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opera's never over Till the Fat Lady Sings
깨어나자 피는 멎어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은 대단히 요란했다. 흥건히 붉게 젖은 셔츠. 태정이 일어난 자리에는 피가 널따랗게 원형을 그리며 다다미까지 스며들어 가 있었다. 이리 저리 바닥에 똑,똑 박혀 있는 빨간 점. 얼굴에 말라붙어 있는 피의 딱지들. 코를 이리 저리 만져 봤지만 어떤 이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침을 뚝 떼는 것처럼 멀쩡한 것이다.
흠흠. 킁킁. 태정은 얼굴을 씻으면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코는, 여느 때와 같은 기능을 발휘한다. 코로 매끄럽게 공기가 들어가고 다시 빠져나간다.
하지만 태정은 느낄 수 있었다. 망가지려나 걱정했던 그것이 아침이 되어 홀연 하게 변화되어 있는 것을.
어떠한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다. 앓던 이가 빠진 것도 아니다. 오늘은 그저 어제의 연장에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확연히 달라졌다. 코가 아니라, 태정 자신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에 아등바등 바위를, 잡풀을 잡고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던 바닥은 바로 아래. 나뒹굴지도, 넘어지지도 않고 두 발로 가뿐히 딛고 설 수 있을 만큼 가까워 스스로가 바보 된 느낌이었다. 까마득히 아득해 보여 두려워했던 바닥을 이제는 쾅쾅 두들길 수 있을 것이다.
그칠 줄 몰랐던 코피는 사소한 계기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유를 찾지만, 단지 계기만이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태정은, 깨닫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태정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태정은 관장에게 노무라와의 만남을 청했다. 그가 남기고 갔던 명함을 집어들었다면 관장을 통할 일도 없었으리라. 체육관에 무겐의 모습은―물론―보이지 않았다. 이미 관장은 무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토, 라는 녀석의 짓이라고…?」 동경 시부야 경찰서 유치계를 통해 무겐이 연락을 취해왔다고 관장은 전했다. 이미 무겐은 유치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무겐, 그 녀석, 횡설수설 말을 잘 못하던데…. 어떻게 된 일이야」 대강의 사실만을 알고 있는 관장에게 태정은 전후 사정을 이야기했다. 태정의 이야기는 건조하게 시작해서 시작과 똑같이 평이한 어투로 끝났다.
경찰에게 적발되는 것이 무겐이네들에겐 가장 나쁜 경우였다. 무겐은, 적발이 아닌 신고였지만. 그리고 불법 체류중인 외국인이 형을 살 수 있었다―그것이 현실이다. 관장은 그런 경우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변호사가 좋으면, 그리고 재판관을 잘 만난다면… 이라고 관장은 말했다. 무겐에게는 ‘잘’이라는 운이 이어져야 했다. 운이 좋고, 나쁘고를 태정은 가려 생각하지만, 태정은 ‘운이 좋아야 할 텐데’라는 쪽으로 기분이 기울어지지 않는다. 시합 후의 통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유치장에 있을 무겐을 생각해도 태정은 무감각할 뿐이었다.
「널 탓하지는 않는다고 녀석이, 그렇게 말해달라더군.」 태정의 이야기가 끝나자 관장이 무겐의 전언을 들려주었다. 그 전언 또한 태정의 귀엔 그저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하지만 전언에 태정은 무겐에게 듣지 못한 것이 떠오른다. 엉뚱하고도 엉뚱한. 이상하게 무겐이 말했던 여자의 노래가 태정은 궁금해졌던 것이다. 뚱뚱한 여자가 부른다는 노래를…, 그것이 무엇인지 녀석에게 듣지 못했다.
「조, 걱정하지 마」 관장은 태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정은 무겐의 걱정이 아닌 그저 태평하게, 노래를 궁금해했던 것을. 태정이 노무라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말하자, 관장은 역시나 무겐 때문이냐고 물었다. 그런 ‘일개’ 몽골인의 일은 그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태정의 행동에 대한 대단한 ‘오해’를 하며 관장은 태정을 말렸다. 그런 사실은 태정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개’ 불법 체류자인 무겐을 위해서 노무라를 찾지는 않는다.
