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ll the Fat Lady Sings #22
웨스틴 도쿄 호텔이라고…, 누나가. 그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태정을.
누나에게서 온 전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태정은 누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은 잔뜩 있었는데, 문에 붙여둔 사진 속의 누나에겐 시시콜콜 잘도 지껄였으면서, 정작 전화에 대곤 아무 말도 못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엔 ‘잘 지내’라고,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냐는 말엔 ‘응’이라고, 일이 힘든 거는 아니냐고 물었을 땐 ‘별로’라고 한마디씩 대답하는 게 고작이었다.
태정은 그동안의 일을 태희에게 늘어놓지 않았고, 그 누이 또한 그동안의 일을, 동생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왠지 알 수는 없지만, 누나는 태정의 근황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태정이 누나의 일을 알고 있듯이.
누나는 언제쯤 볼 수 있냐며, 태정의 비는 시간을 물었다. 태정이야 당장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누나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누나를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아무 때나 괜찮다고 태정이 태희의 시간에 맞추려 하자, 「그래 어쨌든 널 보는 게 중요하니까」라며 누나는 동생의 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시간과 장소를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일주일도 훨씬 넘었다. 이즈음 시합이며 그로 인한 연습과 부상, 그리고 고토로 인해 시간에 늦거나 무단결근이 있던 터라 십장의 눈총을 받다가 급기야는 ‘좀 더 두고 보겠다’라는 경고까지 받았지만 태정은 개의치 않았다.
이상했다. 누나를 그리워하긴 했어도 만나고 싶다거나 만나야겠다는 강렬한 의지 같은 건 없었다. 아니 그런 의지 같은 건 꾹꾹 눌러 어딘가에 쑤셔 박은 채, 어쩌면 계속 피해온 건지도 모른다. 줄곧 미루어두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 누나의 전화를 받자 모든 것은 안중에도 없어졌다.
미룬 것은, 피한 것은, 만나면 도망치게 될 것 같아서였다. 바로 누나에게로. 그런데 득달같이 누나를 만나러 이곳에 오다니. 미룬 보람이 전혀 없지 않은가.
태정은 호텔 로비를 들어섰다. 외부부터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유럽형의 호텔 건물은, 화려한 내부의 조명, 무엇보다도, 기둥과 바닥이 모두 검은 색의 대리석으로 장식된 것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매끄럽게 반짝이는 검은 세계에 태정은 잠시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렸다. 길을 잃어버린 듯한 착각. 마치 쫓기는 도망자 같다. 힘껏 도망가다 사방이 막힌 곳으로―코너로―몰린 기분이었다.
태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회전문이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를 쫓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쫓기는 기분인 것인가. 자신은 무엇으로부터 도망가고 있나.
「그러니까, 너도 널 믿어.」
그렇게 희상이 말했다.
그리고 경무가 이렇게 소리쳤다.
「무조건 믿는다고.」
누나에게 전화가 오고, 희상이와 경무, 녀석들과 고토가 마주쳤다. 누나를 만난다는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두 녀석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고 드는 수치심이 교차하여 태정은 초조와 불안, 그리고 기대 온갖 감정이 뒤섞여 며칠을 혼란스럽게 보냈다. 두 녀석들을 생각하면 태정은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집으로 찾아온 녀석들을 보고 가슴이 덜컹했었다. 녀석들이 오기 전에 바로, 고토 녀석과 벌거벗은 채로 부둥켜안고 그 좁은 다다미 위를 뒹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가슴을 쓸어 내렸다. 희상과 경무가 끝까지 눈치 채지 못한 것에. 상대는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 고토인 것이다. ―고토가 남자인 것은 고토가, 고토라는 사실에서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녀석들이 알까. 그렇게 그들을 보내 놓고서 자신은 고토 자식과 또 섹스를 했다.
완벽하게 배반했다.
모든 믿음을 저버리고, 모든 신뢰를 저버렸다.
그리고 도망하는 것인가. 누구, 누나에게로 말인가…?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고 싶었던 것을…. 너무 한심한 꼴이지 않은가. 태정은 그를 기다리는 누나를 떠올린다. 태희는 이런 동생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더 주저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회색 수트를 입고 무전기를 손에 든 구석의 사내가 태정을 주시한다. 넓은 장소에 사람이 쉼 없이 오가지만, 그런 시선을 태정은 쉽게 감지한다. 로비 중앙에 서서 어물쩍거린 것 때문만은 아니리라.
사내가 왜 그를 살피는 것인지 태정은 스스로를 한 번 살핀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 비한다면 태정의 차림새는 대단히 후줄근하고 초라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시큐리티의 경계를 받을 만큼 수상한 인간으로 보이는 건가….
태정은 일단 가까운 계단으로 걸음을 옮긴다. 몇 호실인지는 머릿속에 잘 새겨 두었다. 11층의 객실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수월했겠지만, 마치 태정이 위험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계하는 시선에서 우선적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눈에 띈 계단을 택했던 것이다.
여유 있게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 그때, 태정은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뒤를 밟히고 있었다. 과민한 것이리라 생각하면서도 계단의 난간 아래를 슬쩍 내려보니, …있다. 예의 로비에서 보았던 회색의 양복 자락이 눈에 잡혔다.
정말로 쫓기고 있는 것이다. 하하. 이런 상황이라니.
태정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르던 계단을 다시 밟기 시작한다. 그저 남루한 옷을 걸쳤다고 경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 건가.
누군가 전과자는 전과자만의 어깨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죄의 무게에 짓눌린 어깨. 설마, 그런 어깨가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 어깨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슬며시 피어난다. 태정은 괜스레 한쪽 어깨를 쳐다보았다.
11층을 다 올라 복도를 걷는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회색 인간의 인기척은 여전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헛수고를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일인 것이다. 태정이 지금 문마다 적혀 있는 숫자를 확인하면서 그중 하나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치다. 언뜻 무의미해 보여도 필수적인 작업이다. 그렇다면 회색 양복의 헛수고를 헛수고라고 칭하는 건 어불성설이리라.
태정은 지나왔던 복도를 돌아본다. 스윽, 사라지는 그림자. 썩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상관은 없으리라. 그저 그는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뿐이다. 그 일을, 태정은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태정은 고개를 돌려 문에 달린 숫자에 골몰한다.
여긴가….
드디어 태정은 중얼거리며 찾던 것과 일치하는 숫자를 찾아낸다. 문 앞에 똑바로 서지만 왠지 누나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응답을 기다리는 그 찰나의 사이, 불안이 끼어든다. 누나가 없을 것만 같다. 아니면, 문이 열리고 고개를 내민 사람은 누나가 아니다. 아니면…….
“…….”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더 이상 ‘아니면’이라는 부정적 가정은 필요치 않다.
‘누나’다.
그 앞에는 어떤 수식어도, 말도 필요 없다. 그의 눈앞에 실체가 있는 것을.
문을 열고 누나는 태정이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안으로 빨려 들 듯 태정은 방 안으로 들어선다.
누나는 문을 닫는다.
“태정아,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이야.”
말하고 움직이는 누나.
태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누나다.”
보고 있는데도 그립다는 말이 이런 것이었나. 몰랐다. 이렇게나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응. 그래 누나야.”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태정의 말을 반복하면서 재밌는지 누나가 웃는다. 그러곤 두 손을 벌리며 태정에게 다가온다. 이리 와 보라고, 누나는 태정을 부른다. 태정은 벌린 누나의 품에 가서 자연스럽게 안겼다.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누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커다란 동생의 어깨를 껴안는다. 종종 이렇게 누이는 태정을 따뜻하게 안아주곤 했다. 지금도 그 온기를 태정은 그대로 느꼈다. 실로 오랜만의 포옹이었다.
