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28)

Till the Fat Lady Sings #26

간혹, 태정은 냄새를 맡으려고 애를 쓸 때가 있었다. 못내 떨쳐내지 못해 안달했던 그 냄새를 다시 한 번 맡아보려고 말이다. 그 근거 없는 냄새에 호되게 당했던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코를 킁킁대어 보는 것은, …의지할 데가 없어서이다.

코의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냄새가 아예 나지 않는다거나, 또 쓸데없는 냄새를 예민하게 맡는 경우가 있다. 이건 호전이 아니라 악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라리 그것이 낫다. 완전히 못써버리는 게 돼버리는 편이, 낫다.

소규모 게임 시합 정도이리라 예상했지만, 클럽이 가까워질수록 새삼 과거의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냄새에 얽혔던.

기억을 더듬어 오모테산도의 클럽을 찾아 스쿠터를 몬다. 흐읍…. 태정은 냄새를 맡아보았다. 주의할 만한 어떤 냄새는 나지 않는다. 후우…. 그저 바람에 묻어오는, 거리를 오가는 인간들이 비슷하게 느낄 공기의 냄새이다.

코는 이제 아무 사실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 그런데도 또 왜 냄새 따위를 맡고 있는 건지, 태정은 스스로를 비웃는다.

부웅―태정은 스쿠터의 속력을 높였다.

녀석은 단지 전화에 메시지로 간단하게 시간을 보내왔을 뿐이다. 날짜. 시간. 숫자가 전부였다. 클럽은 찾는 것은 물론 어렵지 않았고, 태정은 시간 안에 스쿠터를 가까운 근처에 댈 수 있었다.

조금 남는 시간에 태정은 파킹 장소로부터 천천히 걸어 입구를 눈으로 찾는다. 저긴가…. 그런데 저 사람들은 뭘 하는 거지?

클럽 knock knock 입구, 로 다가가는데 입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조명 아래, 사람이 여럿 그 앞에 서서 웅성이고 있었다. 태정은 그중 하나에게 묻는다.

“무슨 일 있는 겁니까?”

“내기 복싱 시합이 있다고 해서 와봤는데….”

“내기… 시합 말입니까?”

“네, 재밌을 것 같지요? 색다르고.”

여자가 방긋 웃으며 이야기한다. 내기 시합. 그냥 시합도 아니고 고토는 내기 시합을 기획한 건가. 태정은 고개를 저었다. 녀석, 요코하마에서의 시합을 보고 모방해 일을 꾸민 것이리라. 태정은 몇몇의 사람들을 지나쳐 입구를 향한다.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면 다시 클럽으로 이어지는 문이 나온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태정을 제지한다.

“실례지만, 오늘은 더 이상 입장이 불가능하거든요.”

시작도 전에, 입장이 불가능하다…. 태정은 입구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며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입장을 위해서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거나, 혹은 이미 내부가 포화 상태라는 것이다.

“어떻게 오신 분입니까?”

태정이 그 앞에서 머뭇하자, 상대가 다시 묻는다. 어떻게라니…, 싸우러 왔다고 해야 하나. 아니다. 그 이전에, 태정이 ‘어떻게’ 온 건지 그 연고가 있지 않은가. 태정은 그의 ‘연고’를 댄다.

“고토는…, 고토는 안에 있습니까?”

고토의 이름을 대자, 상대 여성이 태정을 유심히 살핀다. 여성이 출입 통제를 담당하고 있지만, 사내 두엇이 두어 발짝 물러서서 이곳을 주시하고 있다. 여자는 아마도 ‘시합’이라는 특별한 이벤트를 감안했을 때, 부드러운 분위기를 위해 내세워진 듯했다. 그런데 그 여성이 태정을 꽤 오랫동안 살피고 있다. 태정이 의아한 눈으로 상대를 마주보자 여자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머나’ 하는 외침과 함께.

“당신, 우에노 공원에서….”

그러고 보니, 여자의 모습이 왠지 낯익다 싶었다. 태정도 ‘아’ 하고, 여자를 인식했다는 짧은 소리를 낸다. 굉장히 달라 보여서 한참 들여다보고야 알 수 있었다며 여자는 웃었다.

