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28)

Till the Fat Lady Sings #21

“좋은데.”

태정이 잡지를 덮으면서 희상에게 말했다.

“좋은데? 그게 다냐?”

「호르몬 인간」에 자신이 쓴 글을 읽고 태정이 짤막한 평을 들려주자, 희상은 탐탁지 않은 듯 불거진 목소리를 낸다. 으응? 태정이 다른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자신의 말에 어떤 잘못이 있는가 조금 근심 어린 얼굴로 쳐다보자 희상은 피식하며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태정의 얼굴이었다. 잡지에 글을 쓴다고 태정을 찾았을 때가 벌써 삼, 사 개월 전인 것이다. 일 년에 두 차례 발간될 뿐인 호르몬 인간은 거기에 발행일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 발간이 이렇게 늦어져버렸다.

그동안 연락이 제대로 되지도 않고 그나마 되었을 때는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결국 날짜는 술술 흘러가 버렸다. 결국 잡지가 나와서야 이렇게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본 녀석인데…, 희상은 곤란해하는 태정을 안심시킨다.

“아냐. 아냐. 좋다고 해주니까 굉장히 기쁘다고. 이 글 쓸데 이거 과연 제대로 쓰는 건가 굉장히 노심초사했거든. 아무래도 민감한 이야기니까. 좀 지난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뭣보다….”

희상은 말을 생략했지만, 그가 걱정했던 것이 무엇임을 태정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기분이 묘하긴 하지만, 구체적인 인명이 명시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그때 일로 영향을 받을 사람도 없다고. 아무튼… 글이 굉장히 멋진데.”

태정은 탁자 위에 놓인 잡지를 손으로 탁탁 두드리며 또 한 번 글에 대한 단순한 감상을 말하는 녀석의 얼굴이 좋아 보인다.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카페에 들어섰을 때 미리 기다리고 있는 녀석을 보고, 희상은 대단히 안심을 했다. 얼굴이나 체격이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좋아진 것이다.

“또 좋다고 하는구나? 좋다니까 다행이지만…. 그래도 머리에 쥐나게 썼단 말야. 그런데 편집장 평이 ‘볼만해’였어. 그 한마디로 끝났다구. 그런데 너마저 ‘좋은데’ 한 마디냐….”

끝난 줄 알았던 희상의 불평이 되살아나자 태정은 또다시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왠지 그것에 갑작스런 재미가 들려 희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좋다’라든가 ‘멋지다’, 이런 건 구체적으로 아무런 뜻을 전하지 못한다고. 뭐가, 왜 그런지 구체적으로 말해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말은 뜬구름처럼 잡히지 않은 채로 그냥 공허하게 사라진다고.”

“어어… 요샌 그렇게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게 어려워….”

귀 뒤를 슬며시 긁으면서 말을 끄는 태정을, 희상은 나오려는 웃음을 감추며 느긋하게 바라본다.

“좋은 건 좋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게 되는 거 아닐까.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라고 말하면 그것만 좋은 게 되어버리잖냐. 어… 그리고…, 군데군데가 좋거나 부분적으로 괜찮다고 저절로 멋지다는 말이 나올 수는 없다고… 왠지 미처 말할 수 없는 부분까지 좋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 같아. 마냥 멋지고 마냥 좋은 거지.”

태정은 자신이 좀 단순한 것 같다며 그것에 희상의 동의를 구한다. 단순하긴 뭐가 단순하단 말인가. 녀석은 희상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설명과 함께 희상의 글이 ‘마냥 멋지고 좋다’라는―처음엔 불만이었던 평을―아주 기분 좋은 결론으로 유도해 내고 있는 것이다.

태정은 자신이 눌변인 듯 이야기를 했지만 희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희상은 가끔 사색이란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외부에서 흡수해 들이는 지식으로 내부를 채우는 자신과는 달랐다. 그 반면으로, 녀석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색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분명 태정은 똑똑한 인간이기보다는 현명한 인간 쪽인 것이리라, 고 희상은 생각했다.

태정의 행동은 독립적인 사색에서 출발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아무튼 희상아. 처음부터 인상적이었어.”

희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상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웃으며 글에 대해 한마디를 덧붙인다.

“처음 시작이… 잠깐….”

문득 태정은 잡지를 들추어 페이지를 이리 저리 뒤적였다. 한글과 일본어 두 언어가 홀, 짝수면에 나뉘어 쓰인 잡지는 조금 두터워질 수밖에 없다. 펄럭이는 종이 소리가 조금 긴 듯 지속되다가, 멈춘다.

“그래 이거.”

태정은 중얼거리며 희상을 보더니 그 부분을 가리키며 보여주려 한다. 희상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 보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 태정은 잡지를 한 손에 고쳐 쥐고 다시 눈을 글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태정은 도입부를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용구였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언과도 같았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읽으며 태정이 힐끔 희상에게 눈길을 준다. 희상은 계속하라는 뜻으로 턱을 살짝 끄덕였다.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태정은 글을 옮겨 읽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녀석의 말이 되어 있었다. 적어도 희상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희상의 글은 그렇게 4줄로 시작했다.

태정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 구절을 봤을 때 희상의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그 4줄 중에서도 마지막 구절을 태정은 음미하듯 천천히 반복했다.

“시민의 반항.”

끝으로 태정은 인용구의 아래 적혀 있는 그 출처를 읊는다.

「호르몬 인간」에서 희상은 글은 태정의 이야기와, 그 외의 몇 가지 사건을 예로 대처들어 재일이 겪고 있는 불합리하고 불리한 법적 상황과 그 문제점을 짚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희상은 그에 어떻게 대처할지 그 방법과 대책을 모색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처음 희상은 어떻게 글을 이끌어 나갈지 뚜렷하게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 구절이 희상의 눈에 와 박혔던 것이다. 그건 분명 우연이 아니었다.

“여전하구나, 이런 책 읽는 건.”

태정이 잡지에서 눈을 떼 희상을 돌아보며 말한다. 희상이 맘에 드냐고 하자 태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이걸 보고 네 생각을 했거든.”

“응?”

녀석의 목이 약간 앞으로 빠져 나온다.

“이거 읽으면서 네 생각이 났다고. 너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그래서 그 글의 처음 시작이 그런 거야.”

희상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자신이 느꼈던 것을 일러 준다. 기분 탓인가. 싱겁게 웃는 눈앞의 태정의 얼굴이 왠지 조금 어두워지는 것 같다. 태정은 고개를 희미하게 저으면서 그렇지 않다고 희상의 말을 부정한다.

“그런 식으로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강한 사람이겠지.”

“넌 그렇지 못하다는 거야?”

“푸후… 그래 전혀 그렇지 않아. 희상이 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강하다고?”

태정은 웃음을 흘리면서 희상에게 물었다. 웃는 녀석의 얼굴에는 자조적인 기운이 비쳤다. 태정아 너 왜 그렇게 웃는 거야…. 희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음에도 그렇지 못하고 그저 태정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보아왔던 사람들에서 가장 강한 인간 중의 하나가 태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장본인은 그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여러 종류의 기준이 다른 강함이 있겠지.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면 약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야. 하지만….”

“희상아. 이 인용구가 나와 비슷하다고 했지. 미안하지만 완전히 틀렸어.”