“으응? 어째 더 큰 것 같다?”
누나의 포옹은 태정의 등을 살짝 두르는 정도. 누나가 자신의 가슴에 포옥 안겨 있다. 하지만 태정은 오히려 그런 누나에게 완전히 감싸 안긴 느낌이었다.
포근하다. 푸욱 쉴 수 있는 아늑한 둥지처럼. 편안했다. 안전한 요새에서 보호받는 것처럼 그저 안심이 되었다.
누나였기 때문에, 누나이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래서….
태정은 놓아 버렸다.
그때까지 간신히 지탱해 왔던 것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던 것을.
그 치열했던 긴장을.
“……흐.”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태정아…?”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챈 태희가 동생을 부른다.
“……으흐….”
어깨가 떨려서, 태정은 누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너……, 우는 거니?”
태희는 조심스레 묻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매우 놀란 듯하다. 누나는 동생의 얼굴을 보려하지만 태정은 보여 주지 않는다. 태정의 마음을 알아챈 듯 누나는 더 이상 보려하지 않고, 그저 꼭 동생을 보듬어 더 깊이 안았다.
“…울어. 많이 울어도 돼, 태정아.”
누이 앞에서 태정은 어디까지나 어린 동생일 수밖에 없었다.
“…으…으윽……흐으…….”
누나의 위로는 도화선이 된다. 포옹하는 오누이 사이를 비집고 나오던 들릴 듯 말듯, 잔뜩 억눌려 있던 소리가 좀 더 느슨해지고, 조금 더 커진다.
객실을 울리는 소리는 비록 간헐적이었지만, 그것이 완전히 멈추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 * *
창피함도 모른 채 누나의 머리에, 어깨에 눈물을 묻혔다.
“아유, 우리 울보 동생.”
누나가 태정을 올려다보며, 두 볼을 잡아 양쪽으로 좌악 늘이며 앞뒤로 흔든다.
“누나―누가 울보야.”
쥐어 잡힌 아픈 얼굴에도 불구하고 태정은 항의를 하지만, 그것이 누나의 배려임을 안다. 걱정스런 눈빛임에도 그것을 내색 않고 오히려 밝고 가볍게 태정을 대한다. 덕분에 무언가 씻어 내리듯 울었던 태정은 한결 차분하고 쉽게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누날 봐서 얼마나 기쁜지. 울기까지 한 거잖아.”
푸훗. 하고 겨우 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거짓말이 서투르다는 걸 스스로 알고는 있지? 라고 미소 지으며 묻는다.
“그런데, 네가 운 건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봤던 것 같다. 여간해선 안 우는 애였지, 넌…. 너 요만했을 땐 좀 울리고 싶어서 일부러 때리고 꼬집고 했었다고. 그때 네 표정이 찌푸려지는가 해서 성공했다 싶었는데, 다시 멀뚱멀뚱해지는 거야. 그때 그냥 포기했어.”
누나는 ‘두 손을 들었다’며 자신의 손까지 들어 보인다. 태정으로서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왠지 억울한 일을 당한 것 같다. 누나가 그랬냐며 언제의 일이냐고 태정이 짐짓 골이 난 듯 묻자, 그렇게 둔하니까 기억이 안 나는 거라며 태희는 또 동생을 놀린다.
“얼마나 둔했던지. 참…….”
마치 도리 없다는 듯 누나가 고개를 내두르며 혀를 찬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누나의 말에 태정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주룩주룩 눈물이 멈추지 않고 쏟아졌었다. 그건 모든 사람이 인정할 법한 극히 당연한 이유를 가진 눈물이었다.
그리고 누나가 모를 뿐, 운 적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꿈속에서도 태정은 운 적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은 왜 울었던 건가…? 돌이켜 보니 스스로가 혼란스럽다.
왜였지…? 태정은 이마를 누르며 소파에 슬며시 주저앉았다.
“그게 농담인 줄 알았어.”
“응?”
태정의 뜬금없는 말에 누나가 눈썹을 세운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말야, 처음 들었을 때 그게 농담인 줄 알았어.”
“대부분 반응이 그렇지 뭐. 죽음이란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일단 놀라거나, 부인하거나 해서, 그런 과정으로 여과시키는 게 아닐까.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누나는 태정의 그때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한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태정은 그때 상황이 누나의 이해와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날 말야 어머니 돌아가신 날, 아버지가 사실을 일러 주셨어. 학교 갔다 오는데 대뜸 네 엄마 죽었다. 옷 갈아입어라, 이러시는 거야. 그런데 누나, 하하, 내가 뭐랬는 줄 알아? 에이, 그거 농담이죠? 그랬어. 그것도 웃으면서 말야.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장난하는 건 줄 알았어. 그땐. 아버지가…, 그럴 리 없는데. 어머니 줄곧 병원에 계셨고 그런 농담 같은 거 하실 리 없는데 말이지. 대번에 뺨따귀에 주먹을 날리시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그래도…, 더 맞을 만도 했는데… 그 한 대로 끝내셨어.”
재미없는 이야기였나. 서 있는 누나를 올려보자 누나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본다. 마치 계속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태정은 그런 누나에게 이야기를 마저 끝낸다.
“그거 맞고 나서 겨우 알았어. 정말 돌아가셨구나…….”
태희는 앉아 있는 태정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정말 둔한 녀석이지, 누나.”
누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저, ‘죽음’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그렇게 누나는 말했다.
죽음이란 걸 앞에 두면 사람들은 정상일 수 없다고.
죽음이란 것이 끼어들면 그렇게 되는 거라고.
* * *
그렇게 두런두런 오누이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건 이미 둘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때 그랬지. 맞아. 누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웃으면서 그렇게 맞장구를 칠 수 있는 시치고산七五三: 남아가 3, 5세가 되었을 때, 혹은 여아가 3, 7세가 되었을 때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는 일본의 전통행 때의 이야기나 태정이 아버지 가게에서 구슬을 닦던 어렸을 때의 집안의 소사, 어머니에 대한 추억들…. 마치 그들 사이에 공백이 없었던 것처럼, 그 공백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하리 만치 배제되었다.
하지만 그래서였을까. 태정은 누나와 함께 휴가를 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휴식도 잠시였다. 누나와 호텔의 객실을 나온 그 이후로, 하루의 반나절을 정신없이 보냈던 것이다.
나가자고, 말한 것은 누나. 그래도 되냐고 하자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냐며 태희는 주저하는 태정을 잡아끌다시피 했다. 그곳에 부른 건 누나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이리라고 추측했었다.
‘누난 스타잖아’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에, 누나는 깔깔 웃었다. 스타는 무슨, 이라며 겨우 신인 딱지를 단 거라고 했다. 호텔을 약속장소로 잡은 것은 그날 정치가의 후원회에 참석 요청을 받아서였다고 했다. 문득, 신인에게 그런 요청을 하는가 생각이 들지만 태정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때 조금, 누나는 현재의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비추었을 뿐이다. 태희도 상당히 들떠 있는 듯 보여 태정은 즐겁게 누이와의 나들이를 만끽하기로 했다.
그렇게 객실을 나와 간 곳은 호텔의 레스토랑. 왠지 사람들은―관장을 비롯해서―이상하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싶어했다. 그런데,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체중도 돌아와 몸도 이전보다 더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많고 고급스런 메뉴 중에서 태정이 택한 건 닭 가슴살 요리. 복싱을 다시 하면서 제대로 근육을 만드느라, 물릴 정도로 먹었는데, 또 습관처럼 고른 것이다. 하지만 여느 때와는 맛이 다르다. 그것은, 장소나 비싼 가격 때문이 아니라, 누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태희는 태정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얼굴이 상한 것 같다며, 그가 먹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정의 손놀림에서 붙어 눈동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누나는, 마치 태정을 감독하는 양, 먹지 않으면 떠서 먹이기라도 할 것 같다.
