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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텐션 (3/16)

Chapter 2. 텐션

탁, 종이 쪼가리들이 거칠게 테이블 위로 흩어졌다. 그토록 기다렸던 서류들인데, 원재는 이젠 원수라도 된 듯 노려봤다.

사월 사장은 놀랍게도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한참은 아니더라도 몇 살은 더 어릴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제때 출생 신고를 못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이 이쪽 동네엔 꽤 많으니까.

하지만 나이보다도 원재를 놀라게 한 건, 단 3장으로 정리된 사월의 삶이다. 같은 세월을 산 자신에겐 턱없이 부족한 지면이었다. 아마 집안 얘기에, 학창 시절만 해도 3장은 가뿐히 넘지 않을까. 원체 집이 복잡하긴 했지만 보통 성인이라면 그 정도의 정보가 나오는 게 당연했다.

사월 주변엔 별다른 게 없었다. 아니, 그렇게 표현하기도 뭐했다. 뭘 외울 것도, 주의할 점도, 약점 같은 것도 전무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가족도 없다. 당연히 그 흔한 친구도 없다. 그나마 곁에 있던 인물에 대한 자료는 단 세 줄로 끝났다.

김효동 ┃ 1963 / 남

1989년 ┃ <스토크> 오픈

1992년 ┃ 4월 사월 출생 신고한 법적 보호자. (92년 4월 초경 가게 앞에서 버려진 아이를 보호)

2020년 ┃ 1월 사망

이 정도면 정말, 종이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오점 따위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게 또 신경질 나게 처량했다.

“뭔 재미로 산 거야.”

10대 후반의 원재를 즐겁게 했던 건 술이었다. 값비싼 술을 마시며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고, 술자리 자체도 꽤 즐겼다. 20대 초반엔 돈 쓰는 재미로 살았다. 용돈을 받아쓰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또래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이었다. 장거리를 갈 때 타는 차, 일할 때 타는 차, 개인 시간을 보낼 때 타는 차가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까.

스물 중반, 원재의 흥미는 연애였다. 여러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면서 확고한 성적 지향도 깨달았다. 그러다 질척한 관계가 귀찮아지면, 목적 맞는 상대와 원나잇으로 욕구를 채웠다.

그렇게 살다 후반에 접어들고 나서야 일에 욕심이 생겼다. 아버지가 이끄는 성탁 기업의 뒷일뿐 아니라, 나름대로 발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사를 따로 차릴 계획도 있고.

그간의 시간을 간소화시켜도 이 정도인데, 사월은 정말 특별한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왜 그렇게 사월이 경계를 세우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누군가와 관계를 성립하는 일도, 신뢰를 다지는 일도, 마음을 터놓고 의지하는 일도 모두 해 본 적이 없어서가 아닌가.

“뭔, 씨팔…….”

그래서 그렇게 겁에 질린 작은 짐승처럼 경계를 한 거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애네, 애야.”

나름 스스로가 고달프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본 적도 없는 공허한 삶을 목도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따지고 보면 사월 사장은 자신에게 완전한 타인이었다. 자신이 동정이나 연민 따위를 느낄 필요도 없는. 그냥 몇 번 만나 네임을 지우고, 값을 지불하면 깨끗하게 뒤돌아설 수 있는 관계. 그 간단한 것을 해내지 못하고 질척이는 건 자신이었다.

왜일까. 원재는 아직 이유를 찾지 못했다. 굳이 가져다 붙이자면, 사월은 그냥 스치고 말 인연으로는 끝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는 거. 분명 살갑지도 않고, 호의적이지도 않았지만.

원재는 서류 좌측 상단에 박힌 사월의 사진을 느릿하게 만졌다. 언제 찍은 건지 지금보다 앳된 얼굴이지만, 냉한 얼굴과 서늘한 시선은 지금과 똑같았다. 원재는 이 차가움이 다른 온도를 지니게 될 순간이 궁금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형.”

“왜요.”

최 비서는 원재가 서류를 훑는 짧은 순간에도 태블릿으로 스케줄을 들여다봤다. 쳐다도 보지 않고 성의 없이 돌아온 대답에도 원재는 개의치 않았다.

“술 한잔하자.”

마음 같아선 사월과 술잔을 기울이고 싶지만.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까.

갑작스런 제안에 최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럽시다.”

그러곤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성 사장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원인을 알아야 했다. 요즘 들어 나사 빠진 듯 전화기만 들여다보는 이유를. 넋 나간 상사 덕에 조금 더 바빠졌으니 말이다.

***

원체 깔끔한 성격의 사월은 잠들기 전에 작업실 곳곳을 소독했다. 오늘은 더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했다. 자주 만지는 미니 냉장고 손잡이라든가, 조명의 머리 부분이라든가, 가위 손잡이까지 말이다.

창문을 열어 놓고 소독을 했음에도 알싸한 향이 남아 있다. 문단속까지 마친 사월은 불을 껐다. 작업실 안쪽에 딸린 방으로 향했다. 벌컥 열어 놓은 문 사이로 전등의 주황빛이 새어 나왔다. 약간 덜 마른 머리를 마저 털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딱 거기까지였다. 발이 묶인 듯 그 자리에 멈추었다.

“방이 원래…….”

원래 이렇게 넓었었나. 김 사장하고 쓸 때는 서로 좁다고 밀쳐대기 바빴는데. 휑― 방 안에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두 마디쯤 열어 둔 창문 틈에서 불어온 것이었다. 검은 반팔 티 아래로 드러난 팔뚝을 쓸며 방 안으로 걸어갔다.

쾅―.

막 이불 속에 앉았을 때였다. 무언가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옆 건물인가? 사월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불을 마저 들췄다.

쾅쾅―.

“…….”

쾅쾅―, 둔탁한 소리 끝에 이어지는 희미한 울림. 스토크 문에 달아둔 종에서 나는 소리였다. 사월의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달려 있던 거였다. 하도 오래돼서 종소리도 흐릿하고 탁했다. 딱 지금 들리는 소음처럼.

이 시간에 누구야. 동네 아저씨가 술 처먹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건가. 사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느릿하게 걷는 사이에도 몇 번의 종소리가 더 들렸다.

“……뭐야.”

원재였다. 한쪽 팔을 뻗어 벽에 지탱하고, 또 노크를 하려 했는지 손등이 보이게 팔을 든 채였다. 문을 열자마자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사월은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김 사장이 하라는 건 다 했던 사월이지만, 딱 하나 성공하지 못한 게 바로 술이었다. 맛도 좆같지만 냄새는 더 구렸다. 사월의 미간이 아까보다 더 구겨졌다. 인기척을 느낀 원재가 고개를 들었다. 살짝 풀어진 눈 주변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문을 왜 이렇게 빨리 닫아?”

미친놈아. 지금 열두 시가 넘었는데……. 사월은 대꾸도 하지 않고 원재를 올려다봤다. 이 시간에 타투 도안 핑계를 대지는 않을 거고. 실컷 술을 처마시고 온 것 같으니까 목마르단 핑계 또한 먹히지 않을 텐데. 이번엔 또 어떤 이유로 선을 침범하려는 걸까.