이 녀석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지금 태정은 자신의 친구, 그가 알던 태정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희상은 여전히 어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너 그 말이 맘에 든다고 했잖아. 난 그게 네 심리를 반영한다고 봐.”

“내 심리…?”

태정은 잠시 허공을 쳐다보고는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나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어. 그래서 나한테 그게 인상적일 수 있는 거지.”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희상이 미간의 주름을 세우면서 말하지만 녀석은 자신의 반응을 이해 못하는 듯했다.

“희상이 너야말로 왜 그렇게 심각해…. 하하.”

“웃지 마. 태정아.”

희상의 정색에 알았다며 태정은 후우, 하고 옆으로 한숨을 내보냈지만 뭐가 재밌는 건지 아직 미소가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린 강해져야 해.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이건 당연한 거야. 너도 그걸 모르진 않잖아. 근데 왜 그런 나약한 소릴 해.”

“왜 그래 희상아. 너에게 언제나 중요했던 건 세계 평화, 사회 정의, 양심 이런 거잖아. 지난번에도 궤도 수정이라며 과격한 발언을 하더니…. 폭행으로 감방을 갔다 온건 나라고… 하하.”

태정이 녀석 웃음소리까지 가볍게 내면서, 농담을 한다. 그것이 경직되는 분위기를 의식한 것임을 안다. 알지만, 자식,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희상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진지한 자신이 우스꽝스럽다. 희상은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태정을 노려보지만 녀석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웃는다.

“농담하지 마. 조태정. 그런 농담 듣고 싶지 않아.”

태정의 풀네임을 부르며 화난 기색을 숨기지 않자, 그제야 태정은 진지한 목소리로 희상의 이름을 불렀다.

“희상아. 너나 나나 말야. 조센징이잖아. 조선이나 한국이 축구를 하면 당연히 그쪽을 응원해. 넌 지금 그런 거랑 비슷해. 네가 내 친구라고, 무조건 나를 감싸는 건 하지 마. …난, 강하지 않아. 희상아.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지. 중졸에 전과범인 시시한 녀석이라고. 나한테서 네가 보고 싶은 걸 보려하지 말아줘.”

축구… 축구라고? 축구에 빗대서 할 만한 이야긴가? 게다가, 태정이 이야기 한 게 정말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말이다. 희상은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했다. 방금까지의 농담이 더 나았다.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자긍심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저 녀석이 정말 태정이란 말인가. 희상은 지금 태정에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사실을 말하는 거야.”

희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를 억제할 수 없었다.

“너 왜 그래? 도대체 왜 그러냐고?!!”

희상은 언성을 높였다. 카페 내 사람들의 시선이 희상에게 꽂힌다.

이 녀석, 망가졌다.

돌아와서 그 바쁜 와중에 복싱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녀석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저 글을 무슨 생각을 하며 썼는가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무언가가 태정을 좀먹고 있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

태정은 망연자실하게 희상을 보았다. 그 표정이 한층 희상의 화를 돋운다. 자신이 화내는 이유를 태정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녀석이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내가 화내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희상의 목소리에 힐끗 그들을 쳐다본다. 이렇게 흥분하거나 이렇게 커다란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는 희상이었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겠다.

“너한테서 보고 싶은 걸 본다고 했지.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정확한 사실은, 여태까지 잘못 봤다는 거야. 태정이 널 잘못 봤다.”

고개를 올려 희상을 바라보는 태정의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희상은 지금 더 이상 태정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런 침울한 표정의 태정은 더더구나 보고 싶지 않았다.

희상은 작별 인사도 생략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발을 옮겼다.

* * *

태정은 마치 온 세계를 등져버린 것 같았다.

희상이와 싸우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희상이 녀석과 말이다.

“타악.”

손에 든 잡지를 괜히 방바닥에 내 팽개쳤다. 그러나 이내 곧 태정은 몸을 구부려 바닥에 나뒹구는 책을 집어들며 앉았다. 공연한 화풀이다. 희상과 싸우고 녀석이 일부러 가져다 준 책에는 화풀이를 하고….

엉망이다.

시간이 갈수록 생활이 안정될 줄 알았다.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있다. 살도 찌고 몸도 예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좋아졌다. 게다가 고토와도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그래 녀석과 난 잘 지내고 있는 거다. 태정은 생각 사이의 공백을 지워버린다.

문제될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기대와는 반대로 흘러간다. 안정이라고…? 허울뿐인 안정이다. 마악 집으로 돌아왔던, 아니…, 공원이나 거리를 떠돌았던 당시가 역설적이게도 가장 평온하고 안정된 시간이었다.

태정은 벽에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호르몬 인간」을 이리 저리 뒤적인다. 희상의 글이 눈에 띄고 조금 읽는 듯하다가 태정은 다시 잡지를 덮어 버린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초조해하고 차분하지 못하고 산만하다.

희상을 화나게 한 것 그것 때문이었다. 녀석은 신뢰에 가득 찬 눈빛으로 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희상의 글은 처음부터 강철 같은 의지와 돌 같은 믿음으로 시작했다. 그 인용구 말이다.

4줄의 활자는 그림처럼 태정의 뇌리에 정확히 입력돼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그런 믿음이라니. 정말이지 부럽다. 하지만 그런 믿음을 믿을 수 없다.

자신마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무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래서 희상의 말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녀석의 신뢰가 너무 버거웠다. 그것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희상에게 보인 행동은 그에게로 되돌아와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네가 나약하다는 증거야.

젠장, 아니라고 태정은 반론할 수 없었다.

태정은 벌떡 일어났다. 너무 한가한 거다. 이렇게 있으니까 생각이 많아지는 거다. 빈틈을 주면 이렇게 된다. 태정은 체육관에 갈 때 가져가는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옷차림을 가볍게 바꾸기 위해서였다. 좀 뛰어야 했다. 힘들게 일을 하면 괜찮을 텐데. 쉰다고 말하고 다시 일하러갈 수도 없지 않은가. 몸을 움직여서 땀을 내면 괜찮아 질 거다. 마악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서기 전 태정은 또 누나를 본다.

“이건 도망치는 게 아냐. 누나.”

마치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태정은 문을 연다.

“TRRRR…TRRRRR……RRRR.”

나서려는 찰나 등 뒤에서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희상이인가?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괜한 기대로 태정은 몸을 황급히 돌린다. 잊고 나갈 뻔한 전화를 찾아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식이라 받아야 할 연락도 제대로 못 받는 것이다. 태정은 방금 벗어 놓은 재킷에서 소리를 듣는다.

“TRR… 딸칵.”

전화가 끊어 질 새라 태정은 신발도 벗지 않고 바닥을 딛고 들어가 전화를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상대방을 확인한다.

“…….”

저쪽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태정은 다시 한 번 말을 걸어 본다. 이쪽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아니다. 시간을 두고 망설이며 이쪽을 살피는 듯한 그런 침묵이다.

“여보세요? …희상이냐? 아까 일은.”

공원에서의 일로 녀석이 머뭇거리는 건가 싶어 태정은 자신이 먼저 그 일을 언급하며 선수를 친다.

“태정아.”

“……?!!!”

희상이 아니다.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태정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태정아.”

