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ll the Fat Lady Sings #20
그들은 시합의 결과에 대해 아주 만족해했다. 태정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던 것이다. 패배로써 말이다. 수두룩한 격투 내기 시합들 중에서 복싱 시합의 묘미는 시간의 연장. 즉 복서들이 얼마나 한계까지 견디는가였다.
케이오나 넉아웃이 초반에 나오면 그 시합은 실패로 돌아간다. 내기 시합을 찾는 주된 이유는 물론 중독성 강한 도박의 매력 때문이리라. 그러나 또 하나, 관장은 복싱이 주는 느림의 미학을 찾는 거라고 했다. 통쾌한 케이오를 기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들은 복싱을 감질나게 대한다고, 그리고 어느새 그런 감질난 잔인함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태정은, 오늘 그런 시합을 했다. 끈질기게 달려들고 달려들어서, 시간을 연장하고 서서히 상대를 뭉개 가는…, 느리게 진행되는 잔인함을 연출했다. 결국 졌지만. 하지만 노무라는 그것이 완벽했다며 흐뭇해했다.
그들이 어떻게 시합을 그들 뜻대로 빚어내는지 태정은 모른다. 그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태정이었으니. 위너 테이크 Winner take all이라는 구식 형태를 따를 수밖에 없는 내기 시합에서 태정은 무보수로 봉사했지만 만족이라면 태정도 노무라 못지않을 것이었다. 태정은, 그들이 자신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고 보았다. 시합에서 태정은 승패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저 주먹을 있는 힘껏 휘두르고 또 있는 대로 흠씬 얻어터지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원했다.
승패는 예견된 결과였다. 하지만, 원했던 것을 마침내 ‘얻었는지’를 말할 수는 없었다.
고토는 태정이 형편없어 얻어터지는 꼴을 봐주겠다고 말했었다. 녀석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태정은 녀석을 떠올렸다. 고토에게 시합의 구체적 날짜를 일러주었을 때, 녀석은 ‘드디어’라고 전화 저편에서 중얼거렸다.
드디어, 라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드디어, 라고 말할 만큼 시합을 기다렸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리라. 태정조차 시합을 맞으며 ‘드디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을.
그리고…, 지금, ‘드디어’의 의미를 물어볼 수 있는 걸까.
고토가 숙소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도 태정은 놀라지 않았다. 창고―시합장―에선 녀석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어딘가 있으리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리고 그저 느꼈다. 지금과 같은 태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그곳에도 있었다.
요코하마에서 하룻밤을 머물라는 관장의 말에 태정은 돌아가겠다고 했다. 다음날 일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더니 관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분명 그로기 상태로 일하지 못할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었는데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하지만 굳이 돌아가야겠다는 태정을 관장이 차로 실어 숙소 어귀에 내려놓았다.
관장에게 ‘일’ 운운했던 이유를 지금, 눈앞의 고토를 보고, 태정은 깨달았다.
녀석이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태정은 또, 그를 찾아갔을 것이다.
“눈이 많이 찢어졌지? 다친 게 아주 보기 좋은데.”
아직 눈이 찢어진 부분에 태정이 밴드를 붙이고 있는 것을 보고 고토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그것을 말한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눈앞에 서 있는 고토에게 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비아냥을 넘긴다. 복싱에서 눈이 찢어지는 것은 일상다반사이다. 하마다 관장이 몇 바늘 꿰맬 수 있을 정도의 상처인 것이다. 시합 후 관장은 그런 상처에 익숙한 사람처럼 손을 놀렸다. 응급 수술을 훌륭하게 끝낸 관장은 그 상처 때문에 라면 병원에 갈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걱정? 누가 걱정을 하는데?”
고토가 이죽거리며 태정에게 바싹 다가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태정을 응시했다. 그러곤 퉁퉁 부은 태정의 뺨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면서 경고한다.
“입 조심해서 놀려, 찢어졌던 곳이 다시 찢어지는 수가 있으니까.”
주위는 어두웠고 단지 희미한 가로등만이 그 둘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태정은 오늘 엉망으로 맞아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고토의 얼굴은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저 멀쩡하고도 뻔뻔스런 얼굴이 자신의 것보다 더 흉하게 일그러져 보인다. 그것은….
“고토, 오늘 시합 말이야. 그건 내가 가진 두려움을 삭히려 했던 거야.”
그런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효과는 물론 없었다. 그렇게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태정은 시합에의 이유를 고토에게 밝힌다. 그리고 문득 태정은 녀석이 궁금해졌다.
“넌 어떨까. 응? 공포가 없는 건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건가….”