“…….”

“사월 사장.”

원재가 노크하려고 들었던 팔을 그대로 뻗었다. 손바닥은 사월이 몸으로 막아선 문 위로 안착했다. 지그시 힘을 주자, 문이 뒤로 밀리며 열렸다.

“야, 술 처먹었으면 집에 가서 곱게 자.”

“……술 냄새 싫어해?”

“존나 싫어.”

“또?”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듯 나른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또는 뭘 또야. 사월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자, 마르지 않은 머리칼이 스르륵 흘러내려 이마 위를 가렸다.

“…….”

“또, 사월 사장이 싫어하는 거.”

“…….”

“안 떠올라? 그럼 천천히 생각해 봐. 기다릴게.”

방심한 사이 커다란 몸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사월이 뒷걸음질을 쳤다. 술에 취해 그런지 더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어느새 원재는 스토크 안에 들어섰다. 사월은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술 처먹고 주정 부리는 거. 힘으로 밀어붙이는 거.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거.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 씨발, 다 싫어.”

“그럼 좋아하는 건?”

날이 잔뜩 선 말에도 여상히 돌아온 대답이었다. 원재는 아까 사월이 강박적으로 소독해 둔 작업대 위에 앉았다. 이 씹. 사월이 잇새로 욕을 짓씹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잔뜩 찡그려 진 미간은 당연히 뒤따랐다.

“너 빼고 다.”

악에 받쳐 꽉 눌린 목소리였다. 살기 어린 사월의 분위기에도 원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사월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사월의 거침없는 발길은 작업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쭉 뻗은 원재의 다리 사이에 다다라 멈춰 섰다. 순간 사월의 시야로 큰 손이 훅 들어찼다. 사월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긴 손가락이 사월의 미간 사이를 느릿하게 문지른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인상 좀 쓰지 마.”

“…….”

“나만 보면 아주 자동이지?”

말끝에 웃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순간 사월은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남자가 취한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너 빼고 다 좋다는 극단적인 말을 듣고도 실실 웃는 걸 보면 취한 거 같긴 한데.

“야, 너 뭔데 자꾸 여기 찾아와? 존나 거슬리게.”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늘인다. 여유로우면서도 나른한 투였다.

“내가 거슬려?”

원재가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미간을 진득이 누르던 손가락이 천천히 콧대를 타고 내려온다. 뜨거운 체온이 닿는 곳마다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사월이 티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작게 오르내렸다.

“……그래, 씨발. 하는 짓, 하는 말, 생긴 거까지 다.”

“흐음…….”

숨을 길게 늘인다. 잘게 떨리는 사월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 게 분명했다. 원재의 초점은 어느새 자신의 검지 끝에 맺혀 있었다. 콧잔등을 타고 내려오던 손가락이 코끝에서 뚝 떨어져 윗입술을 스쳤다. 사월이 어깨를 움츠리기도 전에 빠르게 입술 사이 틈에 머문다.

“거슬리는 거랑 신경 쓰이는 건 한 끗 차이인데.”

“…….”

“난 어디에 더 가까워?”

검지 끝으로 사월의 축축한 숨결이 만져졌다. 원재는 다시 갈증이 났다. 식도를 타고 아랫배까지 타들어 간다. 술로 가득 찼을 몸 안이 텅 비어 버린 듯한 갈급이었다. 원재의 목울대는 감출 것 없이 크게 울렁였다.

아랫입술을 살짝 끌어 내리며 떨어지는 손을 사월이 거칠게 쳐 냈다. 어느 순간부터 어금니를 꽉 문 채였다.

“치워, 씨발. 너 이제 여기 오지 마. 작업 취소해. 네 거 작업 안 해.”

사월의 매서운 거절에 허공에 붕 뜬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종착지는 사월의 갸름한 턱이었다. 아까의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거친 움직임이었다. 눈빛도 좀 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사월이 입 안의 연한 살을 치아로 짓씹었다. 그때였다.

“…….”

원재가 잡은 턱을 자신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순식간의 두 사람의 간격이 좁아졌다. 숨소리마저 느껴질 거리였다. 쭉 뻗은 원재의 두 다리 사이로 완전히 갇힌 사월이 낯빛을 굳혔다.

“근데, 사월 사장.”

“…….”

“나 하나도 안 취했어.”

혼잣말과 다름없는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가까이 선 사월이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입을 열 때마다 뜨거운 숨이 입술 위를 간질일 만큼의 거리였으니까. 미세하게 아래에 위치한 원재의 시선이 꼼짝없이 사월을 옭아맸다. 순간 코끝이 스칠 정도로 거리가 더 좁혀졌다. 턱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더 실렸다.

“눈 안 감네.”

“…….”

“무드가 없어, 사람이.”

어쩌면 원재는 처음부터 술에 취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발음 한 번 꼬이지 않고, 작업실을 가로지르던 걸음마저 반듯했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허리에 감기는 손길을 느끼며 사월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허리에 감긴 손끝으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럴수록 둘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져 갔다. 원재는 고개를 틀고 눈을 내리깐 채였다. 시선 끝에는 잘게 떨리는 사월의 입술이 있었다. 고르던 숨이 순간 멈칫했다, 반 박자 늦게 뱉어졌다. 찰나였지만 원재는 결론을 내렸다. 사월은 자신이 거슬리는 게 아니라 신경이 쓰이는 거라고.

원재는 머릿속이 발기되는 기분을 느꼈다. 온몸이 뜨거웠다. 손바닥에 감기는 체온도,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샴푸 향도. 모두가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 씨발, 이름도 사월이야. 입천장에 혀가 닿는 발음이 좋았다. 원재가 혀를 내어 입술을 축였다. 축축한 소리가 고요한 작업실 안을 채웠다.

순간 바람이 불어 문이 덜컹거렸다. 마법에서 깨어나듯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니, 나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이러면 낮에 있던 변태 새끼랑 다를 게 없잖아. 애써 흩어졌던 이성을 추스르며 원재는 눈을 깜빡였다.

“……사월 사장은 네임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얼어 있던 원재가 겨우 꺼낸 말은 그거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말 무슨 일을 치를 것처럼 농밀하게 닿아 오던 눈빛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래도 허리와 턱에 감긴 손은 떨어지지 않는다. 사월은 갑갑한 허리를 뒤챘다

“없어, 그딴 거.”

“아닌데, 있는 거 같은데.”

웃음기가 섞인 음성이었다. 없다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월이 겨우 팔을 들어 원재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힘을 주어 밀었다. 꽤 세게 밀쳤음에도 원재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나 지금 네임 따가워. 아무래도 사월 사장한테 내 이름 새겨진 거 같은데.”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원재의 옆구리에 작게 발현된 이름은 ‘우주’였다. 사월의 이름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것이었는데. 무슨 네임 타령이야. 사월이 다시 한번 힘을 가했다. 짜증스럽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곧 뒤를 이었다.