대답대신 태정은 가슴을 한 번 커다랗게 들먹인다.

“우리 동생, 잘 있었니?”

그리워했지만, 이렇게 안부를 묻는 한마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 줄은 몰랐다.

지금 태정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누나.”

* * *

끼릭 끼릭. 수도꼭지를 돌린다.

쏴아. 나오는 물을 컵에 받고 꼭지를 잠근 후, 꿀꺽 꿀꺽. 태정은 두어 모금 들이키는 것으로 컵에 가득 찬 물을 목으로 쏟아 넣었다.

“마실래?”

방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긁으면서 고토가 물먹는 태정을 거꾸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정은 녀석에게 컵을 들어 보이며 의사를 묻는다.

“저리 못 치워….”

결과는 당연한 거절…인가. 녀석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절대 먹지 않았다. 물론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시고 싶어하는 것 같아 권해 본 것을 저렇게 눈을 부릅뜨고 반응한다. 태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한 컵 더 물을 받아 마신다. 그래도 갈증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는다.

섹스 후엔 대개 수분을 보충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고토와의 질펀한 섹스가 주는 갈증은 느낌이 틀렸다. 물을 먹어도 마치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그 해소가 어려웠다. 처음엔 물을 계속 들이켰었다. 그러다가 좀 더 지나 깨달았다. 육체적인, 생리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신적인 문제라는 것을.

갈증은 녀석과의 섹스를 닮아 있었다. 분명 녀석 안에서 눈앞이 아찔한 쾌감을 느끼며 쏟아냈는데도, …모자랐다.

뜻―끈한 열을 만끽하며 그 비좁은 녀석의 엉덩이를 한껏 벌여 놓으며 최후의, 최후의 순간에 분출시켜도 좋은 건 그때 뿐이었다. 꺼내보면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들어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데도, ……여전히 모자랐다.

마치, 꿈속에서 오줌을 싸는 느낌이었다.

문득 초급학교 3년생일 때가 떠올랐다. 그가 이불에 경우를 가리지 못한 마지막 때가 그때인 것이다. 3학년이라니, 자신은 아무래도 좀 늦된 아이였다. 그때까지 일 년에 한두 차례씩은 실례를 했던 모양이다. 어머니나 누나는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그것 때문에 아버지는 태정이 늦되다며 못내 닦달하고 윽박질렀던 것이다. 3학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그 꿈 때문일 것이다.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싸는데 아무리 시원하게 싸대도 그 줄기는 끊이지 않고, 계속 오줌은 마려운 그런 꿈 말이다.

결국 태정은 흥건하게 젖은 이부자리에서 잠을 깼고, 그날 아버지에게서 매를 쏟아지게 맞았다.

어쩌면 지금 저 고토 녀석과의 섹스는 그런 꿈인 것이다.

어느 날 잠에서 눈을 깨면 속옷이 젖어 있을지도 모르는 거다. 수면 중에 지리는 건 노랗게 투명한 오줌이 아니라 탁하고 풋내 나는 흰색의 끈적한 체액….

아버지의 사나운 체벌 때문인지, 그 이후로 자면서 아랫도리를 적시는 일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들어서면서 늦되게 몽정이란 걸 겪기 이전까지는. 신체적 성장이 빨랐던 것에 비해 태정의 「발달」은 느렸다. 전반적으로 느린 유·소년기의 발달을 겪었다고 생각하는데, 비교적 이른 것도 있었다. 섹스의 경험이 몽정보다 더 앞섰다. 정상적인 발달 순서 같지는 않지만 그때는 그게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다.

늦는 게 있으면 빠른 것도 있는 것이다.

“어이.”

고토가 부르는 소리가 태정의 멍한 정신을 깨운다. 태정은 한 박자 느리게 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린다.

“어?”

“…뭐해 물 사오라니까.”

특정 상표의 물만을 고집하는 고토가 물을 찾는다. 편의점에까지 가서 사와야 하는 수고로운 책임을, 고토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정에게 지운다. 고토는 여전히 드러누워 자신의 바지를 뒤적여 지갑을 꺼낸다. 태정은 이럴 때 녀석의 기준을 모르겠다. 어떤 것에서는 멋대로이고 막무가내인가 하면, 이런 데선 구분을 확실히 짓는 것이다.

휘익―한쪽 팔만 뻗어서, 녀석은 보지도 않고 만 엔을 태정에게 던진다.

―그저 단순한 돈의 과시일지도.

고토의 에비앙을 사기 위해, 태정은 주섬주섬 옷을 찾아 들어 대충 몸에 꿰기 시작한다. 셔츠를 팔에 끼우면서, 허리를 굽혀 다다미 위에 뒹구는 만 엔을 줍는다.

“잠깐.”

태정이 주워든 만 엔에 누워 있던 고토의 손이 불쑥 뻗쳐 왔다. 녀석은 돈을 아래로 잡아 당겨 다시 거두어 간다.

“너 그게 무슨 뜻이지?”

녀석은 엄지와 검지로 맞잡은 만 엔을 팔랑거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라니, 뭘 말하는 건지. 태정은 혼잣말이라도 했는가 싶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되묻는다. 그러자 고토는 웃긴 뭔가가 생각났는지 혼자 키들거리며 웃었다. 대개 섹스 후 기분이 안 좋은 녀석을 생각하면 이쪽이 낫긴 하다.

“너 말야, 싸기 직전에 말이야…, 큭큭, 너 그때 어떤 줄 아냐? 목이랑 얼굴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고. 억지로 겨우 참는 웃긴 얼굴을 해 가지고선….”

질문과는 동떨어진 딴 소리를 녀석은 굉장히 웃기다는 듯이 늘어놓았다. 태정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건만 전혀 아랑곳 않고 줄기차게 지껄인다. 이야기는 점점 딴 곳으로 흘러간다. 쌀 거 이미 다 싸놓고 빼낼 생각은 하지 않고 외려 더 박아넣으려 하는 건 뭐냐? 라고, 그렇게 일 끝난 후 허리를 움직이는 건, 여자 거시기 위치를 잘 몰라 그 주위를 헛 찌르는 멍청한 녀석과 다를 게 없다면서 낄낄 웃어댄다.

노골적인 성 묘사를 녀석은 거침없이 입에 담는다. 듣고 있는 이쪽의 귀가 뜨거워질 것 같았다. 입에 담지 못할 더럽고 지저분한 이야기는 수감생활동안에 물려버렸는데, 그보다 수위가 낮은 녀석의 것은 오히려 익숙해 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녀석의 이야기가 ‘태정’을 말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타당한 원인을 찾으면서 태정은 애써 침착성을 되찾으려 한다.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낯이 뜨거워야 하는 것은 ‘행위’인 것이다. 고토의 말을 태정은 녀석과 ‘진짜로 하고’ 있었다. 그런 ‘행위’에서조차 수치는 뒷전인 것을.

“……굉장히 좋을 때 말이지 네 녀석 뭐라고 중얼거린단 말야…. 미친 녀석같이 소리치기도 하고. 아무튼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구. 어떻더라? 그래, 이런 식인 것 같은데….”

녀석은 눈을 빛내면서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며 태정더러 잘 보라고 말한다.