애초 내기 시합이란 것이 키타무라 때문이 아니었듯, 노무라를 만나는 것도 무겐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태정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찾은 태정을 보고 무얼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래도 그 순간엔 ‘무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태정은 끝내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예’의 논리를 태정은 우둔하게 세우고자 한다. 도움을 청하러 온 게 아니라고 하자, 노무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결국 깨달았다는 거군…? 갈 곳이 여기란 걸 말야.」
그때 태정은 누이와 했던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렸다. 누나에게 결코 되지 않으리라, 하지 않으리라 말했던 것을 하게 되었다. 「복싱은 안 할 거야. 그리고 야쿠자만 되지 않으면 되지… 그렇지?」라고 태희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또 파친코를 하지 않는다고 했었나? 아마, 이후로 그때를 떠올린다면, 그건 몽땅 우스갯소리로 기억될 것이다. 태정은 이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의지로써 살고 싶다’고 했던 것을 그의 의지로써, 그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의지의 배치背馳정도로 겉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노무라를 찾아갔더라도, 태정의 일상이 크게 달라지거나 전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물에 뜬 기름처럼, 부표 하듯 한 태정의 소속이 비로소 명확해진 것뿐이다.
칼로 손등을 찍으라느니,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이라는 둥, 야쿠자 사무실을 찾는 조무래기들에게 거창한 말을 하거나 한 장면을 연출한다는 건, 과장이나 허풍이리라. 노무라는 그저 ‘일을 잘 배워보라고’만 말했다.
태정은 지금까지처럼 일상을 살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하겠지. ―어쩌면, 파친코점을 협박해 수금을 하거나 위조된 프리페이드 카드의 공급이 일이 될지도 모른다. 과거 아버지를 파친코를 드나들었던 녀석들처럼. 어쨌거나 태정은 또 여전히 아라시를 찾아가서 샌드백을 두드릴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고토를 볼 것이다.
…지금처럼.
고토가 차를 세워놓고 그 앞에서 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이 난장판이더군?”
그래서 나와 있었던 건가. 언젠가 여느 때처럼 불쑥 나타나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모습을 보이리라고, 태정은 생각지 못했다. 녀석은 너무 빨리 왔다.
“무슨 일 있었던 거냐? 그 피는 뭐야?”
고토는 계속 태정을 향해 말을 걸었다. 태정은 힐긋 고토를 보지만, 그냥 지나친다. 하마다 관장과 노무라, 두 사람을 찾아갔지만 모두 길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조금 허기가 지는 태정이었다. 집으로 향하면서, 태정은 그저 무엇으로 저녁을 먹을 것인지 궁리한다. 그리고 어떻게 다다미에 밴 피를 뺄 것인가도 함께 생각하면서.
“내가 안 보이냐? 안 들려?”
“…….”
고토의 목소리가 깔려 있다.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저벅 저벅 걸어 태정은 계단의 난간을 잡는다. 다시 녀석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이봐……. 용서해줄게.”
왠지, 그 몇 발자국 사이에 고토의 목소리는 조금 변해 있다. 언뜻 온화하고, 조용히 회유하는 듯하다. 태정은 어떠한 주저도 없이 계단을 오른다. 쿵. 쿵.
“용서해준다고!!”
부드러웠던 고토의 목소리는 대번에 굵고 거친 가시를 드러냈다. 용서라. 태정은 오르던 계단 위에 우뚝 멈춰 선다. 용서라고…, 녀석은 언제나, 처음부터 선수를 치고 있었다. 태정은 고토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선수를 친다는 건, 자신이 켕기거나 상대가 두려울 때.
죽여 버릴 것 그랬다는 말이 널, 안절부절 하게 만드나? 고토?
“무얼 용서해준다는 거지?”
고토가 태정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여유를 일부러 찾는 것이 눈에 보인다. 금세 태정의 눈앞으로 다가와 선 고토는 계단 위에 선 태정을 올려다본다.
“네가 잘못한 것들.”
태정은 계단을 내려와 녀석과 똑바로 마주한다. 용서라는 것을 녀석에게 확인하고 확인받아야 할 것이 있었으므로.