“애초에 이름이 다르잖아. 그리고 미친 새끼야, 좀 놓고 말해.”

“아냐. 아닌 거 같은데.”

사월은 다시 혼란스러웠다. 이거 지금 주정이야, 뭐야. 아랫입술 안의 얇은 점막을 세게 깨물었다.

“내가 확인해 볼게.”

불쑥 티셔츠 아래로 들어오는 뜨거운 손바닥에 사월은 신음을 낼 뻔했다. 가까스로 입술을 짓씹어, 소리를 틀어막았다.

“미친, 야!”

티셔츠 안을 침범한 손은 거침없이 사월의 옆구리를 타고 올랐다. 방금 씻어 아직 서늘한 몸에 뜨거운 손바닥이 길을 내며 올라간다.

고개를 튼 원재가 사월의 어깨 위로 이마를 기댔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이 목덜미 주변으로 뜨끈하게 퍼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월은 정신없이 속살을 지분대는 손목을 꽉, 잡았다.

“이 씨발 새끼야, 진짜 뒤지고 싶어?”

“…….”

사월의 부드러운 살결을 파고드는 순간, 원재는 겨우 잡았던 이성을 놓칠 뻔했다. 배 속을 달구던 갈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지문이 다 닳을 만큼 사월의 살결을 문대고 주무르고 싶었다.

얇은 티셔츠를 사이에 두고, 손목에 사월의 손이 감겼다. 원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머릿속에서도 빨간 경고등이 함께 깜빡였다.

“안 넘어오네.”

나른한 목소리였다. 사월은 기가 찼다. 역시나 술에 취한 척 개수작을 부린 거였다. 꽉 틀어쥐었던 손이 뒤척이더니 티셔츠 안에서 빠져나왔다. 사월은 그제야 팔을 내렸다. 아니, 내리려고 했다.

“아―.”

원재의 어깨를 밀치려고 전투적으로 다가가던 손이 매가리 없이 잡혔다. 손등의 힘줄이 불거질 만큼 거센 힘으로 사월을 낚아챈 건, 원재였다.

방금까지도 사월의 속살을 더듬던 손은 그 체온을 잊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하얀 살결 위에 감겼다. 그러곤 거침없이 제 입가로 손을 끌어온다. 사월의 눈이 커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촉―.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손등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촉, 촉―. 잘게 이어지는 입맞춤 사이로 뜨거운 점막이 느껴진다. 사월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읏, 야. 너 지금 뭐 해?”

손등 위에 파묻은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어 그 위를 느릿하게 핥았다. 사월이 경악하며 몸을 물리려고 해도, 허리춤에 감긴 힘은 느슨해질 틈이 없었다.

뜨거운 점막이 살결을 축축하게 훑고 난 후에는, 연한 살을 거세게 빨아들였다. 손등이 얼얼할 정도였다. 애무를 하듯 치아로 살짝 물기까지 한다.

“씨발…….”

사월은 미칠 노릇이었다. 원재의 품에 안겨 꿈쩍도 하지 못하는 데다가, 손등까지 애무를 당하고 있다. 아니, 씨발 이게 뭐라고 기분이 좆같은 거야. 사월은 이를 악물었다. 명치 아래가 요동치고 있었다.

춥―, 물기 젖은 소리와 함께 원재의 입술이 떨어졌다. 손등 위에는 붉은 울혈이 새겨졌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살결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쓱 훑는다. 꽤 자랑스럽다는 듯 그것을 내려다보던 원재가 던진 말은 가관이었다.

“네임, 생겼다.”

“씹새끼가…….”

창백하리만치 하얗기만 하던 사월의 얼굴 위로 붉은빛이 스쳤다. 목덜미부터 타고 올라온 붉은 기운은 눈 아래까지 번져 있었다.

“발정 났냐, 미친 새끼야? 놔!”

“났으면?”

“허.”

이 새끼랑 마주하고 있으면 심하게 말리는 기분이다. 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또 뱀처럼 말 한 마디 한 마디, 한순간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옭아맨다. 딱히 뭔가를 힘주어 하지 않아도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사월이 가슴팍을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귀 뒤에서 쿵쿵 맥박 뛰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는 듯했다.

“그럼 해 주게?”

“…….”

“할까? 난 너무 좋은데…….”

사월은 어디에도 잘 휩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화를 내고, 좋아하는지를 잘 파악했다. 그래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쉽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원재의 앞에만 서면 그 어떤 것도 잘되지 않았다.

반응을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손등을 왜 빨아, 빨긴.

“진짜 돌겠네…….”

“네임 지워지면 하자. 그땐 여기에 새겨 줄게.”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불쑥 내려간다. 그나마 살집이 있는 엉덩이를 꽉 잡았다 놓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연한 살결이 얼얼했다.

“…….”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채 사월이 원재를 내려다봤다. 사월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기도 했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부끄러운 것 같기도 했다. 원재는 아직 사월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단 3장짜리 서류로는 부족할 만했다.

어깨를 으쓱인 원재는 사월을 옭아매고 있던 손을 모두 풀었다. 그러곤 제 허벅다리 사이에 자리한 사월의 골반을 틀어잡아 뒤로 물렸다. 벌어진 공간으로 원재가 몸을 일으켰다. 다시 시선이 뒤바뀌었다. 원래의 자리였다.

“사월 사장. 그때 가서 모르는 척하면 안 돼.”

“……씹.”

원재가 멀어질수록 알싸한 술 냄새도 조금씩 옅어졌다. 딸랑―, 둔탁한 종소리가 울렸다. 문이 경박스럽게 앞뒤로 움직이며 제자리를 찾는 동안, 사월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지 못했다. 원재가 빠져나간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등 뒤에서부터 찬 기운이 넘어왔다.

찬바람과 뜨거운 공기가 뒤섞인 기묘한 밤이었다.

***

원재는 도망치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 대리를 불러 골목에 세워 두었던 차로 향했다. 어두운 골목에는 가로등만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탁―, 거칠게 운전석 문을 닫은 원재가 시트에 몸을 깊게 묻었다. 고개를 들자 바로 스토크가 보였다. 검은 바탕에 꽃 한 송이와 함께 흰 글씨가 새겨진 깔끔한 간판이었다.

간판에 새겨진 글씨를 읽자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울혈이 지워지는 데 얼마나 걸리지. 너무 세게 빨았던 건 아닌가. 그게 좀 지워져야 수작을 걸어도 걸 수 있는데. 원재는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시야에는 서늘한 사월의 얼굴이 잔상처럼 남았다.

“씹.”

원재는 거칠게 벨트를 풀어 젖혔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신경질이 묻어나는 손길로 버클을 풀고, 얇은 드로어즈 안을 허겁지겁 헤집기 시작했다. 이미 뜨겁게 부풀어 오른 성기는 조금 힘을 주어 당기자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하…….”

