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ll the Fat Lady Sings #19
문을 나서기 전에 항상 누나의 사진을 보게 된다. 태정은 다녀올게 누나, 라고 소리내어 태희 누나에게 인사를 하고 밖을 나서는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습관으로 굳어져버렸다. 태정은 오늘도 잘 다녀오라는 듯한 누나의 미소를 보지만 평소와는 달리 습관적인 인사를 건네지도 않고 바로 문을 열고 성큼 나서지도 않았다. 그 앞에서 태정은 조금 서성거렸다. 그리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명함이었다. 하마다 관장이 준 명함에서 눈을 떼고 태정은 다시 누나를 마주 보았다.
누나 그때, 내가 나의 선택을 좀 더 앞당겼더라면 뭔가 달라진 게 있었을까? 응?
자신이 온힘을 기울여 노력했던 일의 결과가 2년 여의 형무소 생활이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래도 좋다’라는 식이었던 태정의 가치관에 한 가지 가이드라인이 정해지게 되었다. 두 번 다시 그곳에 발을 딛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단순한 만큼 지키기 쉬우리라 생각했건만, 그 일은 굳은 다짐이 필요했다. 왜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는지를 태정은 생각했다. 태정의 머릿속엔 한 사람이 떠오른다.
고토.
“누나, 성의라는 게 뭐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도무지…. 그러고 보니까 요샌 모르는 것투성이잖아. 옛날보다 더 머리가 나빠진 거 같다. 하하.”
태정은 누나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르는 게 있어도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 옛날엔 안 그랬었지…. 머리가 아플 때까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래서 더 편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이게 좋은 건가? 누나?”
누나는 여전히 대답이 없고, 태정은 이곳에 정말 누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아는 것과 깨닫는 것에는 괴리가 있다―멋쩍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태정은 집을 나왔다.
복싱을 다시 해보는 게 어떻겠니? 라고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 누나는 그렇게 물었다. 지금 하마다 관장을 찾아간다는 것을 알면 누나는 어깨를 두드려주었을 것이다.
‘관장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복싱을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태정은 속으로 누구에게인지 모를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곤 다시 한 번 손에 들려져 있는 하마다 관장의 명함을 내려 보았다. 복싱을 하겠다는 게 아니야…라고 태정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명함의 주소는 이상하리 만치 생소하다. 이전의 주소가 아닌가, 문득 이전을 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한때 익숙했던 장소가 생소해질 만큼 오랫동안 그곳에 가보지 않았던 것이다. 태정은 기억을 더듬어 아라시 체육관의 위치를 머릿속에서 확인한다. 그리고 스쿠터의 시동을 켜고 핸들의 방향을 잡는다.
* * *
아라시에 도착해서 태정이 새삼 느낀 것은 관장의 수완이었다. 터질 듯 풍만한 가슴의 핀 업 걸의 캘린더가 걸려 있는 건 여전했지만, 빠른 템포의 신경을 흥분시키는 유행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 같은 걸 들었었던가. 태정은 기억을 더듬고, 또 기억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체육관의 모습을 보며 사뭇 놀란다. 이전에도 나무랄 데 없는 체육관이었는데 지금은 언뜻 훑어보는 것만으로 훌륭해졌다. 관내에 관장이 있지 않을까 싶어 태정은 멀찌감치 서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했지만 그중에 관장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태정은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등록하러 오신 겁니까?”
태정이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면서 내부를 살펴보고 있노라니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중한 말투였지만, 날카로운 눈빛이 태정의 머리에서 발끝을 훑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교생인가? 자신보다 어려 보였고, 시선도 낮았다. 태정은 그를 쏘아 올려 보는 상대에게서 막연한 적의를 느꼈다.
하지만 그런 적대적인 태도가 정겹게 느껴진다. 녀석이 링 위에서 연습 시합조차 뛰어 본 적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마구잡이식의 적의 때문인 것이다. 저때쯤엔 빨리 링 위에서 누군가와 싸워보고 싶어 안달 나게 마련이라, 눈앞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적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태정이 가벼운 미소로 상대에게 용건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순수한 혈기왕성함을 굉장히 오랜만에 접했기 때문인 것이었다.
“관장님 계십니까.”
태정도 어린 훈련생에게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가를 말해준다. 한껏 드러낸 적의에 돌아간 것은 그저 잔잔한 미소와 정중한 태도. 상대의 적의는 한풀 꺾이지만 말투는 퉁명스럽다.
“관장님이요?”
거듭 태정의 용건을 확인하는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지만 그는 여전히 태정을 등록 희망자로 생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관장님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닌데…. 등록하실 거면 저어기 안도 코치한테 말씀을 하세요.”
관장 접견 자격을 심사하는 권리라도 부여받은 듯이 말하면서 훈련생은 태정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코치!”
목소리를 키워 누군가를 부르자, 이쪽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다. 그가 아까 말한 ‘안도’라는 코치 선생이리라. 스피드 볼을 두드리는 훈련생 옆에 서 있던 코치는 성큼 성큼 태정에게 다가왔다.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팔자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오면서 코치는 무슨 일이냐고, 그를 불렀던 어린 관원에게 묻는다.
“등록하러 왔나봐요.”
끝까지 상대는 태정을 등록생으로 믿고, 그 믿음과 함께 태정을 안도 코치에게 인수한다. 코치가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훈련생은 제자리로 돌아가 머리를 위아래로 올렸다 내리는 동작을 반복한다. 보빙Bobbing 동작을 연습 중이었나.
“복싱을 하고 싶으시다고? 지금부터 시작하려면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아 물론 프로 자격을 따고 싶다면 말이지만. 아니면 그냥 취미로?”
코치가 팔짱을 끼면서 태정에게 묻는다. 마치 사람을 떠보는 듯한 어투에 거만한 자세이다. 그런데다가 조금은 복서 지망생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다. 복싱을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을 보통 이렇게 대하는 건가? 의문이 잠시 일지만, 이내 사라지는 의문이다. 태정은 관장을 보러 왔을 뿐인 것이다.
“…등록하러 온 건 아니고, 하마다 관장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관장을 만나는 일이 언제부터 이렇게 힘든 일이 되었나 싶은 생각을 하며, 태정은 구체적으로 용건을 꺼내면서 오해를 어렵사리 바로 잡는다.
“하마다 관장님이라면…?”
안도라는 코치는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관장의 이름이 위력을 발휘한 것인지, 굳게 크로스 된 팔짱이 풀리면서 그제야 호기심을 드러낸다.