“그럼 성의를 보일 필요는 이제 없다는 거군…?”
“뭐? 네가 시건방진 소릴 했잖아. 그걸 용서하겠다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 녀석의 용서라는 건 부분적인 것이었다. 태정이 ‘감히’ 해선 안 될 모욕적인 언사나, 죽여버릴 걸 그랬다는 말이 용서의 대상이었으리라. 하지만 녀석의 용서를 이제 구하지는 않는다. 아니, 지금까지도 녀석의 용서를 바란 건 아니었다. 성의를 표하라는 요구에 태정이 응한 것뿐.
그런데 고토, 말하지 않았나. 이제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앞으로 성의 같은 건 없을 거야.”
태정은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일방적인 것이 이제는 고토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뭐야, 갑자기…… 너. 그 몽골 녀석 때문인가? 하, 녀석을 경찰에 넘겨서 그래? 그건 너 때문이잖아. 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하…. 너 시합 이야길 하는 건가? 시합은 잊었어. 몽골 녀석 따윈 더더욱.”
그것이 언제 일이었는지, 태정은 정말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졌다. 단지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던 그것이…. 고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고토. 나는 항상 바랐지. 너와의 끝을 말이야. 하지만 같은 이유로, 지금은 너와 끝을 바라지 않아. 이제 시작이거든.”
태정은 씨익 웃었다. 이제 새 출발인 거다. 말을 하고 나서야 태정은 실감을 한다. 어떤 말은 별 생각 없이 말했다가도, 돌이켜 보면 왠지 더 그럴듯해 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폭죽이 터지고 팡파르가 울리는 것까지야 바라진 않지만, 녀석에게는 바라도 되지 않을까.
“축하해줘야지. 고토.”
고토에게 말했을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만들어줬다고…. 하지만 시작은, 고토 때문이 아니다. 녀석 역시, 하나의 계기일 뿐.
“뭐가 시작이라는 거지?”
“이봐 고토. 축하가 먼저다. 알고 싶다면 말이야.”
“너, 달라졌군…. 뭔가… 달라졌어.”
고토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천천히 혼잣말을 했다.
“뭐야 뭐냐고….”
녀석이 초조해 보인다. 안달을 내며 뭔가를 알고 싶어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하지만, 태정은 녀석에게 미소만을 보였다.
“방에 그 피는 뭐야.”
“아, 그 피를 봤군? 흠….”
피를 들먹이며 대화의 전환을 시도하는 고토에게, 태정은 조금 뜸을 들였다. 무어라 말해줄까. 시작의 계기였던 피를, 태정의 시작을 도왔던 녀석에게 무어라 설명할까.
“그건, 죽은 녀석 피다.”
그래, 어제 죽은 녀석의 피다. 어리석었던 녀석의. 미련했던 녀석의. 끝까지 도피만 했던 녀석의. 고토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
“그러니까 시작이라고.”
“죽었다고? 죽었는데 뭐가 시작이야….”
“알고 싶으면…, 말했잖아. 축하해달라고.”
“알고 싶지 않다면? 축하를 하지 않는다면, 어쩔 거지?”
고토는 굳은 표정으로 태정이 말한 반대의 경우를 묻는다. 평소의 녀석이라면, 코웃음으로 무시했을 녀석이. 피, 죽음. 그런 것에 불안해졌나? 고토, 네가? 하지만, 확실히 녀석도 느끼고 있었다. 태정이 말하는 ‘시작’을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더라도.
“알고 싶지 않다면, 이대로, 돌아가. 그리고 그게 끝이야. 네가 끝낼 수 있는 끝.”
태정은 이미, 끝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건 녀석에게 주는 기회이다. 하지만 영리한 녀석은, 기회를 덥석 물지 않는다.
“내게 끝낼 기회를 준다…? 그렇다면 왜 네가 끝내지 않는 거지? 왜 끝을 바라지 않는다는 거냐고.”
“축하를 받기 위해서.”
“고작 내게, 축하를 받기 위해서라…?”
