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3권) (19/28)

CONTENTS

3권

Till the Fat Lady Sings #18

“후우…….”

태정은 팔을 베게 삼아 뻐근한 몸을 맨바닥에 누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정이 집을 나와 6첩 다다미방을 잡고 일당을 받으며 공사판의 일을 하게 된 것도 이제 벌써 3주일을 지나고 있었다. 지금의 생활에 불만은 없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꽤나 만족하는 편이었다. 먹고 자는데 커다란 문제가 없는 것만으로 더 이상 바라거나 원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똑바로 누우면 발이나 머리가 쉽게 벽에 닿는다. 이부자리가 있긴 해도, 펴거나 까는 것이 귀찮을 때가 있다. 피곤해서 누워버리면, 그냥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맨바닥에 맨몸으로 하루하루가 지날 때가 꽤나 많았다. 다다미 바닥에 몸이 배기는 것이 벌써 익숙해진 듯하다. 조금의 불편함만 감수하면 많은 것이 없어도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었다. 빨래를 널 건조대가 없으면 대충 긴 줄을 그때그때 고정시켜 널거나하고 밥상이 없으면 빈 박스를 활용한다. 오랫동안 간소하게 생활해 왔기 때문에 사실 그런 식의 생활은 익숙해질 필요도 없었다. 일주일 전엔 분명 뭔가가 필요해 대형 마켓을 갔었는데, 그곳에 쌓여 있었던 산더미 같은 상품과 소비재에 무엇을 사려고 했는지조차 까먹어 버렸던 적도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사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역시 그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몸이 덜 피곤한 건가? 분명 종일토록 힘을 쓰는 육체노동으로 몸이 축 쳐져, 근육에 통증이 오는데도 그걸 풀어줄 여력이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가끔 쉬이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오히려 이런 저런 잡념만 끼어들어 정신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태정은, 모로 몸을 뒤척인다.

이번 달 신용금고의 이자는 그럭저럭 해결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렇게만 해 나간다면 이자를 갚고, 원금까지도 조금씩 줄여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컴컴하고 상자 같은 집구석에 누워 있는 태정의 생각은 그래도 희망적인 쪽으로 뻗어 나간다.

아버지가 미련 때문에 억지로 붙들고 있었던 파친코를 팔아넘기기로 결정했던 것은, 태정의 형기 만료 시기와 거의 일치했다. 그 즈음에 파친코를 시장에 급매물로 내놓고, 팔린 것은 태정이 돌아온 직후. 파친코 경기가 결코 좋지 않은 상황에, 상당히 신속한 거래가 이뤄진 것은 물론, 헐값에 넘겼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파친코 기계를 들이고, 시스템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융자한 빚은, 집을 담보로 해서 빌린 것이었다. 물론, 파친코의 정리 후에도 빚을 깨끗이 정리 할 수는 없었다. 바로 집이 압류가 되었고, 태정은 이곳으로, 아버지는 다른 머물 곳을 찾아 짐을 옮겼다. 잘 알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를 봤을 때, 사귀는 여성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깊게 사귀는 사이였는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다. 어머니의 기억에 사로 잡혀 있었던―그래서 아버지가 파친코에 그렇게 미련을 두었던 것이리라―아버지의 변화를 보고, 태정은 또 시간의 흐름을 생각했다.

집주인이 급작스레 바뀐 시기를 생각하면, 자칫했으면 집도 못 찾아 갈 뻔했기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에 가슴 묵직이 누르는 무언가를 가볍게 넘기기 위한 농담일 뿐이었다. 태정은, 잡초가 무성하고 오물냄새가 폴폴 나던 뜰 구석의 스쿠터를 기억한다. 스쿠터의 상태는 매우 깨끗했고 기름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집은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법했지만, 태정의 스쿠터만은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혹시나 하고 들쳐보았던 화분 밑에는 열쇠가 놓여 있었다.

그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열쇠 때문이 아니라, 아들을 기다렸던 아버지에게 비렁뱅이의 행색을 하고 나타난 자신을 보여드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이.

이후 휘몰아치듯 급작스럽게 파친코와 집이 정리되었고, 주변의 모든 것이 썰물에 쓸려 내려가듯 깨끗하게 사라진 듯싶었다. 하지만, 쓸려 내려가기에 빚은 너무 무거웠다. 3천만 엔에 달하는 상당한 빚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달이 이자를 갚아 나가기에도 빠듯한 금액이지만, 태정은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3천만 엔은 성실히 갚아 나가면 언젠가는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상황이 나쁘면 얼마든지 더 나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암울한 생각은 바닥없는 늪과 같아 버둥거릴수록 더 깊이 잠식당할 뿐이었다. 부정적인 상상은 바로 절망으로 이어지는 것을 태정은 잘 알고 있었다.