“뭐라는 거야 이 자식, 오늘 맞은 게 어떻게 된 거냐? 너?”
고토는 태정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미친 녀석처럼 뭘 중얼거리냐면서 구급차라도 불러줄까 묻는다. 그런 고토의 모습에 태정은 오히려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척인 거였어…. 그렇지…?”
과거보다 한결 더 광포하게 변해버린 듯한 고토였다. 하지만, 그건 자기 과잉 방어였던 것이다. 상대를 두려워할수록, 그리고 당황할수록 주먹을 더 난삽하게 휘두르고 펀치도 더 커지는, 그런 이치인 거다.
“그런 척이긴, 뭐가 그런 척이야…. 누가 그런 척을 한다는 거냐고…!!”
그래서 지금도, 위협적으로 고개를 들이밀면서 목소리에 힘을 싣는 거다. 태정은 오늘 시합에서 깨달았다. 그렇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결국 그런 식으로는 떨쳐 낼 수 없음을. 그래서 상대에게 달려들고,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알 수 있었다. 녀석, 또한 마찬가지임을….
줄곧 나를 무서워했었나? 고토?
형무소에 나온 태정의 주위를 맴돌며 경계했던 것을 무어라고 설명할까. 증오에 가득 찬 복수심?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가루이자와에서도 분명 녀석은 신경이 예민해 있었다. 그런데 아닌 척, 태연하게 태정을 그곳까지 데려갔다. 그리고 섹스 쇼를 태정에게 보여주고, 경찰을 부르면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면서 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써 극단의 폭력을 채택한다는 것은, 거꾸로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라 했다. 태정에게 겁을 주었던 것은 거꾸로 녀석이 겁을 먹고 있었다는 의미다.
닮아 있었다. 오늘 태정이 벌였던 시합과, 녀석은 닮아 있는 것이다.
“너, 내가 무서운 거지…?”
“뭐?”
태정이 무슨 소릴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토는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녀석이 이해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허탈했다.
그런 허튼 짓을 해가면서 고토는 이겨 보려 했던 것이었다. 태정을. 그가 주는 ‘두려움’을 말이다.
후…, 도대체 이 녀석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다시 복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가? 또 한 번 그렇게 정신을 놓고 주먹을 휘두르리라고? 고토, 넌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
“하하…, 무서운 거였냐?”
우습게도 말이다. 고토는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우스워서 태정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고토의 행동은 태정이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녀석의 생각을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무슨 소릴 하느냐는 고토를 뒤로하고 태정은 조용히 계단을 올라 잠긴 문 앞에 섰다. 뒤이어 한 발 늦은 고토의 성급한 발소리가 쿵쾅쿵쾅, 안 그래도 부실한 계단을 무너뜨릴 것처럼 울린다. 그리고 그 소리에 질 새라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너 이 자식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지금, 내가 널 무서워한다고 했냐? 엉?!! 이게 진짜…. 어디서 기어 오르냐? 감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다. 녀석은 끊임없이 그 자신이 우위임을 입증하려 들었고, 그것은 언제라도 태정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음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고토가 항시 자신에게 주입하려 들었던 사실을 태정은 떠올린다.
연발되는 고토의 질문에 대답 없이―사실 응대가 필요 없는 질문들이었으니―묵묵히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고토가 힘을 주어 태정의 팔을 낚아챈다. 고토 쪽으로 돌아설 수밖에 도리가 없다.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도발이다. 태정의 도발. 누군가를―특히나 고토를―도발하는 짓은 태정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모든 것이 평소와는 달랐다.
“대답해!!!”
고토가 이번엔 태정의 옷을 틀어쥐며 뒤로 밀어붙인다. 콰앙. 밀리면서 태정의 등이 살짝 열려 있던 문을 시끄럽게 닫는다. 뭐야 시끄러워!!! 어디선가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두어 집 건너 속옷 차림의 사내가 나오더니 불만을 토해낸다.
고토는 씨근덕거리며 한참을 태정의 멱살을 붙들고 대치상황을 연출했지만, 소동에 성질을 부린 사내가 여전히 그들을 주시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태정을 풀어 주었다.
젠장, 어지럽다. 고토의 멱살을 쥐고 흔든 것만으로 머리가 한 번 땅에 부딪은 것처럼 진탕 쳤다. 태정은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게다가 얼굴이 붓고 찢어진 눈은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이지러졌다. 머릿속은 쿵쿵 울리고 술에 취한 듯 아직도 강한 펀치의 충격이 가라앉으려면 아직 멀었다.
태정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주면서, 한 번 열렸다 닫힌 문을 다시 열었다.