벌써 축축하게 젖은 귀두를 엄지손으로 꾸욱 누르며 문질렀다. 허리가 들썩였다. 고개를 젖히고 희미하게 주황빛이 도는 가게 안을 응시했다. 손을 동그랗게 말아 거대하게 발기한 좆을 움켜쥐었다. 위아래로 손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검붉은 핏줄이 느껴질 만큼 은근한 손길이었다.

“……읏.”

사월의 찌푸려진 미간이 떠올랐다. 좆을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얇은 피부가 손바닥에 딸려 위아래로 정신없이 쓸려 다닌다.

티셔츠 아래로 느껴지던 부드러운 피부. 덜 말라 젖어 있던 머리칼. 샴푸 향기. 하얀 피부 위에 새겨진 검은 잉크. 그런 것들이 모두 제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씨발…….”

사월을 떠올리니 정말 금방이라도 돌아 버릴 거 같았다. 좆이 터질 만큼 발기했다. 당장이라도 차 문을 열고, 스토크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좆질은 못 해도 사월의 뺨을 꽉 붙들고 흔드는 짓이라도 하고 싶었다. 붉은 입술 안에 좆을 처박고, 삼키지 못해 줄줄 턱 아래로 흐르는 타액을 훔쳐 입 안으로 빨아들이고 싶다.

“사, 월……. 사월…….”

가빠진 호흡에 발음이 음절마다 끊겼다. 원재는 한 손으론 핸들을 틀어쥐곤 상체를 숙였다. 아랫배에 닿을 만큼 바짝 선 성기를 더 단단히 압박했다.

“아, 하아…….”

좆을 흔드는 손짓이 거칠어졌다. 제가 강하게 잡아 쥔 탓에 붉어진 엉덩이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는 사월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아― 씨발, 씹…….”

달아오른 엉덩이 사이로 검붉게 발기한 좆을 문지른다. 프리컴에 축축해진 귀두가 하얀 살결 위를 마구 짓누른다. 축축하게 젖어 빠끔대는 구멍으로 귀두를 맞춘다. 동시에 사월이 몸을 움찔대며 앓는 소리를 낸다. 엉덩이를 잡아 벌려 안으로 좆을 삽입한다. 세게, 더 세게. 성기에 달라붙는 점막들을 모조리 빨아들여 깊은 곳으로 쑤셔 넣는다.

“아흑.”

원재는 핸들에 머리를 처박은 채 거세게 좆을 흔들어 댔다. 상상 속에서 엉망으로 사월을 헤집었다. 부어오른 구멍에 좆을 처박고, 도드라진 날개 뼈 위에 입을 맞추고. 달아오른 목덜미를 깨물고. 온통 자신의 체온으로 휘감긴 사월을 떠올린다.

상상 속 사월의 입에서 색스러운 신음이 터지는 순간, 울컥 정액이 쏟아졌다. 바지와 속옷, 그리고 좆을 감싼 손에 정액이 흩뿌려졌다. 여전히 핸들을 쥔 채, 가쁜 숨을 골랐다. 이내 차 안이 시큼한 냄새로 가득 찼다.

“미쳤지, 성원재…….”

이 나이에 자위라니. 그것도 상대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핸들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팔뚝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원재는 손바닥을 펼쳤다. 정액으로 더럽혀진 것을 보며 생각했다.

이젠 정말. 정말 되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

사월은 밤새 뒤척였다. 눈을 감으면, 자신을 나른하게 바라보던 시선과 자꾸만 마주했다. 손등에 남은 울혈도 연신 따끔대며 존재감을 알렸다. 발현이 된 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네임에 자극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약에 자신이 네임을 가진 채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면 이런 감각이 느껴질까 싶을 정도였다.

낮에 작업이 있어 준비를 하면서도 사월은 넋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잉크를 꺼내다가도, 바늘을 끼우다가도, 라텍스 장갑을 끼다가도. 손등이 자꾸만 시야에 들어왔다.

연한 살을 물고 빨던 새빨간 혀. 뾰족하게 세운 혀가 피부 위에 그림을 새기듯 유영하고, 진득하게 표면을 휘감고……. 눈으로 보지도 않은 장면들이 밤새 크기를 부풀려 뜨겁게 욕망을 분출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건 나이트 사장이 아니라 자신이 아니었을까. 사월은 생각했다.

“내가 진짜 미쳤나…….”

자꾸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정신없이 침범할 새끼였다. 저답지 않게 분위기에 휩쓸려 여태껏 딱히 반응하지 않았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피차 서로 곤란해질 뿐이라고 사월은 생각했다.

사월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법도 받는 법도 몰랐다. 애초에 모든 관계는 귀찮고 번거로운 것이었다. 나이트 사장도 그 범주에 들어야 했다. 그게 그 사람에게 주어진 원래의 자리니까.

사월은 결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난번 그려 두었던 도안을 나이트 사장에게 보냈다. 작업을 안 한다고 하면 또 그걸 빌미로 정신없이 귀찮게 할 게 뻔했다.

그럼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빨리 작업을 하고, 빨리 끝을 내는 것. 그 새끼와 자신 사이에 ‘작업’이라는 단어가 개입을 하니 모든 게 뒤엉키는 것 같았다. 어서 그 단어를 지워야 했다.

작업할 도안.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웬일인지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짧은 진동이 여러 번 이어 울렸다. 답장이 여럿 온 줄 알았는데, 전화였다. 사월은 고민을 하다 뻑뻑한 눈두덩을 누르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확인했어. 안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빨리하고 끝내게. 수정하고 싶으면 예약한 날에 얘기하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사월은 소파에 깊게 등을 기댔다. 흐리멍덩한 정신을 깨우려고 들이켰던 커피 때문인지 자꾸만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건, 원재도 마찬가지였다. 자위를 하며 한번 욕망을 터트렸더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씻으면서도 자꾸 아래로 손이 갔다. 차가운 물로 몇 번이나 샤워를 하면서 겨우 몸을 잠재웠다. 그러고 났더니 정신이 맑아졌다. 결론은 원재도 사월처럼 밤을 지새웠다는 거였다.

“존나 매력 있어. 진짜.”

원재는 가차 없이 끊어진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10초도 채 되지 않는 통화였다. 하지만 사월의 목소린 원재가 느끼기에 무엇보다 강하고 노골적인 자극이었다. 어젯밤 내내 상상한 것보다도 더 강렬했고, 몸과 마음을 동하게 했다.

화면에 남은 전화번호 11자리를 검지로 문질렀다. 숫자를 몇 번 더 훑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뭔가 급한 일이 생각난 듯 다급한 움직임으로 씻고, 입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정말 당연하게도 사월이 있는 그곳이었다. 스토크.

“……너, 내 말이 우습냐?”

막 손님이 나가고 뒷정리를 하던 사월이 인상을 찌푸렸다. 원재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져 있었다. 눈 주변이 붉게 물들었고, 늘 단정히 차고 있던 시계도 없고, 단추도 두어 개는 풀어진 상태였다. 평소 뿌리고 오던 묵직한 향수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날씨에 재킷은 어디에 뒀는지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평소와 같이 능글대는 웃음을 걸고 낯짝을 들이밀어야 할 원재가 입을 딱 다문 채였다. 서늘한 눈매가 사월에게 따갑게 내리꽂혔다. 저러고 있으니 또 인상이 달랐다. 서늘하고 위압적인 원재의 온도가 스토크 안을 차갑게 채웠다.