“그런데, 관장님께는 무슨 용무로?”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일전에 한 번 들르라는 말씀을 하신 게 생각나서 그냥 들려본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왜 관장님이 그쪽더러 그런 말을 했느냐는 걸 묻고 있는 것인데?
“그 이유야 저도 모릅니다만….”
태정이 무슨 꿍꿍이라고 가지고 있는 냥 코치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다.
“관장님은 어떻게 알고 있는 사이쇼?”
“몇 년 전 아라시에서 복싱을 배웠습니다.”
“아아 그러셨군? 어쩐지 이상한 게 척 보아하니 등록하러 온 초보 같지는 않았거든….”
코치는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덧붙이는 그의 말이 처음 보였던 코치의 태도와는 매우 상반되었지만. 태정은 따라오라면서 앞장을 서는 코치를 아무 말 없이 뒤따른다.
* * *
태정이 관장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관장은 특유의 너스레를 떨면서 태정을 맞았다.
“어이∼ 왔군. 널 만나고, 음 그러니까 벌써 얼마나 됐지? 아무튼 그동안 내내 기다렸는데 말이야. 조. 그래도 이 늙은이 늙어 죽기 전엔 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관장님.”
태정은 그저 관장을 부르며, 그가 내민 손과 가벼운 악수를 나누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던 건지 ‘잘 왔어 잘 왔어’라며 다른 한 팔로 태정의 어깨를 안아 툭툭 두드린다. 손과 어깨에서 태정은 관장의 온기를 느끼면서 왠지 모를 안도감에 휩싸였다.
“아니 관장님, 이 녀석이 죠오∼라구요?”
관장과 태정의 인사에 둘을 지켜보던 코치가 끼어들었다. 태정은 과거 그의 링네임이 이번에도 만화의 인물과 결부되는가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한다.
“아, 제 링네임이 ‘조’였습니다. 그 ‘내일의 조’ 말입니다.”
또 한 번 링네임이 우스개 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두지만, 멋쩍은 건 어쩔 수 없어서, 태정은 말하면서 뒷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태정은 곧 자신의 추측이 오히려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 생각했던 거와는 다른데….”
생각했던? 그가 태정에 대해 생각할 게 뭐가 있었을까.
그것은 저 생면부지의 코치가 링네임 때문이 아닌, 자신을, 한때 조였던 태정을 알고 있었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안도, 이제 내려 가봐. 눈만 떼면 애들이 딴 짓을 하려 들잖아. 빨리 가서 뭐 하는지 체크해보라고.”
태정은 막연한 짐작을 확인하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하마다 관장이 코치를 떠밀다시피 사무실 밖으로 내보냈다. 코치는 그렇게 밀려 나가면서도, 뭔가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코치를 서둘러 밖으로 내보내고 태정을 돌아보는 관장은 앉으라며 자리를 권했다. 뭐 마실게 없는가 중얼거리며 관장은 사무실 한쪽에 비치되어 있는 미니 냉장고에 쭈그려 앉아 음료를 찾았다. 태정은 그런 관장의 등을 바라보다가,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을 꽉 채우는 2인용 소파에 한쪽 엉덩이를 붙였다. 후우. 태정은 왠지 모르게 분주했던 상황에 한숨을 돌렸다. ‘혹시’ 하고 잠시 일었던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냥 접어 두었다. 안도 코치가 ‘조’를 알고 있을 만한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인 것이다.
“요즘도 모두 링네임을 갖고 있습니까?”
의문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아도 화제는 결국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부산히 음료를 찾으면서도 관장은 등 뒤로 건네진 질문에 성실하게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무언가를 찾았는지 관장은 쭈그리고 앉았던 몸을 끙차 하는 소리를 내며 일으킨다.
“링네임이란 건 말야…. 완전히 다른 자신을 의미하지.”
링네임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면서, 하마다 관장은 앉아 있는 태정에게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위아래로 흔들어 건네주었다. 이게 뭐지? 태정은 받아 든 것을 이리 저리 돌려 확인해보았다. 흰색의 내용물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 용기였는데, 분명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음료는 아니었다.
“어, 이런 거 처음 보는데요.”
“허허. 좋은 거니까 마시라고.”
태정이 주저하는 모양을 보면서 관장이 웃었다. 관장의 권유에 태정은 뚜껑을 열고 꿀꺽 한 모금을 기세 좋게 넘기지만, 단지 그 한 모금에 얼굴이 묘하게 살짝 일그러졌다. 처음부터 수상했지만, 이건…이런 건 처음 맛보는…, 아무튼 형용할 수 없이 굉장히 이상한 맛이다.
“콜록 콜록.”
태정은 음료 보틀의 입구에서 입을 떼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하하하 어때? 내가 한 번 만들어본 건데….”
“관장님이 만드셨다고요? 이게 도대체 뭡니까?”
“처음 맛이 좀 이상한 건 알지만, 그래도 익숙해지면 그 맛이 좋아진다고. 어? 왜 마시다 말아? 아주 좋은 거니까 한번에 다 들이켜라고.”
좋다고는 해도…. 관장의 거부할 수 없는 강권에 태정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숨을 막고 마시는 수밖에. 태정은 하마다 관장의 정체불명 자가 제조 음료를 다시 입에 대고는 꽤 남아 있는 그것을 단번에 모두 위 속으로 넘겨버린다.
“케헵… 에… 짭, 짭.”
어떤 경우엔 맛있어서가 아니라 그 믿기지 않은 맛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입맛을 다실 수 있다. 숨을 쉬지 않았어도 그 비릿하면서 달짝지근하면서도, 최후엔 받아들인 위가 미식거리는 맛이 목구멍과 혀에 남아 있는 것을 태정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태정이 보틀을 모두 비운 것을 확인한 관장은 씨익 웃으면서 설명을 했다.
“그게 내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개발한 거라고. 체중 조절 중의 복서의 근력만을 집중 강화시키고 순간적으로 발산되는 에너지의 파워를 증강시키는 건데 말야….”
“뭐가 들어가는지 굉장히 궁금해지는데요.”
관장이 말하는 음료의 효력은 둘째치고 태정은 실로 어떻게 그런 맛을 낼 수 있는지 정말 알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프로테인에 엄선된 각종 근육강화제가 들어가긴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지. 레시피는 말이지 특급기밀이라고. 아암.”