“우와, 진짜 기쁘네요. 이렇게 만나다니…, 아무튼, 좋아 보이는데요.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틀려질 수가 있는 거죠? 으음, 다시 접근하고 싶어지는걸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는 쾌활하고 유쾌했다. 비록 마지막 기억은 그리 좋은 게 아니었을지라도. 여자가 그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게 접근한 거. 항상 미안했어요. 그런데 고토 상의 부탁이라서…. 아, 그런데 고토 상과는 무슨 관계인 거죠? 아직도 모르겠는데… 오늘도….”

“어떤 관계도 아닙니다.”

태정은 싱겁게 웃는다. 여자와 고토의 관계를 태정이 모르듯, 여자에게도 고토와 태정의 관계는 그냥 그렇게 남겨두는 것이다. 시간 때문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고 하자, 그제야 여자는 태정을 위해 길을 내준다. 사실 고토와 태정은 ‘어떤’ 관계라고 정의할 수가 없는 것이니. 대답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내는 이미 더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고교 시절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내부. 무대나, 음악이나, 조명은 그때보다는 더 정교하게, 더 공을 들인 듯 그럴듯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양 코너에는 의자가 비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글러브까지 놓여 있다. 이미 로프를 두른, 사각의 무대를 둘러싸고, 흥미롭게 바라보는 인간들은, 얼굴과 눈에 기대를 품고 기다리고 있다―시합을. 그리고 파이터를. 그리 넓지 않은 클럽의 내부 공간이지만, 이렇게 사람들로 꽉 채운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아마추어들의 싸움판이 될 시합에, 이런 구경꾼들을 불러모으다니 태정은 고토의 수완이 놀랍기만 했다. 그런데… 녀석은? 태정은 그곳에 처음 오는 곳인 양 이리 저리 둘러보면서, 고토를 찾았다. 그리고 낯설지만은 않은 인물들이 몇몇 발견 해 낸다. 어디선가 봤던. 히로카즈.라고 했던가? 가루이자와에서 말을 좀 길게 나누었던 고토의 친구―하지만 고토는 그 옆에 없었다. 그리고 역시 그곳에서 적당히 태정에게 호의를 보였던 여자. 아까 입구에서도 그렇고, 오늘은 지나쳤던 인물들을 많이 보고 있었다. 모두 고토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왔군?”

그리고 고토. 태정이 시선을 준 곳과는 다른 곳에서 불쑥 나타난 녀석이 말을 건다. 어때? 라며 자신이 준비한 무대와, 그가 초대한 관객들을 흐뭇하게 둘러본다.

“이런 시합을 해야 할 필요가 굳이 있는 건가?”

필요성을 묻는 것은, 이유는 대강 짐작을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것만으로 태정은 고토에게 여전한 ‘성의’를 드러내 보였다. 변함없이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말이다. 둘의 위치를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필요 때문이라면 하지 않아.”

너무도 녀석다운 한마디. 그래서 태정은 줄곧 꺼림칙해 했던 사건―그건 사고였다―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봐 고토, 지난번에 내가 한 말은….”

“준비는 되어 있냐? 이제 곧 시작이야.”

그때부터 계속인 건가. 녀석은 일관된 무시로써 태정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고토는 사각의 무대로 걸어 나가 짝짝!!하고 손뼉을 쳤다. 산만한 움직임들이 멈추면서, 일제히 무대를 향해 그 많은 시선이 집중된다. 음악 소리까지 발밑에 깔리듯이 하여 작아진다.

“자,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이미 시간이 지났나? 뭐어, 조금 기다려도 기다리는 게 또 재미를 북돋운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겠지….”

고토는 편한 말투로 관객들을 향해 말을 건다. 상당수의 사람 앞에서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인간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일부러 키우지 않은 고토의 목소리지만, 모두에게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다들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는데 말야…. 이제 시작될 볼거리가, 기대 된다는 거겠지?”

몇몇이 쿡쿡, 키킥 웃음소리를 낸다. 볼거리. 저 무대에 태정이 서게 되면 저들에겐 광대쯤으로 비치게 될 것이다.

“장담하지만, 기대에 어긋나진 않게 재미있을 거야.”

태정은 고토의 그런 확신이 어디에서 기인되는지 의심스러웠다. 정말이지? 믿어도 되나? 등등 태정과 비슷한 의혹을 고토에게 던져 보이는 관객도 있지만, 장난기 어린 목소리는, 이미 재미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이제 선수들을 공개해야 하겠지…?”

고토는 태정을 보면서 자신에게―무대 위―로 오라고 한다. 상대는? 태정의 머리에 떠오르는 질문과 함께 고토가 저편 바bar쪽에 있는 누군가에게 손짓과 함께 말한다.