때론 어처구니없는 낙관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낙관에는 소박한 만족이 따라 붙는다. 별로 나아질 기미도 없는 이대로의 생활이 지속되길 원하고 있다. 그런 만족 속에서 아마도 잠이 들겠지. 그리고 내일 아침 눈을 뜨고 일을 나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바라는 게 없다는 것은 그저 먹고 자는 것만으로 빠듯하다는 것의 반증인지도.

일단 집안의 빚을 모조리 갚고 나서―머릿속 빚의 청산은 이렇게나 쉽다―그 뒤의 일을 생각하기로 하지만, 수면전의 상념은 번잡하게 뻗어나가 또 다른 빚에 대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개인적인 빚이 있었다. 태정은 고토의 보상 요구를 상기했다. 빚은, 땅을 캐어 보니 마치 덩굴에 이어져 얽혀 올라오는 알감자들처럼, 주렁주렁 열려 있는 듯했다. 그걸 어떻게 까먹고 있을 수 있었을까. 태정은 어둠 속에서 또다시 몸을 뒤척였다.

성의를 보여. 녀석의 말이 머리를 울렸다. 그 성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녀석의 말대로 자신이 가해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피해자인 고토의 입장을 깊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그 섹스도…. 별장에서 태정의 눈앞에서 야단스레 벌렸던 고토의 섹스 말이다. 녀석은 자신에게 그것을 보라고 했다. 불현듯 여성과 다리가 얽히고 벌거벗은 하체가 밀착된 고토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거지로 여자에게 허리를 밀어 넣으면서도, 고토는 고개를 돌려 태정과 눈을 마주하여 자신을 보고 있는가를 끝까지 확인했다.

잠을 청하느라 감겨 있는 눈인데도 태정의 눈이 질끈, 더욱 세게 감긴다.

그런 것이 일반적인 피해자의 반응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정이 피해자의, 고토의,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고토가 그렇다고 했다면 그런 것이리라. 태정은 고토의 말에 그저 긍정만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고토의 말대로 태정은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었다. 태정의 사과는 고토의 걷잡을 수 없는 화를 야기했다. 태정으로서는 그가 말한, ‘성의’라는 것에 기대어볼 수밖에 없었다. 가해자는 뻔뻔해서, 많은 것을 금방 잊을 수 있다는 고토의 지적을 듣고 태정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고토가 요구하는 성의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집안의 빚에 이어 고토의 빚까지, 머리가 멍텅해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꼬리를 무는 잠자리의 번잡한 상념은 정리가 되지 않는다. 단지 근거 없는 희망일 뿐이다. 그런 실낱같은 희망은 그래도 태정의 피곤한 몸과, 무거운 머리를 꿈도 없는 어둡고 깊은 수면 속으로 인도했다.

* * *

드르륵 드르륵. 찻길 위로 커다란 드릴이 구멍을 뚫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새벽 1시 반.

태정은 눈을 비볐다. 졸린 게 아니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눈을 피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주말이라 그런지 길 위에는 꽤나 많은 차량들이 오갔다. 게다가 2차선인 좁은 도로 위의 야간 공사라 한쪽 방향의 도로 통행은 완전히 차단해 놓은 상태이다. 이렇게 되니, 자연 양방향에서 차량들이 줄을 지어 통행차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태정은 형광 조끼를 입고, 붉게 반짝이는 지시봉으로 차량의 소통을 도왔다. 눈이 피로하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전조등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 눈을 피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아예 차를 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일을 끝내고 뒤늦게 눈을 붙이려 해도 그때까지 일의 여파가 남아 눈을 감아도, 눈앞은 한참동안 번쩍거리게 되는 것이다.

“빵빵. 빵빵.”

그럭저럭 소통이 원활하다고 생각했는데 웬 차가 경적을 울린다.

빵빵. 빵빵. 눈을 비비느라 자신이 뭔가를 놓쳤는가 태정은 주위를 돌아보지만 이상한 점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태정은 경적을 울리는 차에게로 주춤 주춤 하면서도 그것에 다가선다. 역시나의 헤드라이트 빛 때문에 역광이 져 자동차 내부의 드라이버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차가 슬며시 움직이더니 머뭇거리는 태정 앞에 정확히 멈춰 선다.

기이익…….

운전석의 창문이 열린다.

“헤이, 조오∼!!”

“……관장님…?!”

차창을 열고 상체를 내민 사람은 아라시의 하마다 관장이었다.

“역시 조 군이었군. 이렇게 우연히보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데….”

