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여인이 노래 할 때까지 #17
태정이 녀석이 나타나면 몇 대 쳐줘야겠다고―그것도 아주 세게―그렇게 굳게 다짐했건만 희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희상은 단지, 「고생했다」고, 팔을 들어 태정의 어깨를 탁―한 번 치는 걸로 오랜만의 친구를 맞았다. 녀석은 「고생은 무슨」이라며 싱겁게 웃었다. 가벼운 웃음으로 그 동안의 시간을 날려버리는 태정의 모습은 비교적 양호했다. 하지만 왠지 태정을 보고 있노라니, 희상은 자꾸 녀석에게 ‘괜찮느냐’고 묻고 싶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고.
「머리는 까치집이고, 수염이 덥수룩, 비쩍 말라서 태정인지 긴가 민가 했다」라고, 우에노 부근에서 태정을 봤다던 전 삼펜 멤버의 말을 희상은 떠올렸다. 희상이 상상한 태정의 모습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어떤 홈리스를 예상하다니…. 도대체 자신이 무슨 상상을 했던 것인가. 그저 녀석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희상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어떻게 화를 내고 때리겠는가. 그렇게 못한다면 차라리 크게 웃으면서 잘 왔다고 어서 오라고, 억센 포옹이라도 하며 등을 두드려주고 싶었지만, 희상은 그것 또한 되지 않았다.
“너 이 새끼 뭘 하다 지금 나타나는 거냐?”
“어, 경무 너도 있었구나….”
“어어, 경무, 너도 있었구나아? 이 자식, 말하는 것 좀 봐라. 내가 여기 있는 게 의왼가 보네.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말야. 조태정 너, 무슨 낯짝으로 이렇게 늦게 나타난 거냐? 엉? 내가 널 보면 엉덩짝을 걷어차주려고 별렀는데 말이지….”
경무 녀석이, 마치 싸움을 걸 것처럼 태정에게 다가섰다.
기세등등하게 바싹 다가서더니만,
덥석―태정을 어깨를 끌어안는다.
“아무튼 살아서 잘 돌아 왔다, 조태정.”
팡팡팡, 경무가 등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주 크게 난다. 경무의 타깃은 엉덩이 대신 등짝으로 바뀐 듯싶다. 세게 두들겨 맞은 등이 아픈 듯 태정의 한쪽 이마가 살짝 일그러졌다. 태정의 곤란한 듯한 표정이 희상은 매우 우스웠고, 또 왠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경무 녀석이 대신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모자라.
파악―.
조금 늦게 희상은 아직 경무에게 잡혀 있는 태정의 등을 한 대, 힘을 실어 한껏 쳐볼 수 있었다.
“자아 들어가자 들.”
그리고 희상은 싱긋이 웃으며 경무와 태정을 재촉했다.
“희상이 너….”
태정은 한쪽 손을 어깨 뒤로 돌려 경무에 이어 희상에게 연달아 맞은 등 쪽을 쓰다듬었다. 그러곤 말을 잇지 못한다. 음? 왜? 하고 희상은 턱을 들며 시치미를 떼자 그것에 경무가 낄낄대며 웃었다. 쿨럭 쿨럭. 웃다가 경무는 급기야는 사래까지 들린다. 계속 그치지 않은 기침을 커다랗게 뿜어내면서도, 태정의 어깨를 감싼 채로 경무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태정도 그런 경무의 모습에 소리 없이 웃다가 녀석과 함께 보조를 맞췄다.
경무와 태정. 태정과 경무.
희상은 둘을 앞에 세워 뒤를 따라갔다. 둘의 나란한 모습에 과거가 겹쳐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희상에게 태정의 모습은, 그 옛 시절, 고교시절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었다―다른 무엇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만 해도, 경무와 엇비슷한 키에 체격 또한 그리 뒤진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좋게 봐도 경무와 비교하기엔 역부족이다. 아직까지도 경무 녀석, 헤비급을 외치며(희상이 보기엔 그건 미련이 아니라 입버릇이었다) 몸을 더 불리고 그것을 근육으로 키운 경무였다. 그에 반해 태정은, 좋게 말하자면, 체중감량을 한 복서였다. 그것도, 한 체급이 아니라 두세 체급을 한꺼번에 조절했다 싶은. 입고 있는 검은 색의 티셔츠는 굵직한 뼈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고―이전이라면 근육의 형태에 밀착되었을 터―조금은 촌스럽게, 색이 바란 청바지는 여분의 주름이 많이 잡히고 있었다. 몸뿐만 아니라, 가벼워진 것은 또 있다. 지저분해 보인다고까지 말을 들었던 태정의 머리가 상당히 짧아져 있었다.
