 사장 웃는 거 보려면 평생 따라다녀야지.”

드러난 어깨 위에 사월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목덜미에 얼굴을 푹 파묻은 탓에, 말을 할 때면 쇄골 부근이 간질댔다.

“……마음대로 하든가.”

아니, 간지러운 건 심장인가.

***

원재는 데스크에 앉자마자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열 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서류를 첫 장부터 꼼꼼하게 훑었다. 그러다 날카로운 시선이 한 단어 위에 멈췄다.

“네임?”

“검색 기록에 네임 관련된 게 여러 개 있었어. 다음 장 넘겨 봐.”

최 비서는 노트북을 닫은 뒤에야 원재 쪽으로 힐끔 시선을 둔다.

“그다음 장.”

허공 위로 빙글 손가락이 돈다.

눈이 옆에 달렸나. 원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서류를 두 장 넘겼다.

― 네임 새기는 방법

― 타투 네임 불법

― 네임 불법 시술 처벌

― 네임 불법 시술 벌금

성 회장과 동행했던 남자의 추가 자료였다.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 ‘네임’. 원재는 검지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어떤 역할로 데려온 건지, 이제 좀 추측이 됐다.

“굳이 사월 사장 찾아간 거면, 새기려던 게 내 이름이겠네.”

“그럴 확률이……, 없진 않지. 회장님 성정이라면.”

원재는 스토크에 도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스토크로 찾아갔다는 말에 순간 모든 사고가 멈추는 듯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아버지는 빠르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형이 죽고 남은 아들은 자신뿐이라, 어떻게든 뽑아 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뽑아 먹을 노인네다. 이를테면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줄 결혼 따위라든지…….

“그러고도 남을 노인네야.”

사월을 자신과 떨어트리려면 온갖 방법을 동원할 인간이었다. 하지만 불법 네임 작업을 물고 늘어질 순 없었겠지. 불법 작업을 자신의 아들이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계산기 잘 두드리는 양반이 이용 가치 남은 아들을 감방에 처넣을 리는 없다.

“음…….”

그렇다고 안심을 할 수도 없었다. 성 회장이라면 사월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교묘히 움직이는 게 어렵지 않으리라. 그런 쪽으로는 도가 튼 사람이니까. 원재의 검지가 데스크 위를 톡톡 두드렸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패가 펼쳐졌다.

“……광 박사 목숨값 할 때가 된 거 같네.”

최 비서는 광 박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지만 다 죽어 가는 걸 살려 놨으니, 목숨값을 받긴 해야지. 살벌한 원재의 말에 최 비서가 동조했다.

성 회장이 뒤로 몰래 손을 쓰는 건 모두 원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그 말은, 성 회장은 원재의 손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어떤 걸로 준비할까.”

“사월이한테 쓴 약, 광 박사가 제조한 환각제야. 약쟁이가 조달받긴 좀 힘든 약이 섞였더라고. 법인 허가 통해야 받을 수 있던데.”

“미친. 광 박사 주제에 그 귀한 걸 어떻게 구한 거래.”

“루트는 우리 입맛대로 만들면 그만이지. 성탁이 이번에 투자 시작한 법인이 적합할 거 같네.”

성탁이 의료 법인에 투자한 지 거의 반년쯤은 된 듯싶었다. 투자 이유는 아버지 본인의 안위였다. 얼마나 오래 해 먹고 싶은 건지 끔찍이도 건강을 챙기는 노인네니까.

원재의 머릿속에는 그다음에 벌어질 일들이 그려졌다. 약쟁이가 구하기 어려운 약을 구했다. 출처는 작지 않은 의료 법인. 정확히는 성탁의 지원을 받아 별관까지 세운 법인. 여기까지는 이음새가 엉성할 수 있다. 하지만.

“광 박사가 역할 인지를 잘하는 게 중요해. 알지.”

“아아, 오케이. 준비해 볼게.”

마약 제조에 일가견이 있는 광 박사라는 이음새가 있다면 딱 맞아떨어지겠지. 성탁 재개발 지역 연대를 족치고 다니면서 뒷돈을 받아 처먹는 조직의 약쟁이가 법인과 연루되었다는 흔적을 남긴다.

“풀어 주는 걸로 딜 쳐. 숨통 트일 즈음에 처리하고. 뒤져도 흔적은 남겨야지. 아, 그리고 아버지가 먹는 약도 좀 좋은 걸로 바꿔 드려.”

거기다 법인에서 공급하는 성 회장 영양제에 마약으로 분류되는 약까지 섞여 있다면 더없이 완벽했고.

“네, 사장님.”

왜 아버지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자문을 건네 본 적이 있다. 바깥일을 한다는 이유로 집을 비우고, 숱하게 바람을 피우고, 자신의 체격의 반도 되지 않는 아내에겐 손찌검을 일삼았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혼자 외롭게 죽던 순간에도 쓰레기 같은 아버지는 술이나 진탕 처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를 잃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형까지 떠나보냈다. 심지어 형의 숨통을 조른 건 노인네였고.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남은 모든 절망을 뒤집어쓴 자신.

아버지에게 똑같은 고통과 좌절, 상실감을 느끼게 해 주리라. 그게 스무 살도 채 되지 않던 원재가 품었던 원대한 꿈이었다.

서류철을 덮은 원재는 의자에 등을 깊게 파묻었다. 혈육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머리가 이렇게 냉정하게 잘 돌아가면서, 한 사람을 생각하면 모든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다. 과잉보호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조바심과 걱정만이 남는다.

“형. 가게는…… 접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노출되는 건 위험하니까.”

최 비서의 간결한 대답에 원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얼굴을 떠올리니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작업이 없는 날이라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사월을 지금 당장 품에 안고 향기를 느끼고 싶었다.

서류철을 한쪽으로 밀어 두던 최 비서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급하게 몸을 일으키는 원재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이 이동했다.

“성 사장, 설득이야. 납치 아니고 설득.”

“알았다고.”

납치하고 싶어도 조용히 당해 줄 성격이 아니라는 걸 모르나. 원재는 가벼운 손길로 의자 뒤에 걸어 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최 비서는 걱정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

급한 걸음으로 도착한 집. 벌컥 문을 열자마자 전실을 훑었다. 원재의 것보다 두어 치수 작은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원재는 흐트러진 구두를 신경도 쓰지 않고 거실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월이 고개를 돌려 현관을 바라봤다. 거실의 낮은 테이블 앞에 앉은 사월을 보자 발끝에서부터 안도감이 퍼졌다.

“……빨리 왔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괜히 민망해진 사월이 연필을 쥔 손으로 목덜미를 긁으며 하는 말이다. 원재는 넥타이를 비틀어 풀었다. 소파 팔걸이에 재킷과 타이를 던져 놓고, 사월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크로키 북 위에는 다양한 모양의 가쿠가 그려져 있었다. 검정 반팔 티를 입어 드러난 하얀 팔뚝. 그 팔뚝을 휘어감은 뱀 문신 끄트머리의 자잘한 상처 몇 개가 원재의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랗게 뜬 시선이 손목 위에 닿는다.

“다친 거야?”

고개를 젓는 사월에게 다가가 팔목을 끌어 가까이 당겼다. 주변이 붉은 걸 보면 상처 같기는 한데, 제 옆구리에 새겨진 문신처럼 선이 어두웠다.

“……네임이라도 생기나 보지.”

네임? 순간 원재의 머리가 차가워졌다. 슬쩍 미소를 걸고 있던 얼굴 또한 싸늘하게 굳었다.

자신의 옆구리에 있는 건 사월의 이름이 아니다. 성 회장의 말처럼 사월이 자신의 이름을 일부러 새긴다고 해도, 둘은 네임으로 이어진 사이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손목에 생긴 상처가 네임일지도 모른다고? 그 말에 단단하게 근육이 선 턱이 비틀렸다. 물론 정말 네임이 발현한 거래도, 그 네임 상대가 사월의 앞에 나타난다 할지라도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상대를 없애 버리면 된다는 쉬운 선택지가 있으니까.

사월이 옆구리에 새겨진 네임을 불안해하는 것처럼, 사월이 발현할까 불안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좆같은 상상만으로도 원재는 기분이 나빠졌다.

“…….”

의도치 않은 정적이 흐른다. 딱딱하게 굳은 원재의 표정을 목도한 사월은 시선을 떨어트렸다. 말실수를 한 거 같은데……. 도톰한 종이 위를 사각대던 연필이 같은 자리만 맴돌았다. 사월은 어색하게 종이 위만 긁적였다.

“내 이름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한 박자 늦은 대답이었다. 사월의 마음에 이미 불안의 파도가 한번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마음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그 영향으로 목소리도 제멋대로 불쑥 튀어나왔다.

“없지.”

“…….”

원재가 고개를 기울인다. 명백한 사실이지만, 사월의 입으로 들으니 더 확실해진다. 생전 느껴 본 적도 없던 질투라는 감정이 원재를 잠식한다.

네임이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주체할 수 없이 끌린다고 하던데. 사월마저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내내 자신을 밀어냈던 것과 달리 네임 상대에겐 단번에 마음을 연다면?

“아…… 좆같네.”

“…….”

“네 네임이라고 앞에서 얼쩡대는 새끼 있으면 어떡할 거야.”

“…….”

“갈 거야?”

사월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어떤 단어가 만들어질 듯 작게 부딪쳤다 떨어지기만 반복한다.

물론 자신에게도 원재는 조금 특별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화가 났을 말과 행동도 그냥 넘어간다. 소유인 것처럼 자신을 다뤄도 불쾌한 감정보다는 안정감이 먼저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네임 같은 건 결과가 정해진 일이었다. 정해진 운명, 정해진 네임. 이미 원재는 그걸 갖고 있었다. 그게 자신은 아니었고. 손목에 생긴 상처가 네임인지 아닌지조차 확실할 수 없는 상황인데…….

확률상 원재의 네임 상대가 먼저 앞에 나타날 가능성이 크지 않나. 그렇게 결론에 미치자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안 간다고 하면, 나랑 있어 줄 거야? 네 네임 상대가 나타난대도?

사월의 불안한 심연이었다.

“난 그런 거 안 믿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 애써 덤덤하게 던진 말은 그거였다. 크로키 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연필을 다시 집어 들었다. 새카만 연필이 하얀 종이 위에 사각대며 흔적을 남겼다.

“대답이 틀렸잖아.”

원재가 팔을 뻗어 사월의 뺨을 한 손으로 잡았다. 볼이 꾹 눌리며 입이 벌어졌다. 달뜬 숨이 새어 나왔다. 서늘하면서 동시에 뜨거운 시선이 사월을 꼼짝없이 옭아맨다.

“대답해, 제대로.”

“…….”

사월의 상체가 뒤로 밀려 소파에 닿았다. 더는 뒤로 몸을 무를 공간이 없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월의 옷 속으로 손이 거칠게 파고든다. 사월이 다급하게 옷에 파묻힌 손목을 움켜쥐었다.

“읏, 야…….”

“대답 먼저.”

그럼에도 손은 거침없이 가슴을 어루만졌다. 마른 가슴을 모아 쥐었다가,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고 살살 흔들어 댄다.

사월이 어깨를 움직이며 손길을 떨쳐 내려 노력했지만 모두 물거품이었다. 가슴팍까지 올라간 옷 아래로 차가운 공기가 닿자 절로 몸이 움찔댔다.

“딴 새끼 나타나면 따라갈 건가 봐?”

“으읏, 읍.”

원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간다. 운명을 믿지 않는다는 애매한 대답 말고 확신이 필요했다.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젖꼭지를 사이에 낀 손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사월이 움직여 손가락이 빠지면, 유두를 손가락으로 잡아 꼬집듯 비틀었다.

“읏!”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손길에 사월은 삽시간에 흥분에 휩싸인다. 입술 사이에서 새된 비명이 터졌다. 원재가 혀로 사월의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핥았다. 상체는 이미 기울어 사월의 위를 점령한 뒤였다.

“꿈도 꾸지 마. 너 못 가. 알았지.”

“으응, 흐아…….”

“알겠다고 해. 얼른.”

강압적인 말 사이사이, 두 입술이 야릇하게 포개졌다. 뜨거운 숨이 서로의 입 안으로 오고 갔다.

금세 축축해진 사월의 눈가였다. 붉어진 눈이 원재를 응시한다.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원재가 기어이 대답을 얻어 냈다. 그의 낯에 그제야 안도가 스친다. 불안함을 걷어 낸 얼굴엔 슬쩍 웃음까지 걸린다.

사월의 옷 속을 파고들었던 손이 쑥 빠져나간다. 그러곤 티 끄트머리를 잡아 당겨 올린다. 순식간에 반팔 티가 벗겨진 모양새가 되었다.

“가고 싶다고 해도 안 돼.”

“하아…….”

아직 있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 정말 혹시의 혹시. 만약의 만약이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절대 놓을 수 없다. 삭막하고 외로운 원재의 마음엔 사월 하나만이 덩그러니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안 돼, 절대.”

바지와 속옷까지 단숨에 벗긴 원재가 가슴부터 골반까지 천천히 입을 맞추며 내려간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사월이 움찔대며 반응을 보였다.

“아아…….”

매끈한 사월의 허벅지를 쓸고 내려온 손이 무릎 뒤를 잡았다. 그러곤 단번에 밀어 올렸다. 사월의 허리가 들리며 엉덩이가 훤히 드러났다.

“읏, 야. 뭐 하는……. 으읏.”

뜨거운 것이 구멍 위를 훑고 지나간다. 사월이 다급하게 원재의 팔뚝을 잡았다. 하지만 구멍 위를 눅진하게 핥는 애무는 멈추지 않았다.

“아, 잠깐……, 거긴 하, 하지 마.”

이 안에 제 흔적을 새겨 넣고 싶다. 네임이라는 같잖은 걸로 서로가 불안하고 싶지가 않다. 샤워를 했는지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사이에 있는 사월의 체향을 맡으며 원재는 뜨거운 혀로 다시 구멍 주변을 핥았다.

“하지 마, 흐흣!”