관장은 매우 뿌듯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지만, 슬쩍 노출된 비밀 아닌 비밀에 태정은 안심할 수 있었다. 대개 복서들 뿐 아니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신경 써서 섭취하는 것이었고 특별할 것은 없다. 아마도 거기에 그저 관장이 좋아하는 어떤 것들이 첨가되었으리라, 태정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관장이 각별한 생각으로 그 음료를 태정에게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비록 맛은 혓바닥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건 단순한 음료가 아닌 특별 영양식인 것이다.
“어때, 다 먹고 나니 맛이 그리 나쁘진 않지?”
“네, 아주 잘 마셨습니다. 관장님.”
맛을 떠나 태정은 관장에게 감사해한다.
“하하, 네 녀석도 미각이 정상은 아닌가 보구나. 그걸 잘 마셨다고 하다니. 사실 먹어본 녀석들마다 넘기는 것조차 고역이라느니 내 미각이 어떻다느니, 파이트 체육관 녀석들에게 먹였으면 좋겠다느니.”
관장은 음료에 대한 사실을 결국 유쾌하게 시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아…, 파이트 체육관이라고 새로 생긴 체육관 모르지? 이상하게 그쪽 녀석들이랑 시합에서도 많이 부딪쳐. 애들이 쉬쉬하지만 밖에서도 충돌하는 모양이고.”
새로 생긴 체육관에 철없는 관원들의 불평들. 요즈음의 아라시를 알 수 있다. ‘요샌 그렇군요’라는 듯 입을 조금 벌린 멍한 표정으로 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관장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때 많이 달라졌지? 아라시도.”
“네, 아래층에서 잠깐 훈련하는 걸 봤는데 외국인까지 있더군요.”
“응, 러시아에서 온 애랑 몽골에서 온 애가 한 명 있지.”
“몽골에서요?”
분명 그리 흔하게 소식을 접하거나 할 수는 없는 나라이다. 초원에서 말을 타고, 천막을 치고 이동해 다니며 사는 유목민들, 태정이 몽골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런 단편적인 것이 다이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마저 한쪽으로 경도된 이해일 것이다.
조선 국적인 태정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향된 지식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태정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녀석에게 흥미와 관심이 일었다.
“그래, 그 녀석이 또 아주 재밌는 녀석이지. 요즘 왜 스모에서 꽤 잘나가는 몽골 출신의 선수가 있지?”
태정에겐 새로운 사실이다. 고개를 갸웃하자, 오히려 관장이 놀란다. 요코즈나를 외국인에게 넘겨줬다며 스모계가 엄청난 충격의 도가니였다고, 그걸 어떻게 모르냐고 한다. 아마도 자신이 형을 살 때 있었던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태정은 그렇게 새로운, 하지만 때늦은 뉴스를 접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선수를 동경한다고, 그 선수처럼 되겠다고 하더군. 몽골에도 스모 비슷한 스포츠가 있다고 하면서.”
“어…. 스모 선수를 동경하면서 복싱을 하나요?”
“그게, 그 녀석이 불법적인 경로로 일본으로 들어온 녀석이야. 붙잡혀서 쫓겨나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거지. 아, 그러고 보니 조, 네 또래이군. 그 녀석 이야기를 들으면 인생이 심심하진 않겠다 싶어. 아주 흥미진진하지.”
“위험하고 아슬아슬하다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하하…. 조, 네 녀석한테도 난 아주 흥미가 있었다고. 물론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고 말이지. 어때? 자넨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관장의 관심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태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웃었다.
“흐음. 그렇게 그냥 웃는 걸로 얼버무릴 생각을 하는 거지? 다 안다고. 그런다고 내가 그렇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나?”
다 알고 있다는 투의 관장의 말은 태정이 그저 웃고만 있게 놔두지 않는다.
“말해보라고.”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태정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드물게 진지한 표정의 관장은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그의 말을 기다리는 관장에게 태정은 말 할 수밖에 없었다.
“감옥엘 갔었습니다.”
하마다 관장의 이마가 가운데로 몰리고, 몰린 곳이 위로 솟는가 싶다가 결국에 가서 보이는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크하하…. 아 그래? 하하. 쿠큭…….”
하마다 관장이 갑자기 주체 못 할 것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죠…, 네가 감옥엘 갔다고. 하하…. 아아. 미안. 미안하군, 웃어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말이지 괜찮았다 그뿐이랴, 관장의 대장 박소로 인해 태정은 그가 말한 사실이 한없이 가볍고 별일 아닌 사실이 되는 것을 알았다. 정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임을 관장이 깨닫게 해준다.
“…주먹을 썼군? 그렇지?”
관장은 언제 웃었냐는 듯 차분한 기색으로 태정에게 사실을 묻는다. 하지만 그건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그러나 그렇게 사실을 말하는 관장의 직관. 태정은 그의 이런 면모가 관원들의 신뢰를 모으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
“그래 그거 아니면 네 녀석, 법 없어도 살아갈 녀석이었으니. 그 주먹이 왠지 걱정은 되더라만…. 하하.”
관장은 나지막이 목을 울리고, 태정은 왠지 이전에 관장의 도움이 상기되어 고개를 숙였다. 관장의 걱정과 염려를 결국 자신은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이봐 조.”
태정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관장을 바라보자, 관장은 꺼칠한 턱을 쓰다듬으며 태정의 눈앞에 바싹 얼굴을 들이댔다.
“그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마.”
관장은 손가락의 검지를 세워 그것을 까닥이며 거듭 강조했다.
“이유를 찾지 말라고.”
단지 그것뿐이었다.
장광설을 늘어놓고 설명을 붙이길 좋아하는 관장이 거기엔 어떠한 사설도 더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관장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똑바로 알 수 있었다. 관장은 알겠느냐고 물었고, 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관장은 씨익 웃으며 묵직한 주먹으로 툭툭 태정의 뺨을 쳤다.
나침반의 자침이 정확히 남과 북을 가리키듯, 희미했던 것이 확실해진다. 어쩌면 최면을 당하는 사람의 기분이 이런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쨌거나 태정은 그를 인도하는 유일한 이정표를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태정은 그가 알고자 했던 이유를 더 이상 알려 하지 않기로 했고, 알고 있었던 이유는 모두 버리기로 했다.
좋아.
태정은 관장의 말을 조그맣게 흉내 내어 말해본다.
“호오∼, 이제야 좀 내일의 조 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군.”
태정이 중얼거린 소릴 들었는지 관장은 과거 그에게 흔히 던졌던 농담을 으레 던지고 있다.