“그 녀석 이쪽으로 내보내.”

바의 뒤로 격리된 공간이 있고 그 문이 열린다. 오늘의 상대를 마치 비밀 병기 마냥 숨겨둔 건가? 태정은 고토의 행각에 괜스레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러나 고토와 비슷한 각도로 고개를 돌려, 열리는 문을 주시한다. 두엇의 사내 녀석들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그 녀석’이 나왔다.

태정은 그제야 ‘특별’의 의미를 깨달았다.

고토의 특별이란 의미를 태정은 과소평가 했다. 너무 단순하게 이해했던 것이다.

녀석의 말 그대로 상대는 특별했다.

무겐.

고토가 골랐다고 하는 오늘의 ‘상대’는 무겐이었다.

“무겐…….”

태정이 무겐을 부르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겐의 눈망울이 태정에게 고정되어 있다. 불안한 빛이 얼굴에 가득했지만, 무겐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원망이 섞인 그 눈초리가 태정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 때문이라는. 태정이 아니었다면, 고토가 녀석을 만날 일도, 무겐이 이곳에 올 일도 없었으리라.

차라리, 그런 것 따위에라도 의지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냄새 따위에라도 말이다. 그랬다면 고토의 이런 악질적인 장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 태정은 무겐을 다시 부른다.

“무겐, 네가 여기 있을….”

“오우 오우. 그러면 안 돼. 시합전의 파이터들이 서로 말을 하다니….”

고토가 무겐 쪽으로 다가가려는 태정을 팔을 잡아 멈춰 세운다. 자신과 함께 한쪽 코너로 태정을 은근슬쩍 몰아가면서, 그 대각의 코너에 준비된 의자에 무겐을 앉히도록 사람을 시킨다.

말을 시켜도 녀석이 말을 하진 않을 거라고, 고토는 웃으며 태정에게 허튼 수고를 하지 말라고 속삭인다. 무겐에겐 일생일대의 중요한 시합이 될 건데 주의를 흐트러뜨리면 곤란해, 라고 덧붙이며 태정에게서 몸을 돌린다. 다시 구경꾼을 향해 선 고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우면서 말을 이었다.

“게임이 재미있을 거라고 이미 말했는데…. 모두,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먼저 오늘의 주인공인 선수들을 소개할 건데 말이지…. 그게 바로 오늘의, 관람 포인트야. 이력들이 별나게 재밌는 녀석들이거든.”

녀석은 집게손가락 하나를 들어 세워 가만히 흔들며 그것에―또 그가 말하는 사실에―유의하란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이어, 그 손을 곧장 뻗어 무겐을 가리킨다. 불안한 듯 사방을 연신 둘러보던 무겐이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몸이 뻣뻣이 굳는다.

“저기 저쪽은… 몽골리안. 불법 체류자야. 그런 주제에 복싱을 하고 있지. 그게 뭘 의미하겠나, 이 일본 사회에는 위험한 인물이란 뜻이지 않겠어…. 어쨌거나, 저 몽골 녀석은 지면, 운이 나쁘면 형을 살거나, 좋아봤자 강제출국이지. …법학도로서, 저런 녀석들은 이민국에 바로 신고해야겠지만, 관용이란 걸 베풀어도 나쁠 건 없겠지. 저 녀석도 이 먼 일본까지 기어 들어오느라 얼마나 애썼겠어…. 그러니, 기회는 줘봐야 하겠지?”

그러한 이유로 무겐이 싸워야 하는 것임을, 태정은 비로소 알게 된다. 고토 녀석, 무겐과 마주쳤을 때,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녀석의 외국인 차별과 혐오가 태정 같은 조센징만으로 국한될 리는 만무했다. 그 사실을 지금에 와서 깨달아봤자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이 녀석.”

고토는 가까운 곳에 서 있는 태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소개한다. 일견 둘의 사이가 친근해 보이기까지 한다.

“전과범인 조센징. 폭력으로 형을 살았지. 어때, 다들. 점점 재밌어지지 않나? 하하. 조센징은, 제 누나를 걸고 싸우는 거야. 이 녀석한테 누나가 전부거든. 지면 그의 누나가 어떻게 될지는 모두의 상상에 맡겨두지.”