믿기지 않는 것은 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관장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에 태정은 자연스레 쓰고 있던 안전모를 벗으면서 관장 앞으로 손을 뻗어 마주 붙잡는다. 관장은 힘차게 손을 흔들고는 이게 몇 년만이냐며 일년, 이년, 삼년, 하고 햇수를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헨다.

하지만 헤아리는 것을 이내 그만둔다.

“정말 오랜만이야, 조.”

관장의 말에서는 흘러간 세월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그에 태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실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바이트 하는 거냐? 이 밤에? 너 같은 애들은 잘 시간이라고….”

태정은 빙긋이 웃는다. 관장은 아직 그를 어린애인 양 취급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애들은 집에 재워두고 관장님은 이 밤에 혼자 드라이브하시는 겁니까?”

태정의 대꾸에 관장이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아주 잠시 밤을 울렸을 뿐이었다.

“네 녀석, 항상 생각이 나더만. …잘 지내고 있겠거니 생각했지.”

관장의 말은 생각대로 태정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지, 아니면 생각한 대로는 아니라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아, 아직도 복싱을 하나?”

문득 생각난 듯 관장이 묻고 태정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흐음……. 아니긴 손을 보니까 복싱을 하고 있는 손인데.”

관장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태정은 자신의 손을 슬쩍 내려다본다. 하지만 손엔 작업용의 장갑이 끼워져 있다. 태정이 의아한 듯 하마다 관장을 보자, 그는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으며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한텐 보인다구.”

여전한 관장의 너스레였다. 태정은 도리 없이 웃지만, 빵빵. 어디선가 또다시 차의 경적이 울린다. 아아 이런. 일하는 중인 것을…, 그사이 깜박했다.

“내 차가 길을 막고 있는가 본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관장은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다. 양복 속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금색의 화려하고 멋진 명함 케이스를 꺼내는 것이었다. 하마다 관장은 그 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며 태정에게 건넨다.

“언제 한 번 체육관에 들려서 몸이나 풀어. 이런 일 하면 근육이 못생겨진다고.”

“하하.”

“웃지 말고. 기다릴 테니까 꼭 들르라고….”

태정은 관장의 강인한 어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하마다 관장은 태정의 대답에 웃으면서 부웅,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열린 창으로 내민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태정도 차의 뒤꽁무니를 향해 안전모를 살짝 흔들어 배웅을 했다.

아라시 복싱 체육관

하마다 스스무

아라시라는 체육관의 이름도, 하마다 관장의 이름도 이상하게 생소하게 다가왔다. 태정은 명함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뒷주머니에 찔러넣고는 세이프티 바safety bar를 들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 * *

“희상 씨, 친구 돌아왔나?”

희상이 「호르몬 인간」 편집부에 들어가자 편집장이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바로 물었다.

“친구요?”

“그래 왜 폭행으로 감방 갔다는 친구 있었잖아.”

“아아 태정이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 녀석 온 지 좀 됐어요.”

“어, 돌아 온 거야?”

편집장에게 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꽤나 지난 일이었다. 녀석이 돌아오지 않아서 속을 끓이며 한숨을 쉬는 희상을 보고 그 이유를 묻는 편집장에게 태정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것이다. 그때 편집장이 대뜸 「야수 같은 녀석이군」 이라며 한마디로 태정을 논평했다. 「야수요? 그 녀석, 야수 이미지는 아닌데….」 아마도 편집장이 싸움과 폭행이야기에서 태정에 대해 잘못된 연상을 한 것이라고 판단한 희상은 잘못된 인상을 잡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의외로 편집장의 ‘야수’는 그 이미지의 사나움이나 폭력성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지야 나야 모르지. 하지만 이런 말이 있다고. 고독을 즐기는 자는 야수 아니면 신이라는…. 면회도 거부, 몇 년 동안 격리되어 있었다면 집이 그리울 만도 한데, 귀가도 하지 않는다…. 나는 불가지론자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말할 순 없으니, 그 친구는 야수인 거겠지.」

일리는 있었다. 희상 또한 태정을 생각할 때 외딴 곳에서 홀로 있는 녀석을 생각하지 않았던가. 정작 그때는 ‘야수’라는 거친 단어와 태정의 연결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편집장의 말을 그냥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태정을 보고 희상은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로하고 지쳐 돌아온 녀석은 상처투성이였다. 헐벗고 굶주려서 헉헉거리지만 안간힘을 쓰며 그것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 야생의 생물을, 희상은 태정을 보고 연상했다.

“그걸 아직 기억하고 계시네요?”

희상은 그때의 태정을 떠올리며 편집장에게 묻는다.

“그럼 가능성이 있는 자료들은 모두 여기, 자동 저장된다고. 이거 성능이 꽤 좋거든.”