원재가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웃었다. 입가는 타액으로 질척했다. 다시 사월의 다리 사이로 머리를 박고, 뾰족하게 세운 혀로 구멍 안을 푹푹 쑤신다.

사월이 허리를 뒤척이며 몸을 떨었다. 금세 구멍이 축축해졌다. 원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더 밀어 올렸다.

“엄살이 늘었네.”

사월 사장이 엄살이 늘긴, 뭐가 늘어. 내 질투가 늘은 거겠지. 원재는 축축해져 뻐끔대는 구멍으로 다시 입을 가져다 댔다. 사월의 마른 다리가 달달 경련했다.

원재의 머리카락이 허벅지 사이를 간질여 자꾸만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를 움찔댈 때마다 안을 파고든 혀가 끈적하게 눌렸다.

“으읍…….”

뾰족하게 세운 혀는 좆이 드나들던 길을 지났다. 마찰이 될수록 구멍 안이 홧홧해졌다. 사월은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살면서 여기로 좆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혀까지 쑤셔 박힐 줄은 몰랐다.

힘이 들어간 단단한 혀는 성기를 삽입당하는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흠뻑 젖어든 아래가 쑤셔질 때마다 질퍽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응, 읏!”

혈관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같이 온몸이 간지러웠다. 심장을 쥐어짰다 놓은 것처럼 피가 뜨겁고 빠르게 끓어오른다. 호흡이 턱밑까지 찬다.

하아, 하아……. 삼키지 못한 호흡에 입가에는 타액이 흐른다. 원재의 손길이 닿았던 젖꼭지가 근질댔다. 사월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유두를 집었다. 원재가 만지던 것과는 영 느낌이 달랐다. 어설픈 손길로는 쾌락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흐아…….”

꼬집고 비틀어도 욕망이 다 차지 않았다. 사월이 유두 주변이 다 붉어질 때까지 문지르고 비벼 댔다. 요령 없는 손길은 곧 원재에게 저지당하고 만다.

“빠는 것도 못하고, 비비는 것도 못해.”

거의 울상이 된 사월이 시선을 들었다. 원재는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술을 밀어 올려 웃었다. 그리고 상체를 기울여 사월의 위에 자리 잡았다. 마른 다리는 어깨 위에 건 채로, 가슴을 크게 문다. 한껏 예민해진 가슴이 뜨거운 점막 안으로 딸려 간다.

“아아…….”

추웁……. 키스를 하듯 유두를 입 안에 넣어 혀로 굴렸다. 젖꼭지가 흠뻑 젖었다. 정점 위를 빠르게 스치는 뜨거운 혀의 촉감에 사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은데 허벅지 사이에 비집고 들어선 원재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랫배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턱이 단단해진다.

“으으―.”

가슴을 빨아 주는 것만으로도 사월은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원재는 치켜뜬 눈으로 사월의 표정을 살피다 이내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축축한 구멍 주변을 슥 훑는 단단한 중지. 주름 하나하나를 문지르듯 손끝이 그 위를 배회한다. 그러다 입구에 툭 걸리는 손가락. 사월이 숨을 들이켜며 원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 잠깐. 읏.”

저지에도 불구하고 젖은 손가락이 구멍 안을 쑥 파고들었다. 혀와는 전혀 다른 압박감이었다. 손가락은 단단하고 집요하게 안을 유린했다. 순식간에 세 마디가 들어찼다. 오물거리는 구멍을 비집고 손가락 두 개를 더 밀어 넣는다.

“흐아, 아…….”

“여기까지 혀가 들어가서 내 흔적 새겼어.”

손가락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젖은 내벽을 퍽퍽 쑤셨다. 혀가 닿았던 곳을 누르자, 사월이 몸을 부르르, 파들거렸다.

젖은 손가락은 점막을 꾹꾹 누르며 계속해서 입구를 벌렸다. 구멍이 벌름대며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차지게 손가락을 얽매는 느낌에, 원재는 새끼손가락마저 짓쳐 넣었다.

늘어난 손가락 틈 사이로 액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이내 원재의 손바닥까지 젖어든다. 질퍽거리는 야릇한 소리에 원재의 눈빛이 형형해진다.

“흐응…….”

원재는 진득하게 가슴을 빨아 올렸다. 그대로 가슴 주변에 작은 울혈이 피어났다. 사월이 자신의 손길에 흥분하고 느끼는 모습을 목도하자, 원재의 아래 또한 묵직해졌다. 바지 아래가 불록 튀어나왔다.

하, 씨팔……. 자꾸만 욕이 터졌다. 어서 갑갑한 바지를 벗고 싶었다. 손가락 네 개를 삼키고 있는 구멍으로 좆을 쑤셔 넣고 싶었다.

추웁……. 낯 뜨거운 소리와 함께 가슴을 괴롭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거친 삽입을 하듯 퍽퍽 쑤시던 손가락도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새빨간 점막이 딸려 나왔다 도로 사라진다.

주륵. 뜨거운 액체가 골을 타고 흐른다. 축축해진 손을 구멍 주변에 문질러 젖은 기운을 옮긴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색정적이었다. 원재의 입 안에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온다.

“……잘 새겨졌나, 확인해야지.”

“하아…….”

물기가 사라진 손으로 벨트를 쥐었다. 흥분에 겨워 손이 자꾸만 엇나갔다. 미간을 찌푸린 원재가 무릎을 세워 두 손으로 벨트를 잡아 열려는 순간이었다.

띠디디딕―.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 질끈 감고 있던 사월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몸을 움츠리며 눈을 번쩍 떴다. 다급하게 팔로 바닥을 딛고 반쯤 일어섰다. 원재 또한 벨트를 잡은 채로 뒤를 돌았다. 그 짧은 움직임에도 신경질이 묻어 있다.

삑삑―.

번호를 잘못 눌렀는지 경보음이 짧게 울렸다.

“…….”

사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집에 누가 찾아오든 상관없지만, 자신이 이 꼴이면 말이 달라진다. 마구 뒤집혀져 소파 위에 늘어진 반팔 티셔츠. 벗겨져 바닥에 나뒹구는 바지와 속옷. 엉덩이 아래로 흐르는 축축한 액체. 반쯤 발기해 끄트머리가 번들대는 좆.

삐삐―.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사월은 급하게 몸을 일으켰고, 원재는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분위기를 깬 불청객이 누군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사월이 집에 머물게 되면서 비밀번호를 바꾼 게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섹스하는 모습을 그대로 최 비서에게 보여 줄 뻔했다.

원재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

원재는 바지 안에 발기한 좆을 잠깐 내려다보고는 볼 안쪽 연한 살을 씹었다. 무시하고 하던 걸 계속하기엔, 사월의 동공이 잘게 떨리고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하’, 짧게 한숨을 쉰 원재는 발가벗은 사월의 무릎 아래로 팔을 끼웠다. 마른 몸을 단숨에 안아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왔는데…….”

“…….”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반동에 발기된 좆이 욱신댔다. 원재는 묵묵히 침실로 향했다. 등 뒤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금방 내쫓을게.”

침대 위에 사월을 내려놓고, 시트를 끌어와 마른 몸을 감쌌다. 도톰한 것에 푹 싸인 사월은 이불을 당겨 몸을 더 가렸다. 문까지 꼼꼼하게 닫은 원재는 방문에 이마를 기댔다. 불룩해진 앞섶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음에 성큼 거실을 가로질렀다. 앙다문 입과 찌푸린 미간, 원재는 누가 봐도 화가 난 표정을 한 채였다.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손길엔 신경질이 가득했다.

“뭐야. 전화를 왜 안 받아.”

“……하, 뭔데.”

“비밀번호는 왜 바꿨는데? 잠깐 좀 비켜 봐.”

최 비서는 현관에 팔을 기대고 비스듬히 선 원재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발기해 버린 아래 때문에 원재는 조금 느리게 반응했다. 목소리는 음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 박사는 어쩌고 왔는데.”

최 비서는 익숙한 듯 거실에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소파 앞의 흐트러진 옷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들고 있는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 뒀다. 원재는 그 뒤를 따라 팔짱을 끼고 감시하듯 최 비서를 응시했다.

“광 박사 새끼는 안 일어나서. 뭐 할 수 있는 게 없어, 지금.”

“깨워야지. 누가 편하게 재우래.”

“비싼 약을 존나게 먹였더니 효과가 지나치게 좋네.”

원재가 혀를 찼다. 미친 새끼가 약을 그렇게 처먹었으면서, 내성도 안 생겼어? 뭘 아직까지 처잔다는 거야. 원재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깨를 으쓱 올린 최 비서는 주방에서 물을 한 컵 내려 마셨다. 아직 이 집에 둘 말고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일단 광 박사는 알아서 정리할 거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양 비서한테 연락이 왔어.”

“양 비서?”

“어. 번호도 새로 파서 연락했더라고. 내일 오후에 시간 내줄 수 있냐고 하던데. 회장님 모르게 움직이는 거라 시간 많이 못 빼고 잠깐이면 된다고.”

무슨 꿍꿍이지. 양 비서가 나를 왜? 원재는 혀로 볼 안을 훑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직접 찾아올 일이 없었다. 아버지의 충직한 개 노릇에 목을 메던 인간 아닌가.

“비벼 보려고 각 재는 거 같기도 하고……. 약간 흘리듯이 말하긴 했는데 눈치로는 어제 일 때문인 거 같아. 사월 사장하고―.”

“형. 잠깐.”

사월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원재가 다급하게 말을 막아섰다. 동시에 침실 문이 열린다.

“…….”

“…….”

세수라도 한 건지 흠뻑 젖은 머리. 눈과 뺨이 달뜬 사월이 턱에 맺힌 물기를 닦으며 막 나오려던 모양을 취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최 비서의 시선이 달아오른 사월의 얼굴부터 목덜미, 품이 큰 원재의 티셔츠, 물기가 남아 있는 종아리까지 훑었다. 마치 급하게 씻고 나온 사람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최 비서가 미간을 구겼다.

“설득이, 이렇게 빨리될 리가 없는데…….”

“형, 바쁘다며.”

의뭉스러워하는 최 비서의 말을 뚝 자르는 음성. 목소리를 낸 원재가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시야가 차단된다. 식탁 맡에 멀뚱히 선 최 비서의 다리를 툭툭 발로 쳤다.

원재와 최 비서의 시선이 마주한다. 곧 느릿하게 최 비서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원재의 불룩한 아래가 그제야 눈에 들어찼다. 작게 욕을 짓씹으며 팍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뭔 상황이냐.’

‘눈치껏 가.’

눈짓으로 나눈 짧은 대화. 원재가 고개를 작게 까딱이자, 최 비서가 구긴 인상을 펴고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이 연락이 안 돼서 찾아왔는데, 방금 얘기를 다 마쳤네요. 하하.”

“…….”

“가, 형.”

예에. 떨떠름한 표정의 최 비서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다. 사월은 손등으로 뺨에 남은 물기를 닦으며 허둥지둥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가끔 쳐들어와.”

지나가며 원재가 작게 속삭였다.

“아…….”

고개를 끄덕인 사월이 어색한 걸음으로 식탁에 가 앉았다. 원재는 혹시라도 최 비서가 걸음을 돌릴까 뒤에 바짝 붙어 등허리를 밀어 댔다. 현관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월은 차갑게 식은 팔뚝을 쓸었다. 방에 혼자 남자마자 작은 욕실에 들어가 찬물로 몸을 적셨다. 짧은 시간 달아오른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찬물로 세수까지 마치고 대충 물기를 닦은 뒤, 드레스 룸을 뒤져 원재의 옷을 꺼내 입었다. 체격 차이가 크긴 한지 어깨선이 팔뚝 중간쯤에 축 늘어졌다. 원재의 향이 온몸을 감쌌다.

침대로 다시 갈까 하다, 방문 앞에 서서 고민을 했다. 그러다 문틈으로 들리는 ‘사월 사장’이라는 말에 문을 열었던 거였다. 저 비서와의 대화에서 내 이름이 나올 이유가 어떤 거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사월은 깊게 골몰했다.

“왜 씻었어?”

찬 물기의 기운이 남은 뺨에 뜨끈한 손바닥이 닿자, 어깨가 움찔거렸다.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얼굴을 마주한다.

“우리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작게 웃으며 옆자리에 앉는다.

무슨 말을 하던 거야? 내 이름은 왜 나온 거야? 사월은 궁금한 게 많았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 들어오는 체온에 그저 뜨거운 호흡만 이어 갔다. 원재의 엄지가 손등 위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사월 사장이 이런 차림으로 있는데, 혼자 빼야 되는 건 좀 가혹한 거 같아.”

어지럽게 테이블 위를 돌아다니는 시선과 그런 사월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 두 개의 시선이 어긋난다.

기류가 묘하게 흘렀다. 원재의 눈빛이 은근하게 사월의 이목구비를 훑어 내렸다. 맞닿은 손바닥이 뜨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해?”

“……됐어.”

사월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찬물로 겨우 몸을 식힌 뒤였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작은 손길만으로도 금방 끓어오를 것을 알고 있었다. 원재와 관계를 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아까 전 현관 하나를 두고 뒤엉켜 있던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너무 민망했다.

뜨겁게 닿아 오는 원재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사월이 식탁을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다급하게 손목이 잡히고 순식간에 원재의 허벅지 위에 앉는 자세가 됐다. 어깨에 단단한 가슴이 부딪힌다. 가깝게 닿은 귓가에 허스키한 목소리가 박혔다.

“우리 하자, 그냥.”

원재가 상체를 숙이고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거리를 좁힌다. 사월 또한 살짝 벌어진 원재의 입술을 응시한다. 찰나에, 갈등이 스쳤지만. 이윽고 사월은 눈을 감는다.

***

“양 비서 만날 장소는?”

―진짜 가 보게? 영 찜찜한데.

원재는 전화를 고쳐 쥐며 커튼을 걷었다. 틈 사이로 새벽의 어둠이 쏟아진다. 어두운 창 위로 침대가 고스란히 비쳤다.