“들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정을 젖히고 고토는 성큼 안으로 들어선다.
“그래 들어가도 돼.”
태정은 초청의 말을 고토의 등 뒤에서 끝내고 자신도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켠다. 비슷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호한 생각이 스친다. 녀석이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태정의 영역을 침범한 적이 있지 않았나.
고토는 들어와서 내부를 살피더니, 경악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 너, 이런 데서 사냐?”
혐오와 경멸이 뒤섞인 어조로 말하면서 녀석은 신발을… 벗고 다다미 위로 올라온다. 왜 계속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때와 말이다. 아니야. 틀려. 전혀 비슷하지 않다. 그때와는 다르다고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태정은 노력한다. 웅웅거리는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네 꼴을 좀 봐. 몇 달 전 비루먹은 개 같은 모습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그 비렁뱅이 꼴이 엉망인 건 여전하다고. 그런데, 몸을 좀 불려서 주먹을 휘둘러보니까 이젠 내가 만만해 보였냐? 뭐어∼? 무섭냐고? 그랬냐? 엉?”
‘이런 데’라고 말한 곳이 낡은 목조 아파트임을―게다가 모두 곤히 잠든 새벽녘의 시간임을―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고토이다.
“저기 고토, 목소리 좀 낮춰줘.”
태정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손짓과 함께 고토에게 나직이 주의를 준다. 그저 같은 건물사람의 불평이 또다시 터져 나올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 자식이!!”
왜인지 휘익―하고 고토는 대뜸 주먹부터 날린다.
터억.
예고되지 않은 공격에 흠칫 했지만, 태정은 손쉽게 고토의 주먹을 손으로 받는다. 손바닥이 흡수한 충격은 컸지만, 그 위력이란 것은 과거 고토가 보여주었던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체력이 바닥난 태정이 날린 주먹을 틀어쥘 만큼. 하지만 고토는 재빨리 다른 쪽의 펀치를 연이어 날렸다.
콰앙. 대단한 격파 소리에 이어 나오는 건….
고토의 신음이었다.
“으으… 으잇… 젠장…”
신경질적으로 내지른 주먹을 태정이 옆으로 빠지면서 살짝 피하자 고토의 주먹이, 벽면을 아주 세게 가서 박았던 것이다. 자기가 가하고자 했던 만큼의 충격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고토가 공격 오류를 범한 손을 털면서 욕설을 지껄였다.
“어디 좀 봐.”
혹 뼈에 손상이 있을까 녀석의 손을 보려 했지만 역시나 순순히 잡혀 주지 않는다. 그를 쳐내는 손을 가만 있어보라며 태정은 억지로 꺾어 붙들었다. 눈에 띄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드는데 고토는 그새 손을 비틀며 태정의 손아귀에 있는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태정은 놓아주지 않는다.
“이봐, 무서워하지 마.”
사소한 고토의 행동 하나가 태정의 믿음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그 사실이 태정에게 별 효용가치는 없었다. 두려움을 빌미 삼은 협박이라든가 공갈 같은 건 할 수도 없었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녀석의 전문이 아니었던가. 다만 태정은 가해자가 할 수 있는 속죄를 하려는 것이다. 단지 그것 뿐. 그런데 저 고토라는 녀석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왜 널 무서워한다는 거지? 너한테 폭행을 당해서 턱이 나가서? 각막이 손상돼서 이식을 받았다고? 이빨이 부러져서 네 개나 새로 박아넣었다는 것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그래, 엉덩이를 네 녀석한테 대줬다고? 그래서 내가 널 무서워한다고…. 그런 의미냐?”
고토는 한결 톤다운 된 목소리로 그가 입었던 데미지에 대해 읊는다. 금세라도 태정에게 덤벼들려 했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해 아주 차분해져 있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녀석의 대응은 매우 탄력적이다.
자신이 불리하다 싶자, 과거 태정의 무력행사가 빚은 결과를 그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태정이 그것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녀석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곳을 찾아 교묘하게 파고드는 고토는, 지능적인 동시에 동물적 인간이었다.
“푸핫…. 정말 그런 착각을 하는 거냐? 난 나약한 인간이 아니야. 너처럼. 너 그 녀석이 너 때문에 죽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그 녀석 이름이… 김 뭐였더라? 뭐어 죽은 조센징 녀석 이름 같은 걸 내가 기억할 리 없지.”
고토는 김영일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유쾌한 기억을 떠올리듯이. 아아. 그랬지. 히로카즈였나…. 그가 그건 장난 같은 일이었다고 말했던 사실을 태정을 떠올렸다. 고토에게 김영일은 이름조차 기억할 가치 없는 죽은 조센징 녀석이었다.