편집장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쳤다. 농담처럼 기억력을 자랑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편집장은 매우 좋은 기억력에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호르몬 인간」은 재일 동포의 소식지로, 편집장은 창립 때부터 참여했다고 하는데 잡지의 이름도 그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라고 들었다. 잡지 「호르몬 인간」의 호르몬은 물론 남성, 여성 호르몬의 그 외래어가 아니라, ‘버리는 물건’이라는 뜻의 그 호르몬이다. 돼지나 소의 내장 요리를 말하는 그 ‘호르몬 요리’의 호르몬 말이다.

버려지던 짐승의 내장이 재일의 손에 의해 훌륭한 요리로 다시 태어났듯이, ‘호르몬’은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상징하는 말인 것이다. 그 이름은 그들 ‘재일’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지만, 또한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고작 1년에 두 번 발행될 뿐이지만 항시적으로 자금과 인력이 부족했다. 그런 「호르몬 인간」이 5호를―겨우 다섯 번째가 아니라 벌써 다섯 번째이다―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편집장의 존재 때문이었다. 빈약한 토대 위에서 시작한 「호르몬 인간」은 원맨 시스템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었고 「호르몬 인간」은 편집장이 편집은 물론, 주필, 발행, 홍보에서 사진까지 다양한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다행히 편집장은 그 모든 것을 커버할 만큼 재주와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호르몬’을 위해서는 매우 다행인 것이지만 거꾸로, 이런 소규모의 잡지, 완벽한 자원 봉사일인 ‘호르몬’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것이 아까울 정도의 인물인 것이다. 학생 신분으로 잡지 일에 참여하고 있는 희상은 편집장으로 인해 한층 더 이곳의 일에 열의를 가질 수 있었다.

“자료라면…, 기사화를 염두에 두는 겁니까?”

“음…, 꽤 재밌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태정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편집장이 희상은 의아했다. 호르몬 인간이 지향하는 논조와 다뤄왔던 기사의 성격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색채에서 일탈하는 것 아닙니까? 이건 좀 심각하고 무거울 텐데. 그런 건 피하자고 했잖아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강약이 있어야 해. 논조가 너무 가볍고 밝기만 했잖아.”

“하지만 그게 바로 독자들이 호르몬 인간에 호의적으로 평가내렸던 이유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럴 때 변화를 주는 게 또 색다르고 참신한 맛이 있지 않겠어.”

“그렇긴 한데 기대에 어긋나게 되면….”

“어이쿠. 희상 씨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아직 결정한 것도 아니고 한 번 생각해볼 만하다는 거라고. 난 그냥 그 친구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을 뿐인데 그렇게 정색을 하니까 호기심이 더 커진단 말이지. 하하.”

희상은 그제야 자신이 얼굴을 꽤나 굳히고 이야기 한 것을 깨달았다. 편집장의 웃음소리에 더불어 경직된 얼굴을 푼다. 그렇게 어렵고 융통성 없이 굴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재미라든가 호기심이라든가의 편집장이 말한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자칫 흥미 본위의 소재로 전락할 우려가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희상으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희상 씨가 친구를 생각하는 맘, 내가 아니까 거기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아.”

편집장의 어투는 가볍던 농담조의 어조에서 진지하게 돌아선다. 희상의 염려가 호르몬 인간의 논점 일탈이 아닌,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리라. 편집장처럼 신중하고 사람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도 다시 없을 텐데 공연한 불안을 드러내고 말았다.

“어, 제가 좀 과민해진 것 같아요.”

“아냐 그게 정상인 거야.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정 내키지 않으면 이건 그냥 덮어두자고.”

“아닙니다.”

희상은 편집장을 믿기로 하고 마음을 정했다.

“연락을 해볼게요. 일단 어떻게 되든 녀석한테 이야기는 해둬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겠어? 그 친구 의사가 가장 중요하긴 하지.”

“그런데, 문제가…….”

“무슨 문제?”

“그 녀석 연락이 잘 안 되거든요.”

최근 전화 연락을 해서 태정과 통화가 이뤄졌던 기억이 없다. 돌아오자마자 일을 시작한 녀석은 신오오쿠보에 방을 얻었다. 일용직 노동자와 불법 체류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거리였다. 태정이 그곳으로 짐을 옮길 때 경무와 함께 희상이 따라가 일을 도왔다. 말이 도운 거지, 애초에 ‘올 필요 없다’고 했던 태정의 말을 무시하고 갔건만, 부러 갔던 희상과 경무가 계면쩍게도 짐이 굉장히 단출해서 생각해보니 녀석에게 방해만 되었던 것 같다.

“그래? 그렇다면 한 번 찾아가 보지?”