태정은, 복싱을 다시 시작했다고, 얼굴이 안 좋은 건 그것 때문일 거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희상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다고 했다. 그때서야 태정은 알게 되었다. 희상이 녀석이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을. 수 차례 연락을 했었던 모양이라고 누나는 말했다. 허튼 전화라고 생각한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줄곧 몰랐다고 했다. 희상이 녀석, 그렇게까지 걱정을 했던 것이다. 넘어가던 음식물이 목구멍을 메운다.
“그런데……, 복싱은 또 왜?”
누나의 사뭇 근심하는 표정이나, 묻는 어조는 그 소식이 그리 달갑지 않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누나 때문에 다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누나가 바랐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냐니….”
예상치 못한 누나의 반응에 태정은 누나의 말을 반복해 읊을 따름이다. 태희는 기뻐해주고 싶지만 왠지 그렇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태정아, 복싱을 다시 시작하게 된 동기가 그거밖에 없어서니? 어쩔 수 없어서야? 아니면 네가 하고 싶어서니?”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왜 다시 시작을 했지…? 태정이 어물거리고 있자, 누나가 대신 답을 내주었다. 그건, 생각지도 못한 제3의 이유였다.
“누나가 보기엔 둘 다 아닌 것 같아. 넌 가끔 ‘아예’의 논리를 따를 때가 있었지…. 그럴 때의 넌 널 돌보지 않고. 지금도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아예’의 논리…라니?”
“그때 이야기 기억나니? 복싱을 할 수 없다고, 복서는 될 수도 없다고 했던 거. 그때 네 말은 ‘아예’ 복싱에의 가능성을 잘라버린 거였어. 그런데 지금, 구태여 복싱을 한다니….”
“변덕이지 뭐….”
태정은 궁색한 변명을 그것도 시원찮게 한다.
“태정아. 너는, 한 번 결정한 걸 이리 저리 쉽게 뒤엎는 성격이 아냐. 변덕이라니, 결국 넌 우직스럽게 같은 논리를 따르고 있는걸. 아무래도 복싱을 하려는 게 아니야. 복싱을 택한 건, 그런 행위를 통해서 ‘아예’ 네 의지를 저버릴 수 있기 때문이야.”
“누나.”
그런 게 아니냐면서, 누나는 자신이 틀렸기를 바란다고 한다. 태정은 ‘틀린 거야’라고 말해주려 했지만, 머릿속엔 난데없이 고토가,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라고 중얼거리며 녀석과 섹스를 했었다. 그때 몇 번을 했던가. 그리고 지금까지 수도 없이 녀석과….
태정은 질끈 눈을 감았다. 누나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태정은 요리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태정은 자신이 없었다.
맛도 느끼지 못하고 음식을 입에 넣어 씹으면서, 태정은 머리를 턴다.
고개를 들자 누나가 테이블에 위에 팔꿈치를 세워 손에 깍지를 끼곤, 지긋이 태정을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연다.
“뭔가가 끝장나기를 바라는 거니? 아예, 말이야. 널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
“그런 논리는 너무 위험해. 태정아.”
물가에 내놓은 아이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 저럴까. 그런 누나의 모습에 왠지 희상의 모습이 겹쳐졌다.
‘제발’이라고 중얼거리던 녀석.
그런 녀석에게 한 마디의 아무런 변명도 해명도 해주지 않았다. 누나에게 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누나,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지, 나쁘면 어떻게 해.”
태정은 천연하게 웃으면서 누나를 타박한다. ‘그런 거 아니야’라고 누나의 해석을 확실한 목소리를 내며 부인해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비록 고토와의 관계에 그런 논리가 끼어들어 해도,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복싱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태정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자연스레 말이 나와 다행이라고 느끼고 있는 자신이 있다.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 건가.
태정의 말을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스토랑을 나왔을 때 누나는 한결 밝아진 모습이었다―아니면 일부러 그런 척 하려 했던 건지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태희는 앞장을 섰고 태정은 두어 걸음 뒤쳐져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저 누이를 좇았다. 누나가 멈춰 선 곳은 호텔 아케이드의 한 맨즈 웨어 숍. 태희가 왜 그곳에 들어가자는지 태정이 모를 리 없다. 태정에게 필요한 것들이 아니지만, 별로 시간이 없었다.
태정은 누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긴다. 들어가자마자 양팔 가득 자신의 앞으로 옷을 가지고 와 입어 보라는 누나의 명령에도 태정은 순순히 따른다. 단지 시간 때문만은 아니다. 양손에 옷을 든 태희는 왠지 기대감에 가득 찬 행복한 표정이었다. 태희가 요구하는 대로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옷을 입고 벗고 입고 벗고를 셀 수 없이 반복한 것은 그것 밖에 태정이 누나에게 달리 해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주문대로 태정은 짙은 감청색의 재킷아래 플라워 프린트가 들어간 린넨 셔츠를 받쳐 입고 나온다. 꽃무늬다…. 그나마 셔츠의 무늬가 동양화처럼, 그다지 요란하진 않아 다행이었지만 숍에서 추천한 저지 바지에, 캐주얼한 구두까지.
처음이라 몸에 붙지 않아 움직이기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데다, 모든 게 새것이라 번쩍거리는 것이, 왠지 자신이 요란스럽게 보인다. 게다가 누나가 셔츠의 단추를 세 개씩이나 풀러 놓아 가슴으로 바람이 드는 게 매우 신경이 쓰였지만 잠글 수도 없었다. 누나가 단추를 꿰려는 태정의 손등을 쳤던 것이다. ‘이 정도는 기본이고 점잖은 편이라’고 한다. 태희가 ‘아, 내 동생이지만 정말 자알 생겼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태정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마치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듯, 굉장히 뿌듯해하는 누나의 눈길에 저렇게 즐겁다면, 뭐…, 하는 심정이 되어버렸다.
원래의 옷가지들은 숍의 로고가 새겨진 고급스런 가방에 담아든다. 그리고 버석거려서 못내 부담스러운 새 옷을 걸치고 태정은 누나를 호위하듯 좇기 바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라는 말이 딱 맞았다. 누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태정의 머리까지 손보았던 것이다. 자라고 있던 머리라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게 어중간했던지, 아예 짧은 게 낫다며 누나는 또 태정을 자신의 눈에 차는 모습으로 변형시켜버렸다.
모든 작업을 끝내고 늘어선 부티크들을 사이를 걷던 누나는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며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한다. 그제야 숨을 돌리게 된 태정은 누이의 뒷모습을 보며 누나가 속옷까지 새것으로 바꾸려 들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작게 한숨을 쉰다. 그런데, 금세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돌아온 태희가 이번에는 한숨을 쉬는 게 아닌가.
“머리도 스포츠 맨 타입이고, 단추도 풀고, 그런데도 넌 어떻게 애가 가라앉아 보이니. 으음… 묘하게 정적이란 말야. 복싱을 한다는 애가 위험한 분위기도 물씬 풍기고 그래야 하지 않겠니.”
태정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태희는 뭔가 맘에 안 드는 양 투덜거리는 투다. 동생이 복싱을 한다던 걱정을 언제 했냐는 듯 누나는, 아예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차라리 단추를 다 풀어버리면 그런 분위기가 좀 나지 않을까.”