“하하. 그 링네임 말입니다. 옛날에 거기에 익숙해지는 게 꽤 힘들었어요. 다들 한마디씩 했었지요. 한때는 관장님을 원망하기도 했다고요. 지금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링네임에 대해 과거의 추억을 태정은 상기했다.
“아아 그랬지. 지금 같은 농담 한마디에 그냥 얼굴이 시뻘개졌던 때가 있었지. 크하하. 하지만 말야. 나는 그 이름이 네 녀석한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아암 아주 잘 어울려.”
“복싱을 하고 있지 않는데도 말입니까?”
“내가 말했지? 그건 복싱을 하는 손이라고. 네 주먹을 봐.”
“네?”
태정은 자신의 손을 들어 살펴본다. 최근 건설 현장의 허드렛일 덕에 손등은 꺼칠하게 여기 저기 터져 있고, 손바닥엔 굳은살이 못처럼 박혀 있는 태정의 손은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보고 하마다 관장이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건지…. 그러나 관장은 정작 그에 관해 더 이상의 언질을 달리 주지 않는다
“조. 링네임이란 건 말야, 그렇게 쉽게 떼버릴 수 없어. 복싱을 배우는 많은 녀석들이 복싱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려는 생각을 갖고 시작을 하지. 거기에 링네임이란 걸 가지게 되면 말야…, 정말 자신이 변화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좋은 착각이지. 그건 의지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거든. 그 효과는 말야…, 말하자면 슈퍼맨의 푸른 옷이나, 배트맨의 박쥐 가면 같은 거지. 아, 그래, 세―라 문의 교복도 있잖아. 아무튼, 그것만으로 변신 완료라는 이야기라고.”
관장은 조금 긴 듯한 링네임 론論을 늘어놓다가, 결국 그렇기 때문에 링네임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간단한 결론으로 말을 맺었다.
조.
자신의 성과 똑같은 링네임.
태정의 머릿속엔, 그래서 자신이 변화하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처구니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바보 같다.
“조. 너는 왜 복싱을 배우려고 했지?”
“비슷한 이유지요. 강해지겠다는 이유 말입니다.”
“그런 이유라면 넌 그때 이미 네가 원했던 걸 가지고 있었어. 그건 내가 보증하지.”
“하지만……, 그런 걸 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 저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만의 강한 힘을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태정은 머리에 자신이 죽였던 누군가를 생각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사건을, 그것도 관장 앞에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정은 다른 이야기를 급조하여 말을 이었다.
“그저…, 감옥에나 가려고 복싱을 배웠던 건 아니었다는 거지요.”
관장은 태정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는가 싶더니, 흰색과 검은색이 공존하는 수염이 까칠하게 난 턱을 버석 버석 긁으면서 말했다.
“흠…, 그게 아닌데. 키타무라 이야기를 하는 거지?”
“…….”
태정은 침묵을 지켰고, 그 침묵은 관장의 말을 긍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관장은 그런 태정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 키타무라와의 일을 잊지 못하는 거로군.”
“잊었습니다.”
뒤늦게 태정은 상대의 말을 부정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태정 자신을 포함해서.
“키타무라는 위험했어. 아, 위험인물이란 게 아니라 위험에 빠져 있었다는 거야. 궁지에 몰려 있었지. 넌 몰랐겠지만 돈 문제가 얽혀 있었어. 빚이 많았다고.”
“그렇다고….”
돈 문제는 태정도 지니고 있었다. 그저 관장은 태정을 달래는 말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태정이 입을 열려 하자 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가로막는다.
“생각해봐. 키타무라 그 녀석이 은행에서 서류 쓰고 돈을 빌렸겠나? 스스로가 자초한 거야. 그 자식 아주 위험한 짓을 하고 다녔어. 나중에서야 그걸 수습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 같지만 너무 늦었던 거야. 키타무라가 몇 번 찾아 왔던 건 기억나나? 나한테 와서 사정을 하더군. 시합을 소개해달라고.”
시합.
“내기 시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태정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불법적인 내기 시합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았다. 관장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 적어도 하나는 근거 없는 헛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응…. 그래. 잘 알고 있는데 그래, 조.”
관장은 가볍게 코로 김을 빼며 웃곤, 부정도 놀람도 없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 마침 주선된 시합도 있었지.”
“지금도 시합이 있습니까?”
“그래, 널 봤던 날도 그냥 드라이브를 했던 게 아니었어. 시합이 있었지.”
시합…. 키타무라가 시합을 원했다니….
똑똑.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 사이 마침, 사무실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들어와! 관장이 크게 소리친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다시 안도 코치가 들어왔다.
“무겐이 연습 게임하는데 관장님이 봐주셨으면 하는데요.”
“알았어. 가봐.”
“빨리 오시죠. 녀석, 처음도 아닌데 꽤나 좋아하더라고요.”
안도 코치가 관장을 재촉하면서 먼저 나가자 태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의 벽걸이 시계가 태정의 눈에 들어왔다. 이런. 시간이 이렇게 가버렸나.
“그럼 저는 가보겠….”
“왜, 보고 가지 그래? 그 몽골에서 왔다는 녀석이거든.”
태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마다 관장은 시합의 일견을 권유했다. 그리고 태정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관장의 손에 등이 살짜기 밀린다. 결국 태정은 관장의 뒤를 따랐다. 뜻하지 않은 초청에 발길을 옮기는 것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체념이었다. 하지만 체념이 그리도 쉬운 것은, 이렇게 될 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마다 관장이 명함을 건넸을 때부터. 누나에게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설 때도, 비겁하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조차, 태정은 이미 모든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 * *
“아, 아까 전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링 주위에 서서 연습시합을 구경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태정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보자 이곳에서 처음 자신을 맞았던 훈련생이었다. 태정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태도를 보인다. 태정이 아니라고, 괜찮다고 해도 아까의 그 거침없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주눅이 든 얼굴로 힐끔 힐끔 태정을 살피면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링 건너편에서는 안도라는 코치가 이쪽에 슬그머니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링 주위를 둘러싼 적지 않은 관원들이 연습 시합보다 태정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구경거리인 건가…. 태정은 왠지 모를 씁쓰레한 기분을 맛본다.
“대부분 녀석들이 알고 있을걸.”
조금은 위험하다 싶게 살이 올라오고 있는 복부 양옆으로 두 손을 올려놓고 링 위를 응시하던 관장이 한마디 던진다.
“무엇을…, 말입니까?”
“너 말이다. 조. 누군지는 몰라도 ‘조’는 알고 있었던 거지.”
시합에만 집중하고만 있는 줄 알았는데, 관장은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악명을 떨치고 있었던 거군요. 저도 모르게 말입니다.”
