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ll the Fat Lady Sings #23
탁탁. 타닥타닥. 탁탁. 타닥타닥. 탁탁. 타닥타닥 탁탁.
오랜만의 로드워크다. 꽤 늦은 저녁시간. 태정으로서는 복싱에의 연습이나 훈련에 많은 시간을 배분할 수 없으므로 없는 여유를 쪼개 쓸 수밖에는 없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훈련생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비슷비슷한 연습 스케줄과 플랜을 따르는데 반해 태정은 단독적인 과정을 밟는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발소리가 뒤섞여 나는 것은 무겐이 태정의 시간에 일부러 맞추었기 때문이다. 발소리가 규칙적인 울림이 태정에겐 왠지 조화롭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탁탁. 투닥. 탁탁. 탁탁. 다닥… 타다닥.
하지만 규칙적인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점점 뒤로 처진다. 옆에서 나란했던 소리는 물론이고, 그리고 무겐의 모습도 말이다. 태정은 페이스를 유지하며 흘깃 뒤를 돌아본다. 그것은 따라오라는 재촉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녀석은 자신을 봤다는 것에 안심한 것인지, 아예 발을 멈춰 버렸다.
“조오∼, 조금만 쉬어.”
숨이 많이 차는지 상체를 구부리고 가쁘게 숨을 내쉬는 무겐. 태정의 뜀박질은 방향이 퍼뜩 반대로 바뀐다. 괜찮냐며 무겐에게 다가가자, 녀석이 장난스레 가슴을 움켜쥐며 아예 바닥에 쓰러진다 그런 시늉으로, 무겐은 미안함과 계면쩍음을 숨긴다.
“저기 조, 저번엔 왜 그랬어?”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무겐은 헐떡이던 숨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 태정을―녀석과 나란히 땅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있다―쳐다보며 묻는다. 저번? 태정이 의문을 입 밖에 채 내기도 전에 무겐이 말을 잇는다.
“온다고 하곤 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고. 연락도 안 되고.”
아…, 누나를 만난 그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누나를 만나고 곧 돌아오리라 생각을 해 체육관을 갈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누나를 보러 갔었어. 미안해. 무겐.”
이번에 계면쩍고 미안한 건 태정이다. 태정은 한 손을 세워 이마에 대고 무겐에게 사과한다.
“누나? 누나가 있어?”
“응. 오랫동안 못 만났거든. 그래서….”
무겐이 그랬냐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누나만 만난 건 아니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자 무겐에게 드는 미안한 느낌이 이상하리만치 강해진다. 누나를 보고, 우연히―우연만은 아니었지만―그 녀석을 만났다. 고토를.
옷을 차려 입던 고토를 잡아가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그런 건 처음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전적으로 고토가 주도하는 것이다. 태정에게 요구라는 건 있지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말을 따라, 녀석이 남았다. …그래봤자, 고작 십여 분을 더 연장시킨 것에 불과했지만. 녀석이 얼굴은 그래도 내밀어야 한다면서, 매우 스피디하게 섹스를 이끌었던 것이다.
결국…, 서서, 했다. 녀석이 셔츠를 벗지도, 그걸 또 절대 구겨뜨리려 하지도 않았기에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뒤에서 셔츠 아래로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고 태정이 고토의 내부로 들어가자, 고토가 허리를 비틀었다. 직립한 자세 때문에 불편했던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테이블을 짚고 있던 녀석의 손이 하나가 된 것이다. 다른 한 손은 이미 흥분한 자신을 스스로 빼고 있었다. 거칠게 마찰시키는 손의 움직임에 녀석의 허리가 진동했다. 그리고 그것에 태정은 전에 없이 빠르게 도달했다.
―그것이 겨우 10분 남짓의 시간인 것이다.
“나도, 동생 있는데….”