여전히 앞이 흐트러진 셔츠를 물고 늘어지는 태정에게 태희가 눈을 흘긴다. 위험한 분위기라…. 그 말은, 바로 고토 같은 녀석….
태정은 왜 녀석을 떠올리는가, 바로 생각을 끊으려 하지만, 그런 게 그렇게 두부 자르듯 쉽게 될 리 없었다. ‘위험’은 그 녀석의 독특한 체취이지 않은가. 그 말만으로, 녀석의 냄새를 맡는 것 같다. 그렇게 위험한 인간을 태정은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도 같이 위험해 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위태로워지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태정은,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베어 무는 누이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맛있네, 라며 웃는 누나…. 단지 아이스크림 하나로 그렇게 즐거워질 수가 있는지. 그런 아이 같은 모습에 태정은 자신도 모르게 누나에게 다짐을 한다.
“누나, 나는 안전한 사람이 되어서, 누나를 지켜줄게.”
난데없이 무슨 소린가, 누나는 묘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입에서 떼면서 걷던 걸음까지 멈춰 선다. 그 잔여물을 입에 묻힌 채로 누나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푸후훗…. 태정아 보통 강한 사람이 돼서 지켜주는 거 아니야? 안전한 사람이 뭐니…. 푸훗.”
고토 녀석 생각 때문이었나. 말해 놓고 나니 이상하긴 이상하다. 태정은 괜히 멋쩍어 같이 멈춰 서서는 태희에게 ‘거기 아이스크림 묻었다’며, 손을 뻗어 누나의 입가에 묻은 것을 스윽 손등으로 닦아준다. 그리고 손을 거두는데, 그걸 바지에 문지르면 안 된다고, 누나는 한 발 앞서 동생의 행동을 예견한다. 바지에 쓱 닦으려던 태정의 손이 경고에 움찔 하자 태희는 그 손등을 잡아 묻은 것을 휴지로 닦아낸다. 그러곤….
…손등이 깨끗해졌는데도 누나는 그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고만 있다.
왜 그래, 누나.
“힘들었지, 태정아.”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잡은 누나는 조용히 말했다.
“…….”
태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한마디였지만, 누나는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그것에 함축하고 있었다.
마치 허를 찔린 것 같다. 이상하게 목구멍이 뜨겁고 울컥울컥한 것이다.
태정은 누나의 말처럼 울보 동생이 돼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나 극도로 갈망했었던 거다. 그런 것을 지금, 태정은 받았다. 누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이 순간만큼 누나는 그녀가 모르는 것까지도 ‘모두’ 알고 있다.
태희의 체온이 손에 스민다고 느꼈을 때, 그녀가 고개를 들고 태정의 눈을 똑바로 맞췄다.
“……정말 커다란 일을 겪었지……. 운다고 약한 게 아니야. 지켜준다니 정말 기쁘다, 태정아. 하지만 누난, 네가 그렇게 기대서 울어주는 게 더 안심이 돼. 많이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고, 울어야 할 때는, 아주 많이 눈물을 흘려봐야 해. 그래야 비로소 너처럼 힘들었던 그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 거야. 그렇지?”
태정은 누나에게 약속이라도 하듯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태희도, 약속을 받은 것처럼, 살짝 미소를 띠며―그것이 왜인지 서글퍼 보인다―고개를 마주 까닥, 하였다.
* * *
누나와의 재회는 꿈결 같았지만, 작별은 현실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돈에 얽힌 문제는 특히 현실과 관계되어 있다. 태희는 집안의 빚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끝까지 아무 소리도 안 하려 했다고 동생을 나무랐다. 진작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동생이 말을 안 했다고 혼을 내다니, 이런 법도 있었던가.
왜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 하는 거냐는 누나의 말이 질책이라는 허울을 쓴 걱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태정이 아니다. 그러나 이어진 누나의 말처럼, 도움을 청하지 않으려는 여전한 쇠고집 같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태정은 스스로를 도왔다. 그것이라도 없었더라면 분산되는 자신의 노력과 집중과 신경과 정신을 어디로 쏟아 부어야 할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핑계 삼아 복싱을 시작했다. 그것은, 고토와의 관계를―직시하지 않고―회피할 수 있는 도피처였다.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 하는 건 태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희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 중 그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없을 리 없다. 본명을 쓰는 것이나 통명을 쓰는 것이,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깊숙한 감정을 파고 들어가면,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름. 국적. 차이.
누나는 집을 떠나서, 아니 모든 것을 떠나서, 모험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모험을 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잖니.」
이미 험난한 ‘여행’을 떠나 돌아온 동생이었다. 그것이 비록 모험은 아니었지만. ‘보신保身과 안위를 걱정하는 동생은 누나와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누나, 그건, 모험을 하지 않으면 잃는 것도 없다는 말이야.」
동생은 누이의 모험을 걱정한 것뿐이었지만, 그것은 도리어 누이의 걱정을 사고 말았던 것 같다. 「나보다 늙은 동생을 둔 것 같다.」며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던 태희는 서서 그녀를 배웅하는 태정을 계속 계속 돌아보는 것이었다.
* * *
그리고 호텔에서 태정은 고토를 보았다. 누나를 배웅하고 마악 호텔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행동반경에 공통된 영역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다른 둘에게는(그들이 만나는―섹스하는―태정의 집은 공통영역이 아닌 접‘점’인 정도일 뿐이다) 참 공교롭다 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호텔에 고토는, 한 여성을 동반하고 있었다. 고토의 팔에 팔을 겹친 여자는 단아하고 고상해 보인다. 거기에 마악 피어나려는 사쿠라를 연상시킬 정도의 화려함도 갖춘, 흔치 않은 미모의 여성이다. 그런 여자의 한 손을 받쳐 든 고토의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아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여성을 인도하는 고토의 모습은, 신사 교본에서 방금 뽑아낸 듯했다. 몸을 따라 흐르는 듯한, 재단이 잘 된 값비싸 보이는 블랙 수트 때문인지, 단정하게 목을 조르고 있는 넥타이 때문인지, ‘위험한 분위기’는 온데 간데 사라진 점잖고 준수한 한 남자가, 여성의 손을 내려놓고 태정에게 다가왔다.
“여기는 무슨 볼일이냐? 설마, 너도 참석하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참석인지, 고토의 말이 완전하진 않아도, 태정은 이곳 어딘가에서 행사나 모임이 있고, 고토가 그리로 향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녀석과의 만남이 뜻밖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한 쪽은 고토이리라. 그에겐 이곳이 제집처럼 편해 보이는 것이다.
“어라…… 이것 봐라….”
고토는, 가소롭다는 어투로 말을 던지며 태정의 주위를 비잉, 한 바퀴 돌았다. 돌면서 위아래를 훑고, 태정의 앞 뒤 옆을 고개를 비죽이 내밀어가며 자세히도 살핀다. 이런, 태정은 일신된 녀석의 모습에 놀라기만 했지, 정작 자신의 모습을 잊고 있었던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너 오늘은 굉장히 다른데…? 어디서…, 빌려 입었냐?”
물론 사라진 게 아니었다. 녀석은,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어딘가 숨겨두었던 ‘위험’이 녀석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고토 상?”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던 여자가 고토를 부른다. 고토가 여자 쪽으로 몸을 틀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주었다. 그 모습이 비할 수 없게 상냥하다. 그렇게 알았다는 시늉을 하지만 고토는 다시 태정을 돌아보았다. 태정의 앞에 어슷하게 선 고토가 대뜸 손으로 태정의 가슴에 댄다. 그에 태정이 대번에 몸을 굳히자 고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옷 좋은데?”