그것을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러나 그에게 요구되는 ‘고작’에 불안이 가라앉은 건지 고토는 가볍게 미소마저 띄운다. 녀석의 결심이 기운 것 같다. 그의 기회를 포기하고 태정의 시작을 알아보기로. 태정에게 축하를 하기로 말이다. 그래, 고토 네게 축하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좋아, 축하를 어떻게 하면 되지? 축하해? 이러면 되나? 아니면 꽃다발이라도 같이 줘야하는 건가? 하하.”
웃는 고토에게 태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녀석이 해야 할 말을 태정이 대신, 말한다.
“미안해.”
축하의 말은 한마디면 된다.
뭐? 고토가, 얼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미안하다고 나한테, 말해. 그게 축하다.”
“하하…뭐?…하하…하….”
녀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띄엄띄엄 웃었다. 웃긴가? 하긴, 웃길 만도 하다. 고작 한마디의 사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말해 봐. 고토.
“쿠큭…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냐? 엉? 뭐, 못할 것도 없는데…? 네 녀석, 많이 쌓여 있었나 보군? 그 말을 들으면 좀 기분이 나아질 것 같냐? 그 말 한마디 들으려고 시작이니 끝이니 죽은 녀석 운운 하면서 무게 잡았냐고….”
녀석의 비웃음은, 축하의 의미를 희석시키기 위한 작업. 태정은 그런 작업을 중지시킨다.
“넌 할 수 없을 거야.”
“……?!”
태정이 고작, 사과 따위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기분 한 번 풀고자 하는 것도, 고토의 잘못을 따지려고 드는 것도, 그러한 과거의 행태를 강제로 인정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그 말만은 꼭 듣고 말리라, 라는 식의 기분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태정은, 그런 감정들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왜 할 수 없다는 거지?”
고토는 마치 그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넌, 제대로 해야 해.”
그 뜻이 무엇인지는 녀석이 잘 알 것이다. 두려운 녀석은 두려운 녀석답게 굴라고 했던 고토이지 않았는가. 녀석은 미안한 녀석답게 말해야 했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인정하는 게 될 거야. 네가 날 무서워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사실을 지적 받고도, 네가 말한다는 건 그건 네 자존심을 다 버리겠다는 것과 다름없겠지. …그런데, 할 수 있을까.”
의문을 던지고, 태정은 남은 계단을 다시 올랐다. 고토의 말을 태정은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려 봤자 시간낭비인 것이다. 녀석이 해야 할 말은 단지 ‘축하’뿐이었다.
“너 이건 무슨 수작이야 이건…? 네가 이래도 된다고 생각하냐? 엉? 이 자식!! 내가 말하고 있잖아! 어딜 가?”
태정의 말을 충분히 알아듣고 나서도, 고토는 과거를 다시 답습하려 들었다. 이제는 무의미하고 무용하다. 태정은 계속 걷는다.
“내가 미안할 게 뭐냐고?! 미안한 건 네가 미안한 거잖아! 네가 나한테 미안하다면서?!”
저런 반발이 당연하리라.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태정에게 그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던 녀석이다. 따라하라는 말을 대충 넘기기도 어려울 고토였다. 태정이 시키는 대로 말을 하기란 더더욱 힘들 것이다. ―고려조차 하고 있지 않으리라.
태정은, 계단에서 멀지 않은 방문에 금세 당도한다. 녀석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보라고, 용기가 있으면 마음대로 들어가라고 수준 이하의 협박을 입에 담기까지 한다.
찰칵.
열쇠를 꺼내 돌리고 끼익, 문을 연다. 달칵. 태정은 다시 문을 닫았다.
“너, 몽골 녀석 때문에 이러는 거지? 아니라고 해도 결국 그거잖아!! 원하는 게 뭐야. 잊었다는 웃긴 소리 하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하라고. 다시 빼내? 엉? 빼내면 되는 거냐고.”
고토의 말은 내부로 또렷이 침입해 들어온다. 이번에 녀석은 타협을 하자고 말을 한다. 저런 타협안조차 큰 맘 먹은 것이리라. 벽에 뒷머리를 기대고 서서 태정은 녀석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틀렸다. 고토. 틀렸어.
“내말 들려? 들리냐고?”