느닷없이 귀를 울리는 무겐의 목소리에 태정은 움찔한다. 젠장 무슨 생각을…. 태정은 어두운 밤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무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컴컴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무겐의 눈이 흐려져 있다. 아아, 이런 객지, 머나먼 타국까지 와서 가족을 그리는 녀석을 생각지 못했다. 무겐이 녀석에 비하면 태정이 그의 누나를 볼 수 있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런 녀석을 두고, 누나 이야기를…. 아니 고토와의 어떤 짓거리를 떠올리고 있었던 거다.
“줄라, 보고 싶다. 엄마도, 보고 싶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중얼거리는 무겐은 태정이 아니라 마치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동생 이름이 줄라?”
무겐이 고개를 끄덕인다. 녀석이 동생이 이름을 입에 담을 때, 태정이 태희의 이름을 부를 때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무겐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었다. 엄마가 가장 보고 싶다는 녀석은 마냥 어린애같이 보였다. 덩치는 산만 한. 뭐어, 태정 자신도 사실 녀석과 비슷하지 않은가. 누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쑥 뺀 것이나, 지금의 무겐이나.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거야 무겐.”
태정은 위로를 해 본다. 하지만 무겐이 고개를 저으면서 언젠가가 아니라고 했다.
“언젠가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꼭 볼 거야.”
믿음. 또 확신. 태정은 자신 속에선 그저 재가 되버린 듯한 그것이 무겐에게서 반짝거리고 있음을 목격한다.
“그런데, 조는 바라는 게 뭐야?”
바라는 거라…, 갑작스런 질문에 태정은 당황한다. 생각나는 게 없는 것이다. 자신은, 뭘 바라고 있는 건가? 태정이 머뭇거린다.
“정말 없는 거야?”
무겐은 확인하듯 질문한다. ‘정말’이라니. 그렇다는 건 태정에게 그런 것이 없으리라는 가정을 무겐이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조한테 왜 복싱을 하냐고 물었잖아. 그때도 조는 기다리는 것 같았어.”
“기다려…?”
“응.”
“뭘?”
“노래. 뚱뚱한 여자가 부르는, 노래.”
무겐은 영, 영문 모를 말을 한다. 무슨 이야기냐고 태정이 묻자, 무겐은 빙그레 웃었다.
“조는, 그 여자가 노랠 부르기만을 이렇게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는 사람 같아.”
무겐은, ‘학수고대’라는 말을 풀어 자신이 직접 동작으로 설명해 보이면서 말했다―‘이렇게’라는 말만큼 목을 길게 뺐다. 그리고 무겐은 다시 목을 집어넣고는, 탁탁 태정의 등을 두드렸다.
“그 여자가 노랠 부르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야. 조가 바라는 것도.”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태정을 보면서 무겐은 벌떡 일어선다. 웃으면서, 빨리 일어나지 않고 뭐하냐고, 천연덕스레 면박까지 주는 게 아닌가. 먼저 주저앉은 게 누구인데, 언제까지 앉아 있을 거냐고 한다. 갑자기 힘이 솟아오른 모양이다. 타다닥. 무겐은 태정을 기다리지도 않고 앞으로 뛰쳐나간다. 그 모습을 보고 태정은, 고개를 저으며 쓰윽 일어난다.
뚱뚱한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왜 하필 뚱뚱한 여인인 건지…. 그 여인은 또 왜 노래를 부르는 걸까. 그리고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 그리고 무겐은 왜 태정이 그 노래를 기대한다고 하는가, 머릿속에선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졌지만, 무겐의 답을 들을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달려가는 무겐의 녀석의 등에 대고 태정이 묻고 싶은 것은 이것.
「그 노래는 들을 수 있는 건가?」
그것은 태정의 빈약한, 박탈된 믿음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 새 불신이라는 건 태정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그런 건 잊어버리자. 투타타타다다닥. 무겐의 뒤를 따라 잡으면서 태정은 바람이 그런 모든 것을―그 자신마저―날려버리길 희망하며 세차고 빠르게 땅을 찼다.