태정이 동의하지 않은 사실을, 마치 합의된 사실인 양 밝히는 녀석. 모두의 상상에 맡긴다는 건, 태정의 상상에 맡기겠다는 말. 태정의 누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그녀에게 어떤 짓도 가능하다는 녀석의 위협인 것이다.

태정은 무겐을 바라본다. 이미 태정을 무겐은 응시하고 있었다. 무겐의 얼굴은 어둡고 몸이 늘어진 것처럼 어깨가 추욱 쳐져 있다. 그렇게 코너의 의자에 앉아서, 무겐은 태정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보일 듯 말 듯 미미한 움직임. 저건…, 포기이다. 반발과, 저항의 포기―시합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둘 다 필사적이어야 할 이유를 지니고 있으니….”

고토의 목소리가 시선을 주고받는 태정과 무겐사이를 가로질렀다.

어때 볼 만한 게임이 될 것 같나―?! 라고, 마지막을 고토는 목소리를 크게 키워 소리쳤다. 휘익 하는 커다란 휘파람 소리부터 빨리 시작해, 괜찮겠군 등등, 녀석에게 호응하는 다양한 소리들에 고토가 지극히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시합의 임박이다.

* * *

무겐은 「미안해 조」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처음 주먹을 뻗었다. 미안할 이유가 녀석에겐 전혀 없는 것을.

퍼억―.

온 힘이 실린 듯한 주먹, 이 태정의 얼굴을 날렸다.

무겐의 리드 블로우lead blow: 권투에서 첫 블로를 가하여 상대를 리드하는 것. 또는 다음 펀치를 유도하는 타격로 태정은 휘청한다.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는 의미를. 이렇게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무겐은 이해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태정도 필사적이어야 했다. 누나. 태정은 고토가 들먹였던, 그가 투지를 불태워야 하만 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하지만, 싸움에의 의지는 머리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태정은 주먹을 뻗을 수가 없다.

휘익―빠악―.

입술을 깨물며 덤비는 무겐의 주먹이 연타를 날린다. 한 번은 피하지만, 나머지는 피할 수 없었다. 원. 투. 일 뿐인 주먹에 태정은 간단히 당한다.

오우… 와… 갤러리의 함성. 잘한다. 때려 눕혀봐. 몽골 녀석 잘하는데?! 어이 조센징 잘 좀 해봐―마악 시작된 게임은 벌써 양 갈래로 나눠진다.

스모 선수를 꿈꾼다는 무겐이라고 해서 복싱을 게을리한 건 아니다. 하마다 관장 밑에서 기본기를 착실히 닦은 녀석이라 두셋의 펀치만으로도 충분한 타격을 받는다. 태정은 뒤늦게 방어를 생각한다. 링 위의 기본인 가드를 잊고 있었다.

“조 왜 이렇게 된 거지?”

태정이 몸을 빼면서 균형을 다시 찾자, 무겐이 다가섰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 시합을 받아들여 글러브를 꼈음에도, 태정을 치면서도 겁을 버리지 못한 목소리다. 그래서 무겐의 주먹이 더 세었던 것일까. 본능적인 힘은 겁을 먹을 때 한층 더 발휘될 수 있다.

“미안해, 무겐.”

그런 말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건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그저 체육관을 대신 가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런 시합이 될 줄이야. 하지만, 이게 단순히 고토 때문인 걸까…. 아니다. 녀석 때문만은. 아니어서 무겐에게 태정은 미안할 뿐인 것이다.

툭.툭. 한 발짝 다시 물러난 태정이 고작 해보는 건 가벼운 잽 정도. 주먹으로 탐색을 해보는 시늉을 해본다. 잽을 받는 무겐의 입이 달싹거렸다. 내부의 소음에 무어라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녀석의 모국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을 뿐. 하지만, 그 끝자락의 말만은 선명했다. 마마. 줄라.

그리고…, 곧장 이어 연발되는 무겐의 쭉뻗는 팔을 태정은 그대로 받았다. 얼굴에 어깨에, 그리고 바디 블로우.

퍽, 파악, 푸욱. 퍽.

가깝게 파고들어 난사하는 무겐의 어깨를 끌어당긴 홀딩 상태로 태정은 무겐의 주먹을 무력화시킨다.

“떨어져.”