느긋한 태도를 취하던 편집장은 희상이 태도를 정하자, 감춰두고 있던 추진력을 드러낸다.

“찾아가더라도 만난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태정의 일 때문에 이사는 밤중에 이뤄졌는데 이렇다 할 큰 짐도 없고 해서 매우 신속하게 이뤄진 이사는, 마치 야반도주라도 하는 느낌을 주었다. 2주간을 밤낮 없이 일하고 있었던 태정의 근황을 알고 있었던지라 희상이 하루 정돈 쉬지 그랬냐고 말하자 녀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왜 쉬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녀석에게 희상이 ‘그렇게 일하면 몸이 망가진다’고 지적하자 아 그것 때문이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태정이였다.

「일하고 있는 것보다 쉬는 게 더 힘들어.」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흐음…, 그래도 한 번 다시 찾아가 봐야겠는데?”

편집장의 말에 정신이 든다. 하지만, 방금까지 이어지던 대화 내용임에도 잘 이해는 가지 않는다. 편집장의 행동력을 익히 알고는 있지만, 태정의 일에 이렇게 밀어붙일 이유는 없었다. 희상은 눈을 껌벅이며 ‘네?’라는 한마디로 그 이유를 물었다.

“기사도 기사지만, 뭣보다 희상 씨 얼굴이 그 친구를 꼭 봐야 할 것 같은 표정이라서 말이지. 연인을 그리워하는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

“연인이라뇨…. 편집장님도 참. 그냥 그 녀석 생각만 하면 안쓰러워서요.”

“안쓰럽다…. 혹시 그런 것 때문에 희상 씨를 피하는 거 아닌가?”

“네에? 피해요? 아녜요 워낙 바빠서 그런 거죠. 피할 이유가 없다고요. 그럴 녀석도 아니고요.”

절로 톤이 높아지는 희상의 어조에 편집장이 껄껄 농담이라며 웃었다. 편집장은 그저 하나의 가능성을 짚어 본 것뿐이라고 했고, 분명 확률이 높지 않은 가능성이었지만 희상은 설마하는 생각에 괜히 가슴 한구석이 개운치 않았다.

* * *

결국 편집장의 충고대로, 희상은 태정을 찾았다. 정확히는 태정이 방 하나를 빌린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의 삐거덕거리는 계단에 주저앉아 하릴없이 태정을 기다리고 있다. 호르몬 인간의 일도 일이었지만 태정과 연락이 되지 않고 약속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녀석을 기다리는 건 매우 충동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자정이 넘어 갈 때까지 태정이 나타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했던 것이 오밤중을 넘어 벌써 2시를 넘겼던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를 녀석을 몇 시간째 기다리는 것이 생각보다 지겹지는 않았는데, 그것이 희상을 위로해주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곳의 분위기나 공기는 지난번 왔을 때 희상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여기서 골목을 돌아 몇 발자국만 나가면 싸구려 풍속 업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술집이나 가라오케 러브호텔 등이 포진해 있다. 그 뒷골목에 자리한 이곳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오가는 사람도 다양하고 주변 풍경도 꽤나 색달랐다―그것은 희상이 태정을 기다리는 내내 긴장하고 주변을 살펴야 할 만큼 위험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의미를 포함했다. 그래서였는지 금색의 번쩍거리는 체인 목걸이를 한 위협적인 인상의 사내가 희상이 걸터앉은 계단을 스쳐 지나갈 땐 왠지 어깨가 움츠러들기까지 했다.

“어, 희상이니…?”

태정이다. 전방에 녀석이 멈칫 서서 고개를 기우뚱하고 있다. 장시간의 기다림과 불안 때문이었는지, 희상은 녀석에게 달려들어 껴안고 싶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뭘 이렇게 늦게 다니냐며 가까이 다가온 태정에게 투덜댄다. 그것에 태정이 녀석,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이 아닌가….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기다렸다 불평을 하는 희상을 녀석은 전혀 탓하지 않는다. 바보 자식…. 무던함도 저런 무던함이 없다. 얼마나 기다린 거냐면서 또 희상을 걱정하는 녀석인 것이다.

일단 들어가자는 ‘바보’의 뒤를 따라 희상은 방으로 들어갔다. 좁다고 느꼈던 처음보다 더 공간이 협소하게 느껴진다. 자신에게조차 넉넉한 크기가 아닌데 키와 골격이 희상보다 훨씬 더 큼직한 태정이 녀석에겐 어떨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불편하진 않냐?”

걱정은 절로 질문이 되어 나간다.

“별로 불편한 건 없어. 여기서는 잠만 자는데 뭐. 누울 공간만 있으면 되는 거지. 오히려 편하다면 편해. 손만 뻗으면 뭐든 닿잖냐, 하하.”