“흐윽. 잇포. 으헉 잇포잇포. 읏흐.”

일부러 일어나 무릎을 꿇고 자세를 잡은 녀석은 시든 자신의 음경을 붙잡고는 허공을 향해 허리를 흔들면서 붙잡은 그것을 어딘가 찔러대는 흉내를 냈다. 신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일부러 가다듬어 내는 고토의 목소리는 분명 태정의 ‘그때’ 목소리를 닮아 있다. 즉흥 연기는 비록 짧았지만 그 마지막까지 녀석은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고토는 몸을 떨면서 내보내는 시늉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우으… 으… 시파…………. 이렇게 말야. 어때 비슷하냐? 크핫.”

새삼 낯 뜨거워할 건 없다 생각했건만, 태정은 목에서부터 열이 위로 확 올라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행위’에서 뒷전 한 수치는 이렇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뭐야, 하하… 설마 기억 안 나는 건 아니겠지?”

고토가 미심쩍다는 듯, 비웃는 어조로 묻는다.

“…….”

물론 태정 자신의 일인데 모르거나 기억나지 않다거나 할 리 없다. 게다가 저렇게 신음의 소리까지 태정을 모방해 리얼하게 흉내 내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전에도 같은 질문을 듣지 않았던가… 언제였지…?

고토는 태정의 ‘씨팔’을 흉내냈던 ‘시파’의 의미를 안다며, ‘오오라, 네 녀석은 좋으면 욕이 나오는 거였군’이라며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녀석은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하지만 질문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 잇포가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관계 중 자신의 입버릇이 왜 그렇게 들여졌는지 자문해 본다. ‘예뻐’라는 말이 갑자기 언제 어디서부터 튀어나왔던 것인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태정의 성적 고양이 최고조에 달할 때, 생각지도 못할 때 뛰쳐나와버린다.

“아무것도? 왜 그것도 욕이라서 말 못하겠냐?”

고토는 질기게 그 뜻에 매달린다. 말하지 않을 이유도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입을 떼지 못하겠다. 그저 입버릇에 불과한 것을. ‘예뻐’ 정도의 말, 섹스 도중 상대에게 한두 번 입에 담을 수도 있는 말이었고 그게 습관으로 굳어진다 해도, 과하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녀석인 것이다.

“아아, ‘시파’ 빨리 말하라니까.”

태정이네들의 ‘욕’을 끼워 넣으며 녀석이 강압해 온다. 하는 수 없다. 둘러댄다거나 어물쩍 다른 뜻을 말한다거나 하는 임기응변을 태정은 생각하지 못한다.

“귀엽다카와이이는 뜻이야.”

태정은 ‘잇포’의 본뜻을 일러준다.

“하, 귀엽다? 귀엽다는 뜻이라고?”

고토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랬기에 태정은 말을 하기 꺼렸던 것이다. 고토가 태정과 ‘모종의 이유’로 섹스를 하고 있었지만, 녀석은 나무랄 데 없는 남자인 것이다. 고토의 자존심은 ‘귀엽다’거나 ‘예쁜’ 존재가 되는 걸 허락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남성을 수식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래서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건 과거에도 태정이 한 번 저질렀던 실수였다―그리고 또 반복하고 있다.

“그건 그럴 때 입버릇이야. 아무런 뜻도 없어.”

“뜻이 없어도! 그렇게 이미 말했잖아. 입버릇? 너 내가 뭐로 보이는 거냐? 엉? 이 조센징 변태 새끼.”

이젠 벌떡 일어나 눈앞에서 태정을 윽박지르는 고토에게서 단골메뉴인 ‘조센징’ 욕설이 튀어나온다. 그 목소리는 옆집이 신경 쓰일 정도로 크다. 녀석에게 어떻게 말해야 이해시킬 수 있을까. 지금 고토의 모습은, 아까의 ‘행위’로 인해 머리가 부스스하게 흐트러져 있고, 구겨진 셔츠 하나만을 단추도 채우지 않고 걸치고만 있다. 번들거리는 목과 축축해 보이는 겨드랑이의 땀 냄새, 정액 냄새가 뒤섞인 시큰한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런 사내 녀석이 예쁘다는 생각 따위 해본 적 없다.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

…만무하다.

“널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미 말한 게 문제라면 취소하겠다. 그리고 이쪽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 것이다.

금세 싸움이라도 걸 것 같았던 고토의 기세가 멈칫했다. 흥분이 가라앉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제 된 건가.

“뜻이 없다고 한 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나 뭐 달라지는 게 있냐? 똑같잖아. 멍청한 자식.”

사실을 이해한 것으로 여겼지만 오해이다. 반격할 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여자들한테 그렇게 말하면서 섹스를 한 거군? 이 자식 진짜 구제 불능의 변태 아냐…. 그때 그 여자한테도 귀엽다고 말했던 거냐? 응?”

고토의 말은 뭔가 논점을 일탈해 있었다. 이 녀석 법학도 아니었나? 머릿속에 엉뚱한 의문이 스칠 만큼.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는 건가 말이다. 게다가 ‘그 여자’라니…, 태정이 자신의 말을 캐치 못하는 것을 고토는 금세 알아챈다.

“그때 파친코의 여자 말이야 널 테짱이라 불렀지?”

태정이 기억을 상기하는데, 고토가 이번에도 돕는다.

이럴 수가….

잊고 있었다. 다카기 상을 말이다. 그런데 고토는, 파친코에서 잠깐 스쳤던 다카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태정은 그가 어느 쪽에 놀라는 건지 헷갈렸다. 다카기를 잊고 있었던 자신에게인 건지, 고토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쪽인지.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여자 전혀 카와이이 하지 않았지. 나이 든 아줌마였잖아. 그러면서 그 소리가 나왔냐? 도대체 누구한테나 다 그런 말을 씨불이고 다니는 거냐? 하―.”

고토의 다카기에 대한 기억이나, 지레 짐작으로 태정을 매도하는 것이나 모두 지극히 일방적이고 편파적이다. 다카기는 아줌마가 아니었고 매우 사랑스러운 여성이었다. 그리고 태정의 ‘예뻐’라는 입버릇을 좋아해주었다. 태정에게 그녀가 정말로 ‘예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말버릇에서 벗어난 사실이 될 수 있었다. 녀석에게 그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녀석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다만 지금은 그런 소릴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다.

지금의 섹스 상대를 제외하곤.

“‘예뻐’라는 말은 이젠 너한테밖에 하지 않아.”

태정의 대답에 고토가 황망하다는 듯 눈을 굴린다.

“뭐어?!”

쇳소리처럼 날카롭게 치솟는 목소리. 아아 그렇지, 녀석이 화 난 이유가 ‘예뻐’라는 말 때문이었던 것을.

자신의 대답이 엉뚱한 사실을 짚고 말았다는 것을 태정은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먼저 딴 얘길 한 건 고토이지 않았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자식.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양 주먹을 콰악 틀어쥐고 버럭 성을 내는 고토는 금세라도 주먹을 들어 태정에게 달려 들것 같은 기세이다. 그러나 녀석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해서 씩씩거린다.

“가서 물이나 사와. 빨리!!!”