* * *
몸은 지쳐 쓰러질 것 같아도, 이렇게 기분을 고조시키는 것도 달리 없을 것이다. 달리기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로드워크를 끝내고, 체육관을 목전에 둔 태정은 무겐과 함께 속력을 늦추고 몸을 풀면서 거의 걷다시피 한다. 나란하게 걷는 무겐과 태정, 두 사람 사이에, 누군가가 비집고 지나가면서 ‘실례합니다’라고 양해를 구한다. 둘 사이의 빈 공간을 지나는 것이라 태정은 개의치 않는데, 무겐이 서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왜 그래? 태정이 묻자, 무겐은 태정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팔을 치라고 했다.
“무겐 팔을, 때리라고? 내가?”
“응 세 번 세게 쳐.”
차암, 이 녀석에겐 또 무슨 난데없는 소린가. 뚱뚱한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어쩐다고 하더니만…. 왠지 무겐이 녀석에게 할 군소리가 속으로 쌓여가는 것 같다. 같지만, 그것이 결코 기분 나빠서가 아니다. 태정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녀석을 때려달라는 소원을 들어주었다.
“팍. 팍. 퍽.”
“으악…. 그렇다고 정말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떻게 해……. 조, 네 주먹, 진짜 아프단 말야.”
무겐은 팔을 들어, 맞은 부위에 대고 입김까지 호호 분다. 녀석, 엄살은…. 그런데 녀석이 태정더러 각오하라고 한다. ‘왜?’라는 의문이 떠오르기 무섭게 무겐이 녀석이 태정의 팔에 석 대 똑같이 되돌려주고 있었다.
“푹. 팍. 퍽.”
이거 이거, 녀석을 때렸을 때보다 훨씬 더 큰소리가 나는 듯하다.
“어, 뭐야. 이건 무겐….”
얼떨결에 맞은 태정에게서 볼멘소리가 나간다. 역시 맞는 건 억울한 것이다.
“에 그게, 아까 사람이 지나갔잖아. 우리 둘 사이로. 원래 두 사람이 같이 걷는데 그 사이에 뭔가가 껴서 둘이 더 떨어지게 되잖아…? 그럼 언젠가 싸우게 된다고. 그래서 으음….”
녀석은 눈을 데굴, 굴렸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예방?”
“그래!! 예방을 하는 거야. 세게 때릴수록 효과가 좋거든.”
녀석은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마치 그것이 매우 중대한 사명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말을 했다. 서로 때리는 것으로 둘의 싸움을 예방하다니…. 그러다 싸움 나지 않을까, 태정은 어처구니없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효과가 정말 존재하리라 여기고 싶어진다. 태정은 무겐을 따라 점점 자신이 미신적이 되어가는 듯 느껴졌다. 뭐어, 미신도 일종의 믿음이다. 잘못된 믿음이라 해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보잘것없고 무의미하고, 쓸데없이 보이는 것에 무겐은 매우 충성스럽게 그의 믿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전에 녀석이, 떨어뜨린 열쇠를 집어 올리기 전에 꾹꾹 밟았던 것을 태정은 기억해 낸다. 태정이 집어주려고 하자 무겐은 건들지 말라고 소리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번을 밟고 나서 열쇠를 주워든 녀석은 이렇게 해야 앞으로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며 오늘과 비슷한 믿음을 보였던 것이다. 무어랄까 원시적인지 토속적인 믿음인지 주술인 건지…. 태정은 아까 전 무겐이 말한 여자의 노래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일어, 무겐, 하고 녀석을 부른다.
“무겐이라고?”
무겐에 하려던 질문은 사라진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모르게 태정은 머리가 텅 비는 듯하다.
“그리고 넌, 내일의 조란 말이지? 푸하하.”
태정의 앞에 떠억 나타나 폭소를 하는 녀석은 고토. 체육관 입구에 서 있던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무겐은 갑자기 등장한 고토 녀석에, 태정을 당혹스럽게 바라보고, 태정은 고토를 그와 비슷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 녀석이 왜 여기까지…?
“네가 왜 여기에?”