태정은 셔츠를 머리 위로 벗겨내면서 웃었다. 실밥이 뜯어진 반팔의 낡은 러닝셔츠가 희상의 눈에 들어왔다. 실밥만 터진 것이 아니라 어깨에는 마치 좀이라도 먹은 것처럼 작은 구멍도 나 있다.

“희상아, 뭘 보고 있는 거야?”

희상이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을 태정이 눈치 챘는지 웃음기가 도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곤 자신의 어깨를 보면서 설명을 곁들인다.

“건축 자재 같은 거 옮기려다 보면 어깨 쓰는 일이 많아. 멀쩡한 것도 금방 해지는데 그럴 거 굳이 손 볼 것도 없고.”

“아, 아니….”

괜한 곳에 시선을 줬나 싶다. 희상은 부자연스럽게 얼버무리면서, 공연히 좁은 방을 한 바퀴 휘휘 돌았다. 아, 저건….

“이건 뭐야? 태희 누나?”

들어온 문 안쪽에 사진들이 여럿 붙어 있었고 그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희상이 묻자 태정은 뒤쪽 머릴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괜히 잡지에 이름이라도 조그맣게 실리면 사보게 되더라고. 가끔 오려서 붙여 놓기도 하고…. 꽤 재밌더라고 그런 것도.”

별로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 것을 계면쩍어 하는 태정이 희상은 어째 이전보다 더 순진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괜찮아 괜찮아, 태희 누나라면 시스터 콤플렉스가 있을 만도 하지.”

희상이 다 이해한다는 듯한 시늉을 짐짓 취하자 의외로 녀석이 심각하게 반응한다.

“시스터 콤플렉스…. 희상이 네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냐? 이런 거 좀 꼴불견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문에 얼기설기 엉성하게 붙은 사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역시 떼어야 하나…’라고 중얼거리는 태정을 보자 희상은 그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 조태정. 괜찮아 농담이야. 보통, 가족사진을 액자에다, 벽에다, 줄줄이 늘어놓잖아. 이거나 그거나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아니…, 사실 그런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던 참이었거든. 그런데 직접 말로 들으니까 좀 충격인걸.”

태정의 상황은 특수한 상황이었다. 몇 년간 제 누나를 만나지도 못했던 녀석인 것을. 게다가 유명세를 타고 있는 피붙이가 있다면 가족인 태정의 반응은 지극히도 당연한 것이다. 희상이라면 당장에라도 찾아갔을 법한데 녀석은 제 누나한테 무슨 영향이라도 갈까봐 이런 식으로 문에 사진이나 붙어놓는다. 사실 태정이 녀석에겐 그리 선택의 폭이 넓지도 못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나마 기뻐하고 뿌듯해하는 녀석에게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한 건지.

“설령 시스터 콤플렉스면 뭐가 어떠냐. 그런 소릴 듣는다고 태희 누나에 대한 애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지갑 같은 데 넣어 다니지만 않으면 되지. 안 그래?”

“어… 그게….”

태정은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뭐야 너 지갑에 누나 사진 있는 거야?”

이 녀석 어쩌면 정말 중증의 시스터 콤플렉스인지도…, 희상은 태정의 지갑을 채어 벌려 보지만, 나오는 사진은 예상과는 달랐다. 가족사진이었다. 꽤나 낡은.

매우 앳된 태정의 모습, 그와 마찬가지로 태희 누나는 그 속에서 아직 소녀이다. 그리고 녀석의 아버지 또, 어머니. 단란한 가족의 군상이다.

“태희 누나가 너희 어머님 닮았구나.”

사진에 대한 즉각적인 감상을 희상이 입에 담자 태정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그렇다고 한다.

지갑을 되돌려주자, 태정이 지갑을 받았다―흉터가 있는 손으로. 희상의 시선이 잠시 그쪽에 머물지만, 태정의 말에 곧 주의가 쏠린다.

“그런 사실을, 이제는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지. 죽으면, 사진 따위만 남을 뿐이야.”

희상은, 태정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그녀의 죽음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녀석이 중얼거렸다. ‘무섭다’고.

“무섭다니 뭐가?”

대뜸 물어 보지만, 태정은 희상을 보면서 어딘가 빗나간 듯한 대답을 했다.

“예전엔 그런 공포 같은 거 몰랐다. 몰라서 알고 싶어했지. 그리고 알아버렸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태정아. 공포라면, 죽음에 대한 공포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거잖아. 알게 되는 게 당연한 거야.”

“그래, 그런 거겠지? 그런데 너무 늦게 깨달았어. 죽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그런 공포를.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게 너무 쉽다는 거야.”