“오명인 거지. 뭐어, 사실 악명도 나쁘진 않다고…, 시합에선 그런 게 어드밴티지가 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오명 때문인 건가, 아니면 악명이란 말 때문인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 말들이 이끌어낸 과거의 망령인 건가. 아니, 하마다 관장의 ‘시합’이란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 관장의 ‘시합’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관장님, 저, ‘시합’에 나가고 싶습니다.”
아라시의 문을 열고 들어 올 때, 모든 것이 정해졌다고 여겼건만, 이건 태정에게도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스스로 한 말에 태정은 놀란다.
그러나 말을 던진 순간, 태정의 ‘시합’은 결정되었다.
* * *
죽으면 용서를 빌 수도 없다. 그리고 용서 같은 건 빌었다 빌지 않았다 하는 것이 아니다. 태정은 그런 생각으로 계속 미적거리고 있었던 결심을 굳혔다. 고토를 찾아가기로 말이다. 성의를 보이라는 녀석의 말이 태정으로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기도 했고, 또 그런 상태가 바로 태정이 무성의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희상은, 돌아가기 전에 그의 ‘공포’에 대해 물었다. 고토를 죽일 뻔했기 때문에 ‘살인’에 대한 공포가 생긴 거냐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공포’는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해 있었다. 다만 실감한 것이 그때였던 것이다. 왜 하필 녀석이었을까. 키타무라는 죽었는데, 그리고 녀석은 살았는데 왜 죽음에의 공포를 실감했던 건 고토인 것일까.
고토는 태정에게 어떤 의미로든 특별했다.
고토 덕분이리라 할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이 말이다.
자신이 고토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녀석은 절대 모를 것이다.
녀석이 살.아.있.어.준.대.가.로서 태정은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려 하는 것이다. 고토가 배상을 원한다면 기꺼이 배상을 할 것이다. 그리고 구타로써 화풀이를 한다면 기꺼이 맞아 줄 것이다―이미 그리 했지 않은가. 그러나 녀석이 말한 ‘성의’라는 것은 태정에게 대단히 어려운 과제였다.
「녀석을 한 번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어.」
희상은 마치 태정의 고민을 읽은 듯 말했었다. 물론, 태정의 사정을 알 까닭이 없는 희상이 그런 말을 했던 것은, 태정이 고토의 무사에 대해, 비 이상적일 정도로 안도를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태정의 두려움이 고토를 해한 행동에 의해 유발되었다면, 현재 멀쩡한 고토를 직접 확인하는 것으로 어쩌면 그 공포를 떨쳐 버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희상의 말이었다. 분석적이고도 논리적인 것이 희상이다웠지만, 녀석은 태정이 이미 고토와 대면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두 눈으로 고토의 건재를 확인했건만 그것은 태정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고토는 그 존재 자체로서 태정을 과거로 퇴행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 움직이고 말을 하는 고토는 끊임없이 태정의 죄의식을 일깨웠던 것이다.
물론 희상은 자신의 제안을 적극 권유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말해놓고 후회하는 기색까지 비쳐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 못했던 희상의 말이, 오늘 태정의 행보에 어떤 힌트를 제공했던 것은 분명하다.
태정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못한 것이다.
관장은, 시합을 청한 태정을 한동안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한마디만 물었을 뿐이다. 「혹시, 키타무라 때문인가?」 키타무라에 얽매여 있다고 관장은 걱정을 떨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감상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아닙니다. 라고 태정이 짧게 대답하자, 관장은 흐음… 하며 턱수염이 부숭부숭 난 턱을 다시 버석, 긁었다.
「일단 몸을 좀 불려. 그대로는 안 돼…. 시합 결정은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조건부인 데다가 그마저도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하지만 관장은 태정의 청을 거절하진 않았다.
시합이라…. 또다시 무모해지는 건가. 관장에게 한 부탁은 무모, 그 자체 아니었던가. 하지만, 아니라고 태정은 사실을 부인한다. 무모한 게 아니다. 그것은 이미 경험했고 그것이 어떤 건 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태정은 시합에의 도전이 무모한 게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었다.
스쿠터를 고토의 학교로 몰면서, 태정은 시합을 생각한다. 시합을 생각하다니…. 고토를 만나러 가면서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줄이야. 태정의 사고는 다시 직면한 현실, 고토에게로 돌아온다.
공사 현장의 십장에게 못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리고, 고토의 학교를 찾아가지만, 하루를 쉰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차라리 평소처럼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쪽이 나았다.
녀석의 학교는, 태정이 있는 신오오쿠보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만나려는 마음만 있으면 로드워크를 하면서도 쉽게 오갈 수 있을 것 같다.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인간, 의 코앞에서 얼쩡대고 있었던 기분마저 들만큼. 그리고 지금은 녀석을, 자진해서 만나러 가고 있다.
오쿠보, 니시와세다, 토야마 등 복잡하게 네 군데의 캠퍼스로 나뉘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확히 알고 있다―복잡할 것 없이 가장 큰 중앙캠퍼스로 가면 되는 것이다.
커다란 광장 같은 진입로를 들어서자, 눈앞에는 대학의 상징처럼 서 있는 시계탑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푸르륵. 금세 고토의 대학에 도착해 태정은 가장 먼저 원동기를 주차장에 세워 시동을 끈다. 일단 찾아는 왔지만 갑자기 막막해진다.
희상에게 고토의 학교에 대해선 이미 듣고 왔고, 녀석을 그나마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찾아 왔지만, 막상 도착하자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토가 학교에 있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이 넓은 곳에서 찾지 못하리라고 체념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푸우. 태정은 가볍게 실소를 한다. 자꾸 미루고 싶은 것이리라. 녀석을 만날 가능성이 커지면서 계속 움츠러들고 있다. 태정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고토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있지만, 적극적이진 못하다. 시간은 꽤 많으니 조금 나중에…라는 생각으로 눈에 띄는 벤치에 앉아 버린다. 오가는 학생들을 구경하지만, 정작 눈에 남는 것은 없었다. ―눈에 힘을 빼고 그저 바라만 본다.
“저기….”
누군가의 말, 태정은 눈을 뜬 채 정신을 잃었던 것처럼 정신을 퍼뜩 차린다. 초점이 돌아온 태정은 눈에는 한 여성이 포착된다.
“……?”
“역시, 당신 마사키랑 같이 왔던 사람이군요…?”