경무 녀석이야 자신의 어깨와 목 근육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유지한다지만, 뭐라 해도 마이동풍, 목과 귀를 뒤덮도록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두던 녀석의 머리가 아니던가. 뒷목이 시원하게 드러나고, 이제는 태정이 녀석에게 귀가 확실히 붙어 있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짧게 잘린 태정의 뒷모습이 희상은 낯설기만 했다.
당연한 것이다…. 희상에게 남아 있던 잔상처럼 고교시절의 모습 그대로 태정이 남아 있을 리는 없었다.
“희상이 너 거기 서서 뭐해…. 빨리 들어 와.”
경무가 뒤를 돌아보며 서 있는 희상에게 손짓을 했다. 나란히 경무와 어깨를 붙이고 보조를 맞추던 태정 또한 그를 기다리며 어서 오라는 눈길을 준다.
그 시절 저 두 녀석이 저런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희상은 상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나란히 서서 희상을 돌아본다. 둘의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그것이 희상에겐 정겹기까지 했다. 태정이 못마땅해 으르렁거렸던 경무는 그런 사실이 언제 있었는가 싶게 진심에서 우러난 기쁨으로 태정을 반긴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런 것을 시간의 조화라고들 하던가. 가끔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 같이 보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이 함께 하지 못한 시간들은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인 것을….
그 시간 속에서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다.
태정은 어떻게 변했고 또 어떻게 변하지 않았을까.
희상은 그를 기다리는 두 친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건배―!!”
경무 녀석, 분명히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을 터인데도 용케 참으면서 버틴다. 태정이 뭘 하고 지냈는지, 도대체 어디로 잠적했었는지 입이 근질근질 하련만―물론 그것은 희상도 마찬가지였다. 경무는 자신의 대학생활을 이야기 하다가 또, 조고의 복싱부 코치로 나가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희상이 하고 있는 공부를 화제로 삼으면서 술병을 하나 둘씩 비워나갔다.
“희상인 원래 언론 계통이라고 생각했지만 경무 넌 복싱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둘의 근황을 조용히 듣던 태정이 몇 마디 하자, 경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새 말을 가로 챈다.
“알아알아 쳇, 나도 내가 대학이란 걸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않겠냐. 그런데 우리 그 영감이 울더라고. 뭐 어쩌냐. 삼류라도 좋으니 제발 가라고 하는데. 그게 말야…. 이야기만 듣다가 내가 당하니까 그것 참 뭐시기 하더라고….”
희상은 익히 알고 있는, 경무의 대학 진학기는 유명한 모 대학 교수의 일화를 떠올리게 했다. 유명하다는 것은 교수가 총련계의 조선인이라 재일 사이에서 그렇다는 의미로, 그의 스토리는 그들 사이에서 꽤나 흔하게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조선인 최초로 일본의 유명 사립대의 교수로 임명된 그 노老학자는 집안 형편과 당시 재일의 상급학교 진학시의 부당한 제한·차별로 아예 대학 진학에의 꿈을 접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바짓가랑이를 잡으면서 ‘너도 나처럼 리어카에 고철이나 싣고 팔러 다닐 거냐’며 울면서 어떻게든 대학을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경무의 ‘이야기만 듣다가 자신이 당했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당시야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직종에 몰려 힘들게 생업을 꾸려 나가던 재일인의 자식 교육이 양극단을 달렸던 때였다. 포기거나, 자식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리고 교수의 아버지는 후자였으리라.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물론 많은 것들이 변했다.