“사월이 얘기라며. 뭔 소리를 하는지 내가 듣고 싶어서 그래.”

비가 오지 않음을 확인하고, 커튼을 다시 내렸다. 몸을 돌린 원재의 시선이 침대 위로 향했다. 그새 바꾸어 보송한 이불에 파묻혀 자고 있는 사월이 보였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얀 맨살이 이불 틈으로 드러났다.

―흠. 그럼 약속 잡아 봐?

“일단…… 뭐라고 지껄일지 들어는 봐야지.”

찝찝한 건 원재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충실한 개로 지내던 양 비서가, 아버지를 따돌리고 자신에게 접근을 한다? 그것도 사월의 이야기로? 충분히 의심할 일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의심하기엔 또 여지가 남는다. 요즘 들어 성탁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던 성 회장과 뒷일을 도맡아 하던 자신을 따르는 세력이 티가 나게 갈리는 중이었다. 이 흐름이 원재에겐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를 빠르게 무너트리는 데 더없이 좋은 찬스였으니까.

거기다 그간 봐 온 양 비서도 꽤 머리를 굴릴 줄 알고, 약삭빠른 새끼였다. 어제만 해도 순순히 물러설 노인네가 아니었는데, 이빨 빠진 듯 구는 변화를 감지한 걸 거다. 이걸 기회로 노선을 갈아타려는 수작을 충분히 생각해 낼 만한 약아빠진 새끼. 그래서 자꾸만 갈등이 됐다.

―하, 모르겠다. 그 새끼는 왜 뒷구멍으로 연락을 해서 심란하게 만들고 난리야. 스케줄 잡고 문자 남길게.

“응. 부탁해.”

더군다나 사월의 이야기라면 제아무리 개수작이래도 원재는 기꺼이 속아 줄 용의가 있었다. 간결한 대답에 통화가 마무리될 듯하더니, 다시 이어진다.

―아, 그리고 너는 사월 사장 있으면 말을 해야지. 나만 눈치 없는 새끼 됐잖아.

“어디 또 한 번 와 봐. 그땐 보는 앞에서 할 거니까.”

―미친. 다신 안 가. 끊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끝으로 가차 없이 끊긴 전화를 내려다본 원재가 픽 웃었다. 용도를 다한 핸드폰을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곳엔 고민도 갈등도 잊게 해 줄 이가 있었다. 이불 속, 뜨끈해진 몸을 가득 끌어안는다.

사월을 품에 안을 때면 경험해 본 적 없는 안락함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살면서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준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는데. 작게 뒤척이는 마른 등을 토닥이며 원재는 눈을 감았다.

소중한 것을 움켜쥐듯, 사월을 감싼 손에선 밤새 힘이 풀어지지 않았다.

1시. 부평.

최 비서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사월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깨워 볼까도 했지만, 거의 기절하다시피 눈을 감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도 양심은 있으니까. 이불을 끌어 붉은 자욱이 가득한 턱 아래까지 덮었다.

급하게 잡힌 약속 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더군다나 거리도 꽤 있어 서둘러야 했다. 옷을 챙겨 입고 드레스 룸에서 나온 원재는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잠에 취한 사월에게 손을 뻗어 머리칼을 느릿하게 쓸어 올린다. 동그란 이마가 드러나자, 당연하단 듯 입술이 내려앉는다.

“나 잠깐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응.”

대답인지 아닌지, 희미한 소리를 뱉었다. 원재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손이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연신 사월의 몸 이곳저곳을 쓰다듬었다. 울혈이 잔뜩 남은 쇄골과 귓불. 붉게 부푼 입술과 눈가까지.

자는 애를 혼자 두고 나가려니 영 마음에 걸렸다. 정확히는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는 기분에 가까웠다.

XX 카페.

그런 원재를 재촉하듯 문자가 하나 더 이어졌다. 이것 역시 최 비서에게 온 것이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아닌 최 비서와 연락을 하고 있는 듯싶었다.

또 한 번의 갈등이 원재를 관통한다. 가는 게 맞을까. 내가 가고 나면. 사월에겐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일러 놓아야 하나. 아니, 그건 너무 구속하는 건가.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거칠게 살아온 데다, 앞가림쯤은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사람인데.

짧은 한숨과 함께 고민을 접었다. 뭐든 빠를 수 있다면 빠른 게 좋았다. 사월은 안전한 바운더리에 두기 위해서는.

“보고 싶으면 연락해.”

만약, 양 비서가 자신 쪽으로 넘어오는 거라면 아버지를 무너트리는 일은 더 빠르고 쉬울 것이다. 아버지와 가까웠던 만큼 비밀을 많이 쥐고 있는 인물이니. 원재는 그것에 일말의 희망을 품어 보기로 했다.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미리 보상받듯 잠에 취한 얼굴을 부여잡고 연신 쓰다듬었다.

“가서 일이나 해…….”

미간을 찌푸린 사월에게서 기어코 한소리가 나온다. 크게 웃음을 터트린 원재가 뺨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응. 갔다 올게.”

원재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움직였다. 혹여라도 깨지 않게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러곤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곤 걸음을 재촉했다.

지이잉―.

침대 맡에 던져두듯 올려 둔 낡은 핸드폰이 진동을 울린다. 원재가 나가고 난 뒤, 설핏 잠에 들었던 사월이 눈을 구겼다. 지이잉. 진동은 계속해서 잠을 방해했다.

“아…….”

무시할 수도 없게 이어지는 진동에 사월은 결국 눈을 떴다. 베개 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쥐고 액정을 확인했다.

“이 사람이 왜…….”

스토크 건물 2층에 있는 라이브 카페 사장이었다. 번호는 저장되어 있어도 건물 관리에 대한 내용이 아니면 연락할 일이 없는 사람인데……. 사월이 의아한 낯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사, 사월 사장. 가게, 가게 비워 두고 어? 어딜 갔어? 응?

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였다. 말을 연신 더듬으며 겨우 한 문장을 완성한다.

“뭔데 그래.”

―큰일 났어! 지금 가게에 부, 불이 나서 신고를 했는데. 얼른 와! 얼른.

“불?”

사월이 인상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기운 없이 축 늘어졌던 몸에 힘이 들어간다. 불이 왜…….

“아.”

사월의 코끝에 남은 냄새. 원재에게 앙심을 품은 남자들에게 납치당하기 전 맡았던 휘발유 냄새. 설마…… 실패로 돌아가서 불을 지른 건가. 가게를 비웠다는 사실을 알고?

사월이 이불을 휙 걷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다리가 바닥에 닿았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원재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세탁된 채 걸려 있는 옷을 끌어 내렸다.

“신고는?”

―했지, 했어. 근데 여기 길이 좁아서……, 모르겠어! 얼른 와!

“금방 가.”

마음이 다급해졌다. 통화를 끊고 급하게 옷을 입고, 핸드폰과 지갑을 챙긴 뒤 건물을 빠져나오는 데까지는 7분이 걸렸다. 마침 대로 앞을 지나는 택시가 있어 그대로 잡아탔다. 스스로가 놀라우리만치 침착하게 굴었다. 택시에 올라 목적지를 말하고 나서야 시트에 등을 기댔다.

“…….”

일단 신고는 했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정리가 될 거야. 꽤 단순하게 결론을 지었음에도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가게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원재에게 알려야 할까, 말아야 하나. 혹시라도 그때 그 새끼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지. 일하는 사람을 괜히 번거롭게 만드는 건 아닐까. 사월이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반복한 문자가 임시 저장함에 남았다.

원재의 아버지가 가게에 들이닥친 후로는 매일같이 출근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작업이 있으면 가게에 나가기는 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손톱을 까득 씹으며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사월은 낡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나니, 자신이 원재의 집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것이 생각났다.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연락을 해야 하는구나.

이제 사월의 행동반경 모든 곳에 원재가 얽혀 있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사월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미친놈처럼 밀어냈는데, 기어코 이렇게 됐구나. 시트에 등을 깊게 기대자, 왜인지 마음이 편해진다.

원재의 집과 가게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골목이 왜 이리 복잡해……. 저 전봇대 앞에 세워 드릴게.”

택시가 좁은 골목에 접어들었다. 사월은 익숙한 풍경을 보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신고를 했다더니 아직 소방차는 오지 않은 듯했다.

열린 가게 문과 닫힌 창문 틈 사이로 연기가 새어 나온다. 불길이 치솟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심각해 보이는 시커먼 연기.

택시가 멈추고, 차비를 계산하는 동안 가게 앞에 선 라이브 카페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안절부절못하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뛰듯이 택시 옆으로 와 문을 벌컥 열기까지 한다. 뭔가에 쫓기듯 불안해 보이는 남자가 열어젖힌 문에서 사월을 잡아끌었다.

“소, 소방차 지금 저 골목으로 온다고 그랬어. 얼른 들어가! 장비 같은 거 빨리 챙겨 나와!”

다급한 외침에 덩달아 급해진 사월이 가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장비 따위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스토크 쪽방에 있는 김 사장의 흔적이 모두 타 버리는 건 아닐까, 사월은 그게 걱정이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김 사장의 옷, 신발, 사진. 그가 살아 있었다는 일말의 흔적들이 모두 재가 되어 타 버렸으면 어떡하지. 그럼 김 사장이 자신의 곁에 있었단 사실이 모두 없던 일처럼 여겨질 것만 같았다. 사월은 뛰듯이 가게를 향해 갔다.

그러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이렇게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타는 냄새는 왜 나지 않지? 사월의 걸음이 뚝 멈췄다.

가게 문은 활짝 열린 채로 시커먼 속내를 보이고 있었다. 연기 때문에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사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안을 가늠하듯 바라봤다.

“얼른! 잡았어!”

갑자기 라이브 카페 사장은 악을 써 댔다. 사월은 발버둥 따위를 치지도 않는데 혼자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리고 있었다.

“뭐야, 씨발.”

당황한 목소리가 채 욕을 뱉기도 전이었다. 스토크 안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덩치 큰 남자들이 사월을 에워쌌다. 그 압박에 사월은 거의 끌려가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선 카페 사장의 거친 숨소리가 떠나지를 않았다.

사월이 스토크 안으로 들어가자 내내 열려 있던 문이 탁, 닫혔다. 내내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말이다.

“혹시 들었나? 원재, 그 녀석의 형도 그림을 그렸어.”

연기 사이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게 안쪽으로 몇 걸음 더 다가가자, 연기가 잦아들었다. 희뿌연 시야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바로 어제 봤던 남자. 원재의 아버지. 성 회장. 그는 사월의 크로키 북을 한 장씩 찢어 작업실 한가운데 있는 드럼통에 던진다.

몇 해 전, 김 사장이 겨울에 난로를 만들겠다고 얻어 온 낡은 드럼통이었다. 군고구마를 구워 주겠다, 계란을 쪄 주겠다 말만 번지르르 하더니, 결국 아무것도 해 주지 않고 떠났다. 이 와중에 김 사장이 남긴 고물덩어리를 보고 안도를 한 자신이 참 등신 같기만 했다.

그 속으로 떨어진 그림은 활활 타올라 곧 바스라져 사라진다. 남자들이 그 위로 냄새가 나는 액체를 계속 들이붓는다. 매캐한 연기가 입 안에 들어차는 탓에 목이 따가웠다.

“손이 병신이 되고 나선 완전 돌아 버렸지.”

“……나가.”

사월이 한 글자씩 짓씹어 말했다. 허나 날을 세우는 사월의 경고 따위는 무섭지 않다는 듯, 성 회장은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쪽도 손으로 벌어먹고 사니까 큰 녀석의 심정을 좀 이해하려나. 가만 보니 쓸데없는 데 자존심 세우는 것도, 원재 정신을 쏙 빼는 것도 참 비슷해. 결말도 똑같으려나.”

“헛소리 집어치우고―.”

“그 애의 말로가 어찌된 줄 아나?”

“…….”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사월은 할 말을 잃었다. 어린 아들의 자전거를 잡아 주지도 않는 아버지. 목숨을 끊은 형. 그럼 원재의 유년에 무엇이 남은 걸까.

사월은 주제넘게 원재를 동정했다. 왜 그렇게 애정에 목마른 사람처럼 굴었는지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자네는 어떨까. 길바닥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꼴을 보니, 끈질기게 살고는 싶은가 보군. 버러지처럼.”

웃기는 소리였다. 누구보다 죽고 싶은 사람은 사월이었다. 하루빨리 뒤져서 김 사장이나 만났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다. 그 생각도 원재를 알게 된 이후 곱씹지 않게 되었지만. 사월만큼 삶을 향한 애착이 없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게. 돈을 줄 때 알아서 떨어져 나갔어야지.”

“…….”

“너 같은 정액받이 구멍 한두 번 본 줄 아나? 어디서 구질구질하게 바짓가랑이를 잡으려고 골치를 썩여.”

쯧, 혀를 차는 소리가 귓가에 콱 틀어박힌다. 성 회장을 마주한 사월은 자신이 선 주변만 푹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발치에 나가떨어진 듯, 애달프게 파닥댔다.

돈, 정액받이, 구멍, 구질구질, 골치. 걸걸한 목소리는 사월을 깎아내릴 대로 깎아내린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사월의 시선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진다.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뒷줄기가 서늘하다. 그간 원재의 품에서 애정 어린 속삭임만 들어 잊고 있었다.

더 파고 들어갈 곳도 없는 밑바닥. 이게 원래 자신의 자리라는 것을. 주제넘게도 행복해지기를 바랐던 건가.

모든 게 정신없이 사월의 주변에 휘몰아친다. 따가운 눈초리와 날카로운 말, 시궁창 같은 삶, 그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붙드는 목소리.

“보고 싶으면 연락해.”

“…….”

보고 싶어.

사월은 속으로만 외쳤다. 자신을 에워싼 남자들이 손에 든 것을 크게 휘두르는 광경을 보면서, 질끈 눈을 감았다.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주제넘게, 네가 보고 싶어.

“끈질긴 버러지는 잘근잘근 밟아 죽여야지 다시 안 살아나.”