“올 만하니까 왔지. 여기 관장이 차까지 대접해주던데? 아, 이것도 주고 말야.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고토는, 하나 더 받았으니 네 건 돌려주지, 라며 태정에게 네모난 종잇조각을 손가락에 끼워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뽑아든 태정은 관장의 명함임을 알아본다. 분명 지갑 속에 있었을 이 명함이 왜, 언제 이 녀석의 손에 들어갔던 것일까.
“저어기, 조. 누구?”
불안과 호기심이 반반씩 그 눈을 메우고 있는 무겐이 묻는다. 녀석이 무겐을 돌아본다.
“아아… 방금 무겐이라고 했지?”
무겐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뭇 달라진 태도로 고토가 빙그레 웃으면서 녀석을 살폈다. 무겐은 자신의 링네임이 멋지지 않느냐고 순진하게 묻는다. 고토에게. 순간 고토의 웃음에서 비린내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무겐 먼저 들어가. 나 때문에 많이 늦었잖아.”
넌지시 태정은 무겐에게 이른다. 무겐과 저 고토 녀석과의 대면이 더 이상 길어지게 놔둘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괜찮은데, 라며 무겐은 기다려도 아무 상관없음을 밝히지만, 태정을 보곤 슬며시 그럼, 들어가 보겠다며 말을 바꾸었다. 흘낏 흘낏 돌아보며 옮기는 무겐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굳어진 태정의 얼굴에 무언가 심상찮다는 것을 눈치 챈 걸음이다.
“저 녀석, 일본인이 아니군?”
무겐이 들어가자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을 태정을 보며 고토가 묻는다―답할 필요가 없으므로 태정은 침묵을 지킨다. 흥미로운 눈길을 보낸 건 역시 고토다운 호기심이었으리라. 의사소통에는 문제없는 무겐이었지만, 어색한 외국인의 어조는 금세 고토에게 간파 당해 있는 것이다.
“냄새가 달라. 저런 녀석들은.”
여전히 서슴없다. 저런 인종 차별적인 발언 말이다. 얼굴을 찌푸리며 녀석은 악취를 쫓는 것처럼, 자신의 코 근처에 손바람을 일으킨다. 냄새. 냄새를 저 고토가 말하다니. 태정은 고토가 풍겼던 냄새를 기억한다. 녀석도 달랐다. 그것을 알까 저 녀석은. 자신이 그 피비린내를 태정의 코를, 마구 찔러대는 것처럼 풍겼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정말 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이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아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코에 냄새가 나지 않을 때가 가끔 있지 않은가. 이상한 일이었다. 전혀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무언가 느끼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너무나도 역설적인 지금의 상황이 불가해하기만 하다.
“저 녀석은 또 어디서 온 거야? 보아하니, 니 동족은 아닌 것 같고….”
“무겐은 내버려둬. 이미 충분하잖아.”
“이미 충분해? 뭐가 충분하다는 거냐 너, 지금?”
넌, 충분하지 않은가…? 태정은 속으로 되묻지만, 충분하다는 의미를 고토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고토가 만족할 때까지 과거의 보상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것을 이젠 충분하다고 태정이 선을 그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럴 의도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충분하다니…. 이건, 지금까지 자신이 인내로써 녀석을 대한 것 같은 말이지 않은가.
“보상을 해야 할 인간은 너고, 용서를 구해야 할 인간도 너야. 넌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충분해? 그런 말을 하면 해도 내가 해.”
“알고 있어.”
태정이 대답하자, ‘그리고, 충분하려면 아직도 멀었어’라고 고토는 일부러 태정의 귀에 대고 말한다. 그리고 또 묻는다. 이제 정말 알겠느냐고.
“그래. 잘 알았어.”
아주 잘 알고 있다. 태정은 시선을 깔면서 중얼거렸다.
“좋아.”
두 번이나 확인한 고토는 그럭저럭 됐다는 듯, 퉁명스레 한마디를 던졌다. 카악 퉤엣, 괜스레 침까지 바닥에 내뱉으면서.
* * *
고토 녀석이 체육관까지 온 것에는 그 이유가 있었다.