의외로 싱겁게 상황은 종료되었다. 나가려던 태정을 붙잡았던 고토가 이번엔 퉁명한 말로 태정을 몰아낸다. 이 정도로 끝나 다행이다. 그러나 다행 이전에 뭔가가 걸렸다. 녀석이, 평소의 녀석과는 다르게 어딘가 이상하다.

“뭘 보는 거야!! 이거 갖고 빨리 나가.”

태정이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자 녀석은 재차 소리를 지르면서 이쪽을 향해 뭔가를 던진다. 탁. 투욱, 고토의 주먹 안에서 잔뜩 구겨진 지폐가 태정의 가슴을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태정의 시선은 고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상해. 뭐가 이상한 거지.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녀석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이것 때문이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만큼 성이 났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설마, 자신의 말 때문에 저 고토 녀석이 얼굴을 붉히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설마’ 외엔 고토의 이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지금, 뭐가 있는가.

고토는 태정에게 예쁜 인간이 아니었다. 녀석에게 한 말대로 그가 예쁘다거나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같은 말버릇이 다카기에게서는 진실이었지만 녀석에게 가선 명백한 거짓이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건, 자신과 섹스를 하는 건, 고토이다.

“그 말…, 너한테밖에 안 해.”

그렇다. 지금은 오로지 녀석만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

한데 그 말에 창피해하는 건가, 고토, 네가?

태정은 이보다 더 모순투성이인 인간을 본 적이 없다. 듣기 싫어하는 말을 했다고 화를 내는가 하면 그 똑같은 말을 ‘녀석에게만’ 한다는 것엔 얼굴이 상기된다. 그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러웠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눈을 피했던 녀석이, 언제 그랬냐는 듯 태정을 향해 눈을 치켜뜨며 부라리지만 이미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늦었다. 태정은 고토에게 한 발 다가선다. 그런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녀석은 한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러지마, 더 날뛰어보라고. 넌 더 흉포해져서 내게 덤벼들어야 하는 거잖아. 태정은 고토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기대하면서 녀석과 거리를 좁혔다.

“뭐야? 뭐냐고?!”

신경질적으로 고토는 태정의 한쪽 어깨를 탁, 탁 연속에서 밀쳐낸다. 하지만 태정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게 항거가 미약하다.

태정에게 고토는 끔찍한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녀석과 섹스를 하는 것은 녀석이 태정이 기억하는 끔찍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녀석 또한 태정과 섹스를 하는 것이리라. 귀엽다니, 예쁘다니 그런 말은 둘에게 끼어들 여지가 없는 단어였다.

넌 내게 ‘예뻐’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 고토.

그런데….

대답대신 태정은 한 손을 녀석의 뺨에 갖다 대었다. 녀석의 움직임은 거기서 딱 그쳤다. 비좁은 방이라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으리라.

그런데…, 네 녀석밖에 없다.

태정은 고개를 살짝 틀어 고토의 입에 자신의 입을, 천천히 갖다 댔다.

네 녀석밖에 없다니. ―예쁘다고 말할 인간이 말이다.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면서 태정은 고토를 살폈다. 고토의 눈은 흔들림 없이 태정을 노려보고 있지만 그 눈동자가 확대되고 있었다. 태정은 천천히 혀를 내밀었다. 전투중이라도 되는 듯 대치중이던 녀석의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다. 녀석을 도발이라도 하듯 태정은 고토의 윗입술을 사―악, 한 번 핥아본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녀석, 눈조차 깜박이지 않는다. 태정은 곧장 녀석의 입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먼저 눈을 감은 건 고토였다.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고토는 태정의 뒷머리를 꽈악 잡아 당겼다. 입술의 밀착이 더할 나위 없이 강해진다. 태정은 눈을 감지 않는다. 부드러운 구강의 점막을 혓바닥에 느끼기가 무섭게, 녀석의 억센 혀가 태정의 혀를 휘감아 왔다. 두 개의 혀가 서로 얽히고 언제인지 모르게 고토의 것이 이쪽으로 넘어와 태정을 깊숙이 침범하고 있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점점 차오른다.

넘쳐흐르기 전, 녀석은 마치 태정의 혀뿌리까지 삼킬 기세로 힘껏 빨아 들였다. 츄욱 츄웁, 스읍 빨고 핥는 소리가 성급하지만, 섹스 때의 끈적한 마찰 소리보다 더 끈끈하다. 젠장. 눈을 감지 않았는데도 감은 것보다 더 감각이 예민해져 있다. 쿵. 쿵. 태정의 혈압과 맥박이 빠르게 치솟는다. 안 돼. 태정은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입술을 살짝 떼어 고개의 방향을 틀었다.

그 사이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토의 입술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태정의 입술을 찾는다. 정말이지 쾌락에 솔직한 녀석이다. 녀석의 눈이 꿈틀거린다. 고토가 미처 눈을 뜨기 전, 태정은 각도를 바꿔 입술을 부딪듯이 강하게 엇누르며 그 탄력 있는 입술을 다시 빨았다. 태정은 젖을 구하는 갓난아이처럼, 고토의 혀를 빨아댔다.

녀석에게서 솟아오르는 수원水原은 항시적인 태정의 갈증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것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나 일시적 해갈이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고토 못지않게―아니 그보다 더―쾌락에 탐닉하고 있는 건 자신이다.

퍼뜩, 태정은 언제인지 모르게 감긴 눈을 떴다. 고토의 어깨를 붙잡고 태정은 파악, 그를 밀쳐내자, 한 덩어리가 되었던 혀와 입술이 분리된다.

“하아. 하아.”

고토가 숨을 가쁘게 고르며 태정을 쏘아본다. 후, 후우. 태정도 느리게 가슴으로 숨을 몰아쉰다. 고토의 날이 선 시선과 뜨거운 입김이 곧바로 얼굴에 와 닫는다. 자신이 빨고 문질러댔던 녀석의 입술이 발갛게 부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입과 그 주변까지 타액으로 범벅되어 번들거리고 있다. 태정은 자신이 얼마나 고토와의 그것을 탐했는지를 새삼 깨닫고 망연자실했다.

스윽, 고토가 질척한 입가를 셔츠깃을 끌어올려 아무렇게나 닦는다. 녀석은 입을 열지도 않고 그저 두 눈으로 태정을 똑바로 주시하기만 할 뿐이다. 그런 녀석의 눈은 입술보다 붉어져 있었다. 그 모양이 태정에게 도착적인 자극을 준다.

빌어먹을. 태정은 그 눈에 섹스를 하고 싶어졌다.

저 뱀 같은 눈에. 자신이 주먹으로 엉망으로 뭉개 놓았던 눈에. 한 번 눈을 망가뜨려 놓았다는 괘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이기적인 성욕만이 자리한다. 눈만으로 섹스보다 더 세게 껴안을 수 있다고 했나. 처음 느꼈다. 녀석의 빨간 눈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불끈하고 그게 곤두서는 느낌이다. 지금의 자신을 훑어 세워서 고토에게 박아 넣는다면, 가장 힘 있고 가장 깊숙이 녀석과 결합을 이뤘던 깊이보다 더 깊은 곳까지 도달해 파묻혀 버리리라.

씨팔. 욕설과 함께 더 이상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하는 쪽은 태정이다. 괴물 같다. 고토에게 느끼는 욕정이 자신의 내부에서 괴물처럼 자라나 있었다.