경무의 대학 진학기는 그런 교수의 일화를 얼핏 떠올리게 하지만, 속사정은 꽤나 달랐다. 경무의 아버지가 경무 녀석에게 희망을 걸었다고 보긴 어려웠고, 경무 또한 부모님 때문에 진학을 결심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물론 경무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가 결정적이긴 했지만, 경무가 진로를 진지하게 모색했던 시기는 그보다 더 일렀다. 경무의 헤비급의 꿈이 단지 입버릇으로만 그치고, 복싱을 프로로서 지향하는 것이 아닌, 그저 취미생활로 선을 그어 버린 것은, 태정의 사건을 계기로 해서였다.
「태정이 그 녀석이 정말 그렇게 될 줄이야…. 푸우.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미래도 생각해보게 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경무는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결심한 것이 조금 늦어서, 졸업한 후 1년을 더 공부하고 대학의 문턱을 넘었지만. 물론 경무의 아버지는 매우 기뻐했고 말이다. 그들 아버지 세대는 그래도 배워야 뭔가에 쓸모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경무가 과연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는지는 그만이 알 터이지만 당시 태정으로 인해 녀석의 심경이 매우 복잡했던 것은 확연했다. 그리고 그것은 희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작 그 본인은 주변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 있을까.
희상은 옆자리의 태정을 흘깃 쳐다본다.
한참 전에 따라놓은 술이건만, 태정의 앞에 놓인 잔은 여간해서 줄지 않았다. 게다가 녀석, 먹는 속도까지… 사람 답답하게, 상당히 느리다.
“태정아 너, 먹는 게 왜 그러냐. 맛이 없냐? 많이 먹어라. 좀.”
희상은 이것저것 반찬을 마구 집어 태정의 그릇 위에 쌓아 놓는다. 희상은 어머니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집에서 종종 반찬을 숟가락 위에 놓아 줄 때 정작, 희상은 짜증을 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자신이 태정에게 보이고 있지 않은가.
“너무 맛있어서 그래. 천천히 먹어야지, 아깝잖아.”
태정은 젓가락으로 음식들을 가리키며 변명을 한다. 아깝다니…. 그저 평범한 음식들일 뿐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무우 연어알, 흔히 먹는 닭꼬치, 츠케모노와 니구자카 등등. 하지만 그의 말대로 태정은 선뜻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기도 했고, 마치 진귀한 음식을 대하는 사람처럼 젓가락질이 음식 위에서 머뭇거리며 배회한다.
“어유 그게 말이 되냐? 맛있으면 빨리 빨리 먹어 치워야지.”
경무도 답답했는지 희상을 거들어, 상 위의 모든 접시들은 태정의 앞으로 전진, 이동을 하기 시작한다. 태정이 이러지 말라고 하지만, 경무는 이거 다 네가 비워야 한다면서 태정에게 엄포를 놓는다. 하하… 이거 어쩌냐며, 태정이 고개를 저었다. 희상에게 좀 도와줘야겠다며 웃는다. 외까풀의 눈이 위아래로 포개져 눈꼬리가 부드럽게 눈가로 뻗어 나가고, 느슨하게 웃는 입매가 여전하다. 짧은 머리로 인해 마른 얼굴이 더 뚜렷하게 강조되지만, 인상이 날카롭다거나 성마르게 보이지는 않는다.
술이 하나도 안 줄었다며 쭉 들이키라는 경무의 강권에 마지못해 태정이 술잔을 들었다. 잔을 감싼 커다란 손의 마디는 툭툭 불거져 나와 있고, 손톱은 또 아주 바싹 깎여 있다.
“뭐가 그렇게 다 짧아졌냐.”
희상은 생각을 입 밖에 낸다.
“응?”
짧게 들이킨 잔을 태정이 내려놓으면서 묻는 눈길로 희상을 보았다.
“아니, 너 머리도 그렇게 짧고, 손톱도 짧아서 꼭 피나올 것 같은데. 게다가 그 상처는 뭐고.
녀석의 손등에는 보기 흉한 둥근 화상 자국이 나 있었던 것이다. 희상의 말에 태정은 자신의 손톱을 들여다보고, 또 짧아진 머리를 긁적이며 ‘그곳’에선 줄곧 그렇게 짧았다면서, 길러 볼까하다가 역시 귀찮아서 다시 잘랐다고 한다―그러나 상처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말하다가 영문 모르게 태정은 혼자 지긋이 웃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저렇게 바보같이 웃냐?”