마사키라니…. 아, 고토 말이었다. 태정은 여자를 가루이자와에서 봤던 것을 기억해냈다. 태정에게 음식을 갖다 주었던 여자다. 하지만, 태정의 반응은 조금 느렸다. 고토와 관련된 인물을 만날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태정이 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던 건지, 그의 기억을 돕기 위한 말을 했다.
“가루이자와에서요…. 정원에서요. 먹을 것에 관해 얘기했잖아요. 당신 주먹밥이 최고라고 했고요. 호호…, 기억나나요?”
여자는 웃음을 머금은 눈을 추켜올리며 태정의 반응을 기다렸다. 여자의 태도에서 왠지 살가움을 느껴 태정도 끝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납니다.”
“오늘은 뭐랄까. 딴사람 같네요. 처음 봤을 때는 ‘어디서 봤더라’ 계속 생각해야 했어요.”
“집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지요. 밥도 먹고요.”
태정의 말에 여자는 입을 작게 오므리며 웃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당신 말대로라면, 씻고 옷 갈아입고 밥을 먹는 건, 마술이네요. 그런 걸로 그렇게 달라지다니. 푸훗.”
자못 친절한 여자였다. 지금도 구태여 인사를 하러 다가와서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 하지만, 친절이란 것을 항상 베풀 필요만은 없는 것이다. 태정은 여자가 불편했다. 고토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기에. 그리고 태정의 우려대로였다.
“그런데… 마사키를 만나러 온 건가요?”
여자는 그녀 자신도 의아해하는 모습으로 물었다. 그때의 고토와 태정을 보았다면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태정은 그에 대해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냥 돌아갈 수는 없게 된 것이다. 태정이 느리게 끄덕이자 여자는 역시, 또 다른 친절을 베풀었다.
“마사키는 지금 수업 중일 거예요. 법학부 건물이 어디 있냐면요…”라고, ‘마사키’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어디로 갈 것도 없었다.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이었으니. 앉아 있는 벤치에서 바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자신이 친절에 흡족한 건지 여자는 적이 흐뭇한 미소를 띠며 태정에게 인사를 하곤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녀 덕분에 고토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었으니, 태정도 눈에 뻔히 보이는 건물이지만, 그저 앉아서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 * *
누구의 동상인지, 사각모를 쓰고 법률가의 가운을 입고 있는 인물의 커다란 동상이 아래를 굽어보고 서 있는, 법학부의 건물이었다. 그곳 앞을 서성이던 태정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네 녀석이 여긴 웬일이지?”
뜻밖에 먼저 태정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온 것은 고토 쪽이었다. 고토…, 태정은 고토를 보면서 그가 새삼 고토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전화를 받았는데, 네가 여기 있다더군? 설마 하면서 나와 봤는데….”
전화…, 헤어진 후까지 여자는 과잉 친절을 또 태정에게 베푼 것인가. 고토는 무슨 배짱으로 여기에 있는 거냐며 태정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물었다.
“너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
“호오… 꽤나 용기 좋은데?”
“…성의를…, 성의를 표시하는 거야.”
태정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런 것이 성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역시 고토는 피식, 태정을 비웃는다.
“이런 게? 이런 게 성의라는 거냐?”
“그래서, 다시 물으러 온 거야. 성의를 표시하는 것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고.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이게 성의가 없다는 말 아냐.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성의가 있다면 알 수 있는 문제지…. 지금 물으러 왔다는 걸로 뭐? 성의를 말해?”
고토가 원하는 것…?
“네가 원하는 걸 말하고 내가 그것을 따르면… 안 되는 건가?”
질문과 함께 태정은 고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고토는 하늘을 보면서 짐짓 딴청을 피웠다. 태정이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정은 그 자리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토가 원할 만한 것. 녀석이 좋아했던 것. 녀석이 생각할 만한…….
“난 요새 복싱을 해.”
태정이 나직이 말하는 건 지금의 사실. 지금의 태정.
“뭐어? 복싱? 나한테 주먹 자랑했던 게 아직 모자랐냐? 자숙하고 반성해도 모자랄 녀석이 뭐? 복싱을 한다고?”
녀석이 대뜸 오해한 것을 깨닫고 태정은 아니라고, 두 손을 들어 보이며 고토의 성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런 게 아니야. 고토. 아마 난 시합을 하게 될 거야.”
“시합?”
역시, 라고 해야 하나. 녀석은 흥미를 나타내 보였다.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시합이었건만, 그것밖에 녀석을 달랠 수 있는 게 없었나.
“그래. 시합. …배상이라든가 보상이라든가, 그런 게 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나는 당장에 널 만족시킬 도리나 방법도 없고, 그럴 여력도 없어. 단지, 내가 지금 가진 사실이란 게 그것뿐이라는 거야.”
“원래 넌 가진 게 그것뿐이지 않았나?”
녀석은 태정의 전력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녀석의 비아냥거림을 태정은 그저 귓등으로만 흘릴 수는 없었다. 정말 그에게는 그것밖에 없었는지도 몰랐다.
“어떤 시합이지?”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게 고토는 시합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저 그런 재미없는, 보통의 널린 시합이라면 입도 벙긋하지 말라며 녀석다운,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내기 시합이야.”
“흐음…”
태정의 말을 이제는 귀에 담아, 듣고 음미하는 듯한 소리를 고토는 낸다. 옛날, 골목 싸움 같은 시합을 태정에게 제의했던 녀석의 구미에 맞는 모양이다. 내기 복싱 시합 같은 건 본 적이 없다면서, 한 번 봐줄 만은 할 것 같다고 만족한 듯 웃는 것이 표정이 좋다.
그리고 고토는, 오늘 태정이 찾아 온 것을, 성의로 봐주겠다고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이어, 녀석은 시합에 대한 마지막 결정을 들려준다. 그것만은 태정도 예상 가능했다.
“좋아 기대되는걸. 가겠어. 가서 네가 거기서 형편없이 얻어터지는 꼴을 봐주지.”
* * *
“자 마셔.”
관장이 음료를 건네고 안도 코치에게로 간다. 태정이 체육관을 찾는 날이면 관장은 어김없이 관장의 특제 음료를 건네주었다. 태정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차차 그것 특유의 맛에 길들여 가는 중이었다. 이즈음 착실하게 몸을 불어가고 근육이 단단해져 가고 있었다.
관장의 특제 드링크 때문인지, 아니면 하루에 대여섯 끼 씩 먹어대고 있는 자신의 먹성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일도 복싱도 그럭저럭 겸해 태정은 하루하루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조오.”