건조한 어투와 무표정으로 태정은 공포에 대해 말한다. 그의 말에 희상은 가슴이 덜컹했다. 대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렇다는 것이다. 자연사든, 피살이든, 타살이든, 그 죽음의 대상은 ‘나’이다. 그런데 녀석은 ‘살인’에의 가능성을, 희상에겐 생경한 공포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제오늘이 아니리라. 희상은 녀석이 그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 왔음을 직감한다.

언젠가 사람을 죽이리라는 그런 공포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설혹 있다하더라도, 태정의 저러한 지속적인 긴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희상은, 태정의 얼굴을 슬며시 살피게 된다. 그 시선에는 걱정과, 우려, 그리고 거기에는 두려움도 실린다. 그런 복잡한 감정으로 희상은 착잡하기만 했다. 이렇게 된 건, 그 이유는 결국 그것이다.

“너 아직도 그…….”

“아,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냐, 깜박했다. 희상아, 무슨 중요한 볼일이 있는 거야? 이런 시간까지 기다리다니 도통 짐작이 안 가는데.”

희상이 고토의 이야길 꺼내려는 찰나, 그와 동시에 태정이 희상의 용건을 물어왔다. 희상이 하려 했던 말을 태정이 눈치 챘으리라는 확신은 없지만 왠지 공교로운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게다가 녀석은 언제 무표정하게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했냐 싶은 밝은 표정이다. 희상은 녀석의 말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섬뜩함을 지금도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그게, 우리 편집장이 너한테 흥미가 있는 것 같아.”

고토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건 희상도 그리 달가운 건 아니다. 일단 그때까지의 이야기는 접어 두고 희상은 태정을 찾은 이유를 말한다.

“흥미?”

“응. 기사를 실으면 어떻겠냐는 얘길 해서.”

“기사?”

태정은 짤막짤막하게 의문을 표시한다. 녀석, 자신에게 어떤 흥미나 기사거리가 뭐가 있느냐는 듯한,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아, 어디까지나 편집장 생각으로 확정된 건 아니고, 재일에 불합리한 재판 과정이라든가, 그런 사례, 판례 등을 다루려고 하거든. 그중 하나의 케이스로 네 이야기도 생각하고 있나봐.”

태정이 가만히 듣고만 있어 희상은 설명이 조금 모자란 가 싶어 계속 말을 이었다.

“제대로 선임된 변호사도 없었던 데다, 속전속결로 진행된 거의 형식적이었던 재판이었잖아. 그리고 선처를… 아니 선처까지가 아니었어도 일반 형무소에 수감되는 것도 어쩌면 피할 수….”

“뭐, 난 상관없어.”

희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녀석은 싱겁게 응낙한다.

“응? 그래도 대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기사가 나가는가는 알아두는 게 좋지 않겠어? 그리고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느끼는지를 말해도 되고. 또 이런 저런 조건을 내걸 수도 있고….”

“희상이 네가 알아서 하겠지. 네가 원하고 머릿속에 그려놓은 기사를 써야지. 내가 말하는 것 때문에 뭔가 달라져서야 하겠냐…. 아무튼 나보단 네가 필요한 기사를 잘 알고 있을 거고. 넌 원래 그쪽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으니까.”

까다롭지 않은 건 좋다. 게다가 태정은, 희상에게 모든 걸 맡기고, 전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분이 나쁠 리 없다. 하지만 태정이 이 자식, 상당히 무심하지 않은가. 지금 말을 한 꺼풀 벗겨 보면, 아무래도 좋다는 말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흔쾌한 승낙을 보이는 태정의 태도에 대고 희상은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이 새벽까지 기다린 거냐? 차암….”

태정이 웃으면서 희상에게 핀잔을 준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구…. 네놈 전화도 받지 않지, 직접 발로 뛸 수밖에.”

희상은 원성 어린 소리를 섞어 말한다. 아까부터 자꾸 걸리는, 석연찮은 느낌을 떨쳐버리기로 하면서.

“기자 다 됐구나. 희상이 너.”

“기자는 무슨…. 일 년에 두 번, 그것도 부정기로 간행되는 잡지 보조라고.”

별것 아닌 투로 이야기는 하나, 희상이 호르몬 인간의 일을 쉽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론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메이저 언론사를 지향하고 꿈꾸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이니찌재일인 희상에게 그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업계지業界紙나 전문지, 학술지 등도 그나마 ‘비집고’ 들어가야 가능한 것을. 그러나 태정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넌 좋은 기자가 될 거야’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해준다. 역시, 지레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이니까 말하는 건데. 형기 마치고 나와서 도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희상의 질문에 푸하하, 웃으며 태정은 지금 자신을 취재하는 거냐고 묻는다. ‘일단은’이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희상은 답한다. 준비하는 기사와 어쩌면―아주 희박하지만―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사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이다.