고토 나름대로의…. 녀석이 몰고 온 차를 타라고 하여 태정은 도어를 열고 시트에 앉았다. 앉자마자 무언가 갑자기 시야를 가리는가 하더니 타악―, 안면을 세차게 가격해 왔다. 그리고 털썩, 하고 허벅지 위로 떨어진다.
태정은 얼얼한 얼굴을 문지르면서 고토를 보았다―그것은 고토 쪽에서 날아온 것이므로. 이 녀석이 또 광포하게 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기사 아주 재밌던데…?”
고토는 태정을 보지도 않고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한마디를 하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기사? 태정은 그제야 다리 위를 내려다보았다. 고토가 태정에게 던진 물건 자체에 녀석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안면을 강타하고 떨어져 허벅지 위에 놓인 그것은 잡지―「호르몬 인간」이었다.
“너 뒤로는 그딴 짓하고 다니냐?”
저건, 버렸는데.
희상에게서 받은 그때의 잡지는 분명히 버린 것이다. 일부러 버렸다. 집에 들고 오긴 했지만, 희상과 싸웠고 또, 그곳에 씌어 있는 희상의 신뢰가 버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버리진 않는다. 정작 태정은 소중하게 보관해 두고 싶었던 것을. ―친구가 쓴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런 일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 작은 방구석에 잡지 하나 둘 곳이 없어서 버렸다.
고토 녀석이 볼지도 모르는데, 라는 소심하고 미미한 염려. 그것이 희상의 기사를 폐품 처리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시 태정에게로 돌아와 있다. 그것도 고토가 돌려주는 것이다.
“이걸 네가 어떻게…?”
“그거 조센징들이 좋아하던데. 그쪽에서 꽤 반향을 일으키는 잡지잖아? 그게 신경을 거슬리더라고. 이번 호는 특히.”
녀석의 조센징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여전한 모양이었다. 고토의 말은 「호르몬 인간」을, 이미 눈 여겨서 보고 있었던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태정이 헛짓거리를 한 것이다. 비겁할 정도로 고토를 의식하여, 희상의 기사를 쓰레기통에 넣다니. 화악, 몰려드는 자괴감에 태정은 고개를 떨군다.
“그 기사, 네가 폭행에 대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정황설명을 해 놓았더군? 어이가 없어서….”
태정은 그저, 다리 위에 놓인 잡지만을 뚫어지게 내려다본다.
“그게, 정당방위였냐? 엉? 재판이 억울했냐? 감옥 간 게 분했냐고?”
태정은 억울한 거 없다고 중얼거린다―그 말 그대로 태정은 억울하지 않았다. 억울한 건 죽은 사람일뿐인 것이다. 가라앉는 태정의 목소리에 반해 고토의 목소리가 한층 더 크기를 키운다.
“그런데, 그런데 일본 사법제도가 이러쿵저러쿵, 재일 차별이다 어쩌고저쩌고. 요란 시끌하게 써댔더군? 더 해보지 그래? 할 말이 아직 많은 가보던데? 응?”
“그렇지 않아. 미안하다고, 그래서 네가 원하는 보상을 하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딴 게 보상이냐, 이딴 게 성의냐고?”
태정의 다리 위에 놓인 잡지로 녀석이 손을 뻗어 그것으로 태정을 타악타악 마구 두들겨 댔다. 한 손으로 하는 고토의 핸들링이 점점 난폭해졌다. 끼익, 끽. 더불어 타이어가 도로 위에서 비명을 질렀다.
“아직 모자라나 보지? 그리워?”
그립다니…. 태정은 비로소 무겁게 떨궈진 고개를 들어 고토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핸들을 놀리면서도 태정의 눈을 똑바로 맞추며 말했다.
“거기가 그립냐고…. 다시 보내 줄까?”