사월은 그 순간까지도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이곳까지 유인한 라이브 카페 사장도, 검은 손길을 뻗는 덩치 큰 남자들도, 눈앞에서 재밌는 영화를 보듯 관망하는 성 회장도.

……원재도.

모든 화살은 사월의 가슴에 꽂힌다. 심장에 깊게 박힌 화살 탓에 피가 흐르고 신음이 터진다. 그럼에도 사월은 화살을 뽑지 않는다.

모든 건,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일임을 사월은 알고 있었다.

***

“왜 하필 원재를 건드렸나. 내가 진창을 뒹굴고 뼈가 부서지게 맞아 가며 지킨 것들을 이을 놈인데. 너 따위가 지금 끼어들어 망치면 되겠어?”

“네임을 지우는 것 때문에 만났다지. 이제 그 일을 못 하게 된다면, 자네 이용 가치는 바닥이지 않겠나.”

“성 사장에겐 내 피가 흘러. 계산에 미치지 못하면 철저히 외면해 버리지.”

정신이 혼미할 만큼 구타를 당하면서도 계속 그 말이 떠올랐다.

부러졌는지 감각이 없는 팔과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 다 터진 입 안엔 연신 피가 고였고, 온몸의 뼈가 조각난 듯 숨을 쉴 때마다 아팠지만.

그보다 더 아프고 깊은 상처는 성 회장의 말이었다. 그간 주제넘게 행복이란 걸 바랐던 자신에게 내려진 벌 같았다. 상처에 무뎌졌다 생각했는데, 실은 아니었나 보다.

“잡아, 씨발.”

“걸레가 좆도 가려 가면서 받나, 썅.”

사월이 휘두른 양주병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남자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휘청댔다. 손바닥 사이로 피가 주륵 흘렀다. 팔뚝을 타고 줄줄 떨어지는 피를 보면서 사월은 웃었다. 반쯤 열린 지퍼를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몸을 뒤로 물렸다.

원재 외에는 누구도 들어온 적 없던 좁은 쪽방이었다. 그곳엔 퀴퀴한 욕망의 냄새가 가득했다.

“걸레도 눈은 있지, 씨발아.”

조소하는 사월의 입 안은 피로 물든 상태였다. 기괴하리만치 섬뜩한 웃음이었다. 남자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피떡이 되도록 맞았음에도 반항하는 사월에게 놀란 것도 있었다.

“이, 씹새끼가!”

깨진 이마를 움켜쥐고 고통을 삼키던 남자가 악을 썼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사월에게 향했다. 걸음에는 신경질이 가득했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성 회장의 말이 있었다. 성 사장이 물고 빤다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었기에, 재미 좀 보려던 참이었다.

은근한 색기를 흘리는 낯짝이고 사람 꼴리게 하는 거친 말버릇이고, 그냥 죽이기는 아까웠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손 안 타는 고양이일 줄은 또 몰랐지.

“너, 너 이제 그냥은 못 뒤져. 여기 있는 새끼들 좆 한꺼번에 다 받아야 뒤질 수 있어. 알겠어?”

“……하아.”

“알겠냐고, 이 씨발놈아.”

두꺼운 손이 사월의 머리칼을 휘어잡는다. 사월은 손에 꽉 잡고 있던 양주병을 다시 휘둘렀다. 단단한 유리병은 남자의 정강이에 닿았다. 뼈에 맞았는지 병을 쥔 사월의 손마저 찌르르 울렸다.

“윽, 씹! 미친 새끼가!”

사월의 뺨을 후려치는 두꺼운 손. 고막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다시 술병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힘이 다 빠져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김 사장이 친한 깡패 새끼한테 받았다던 양주였다. 한 번도 따지 않은 금색의 술이 거품을 일으켰다. 양주병이 바닥 위에서 맥없이 빙글빙글 돈다.

“윽.”

울컥, 넘어오는 피를 뱉지도 못하고 흘려보내면서, 사월은 원재를 떠올렸다. 차갑고 무심한 시선. 그게 자신에게 닿을 때 변하는 그 찰나가 좋았다. 호기심이 가득하던 시선에 애정이 서리는 것도.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리던 것도. 모두 좋았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말이다.

“……원…….”

원재의 이름을 채 다 발음하지도 못하고, 발목이 질질 끌린다. 속절없이 끌려가는 길에 피가 길게 늘어진다. 온몸을 지배한 고통에 정신을 놓기 전. 사월은 겨우 남은 힘을 쥐어 짜내 원재를 불렀다. 아니. 입 밖으로 소리를 내긴 했는지, 속으로만 외친 건지 분간마저 잘되지 않았다.

“씹새끼들이!”

사월은 정신을 잃기 전,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원재였으면 좋았을 텐데…….

***

줄어드는 엘리베이터 계기판 숫자를 바라보던 원재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애초에 사월의 행동반경이 넓지 않았으나, 닿는 모든 곳은 감시하는 게 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통화 목록 가장 위에 있는 번호를 누른다.

―네, 사장님.

“형. 사월 사장 가게에 애들 몇 명 더 보내 봐.”

―가게?

“응. 사월 사장 없을 때 어떤 수작 부릴지 모르니까.”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원재가 차 키를 손에 쥐고 경계를 넘는다.

이미 상황을 감시하는 눈이 있기는 했다. 보이지 않은 곳에 심어 놓고, 상황을 수시로 보고받는 중이었다. 하지만 양 비서를 만나는 자리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기에, 보험을 드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오케이.

“나한테는 안 붙여도 돼.”

―그래도 성 사장 가오가 있지. 그 새끼가 돌변하면 어쩔래. 혼자 처맞게?

운전석 문을 열기 전에 멀찍이 떨어진 검은 차를 힐끔 확인했다. 선팅이 짙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원재 쪽 사람이리라. 최 비서라면 원재를 혼재 보낼 리가 없으니까.

“양 비서보다 형이 낫다. 가오도 챙겨 주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사이 차는 주차장을 벗어났다.

―지금 주차장에 있는 애들은 올려 보내지 마?

“응. 아직은.”

건물 주차장에서 지키고 있는 걸로 충분했다. 사월이 무방비하게 혼자 머물고 있을 호수까지 알려 주는 건 위험할 것 같았다.

―그래. 내가 가게 확인하고 집 들를게.

“알겠어.”

―수시로 보고해.

“어어.”

상하관계가 완전 뒤바뀐 듯한 대화로 통화가 마무리됐다. 차는 빠르게 도로 위를 달린다. 사월이 잠들어 있는 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원재의 집은 최 비서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았다. 주차장과 건물 앞을 지키는 애들도 한정적이다. 따로 찾아올 이도 없었다. 그렇다고 문을 열어 줄 사월도 아니었다. 모든 건 원재의 통제하에 있다. 그런데도 가슴 한쪽에 자꾸만 불안함이 피어났다.

신호에 걸린 원재의 차는 큰 사거리에 멈췄다. 마디 굵은 손가락이 핸들 위를 톡톡 두드린다. 그 간격이 쫓기듯 점점 짧아진다.

“아…… 도대체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모르겠네.”

양 비서가 허튼 짓을 하지 않으리란 100%의 확신이 없어서 그런가. 만에 하나라도 수가 틀려 무슨 짓을 해도, 꽁꽁 숨겨 둔 사월에겐 손대지 못할 텐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이럴까. 원재가 마른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통화 목록을 켰다.

온통 최 비서로 가득하던 목록에 남겨진 새로운 번호였다.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원재의 차는 여전히 빨간불에 잡혀 있다.

“…….”

―연결이 되지 않아…….

딱딱한 기계음에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아직 자고 있다고 치부하기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본 사월의 핸드폰은 분명 머리맡에 있었다.

사월 사장이 잠귀가 아주 어두운 것도 아니던데. 못 들었나. 여전히 빨간불에 멈춰 옴짝달싹 못 하는 차 안. 통화음이 다시 울렸다.

―연결이 되지 않아…….

지겨울 정도로 일정한 통화음이 끝나고 다시 같은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원재는 갈등했다.

차를 돌려 사월이 무사히 있음을 확인하는 쪽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아버지 눈을 피해 겨우 나왔다던 양 비서가 얼마나 시간을 낼 수 있을지도, 어떤 얘기를 할지도 미지수인 상황이었다. 원재는 갈림길 앞에 섰다.

빵!

어느새 신호가 바뀌었다. 갈등에 빠져 멈춰 있던 원재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동시에 움직이는 수십 대의 자동차 사이. 원재는 유턴을 하기 위해 1차선으로 핸들을 돌린다.

지이잉.

조용한 차 안. 진동이 길게 울렸다. 원재의 시선이 빠르게 액정에 꽂혔다. 기다리던 회신은 아니었다. 대신 아까까지 통화를 하던 최 비서의 이름이 덩그러니 떠 있다.

“왜.”

―차 돌려! 빨리. 씨발, 이 새끼 장난질 친 거야.

핸들을 빠르게 돌린 원재가 고개를 기울이며 목을 늘인다. 분명 양 비서가 혼자 부평으로 향하는 걸 봤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 온다. 핸들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린다. 전화 너머는 소란스러웠다.

몇 분, 아니 몇 초 전의 선택이 후회된다. 불안함을 느꼈으면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사월을 혼자 두어서는 안 됐다. 사월의 안위가 걱정되어 현관 앞을 비워 두었던 게 사무치게 후회된다.

“어디.”

―가게. 사월 사장 여기 있어, 빨리 와. 너 어디까지 갔어?

“얼마, 얼마 안 갔어.”

호흡이 밭게 이어진다. 스토크는 집을 지나쳐야 갈 수 있다. 지금까지 온 거리에서 몇 번의 사거리를 더 지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애들은. 씨팔, 애들 심어 놨잖아.”

―이 새끼들 작정하고 날 잡은 거야. 위치도 노출됐던 거 같은데. 지금 여기…… 난리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이 지금 상황에 딱 어울렸다. 이 좆같은 연락부터가 원재에겐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집이 아니라면, 그사이 사월이 스스로 집 밖을 나갔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데.

사월을 불러낼 인물? 아무리 떠올려도 추측할 수가 없다. 오피스텔 주변에서 전해진 보고 또한 없었으니, 누구의 차를 타고 갔는지 스스로 나갔는지도…….

“미친.”

아니, 전화를 받은 후로 원재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골치가 지끈댄다. 손 아래 잡힌 가죽이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사월이는.”

―다쳤어.

머뭇대다 겨우 꺼낸 질문에 비해 간결한 대답이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빨리 와.

어떤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원재는 미친 듯이 밟아 스토크 골목에 다다랐다.

이미 엉망이었다. 차 여러 대가 골목을 막고 있고, 가게 앞엔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들이 한데 뒤섞여 주먹질을 하고 있다.

번화가는 아니지만 꽤 많은 상가가 자리했다. 사람들을 몸을 사리는 듯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씨발.”

꽉 막힌 입구에 원재는 지체하지 않고 차 문을 열고 나왔다. 때마침 소란을 비집고 힘들게 머리를 뺀 차가 경적을 울린다. 무시하고 지나려던 원재의 뒤통수를 잡아끄는 목소리도 뒤이어 들려왔다.

“사장님!”

열린 운전석 사이로 최 비서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원재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차로 향했다. 벌컥 뒷좌석을 열었다.

“…….”

원재의 표정은 황망함 그 자체였다. 동공은 맥없이 사월에게만 꽂혔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어떤 말도 완성되지 못했다.

성인이 된 후 내내 붙어 다니던 최 비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마저 휩쓸려서는 안 됐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제 상사와 그의 연인을 어서 병원으로 보내야 했다. 최 비서는 이를 악물고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뭐 하고 계십니까. 병원으로 곧장 가야 합니다.”

비명과 둔탁한 파열음. 어수선한 주변 소리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병원’ 그 한 단어만 뇌리에 박힌다. 원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피에 절은 하얀 얼굴과 옷. 머리카락도 흠뻑 젖어 어지럽게 엉켜 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이런 좆같은 감정은 처음이었다. 형이 자살하는 걸 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 때문이야. 모든 건 다. 울컥, 원재는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무언가를 애써 삼키면서 뒷좌석 문을 닫았다.

“얼른. 얼른 가, 원재야.”

사월 사장 살려야지. 최 비서가 원재의 등을 가볍게 밀며 말한다. 마법이라도 풀린 듯, 그제야 원재의 몸이 움직인다. 삐그덕 소리가 날 것같이 뚝뚝 끊어지던 움직임이 이제는 거침없었다.

최 비서가 내어 준 운전석에 앉아 액셀을 밟았다. 끼익. 아스팔트 위를 긁으며 돌아가는 타이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다친 사월을 목도하니 자책도 뒤로 밀려났다.

원재는 그대로 소란을 뚫고 달려간다.

사고가 나지 않은 게 용했다. 뒷좌석에 죽은 듯 아무 기척 없이 누워 있는 사월을 틈틈이 확인하며 병원을 찾았다. 늘어진 몸을 안아 든 것도, 응급실로 뛰어 들어가 베드에 눕힌 것도 조각난 필름처럼 기억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의사의 말만 자꾸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원재는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괜찮으신가요? 손에서 피가 많이…….”

간호사 하나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원재의 손을 내려다봤다. 제 손과 셔츠를 온통 적신 건 사월의 피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괜찮을 수가 없다. 빈주먹을 세게 쥐었다. 무능한 자신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

원재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충 짧게 고개를 젓자, 간호사는 눈치껏 거리를 벌리며 멀어졌다.

응급실은 번잡했다. 허나 원재의 귀에는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른팔이 부러졌고, 옆구리엔 5센티가 넘는 자상이 있었다. 수술을 피할 수 없다. 보이는 얼굴만 해도 상처가 가득했고, 옷에 가려진 곳은 더 심했다. 피멍이 들고, 찢어지고, 부었다.

사월의 상태를 연신 상기하며 원재는 이를 악물었다. 피가 쏠린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붉었고, 근육이 바짝 선 턱은 사납게 비틀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양 비서와 제 아버지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 버러지 같은 인간들의 숨통을 당장이라도 끊고 싶었다. 세 치 혀에 허튼 기대를 걸었어도 안 됐다고. 원재는 자신이 했던 모든 선택을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타닥타닥.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원재에게 곧장 향한다.