레프리를 자청한 고토에 의해 브레이크가 선언된다. 「제대로 못 해?」 고토는, 무겐에게서 태정을 떼어내면서, 그 사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먹을 피하기 위한 사이드 스텝마저 잊어버린 듯했다. 링에 올라가는 순간 선수는 머리를 비워야 한다. 상대 선수의 약점 그리고 특기, 스타일을 연구했다 하더라도, 링에서는 모두 잊는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싸우는 것이니. 갑자기 하마다 관장의 복싱 강의가 머리에 떠돈다. …이게 아니다. 이게 아니잖아. 잡념이 머리에 들끓는다.

두 팔을 붙여 방어하면서 무겐을 본다. 빙빙. 빙빙. 괜한 풋워크로 무대를 돌면서 시간을 끌어 본다.

힘내라 조센징. 뭐하는 거야. 시끄러운 음악과 장내의 소란 속에서도 접전을 부추기는 소리가 크게 날라온다. 케이오 시켜봐. 한방 날려봐.

싸워. 좀 더 싸워봐. 싸우라고!!

모두가 파이트를 외친다.

순간의 재미를 위해, 잠시면 사라질 흥분을 위해. 그렇게 보고 싶은 건가? 흘리는 피를?

태정은 많이 싸워 왔다. 하지만 상대는 언제나 ‘그래야 하는’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의미를 모두 상실한다. 그때도 정말 ‘그래야 했던’ 인간들이었나.

퍼억―! 퍽! 스트레이트. 그리고 스윙.

파이트를 원하는 인간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기회를 엿보던 무겐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예방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 번씩 서로를 치지 않았는가. 네가 엄마와 줄라를 불렀던 밤 말이다. 그렇게 하면 싸우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왜 우린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거지…, 무겐?

“싸워야 해. 조. 싸워야… 우린….”

가드 없이 주먹을 받는 태정에게 무겐이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어지는 펀치 사이, 잠깐의 공백이었을 뿐이다. 이를 악다물고 무겐은 다시 주먹을 뻗는다. 그것을 태정은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펀치를 피한다.

“퍼억.”

처음으로 터진, 태정의 클린 히트에 무겐이 비틀거린다.

싸워야 했다. 저렇게 무겐처럼 이를 악다물고 싸워야 했다. 태정은, 그렇게 싸웠었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는, 무겐. 녀석을 보면서 태정은 깨닫는다. 무겐의 모습은, 바로 자신이었다.

궁지에 몰린 인간. 하지만 그 궁지를 정당한 이유로, 정당함의 근거로 삼고 있다.

싸워야 한다는.

태정은 무겐과 싸워야 하는 이유를 떠올린다. 누나.

아니, 누나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건, 고토가 만들어낸 태정의 이유일 뿐.

애초에 태정이 관장을 찾았던 건, 다시 링 위에 오른 건. 다시 싸웠던 이유는….

누나…, 누나가 옳았어. 누나의 논리가 옳다고.

‘아예’의 논리. 그것 때문에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위험하진 않다. 그 논리는 너무 위험해 태정아…, 태희가 말했다.

아냐 누나 이게 오히려 ‘안전’한 거야.

아예 엉망진창이 돼버리는 편이, 나아.

아예 완전히 끝내 버리는 게 나을 거라고.

아예 박살내버리는 게 좋아.

아예…….

태정은, 지금도 그 논리를 따른다.

단지, 논리만이 있을 뿐이다.

파악 퍽, 투욱 탁. 슈욱―퍼억!

주먹의 러시. 태정은, 거세게 주먹을 휘두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무겐이 휘청이며 뒤로 밀린다. 무겐도 주먹을 태정에게 내어 보지만, 그 주먹을 맞아도 태정은 느끼지 못했다. 감각이 없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 무겐이 태정을 부른다. 「조 나 좀 봐줘」 그것은 장내의 소란과 마찬가지의 소음처럼 떠돈다. 무겐이 태정의 팔꿈치를 잡아끌어 안는다. 홀딩. 팔에 엉긴 그것이 귀찮다. 파악―태정은 거칠게 그것을 뿌리치면서 팔의 자유를 되찾는다.

쉬익―빡―! 빡―! 빠악―!

태정은 무겐을 끝의 끝으로 몰고 간다. 장외…. 하지만 퍼억―! 태정은 상대를 코너로 몰아세운다―무대 주위를 비잉 둘러싼 인간들에게로 무겐을 밀어 넣으면서도 태정은 주먹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어머나. 어어. 어어.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없어지자 놀라 사람들이 아우성을 친다.

“퍼억―!”

“!! !! !!”