“이건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토는 씨익, 한쪽 입술을 올리며 웃는다. 그 미소는 더할 나위 없이 사악해 보였다.
“네가 어떻게 했어도 그 일은 일어났어. 녀석은 죽을 운명이었단 말야. 내 손에 말이야.”
“……농담이지…?”
그렇지 않을까 의심했던 사실이 장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지만 막상 그 사실을 맞닥뜨리자 태정은 믿을 수 없었다.
“농담? 하하하… 네 녀석들 농담을 좋아하는군? 농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김인가 뭔가 했던 녀석 끝까지 했던 소리가 뭔지 알아? 눈물에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말야. 농담이죠? 이거 농담이죠? 장난이죠? 그 말만 마냥 되풀이하더라고. 목에 스스로 밧줄을 걸면서 말야…. 그 덕에 일이 수월해졌지만. 녀석 어찌나 질질 짜대던지 참…. 정말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
고토는 자랑스레 자신이 한 짓을 떠벌리면서 태정을 느긋하게 쏘아본다. 태정이 고토의 두 손을 붙들고 녀석을 제압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오히려 태정은 자신이 고토에게 붙들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녀석, 뭐라고 하는 거지? 태정은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듣고 싶어했던 이야기였건만. 고토가 말한 것은 태정이 실로 바라던 사실이었다. 자신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고토를 무력으로 깔고 안았다―그땐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김영일의 죽음과는 부인할 수 없는 인과관계가 있다 여겼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을 고토가 제 입으로 밝히고 있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시합 때보다도 더 격렬하게 심장의 고동이 뛰고 있었다.
도무지 가라앉지가 않는다. 후욱 후욱. 태정은 심호흡을 했다. 듣고 싶은 사실을 들었는데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건, 그저 녀석이 태정을 떠보는 것이다. 허세일 뿐인 것.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에서 나타나는 반응을 숨길 수는 없었다. 고토가 그 반응을 알아채곤 피식 태정에게 조소를 보냈다.
“이제 알겠냐고…? 무서워한다는 건 그런 거야. 농담? 아직도 농담 같냐? 아아, 그런 게 너와 나의 차이점이지. 넌 그런 걸 농담이라고 믿고 싶은 거고, 나한텐 그런 게 바로 농담인 거야. 하하. 그런데 내가 널 무서워한다고? 응?”
고토는 계속적으로 자신의 강함을 말하고 있었다.
“크큭. 그래, 아주 무섭다. 무서워 죽겠네. 큭.”
녀석은 낄낄거리면서 태정을 조롱했다. 자신의 두 손을 결박하고 있는 태정에게 더 바싹 다가서면서 자신에겐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을 과시한다. 그리고 녀석의 그런 밀착은 태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단순한 밀착이 아니라 하체를 비벼오는, 노골적인 성적 도발이었던 것이다. 태정은 입이 말라왔다. 제기랄. 씨팔. 바싹 마른 입 속에서 욕설이 돈다.
“이봐 내가 널 무서워하는 것 느껴지냐? 응?”
고토가 태정의 허벅지에 자신의 사타구니를 비비면서 묻는다. 녀석을 붙잡았던 손이 절로 느슨해진다. 이제 누군가를 ‘붙드는’ 쪽은 고토이다. 허억. 태정은 짧은 숨을 토해냈다. 고토가 태정의 다리 사이의 그것을 ‘붙들었던’ 것이다.
“오우 멀쩡하군. 복싱하다가 여길 다치는 녀석이 가끔 있지.”
“후우…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성기를 주물럭거리는 그 손에 반응하지 않으려 태정은 숨을 고른다. 그 많은 경우의 수에서도 가장 나쁜 수에 걸려들었다. 제일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건….
태정이 고토에게 저질렀던, 기억조차 지워버리고 싶었던 그때의 상황을 태정은 지금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행위가 명백히 그러한 ‘기억의 상기’를 의도하고 있음을 고토는 말로 확인시켜 주었다.
“왜? 내 기억으론 이게, 그때 굉장히 흥분했었는데 말야. 정신없이 내 엉덩일 찔러대면서 헉헉댔었다고. 야, 너, 그렇게 좋았냐?”
고토는 주먹을 살짝 쥐곤 툭, 툭 태정의 가랑이를 때리면서, 그것에 대고 ‘너’라며, 묻는 시늉까지 한다. 가벼운 잽과 같은 충격―그곳은 가장 무방비한 부분이다―에, 태정의 하반신이 움찔 움찔 거린다.