“어떻, 어떻게 됐어. 사월 사장은?”

“잠깐 자리 좀 지켜 줘.”

“어디 있는데.”

수술. 짧은 대답을 끝으로 원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제 몸속에 흐르고 있는 더러운 피가 날뛰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그 피가.

뒤에서 부르는 최 비서를 무시한 채 그대로 달려 나갔다. 머리끝까지 찬 분노를 당장 풀지 않으면. 숨이 막혀 뒤질 것 같았다.

자신을 꿰어 낸 양 비서나, 뒤에서 그것을 조종했을 성 회장. 그리고 그들의 손에 놀아난 자신. 모두가 쓰레기였다.

피해자는 애꿎은 사월 하나였다.

원재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붉은 입술에서는 피가 새어 나온다. 이렇게 해서라도 더러운 피가 빠져나가길 바랐다.

***

콰앙―!

막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성 회장의 차가 멈춘다. 강한 충격에 차체가 흔들리고 뒤꽁무니가 온통 찌그러졌다. 성 회장은 앞좌석 헤드를 잡고 몸을 움츠렸다.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데 없으십니까?”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들리는 급박한 음성. 조수석에 앉은 양 비서였다. 성 회장은 경직된 몸을 세웠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들이박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회장님.”

콧잔등에 붉은 상처가 생긴 기사가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성 회장은 심기가 뒤틀린 얼굴로 턱짓을 했다. 그 짧은 행동에도 양 비서는 무언가를 캐치해 냈다.

“내려서 확인해 보세요, 빨리.”

“예예, 알겠습―.”

쾅―!!!

다시 한번 차가 크게 뒤흔들린다. 양 비서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뭐야, 저건!”

룸미러로 양 비서의 시선이 향했다. 그러고는 이내 동공이 커졌다.

“뭐 하고 앉아 있나?”

참고 참았던 성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운전기사는 사색이 된 채로 벨트를 풀었다. 달칵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 뒷좌석 문이 벌컥 열린다.

“윽.”

“잡아! 뭐 해!”

다급하게 양 비서가 차에서 내렸다. 그럼에도 성 회장의 상체가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갔다. 빙 도는 시야에 눈을 감았다 뜨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눈과 표정.

“노망이 들려면 곱게 드셔야지. 이렇게 더럽게 놀면 어떡하잔 겁니까.”

“너 이놈…….”

“사장님! 떨어지십쇼.”

차를 빙 둘러 달려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다급하게 양 비서가 원재를 막아섰다.

원재는 자신의 팔뚝에 감긴 손을 내려다봤다. 코웃음을 치며 쥐고 있는 성 회장의 멱살을 쭉 잡아 올렸다. 반쯤 기울어진 몸이 차 밖으로 딸려 나온다. 자신을 말리고 있는 양 비서의 제법 거센 악력에도 거침이 없다.

성 회장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몸의 감각은 남아 있는 건지, 빠르게 팔을 휘두른다.

“윽.”

눈이 돈 원재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 반항이었다. 가볍게 팔을 피한 원재는 팔뚝으로 성 회장의 턱 아래를 꾹 압박했다. 목구멍이 콱 막힌 성 회장이 인상을 썼다.

“큽, 이놈이, 말리지 않고, 윽……, 뭐 하나!”

“진짜, 정말 하면 안 되는 짓을 하셨어. 건들면 안 되는 사람을 건드렸어.”

팔뚝에 체중을 싣는다. 숨이 모자란지 성 회장의 낯이 붉으락푸르락 변한다. 뒤늦게 달려온 이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감히 성 회장의 차를 들이받은 미친놈이 누군가 했는데, 성 사장이었다. 성 회장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모시는 사람이었다.

최근 성 사장을 따르는 세력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 판이었다. 이 바닥에선 줄을 잘 타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갑자기 제 아비의 목을 짓누르는 있는 꼴에도 말이다.

퍽.

원재의 얼굴에 주먹이 꽂혔다. 얼얼한 뺨 안쪽을 혀로 훑은 원재가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게도 양 비서였다.

“비키세요. 성 사장님.”

원재가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옥죄던 힘이 멀어지자, 숨이 트인 성 회장이 콜록댔다. 원재는 몸을 돌려 양 비서와 마주한다. 긴장한 양 비서와 달리 원재는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차에서 챙긴 다음에 어디에 넣어 놨더라……. 원재는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잠깐 생각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운 탓에 기억이 빨리 떠오르지 않았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과거의 일을, 한참이나 더듬어 떠올린다. 글로브 박스를 열었고, 그 안에서 손에 잡히는 걸 꺼냈고. 그다음엔…….

“아.”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양 비서는 긴장한 낯으로 원재를 관찰한다. 그러고는 순식간이었다.

“윽.”

푹. 급소를 피한 칼이 양 비서의 옆구리에 꽂힌다. 슈트 재킷까지 칼이 파고든 탓에 손잡이가 허리에 바투 닿았다. 푸욱. 안에서 더 깊게 파고든 칼이 비틀렸다.

양 비서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질퍽이는 소리를 내면서 뽑히는 날카로운 칼날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으윽…….”

“지금 뭐 하는 게야!”

성 회장이 고함을 친다. 원재는 칼을 쥔 손의 새끼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피가 묻은 칼을 성 회장의 목 옆에 가져다댔다.

“…….”

성 회장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간신히 이어졌던 호흡을 다시 멈췄다. 비린내 나는 칼날이 성 회장의 셔츠 깃에 닿았다. 날의 앞뒷면을 고루 느릿하게 문지르자, 깃이 금세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회장님. 개새끼 관리를 잘하셨어야죠.”

“…….”

“주제를 넘으면 적당히 매라도 드셨어야지.”

성 회장은 칼날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픽 조소를 흘린 원재는 성 회장을 차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넘어지다시피 뒷좌석에 나뒹구는 꼴이 우스웠다. 젊었을 땐 주먹깨나 썼던 양반인데. 형형한 기색을 뿜는 아들을 보고 몸을 사리는 꼴이라니. 그러게 나이가 들었으면 깡패짓은 그만두고 여생 보낼 궁리나 하지 그러셨어.

혀를 찬 원재가 차 문을 쾅 닫았다. 안에서 무어라 고함을 치고 있음에도 모두 무시했다. 그사이 양 비서는 사색이 된 채,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피를 많이 흘린 그는 힘이 빠지기라도 한 듯 차체에 부딪힌 뒤,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래도 양 비서는 대가리 좀 굴릴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으윽, 윽…….”

“영 등신이었네.”

나를 불러낸 게 진심이었으면 좀 좋아. 성 사장은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옆구리를 틀어쥔 양 비서의 손은 이미 흥건하게 젖은 상태였다. 앉은 자리에도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주제넘지 말라고 했을 때, 말을 들었어야지.”

푸욱. 다시 한번 칼이 꽂힌다. 이미 늘어진 몸은 저항할 기력도 없다. 허벅지에 꽂힌 칼 손잡이를 내려다본 양 비서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칼을 뽑으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칠 게 뻔했다. 더렵혀지긴 싫은데. 원재는 손잡이 끄트머리를 쥐고 갈등했다. 이내 결심했다는 듯,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이미 더러운 피가 온몸에 흐르고 있는데, 뭘 고민해.

“크, 큿.”

“이걸로 안 뒤져. 엄살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원재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뺨과 가슴팍에는 피가 정신없이 흩뿌려진 채였다. 발로 툭 치자, 양 비서가 바닥으로 기울어진다.

손등으로 턱에 맺힌 피를 닦은 원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운전석을 지나 뒷좌석 문으로 돌아갔다. 옆자리에 몸을 멀찍이 떨어트린 성 회장이 경계를 세웠다. 가장 아끼는 측근을 쑤셨다는 건, 다음은 네가 타깃이라는 뜻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성 회장은 붉으락푸르락한 낯을 하고 있었다.

“출발하세요.”

“……아, 그…….”

“기사님. 출발하시라고요.”

뻣뻣하게 굳은 기사의 뺨을 칼의 넓적한 면으로 툭툭 쳤다. 소스라치게 놀란 기사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 차 안에는 정적과 피비린내가 공존했다. 제대로 호흡하는 것은 원재뿐이었다.

“모, 모든 건 그놈이 나타난 뒤야. 네 녀석이 이렇게 미친놈처럼 구는 것도! 다 그놈한테 홀려서는……. 살려 두면 안 돼, 살려 두면.”

“쉿.”

원재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푹신한 입술 사이에서 분노에 억눌린 글자가 새어 나온다.

“회장님,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시네. 걔 앞에서도 이렇게 주둥이를 잘 놀리셨어요?”

정말 쫄기라도 했는지, 성 회장은 거친 숨과 함께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물론, 아직 끝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 숨통을 조이고, 더 바닥까지 끌어내야 했다.

“정신 나간 새끼. 판단 똑바로 해! 제 아비를 못 알아보고―.”

“뭐라고 했는지 올라가서 찬찬히 들어 볼까요.”

음성의 온도는 같은 듯 다르다.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는 성 회장과 안쪽 깊숙한 곳에서 끓고 있는 화를 억누르는 성 사장. 두 사람의 몸속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

사월이 열일곱이 되던 해. 그땐 스토크에 큰 위기가 찾아왔었다. 김 사장이 교통사고로 팔꿈치를 다쳐 작업을 못 하게 된 거였다. 그때도 타투 작업을 돕긴 했지만, 사월 혼자 소화하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둘은 모든 작업을 캔슬하고, 손가락을 빨 수밖에 없었다.

“……하나 남았네.”

밥을 제대로 먹는 건 두 사람에게 사치였다. 슈퍼에서 파는 가장 싼 컵라면이 주식이었고, 그나마도 남은 건 단 하나였다.

김 사장은 자주 라면 대신 소주를 마셨다. 김 사장은 소주가 더 좋다고 했었다. 배고픔도, 슬픔도, 통증도, 모두 잊게 된다고. 사월은 한숨을 쉬었다. 내일부턴 공사장에라도 나가 돈을 벌어야 할 판이었다. 분명 김 사장이 안다면 노발대발할 일이긴 했지만.

“…….”

사월은 버너 위에 물을 올렸다. 크으. 열린 방문 틈에서 삐져나오는 소리가 더없이 구슬프게 들렸다.

“……이거랑 먹어.”

“하이고, 안주냐?”

결국 알맞게 끓인 라면은 김 사장 앞에 놓였다. 사월은 작은 상을 그의 앞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벽에 기댄 사월은 무릎을 끌어안았다.

“너는?”

“생각 없어.”

김 사장은 술에 담뿍 취했으면서도 알고 있었다. 이건 사월의 저녁이라는 사실을. 비쩍 마른 놈이 먹을 걸 양보하고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렇다고 이미 뱉은 말을 무를 애도 아니었다. 해서 과한 몸짓으로 라면 국물을 퍼먹었다. 차라리 이편이 사월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 테니까.

“캬. 맛 좋네, 맛 좋아.”

김 사장은 벌게진 얼굴을 하고도 좋다고 웃었다. 싸구려 라면 국물이 뭐가 그렇게 맛있다고. 수저에 가득 푼 국물은 수염이 거뭇거뭇 난 입 속으로 들어간다. 그마저도 반은 질질 흘려 상 위에 뚝뚝 떨어졌다.

“이러고 있으면 옛날 생각이 나.”

“……또 시작이네.”

김 사장이 취하면 자주 꺼내던 소리였다. 이혼을 하고 방황하던 시기에 여관방에 틀어박혔던 이야기. 술인지 물인지도 분간 못 하고 쩔어 살았다던 그 시기.

힘들었을 거면서 왜 하필 그때를 떠올리는 건지, 사월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이혼했는 줄 아냐.”

이번엔 그래도 레퍼토리가 좀 달랐다. 여관방에 들어섰던 순간부터 정신 차리고 털고 일어나던 시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김 사장 입에서 직접적으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왜 이혼했는데.”

“와이프가 옆 동네에서 꽤 잘나가던 유지 딸이었어. 나 같은 거한테 코가 꿰여서……. 집이고 돈이고 다 버리고 나를 따라나선 거야.”

김 사장은 어느새 수저를 놓고, 양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은 채였다. 몸을 느릿하게 좌우로 흔드는 게 취객의 모습 그대로였다.

“행복할 줄 알았어. 성공해서 장인, 장모 앞에서 떵떵거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다 좆같은 착각이었지.”

고개를 푹 숙여 드러난 김 사장의 머리칼 사이사이로 새치가 그득했다. 사월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이가 나를 버틴 게 몇 년이게?”

7년을 살았다고 했으니, 그 언저리까지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사월은 막연히 생각하고 결론지었다.

“6년?”

“아니. 딱 2년.”

김 사장이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들어 보인다. 7년을 함께 살았는데, 서로에게 진심이었던 건 고작 2년이란다. 사월은 결혼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때 처음으로 깊게 생각해 봤다.

“그 뒤로 2년은 자존심으로 살았다. 집 버리고 온 와이프나, 행복하게 해 주겠다 떵떵거린 나나. 피 터지게 싸우면서도 자존심으로 버티고 버텼어. 이혼해 버리면 개차반처럼 산 게 들통 나니까.”

“…….”

“어느 날부터는 싸움도 줄어들더라. 변하는 게 느껴졌어. 와이프가 우연히 만난 네임 상대랑 눈 맞은 걸 알면서도 다 눈감아 줬어.”

미친. 4년을 함께 산 사람을 버리고 네임 상대를 따라가? 사월의 분노는, 본 적도 없는 김 사장의 전 와이프에게 향했다.

“3년이나 그러고 살았더니, 속이 썩을 대로 썩더라고.”

“등신 같애.”

툭 던져진 냉정한 말에 김 사장이 피식 웃는다. 그러곤 반쯤 채워진 소주잔을 든다.