“야, 읍―.”

원재는 단숨에 사월의 뒷목을 잡아챘다. 라텍스 장갑을 채 벗지도 못한 사월이 다급하게 널찍한 가슴팍을 밀어 댔다. 하지만 쉽게 밀릴 이가 아니었다. 눈을 크게 뜬 사월의 시야로 지그시 감은 원재의 눈두덩이 보였다. 닿은 입술이 너무 뜨겁다고 생각할 무렵. 더 뜨거운 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침범했다. 거침없이 점막 안을 헤집고 빨아 올린다.

추웁, 춥―. 잔뜩 젖은 소리가 둘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사월은 거칠게 버둥댔다. 허리와 뒷목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릴 만큼 움켜쥔 아귀힘에 사월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혀를 옭아매고 입천장을 쓸고, 목구멍 깊은 곳까지 삽입을 하듯 혀로 찔러 댄다.

“으읍…….”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힘에 사월이 뒷걸음질을 쳤다. 사월은 허벅지 아래에 닿는 딱딱한 작업대를 느끼며 몸을 뒤틀었다.

친구는 물론 정을 준 사람도 없다. 누군가를 사귀고 스킨십을 해 본 적도 없다는 뜻이었다. 누구의 체온을 느낀 적 없던 혀가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고개를 틀며 더 깊숙이 사월을 마셔 대던 원재가 멈칫했다. 그러곤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아랫입술이 딸려 올 만큼 강하게 빨아들이면서. 잠깐 헤집었다고 여린 입술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원재가 혀로 입을 축이곤 툭 내뱉었다.

“사월 사장, 키스 왜 이렇게 못해?”

원재는 초인적인 힘으로 욕망을 억누르는 중이었다. 사월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타액에 젖은 새빨간 입술 사이로 사월이 뜨거운 숨을 몰아쉰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젖은 눈을 깜빡이는 사월을 가만 내려다봤다.

씨발, 뭘 하지도 않았는데 눈물은 왜 맺힌 건데 또. 돌겠네 진짜. 아까부터 미친 듯이 아래가 저린 걸 보니, 이미 제 좆은 발기하는 중이었다. 존나 단단하게. 아마 스토크에 들어서서 사월의 향기를 폐에 담았을 때부터 좆물이 맺혔을지도 모른다. 원재는 애써 아래로는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

사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원재의 얼굴에 희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힐끔 시선을 들어 올린 사월이 상기된 얼굴과 마주하고 곧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번뜩이는 눈, 비죽 올라간 입꼬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다잡은 사월이었다. 금방이라도 또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곤 원재를 쏘아봤다. 그 눈빛에 원재의 몸이 더 동한다는 건 당연히 알지 못했다.

“씨발 새끼야, 당장 나가. 경찰에 신고―.”

“처음이야?”

이미 핀트가 나간 눈은 사월의 입술에 박혀 있었다. 경찰에 신고를 한다느니 어쩐다느니. 사월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입 안을 헤집어도 미동 없던 혀. 뻣뻣하게 굳은 몸. 어색하게 제 어깨를 잡고 미약하게 밀어 대는 손. 그 모든 게 ‘처음’이라 그랬단 사실이 미치게 좋았다.

아니, 좋은 걸 넘어섰지. 마음 같아선 씨발, 가게고 뭐고 사월을 당장 눕혀 옷을 찢어발기고 싶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을 성역 같은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싶다. 처음 느끼는 쾌감에 움찔대는 몸을 콱 틀어쥔 채, 살을 빨아 올려 입 안에 굴리고 싶다.

검은 잉크가 새겨진 목덜미를 물고 핥고 싶다. 목에 그려진 검은 꽃에 붉은 열매가 맺힌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만으로 사정감이 몰려온다. 감춰 둔 하얀 피부 아래엔 얼마나 많은 그림이 있을까. 그 위를 붉게 수놓을 생각에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 같다.

“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는 짐승의 울음 같았다. 아아―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들이 자꾸만 원재의 잇새에서 터졌다.

사월에겐 더는 몸을 무를 곳이 없었다. 여기서 조금만 뒤로 체중을 실었다간 작업대에 눕는 꼴이 될 터였다. 그럼 그 뒤는……. 아마도 원재가 원하는 흐름이 될지도 몰랐다. 꿋꿋하게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맞닿은 아래가 볼록하게 발기한 건 애써 모르는 척하면서 말이다.

“내가 알려 줄게, 사월 사장. 착하게 입 벌려.”

“…….”

“혀 내밀고.”

사월이 입을 딱 다물었다. 원재가 픽 웃었다.

“어차피 순순히 따를 거란 생각은 안 했어.”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옮겼다. 엄지와 검지로 사월의 뺨을 세게 짓누른다. 어금니를 앙 물고 버티는 사월이 이길 수 없는 악력이었다.

“아.”

작은 탄성과 함께 입술이 뻐끔 열렸다. 입술 안으로 보이는 새빨갛고 뜨거운 점막. 원재는 다급하게 고개를 틀었다. 혀를 길게 빼고 열린 구멍에 집어넣는다. 좁은 틈새에 들어찬 혀가 입술 위를 진득하게 누르며 벌렸다.

“으읍.”

뺨을 쥔 손목 위로 미끌거리는 라텍스 장갑의 감촉이 닿았다. 원재는 힘을 풀고 고개를 기울였다. 크게 벌어진 입 안으로 무작정 욕망을 욱여넣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타액이 맺혔다. 숨이 모자란 사월이 인상을 쓰며 어깨를 움직였다. 목구멍까지 파고들었던 혀가 잘게 떨리는 사월의 입술 위를 핥으며 멀어진다.

“하아…….”

“갈증 나서 돌겠어, 나.”

목덜미부터 붉게 물든 사월의 피부를 보니 목이 타들어 갔다. 사월 사장은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 건지 알아줘야 돼, 진짜.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사월은 여전히 원재의 가슴팍 어딘가에 손을 올리고 쌕쌕대는 중이었다. 원재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그러곤 엉덩이 아래 부분을 잡아채 자신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읏.”

하체끼리 진득하게 맞닿았다. 옷 사이로 거대한 좆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남의 좆을 볼 일이 많지는 않지만…… 아니,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닌가. 존나 거대한 걸 어딘가에 쑤셔 넣는다고? 미친 새끼 아냐, 정말. 사월이 공격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원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짝 맞물린 하체를 더 가깝게 붙이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뭉근하게 아래를 돌리고 뜨겁고 긴 숨을 토해 냈다. 나 지금 너 때문에 좆이 섰어. 그걸 뜻하는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역시, 이 새끼의 목적은 이거였다. 사월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다른 새끼들처럼 저급한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음흉한 속내는 똑같았다. 깡패 새끼들하고 일하면서 이런 경험은 비일비재했다. 볕을 자주 보지 못해 하얗고 마른 사월은 시커먼 사내 사이에서도 유독 빛이 났으니까.