“물 사 올게.”

끈끈히 달라붙는 녀석의 눈을 애써 외면하며 태정은 바닥의 돈을 주었다.

“쿡쿡… 쿡.”

목구멍으로부터 올라오는 웃음소리. 힐끔 태정이 고토를 살피자, 붉은 눈가가 휘어지게 고토가 웃으며 어깨를 떨고 있다. 태정은 그 안의 미친 듯한 욕구를 녀석에게 들킨 것 같아 무언가 켕기는 사람처럼, 밖을 나왔다. 그러나 문밖으로 새 나오는 녀석의 킬킬거리는 웃음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벽에 기대선 태정은 한 손을 펴서 얼굴을 가린다―무언가에 숨기라도 하듯. 그러나 그 행동으로 자신의 입가에도 고토 못지않게 타액이 들러붙어 있음을 깨닫는다. 태정은 서둘러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몇 번이나 지우고 확인한다. 지우고 지워도, 들러붙었던 녀석의 혀와 입술 그 타액의 맛은 지워지지 않는다.

큭큭. 녀석과 비슷한 웃음소리가 태정의 안에서 솟아 나온다.

태정은 고토가 웃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차고 넘칠 만큼 섹스를 했다. 겨우 키스 하나로 놀라 도망치듯 등을 돌려 나온 자신의 꼴은 무어란 말인가―그것도 먼저 달려든 건 태정이었다.

이것이 고토와의 첫 키스인 건가.

섹스엔 언제나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키스가…, ―아니다, 키스 후에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게 섹스였다. 그런 게 고토와는 전혀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긴 녀석이 정상적이기를 바라는 것이 비정상인 것이리라.

‘비정상’은 어쩌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인지도 몰랐다.

태정은 그가 발달 순서에서 어떤 애로隘路를 겪었던 사실을 재차 상기한다. 그러나….

―늦는 것이 있으면 빠른 것도 있는 것이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하지만 태정의 균형은 이미 심하게 삐걱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 * *

“태정이 녀석한테 소리를 질렀다고? 희상이 네가?”

경무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희상을 바라본다.

“그건 내 전매특헌데. 내가 녀석한테 화내면 네가 말리고. 그러는 거잖아. 하하. 근데 어째 이번엔 역할이 바뀐 것 같다? 크하하.”

희상은 태정에게 그렇게 소리를 지른 것이 못내 가슴에 걸렸다. 그래서 경무를 호출해 태정과의 의견충돌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경무에게 함께 태정을 찾아가 보자고 청했다. 경무 놈 연신 저렇게 웃어대는 걸 보니 그런 상황이 재미있나보다.

희상은 아직도 태정이 한 말이, 그리고 그런 실망스런 태도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태도 역시 믿기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격한 감정에 밀려 이성을 잃고 소릴 치다니. 아무튼 그렇게 태정과 헤어진 후로 녀석과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태정이 이 자식, 매정한 녀석 같으니.”

“연락 없다고 공연히 그 녀석 원망하지 마. 안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경무 놈, 은근한 핀잔이다. 태정을 ‘공연히 원망’하는 건, 같이 동조를 해달라는 뜻인데 말이다. 둔한 녀석. 금세 희상의 원망은 경무를 겨냥한다.

“그것 참. 녀석 답지 않은걸. 뭔가… 아직도 사로잡힌 것 같아.”

경무가 중얼거린다.

“응? 사로잡히다니? 뭘 말야?”

웬만해서 경무의 말을 희상이 못 알아듣는 경우는 없다. 그만큼 녀석은 직설적이고 단순하게 내뱉는다. 애매하거나 뜻을 함축하는 말을 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내가 그때 그 녀석, 고토 자식한테 복수하려는 게 아니냐, 뭐 이런 말했던 거 기억 나냐?”

“아직도 그 얘기냐? 너?”

정말 못 말리겠다고, 어투에는 희상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 어조를 알아차린 경무의 볼이 뚜웅―불거진다.

“에이씨,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봐. 내 말은, 태정이가 아직도 그 일에 사로 잡혀서 자신을 놔주지 않는다는 거야.”

“후회한다는 거야? 그건 아니라고 봐. 그 녀석도 아니라고 했고.”

“…후회하지 않는 대신 자신을 학대하려고 하는 건가?”

“뭐? 학대?”

“태정이 너한테 했다는 이야기 말야…, 그건 자기 비하를 떠나서 자기 학대 수준 아니냐? 왠지 그런 생각이 들잖냐. 그 녀석 집안의 빚을 갚겠다고 몸이 으스러지게 일하는 거며. 누나한테 이야기도 연락도 안 하는 거. 난 그 녀석 생고생하는 게 자처해서 일부러 힘들어지려고 하는 것 같아. 자길 괴롭히기로 작정한 놈 같다고. 그 와중에 복싱까지 하잖아. 몸이 남아나냐?”

“……!!”

설마 그런 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거라고? 태정이 녀석,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벌주는 건가? 어쩌면 태정은 대가를 치루는 걸 끝내지 않기로 한 거다. 희상은 태정이 ‘대가의 정당한 지불’에 대해 이야길 했던 게 떠올랐다. 녀석은 대가를 중요하게 보았다.

덜컥 겁이 난다. 희상은 왜 겁이 나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면 두려움은 더 증가한다. 내딛는 희상의 발걸음이 성급하고 빨라졌다.

“어이 같이 가.”

처지기 시작하는 경무가 뒤에서 희상을 부른다. 하지만 조급해진 마음에 희상의 속도엔 오히려 가속도가 붙는다.

“녀석 뭐가 저렇게 급해….”

투덜거리면서도 경무는 성큼 성큼 따라와 희상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 * *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다. 녀석은 더 질책을 받아야 했다. 아냐. 그래도 화를 낸 건 어쩌고. 난 사과를 하러 온 건데…. 태정의 숙소 앞에 다다르자 희상은 초조해져 생각을 차분하게 정돈할 수 없었다.

“우와 차 좋은걸! 저거 봐봐.”

희상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경무는 근처의 근사한 스포츠카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읊고 있다. 휴우, 희상은 작게 한숨이 나왔지만 녀석에게 장단을 맞춰주느라 흘깃 보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래도 자신의 전화 한 통에 여기까지 따라와준 녀석이지 않은가.

그런데…어, 뭔가 동떨어져 있었다. 경무의 호들갑대로 멋지긴 하지만 멋져서 이상하다. 시선을 준 차는 태정이의 초라하고 낡은 아파트 건물 앞에 서 있는 게 아까울 정도로 이곳의 분위기와 걸맞지 않는 차였다. 가로등 아래 경무 녀석은 그런 사실엔 아랑곳없이 차에 정신이 팔려 있다.

희상은 잠시 일었던 이질감 같은 건 금세 잊는다. 건물 2층을 훑어 태정의 숙소 위치를 체크한다. 녀석이 있나? …있다.

…창문에 불이 환하다. 하지만 희상은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정이 자식 있잖아. 잘 됐네…, 희상이 너 뭐해 빨리 오지 않고.”

“어… 어.”