무겐이란 녀석이 싱글거리면서 태정이 쪽으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관장이나 다른 누군가가 태정에게 소개시킨 일도 없는데, 무겐은 태정이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자연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자신이 연습 게임을 했는데, 다들 자기 시합에는 관심이 없었던 게 당신 때문이었다고, 말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또 무엇보다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낙관적이었다. 체육관의 잡일을 도맡아하고, 그보다 한참 어린 녀석들이 그를 업신여기거나 마구 대하여도 허허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처음 태정이 자신 역시 일본인이 아니라 코리안―무겐은 조선이란 단어를 생소해했다―이라고 하자마자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배고파 죽겠어’ 같은 말도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 일본에 왔을 때, 한국인들―무겐과 같은 처지임이 분명한―과 함께 지냈다고 그 뒷배경을 설명하면서. 태정의 말에 관심이 많은 듯 태정에게 이것저것을 물어 보았는데, 알려주면 바로 그럴싸하게 흉내내어 말했고, 또 응용해서 써먹는 것이 재빨랐다.
아, 물론 무겐은 링네임으로 원래 이름을 관내에서 아무도 정확히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뭉흐 터그스―대충 비슷할 것이다―라는, 바람 빠지는 소리의 이름을 가진 무겐無限은 역시, 한계가 없다는 뜻인, 자신의 링네임을 좋아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리고 다녀서 ‘멍청이’라고 부르는 몇몇 관원들이 있었지만, 절대 무겐에게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었다.
무겐은 머리가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발바닥까지 털이 나 있을 것처럼 털이 많았는데, 그것 때문에 자칫 위험한 들짐승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 순하디 순한 표정 때문에 기껏 난 덥수룩한 털의 효용이 떨어지고 있었다. ―녀석 스모 선수가 되면 몸 전체의 털을 왁싱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태정이 녀석을 위해 쓸데없는 걱정을 할 만큼 성격이 둥글둥글한 무겐이었던 것이다.
“근데 조. 지금 몇 키로?”
“저번에 쟀을 때 칠십삼이였어. 지금은 좀 더 나가겠지.”
“키가 나보다 큰데, 백구십 되나?”
나이가 비슷한 무겐은 태정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눈다. 자신의 키를 보통 아니게 크게 늘려 보는 무겐에게 웃으며 백 팔십사라는 태정의 대답에 역시, 말라서 더 키가 커 보이는 거라면서 몸을 더 찌워야 한다고 한다고 관장과 똑같은 소리를 한다. 하긴, 십 킬로는 족히 더 찌워야 했다. 스모만큼이야 아니겠지만, 복싱에서도 몸무게에서 나오는 힘을 절대 경시하지 않는다.
“너보다는 낫다고, 스모 선수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보면 무겐이야말로 심각한 체중 미달 아니야?”
“일단 지금은 복싱을 하니까, 여기서 더 찌면 안 돼. 지금도 뚱뚱한 거니까.”
“스모 선수가 되면 훨씬 더 뚱뚱해져야 할 텐데, 괜찮잖아?”
“그때가 되면 스모 선수의 기준에 맞춰야겠지…. 그리고 또…, 스모 선수들이 뚱뚱해 보여도 그거 다 근육이다, 뚱뚱하지만 뚱뚱한 게 아닌 거야.”
아무리 현재 스모계에 이름을 날리는 몽골리안이 있다고는 하지만…
태정은 고개를 절래 저었다. 하지만 확신에 찬 무겐의 모습에 ‘스모 선수의 살이 정말 모두 근육인 건가?’ 하는 의문이 은근슬쩍 머리를 드는 것이었다. ―논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던 질문이었건만.
“그런데 조는 뭣 때문에 복싱을 하는 거야?”
갑자기 무겐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전엔 강해지고 싶다는 그런 이유인 듯싶지만 지금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답을 해주려 했지만 태정은 갑자기 입이 닫히는 걸 깨닫고는 그저 왜 묻느냐고 반문했다. 일도 바쁜 것 같은데 복싱까지 하잖아. 게다가…, 말을 잇는 무겐에게 태정은 그저 무난하게 ‘좋으니까 하는 거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무겐이 고개를 젓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 조. 좋아하진 않는데… 으음… 뭐라고 해야 하지…”
녀석은 말을 고른다. 아무래도 외국어로 말을 해야 하니,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모두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으음… 거기에 빠진 사람? 아냐…”
무겐은 계속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녀석이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왠지 알 것 같았다. 태정은 지금 복싱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겐이 지금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태정도 자신에게 설명이 불가능했다.
“어이!! 조. 조!!”
무겐과의 잡담에 잠시 한눈을 판 태정은 관장이 부르는 소리를 뒤늦게 깨닫는다. 네? 태정이 돌아보자, 관장은 멀찌감치 서서 손짓으로 태정을 불렀다. 사무실로 올라오라며, 관장은 먼저 위층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이 평소처럼 태평해 보이지 않는다. 태정은 관장의 뒤를 이끌리듯 따라 가면서, 막연하지만 이상하게, 그것이라는 느낌이―거의 확신처럼―들었다.
시합이다….
사실, 태정의 예감은 예감이라 할 수도 없었다. 태정은 이즈음, 계속 시합을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언제 어느 때 시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해도 아마 자신의 예감은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피식, 태정은 자신의 생각에 실소하며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웃음은 거기서 그친다. 관장의 사무실에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시합은 농담으로라도 웃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낯선 남자는, 그저 차분한 검은 양복 차림이지만 단추의 풀림과 깃, 그리고 목걸이, 시계, 양손의 반지 등의 액세서리가 결합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가 야쿠자, 라는 것을 태정이 단지 그런 것으로만 느끼는 건 아니다. 남자는 태정이 들어오면서부터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태정을 평가하고 탐색하고 있었다. 그리 날카로운 눈도 매서운 시선도 아닌데 그것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 수 있었다.
계속 그렇게 태정의 아래 위를 쳐다보면서 남자는 입을 떼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끄는 것을 눈치 챈 태정은 먼저 입을 열었다.
“합격, 이면 좋겠습니다만….”
남자는 태정의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리 말을 꺼내는 건 태정의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절실하고 초조했다. ―태정은 복싱에, 시합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체시킨 남자가 이윽고 입을 연 것은 하마다 관장에게였다.
“하마다 선생. 이 녀석 배짱은 좀 있어 보입니다?”
남자가 관장을 관장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키타무라 대신에 시합에 나가겠다고?”