가슴에 댄 손을 뒤집어 고토는, 날렵하게 접혀진 재킷의 윙을 손등으로 쓸어내리고, 또 올렸다. 마치 그 감촉을 즐기는 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녀석의 손동작은, 그들 사이가 꽤 가깝고 정겹게끔까지 보이도록 만든다.
“그냥 옷일 뿐이야.”
“어떤 여자냐?”
녀석은 대뜸 여자를 물었다. 여자가 옷을 사준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 믿음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흥미가 당긴다는 듯 고토는 엷게 미소를 띠고 있다.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태정은, 고토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상황 타결책이리라. 그리고 녀석이 원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누나야. 내, 누나.”
“아, 누나아∼.”
고토는 어조를 간드러지게 꼬아댐으로써, 믿지 않음을 간명하게 드러냈다.
“누나를, 보통 호텔에서 만나는 거구나. 몰랐다. 난 외동이거든.”
이러면 태정에게도 도리가 없다. 태정은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허하게 웃었다.
“…모를 수밖에 없지, 외동인데, 호텔에서 없는 누나를 어떻게 만나겠냐….”
“이게, 끝까지….”
고토는 이마에 불끈 힘을 준다. 말이 막혀 당연한 말을 하는데, 녀석은 아무래도 곡해를 한다. 태정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돌리다가, ‘고토 상’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눈이 닿았다.
태정과 눈이 마주친 여자는 인형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한 번 더 고토를 부른다―목소리가 아까보다는 좀 가늘어 져 있다. 태정은 그것을 기회 삼아 고토의 주의를 돌려보려 했다.
“네 그녀가 부르는데…. 레이디를 저렇게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건가?”
자신을 부르는 여자를 다시 돌아보며 고토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시원한 미소로써 서비스를 하면서, 나직이 태정에게 말한다.
“내 그녀? 레이디…? 흐응… 왜, 맘에 드냐?”
녀석은, 그 호쾌해 보이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그녀와 눈을 맞추면서, 이쪽으로 몸을 슬며시 기울였다. 마치 긴요하고 비밀스럽게 어떤 할 말이라도 있는 듯.
그러곤, 뭐하나 말해줄까? 라며, 운을 뗀다.
“저 여자애 말야…, 내 걸 굉장히 좋아하더라. 입으로 하는 거 있잖냐,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무슨 맛있는 거라도 되는 양 계속 빨았어. 그냥 내버려두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빨아댔을걸.”
녀석이 물었을 때,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이라고는…. 태정은, 고토의 음담에 전혀 무방비 했다.
“아, 생각하니까 후우… 느낌이 생생해지는데 그래.”
고토는 마악 일어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심호흡까지 해 보인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태정을 살피는 녀석의 한쪽 입꼬리가 같은 경사로 올라간다. 그와 반대로 태정이, 이마를 찌푸리며 난감해하자, 녀석의 미소는 더 크게 번진다. 그러곤 하지도 않은 태정의 물음에 녀석은 맞장구를 친다.
“그래, 맞아. 방금까지 그 짓을 하고 있었다고. 지금은 저런 새침한 표정에 요조숙녀 같지? 입 속에, 목구멍까지 그걸 마구 찔러넣으면 어떤 표정을 하는 줄 아냐? 얼굴이 풀려서, 황홀해 죽겠다는 표정을 한다고. 내가 다릴 벌리고 서니까,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말이야, 내 고추를 무슨 보물 다루듯이 받아 들면서 입에 넣더라고. 얼마나 공손한 줄 아냐…? 하하, 그런게 뭐어, 진짜배기 레이디긴 하지.”
고토는, 그가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소상히 밝힌다. 그렇다. 이것이 정상인 것이다. 고토는 태정의 모든 것을 제어하려 들었지만, 그 초점은 당연히 고토 자신에게 있었다. 태정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고토는 그의 권력, 지배권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인간―그 실험체가 태정이다―에게 행사되는지를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아깐 잠시, 녀석이 빗나간 관심을 보였다고 느낀 것이다―태정에게 여자가 있다는.
고토의 끊이지 않고 태정에게 포르노를 중계했다. 그 말소리가 귀에서 계속 윙윙대고 있다.
“……내가 팬티를 찢어놔서, 스커트 아래가 노 팬티야. 저렇게 고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말이지. 새 걸 사서 입으려는 걸,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한 마디 했지. 그러니까, 그게 좋냐고 묻는 거야. 내가 좋으면 자기도 좋다면서. 올리던 팬티를 다시 끌어내리는데….”
말을 끌면서 녀석은, 태정에게 돌아선다. 여유 있게 바지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이 사타구니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게 또, 은근히 해달라는 소리잖냐. 뭐, 한 번 더 찔러 주고 나왔지.”
고토는 웃으면서, 태정에게만 보이게끔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지 속 손으로 쥐고 주물주물해 보였다. 그것에서 태정이 연상하는 것은―어쩔 수 없다―호텔 침실에서 여자와 뒹구는 고토이다. 그런데 그것은 곧바로 가루이자와에서의 녀석으로 체인지 되고 있었다.
아아. 그런 건가. 그때 그곳에서 녀석은 태정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을 내었다. 태정은 여성을 거의 힘으로 누르다시피 해서 거칠게 관계를 가지던 녀석을 떠올렸다―자신의 남성을 태정에게 증명하고 싶어했던 고토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오픈 된 공공의 장소에서 여자와의 행위를 재연할 수는 없으니, 고토는 이런 지저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설마, 미처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냐. 고토. 이런 식으로 남성의 건재함을 과시하려 들지 않아도 되는 것을.
녀석이 버젓한 사내라는 것을 누구보다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태정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뭐?”
“내게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흐응…, 질투하는 거냐?”
질투?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단어에 태정은 멀거니 고토를 바라보았다. 그저 그런 가벼운 농담이었나. 녀석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흘낏, 시간을 체크했다.
“기다려.”
그 한마디를 뒤로하고 고토가 여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다짜고짜 던지고 간 말 덕분에, 고토가 여자에게로 건너 가 있는 동안에도 태정은 녀석에게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인내를 가지고 고토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녀석이 무어라 했는지 앵돌아진 표정을 했다. 여자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일자로 굳어지지만, 고토가 웃으며 이마에 키스를 하자 조금 그것이 풀린다. 그리고 녀석이 자신의 입술로 여자의 귓가를 쓸어 대다시피 하며 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여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듯 고토를 돌아보면서, 결국 여자는 혼자 그곳을 떠났다.
능란한 녀석이다. 여성을 대하는 것이. 고토는 그렇게 여자를 보내고 나서, 다시 그에게 돌아와 ‘가지’라고 말했다. 태정과의 동행을 당연시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제 맘대로 휘두르는 녀석인 것을… 새삼 여성에게 능란하다 여길 것도 없었다.
“가던 곳이 있지 않았나?”
“상관없어. 잔말 말고 따라 오기나 해.”
가야 할 곳을 가지 않는다면 시간을 유용하는 것이다. 대개 그런 경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텐데, 오히려 녀석은 갑자기 서두르면서 조급함을 드러내 보였다. 터억, 태정의 등을 떠밀곤 고토는 길을 앞장선다. 어디로 가는 건지…. 물어봤자 보나마나 잔말 말라는, 방금과 같은 대답이 돌아올게 뻔하다. 왠지 다리가 무겁지만, 태정은 그래도 빠르게 움직여보고자 몸을 이끌었다.