멀거니 희상이 불 켜진 창문을 바라보고만 있는데, 경무 녀석, 어느새 먼저 계단을 뛰어 올라 미적거리는 희상을 재촉하고 있다. 녀석, 이곳에 왜 왔는지 완전히 잊고 차를 구경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넋을 놓고 있는 쪽은 자신이다.

숨이 찰 정도로 급하게 걸어왔는데 막상 다 와서 머뭇거리다니. 평소 몸과 행동이 먼저 앞서는 경무 녀석의 결점이 지금은 장점으로 보인다.

경무는 이미 계단을 다 올라 태정의 숙소에 다다라 있다. 희상은 아래에서 경무의 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몇 개의 똑같은 모양의 문이 나란한 가운데 경무가 그 하나 앞에 선다.

참나…, 저 경무 자식,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연다. 녀석의 앞 뒤 가리지 않는 행동에 희상은 희미하게 웃었다. 깜짝 놀란 태정이 나오고 문밖을 나와 자신을 본다…―아마도 그러하리라 예상했지만 경무가 이상하다. 문을 붙든 채로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그저 바닥에 발이 붙은 것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야, 왜 그래? 태정이 없냐?”

희상이 다가가며 경무에게 물었다. 경무가 고개를 틀어 희상을 보지만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 뻐끔 할 뿐 말을 하지 못한다. 희상이 문 쪽을 바라보자 열린 문으로 새나오는 빛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있다. 사람 있는데 저 녀석 왜 저러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채 끝나기도 전에 불쑥, 그림자의 실체가 밖으로 나온다.

태정이……, 아니었다.

“……너…? 왜?”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희상이 느끼는 충격은 경악과도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매끄럽게 입을 놀릴 수 있는 희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보처럼 의미가 불분명한 말을 띄엄띄엄 낼 뿐이었다. 경무가 아무 말도 못했던 게 당연하다.

그때였다.

“희상아…?! 경무…?”

그들이 찾았던 친구의 목소리가 때마침 들려왔다. 희상이 그 목소리를 향해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태정이 서 있었다.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그리고 슬리퍼. 잠깐 어딘가 다녀 온 듯한 차림이다. 편의점인가… 태정은 편의점의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다. 담겨 있는 건… 에비앙? 생수를 사들고 온 태정은 밖에 주차된 스포츠카가 주었던 이질감을 던져주고 있었다.

태정은 희상, 경무에게 한 번씩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여기에 있는 이유가 반드시 설명되어야 할, 이곳에 절대 있으면 안 될 인간을 향해 고정된다.

“이봐, 네 조.센.징. 친구들이 찾아 온 모양인데.”

문틀에 기대어 팔짱을 낀 일.본.인.이, 태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태정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희상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호르몬 인간」의 기사도 쓰기로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글로 쓰려니까 뭘 알고 있는가, 막막했다. 생판 모르는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게 더 쉬웠으리라. 기사를 쓰면서 점점 녀석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더 커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 희상은 또 그때 느꼈던 막막한 느낌에 휩싸였다.

고토, 저 자식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태정이 녀석은.

‘고토’의 모습은 아주 초연하다. 녀석으로 인한 혼란과 당혹스러움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전혀 개의치 않는 건지…. 얄미울 정도로 차분한 태도이다.

“이 새끼가 왜 여기 와 있냐?”

손가락으로 고토를 가리키면서 비로소 경무가 묻는다. 희상이나 경무로서는 응당 나올 법한 질문이다. 왜 있는 거냐고, 태정의 이름을 부르며 답답한 듯 경무는 재차 대답을 재촉하지만 우뚝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사왔냐?”

희상의 어깨너머로 고토가 말을 던지자 묵묵부답에, 정지돼 있던 태정은 그제야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곤 고토에게 들고 있던 것을 건네주었다. 녀석의 주문이었던 건가. 설명이 된다. 그 이질감 말이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 주차 돼 있는 것이나, 영화나 소설 속 인물의 냉장고를 채우는 저 수입 생수를 들고 있는 것이나.

아니다. 대체 뭐가 설명이 된다는 것인가…. 마치 태정이 심부름꾼처럼 저 고토에게 물을 사다 바치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건가 말이다. 그 이전에….

“태정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잠깐 혹시 이 녀석, 너한테 무슨 협박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런 거지?”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런 것이었다. 과거 고토의 행동 패턴이나 음흉했던 속성을 기억할 때 가장 그럴 듯한 가정이 된다.

“맞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도대체 저 새끼 또 무슨 개수작을….”

경무가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면서 맞장구를 치면서 흥분했다. 하지만 태정은 경무의 뒷말을 막으며 아니라는 모양으로 고개를 내젓는다.

“그런 일 없어.”

부정을 하는 태정의 얼굴은 방 안의 불빛과 바깥의 어두움이 교차되어 음영이 져 있다. 그것 때문인가. 녀석이 매우 피로해 보였다. 고토 때문이겠지…. 태정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희상은 필시 그럴 것이라 확신한다. 고토 녀석은 모든 싸움과 폭력, 분란과 고통을 조장하는 근원적인 악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더군다나 녀석 때문에 태정이 녀석이 어떻게 되었는가….

갑작스레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과거로 인해 고토를 보는 희상의 시선엔 절로 증오와 미움이 실린다. 그러나 정작 녀석은 아주 평온하고 느긋하게 보틀의 입구를 비틀어 열어 물을 마시고 있다. 그들의 대화를 경청이라도 하듯 그들 셋을 둘러보다가 물에서 입을 떼고 한마디 한다.

“내가 여기 좀 와 있다고 거참, 시끄럽게들 구는군.”

역시 영리한 녀석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를 분위기로 바로 파악하고 있다.

“당연하지 너, 네가 올 데가 아냐 여긴. 또 무슨 꿍꿍이속으로 여길 온 거냐?”

경무가 고토를 상대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한 걸음 다가가 눈매와 목소리를 있는 힘껏 깔아 무게를 잡으며 한 걸음 고토에게 바짝 다가선다. 경무의 체격이 체격인지라 웬만한 상대는 그런 동작만으로도 상당한 위협을 느낀다. 하지만 여간내기가 아닌 고토이다. 반응이 고작 고깝다는 듯 고개를 비틀며 코웃음을 내는 것이다.

“궁금하냐?”

싱글싱글 웃으면서 고토가 말했다.

“뭐?”

“궁금하냐고. 내가 여기 있는 게.”

장난스런 어조로 말하는 고토는 여전히 빙글, 넉살 좋게 웃고 있다. 막상 녀석이 그렇게 나오자 경무가 당황한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대답하지 못한다.

“너흰 이해 못 할걸.”

희상과 경무를 한꺼번에 무시하면서, 고토는 ‘안 그러냐’며 태정에게서 동의를 구한다.

‘너희’라니…. 그 말은, 무언가 고토와 태정을 한데 묶어 주는 끈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대체 희상이들이 이해 못 할 ‘녀석들’의(어째서 고토 자식과 태정을 한통속처럼 말해야하는지 희상은 영 내키지가 않는다) 끈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게 점점…. 이해를 못 해? 우리가 뭘 못 하는데.”

경무 녀석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시합전의 습관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우둑우둑 꺾는다. 고토의 목을 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경무는 대단한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말해줘도 좋겠지만 말야.”