예기치 않은 이야기에 관장을 쳐다보자 태정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관장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남자는 키타무라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다, 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태정도, 남자가 이유를 틀리게 짚고 있지만 관장의 끄덕임에 굳이 입을 열지 않고 말이다.
“재일이라고 들었는데?”
태정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너도 참 힘든 인생이겠군… 이라며 혀를 차기까지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인간에게서 태정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는다. 물론 동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너도’라고 하며 공감을 표하는 것은 상대가 재일이 아닌 이상 듣기 힘든 말이었다. 그래도, 인생이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태정은 눈앞의 남자와 더불어 깨닫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남자는 야쿠자인 것이다.
“지금 뭐하고 있지? 관장한테 들었는데 빚도 있다면서?”
남자는, 시합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고 있었다. 일용직으로 일하는 이야기를 하자, 남자는 그것을 가지고 태정에게 의외의 평을 한다.
“꽤 재밌는 녀석이군, 너. 샛길로 빠지지는 않겠다는 건가?”
재밌을 것이 있나. 생각하는 태정에게 남자는 여전히 시합이야기는 하지 않고 딴 이야기를 한다.
“난 18살에 이쪽 세계에 발을 담갔어.”
태정이 이미 그가 어떤 인간인지 다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깔며 남자는 이야기를 한다.
“옛날이 좋았는데… 야쿠자의 호경기가 지나가긴 했지. 옛날을 그리워하는 조장들이 많다고. 야쿠자 등록제 시행에다 뭐다 해서 조직이 위축된 건 알지? ‘나 야쿠자요’ 하면서 정부에 등록하라니…, 웃겨서.”
남자가 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건지 어리둥절한 태정이지만, 야쿠자는 그만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태정도 가만히 들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 법이나 그걸 따르는 야쿠자 녀석들이나. 하지만 위기가 기회라고… 조금 침체되고 주눅 들어 있지만, 그때를 바로 호기라고 말하는 거야.”
“어이 노무라. 그만하게.”
길어지는 말에 관장이 남자를 스톱시킨다. 노무라는 관장을 보더니 피식 웃는다.
“이봐 조. 선생이 말리시는군…? 칼이나 폭탄 들고 설칠 조무래기 물색하는 건 관두라고 말야. 하하.”
그래서 지금가지 얘기를 했던 것이다 남자는. 태정을 야쿠자 똘마니로 적당하다고 봤던 건가. 하지만 물색할 필요까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극도極道를 혐오하는 인간만큼 극도를 동경하는 인간들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전 시합만을 원할 뿐입니다. 그 이상 원하는 게 없습니다.”
남자의 세계를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다. 노무라는 아마도 태정을 떠봤던 것이리라. 그에 대해 태정은 완곡한 거절을 한다.
“야쿠자가 매치 메이커Match maker인 시합…. 뭐어, 자네 원하는 대로 됐으면 좋겠군.”
언뜻 태정을 격려하는 말을 하지만, 마치 그것은 태정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시합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그리고 태정에 대해 가타부타의 언급도 노무라는 하지 않았다. 뭐 이렇게 알게 됐으니, 라며 노무라는 그의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으면서 떠나려는지 일어난다.
“어쨌든 어려운 일 있으면 찾아오라고. 내가 도와주지.”
어려운 일이 있고 남자를 찾으면 그가 도와준다….
그것이 돌려 말한 것임을 관장, 남자, 태정 모두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만, 어려운 일은 없을 겁니다.”
“흐음… 지금도 이미 많이 어렵지 않나? 자네를 도와주고 싶다는데 그게 나쁜 건가? 그렇게 딱딱하게 굴진 말라고. 언젠가는 한 배를 탈수도 있다고…, 안 그래?”
남자는 넌지시, 계속 태정에게 말하고 있다. 같은 세계에 발을 담글 것이라는. 남자의 관심이 평범치 않은 것을 눈치 채고는 있었다. 설마, 했던 것을 태정은 확인해보았다.
“재일이, 함께 한 배를 타는 경우를 꽤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선생, 선생이 말한 겁니까?”
남자가 태정을 떠봤듯 태정도 떠본 것일 뿐이다. 그런데 태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응을 보이는 남자… 역시 사실이었다. 노무라는 ‘동포’였던 것이다.
남자의 물음에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관장 또한, 태정이 사실을 알아 챈 것에 적이 놀란 표정이다. 폭력단의 조장, 조원에 적지 않은 재일이 있다는 건, 태정과 같은 ‘동포’는 공공연히 다 아는 사실을.
“하하, 이거 의외로 눈치가 빠른데. 그래 나도 재일이야.”
노무라는 쉽게 인정을 했다. 그리고 사실을 알았으니 좀 더 쉬울 거라고 한다. 자신을 찾아오는 것이. 태정은 그 반대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극도로 빠진 재일이 다른 재일을 끌어들이는 경우는 익히 듣고 봐왔던 태정이다. 알게 모르게. 노무라처럼 말이다.
「갈 곳이 그리 많지는 않잖아? 재일끼리 돕고 사는 거야.」
노무라는 일어나 사무실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태정에게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태정은 탁자 위에 남겨진 노무라의 명함을 보지만, 그것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에게 태정이 도움 받을 일은 없었다.
남자와의 대면에서, 시합에 대한 어떤 확정적인 언질도 없었지만 관장은 며칠 후 시합이 결정되었다고 태정에게 알려왔다. 하루하루 날짜가 지날수록,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가 조금씩 고개를 쳐들고 있을 즈음이었다. 노무라와의 이야기가 시합이 아닌 줄곧 다른 것에 대한 잡담이지 않았는가.
「마침, 너 같은 초짜 녀석을 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지. 전력을 알 수 없는. 정보가 없는 깨끗한 녀석 말이야…. 조, 네가 원해서 들어주긴 했다만, 그들은 소모품을 찾은 거라고.」
관장은 자못 비정한 투로 태정을 ‘소모품’이라고 말했지만, 물론 눈길에는 염려가 깃들어 있음을 태정이 모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깨끗한 녀석이라니.
그쪽 세계에선 태정이 아직도 깨끗한 인간일 수 있다는 데에 싱거운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단지 관장의 염려가, 태정은 또 그것이 걱정되어 말했다.
「소모품이라서 더 좋은 겁니다. 관장님.」 그리고 그것은 관장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치레 말만은 아니었다.
태정은 시합에서 단 한 가지만을 원했기 때문에. 그것만을 알면 되었다.
시합은 요코하마 베이브리지Baybridge가 보이는, 선원船員센타라는 곳에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