“뭐어, 우에노 근처에서 어슬렁거렸어.”

“역시…….”

희상의 중얼거림을 듣고 태정이 눈썹을 추켜올린다.

“그때 삼펜 한 녀석이 너 같다면서 우에노 근처에서 봤다고 이야길 했었거든. 그 얘기 듣고 근처를 뒤졌지. 결국 찾지는 못했지만.”

“그랬어? 하하하….”

“웃음이 나오냐…. 얼마나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네 녀석, 사람 그렇게 걱정 시켜 놓고 웃음이 나오냐고…? 그래서, 거기가 그렇게 좋았어? 몇 달씩이나 거기서 살았잖아.”

“그럴 리 있겠냐. 시간이 좀 흐르다 보니까 돌아가고 싶어도 왠지 못 돌아가겠더라고. 그렇게 된 거야.”

“그 상처도 그때 그렇게 된 거야?”

태정의 손위에 상처는, 낙인처럼 찍힌 듯한 뚜렷한 화상이다. 희상은 그것이 못내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돌아온 녀석과 처음 회포를 풀었을 때도 물었던 것 같은데, 설명은 듣지 못했다. 녀석은 손의 흉터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이건…. 뜨거운 맛을 보여 주겠다면서 말야. 말 그대로더라 하하. 진짜 뜨겁던걸….”

희상은, 그저 수감 중에 발생한 일이려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누군가 태정이에게 뜨건 맛을 보여준다며 달려들었나…? 물끄러미 그것을 보는 것이 태정이 녀석 그때 일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또 희상을 답답하게 한다.

“왜 또 넌 그냥 당하고 있었는데. 그 녀석한테도 뜨거운 맛을 보여줬냐?”

희상은 정체불명의 녀석에게 적의를 불태운다. 그 모습에 태정이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희상아, 그동안 정치적 노선을 바꾼 거냐?”

“궤도 수정이란 게 있다고. 비폭력을 아무리 외쳐봐야 통하지 않는 인간들이 있다는 걸 알았어. 그런 놈들한텐 시간낭비야. 고토 녀석처럼.”

아……!

녀석의 이름을 입에 담아버렸다. 감정이 격해 있었는지 제풀에 그 자식의 이름이 그냥 튀어나와버렸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리듯 고토의 이름에 놀란 건 희상뿐인 듯하다. 태정은 별 다른 기색 없이 네 말이 맞는다고 희상에게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지만’이라고 꼬리표가 달린다.

“그 녀석도 결국은 폭력의 희생양이야.”

관조적으로 논평하듯 태정은 말한다. 게다가 비록 말의 어투는 건조하지만 거기엔 동정마저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공정과 객관을 따져야 할 때 따지더라도 고토에게서 찾아야 할 건 아니었다. 더더구나 동정이라니.

“태정아, 그건 그 자식이 자초한 화야. 자업자득이라고. 혹시 자책하는 거라면….”

“아냐, 그런 말이. 힘의 논리를 신봉하게 되면, 폭력 의존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걸 네가 더 잘 알 거야. 녀석도 그런 케이스였던 거지.”

태정의 말은 고토가 폭력이라는 신에 사로잡혔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희생양이고 제물이라는 말이겠지.

“그 녀석은 폭력 의존증 정도가 아니라 폭력 중독 증세를 보인 녀석이었다고. 하지만, 정말이지, 그 고토 자식도 그래, 그때만큼은 뜨거운 맛을 좀 봤을 거야.”

뜨거운 맛이라, 희상의 말에 태정이 중얼거리며 손의 흉터를 내려다보면서 웃는다.

“희상아, 내가, 녀석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 거니?”

분명 그렇게 말을 한 건 자신인데, 이상하게 녀석의 질문에 희상은 확답하지 못한다. 사실 그건 그냥 뜨거운 맛 정도가 아니었다.

“난, 녀석을 죽일 뻔했어. 정말 다행이다. 고토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희상은 자신이 그들―고토와 태정―의 일을 너무 가볍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업자득이니 뜨거운 맛이니…. 종종 경무 녀석은, 고토가 그때 죽었어야 했다, 죽어 마땅한 새끼라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곤 했다. 그리고 그것에 희상은 심정적으로 동의했다―지금까지도.

그런데 태정은 그토록, 다행이라고 말을 한다. 천근의 짐을 겨우 끌며 걷는 우마처럼 힘겹고 무거운 숨을 내쉬지만, 정말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속이 어떨지는 희상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그 고토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희상은 생각을 전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태정이 녀석에게 그것이 다행이었기에. 녀석이 다행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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