“그렇다, 사월아. 누구를 영원히 마음에 둔다는 말.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믿는 것도 전부 등신 같은 짓이야.”

김 사장의 입꼬리는 비죽 올라가 있었다. 말에도 웃음이 섞여 있다. 하지만 사월은 전혀 웃지 않았다.

“여기. 등신이 있잖어.”

김 사장은 자신의 가슴팍 툭툭 치면서 말했다. 짧은 행동에서 사월은 그리움을 느꼈다. 분명 전 와이프를 향한 것이겠지. 혀를 쯧 찬다.

“가끔 떠올라. 술을 마실 때마다.”

“…….”

“소주 맛을 알려 준 사람이니까.”

어딘가 쓸쓸한 말과 함께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는다. 김 사장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울음을 참는 걸까, 술이 쓴 탓일까. 사월은 무릎을 껴안은 채로 눈앞의 남자를 응시한다.

“너는 술 배우지 말어.”

소주 맛 따윈 평생 모른 채로 살아. 휘청대는 고개마다 술 냄새가 풍겼다.

누구를 좋아하는 짓은 등신 같은 짓이다. 역경을 다 딛고 집을 버려 가면서까지 결혼을 한 부부도 7년을 넘기지 못했다. 하물며 개중의 반은 미련으로 붙잡고 있던 시간이다.

그날 사월은 생각했다. 네임도 운명도 모두 한낱 허상이다. 그 끝은 모두 종말이며, 공허이며, 폐허라고.

***

삐―.

귓전을 울리는 일정한 음. 이명처럼 정신이 멍했다. 사월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속눈썹이 눈 밑 살갗 위에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진다.

눈을 깜빡이는 작은 소리쯤은 일정한 알림에 파묻히리라 여겼다.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파고든다. 사월은 눈을 굴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사월아.”

흐릿한 시야에 누군가 보인다.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이자, 형태만 있던 실루엣에 점차 윤곽이 잡힌다. 너른 어깨와 다부진 제격. 굵은 얼굴선에 낮은 목소리.

“…….”

사월은 웃었다. 올라가는 입꼬리가 호흡기 너머 육안으로 확인될 만큼 분명했다.

힘을 뺀 입술 사이로 숨이 빠져나간다.

이 모든 건 허상이다. 후우. 사월이 온전히 호흡을 하는 순간. 공허로 빨려 들어간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허상 속이다.

***

“사월……, 들어…….”

낯선 천장과 이명. 사월은 그것에 집중했다. 맥박이 귀 바로 옆에서 뛰는 것처럼 쿵쿵거렸다. 무성 영화처럼 입만 벙긋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낯선 이들 사이에 성 사장도 함께였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사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약에 취한 사월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시야에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변했다. 종국에는 원재만 남아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맥없는 손가락을 까딱이자, 손등 전체를 감싸 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마디 하나하나를 훑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언제 일어나나……, 계속 기다렸어.”

사월은 눈을 깜빡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경직된 원재의 입술이 일그러진다. 예전과 다름없이 냉랭한 반응이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겠다. 무방비한 낯의 사월을 마주하니, 마음에 돌덩이가 툭 떨어진 듯 무거웠다.

“아프다…….”

다 잠긴 목소리가 내뱉은 한마디는 그거였다. 원재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토록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었나.

형을 눈앞에서 보내야 했던 십 대의 끝자락과는 달랐다. 아무 힘도 능력도 없던 그때와는 달리 엄청난 무력감이 원재를 덮쳤다. 얼굴 곳곳을 뒤덮은 상처와 팔에 감긴 붕대. 자신의 몸에 흉터로 남은 그 어떤 통증보다 더 아리고 아팠다.

“그래도……. 참을 만해.”

대답할 말을 찾느라 허둥대던 원재의 동공이 사월에게 가닿았다. 픽 웃음을 흘리는 입술 끝은 다 터져 불그스름했다. 입술이 따가운지 눈을 찡그린다. 원재의 손가락이 닫힌 눈두덩 위를 쓸었다.

차라리 울었으면.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프다고. 그렇게 화를 냈으면. 손길을 받으며 가만히 눈을 감는 사월에, 원재는 명치가 아려 왔다.

“미안해.”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다. 안 그래도 무겁고 깊은 상처를 지닌 채 살았던 이다. 아물지도 못하고 그냥 덮어 둔 상처들 위에 또 한 번의 피멍이 들었다.

아껴 주고 예뻐하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 사월인데……. 전부 자신이 원인이었다. 광 박사 패거리들에게 끌려갔던 것도, 아버지에게 수모를 당한 것도.

“미안해, 내가…….”

소중한 것을 지니고 있어 본 적이 없어 몰랐다. 자신이 이렇게 무력한 인간인 줄. 사월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그게 너무 큰 욕심이었던 걸까.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말라던 아버지의 충고가 왜 지금 떠오르는 거지.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진다. 자괴감을 주축으로 응집하는 감정들. 어둡게 변해 가는 원재의 표정을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 원재는 고요한 시선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연약한 목소리는 연달아 이어진다. 희미한 음성이 자꾸만 원재 주변에 맴돈다.

“이제 괜찮아.”

주제넘은 욕심은 아픔만 가져온다는 걸 배웠으니까. 이제……. 행복을 바라는 짓은 하면 안 된다는 현실을 알았으니까. 이제는 더 아프지 않을 거야. 사월은 마침표를 찍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

사월이 일어난 뒤,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았다. 겉으로는 두 사람 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어딘가 확실히 어긋나 있었다. 묘하게 물러진 사월과 불안함에 예민해진 원재. 서로가 알고 있었다. 그 변화는 서로에게서 비롯된 거라는 점 또한.

“약 먹자.”

터진 입이 불편한지 사월이 식사를 마치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원재는 재촉 한 번 하지 않고 사월의 입에 죽을 떠넘겨 주었다.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제 손으로 먹인 뒤에야 수저를 내려 둔다.

“찬물로.”

열이 많은 사월은 팔뚝이 다 보이게 환자복도 접어 올렸다. 원재가 사월의 이마를 짚었다. 뜨끈한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원재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떼기 전에 이불을 끌어 올려 마른 허벅지 위를 덮었다.

“안 돼. 미지근한 물 마셔.”

“목이 답답한데.”

“안 돼.”

투정 아닌 투정이 이어진다. 원재는 작게 웃으며 찬물과 뜨거운 물을 섞었다. 약봉지를 뒤집어 손바닥 위에 탈탈 털어 주자, 약 네 알이 툭 떨어진다.

사월은 미지근한 물과 함께 약을 삼켜 넘겼다. 챙겨 주고 챙김을 받는 일련의 과정이 꽤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이제 가?”

원재가 손목을 털어 시계를 돌렸다. 여유가 없기는 했다. 사월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없는 시간을 무리해서 만들고 있었다.

사월을 또 혼자 두고 싶지 않아 처음엔 병실 한쪽에서 일을 했다. 허나 그마저도 사월이 은근히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는 그만두었다.

“왜. 빨리 보내고 싶어?”

“……누가 그렇댔나.”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인다. 허벅지까지 올라온 이불 끄트머리를 잡아 구겼다. 원재는 사월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손가락질받을 패륜이라도 저지를 용의가 있었다. 어머니를 외롭게 죽게 하고, 형의 인생까지 망쳐 놓고, 자신의 삶까지 저당 잡은 채 사는 악랄한 제 아버지. 그가 고통 속에 발버둥 치다 숨이 끊어지는 꼴을 봐야만 뒤틀린 속이 풀리지 않을까.

“그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아버지는 한 번도 살갑지 않았고, 제 피붙이도 오로지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형의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던 자신에게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너마저도 실패작이 되고 싶지 않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는 편이 좋을 거다.”

“계속 있어, 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것, 꿈을 가지고 있던 것, 네임 상대를 두고 정략적인 결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맞지도 않는 깡패 짓에 환멸을 느꼈던 것,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어 끝까지 반항했던 것. 그게 형이 실패작이라 불린 이유일까.

“……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원재는 알았다. 방금 전까지 이불을 쥐고 있던 손이 제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이렇게 사월이 기대 올 때면 성탁이고, 복수고 다 버린 채 그만 데리고 훌쩍 떠나고 싶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위험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으로.

“한 번만 안아 보고.”

원재가 팔을 넓게 벌린다. 머뭇대던 사월도 팔을 내민다. 깁스를 하지 않은 팔 하나가 덩그러니 허공에 뜬다. 이내 두 가슴이 맞닿는다. 쿵쿵. 일정한 울림이 서로에게 전해진다.

원재는 어깨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는다. 사월의 체향을 폐 깊숙한 곳까지 들이마시자,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잠깐만 혼자 있어. 저녁에 또 올 거니까.”

“알겠어.”

기어 들어가듯 작은 대답이었다. 원재는 마지막 호흡을 크게 마셨다. 그러곤 떨어지지 않는 몸을 떼어 내곤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짝 내딛곤 뒤를 돌자 사월이 손을 휘휘 젓는다. 문 앞에서 다시 몸을 돌리자 이제는 이불을 휙 덮고 누워 버린다. 얼른 가라는 제스처에 원재는 문을 밀어 열었다. 밖에 서 있던 남자 여럿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1인실에서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목에는 익숙한 얼굴이 여럿 있었다. 가게와 집 주차장에 심어 놓았던 인원으로는 이제 불안함이 해소되지 않았다.

가게에 있던 새끼들은 아버지 수하들에게 보기 좋게 당했다. 사월 사장이 평소와 달리 말없이 가게에 갈 줄도 몰랐고, 성 회장 쪽 애들에게 그림자의 위치가 쉽게 발각되리라 생각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쓰디쓴 실수를 뼈에 새긴 원재는 몇 배나 많은 인원을 병원에 심었다. 그래도 뿌옇게 내린 안개처럼 불안함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30분마다 병실 안 확인하고, 간호사나 의사가 들어갈 땐 같이 들어가.”

“네.”

이제 사월의 일분일초는 원재의 손바닥 안에 놓였다.

다짐을 받아 낸 원재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다시 병실에 가기 위해선 밀린 일을 미친 듯이 해결해야 했다. 겁만 주고 풀어 준 성 회장을 압박할 차례였다. 제 아비의 행동반경과 반격을 준비하는 움직임도 보고받아야 했다.

성 회장에게 공급되고 있는 영양제에 약이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광 박사 새끼가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도. 또, 성탁의 더러운 뒷면을 고발해 줄 이에게도 연락을 건네야겠지.

“사무실로 곧장 가.”

“예.”

원재는 피곤한 몸을 시트에 기댔다. 성탁을 무너트릴 계획은 찬찬히 준비하던 것이지만, 요즘은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신경 쓸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골치 아플 일 없이 성 회장의 목숨을 끊어 버릴 수도 있지겠만. 냉철하게 고민한 끝에 목숨은 살려 두기로 했다.

단숨에 죽는 건 너무 불공평했다. 어머니도 형도 나도 얼마나 오래 힘들고 아팠는데. 아버지에게도 오랜 고통을 주고 싶었다. 원재는 아버지를 껴안고 진흙탕에 뒹구는 꼴을 자처했다.

“참, 지하에 있는 새끼들은 깨어났고?”

“예. 비서님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전해 달라셨습니다.”

최 비서는 거의 붙박이처럼 지하실을 지키고 있었다. 사월을 처음 발견했던 최 비서는 다음 날 말없이 세 남자를 끌고 왔었다. 사월이 깨어나지 않아 원재는 정신없던 때였다.

최 비서 또한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었다. 며칠 밤낮 남자들을 정신 잃을 만큼 패고, 깨면 다시 폭력을 썼다. 집요함을 느낀 원재가 몇 번이고 물었을 때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이제 뒤져도 되지 않나…….”

기절한 사월의 양쪽 팔과 다리를 붙들고, 마른 몸 위에 올라타려던 더러운 새끼들. 반쯤 열린 바지 지퍼를 찢어 버릴 듯, 움켜쥐고 있었다던 놈들. 사월을 탐하려던 새끼들이었다.

이미 정신은 반쯤 나갔을 텐데, 차라리 뒤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원재가 고개를 기울여 목을 늘인다.

***

원재가 가고 나면 사월은 대부분의 시간을 눈을 감은 채 보냈다. 그렇다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눈을 감고 그냥 살아온 날들을 찬찬히 훑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답답한 과거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버려졌을 때부터? 김 사장이 주워 왔을 때부터? 아님, 그냥 태어난 순간부터? 어긋난 곳이 너무 많아 어느 하나라고 딱 짚어 낼 수가 없었다.

“……김 사장.”

죽은 김 사장의 얼굴이 아른댄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성 사장을 만나는 일 따위는 없었을까. 공허한 마음속에 그가 무섭도록 들어차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살면서 처음 바다를 보고, 체온에 기대는 행복을 바라지 않았을 텐데.

사람다운 삶을 한번 맛보고 나니 주제를 모르고 설쳤다. 중심을 잡아 줄 김 사장이 없으니 익숙해지는 속도는 무섭도록 빨랐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느껴 보고 싶다. 사월은 욕심 아닌 욕심을 품었다.

똑똑.

사월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도 문은 열렸다. 열린 틈으로 자신을 확인하는 눈빛에도 사월은 가만히 눈만 감고 있었다.

한참 고르게 숨을 쉬는 사월을 확인한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힌다. 그제야 눈을 떴다. 원재와 있을 때 꽤나 여러 감정을 내비쳤던 것과 달리, 지금은 인형처럼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늘어진 몸을 일으키고 힘없이 문을 열었다. 놀란 표정의 남자들과 마주했다. 남자 하나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화 좀.”

“전화요?”

의심하듯 가늘어지는 눈에 사월은 말을 서둘러 덧붙인다. 핸드폰이고 뭐고 전부 가게 안에 있을 터였다. 그마저도 온전할지는 모르겠지만.

“핸드폰이 없어. 성 사장한테 전화 좀 걸어 줘.”

“아…….”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제 뒤에 선 남자와 눈빛까지 주고받더니, 안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비서님께 연결드리겠습니다.”