* * *
녀석이 못내 급한 듯, 초조한 기색을 보였던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을 보며, 설마 객실로 가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 매끄럽게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잠깐 생각이 끊기고, 태정은 고토가 오르기에 의식 없이 같이 올라탔다. 고토가 버튼을 누르고 문이 맞물리는가 싶었는데, 쿠당, 꽤 널찍한 승강기의 내부에서 녀석은 태정을 구석으로 떠밀었다―몸으로. 그것이 아주 격렬해서 엘리베이터가 흔들릴 정도였다.
밀어붙여진 태정은, 녀석이 바짝 하체를 마주 대와 ‘그것’을 바로 느꼈다. 발기해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던 것인가. 충성스럽다 해도 될 것이다―생리적 욕구에 말이다. 태정은 헛웃음을 삼키지만, 급할 만도 했다, 고 이 상황을 예외적으로 취급했다. 상당히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태정은 녀석의 크기에 매우 익숙했다―단계별로 알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옷에 감싸 있어도 허벅지에 느껴지는 그것은, 꽤나 위급하다고 그 크기로써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녀석은, 밀착된 둘 사이의 하반신으로 태정의 손을 가져갔다. ‘구급신호’를 보내는 그것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마가 거의 맞닿을 듯, 녀석은 코앞에서 웃으며, 그렇게 ‘구조’를 무언으로 요청하고 있었다.
“여기, 카메라 있어.”
태정은 현실적인 문제를 개입시킨다.
“더 좋아.”
녀석은 혀로 입술을 다시기까지 한다. 변칙적인 흥분. 태정의 지적은 가일층 고토를 부추기고 있었다. 밀착된 사타구니가 더 세게 붙어 왔다.
고토는, 이런 곳에서‘까지’ 요구하는 것이 아닌, 이런 곳이‘라서’ 요구하는 녀석인 것이다. 태정은 한숨을 쉬지만, 녀석의 고급스런 수트의 바짓가랑이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위아래로 쓰다듬는다. 고토의 아랫도리가 조금 더 부풀고, 동시에 그 눈은 실처럼 가늘어진다…, 싶더니, 할짝… 녀석이 부드럽게 태정의 입술을 핥았다. 태정이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태정의 입을 완전히 막아왔다.
그제야 태정은 녀석이, 무엇인가에 단단히 자극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근히 태정의 입술에 들러붙어 온 그것은, 막무가내로 부벼대오는 아랫도리의 그것보다 더, 진한 욕정을 드러내며 태정을 조르고 있는 것이다. 태정의 입술을 고토는 그 자신의 입술로 아래위로 쓸어보다가, 조그만 생물을 태정의 입 속으로 슬며시 침범시켰다.
일방적으로 눌러왔던 고토의 입술에 어느새 태정의 것이 흡착되어, 농밀하게 타액을 섞고 있었다. 두 번째라서 그런 것인가. 그것은, 지난번의 성미 급했던 키스보다 자극적이었다. 대단히. 녀석의 자극―어딘가에서 알지 못하게 일깨워진 그것―은 태정에게도 전이되어, 고토의 사타구니 위에서 가볍게 놀던 태정의 손이 저절로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손은, 녀석의 가랑이를 부드러우면서도 농도 짙게 주물러주고 있었다―그것은 키스의 형태를 닮아 있다. 그리고 전이되는 자극을 더 즐겁게 즐기고자, 이제는 탐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고토의 혀를 태정의 혀가 슬쩍 가로막으며 또 어르며, 강약을 조절하면서 여유를 가르쳤다.
목적한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에야 태정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게 태정의 위로가 되진 않았다. 자신의 손이 어느새 녀석의 바지 지퍼를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 손에 느껴지는 묵직함을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똑같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먼저 나온 고토는 객실의 열쇠를 들고 있었다. 반환되지 않은 열쇠. 체크아웃 되지 않은 방.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다―사쿠라 같은 여성과 고토. 고토와 사쿠라.
여자와 함께 그곳을 나왔던 녀석은 지금, 같은 짓을 하러, 똑같은 곳에, 태정과 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고토 녀석과 덩달아 조급해져 있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이라고 태정은 다른 이유를 생각지 않았다. 그저, 성미 급하게 열쇠를 넣어 돌리는 고토의 동작에 집중이 된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그 안에는 이미, 고토와 온갖 짓을 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들뜨다니. 이상하다. 뭔가에 단단히 자극 받은 건 고토뿐만이 아닌 것이다.
고토가 문을 열고, 손으로 밀면서 먼저 들어간다. 그 뒤를 태정이 따라 들어,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돌아선다.
“거기 서 있어.”
“……?!”
객실의 중앙에 서서, 녀석은 명령조와 더불어 손가락으로 태정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찌르는 듯한 고토의 검지 때문인지, 그대로 붙박이처럼 문 앞에 서서 태정은, 녀석을 바라보았다. 방을 들어오기 전까진 허겁지겁 하던 녀석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돌연….
의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정에게, 고토는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녀석이 돌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니다. 웃음은 한껏 달아올라 흥분한 녀석의 기분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웃음은 마치 오륙십 대의 호색적인 늙은이처럼 음탕하다. 이제 펼쳐질 쾌락에 대한 기대로 고조된 상기된 얼굴을 하고 고토는 바지의 버클을 푼다. 지퍼는 창피함도 모르고 진작 벌어져―승강기 안에서부터 그렇게―있었고, 바지는 쉽게 바닥으로 떨어진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화급한 몸짓으로 고토는 신발을 벗고, 팬티를 끌어내리고, 바지와 한꺼번에 그것들을 발치에서 털어낸다.
그 동안 줄곧, 녀석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먹이를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육식동물처럼, 고토의 시선이 전에 없을 정도로 끈적하다. 무엇 때문인 거지….
태정은, 녀석이 홀에서 여자와의 관계를 상술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대담하게도 그곳에서 녀석은 자신의 가운데를 만지작거렸다. 생생한 이해를 돕기 위한 거짓 모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진짜 터치였던 것이다―발기를 돕는. 자신의 섹스 이야기를 태정에게 술회하는 것만으로 저렇게 녀석이 발정할 리는 없었다.
정갈하게 목에 매인 넥타이를 천천히 잡아 당겨 흐트러뜨리는 동작은 한결 여유를 찾은 듯하다. 단추를 차례차례 느리게 푸는 것을 보면서 태정은, 고토가 자신 앞에서 스트립을 하는 건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일부러 끄는 듯한 녀석의 동작에 일견 공기는 차분해지는 듯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한 번 달아오른 흥분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리 없다―녀석은 참을성이 좋았다. 끈끈히 엉기는 시선과 거칠어진 호흡 소리로 고조된 공기는 태정의 몸을 같이 데우고 있었다. 땀이 차올랐다. 태정은 웃옷을 벗으려 재킷을 제킨다.
“누가 벗으래.”
“어…?!”
녀석이 고개를 한쪽으로 까닥 기울이며, 태정의 행동에 마뜩찮다는 표정으로 제동을 걸었다.
“벗지 마, 넌, 아무것도.”
진회색의 양말을 제외하고 몽땅 벗어 던진 녀석은, 꽤나 당당하다는 듯이, 한 손으로 미끈하게 드러난 허리를 받치곤 태정에게 명령했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에 태정은 그의 새로운 수트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중간히 빼었던 한쪽 팔을 다시 집어넣는다.
스트립을 하면서도 한사코 달라붙었던 고토의 시선, 그리고 지금 녀석이 하는 요구. 뭔가 설명이 되는 듯하다.
“이게 맘에 드는 건가?”
태정은 재킷을 단정히 추스른다. 이 옷이 녀석의 색다른 흥분거리가 된 건가. 스트립을 했던 건 고토였지만, 태정은 자신이 스트립을 하는 것 같다.