고토는 경무를 시험하듯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저 약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경무가 뿌득, 이를 가는 것이다.

“이 자식, 뭐야 이거……. 야 태정아.”

경무가 태정을 부른다. 아마도 그건 ‘이 자식 좀 어떻게 해보라’는 뜻이리라. 대뜸 말하라고 고토에게 호통칠 법한 경무였다. 그런 성질의 경무가 주춤 물러서고 있다. 아마도 경무는 희상 자신과 같은 것을 은연중에 느꼈던 게 아닐까. 고토 녀석, 입을 열면 마치 폭탄이라도 터질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뭔가 대단한 거라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별것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분명 별것 아니어야 했다.

“으음…, 말해줄까? 이 녀석들이 널 이해 할 수 있는지 못하는지. 내가 할까 네가 할까. 응? 테.짱.”

“테짜앙?”

경무가 자신이 들은 것을 의심하듯 말을 길게 늘인다. 가관이다. 태정을 테짱이라고 부르고 있다. 저 고토가. 수통을 손에 쥔 채로 팔짱을 끼고 턱짓으로 여기 저기 사람을 찍어 가리키며 말하는 것은 아주 가볍다. 가볍지만, 태정의 표정은 무겁기 만하다. 그렇군… 녀석은 태정의 의향을 묻는 듯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군, 희상은 태정을 본다. 고토가 시험을 하는 건 경무나 희상이 아니었다. 태정이다. 모두 태정을 겨냥한 것이었다.

“가주지 않을래.”

조용하지만 확실한 한마디. 희상은 그 말을 고토에게 ‘돌아가 주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태정의 몸과 얼굴이 고토를 향해 있고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착각임을 깨닫는다. 태정은 지금 그들의 말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경무가 입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태정이 너 지금, 우리한테 돌아가라고 하는 거냐?”

고개를 조금 숙인 태정의 옆모습. 불현듯 희상은 녀석을 피곤하게 하고 있는 것은 고토가 아니라 어쩌면 자신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태정이 너 이 자식, 왜 이런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거냐고….

못난 자식. 지금 희상은, 고토보다도 태정이 녀석이 더 밉살스럽게 보인다.

무겁게 고개를 들면서 태정은 경무를 그리고 희상을 바라보았다.

“이해 못 할 거다.”

점입가경이다. 믿어지지 않았다.

태정이, 고토와 똑같은 소릴 하고 있었다.

“야 조태정!!!!”

참지 못한 경무가 태정의 멱살을 틀어쥔다. 바로 옆에선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움츠린 고토가 소리를 죽이며 웃고 있다. 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인가. 이곳에서 멱살을 잡혀야 할 사람은 저 고토인 것을. 고토가 그들을, 갖고 놀고 있었다.

“꺼져야 할 건 저 새끼잖아. 그런데 우리더러, 돌아가라고? 이해를 못 한다고? 너 희상이가 여길 무슨 마음으로 찾아 온 건 줄 아냐? 너한테 모진 말 좀 했다고, 그게 신경 쓰여서 이 녀석 얼마나 안절부절 한 줄 아냐. 그래서 일부러 찾아왔더니 뭐? 너, 뭐라고 했냐?”

경무의 폭발은 오히려 희상에게 냉정을 찾아다 주었다. 이즈음의 태정의 언행에 실망을 했지만, 희상은 ‘고토’라는 변수를 모르고 있었다. 고토가 태정을 맴돌고 있었다. 그 중요한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그때부터―고교시절부터 말이다―둘 사이에서는 심상찮은 기류가 흐르지 않았던가. 모를 수밖에 없었다. 태정이 그 사실을 꽁꽁 숨기고 있었던 것을.

하지만, 누구보다 고토를 잘 알고 있는 태정이다. 분명 그만한, 녀석만의 이유가 있으리라. 희상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여전히 태정을 믿고 있다. 그래서 지금 희상은 더 냉정해 져야 했다.

“경무야, 그만해.”

희상이 경무를 말린다. 결국 이렇게 됐다. 경무 녀석을 중재로 내세워 이곳에 온 건데, 중재역이 되는 건 또 희상의 몫이다.

“망할 자식.”

경무가 꾸욱 문 잇새로 욕설을 지껄이며 파악, 태정을 밀치듯 멱살을 놓는다. 그리고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것처럼 손을 턴다.

“태정아 미안하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와서.”

“희상아.”

희상이 사과하자 태정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슬쩍 내 젓는다.

“다만 이것만은 알아줘. …우린, 널 믿어.”

“그만해 희상아. 너 이 녀석한테 화낼 만했어. 더 화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경무가 이의를 제기하지만 희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가 뭔가를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널 믿어. 이해할 순 없어도 믿어. 끝까지 널 믿을 거다. 그러니까…, 너도 널 믿어.”

제발―.

마지막 한마디를 희상은 속삭이듯, 중얼거리듯 말했다. 태정이 들었을까. 하지만 그렇게라도 빌고 싶었다.

태정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고개와 시선을 비껴 정면으로 희상의 말을 받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고 싶었던 건지 태정은 알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것이 희상의 믿음이다.

“…돌아가자. 경무야.”

얼굴에 잔뜩 못마땅한 기색을 하고는 있지만 희상의 진지함을 느꼈던 건지, 경무가 의외로 선선히 희상의 말에 따른다.

“흐음…, 가는 건가?”

뒤에서 고토가 중얼거린다. 에이, 재밌어지려다 말았다고, 아쉽게 혀를 차는 소리도 들린다. 경무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그러지 말라고 낮은 목소리로 희상이 경무를 달래지만 소용없다. 소매를 두어 번 잡아끌지만 석상처럼 꿈쩍 않는다.

“야!! 너―!! 그래 너. 고토.”

경무의 부름에 고토가 자신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날 불렀냐는 제스처를 취한다. 희상은 조금 불안해진다.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조용히 돌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태정을 포함하여―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괜히 고토 녀석을 들쑤셨다가는…….

“네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진 몰라도, 우린 저 녀석을 믿어. 무조건 믿는다고. 알겠냐?”

어라….

경무 이 녀석이 그런 말을……. 그것도 고토에게 할 줄은 몰랐다. 꿈에도 말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생글생글 웃고 있던 고토 녀석이었다. 하지만 경무의 말에 그 소름끼쳤던 미소가 그 얼굴에서 싸악 걷혔다. 아마도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지 않을까. 경무가 희상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이번엔 녀석이 희상의 어깨를 어깨로 툭 치며 가자고 한다. 희상은 무슨 말을 할까 공연히 가슴을 졸였던 게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태정이 자식이 네 말을 못 알아먹는 것 같잖아. 그래서….”

뭔가 계면쩍은 듯이 경무가 코를 긁으며 말한다. 희상은 대답 대신 경무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경무의 중얼거림을 듣고 희상은 두 번 놀라고 있었다. 단순히 고토를 눌러주고자 직설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태정에게 말했던 거란다. 이 녀석, 우회라는, 그런 세련된 방식을 쓴 것이 아닌가.

……공연한 걸음은 아니었다고 희상은 생각했다.

비록 ‘고토’에 대한, 매우 석연찮은 의문을 안고 돌아가게 되었어도 희상은,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