고토의 커다란 외침과 함께, 쿠당 쿵. 쿵….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이어진다.
저벅 저벅. 성급한 발소리가 문 바로 앞에서 멈춘다.
탕탕. 고토가 문을 세게 두드리지만 녀석은 문을 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는 것이리라. 문은 태정이 열어 ‘주어야’ 했다.
“이 자식, 이 내가 물어주잖아. 원하는 게 뭐냐고. 원래 넌 내가 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야! 내가 땅에 엎드리라면 네가 엎드리는 거고, 발가락을 핥으라면 네가 핥는 거라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해야 하는 거잖아. 안 그래? 엉?”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고토는. 그리고 동시에 태정은 깨달았다. 저것도 녀석의 믿음이었다는….
저것이, 태정에 대한 고토의 믿음이었다는 것을. 저 고토 녀석조차 자신을 믿었던 것이다. 하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태정은, 차례차례 밀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고작 저 따위의 역겨운 믿음인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끝까지 남겨 둔 것이, 고토의 믿음이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녀석도, 시작을 하면 그의 믿음을 당연히 내버려야 하리라. 새 출발은 모든 걸 버리는 것이니.
네가 알고 싶은 시작은 그런 게 될 거다. 그래도 할 수 있겠나? 고토?
“원하는 게 뭐냐고? 뭐냐고?!”
탕탕.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녀석은 묻는다. 탕탕. 여전히 시끄럽게 문을 두들겨 대면서. 대답은 필요 없었다.
“아아, 미안하다는 소리? 그래 좋아. 미안하다!! 미안하다고…어이 듣고 있냐?! 내가 말하잖아!!”
탕. 탕. 탕탕. 탕탕.
“…….”
고토는 또 틀리고 있었다. 녀석이 ‘시작’을 원한다면, 그래선 안 된다. 그리고 또한 앞으로, 그럴 수 없을 것이었다. 모든 건 제대로 해야 했다.
시작부터. 시작의 축하부터 말이다.
“…….”
“이잇… 내가 왜… 내가 왜… 우으… 조센징인 네 녀석 따위한테…….”
씨근대는 녀석의 숨결까지 모두 함께 들려온다.
여전히 고토 녀석이 얽매여 있는 건, 차이. 녀석은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녀석에게 태정은 동정을 보낸다. 조금의 이해도 더불어. 녀석에겐 중차대한 사안인 것이다. 그것은 녀석이 행동하고 사고하는 준거準據였으니.
그래. 그 사실을 오히려 명확히 깨닫고 있는 편이 좋다.
네가 시작을 알기 원한다면.
그때는 내가 너에게 차이를 일러주지.
“……왜 이래, 갑자기… 왜 이러냐고…”
그것 역시 지금 알려주는 것은 조건 위배.
태정은 천천히 알려줄 것이다.
“…….”
긴 침묵. 더 이상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고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인기척도 없다. 하지만 녀석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태정은 느낀다.
돌아가는 편이 나을 거다. 넌. 태정은 소리 없이 녀석에게 경고를 한다.
녀석은 시작에 대해 아주, 무지했다.
한마디의 설명조차 태정은 하지 않았고,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았으니.
“이러지 마… 이봐… 조…”
“…….”
그렇다. 이건 수작이다. 교활한 수작.
고토가 축하를 한다면, 태정의 수작에 의한 것이 될 것이다.
고토의 무지를 이용하여, 녀석의 호기심을, 녀석의 미련을, 혹은 오기를, 태정이 이끌어낸 것이다.
고토는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살리는 것이 스스로를 위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축하를 한다면…….
“미…….”
희미한 소리… 제대로 된 말이 아니다.
“……으……후…….”
힘겨운 심호흡.
“……미…안.”
후, 고토의 축하인가…?
기어이, 넌 너의 기회를 져버리는 건가? 고토.
태정은 희미하게 웃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고토의 메시지가 나직하게 벽을 타고 울려왔다.
“……미안해.”
제대로 된 축하의 메시지.
그리고…
축하를 한다면, 기꺼이 나의 시작을 너와 함께 하지. 고토.
끼이.
태정은 문을 열었다.
―이제, 시작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