“하, 이게 좋다고 하는데?”
녀석이 태정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웃는다. 그리고 그렇게 웃으면서 지익, 태정의 지퍼를 내린다. 웃는 눈은 태정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는데, 녀석의 손은 그렇지 않았다. 태정의 앞섶을 열어젖히고 그 속을 파고 들어온 손의 움직임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하반신을 한 번 감싸 어르다가, 이제는 태정의 중심을 쥐락펴락한다.
“그만해…. 고토. 으후….”
태정은, 자신의 생리적 반응을 최대한 억제하려 호흡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일어서려는 것이다. 고토의 손에, 말이다.
“부탁이니까…. 제발…, 그만둬.”
이 상황이 고토의 의도임을 그리고 녀석이 자신을 부추기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건 고토의 부비트랩인지도 모른다. 가루이자와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어떤 장난을 꾸미고 있는 건가….
“부탁?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응? 그렇게 말하면서, 벌써 이렇게 커지면 되나….”
고토에겐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녀석의 손길에 북돋아져 자라나는 것이 마치 보살핌이라도 받는 것 같다. 견딜 수 없다. 주체 못할 흥분을.
그러나 무엇보다 태정이 견딜 수 없는 건…….
“너, 대체 뭘 원하는 거지?!”
태정은 고토의 어깻죽지를 붙들고 힘껏 녀석을 밀어낸다. 쿠당당―! 무방비 했던 고토가 바닥으로 엉덩이를 찧으며 넘어지고, 녀석에게 허리를 붙들렸던 태정이 그와 함께 꼴사납게 나뒹군다.
“원하는 게….”
녀석의 어깨를 바닥에 대고 단단히 누르면서 태정이 다시 묻는 찰나, 녀석이 웃었다. 쿡쿡쿡 웃는 녀석의 아랫배가 울린다. 그 울림은, 태정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그제야 태정은 자신이 녀석의 배를 깔고 올라타 있는 상황을 인식한다. 그런데도 웃는다. 고토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못내 웃기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계속 웃는 것이다. 이 녀석 왜 웃는 거지? 고토의 웃음에 태정은 멈칫, 잠시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그것은 태정에게 어떤 단서를 제공했다.
“넌 알았던 거군.”
“뭘 알아?”
예의 그 비식거리는 웃음을 유지하면서 고토는 태정에게 반문한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고. 고토, 넌.”
“아아, 이젠 내게 책임을 떠넘기겠다 이건가? 이것 보라고…. 지금 무서워하는 게 누구지? 엉? 두려워하는 건 네 녀석이잖아. 알아? 난 하나도 두렵지 않다고.”
녀석은, 자신을 내리 누르고 있는 태정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태정은 다가오는 손에 몸을 뒤로 빼지만, 그때는 이미 잡혀 있었다. 앞 춤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바지와 함께 팬티가 마치 갈고리에 걸린 것처럼, 고토의 양손에 잡혀 끌어내려졌다.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최초 공개되는 전시물이라도 되는 양,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 힘을 받아 딱딱해져 가는 자신의 것을, 태정은 망연히 내려다본다.
…견딜 수 없는 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다.
그리고 그 가정이란, 다시 고토와 얽히는 것.
얽힌다는 것은 육체의 교합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태정은 노력할수록, 피하려 할수록 가장 좋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려 버리는 것이다. 종국에 가서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라고 하는 변칙을 그는 생각한다.
처음부터 자신이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로 바로 뛰어 들면 무의미한 노력에 힘을 소진하진 않으리라.
차. 라. 리.
역사는 진화하는 게 아니라 반복되는 거라고 했나. 그 순환설을 태정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과의 과거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면….
바야흐로 태정은 자진하여 그 가설에 하나의 모델을 추가, 제공한다.
* * *
고토에게 저항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녀석의 말대로라면 그것이 당연한 거겠지만, 당연하게 여길 수만도 없었다.
두렵지 않다고 했나….
고토가 사소한 것에 자존심을 세웠던 녀석임은 누구보다 태정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나 겨우, 그런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태정도 무의미한 일을 자청하지 않았던가.
태정은 그 이상 생각하기를 멈춘다. 적나라히 드러난 고토의 하반신에 사고와 함께 일순 몸도 굳는다. 녀석을, 그렇게 만든 것이 태정, 자신이었으면서.
녀석에게서 벗겨낸 옷을 들고, 일어난 태정은 고토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정의 시선을 고토가 직시하면서, 천천히 다리를 좌아악 자랑스럽다는 듯 좌우로 벌렸다.