이것이 ‘아예’의 의미다.

털썩―.

그들을 피한 사람들 사이로―그 좁은 틈으로―무겐이 쓰러진다.

후욱. 후우. 후…. 태정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둘을 둘러싼 인간들이 숨을 죽이고 그들의 발치에 자빠져 있는 무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코앞의 태정을 바라본다. 태정은 무겐을 내려다보면서 손에서 글러브를 뺀다. 오른쪽. 왼쪽. 무겐은 일어나지 않는다.

끝이다. 돌아가야지. 태정은 벗어 놓은 상의를 찾아 들어 걸친다. 태정의 움직임에 따라 밀집된 사람들 사이로 길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 스륵. 사람들이 갈라지고 자동으로 길이 열리며, 그 길로 고토가 다가 왔다.

“이 녀석, 불쌍하군. 믿었을 텐데. 널.”

고토가, 무겐을 애석해했다. 얼굴 만면에 즐거움을 담고서.

“상관없었어. 녀석이 몽골로 돌아가거나 말거나. 형을 살아도 어차피 상관없는 일…. 보내 버려.”

…무겐은 어차피, 이런 곳에서 못 살 것이다. 태정 같은 인간이 있는. 고토 같은 인간이 있는… 이곳.

“오, 굉장히 매정한데. 네 누나는 안전하다 이건가?”

피식, 태정은 웃었다. ‘누나를 위해서’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것을 녀석은 모를 것이다. 무겐이나 누나나, ‘아예’라는 말 앞에선 태정에게 똑같았다.

누나라는 볼모가 쓸 만하다고 생각했나? 무겐의 불법 체류 사실을 알고 기뻐 뛰었겠군…? 그 다음은 또 뭘 찾아낼 건가? 무얼 위해 그렇게 시뻘건 눈을 하고 덤벼드는 건가. 무엇을 그렇게 침 흘리며 쫓아다니는 건가… 푸후… 태정은 녀석이 우습다. 후후… 우스워 웃음이 치민다.

“고토…. 넌 아직도 충분하지 않겠지. 정말 대단해….”

푸하하.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하하. 태정은 크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고토가 슬쩍 얼굴을 찌푸린 채 태정을 살피고, 사람들도 영문 모를 표정으로 태정을 주시한다. 뭐야. 왜 저래? 뭐가 웃긴가? 의문에 찬 술렁임.

쿠쿡…. 쿡. 태정은 겨우 웃음을 참으면서, 고토를 응시했다.

“푸…. 대단해, 고토.”

“뭐가.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너.”

언제나의 태연자약함을 잃고, 고토는 당혹스러워 했다. 후후…. 다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태정은 어찌 할 수 없다. 웃지 마. 태정의 웃음이 적잖이 거슬리는 듯 고토가 목소리를 깔며 주의를 준다. 넌 이것이 웃는 것으로 보이겠지. 내가 웃고 있으니. 크큭. 웃고 싶지 않은데. 웃음이 자꾸 나온다. 하지만… 그래 웃는다. 녀석이 그렇게 착각하는 편이 좋으니까 말이다.

“넌 결국, 네 뜻을 이루는구나. 이렇게 살고 싶지 않도록 날 만들었어.”

짝짝. 고토에게 태정은 짧은 박수를 보냈다.

살고 싶지 않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던가? 고토? 넌, 언젠가 그렇게 말했었다.

아. 예. 모든 것을 날려버리자고 마음먹었지 않은가. 태정은 마지막 블로우로 최후의 것을 날려 버린다.

“후후… 그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태정은 웃으면서 말했다. 녀석이 숨 쉬는걸. 녀석이 무사한걸. 녀석이 살아 있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틀렸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이제, 말했다.

“아. 예. 널, 죽여버리는 편이 훨씬 나았어. 고토.”

태정은 몸을 살짝 굽혀 고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움직인다. 천천히. 태정은 고토의 어깨를 스칠 듯 지나쳐 입구로 향했다.

“으으….”

싸하게 조용해진 내부의 고요를 신음소리가 깬다. 소리는 꽤나 고통스럽게 들린다. 무겐. 태정은 잠시 걸음을 멈춰, 몸을 일으키는 무겐을 쳐다보았다. 녀석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일어나는 무겐을 멍하게 보기만 한다.

주룩. 투둑.