“글세…… 후으….”
고토는 삐뚠 웃음을 지으며 애매하게 말했다. 저 하반신의 발기된 성기와 억누른 신음이 무색하게 말이다. 어떤 가리개도 없이 환한 불빛 아래, 붉게 충혈된 모습으로 우뚝한 아랫도리를―더 일으킬 것도 없는 그것을―손으로 세우고 있다.
이제 충분히 흥분했나? 고토? 태정은,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고토도 더 이상 막지 않고 태정을 기다린다. 아니, 주위를 살피고는 아주 침대로 가서 그 가장자리에 걸터앉는다―다리를 크게 벌리고서. 본격적인 유희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태정의 눈에 들어오는 건 고토가 아니었다. 녀석과 거리를 좁힐수록 여기저기서 포착되는 것은 널브러진 정사의 흔적들. 아직 치워지지 않은 방은 녀석과 여자의 행위가 난잡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커다란 목욕 수건이 뭉친 채 내버려져 바닥에 웅크려 있었고, 이건… 녀석이 말했던 건가. 태정이 지나는 발아래에 여성의 팬티 쪼가리인 듯한 것이 밟힌다. 사용한 콘돔이 용도 무시된 쓰레기통 옆에 굴러다니고, 엉망으로 구겨진 티슈들이 곳곳에서 헤맨다. 저건…, 팬티스타킹. 여성의 물건이 또 하나 눈에 띈다.
숨은 그림 찾기 같다. 너무 쉬워서 싱겁기 짝이 없는.
녀석이 앉아 있는 침대의 모습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시트는 거의 바닥으로 흘러 내려와 있고, 그것을 따라 굴러 내린 것처럼 그 끝자락에 와인 잔 하나가 뎅그러니 누워 있다. 마시다 흘린 건지, 침대 위에 걸쳐진 시트에는 붉은 색의 와인자국이 크게 남아 있다. 그러나 시트가 축축해 보이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다.
모든 것이 끝난 방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시작이다.
이제, 곤죽 같은 진흙밭을 녀석과 뒹구는 거다. 하지만, 태정은 묘하게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집보다는 이곳이 나았다. 말끔하게 정돈된 방보다 녀석이 여자와 교잡한 증거가 남아 있는 방 쪽이 낫다. 여자와 농탕질하는 고토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다분히 나았다.
그래, 지금이 훨씬 낫다.
엘리베이터에서의 그 이상적인 흥분은 이와 상통하는 이유에서였다. 경감되는 죄의식. 홀로 떠안아야 하는 책임의 방기―자기 합리화에의 합리화.
앞에 선 태정이 고토를 내려다보자, 그는 뒤로 손을 짚으며 올려다본다. 어깨가 삐딱하여 건들거리는 자세가 엷은 미소와 꽤나 잘 어울린다.
“그 여잔 오늘 91점이었어. 난 까다로운데 말이지. 상당한 고득점이라고 그거. 뭐어, 펠라 덕에 인심 좀 후하게 썼지.”
녀석은, 구체적인 점수를 매기며 오늘의 섹스에 대한 촌평을 한다. 그러곤 태정에게, 그러니까 너도 힘내라고, 기회는 공평해야 한다며, 벌린 다리를 더 열었다. 당연히, 스스로를 어루만지던 그의 손과 바통터치 하는 것은 태정의 입이 된다. 고토의 다리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태정은, 녀석을 한 번 혀로 핥곤 밑동을 잡고 대번에 삼켜 버린다―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것은 과외의 작업이 불필요하다. 몇 번 목구멍까지 써서 넘겨주자, 녀석의 단단한 아랫배가 크게 오르내리고, 심호흡이 커진다. 거친 호흡소리는 신음으로 체인지 되었다.
“…흐으… 크읏……. 기다려……, 기다려.”
오늘은 막바지가 이르다. 도달하는가 생각하는데 녀석이 비키라며 태정의 머리를 끌어낸다. 기다리라는 말이 그저 좀 더 쾌감을 지속하고자 한 소리라 치부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나. 녀석은 예상외로 마무리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한다. 일어서서, 고개를 든 태정을 내려다보며 고토는 붉게 들뜬 얼굴로, 쌌다. 태정에게. 정확히는 태정의 옷에―‘누나’의 옷에. 재킷에 아랫도리를 겨냥하고 페니스를 잡아 쥐고 손으로 마찰시키며 분비물을 배출하는 녀석은 눈을 감았다 떴다, 찡그렸다 하면서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옷에 흥분하고, 옷에 사정한다.
녀석은, 옷과 퍼킹을 하고 있었다.
꽤나 많은 양이 태정의 재킷에 가슴에 그리고 셔츠에 흩뿌려졌다. 풋내가 코를 찔렀다. 태정이 더러워진 옷을 묵묵히 내려다보는데, 숙인 머리 위로 고토의 목소리가 날라 왔다.
“흐음… 좀 더 나아졌는걸. 아까 전엔 굉장히 안 어울렸다고. 하하.”
이어, 끈적하게 젖은 손이 태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고토는, 아예 재킷을 그러쥐어 손에 남은 오물을 마저 닦아냈다. 괜찮아. 태정은 괜찮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이건 세탁하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너무 새것이어서 부담스럽지 않았나. 태정은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재킷을 벗었다. 셔츠의 단추도 끌렀다―그 어딘가에 튄 건지, 아직 온기가 남은 점액질의 것이 손에 묻어 나온다.
털썩, 침대 위에 대자로 드러누운 고토 녀석은, 나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몇 점인 거지?”
꽤나 만족한 듯한 표정에 태정은 냉소하며 고토의 점수를 묻는다. 고토는 몸을 굴려 모로 누우면서 대답했다.
“아직 안 끝났잖아? 끝난 후 말해주지.”
녀석의 말에, 태정은 더럽혀지지 않은 바지까지, 마저 벗었다.
* * *
“아, 너 이시자키 좋아하지?”
“이…… 시자키?”
고토가 갑자기 태희에 대해서 물었다. 방에 붙어 있는 잡다한 사진들에 대해 고토는 경멸조의 코웃음을 치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왜 오늘 난데없이….
“그 여자 여기 와 있을걸.”
“……?!!”
고토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사뭇 놀란 태정이 고토를 바라보지만, 녀석은 그저 셔츠의 단추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셔츠에 주름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세히 살핀다. 고토의 이마가 이내 찡그려진다. 태정이 보기에 셔츠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지만, 녀석에겐 그렇지 못한가보다. 고토가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것을 보고 태정은 이곳을 들리기 전 녀석의 행선지에 생각이 미친다. 여성을 동반하고 어딘가를 가는 고토. 누나도 이곳에서 어딘가에 참석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가는 곳에, 그… 이시자키가 오는 건가?”
발에 팬티를 꿰어 올리는 고토에게 태정이 질문을 던진다. 녀석이 옷을 입는 순서는 셔츠 등의 상의부터이다. 그 다음이 팬티(녀석은 트렁크를 입지 않았다 대개 삼각이지만 종종 사각 브리프도 이용한다), 그리고 바지의 차례이다.
대개 속옷부터 입지 않나, 태정은 자신의 방식을 떠올리며 고토의 순서가 좀 이상하다 싶지만, 옷을 입는 데에 순서가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닌 것이다.
타악―삼각 브리프의 허리를 튕기면서 녀석은 그 탄성을 확인하고는 태정을 보았다.
“그래. 왜, 부럽냐? 후원회에 초대하자고, 내가 아이디어를 냈지. 요샌 젊은 층을 공략해야 하니까.”