화악―뜨거운 피가 용승湧昇해 태정의 굳은 몸을 풀어주고 있었다.
지체할 수 없다. 머뭇거리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손에 든 고토의 옷을 구석으로 던져버리면서, 태정은 고토가 벌린 다리 사이로 무릎을 꿇었다. 지체하지 않고, 녀석의 한 다리를 들어 어깨 위로 올렸다. 이미 꼴사납게 노출되어 있던 태정의 사타구니였다. 허벅지에 어중간히 걸쳐있는 바지를 제대로 내리는 여유 따위, 부려볼 시간은 없다. 이미 고토의 장난으로 웬만큼 준비가 된 자신을 태정은 두 어 번 손으로 마찰시키고는 곧바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래, 난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지.」
태정이, 그 비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서는 순간, 고토는 사실을 지적했다. 눈과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고. 태정은 고토의 ‘드디어’라는 의미를 알았다. 이것이 자신에겐 ‘차라리’였다면, 녀석에게는 ‘드디어’였던 건가. 으윽… 고토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아 벌리면서 쿠욱 자신의 하체를 디밀자 고토는 목구멍을 울리며 신음을 토했다.
걸려 있던 미소가 태정의 행위에 의해 금세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고토의 말을 태정은 온몸으로 막았다. 녀석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것이 태정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실감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깨닫는다. 이렇게, 이런 추한 방식으로 말이다.
―녀석이 살아 있다는 것을.
꽈악, 어깨에 걸쳐진 고토의 허벅지를 바싹 끌어당기며, 푸욱―태정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더 고토에게로, 깊숙이 찔러넣고 있었다. 쐐기를 박아 넣듯 녀석을 가른다. 뜨거운 열기가 침입한 태정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것이 녀석의 에너지. 쿠국. 꾸구욱…, 태정은 겨우 자신의 모두를 고토가 지닌, ‘한 점’으로 쑤셔 넣는다. 그리고 비로소 그때, 고토의 방출하는 에너지를―체온을―온전하게 느낀다. 고토의 내부에서, 자신의 페니스는 체온계처럼 녀석의 체온을 재고 있었다. 그곳이 뜨거워 터질 것 만 같다. ―태정의 수은주는 폭주하며 상승한다.
어쩌면, 이런 방법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지도 모른다.
주먹을 받고 주먹을 뻗는 것으로 얻는 고통, 온몸을 울리는 전율로 죽음을 느꼈듯.
녀석과 이렇게 몸과 몸을 맞대고, 비벼 섞는 살이 달궈지는 뜨거움에 ‘생生’을 실감하는 것이다.
크읏. 거기에 태정은 정수리까지 내닫는 갑작스런 아찔함을 경험한다.
…고토가 갑자기 태정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말해봐……. 내가 뭘 두려워한다고? 엉?”
녀석은 손으로 태정의 엉덩이를 꽈악 쥐어 잡고는, 그 자신 쪽으로 안아 끌었다. 동시에 고토의 얼굴은 살짝 경련을 일으킨다. 스스로의 행위가 고통을 수반 한 것이다. 그러나 태정에게 묻는 녀석의 얼굴에는 통증으로 인한 이지러짐과 함께 득의만만한 웃음이 더불어 공존하고 있었다.
끝까지 녀석은 행위의 이유를 그것에서 찾고 있었다.
좋아. 네가 그것이 이유라고 한다면, 계속 증명해 봐 고토. 태정은 소리없이 뇌까리며 녀석의 다리 사이에 압박을 가한다. 더 이상 밀착될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사내 둘의 하체가 이렇게까지 들러붙을 수 있음을 태정은 깨달았다.
이제 태정은 구조의 전복이라든가 탈출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너무 순진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믿음은 사라졌다. 태정 자신에 대한 신뢰조차 제로인 상태에서 어떤 믿음이 설 수 있겠는가.
그 대신 그 자리에는 다른 대체물이 들어선다. 이런 동물적인 하반신의 욕구 발산 말이다. 빈 깡통 마냥 머리를 텅 비운 채 태정은 교접하는 행위에 몰두했다.
그것이 너무 좋았다.
모든 것을 배제하고 성적 쾌감만을 극도로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첫 섹스였다. 마지막 섹스 후 2년 7개월만의 섹스인 것이다.
마지막 섹스를 했던 녀석과 태정은 첫 섹스를 했다.
고토와는 첫 섹스만, 두 번이다.