하지만 그런 관심은 정말 오래가지 못했다. 더럽다고 칭해질 만큼 거친 사월의 말투 때문이었다. 자꾸만 선을 넘는 원재에겐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긴 했지만.

말리면 안 돼. 안 돼……. 사월은 쿵쾅거리면서 정신 나간 것처럼 뛰는 심장이 야속할 뿐이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자, 손 아래로 원재의 셔츠가 구겨지는 게 느껴진다. 이 작은 감촉에도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만지면 안 될 것을 만진 듯 서둘러 손을 떼어 냈다. 이내 원래 자신의 목소리를 찾았다. 한참 헤맸지만, 입 밖으로 나온 음성은 자신의 목소리가 맞았다.

“아까 말했지. 니 새끼 작업 빨리하고 쫑 낼 거라고.”

“내 네임 잘 있어?”

“너 씨발, 아프다고 지랄을 떨어도 하루 만에 다 끝낼 거야, 내가.”

“확인하고 싶은데.”

뒤섞이지 않는 대화다. 한쪽은 나른하고 몽롱한 음성이었고, 다른 한쪽은 악에 받친 듯 가시를 세운 채였다. 그 간극을 목도한 사월이 짜증스럽게 입을 딱 다물었다. 침묵 사이로 원재의 엄지가 사월의 아랫입술을 훔치고 멀어졌다. 손끝에는 타액이 묻어 있었다.

“벗어 봐.”

“……뭐?”

“장갑.”

“…….”

“내 네임 좀 보게.”

원재가 씩 웃었다. 사월은 도대체 이 새끼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뜯어고쳐야 하는지 이제 계산도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럴 마음을 먹기는 했나.

사월은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심장은 멋대로 쿵쾅대고 손이 벌벌 떨렸다. 애써 널뛰는 마음을 갈무리한 사월은 선 안으로 멋대로 침범한 남자에게서 멀어지기를 선택한다. 멀찍이 떨어져 또 한 번 두터운 선을 긋는다.

“진짜 나랑 떡이라도 치고 싶어서 이 지랄 떨어?”

“어감이 되게 별로다. 내 관심이 지랄로 치부되는 건 좀 그래.”

“관심.”

짧은 비소였다. 사월의 입매가 뒤틀렸다. 이만큼 자신의 벽을 넘은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김 사장도 이렇게까지 자신의 세계를 흐트러트리지 않았었다. 사월은 그게 겁이 났다. 이 사람이 자꾸만 자신의 세계에 손을 대고, 기웃대고, 참견하다가 결국은 그의 손에 모든 걸 맡기게 될까 봐.

“……대단한 관심이네.”

처음 겪어 보는 일련의 감정들이 편해지고 익숙해질까 봐.

당장 내일 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삶을 애써 이어 가는 건, 그저 죽은 김 사장의 노고가 헛되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의 시간을 쌓기 위해서다. 그사이에 지저분하고 끈적한 감정들이 섞여선 안 됐다.

“멋대로 찾아와서 입술 부비고, 물고 빨고…….”

여기까지 정리하자 사월의 머릿속에서 또다시 경보음이 울렸다. 나이트 사장에겐 손님 그 이상의 역할이 주어져선 안 됐다. 생각 안에서 부유하는 단어들을 잡아다가 아무렇게나 입술 밖으로 내던졌다.

“떡 치고 싶으면 말해. 자 줄게. 어차피 씨발, 좆같이 살다 뒤질 거. 발정 난 새끼한테 한 번 대 주는 게 뭐가 어렵겠어.”

“사월 사장, 갑자기 얘기가 왜 그렇게…….”

원재의 눈이 가라앉았다. 물론 사월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끼지 않았다곤 할 수 없다. 몸이 동하니까 마음이 동하는 거. 그건 당연한 수순 아닌가. ‘성급하다’, ‘불쾌하다’, 혹은 ‘난 아무 관심이 없다’. 차라리 그따위 말을 들었으면 이렇게 기분이 더럽진 않을 텐데.

칭찬을 낯설어하는 이 남자는 관심에도 익숙하지 못했다.

“작업 끝나기 전에 말해. 적어도 네가 손님일 때 뒹굴자. 섹스에도 개연성은 있어야지.”

“……내가 성급하게 굴었어. 멋대로 밀어붙여서 불쾌했다면 미안해. 근데 내가 당신한테 원하는 건 그게 아냐.”

다급한 목소리였다. 표정을 지운 채 차가운 낯을 띤 사월에게 매달리다시피 애원하는 음성이었다. 그간 겪었던 사월의 성격을 미루어 보아 정말 자신이 싫었다면, 뺨이라도 올려붙이리라 생각했다. 모든 건 판단 미스였다. 칭찬도 관심도 익숙하지 않은 사월이, 애정 관계에 익숙할 리는 더더욱 없으니까.

“그럼 나한테 뭘 원하는데?”

“…….”

원재는 할 말을 잃었다. 관심을 달라고, 눈길을 달라고, 애정을 달라고……. 그렇게 얘길 하면, 줄 수 있을까. 받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베풀 수 있을까. 원재가 적당한 말을 찾는 사이 침묵이 길어졌다. 사월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 봐. 말 못 하지. 네가 원하는 건 그냥 하룻밤인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사월의 입 안을 탐하던 자신이 흉측하게 느껴졌다. 아냐. 난 고작 그것만 원하는 게 아닌데. 주변에 가시덩굴을 세운 당신의 안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몸을 맞대고 앉아 ‘같이 밖으로 나가자’ 그 말이 해 주고 싶은 거야. 뱉지 못한 말들이 담긴 입 안은 쓰디썼다.

사월의 말 한마디로 자신의 모든 관심이 저급해졌다. 당장이라도 취소할 줄 알았던 작업을 이어 간다는 소리에 들떴던 스스로가 등신 같았다. 단순히 네임을 덮어 준다는 말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게 실수였다. 순식간에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작업일 아직 남았어. 그 안에 찾아오면, 진짜 나랑 자고 싶단 뜻으로 알아들을게.”

사월이 장갑을 벗었다. 손등엔 여전히 울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쉽게 가실 리 없었다. 원재는 붉은 자국을 보고 아랫입술을 씹었다. 사월은 팔을 들어 손등을 내보였다.

“이거 안 지워져도 자 준다고.”

이보다 더 날카로운 가시는 없었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선 사월을 부르지 못했다. 어떤 말로 설득하고 매달린다 해도, 그에겐 오직 하룻밤에 눈이 먼 발정 난 새끼처럼 보일 테니까.

“…….”

가볍지 않은 관심. 다른 사람에겐 문제없이 전해졌을 마음이지만, 사월에겐 쉬이 닿지 않았다. 원재는 높디높은 사월의 성벽을 채 오르지도 못하고 추락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스토크를 나서면서 원재는 옆구리에 피어오르는 알싸한 통증을 느꼈다. 발현 후 처음으로 찾아온 고통이었다.