거듭되는 녀석의 위협. 태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토 녀석은 저렇게나 가볍게 그곳을 들먹인다. 태정에겐 벼랑의 끝과도 같은 곳이다. 두려워하는 건 아니다. 그건 태정 스스로가 정한, 하한선이었다. 그것마저 없다면, 태정은 이미 중심을 잃고 낭떠러지를 굴렀을 것이다. 그나마 계획을 가지고 일을 하고, 고토에게의 보상을 항상 염두에 둘 수 있는 것도, 복싱으로 그의 공포를 조절하는 것도, 그리고 이 녀석과의 섹스도…. 이미 낭떠러지인가 생각할 만큼 엉망인 생활은 그래도 하한선에서는 거리를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그 간격이 안전거리를 유지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고토, 이건 내가 쓴 게 아니야. 그저 기자의 관점이라고.”
태정은 이제 어떻게든 ‘혐의’를 벗어 보려 애를 써 본다. 희상을 들먹이기까지 하면서, 친구 녀석에게로 몰래, 혐의를 미루면서 말이다.
“아하, 그래 네 친구가 쓴 거지. 아주 교활한데 너, 넌 쏙 빠지는 척, 결국 네 입장을 옹호하겠다는 거냐?”
태정의 비굴한 발뺌은, 대뜸 발목을 잡힌다. 고토 녀석은 누가 썼는지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리석었을 뿐인―그 어리석음마저 모두 들통 난―자기변호. 마치 친구를 팔아먹기라고 한 기분을 태정은 맛본다. 입이 말라왔다.
“시작부터 가관이더군?”
고토가 기사의 시작을 말했다.
“두고 보자, 누가 더 강하나? 하! 웃겨서 말도 안 나온다고. 누가 누가 더 잘 하나도 아니고 말야. 너, 날 보면서 두고 보자 이 자식, 이러고 있었던 거냐?”
대번에 떠오르는 네 줄의 글귀. 아직도 그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잊어버리고 싶은데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미련한 미련이다.
“그런 게 써 있었는지도 난 잘 모르겠는데…. 기억 안 나.”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면서 태정은 부정한다. 그렇다고 머릿속 뚜렷이 각인된 말이 지워지진 않겠지만.
“기억 안나? 그럼 펴봐 그거. 다시 펴보라고!!”
태정이 머뭇거리자, 녀석이 큰 소리를 냈다. 파라락―태정은 어쩔 수 없이 잡지를 넘겨 희상의 기사를 찾아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서두序頭의 인용구.
“그리고…?”
태정이 잡지를 손에 쥐고 고토를 바라본다. 그리고? 녀석은 태정의 말을 고대로 조롱하듯 읊더니 그걸 설마 자신이 읽으라고 시키지는 않겠느냐며, 네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냐고 묻는다.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녀석은, 거울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 녀석의 혼잣말이 더 이어진다.
“이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줘야 하니….”
그리고 혼잣말은 거기에서 끝이다. 녀석은 태정을 바라보고 「호르몬 인간」의 ‘처분’을 지시한다.
“찢어.”
그것을, 예상 못한 건 아니다. ‘그리고?’라며 주저하듯 물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인 것을. 태정은 손에 든 잡지를 내려보았다. 녀석의 요구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도, 막상 잡지에 손을 대자 태정은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왜 못하겠냐? 그건 그냥 종이야. 아니지, 그냥 백지보다도 오히려 못한 쓰레기지. 네 조센징 친구 녀석한테 뭣 좀 알고 쓰라고….”
좌악, 찌익―찍―.
희상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주저하던 태정의 손이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 거침없이 잡지를 찢는다. 이미 한 번 버렸던 잡지였다. 저 고토 녀석 때문에. 차라리 더 빨리 찢어버릴 것을…. 고토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녀석이 희상을 입에 담기 전에. 하, 그러나 고토가 희상에게 한 말은 정작 별것 아니다. 별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지금, 태정의 행위이리라.
좍―좍―찍―찌익―.
두 손으로 태정은 희상의 믿음을 조각조각 낸다. 무조건 믿는다는 희상의 신뢰에, 태정은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등을 돌려버린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풀이되어야 할까. 믿음을 밟아 버리고, 무시하고, 찢어발기는 짓을 말이다.
“좋아, 아주 잘하는데?”