* * *
그것만으론 모자랐다. 그날 밤, 녀석과 두어 번을 더 한 것 같다. 머리는 쿵쿵 울리고, 몸이 부서질 것 같았던 상태였다. 그런데도 고토의 허리를 잡아끌어 또 했다. 만약 시합이 없었더라면 몇 번을 뺐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으리라.
잠에서 깼을 때는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잠을 깨운 것이 타는 듯한 갈증 때문이었는지 전신의 통증인지는 애매했다. 고토는 물론, 보이지 않았다. 개수대에서 물을 받아먹다가 또 얼굴을 씻다가, 찢어진 눈의 통증에 상처를 살폈다. 손바닥만 한 거울을 들여다보니, 어렸을 때 코가 부러졌던 때의 유인원보다 더 끔찍한 녀석이 그 속에 있었다.
그런 얼굴로 헉헉대면서 고토 녀석과 섹스를 했던 것인가. 그때를 돌이켜 보면 낯이 뜨거워질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합으로 인한 얼굴의 통증에 입을 벌린 채로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입 속에 모인 침이 주룩 흘러내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피가 섞인 침이 녀석의 가슴에 떨어져 흐르던 것을, 태정은 바로 알지 못했다. 거기에 무릎은 다다미에 까져 있었다.
시합의 상처나 통증은 온데간데없이, 태정은 그 상처가 굉장히 쓰렸다. 쓰린 아픔과 동시에 고토 속으로 들어갔던 밤의 기억이 함께 밀려와서, 그 이후로도 태정은 한동안 무릎의 상처만 보면 혼자 얼굴이 벌게졌다.
어쩌자고 고토 녀석과 그렇게 또 얽혀 버린 것인가. 바보 같은 새끼. 태정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무릎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그리고 시합의 붓기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고토가 다시 불쑥 태정을 찾아 왔을 때는 그런 어리석음도, 벌겋게 얼굴을 달군 수치심도 모두 잊어 버렸다. 시합날 밤처럼 또 태정은 고토의 엉덩이를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
고토는 그렇게 느닷없이 태정을 찾아와서, 노골적으로 태정의 가랑이사이로 손을 뻗어왔다. 태정은 녀석을 거부할 수 없었다.
횟수는 거듭되었다. 그게 언제일지는, 날짜나 시간은 물론 고토에게 달려 있었다. 녀석은 일주일의 간격을 두는가 하면, 관계를 했던 그 다음날에 다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섹스 중에 태정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고토의 눈을 보면, 녀석의 눈을 쳤던, 고토의 턱을, 그곳을 가격했던 느낌이 손가락 관절을 지잉 울리는 듯했다.
아직도…, 그리고 그때의 모습이 단편적인 영상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차마 만질 수가 없었다. 웃기게도 말이다. 관계의 재계는 그렇게 난폭했지 않았던가.
거칠고 사나웠던 것은 오로지 처음뿐이었다―처음과. 두 번째 처음.
위태위태한 관계가 지속되면서부터, 태정은 항상 고토를 살폈다. 그리고 고토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태정이 관계 중 입을 다무는 것에 반해 녀석은 잘 지껄였다. 「불안하지? 내가 엉덩이를 대주는 게 말이야. 그래서 대줘도 그렇게 못하는 거냐?」
태정이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침범해 들어가면, 고토는 그런 식으로 조소했다. 그리고 녀석의 말대로였다. 태정은 불안했다. 고토 녀석과 자신의 하체가 버물려져서 그 쾌감으로 뒤통수가 세게 당기는 때조차 일말의 불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기억의 재생. 아무리 조심스럽게 녀석과 관계를 해도 자연스레 머릿속에서는 과거가 리플레이되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태정은 녀석을 느낀다. 그것이 매번 반복되어 태정은 그 균열에 불안을 느꼈다. 또한 고토는 언제나 태정의 그러한 불안을 도발하고 확인하고 싶어했고, 그리고 만족을 느끼는 것이었다.
별장에서, 고토는 여자와의 관계를 드러내놓고 태정에게 과시했을 때 여전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제는 스스로 태정의 방으로 걸어 들어와 태정을 발기시키고, 스스로 바지를 벗는다. 그것을 단지, 녀석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성적 욕구의 변태적으로 발산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건가―그런 게 아님을 스스로에게 묻기 전에 태정은 알고 있다.
녀석은 전혀, 여전한 게 아닌 것이다.
“어이. 그런 멍청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기분 나빠.”
녀석과 바닥을 구른 후에 또다시 결론이 나지 않은 사념으로 빠져든 모양이다. 고토가 바닥에 누워 사정이 끝난 태정을 밀어낸다. 고토가 태정을 부르는 호칭은 어이, 라든가 이봐, 혹은 멍청아 또는 조센징 새끼. 그에 준하는 욕설 같은 것이었다. 녀석이 태정의 이름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정말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너’는 그중에서 가장 양호한 호칭이었다.