땅바닥에 떨어진 무엇인가가 태정의 정신을 설핏 되돌린다. 툭. 바닥에 떨어진 것을 붉은 점. …피다. 태정은 코 아래를 만져 보았다. 손에 피가 배어 나온다. 코피라니…. 시합 중에 터져야 할 것이 지금 터져 나온다. 태정은 대수롭지 않게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겨 모든 것을 뒤로했다.

* * *

어두운 방에 누워 태정은 피를 마셨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꾸역꾸역 코에서 흘러나왔다. 선홍색의 그건 끈적하지 않다. 마치 물처럼 흘렀다. 그저 좀 흐르다가 그치겠거니… 했던 것이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피는, 마치 ‘그것’ 대신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녀석 앞에서 웃을 때 나올 것 같았다. 어깨를 들먹이며 웃으면서도 ‘그것’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나오지는 않았다. 기어이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녀석에게 말해주었는데도…. 하지만 눈물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후. 왜 울고 싶었던 것일까. 한심하다. 이렇게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한쪽에서 시작되었던 것은 그것만으로 모자랐는지, 양쪽 코를 모두 점해 피를 내보냈다.

티슈를 꽉꽉 뭉쳐 틀어막아 보았건만 시뻘겋게 젖는 것이 수분을 채 못 넘겼다. 그래서 누워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꿀꺽 꿀꺽 코에서 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피를 끊임없이 들이키자니 토할 것만 같았다.

스륵. 다다미에 누워 자신의 피를 마시다가 태정은 다시 일어나 벽에 기댔다. 눈을 감으면 잘 수 있을 줄 알았다. 시합을 잊고 무겐을 잊고 고토를 잊고…. 모두 잊고 그저 자고 싶은데… 잠을 자야 하는데….

툭. 새로운 휴지로 코를 막아 놓은 게 언제인데, 그새 흠뻑 젖었다. 툭. 비틀어 막은 그 끄트머리까지 피가 배어 나와 다시 피가 떨어지고 있다. 태정은 붉게 젖은 것을 빼내지만, 다른 것을 코에 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흐르는 것에 지쳐 버린 것이다. 주룩. 여전히 흐르는 그것에 급히 머리를 뒤로 젖히지만, 그새 흘러내린 것이 가슴께에 떨어진다. 제길, 태정은 다시 코를 손으로 받친다. 그런 상태로 눈을 감고 조금 쉰다.

뭉클…, 무언가가 묵직하게 손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아니다. 뭐지. 태정은 피를 받던 손을 떼어내어 가까이 눈앞에 가져와 본다. 손안에는 덩어리가 있었다. 핏덩어리. 어둠 속에서도 그것 그저 줄줄 물처럼 흐르던 피와 색이 달랐다. 끈끈하게 뭉친 부정형의 그것은 검다. 새카맣게 검다.

회복 불능이다. 코가 완전히 망가지려나. 삭은 코. 불현듯, 삭은코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골병이 들어 코피가 자주 나는 코 말이다. 코피가 흐르면 흘리면 되는 것을. 흥. 태정은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조소하며 개수대로 가서 손을 씻어냈다. 코도 같이 씻어낸다. 하지만 씻어도 씻어도 깨끗해지지는 않는다. 계속 흘러내리는 피. 툭. 툭. 뚜둑. 우두커니 떨어지는 핏방울을 응시하고 있자니 꾸벅, 눈이 감기려 했다.

누워 있을 때는 도무지 잘 수 없었는데 서 있으려니 잠이 오려고 한다. 갑자기 일어서서 어지러운 건가. 아니면 피를 많이 흘려서인가. 설마 오늘의 일이 고되었다는 말인가…? 우습지만 코웃음을 낼 수도 없다.

태정은 비강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휴지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어 입고 있는 셔츠를 벗어 손에 말아 코에 대었다. 그리고 다시 눕는다. 코로 흘러내려야 할 것이 역류하여 목구멍으로 넘어 간다. 태정은 모로 누워 보았다. 셔츠를 뭉쳐 얼굴 아래를 괸다.

주륵… 주륵… 피가 흘러내리다가 예의 아까의 검은 핏덩어리가 뭉글뭉글 코에서 간헐적으로 기어 내려 왔다.

그냥 내버려둔다. 아까울 게 없는 피였다.

꾸벅. 눈이 감겨온다.

뺨에 괸 셔츠가 축축이 젖어들고 있었다.

꾸벅. 꾸벅. 자꾸 눈이 감겼다.

짙은 피의 향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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