사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간 둘은 대치하는 것처럼 서 있었다.

“비서님, 여기 병원입니다. 성 사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연락드렸습니다. 예. 일어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남자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사월이 그걸 받아 들고 귀에 가져다 댔다. 전화 너머로 소란스러움이 전해지더니, 곧 익숙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나 찾았어? 왜 나한테 전화 안 하고……. 아, 가게에 있나.

“어.”

사월은 몸을 뒤로 움직였다.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를 주무른다. 손바닥 아래 잡힌 연한 피부가 금세 붉어진다. 열린 문을 반쯤 닫고 통화를 이어 간다.

“아까 제대로 못 물어본 게 있어서.”

―뭔데 그래.

“……저녁 언제?”

―뭐?

“저녁에. 몇 시쯤 올 거냐고.”

사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답을 기다리는 게 초조한지 연신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전화 너머로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지금 갈까.

“아니, 몇 시에 오는지…… 알고 싶어서.”

―으음.

말이 길게 늘어진다. 기계를 타고 소음이 들린다. 괜히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해서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빨리 오란 건 아니고…….”

―내가 빨리 가고 싶어졌어.

“…….”

그러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사월은 온종일 원재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식사를 부러 더디게 하는 까닭도 더 머물다 갔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거였다. 원재와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었다.

―한 시간 내로 갈게.

사월은 꼭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섰다. 슬리퍼를 신은 발끝이 창백했다.

“알겠어.”

사월의 짧은 대답으로 통화는 끝났다. 문 너머에 있는 남자에게 핸드폰도 돌려주었다. 문을 닫고 다시 온전히 혼자가 된 사월은 주저앉았다. 손에 까칠한 얼굴을 파묻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사월은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얼른 와.”

시간이 부족했다. 원재의 모든 것을 눈과 기억에 담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사월은 한참을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원재를 기다렸다.

***

전화를 끊은 원재가 픽 웃음을 흘렸다. 최 비서가 힐끔 올라간 입꼬리를 확인한다.

“뭔데?”

“사람 신경 쓰이게 구는 건 참 한결같아.”

“사월 사장한테 일 있어?”

대답 대신 귀찮은 듯 고개를 젓고 서류를 마저 들췄다. 하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문 앞을 지키고 선 남자에게 핸드폰을 빌려 가면서까지 연락을 했다. 그래 놓고 묻는 건 고작 언제 오냐는 말이었다.

사월이 자신에게 의존적으로 굴 때면 원재 마음속에 있는 소유욕이 마구 들끓어 댔다.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는 대부분이 그랬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욕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사월이 안전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원재는 펜을 들고 애써 서류에 눈을 고정한다.

“김진우 씨 쪽도 체크 한번 해야겠는데.”

“어. 연결해 줄게.”

김진우는 성탁이 주도하는 재개발 관할 지역 본청 공무원이었다. 시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성 회장의 청탁 근거를 찾기 더없이 적절한 인물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죽은 원재의 형 이름을 몸에 지닌 사람. 네임 상대의 장례식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구석에서 울어야 했던 남자였다. 원재뿐이 아니었다. 성 회장을 무너트리는 데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걸릴까.”

“뭐가? 한 시간 내로 갈 거라며.”

원재가 펜촉으로 서류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야 빽빽하게 들어찬 글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풀어내야 할 현실이 눈앞에 줄을 지어 섰다.

“아버지 완전히 끊어 내는 거.”

아……. 말꼬리를 늘인 최 비서가 대답을 회피한다. 뭐가 어떻다 대답하는 대신 어깨만 들썩였다.

성탁을 무너트리기 위해 준비한 기간은 꽤 길었다. 요즘같이 갈등이 표면 위로 드러난 적도 없었고. 성탁 내부 분위기조차 점점 원재 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얼떨결에 광 박사를 이용해 함정 하나를 더 팔 수 있게 됐고. 예상했던 것보다 빠를 수도 있겠지만 언제든 방심은 금물이었다.

“서둘러야겠다. 뭐든.”

뒤를 내어 주지 않고, 틈을 보이지 않는 내에서. 빨리 무너트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차가운 병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월을 위해.

***

처음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첫사랑, 첫 키스, 첫 이별, 첫 경험. 처음은 미묘한 긴장감이 공존하고, 언제고 곱씹기 좋은 기억이다. 몇 번이고 되새긴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더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시간일 수도. 사월에게 원재는 전자였다. 그게 떠나려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한 시간 안 지났지?”

전화를 끊은 시간에서 50분도 지나지 않았다. 원재는 약속했던 대로 시간을 맞춰 왔다. 거기에 쇼핑백 두 개까지 들고.

“이건 사월 사장 물건.”

쇼핑백엔 지갑과 핸드폰이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사월은 머뭇대며 받아 들었다. 원재는 재킷을 벗어 멀찍이 떨어진 소파 팔걸이에 던졌다.

손목의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비틀어 빼는 과정을, 사월이 빠짐없이 지켜본다. 쇼핑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끝이 하얗게 질린 채다.

원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월의 맞은편에 앉았다. 굳은 사월의 뺨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나한테 눈을 못 떼네.”

“…….”

“많이 보고 싶었나 봐.”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사월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뜨끈한 체온이 여실히 전해졌다. 온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한 번 느낀 온기는 자꾸만 더 욕심을 갖게 한다.

그냥 있어도 되지 않을까. 성 사장이라면 이기적으로 구는 자신을 다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영원할 순 없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행복 속에서 살 순 없을까.

“……별로.”

사월은 마음을 다잡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없으니까. 혼자 지녀야 할 이 시간을 기억에 꾹꾹 눌러 담는다. 몇 번을 곱씹어도 찬란하고 아름다울 시간을.

“그럼 나만 보고 싶었던 걸로 하지, 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사월은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울림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사월은 팔을 뻗었다. 상체를 기울이는 원재의 목을 감았다. 코끝이 맞닿을 때까지 가까워진 얼굴. 숨이 서로의 입가까지 뻗친다.

“……그러든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머리를 내밀었다. 닿자마자 허겁지겁 뒤엉킨다. 턱이 벌어지며 깊숙이 고개가 맞물렸다. 입 안을 훑는 혀의 뜨거움을 느끼며 사월은 눈을 감는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술이 짓눌려 뭉개진다.

“……으읍.”

이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원재의 단단한 손이 뻣뻣한 환자복 위를 쓸며 올라간다. 뒷목과 허리를 감싸는 손길. 손등에 힘줄이 설 만큼 힘이 들어간다. 두 사람 사이에 빈틈은 찾을 수 없었다.

***

원재가 들고 온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내내 죽만 먹는 사월의 식욕을 돋울 만한 음식을 찾다 사 온 것이었다.

사월은 테이블과 멀찍이 떨어진 채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소파에 앉은 원재가 포장 박스를 벗기는 것을 보고만 있다. 입 안이 간지러웠다.

“초밥 괜찮아?”

“……응.”

“그럼 먹자. 이리 와.”

원재가 손짓을 한다. 사월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테이블에 펼쳐진 초밥에 애써 시선을 두지 않았다.

원재는 사월의 팔목을 가볍게 움켜쥐어 당겼다. 툭, 사월이 맥없이 손길에 이끌려 앉았다. 안착한 곳은 원재의 허벅지였다.

“미쳤어? 놔. 내려가게.”

“여기서 못 먹는 건?”

원재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보였다. 펼쳐진 초밥 박스를 가리키며 하고 싶은 질문만 던져 댔다.

“……없어.”

허리를 꽉 붙든 손은 고집스레 풀리지 않았다.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원재가 젓가락을 하나만 뜯어 곧장 광어 초밥을 집었다. 사월은 상체를 뒤로 작게 물렸다. 그래 봤자 단단한 가슴팍에 막혔지만 말이다.

“아.”

오른쪽 손목까지 붕대가 감겨 있는 탓에 젓가락질 같은 건 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반항을 해 봤자, 어차피 먹게 되리란 걸 알았지만. 사월은 입 앞까지 다가온 초밥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곧 입술에 닿는 물컹한 생선살. 이상한 감촉을 참아 내며 사월이 입을 열었다. 초밥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턱을 움직였다.

“아까 통화 목록을 봤는데.”

“아…….”

“2층 사장. 전화해서 불러낸 게 그 새끼야?”

사월은 생선살을 차마 꼭꼭 씹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이로 물었다. 한참이나 걸려서 씹은 광어를 꿀떡 목구멍으로 넘겼다. 물컹한 느낌에 목구멍 주변에 소름이 이는 듯했다.

“가게에 불이 났다고 해서. 나간다고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없었고, 너도 바쁠 테니까…….”

원재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토크 건물 주변을 떠올렸다. 스토크 건물 2층이면 술집 말하는 건가. 스토크를 들먹였다면, 애정이 있다는 걸 알고 지껄인 말이겠네. 반드시 올 것임을 알고. 참으로 치밀한 노인네였다.

쯧. 원재는 혀를 찼다. 그런 다음에야 품에 안긴 사월의 어깨가 빳빳해진 것을 느꼈다. 내리깐 시선과 불안해 보이는 눈. 허벅지 위에서 주먹을 쥐는 하얀 손. 사월의 허리를 받쳤던 손을 위아래로 천천히 쓸었다.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럼 뭔데. 그렇게 묻듯 사월이 고개를 돌린다. 원재는 장어 초밥을 집어 들었다.

“사월 사장이랑 연락하는 게 누구인지 다 알고 싶어서.”

소유욕에 휩싸인 음성이다.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원재가 속속들이 관여하려 들고, 자신의 일에 신경을 곤두세울 때면 묘한 쾌감과 불안이 함께 뒤섞인다. 붕대를 감은 손목 부근이 따가웠다. 부끄러움과 민망함 사이에 위치한 감정을 숨기며, 사월이 말을 돌린다.

“……너는 안 먹어?”

“먹고 있어.”

사월은 초밥을 먹지 못했다. 애초에 생선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특히 날것이라면 더 그랬다. 애초에 초밥을 먹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입 안에 들어차는 물컹한 식감에 맛있다는 감각보다는 토기를 더 먼저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꾹 참고 주는 초밥을 다 받아먹었다. 먹을수록 속이 더부룩해진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았다. 남아 있는 시간은 모두 원재에게 맞출 생각이었다. 늘 원재가 그러했던 것처럼.

박스가 반쯤은 비었을 때였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원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끊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원재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지만, 사월은 달랐다. 팔을 뻗어 외롭게 진동하던 핸드폰을 주인에게 내밀었다.

“최 비서.”

액정에는 ‘최 비서’라고 저장된 글씨가 빛을 내고 있었다. 허리에 감긴 팔을 풀고 다리에 힘을 주어 땅을 딛는다. 순식간에 홀가분해진 품이 낯설었다. 원재는 괜히 자신의 가슴팍 부근을 문질렀다.

“받고 와. 먹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먹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동작엔 신경질이 가득했다. 정말 급한 일이라면 문밖을 지키고 선 애들에게 연락했어도 됐을 텐데. 원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병실 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 자리하고 있던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해 왔다. 대충 눈짓으로 받아치곤 몇 걸음 멀어졌다. 통화하려는 걸 알아챘는지 남자는 눈치껏 두어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왜?”

―사장님. 성 회장님이 관리하는 법인 통해서 접촉 시도가 있었습니다. 지금 사월 사장이 있는 병원으로요.

“빨리 움직이네.”

원재의 미간이 형편없이 구겨진다. 성 회장은 원재를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병원에 사람을 심어 두어 손을 썼다는 사실은 모를 테지. 그래도 이 병원에 꽂아 놓은 줄이 썩은 동아줄은 아니었다는 데 안도를 느꼈다.

―네. 환자 명단엔 없다고 둘러댔답니다.

“옮길 곳 좀 알아봐, 형. 이 상태면 집도 안전하지 않을 거 같아, 이젠.”

지난번 차를 들이받고 죽일 듯한 기세로 끌고 올라간 뒤로도, 별 움직임이 없는 원재의 태도에 지레 불안함을 느낀 듯했다. 안 그러면 발악이 이렇게 빠를 순 없다. 끈질긴 노인네. 원재가 혀를 쯧 찬다.

간단히 본론으로만 오고 갔던 통화를 마무리했다. 물을 잔뜩 먹은 솜이불이 가슴에 얹힌 듯 마음이 무거웠다. 까만 액정의 핸드폰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또다시 같은 일로 사월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다. 지킬 게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다. 자신이 정신을 잘 차려야 했다.

원재는 굳은 낯을 애써 숨겼다. 다급한 손길로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지금 이 순간 숨통을 트이게 할 유일한 사람. 사월의 체온이 절실했다.

들어가자마자 사월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잠깐 사이에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왜 그래. 체했어? 속 안 좋아?”

“급하게 먹었나 봐.”

손가락 끝이 붉어질 만큼 꽉 쥐고 있던 젓가락을 빼앗아 들었다. 등을 탁탁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으켰다.

“약 먹자, 그럼.”

“약은 괜찮아. 그것보다…….”

사월은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치켜들었다. 셔츠의 허리춤을 꽉 쥔 손과, 붉어진 눈가. 올려다보는 시선. 사월을 내려다본 원재가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자고 가.”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아픈 애를 두고 뭘 할 수도 없고. 원재는 고개를 비뚜름히 기울인다. 숨을 집어삼키는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그래도 돼?”

피곤에 점철된 낮은 음성이었다. 안 그래도 기다렸던 말이었다. 사월이 병원에 있는 내내 집이 아닌 집무실로 향했다.

같이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사월이 곁에 없으니 영 잠이 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월의 체향이 남아 있는 침대에 홀로 눕는 게 그렇게 내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응.”

대답은 간결했다. 가슴팍 높이에 위치한 사월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로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이 느껴진다. 가슴께가 근질대는 기분 좋은 촉감이었다. 무감해 보이는 사월에게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간지러움이었다.