“힘들어. 네 녀석이 닦아봐.”
고토는, 태정이 떨어져 나간 다리를 벌리면서, 태정에게 뒤처리를 요구한다. 욕실이 방에 딸려 있지 않았기에 바로 씻거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건 아니리라. 가끔, 녀석에겐 수치심이라는 것이 결여돼 있는 것 같았다. 아니다. 고토에겐 어떤 요소의 결핍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선천적이라 보는 것이 타당한 경우가 있다. 지금처럼.
녀석이 쩌억 벌린 사타구니가 번들거리고 있다. 아랫배와 시들어 쳐진 페니스는 녀석 자신의 정액으로 번들거리고, 그 아래로 이어진 붉게 충혈된 곳도 역시 젖어 있다. 흠뻑. 태정의 정액으로. 오늘은 안에다 뺐던 것이다. 녀석의 속에서 그냥 배출할 때도 있고, 사정 직전에 빼내서 체외 사정을 할 때도 있다. 콘돔을 쓰기도 하고 쓰지 않기도 한다. 가끔은, 윤활제라는 것을 이용할 때도 있었다. 대개, 그것은 고토의 뜻에 따른 것이다. 녀석은 예측불가에 변화무쌍한 터라, 이랬다저랬다하는 것을 그러려니 하고는 있지만, 이렇게 닦아달라는 요구 같은 건 태정도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이다.
왠지 녀석이 느껴야 할 법한 수치심을 태정이 대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고토의 말을 태정은 묵묵히 따른다. 방 안에 널어놓은 마른 수건을 걷어 물에 적셔 녀석의 배를 그리고 페니스를 그리고 항문을 차례로 닦는다. 녀석의 항문에 얼굴을 들이대면서, 자신의 흔적을 닦아 내려니, 태정은 목덜미가 왠지 뜨거워지는 것 같다.
“쿠쿡. 너, 이렇게 살고 싶냐 아직도? 내 똥구멍이나 닦아 내면서?”
녀석은, 이런 상황에서도 태정을 자극하고 충동질하는 발언을 즐긴다.
“개별적 상황이란 건 별도로 이해해야 하는 거지.”
그런 건,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의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하, 그럼. 지금 하기 싫다는 거냐?”
말꼬리를 잡는 녀석에게 태정은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가끔씩 생각난다고 네 건방진 말 말야. 살고 싶다느니, 네가 정당하다느니….”
과거의 일. 과거의 사건. 과거의 말.
태정은 이런 식으로 고토와 함께 과거로 돌아간다. 어쩌면 녀석과 태정은, 과거에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이미 되풀이되지 않았는가. 태정은 녀석을 안았다.
“나는 정당해.”
녀석을 안고, 안고 또 안는다. 과거를 극복하려고 악몽 같은 사실을 이겨보려고 말이다. 그러면서, 태정은 그가 저질렀던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읏!!…이게!! 닦으라고 했지 누가 손가락을….”
“속에 남아 있는지… 있으면 빼야 되잖아.”
태정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한다. ‘정당’을 말하면서 자신은, 녀석의 항문에 손가락을 넣고 있었던 거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가…. 녀석은 태정의 변명에 ‘멍청한 녀석’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말이 없는 것은 진행하라는 것이다.
잔여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검지를 아직 열을 머금은 곳에 깊게 밀어 넣고 손가락을 신중하게 움직여 본다. 꽈악. 별안간, 뒷머리를 녀석이 세게 잡아 왔다. 동작을 멈추고 태정은 머리를 잡힌 채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손가락 빼.”
태정은 천천히 녀석의 말대로 한다.
“올라와.”
녀석은 잡아 챈 뒷머리를 당기면서 말했다. 스윽. 손가락에 묻어 나온 체액을 태정은 맨다리에 대충 닦으면서, 태정은 녀석의 다리 사이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고토의 하반신으로 손을 가져가 물컹한 그것을 잡는다.
고토 녀석도 이럴 때만은 또, 섹스에 몰두한다. 그럴 때면 태정은 묻고 싶었다. 그저 이건 섹스일 뿐이냐고. 아니면…, 너도 극복하고 싶은 것인가―를 묻고 싶었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녀석은 태정과 같은 이유로 관계를 지속하는 건지 몰랐다. 그 어쩌면, 이라는 희박한 가능성이, 태정을 나락으로 떨어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고토를 부둥켜안고. 녀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