경무 또한 희상처럼 녀석의 웃는 모습을 의아해한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경무의 핀잔에 잠시 흐릿해 보였던 태정의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아, 누나 생각이 나서. 날 보면, 두발이나 위생 상태 같은 걸 점검했는데, 희상이가 누나처럼 그러잖냐. 하하….”
“누나? 태희 누나 말이야? 언제 만나 본 거야?”
경무가 성급하게, 그리고 조금은 흥분해서 태정에게 묻는다.
“어… 아니.”
별다른 기색 없이, 그런 건 아니라고 대답하는 태정에게 경무 녀석 실망을 감추지 않는다. 저 녀석,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녀를 만나지 못한 실망이라면 태정 쪽이 더 클 것이다. 그건 단지 실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그 무엇, 그 이상이리라.
“태희 누나 소식은…. 들었어?”
“소식이라…, 그냥 절로 알게 되던데.”
태정은, 웃으면서 처음에 빌딩 대형 광고를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엉겁결에 사람을 붙잡고 누구냐고 이름을 물었다며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이냐며 경무가 따라 웃지만 희상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인간에게 누나를 ‘확인’해야만 했던 동생의 이야기가, 희상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웃는 소리는 공허하고, 녀석의 웃는 모습은 서글프다.
“언제 만나러 안 갈 거야?”
언제 실망했냐 싶게 경무는, 여전히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현재의 태희 누님’에 대한 호기심을 또다시 여실히 드러낸다. 하긴, 한때 ‘조고의’ 마돈나였던 것이다. 더구나 지금 마돈나는 더 높이 승천해 모두가 우러르고 있지 않은가. 경무의 반응을 나무랄 수만도 없었다.
“만나러… 가야겠지?”
한마디를 하는 태정이 녀석,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반응이란 건, 별로 찾아가 만날 생각이 없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당연히 만나러 가야지 인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되도록 빨리 찾아 가 봐라.”
태정의 태도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경무가 언성을 조금 높인다. 그러곤 약간 쑥스러운 듯 덧붙인다.
“그리고 태희 누나 만나러 갈 땐 나한테 연락하고. 안 되면 싸인이라두.”
“경무야.”
도저히 녀석을 못 말리겠다싶어 희상은 경무를 불렀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도, 내가 태희 누날 얼마나 좋아했는데, 난 아직도 이 녀석이랑 누님이 남매라는 게 믿겨지질 않는다고.”
경무의 말에 태정이 녀석,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게다가 그렇긴 하다고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태정아, 고개는 왜 끄덕이고, 또 뭐가 그렇다는 거야. 저 녀석 말은, 누나 잘 둔 네가 그저 부러워서 하는 말이야. 질투라고 질투.”
“아니, 사실, 나 같은 놈이 동생이라고 찾아가면 방해되지 않겠냐….”
“태정이, 너 인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무도 네가 방해된다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희상은 화가 나려고 했다. 희상이 아는 태정은, 굳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뒤로 숨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에게, 모든 책임을 떠안으려는 기질이 있고 신중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가 많긴 했지만, 절대 저렇게 스스로를 ‘나 같은 놈’이라고 비하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건 태정이 아니다.
“아니, 조태정. 너 바보냐? 아니면 우리가 바본 거냐. 나 같은 놈이라고? 그래 그럼, 너 같은 놈을 친구라고 하는 희상이나 나는, 뭐냐?”
의외로 경무 녀석이 버럭 성을 내면서 태정에게 큰소리를 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면서, 희상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저 녀석이 아까 더 맞아야 했다면서, 등짝 몇 대로 끝내 버리면 안 됐다고, 아쉬워한다. 경무 녀석, 입바른 소릴 할 땐 아주 잘 한다.
“…….”
경무의 꾸지람에 태정이 한동안 침묵을 지킨다. 그리고 침묵의 끝에 무거운 입을 잠깐 연다.
“…고맙다.”
“뭐가 고맙다는 거야.”
경무의 말투는 퉁명스럽지만, 자식, 저래도 태정의 진지한 인사를 받으니, 쑥스러운 거다.