결코 작지 않은 체격의 남자 둘이 침대 위에 같이 몸을 뉘었다. 불을 꺼 어두운 병실 안에서는 안전등만 빛을 내고 있었다. 원재와 사월은 모로 누워 껴안은 채였다. 아무 방해도 없는 잔잔한 침묵이 흘렀다. 그 고요함을 깬 사람은 원재였다.

“당분간 조용한 데 가 있는 거 어때.”

낮은 목소리가 말을 이을 때면, 머리 위에 진동이 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사월은 쿵쿵 일정하게 뛰는 가슴에 이마를 기대며 대답했다.

“그래야 하면, 그러고.”

“…….”

“네 말이면 들을게.”

그 한마디로 원재는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위험한 순간을 몇 번 겪어서 그런가. 사월이 눈에 띄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마 사월이 들으면 기함할 말이지만, 원재는 그게 못내 좋았다. 오른손잡이인 사월의 손이 되어 주는 것도, 유일한 보호자인 것도, 자신과 떨어지기 싫어 불안해하는 것도.

“내 말이면 다 들어?”

가능한한 평생, 이렇게 사월의 시간과 관심을 몽땅 저당 잡은 채 살면 얼마나 좋을까. 욕망에 휩싸인 원재의 눈은 형형했다. 사월은 품에 안긴 자세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월의 어깨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럼 나를 계속 좋아해.”

계속. 끝까지.

원재는 할 수 있는 대로 사월의 발목을 잡고 매달리리라. 동정을 해도 좋고, 이용을 해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 떠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원재는 다짐했다.

“…….”

당연하단 듯 작게 끄덕이는 고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이미 사월은 그럴 생각이었다.

***

싸울 때는 방심해서는 안 됐다. 상대가 반격할 틈을 주어서도 안 됐고. 주먹이 오고 가는 싸움에서도 그랬지만, 머리를 굴리는 일에서도 똑같았다. 이미 성 회장이 사월의 위치를 대충은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래 머무는 건 빌미를 제공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사월의 거처는 빠르게 정해졌다. 서울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교외의 한 요양 병원이었다. 독이 오른 노인네가 분명 악착같이 찾으려 들겠지만, 고르고 고른 곳이라 쉽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사월이 내려가는 길엔 원재가 동행했다. 혹시라도 따라붙는 그림자가 있을까 봐 길을 돌고 돌았고, 중간에 차도 한 번 바꿔 탔다. 병원에서 사월을 감시할 요량으로 배치해 둔 인원도 각자 도착 시간과 오는 길을 달리했다.

원재는 할 수 있는 만큼 주위를 분산시켰다. 차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할 거리를 세 시간이 넘게 걸린 이유였다.

“이쪽이 지내실 VIP 병실입니다. 최근엔 혼자 병실을 쓰고 싶어 하는 분들이 늘어나서 프라이빗한 구조로 설계된 병실이에요.”

사월이 지냈던 스토크의 쪽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쾌적하고 안락했다. 넓게 난 창으로는 흐르는 강이 보였다. 산 중턱에 있어 고요하고 공기도 좋았다. 다친 사월이 재활하고, 요양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바로 앞에는 강이 있어 시원하고, 병원 뒤편엔 조용한 산책로도 있어요. 10시부터 5시까지 이용하실 수 있고요.”

“원장님, 말씀드렸다시피 이쪽으로는 발길이 닿지 않게 좀 부탁드립니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3층은 애초에 입원 환자도 가장 적은 곳이니까요.”

가운을 입은 여자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요양 병원이라 나이 지긋한 분들이 대부분인 것도 있지만, 이 층은 유난히 조용했다.

“편하게 머무세요. 오후 치료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안경 쓴 여자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사월은 창가 앞에 가서 섰다. 대화를 들어 보니 원재가 따로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여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바로 달려올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원재나 최 비서가 곁에 머물지도 않으니. 할 수 있는 대로 손을 썼으리라 예상했다.

“팔 다 나을 때까지만 있어.”

얕게 흐르는 강 위로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힘없는 그 고갯짓에 원재는 명치 쪽이 욱신대는 착각을 느꼈다.

팔이 나을 때까지. 말로는 기한을 정했지만, 병원은 곧 또 옮길 생각이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치료를 받아야 할 사월을 병원이 아닌 곳에 두기도 싫었다. 사월이 번거로울지라도 계속 거처를 옮기는 게 맞았다.

“이틀에 한 번은 꼭 올게.”

사월은 병원 앞을 거니는 사람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모두가 해를 맞으며 삶에 대한 의지를 배양하는 중이었다. 여기라면, 나쁘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오지 마. 멀잖아.”

“…….”

원재는 그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큰 창으로 넘어오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사월이 금방이라도 부서져 사라질 것 같았다. 숨을 들이켜며 입술 안의 연한 살을 잘근 씹었다.

“대신 매일 전화할게, 내가.”

부쩍 더 마른 몸이 원재를 향해 돌아선다. 불편하거나 불만이 있어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꽤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안도를 느낀다.

그러다 문득 사월과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원체 잊을 수 없는 첫 만남이었다. 아무 감정을 담지 않은 듯한 얼굴. 거침없는 말투에 행동까지. 스치기만 해도 베일 듯이 날을 세우고 있던 이였다.

몇 번이고 날을 깨기 위해 부딪치고, 녹이고……. 살면서 그런 공을 쏟아 본 적이 있었나. 그때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꺼지라고 소리치던 사월이 이제는 매일 전화를 하겠다고 먼저 말을 하는 순간이 왔으니까.

“그래 주면 고맙고. 심심하면 문자해도 괜찮아.”

“알겠어.”

원재가 핸드폰을 돌려주면서 번호까지 바꿔 버렸다. 애초에 연락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이젠 정말 원재 말고는 저장된 번호가 없었다. 사월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건 원재뿐이었다.

“보고 싶으면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알지?”

“내가 보고 싶으면, ‘자기야’라고 보내.”

남몰래 핸드폰을 쥐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문자였다. 이제는 보낼 용기가 조금은 생겼는데, 보낼 수 없겠지. 사월은 씁쓸함을 삼키며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원재는 성큼 걸음을 옮겨 사월과 간격을 좁혔다. 지나치게 먼 거리가 마음에 걸렸다. 깁스를 하고 있는 팔이 몸에 닿을 때까지 가깝게 붙어 섰다.

“……비켜.”

사월이 팔꿈치로 몸을 밀어내자 원재가 눈을 찌푸리며 엄살을 피웠다. 딱딱한 팔꿈치가 닿은 곳은 네임 작업을 했던 옆구리 쪽이었다.

“아, 여기 아직 안 아물었어. 아파.”

그럴 리가 없었다. 작업한 지 2주가 충분히 지났으니 말이다. 사월은 예고도 없이 멀쩡한 팔을 뻗어 셔츠를 걷어 올렸다. 어어. 작게 뒤로 무르는 원재에도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첫 만남에서도 이랬는데. 나이트 한구석 쪽방에서 만났을 때 같은 데자뷔를 느꼈다. 그때 올려다보는 사월 사장에게 마음이 동해 여기까지 왔다. 뒷조사를 하고 파면 팔수록 외로운 사람이라, 신경이 더 쓰였다.

사월에게 자신을 투영한 걸까. 어찌됐든 중요하지 않았다. 결핍된 사람끼리 만났으니 서로 발목을 잡기엔 더없이 좋았다.

“잘 아물었네.”

셔츠가 옆구리 위쪽까지 한참 말려 올라갔다. 원재는 작업 부위를 빤히 바라보는 사월에게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사월의 까만 동공이 느릿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네임 아직 다 덮지도 못했는데…….”

깁스한 팔 끄트머리에 빼꼼 나온 손가락이 옆구리 위를 찬찬히 배회한다. 발색도 좋고 번진 곳도 없다.

라인만 딴 채라, 아직까지 꽃잎이 지나가는 길에는 뚜렷하게 네임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잘 아문 작업 부위에 명암을 채워 넣으면, 네임 커버업이 완벽할 것 같은데…….

지금으로는 허리에 새겨진 네임의 주인이 나타났을 때, 제 이름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이었다. 사월은 그게 마음에 걸렸다.

원재가 언젠가 네임 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그리하여 또다시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긴다면. 원재는 또 얼마나 많은 위협 속에 지내야 할까.

운명도 아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한 걸 보면 네임을 만난다면 더하겠지? 책임을 질 것도, 지켜 줄 것도 없게 깨끗하게 지워 주고 싶었는데. 사월의 입 안이 쓸쓸해진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퇴원하면. 그때 해 줘.”

사월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올려 원재를 마주한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대신한다.

그 눈빛에서 왜 체념이 읽힌 걸까. 원재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곧 발꿈치를 살짝 올려 입을 맞추는 사월에 의해, 모든 사고가 날아가 버린다.

명치 아래에 닿은 딱딱한 깁스의 촉감. 어설프게 목을 감고 있는 손. 모든 게 원재에겐 가혹하리만치 소중했다.

이 순간, 머릿속엔 오직 서로밖에 없었다.

***

사월과 떨어져 지내기 시작한 이후, 원재는 한층 더 예민해졌다. 손에 쥐고 살았던 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수술 부위는 잘 아물고 있는 중이랍니다.”

“……또.”

“산책도 서너 번씩 다니고, 식사량도 늘었고요.”

“또…….”

원재는 충혈된 눈으로 앞에 놓인 서류를 훑었다. 광 박사가 만든 좆같은 약의 새로운 행방이었다. 약은 착실하게 아버지의 영양제에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성 회장도 아들과의 대치 상황에 컨디션이 떨어지긴 한 건지, 약을 꾸준히도 타 갔다.

“형.”

“잠시만요.”

최 비서는 뒤에 서 있는 남자 하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걸 확인하고서야, 다시 원재의 친한 형으로 돌아왔다.

“왜. 뭔데.”

“오늘 나 바쁜가?”

대답 대신 최 비서의 시선이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로 향했다. 그걸 말이라고. 힘주어 구긴 미간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원재도 사실 알고 있었다. 청탁으로 재개발에 들어간 자료가 하나둘 넘어오기 시작한 참이었다. 꼼꼼한 검토가 필수적이었다. 제 아비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낼 위인이니, 필요한 서류며 증거를 발로 뛰어 찾기도 했다.

“사월 사장 보러 가야 하는데.”

오늘은 사월의 병원을 찾기로 한 날이었다. 이틀에 한 번은 애초에 무리였다. 매일 보고 살던 얼굴을 이틀 간격으로 보는 건,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사월이 매일 저녁 전화를 걸어 준다는 점이었지만.

“그래서 집중을 못 한 거였구만.”

“사월이……. 이름도 어떻게 사월이지.”

원재는 턱을 괸 채 혼자 중얼댔다. 한번 사월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나니, 꼭 뭐에 홀린 사람처럼 눈이 변한다.

최 비서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스케줄러를 힐끔 확인했다.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은 일은 오전에 처리했고. 갔다 와서 밤에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시간을 낼 수도 있을 듯싶었다.

“세 시간이면 되냐?”

“네 시간.”

“……밤새, 그럼. 내일 오전에 넘길 서류니까.”

밤새는 것쯤이야. 원재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급하게 차 키를 찾으면서도 서류가 들어 있을 패드를 챙기는 일은 또 잊지 않는다. 그래도 제 상사가 일을 설렁설렁하는 법은 없으니까. 최 비서는 원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길게 누웠다.

***

차를 대자마자 산책로 앞을 지키고 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원재는 차에서 내려 그의 곁으로 향했다.

“어디 갔어?”

“산책 중이십니다.”

꽤 더워진 날씨에 원재가 셔츠 단추를 풀어 팔뚝까지 걷어 올린다.

“혼자?”

“뒤에 둘이 따르고 있습니다.”

원재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사월과 같이 걸어 본 바로는 20분 남짓의 코스였다. 나무가 울창해 길을 거닐면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날짜가 조금씩 흐르고, 온도 또한 높아지고 있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월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원재는 사월이 지나갔을 길 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흙냄새가 코끝으로 훅 끼쳐 들어온다. 고요한 흙길을 밟았다. 사월 사장은 어디쯤에 있을까. 유하게 휘어 들어가는 길목에 원재가 막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퍽―!

보이지 않던 모퉁이를 급하게 꺾어 달리던 사람과 부딪혔다. 원재는 본능적으로 부딪힌 사람을 잡아 세웠다. 혹시 사월일까 봐서.

“……뭐야.”

남자의 옷은 흙과 잔디로 더렵혀져 있었다. 뺨에도 긁힌 자국이 보였다. 가쁘게 내쉬는 숨과 겁에 질린 눈. 원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잡고 있던 팔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뭐야. 왜 혼자야.”

“도, 도망가셨, 한 명이 따라붙었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재는 흙길 위를 내달렸다. 정신없이 주변을 살폈다. 길은 하나뿐일 텐데…….

“아, 씨팔.”

산책길 끝에 있는 낮은 언덕으로 눈이 향했다. 언덕 측면에는 뒷산으로 이어지는 샛길이 하나 있었다.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곳이다. 가지가 부러져, 그제야 눈에 들어온 길.

원재는 심장이 발끝까지 툭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피곤함에 충혈되었던 눈이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빠르게 쿵쾅대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씹.”

온갖 생각이 어지럽게 뒤엉킨다. 그 와중에 불과 한 시간 전에 들었던 말이 불쑥 떠오른다.

“산책도 서너 번씩 다니고.”

서늘한 곳이 좋았던 게 아닐지 몰랐다.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닐지 몰랐다. 유독 여기를 좋아하던 까닭이. 그 이유가 혹시, 도망갈 길을 찾기 위해서였어?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말한 거였어? 그때부터 너는 우리 관계에 시한부 판정을 내린 거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관계를 나는 계속 붙들고 있었던 거고?

너는 알고, 나는 모르는 그 일이……. 도대체 왜 벌어져야 해?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심장과 페이스를 놓친 호흡이 엉망으로 흩어진다. 상실감은 사람을 무력하고 허망하게 만든다.

원재는 지금 서 있는 곳이 늪이라도 된 듯, 깊은 심연의 구렁텅이로 빠진다.

―<터치업>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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