***

일주일이 넘었다. 사월을 찾아가지 않은 건.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못 참고 달려가 자신을 봐 달라고 매달릴 거 같았다. 그럼 또 사월은 미간만 약하게 찌푸리고 말겠지.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사람을 보듯 그렇게……. 그건 싫었다. 쓰레기, 인간 말종, 발정 난 새끼 따위로 기억되긴 싫었다.

“후우…….”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비릿함이 공존하던 지하실에 매캐함이 뒤섞였다. 원재는 담배를 길게 빨고, 바닥에 꽁초를 내던졌다. 그 위를 지그시 지르밟는 구둣발은 가차 없었다.

“사, 사장님……. 한 번만 아량을 베풀, 베풀어 주신다면…….”

피를 흠뻑 뒤집어쓴 남자가 손을 모아 싹싹 비볐다. 남자의 몸 어느 곳에도 상처는 없었다. 그를 뒤덮은 피는, 옆에 늘어져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미동 없는 남자의 주변으로는 웅덩이가 고일 만큼 피가 흥건했다.

남자가 피 묻은 손으로 원재의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쯧. 미간을 찌푸린 원재가 발을 거칠게 뒤로 물렸다. 구둣발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지익― 길게 늘어졌다. 손을 싹싹 비비는 남자는 이제 눈물 콧물을 흘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벌벌 떨리는 어깨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원재는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몰랐는데, 양 실장 되게 낯짝 두껍구나.”

“죄송, 죄송합니다…….”

“아량은 그동안 많이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수금한 돈 뒤로 돌려먹고, 없는 사람 이력서 올려서 월급 빼먹고. 술값 씨팔,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장부에 장난질 치고.”

“…….”

원재가 손을 뻗었다. 남자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거칠게 들어 올렸다. 겁에 질린 동공은 정신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원재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공범의 시체를 옆에 두고, 피를 뒤집어쓴 채 공포에 점철된 한 남자의 얼굴을.

“그 정도 눈감아 준 거면 아량 많이 베푼 건데. 더 원해?”

“……죄송합니다, 죄송……. 눈이 멀어서, 꾐에 넘어가서…….”

“아아. 순진한 양 실장을 최 실장이 꼬셨어?”

짐짓 다정한 목소리. 평소 성 사장의 음성과 다를 바 없는 것. 정신없이 휘청대던 동공이 순간 번뜩였다. 남자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격한 움직임에 턱에 맺힌 타액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 실장이 나빴네. 그치.”

“예예, 꼬셔서……. 돈을 빼돌리자고, 그렇게.”

“응. 최 실장한테 넘어간 죄밖에 없네.”

“그, 그렇, 네네…….”

원재가 남자의 뺨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곤 억세게 쥔 머리칼을 놓아줬다. 남자는 순간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알겠어. 양 실장은 덜떨어진 죄밖에 없으니까 살려는 줄게.”

“감, 감사합니다……. 사장님. 성 사장님.”

“뭘.”

냉랭한 표정의 원재가 바닥에 놓인 남자의 손을 살폈다. 손톱 사이사이까지 핏물이 짙게 스민 채였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원재가 검지와 중지, 약지의 손톱을 가볍게 툭툭 쳤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멀찍이 선 최 비서에게 시선을 던진다.

“일단 세 개만 잘라. 장난 못 치게.”

“네.”

“악! 안 돼! 으윽!”

공포에 질려 자지러지는 남자를 본 체 만 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앉아 있었다고 주름이 다 졌다. 무릎 쪽을 툭툭 터는 손길은 더없이 가벼웠다. 바닥을 벌벌 기던 남자가 원재의 바짓단을 다시 붙들었다. 원재는 이번엔 피하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윽.”

가차 없이 남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단숨에 떨어진 손을 구둣발로 꽉 눌러 비볐다. 고통에 찬 비명이 지하를 가득 울렸다. 그 사이로 서늘한 원재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더러운 꼴로 다니면 나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지도 몰라.”

사월 사장이. 그 말은 목구멍 뒤로 삼켰다. 입 밖으로 그의 이름을 말해 버리면 익숙한 얼굴 윤곽이, 은은한 향기가, 높은 체온이, 거친 말버릇이 못 견디게 보고 싶을 것 같았기에.

최 비서가 손가락 두 개를 막 잘랐을 때, 원재가 지하의 문을 열고 다시 들어왔다. 문 밖으로 들리는 절규에 멀리 벗어나지도 못한 그였다.

“거기까지만 해, 그냥.”

맨정신에 손가락 두 개를 잃은 남자는 그마저도 감사하다며 울부짖었다. 피 웅덩이에서 발악한 탓에 온몸이 빨간 선혈로 범벅이었다. 원재는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술이 생각났다. 늘 옆에서 주량을 제어해 주던 최 비서도 데려가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은 멀쩡한 정신으로 지나가기 너무 어려웠다.

부러 관리하는 구역에서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아래 부리는 애들 앞에서 취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걸음을 옮겼다. 다소 신경질적인 걸음에, 구겨진 미간은 누구든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

그렇게 거침없이 목적지를 향해 걷던 걸음이 단숨에 멈추었다. 시야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 탓이었다. 며칠 내내 잠을 이룰 수 없게 아른대던 사람. 브레이크 없던 자신의 삶에 빨간 신호를 띄워 준 사람.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어두워지기 시작한 골목을 덤덤히 가로지른다. 사월은 주변에 시선 따위 하나 주지 않고 앞만 향해 걷는다. 그의 뒤를 바짝 따르는 캐리어마저 요란한 기색이 없다.

평소 같았다면 달려가서 사월의 앞을 가로막았을 거다. 걸음을 멈추게 하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고. 자신을 발견한 뒤 찌푸려지는 미간을 응시했을 터였다. 이런 곳에서 만나 더 반갑다며,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 아니냐며 싼마이 멘트를 지껄였을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현실의 원재는 한 걸음조차 뗄 수 없었다. 입을 벌려 사월을 부를 수도 없었다. 사월이 쳐 둔 뾰족한 가시덤불에 찔린 가슴에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거 봐. 말 못 하지. 네가 원하는 건 그냥 하룻밤인 거야.”

원재는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느껴 보는 상실감이었다. 원하는 건 굴릴 수 있을 만큼 굴리고, 필요 없는 건 가차 없이 찢어 없애고,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애초에 자라날 싹을 짓밟으며 살았다. 무언가를 온전히 가져 본 적 없으니, 제 손아귀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이 느낌이 익숙할 리가 없다.

“……한 번만 봐주지.”

원재의 바람에도 사월은 눈길 한 번 흘리지 않고 곧장 큰길을 돌아 나갔다. 사월이 사라진 좁은 골목을 바라보다 원재는 시선을 떨구었다.

역시 오늘은 맨정신으로 지나가기 너무 힘들 것 같다.