고토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칭찬을 한다. 녀석의 만족. 태정은 비로소 작업을 멈추고 그 결과를 살폈다. 찢긴 종잇조각들은 손에 그리고 다리에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분리되었던 두 개의 언어는 그렇게 파괴되어서야 비로소 뒤섞인다. 하지만, 이렇게 한데 뒤엉키면 엉망이 되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고토와 엉겨버린 태정 자신처럼.
“이제 충분한 건가?”
“충분? 금세 까먹었나 보군? 그 말은 내가 한다고 했지. 그리고….”
―그리고, 충분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태정이 녀석의 말을 기억해 낸다. 그래, 네 녀석 머리가 아주 나쁜 건 아니었지, 라고 말하는 고토는 입 양끝을 싸악, 동시에 올리며 그린 듯한 미소를 만든다.
순간 탁! 하고 녀석이 한 손으로 핸들을 쳤다. 무언가가 갑자기 떠오른 듯한 동작.
“아아,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겠는데….”
고토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지만, 목소리는 들으라는 듯 크고 뚜렷했다. 태정은 고토의 ‘이 정도’가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흘낏 이쪽을 보았다. 태정이 그를 주시하고 있음을 체크하는 눈빛과 동작. 태정이 응시하고 있는 것이 만족스러운 듯 웃으면서 고토는 손을 자신의 아래로 내렸다. 내려간 손은 조용하게 녀석의 허리 버클을 풀고 지퍼를 열었다. 이어 브리프의 앞쪽만을 잡아당긴다. 검게 구불거리는 덤불. 무성한 체모만이 조금 드러날 뿐이지만, 녀석의 손은 다시 핸들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 안 묻냐?”
핸들을 여유롭게 꺾으며 녀석은, 철컥, 안전벨트까지 아예 끌러 버린다. 태정은 말없이 몸을 기울여 손을 녀석의 사타구니로 뻗어 고토가 그만둔 작업을 이어 시작한다. 아직 힘이 없이 물컹한 녀석의 물건. 손으로 태정이 둥글게 감싸 쥐자 고토가 다리를 벌리며 자세를 다시 잡았다. 끼익. 휘릭. 차가 흔들, 하고 위험한 소리가 잇따른다. 빵빵. 뒤에서 울려오는 경적 소리. 제기랄. 고토에게 묻지 않았던 건 운전하는 녀석을 위해서였던 건데―위험해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거기, 더 아래까지 만져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연자약한 얼굴로 고토는 구체적인 주문을 더한다. 앞을 주시하는 녀석은 운전에만 전념하는 것 같다. 더 깊숙이 녀석의 가운데로 들어가려니 브리프 속에서 움직이는 손이 불편하다. 태정은 다른쪽 손까지 더해 녀석의 브리프를 바깥으로 뒤집어 내려놓았다.
이제 마악 굳어지기 시작한 녀석의 페니스가 구속에서 풀려난 듯, 삼각의 머리부터 곧추세우며 모습을 바깥으로 모두 드러낸다. 둥그렇고 중량감 있어 보이는 그 토대까지. 그의 요구대로 태정은 확실히 손을 고토의 가운데로 넣어 불알 전체를 쓸어주고 그 아래까지 긁어 준다. 후욱. 큰 숨소리와 같이 하여 고토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꺼졌다. 언제까지 녀석도 태연할 수만은 없다. 가슴이 부풀고 꺼지는 시간의 간격이 좁혀들고 있었다.
이제 깊숙이 팽창되는 녀석을 위로 아래로 훑어준다. 좋아. 아 좋아. 좋다는 말을 연발하며 녀석은 시트 뒤로 어깨를 펴면서 아랫도리를 더 아래로 뺀다.
붉었던 녀석의 그것이 확연히 붉고 또 어두워진다. 위로 찌를 듯이 솟아 전신의 위용을 자랑하면서 녀석의 첨단이 젖어 들기 시작한다.
태정의 손이 끈적해지고, 부웅―차의 속력은 위태롭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