후원회라…. 아, 그렇다. 누나도 어떤 정치가의 후원회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고토가 참석할 만한 후원회란 건….
“무슨… 어떤, 아니 그러니까, 누구의 후원회인 거지?”
왠지 모르게 안정을 잃어 태정은 말까지 더듬는다.
“하, 갑자기 왜 그렇게 궁금해하는데? 그 여자 때문인가? 후원회 몰라? 후원회. 너 같은 조센징 때문에 그런 게 있는 거잖아. 기생충 같이 이 사회에 빌붙어 사는 녀석들을 좀 없애달라고, 말썽이나 일으키는 골칫덩이들을 빨리 해결하라고, 그런 시원한 정치를 해달라고 사람들이 정치가한테 돈을 주는 거야.”
고토는 신랄함과 비아냥거림으로 태정에게 갑작스레 가시를 세웠다. ‘조센징’ 운운하는 횟수가 좀 줄어드는가 했더니 여전하다. 녀석이 섹스 전과 후의 모습이 표변豹變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태정은 그런 고토에게 할 말을 잃는다. 그것은 녀석이 자신의 눈을 혐오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각막이 필리피노의 것이라고, 한쪽 눈만 필리피노가 되버린 기분을 아느냐 했던 고토 녀석이다. 평소에는 그 사실을 잊고 잘 지내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눈을 잡아 뜯어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참을 수 없어 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도 저 녀석을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뼛속까지 우경화 된, 일본의 극우파 정치가의 아들임을 말이다.
“안 됐군.”
“뭐가 안 됐다는 거지?”
잠시 이야기에서 탈선한 태정이다. 태정은 고토가 무엇을 말하는지 되묻는다.
“이시자키. 그 여잘 보고 싶어한 거잖아. 넌 참석 자격이 없으니, 안 됐다고. 아버지 후원회에, 조센징은 사절이야.”
태정은 녀석이 말한 의미를 뒤늦게 깨닫지만, 그건 대수롭지 않은 사실이었다. 중요한 건 후원회가 역시나 녀석의 아버지, 즉 고토 노부유키 의원의 후원회라는 사실이다. 너무나도 석연치 않다. 아무리 초청을 받았다 해도 고토 의원 같은, 보수 우익의 기수인 정치인의 모임에 참석하다니. 그건 태희다운 일이 아니었다.
“미리 거절해주니 다행인데. 그런 곳에 초대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조센징으로서 고민되지 않겠냐.”
태희도 역시 고민을 했으리라. 그리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언제나 속이 깊었던 누나 아니었던가. 하지만…, 한결같이 태희를 믿었던 태정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끝자락에 가서 그 믿음이 조금 흔들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누나는.
“고민…?”
태정의 대답이 적이 맘에 들지 않은 듯 고토가 날카롭게 쳐다본다. 하지만 흘낏 손목의 시간을 체크하더니, 녀석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흘러간 시간을 의식한 듯 넥타이를 목에 두르고 그 길이를 대중하는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성급해져 있었다. 이미 늦은 것 아니었나 생각하지만 태정은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한 번 자빠트려 볼 수 있을 것 같냐?”
고토는, 능숙하게 타이의 매듭을 지어 올리면서 태정에게 물었다. 거울도 보지 않고 맨 넥타이가 깔끔하게 녀석의 목에 가서 고정된다. 자빠트린다니… 시간에 쫓기면서도 그런데에선 여유를 보이는 것이 녀석이었다. 태정이 얼굴을 찌푸리자, 고토는 야비한 웃음을 흘리면서 설명을 덧붙인다. 이시자키 이야기라고….
지금, 녀석이, 누나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말하는 건가.
태정은 대뜸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맛보지만, 정작 녀석은 대수롭지 않은 농담을 던진 것 같다. 바지가 어디 있는 거냐며, 자신의 옷을 찾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비잉 돈다.
…냉정히 생각하면 누나를 걱정할 일은 없다. 그리고 고토는 태정과 이시자키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고려하면 녀석의 농담은 통상적인 것이다―지극히 고토다운.
“너에겐 여자가 많더군. 가루이자와에서도, 그리고 오늘도… 그런데 아직도 더 필요한 건가?”
태정은 고토의 여자들을 돌이켜 본다. 자신이 본 것 만해도 벌써 두 명. 그것만은 아니리라…. 사실, 고토의 문란한 성생활에 태정이 관여할 뜻은 전혀 없었다―그렇게 놔둘 녀석도 아니지 않는가. 질문은 그저 누나에의 농담에 태정이 희미한 견제를 한 것뿐이다.
“그래서…?”
바지를 찾은 건지 그것을 손에 들고 녀석이 태정에게로 다가온다.
“그래서, 질투 하냐?”
질투. 질투? 태정의 고개가 희미하게 기운다. 고토는 벌써 두 번째로 그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태정은 고토와 그저 퍼킹을 하는 관계였다. 또 누군가와 정사를 나눈 고토의 흔적에 태정은 대단히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그 사실에 흥분까지 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지금 주제넘게 질투하는 거냐고. 네가.”
어느 샌가 태정은 고토에 의해, 질투하는 인간이 되어 있다. 녀석이 그렇게 단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비록 고토의 여자들에 관한 질문을 꺼낸 건 자신이지만, 그것이 녀석으로 하여금 이런 확신을 갖게끔 만들 만한 것이었나.
“아니야, 가서 네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즐겨.”
태정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가감 없이 녀석에게 사실을 들려주지만, 지금에 와서 그건 마치 기정 사실―고토의 어이없는 확신―에 대한 궁색한 변명처럼 들린다.
“아아… 그건,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말이군? 아니, 이미 그런 건가? 저런 옷을 사주는 아줌마랑 말이지….”
벗어 놓은 옷 더미에 흘깃 시선을 주면서 고토는, 태정에게 옷을 제공한 의문의 여인에 대해 말을 한다.
그것을 녀석은, 아직까지 신경 썼던 건가?
“말했잖아. 난, 너밖에 없다고.”
너밖에 없다니….고토 녀석에게 왜 이런 말을 두 번씩이나 하고 있는 건지. 물론 이건 고토 이외의 섹스 상대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단순한 섹스라도 태정은 녀석처럼 여러 명과 동시에 교제하는 주변머리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고토는 의심한다.
…이건 꼭, 질투하는 것 같지 않은가.
녀석이 말이다.
태정의 말에 고토는 무슨 헛소릴 지껄이느냐며 쳇, 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녀석은 바지를 입을 생각이 없는지 그저 손에 들고만 있다.
물론 대단히 희박한 가능성을 지닌 사실이지만 의심은 사소한 것에서 증폭되는 것이다.
설마, 라고 생각하지만 태정은 한 번 그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고토….”
“왜?!”
거의 반사적인 질문과 함께 고토가 태정을 본다. 한쪽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올라가 있지만, 녀석은 태정의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지 마라. 여기에 있어.”
그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지만 동시에 꽤나 계획적인 말이기도 했다.
“뭐라고…?”
“여기 있어달라고. 나는 너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나…?”
“………….”
“너밖에 원하지 않아.”
녀석은 시계를 보았다. 태정을 보고, 또 한 번 시계를 보았다. 보고는, 손에 든 바지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팬티를 내린다.
셔츠에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조인 고토의 윗몸과 벌거벗은 하체가 기묘한 대조를 이뤄 대단히 외설적인 느낌을 가져다준다.
「올리던 팬티를 다시 끌어내리는데….
그게 또, 은근히 해달라는 소리 잖냐. 뭐, 한 번 찔러 주고 나왔지. 」
문득 로비에서 고토가 속삭였던 음란한 이야기가 태정의 머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