***

사월은 며칠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날카로운 말로 원재를 돌려보내고 나서부터 쭉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지끈대는 머리를 차가운 테이블 위에 쿵 박았다. 펼쳐 놓은 드로잉 북 위로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찌르르한 아픔에도 정신은 말짱해지지를 않는다. 사월의 등이 크게 들썩였다 가라앉는다.

쾅.

작은 기척에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다시 적막이 흘렀다. 사월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쾅쾅. 그런 사월에게 확답을 주듯, 다시 한번 소음이 울렸다.

사월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고개를 돌렸다. 불투명한 유리문 밖으로 큰 실루엣이 비쳤다. 사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며칠 전에도 겪었던 방문이다.

늦은 밤, 스토크의 문을 두드렸던 남자. 할 말이 많아 보이던 낯으로 그냥 돌아서던 남자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다.

의자가 뒤로 밀릴 만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사월은 유리문 너머 인영을 잠시 바라봤다. 비틀비틀. 중심을 잡지 못하는 듯 몸이 흔들리더니 이내 유리문 위로 이마를 박는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작게 흔들린다.

“…….”

사월은 반사적으로 벽에 걸린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약속했던 작업은 사흘이나 남았다. 곧 자정을 넘어가니 제한다 쳐도, 이틀은 남은 셈이었다.

“작업일 아직 남았어. 그 안에 찾아오면, 진짜 나랑 자고 싶단 걸로 알아들을게.”

분명 자신이 뱉었던 말을, 그가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스토크의 문을 두드린다는 건 그가 원한 게 섹스라는 뜻일까. 사월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넘겼다. 팔에 감긴 뱀 한 마리가 꿈틀대며 요동쳤다.

쾅. 문 밖의 인영은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채 주먹으로 문을 두드린다. 이젠 본격적인 노크였다. 사월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비소를 흘렸다.

그럼 그렇지. 깡패 새끼 머릿속에 든 게 그것밖에 더 있겠어. 구애를 하듯 자꾸 선을 침범하고, 눈에 밟히게 하던 행동 전부. 그냥 나랑 한번 자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지, 역시. 시선이 답지 않게 애틋해서 착각할 뻔했잖아.

“등신같이…….”

사월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원재가 앞으로 휘청거리며 쏟아졌다. 며칠 전보다 술 냄새가 더 독했다. 얼마나 처먹은 거야. 사월은 한숨을 쉬며 원재를 부축했다. 축 늘어진 몸은 무거웠다. 사월은 무게에 못 이겨 뒷걸음질을 쳤다.

“야, 똑바로 안 서?”

“……어? 또…….”

얼빠진 물음표는 한참 뒤에야 원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원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제 어깨 아래쪽에 있는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아까 마주친 뒤로, 술 마시는 내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더니 이젠 눈앞에 나타난 건가.

원재는 늘어진 팔에 힘을 주어 눈앞의 인영을 더듬었다. 허리, 팔뚝, 어깨, 목덜미. 종국엔 뺨을 그러쥐었다. 신기하네. 생김새도, 향기도, 체온도, 감각도 모두 사월 사장이랑 똑같네.

술에 쩐 원재는 생생한 환영이 신기한 듯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기까지 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채라 서로의 표정이 너무도 잘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월 사장은 나만 보면 자동으로 인상 쓰더니. 환영으로 나타나서도 얼굴을 찌푸리네…….

“술 처먹고도 잘 찾아왔네. 그렇게 나랑 하고 싶었어?”

“……목소리도, 똑같다.”

불분명한 발음에 사월은 원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분명 찾아오지 말라 일렀고 그는 약속된 기한 전에 찾아왔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노골적인 방문일 테지.

“이렇게 섹스에 진심인 줄 몰랐네. 몰라줘서 존나 미안할 정도야.”

원재는 고개를 저었다. 사월은 굳은 낯으로 휘청거리는 몸을 끌었다. 섹스를 하든 뭘 하든 어쨌든 문 앞에서 이러고 서 있을 순 없었다. 무겁게 기대 오는 무게를 이끌고, 잠시 고민했다. 사월의 시선이 작업대 위를 한 번, 스토크에 딸린 방으로 한 번 왔다 갔다 하며 갈등했다.

“씨발…….”

결국 사월은 원재를 어깨에 달고 방으로 향했다. 이불을 펴 둔 채라 눕히기가 쉬울 것 같았다. 낑낑대며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내 원재는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댔다.

“말해도, 내가 말, 하면…… 해 줘?”

“…….”

“못 해 줄, 안 해 줄 거잖아…….”

컴컴한 방의 전등을 켠다. 환해진 방에 원재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원재의 다리를 들어 구두를 벗겼다. 검은 구두 위로 짙은 얼룩들이 여러 개 떨어져 있다. 사월은 의뭉스럽게 그것을 내려 보다 이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미친. 이렇게 취해 놓고.”

아, 진짜 모르겠다. 이 새끼가 섹스를 하고 싶어 하든 술에 취해서 그냥 찾아온 거든. 일단 제대로 눕히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문가에 늘어진 원재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원체 큰 덩치인 데다 술에 취해 온몸이 늘어진 그를 옮기긴 쉽지 않았다.

“야, 눈 떠.”

사월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원재의 뺨 위에서 머뭇댔다. 이내 결심했다는 듯 뺨에 닿았다. 툭툭. 작은 마찰이 이어졌다. 원재는 당연히 미동도 없다.

“……정신 좀 차려 보라고.”

미간을 찌푸린 사월이 조금 더 힘을 주어 뺨을 톡톡 쳤다. 그제야 원재가 눈을 떴다.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 몽롱한 시선이었다.

“사장, 사월 사장…….”

“왜.”

사월은 덩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술기운에 나른해진 얼굴과 마주한다. 원재의 동공이 천천히 사월을 훑었다. 제 뺨에 닿은 사월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친다. 느릿하게 손바닥 위로 뺨을 문지른다. 빳빳하게 굳는 사월의 몸.

“……아니야,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건지, 원재는 계속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고개를 저을수록 뺨이 손 안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잡힌 손을 빼지도 못하고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원재의 체온을, 사월은 그대로 받아 낼 뿐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나는.”

“…….”

“예뻐하고 싶어…….”

단 한마디다. 짧은 속삭임 하나로 사월 주변에 세워진 모든 벽이 와르르 무너진다. 걷잡을 새도 없이, 파편을 흩날리며 모두 부서진다.

아……. 사월은 탄성을 뱉었다.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제아무리 술김이래도 이건 너무 타격이 큰 말이었다. 울렁이는 속을 붙들고 사월은 숨을 들이켰다. 규칙적이던 호흡이 엉망으로 엇나갔다. 모든 신경이 눈을 감고 제 손에 뺨을 비비는 원재에게로 향했다.

“예뻐해 주고 싶어, 너를.”

4월에 버려진 자신에게 생일의 존재를 일러 준 그는, 일생 받아 보지 못한 애정을 입에 올린다. 무차별하게 쏟아지는 다정에 사월은 눈을 감았다. 차갑게 꽁꽁 얼었던 손바닥이 따스하게 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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