사과가 아닌 태정의 고맙다는 인사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모호했지만, 희상은 왠지 알 것도 같았다. 희상은 태정에게 미안하다는 소릴 듣거나 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이제 마악 귀가한 친구 녀석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집안엔 별일 없고?”
조금 가라앉은 자리의 화제도 바꿀 겸, 그리고 뭔가 도움이 될 게 없을까 하는 마음에 희상은 에둘러 묻는다.
최근 넉 달 동안, 태정이 고약하게 모습을 감췄던 그 때문에 희상은 녀석의 집을 찾았었다. 오랜만에 가 본 그 집은 이전의 그 집인가 싶은 게, 뜰엔 잡초가 무성했고 사삭거리는 이상한 소리에 흠칫 둘러보자, 버젓이 삼색의 고양이가 땅을 파고 있었다. 문을 열고 희상을 맞았던 태정의 아버지는 희미하게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희상은 그때, ‘기울어져 가는 집의 모습’이 어떤 것임을 보았다.
몇 년만에 돌아온 녀석을 맞았을 집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희상은 그 기억 속의 모습보다 분명 더 나빴으리라는 것을 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뭐 별일이야 있겠냐….”
집안 사정을 태정이 솔직하게 털어놓으리라고 희상은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역시나의 추측에도 불구하고, 태정은 질문을 가볍게 넘겨버린다.
“아, 이젠 나와 살려고 하는데…. 가격이 싸고 괜찮은, 혹시 알고 있는 방이 있으면 소개 좀 해줘라.”
섭섭함이 채 가시기 전, 의외로 태정은 부탁의 이야길 꺼냈다. 사실 그런 정도야 부탁이라 부를 수도 없는 가벼운 것이었지만.
“언제부터?”
이유를 제치고 시기를 묻는 경무는, 자신이 나와 살기 때문에 태정 역시 나와 살게 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다며, 되도록이면 빨리 나오려고 한다는 태정의 대답은, 녀석이 꽤나 서두르고 있고 무엇 때문인지 시간에 촉박해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녀석이 왜 집을 그렇게 급하게 나가야 하는 건지. 별일 없다는 집에 분명 별일이 있는 것이리라.
“왜, 혹시 아버지 일 때문이냐?”
근심 어린 어조로 희상이 묻는데, 태정이 녀석 피식, 웃는다. 그리고 그더러 날카롭기는 여전하다고 한다. 하지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희상을 안심시키면서, 서두르는 이유를 댄다. 아버지에게 여자가 생긴 것 같은데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을 자신이 방해놓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한다. 차분히 얘기를 하는 태정은 아버지에게 어떤 여자가 있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오히려 녀석 대신, ‘에에에?!’라며 경무가 솔직한 놀라움을 표시한다. 희상도 내색은 안 했지만 경무 못지않게 놀라고 있었다. 분명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잘된 일이라면 잘된 일이리라. 그런데, 그렇게 보면 안 된다고 속으로 타이르면서도 희상은 태정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었다.
* * *
가루이자와에서 경찰에 연행된 후 태정은 유치장에서 하루를 있었다. 또다시 이렇게 된 건가, 뜬눈으로 밤을 샜는데 의외로 그 다음날 태정은 풀려 나왔다. 서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고토가 그의 눈에 띄는 비머를 세워놓고, 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태정의 출소 기념행사가 어땠느냐고 물었다. 기념행사였다. 그것이. 하지만, 이어진 녀석의 말은 숨겨진 진짜 의도를 밝히고 있었다.
「그러니까, 허튼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라. 배상 준비나 하면서 말이야.」
녀석이 생각하는 허튼 수작이라는 것이 무언지 태정은 통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만 배상에 관해서만 물었다. 어떻게 배상하느냐고. 얼마를 배상하면 되느냐고. 그러자 녀석이 크게 웃다가, 낮게 으르렁댔다. 「그런 걸로 될 것 같아?!!」
배상을 말하더니 그런 걸로 되냐는 녀석에게 도무지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데 녀석은 돌연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이 눈, 이 눈 말이지. 필리피노의 각막을 이식 받은 거라고. 필리핀 녀석 거란 말이야!!」
그 기분을 네가 아느냐고, 고토는 갑작스레 소리를 버럭 질렀다. 태정은 움찔했다. 하지만,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화를 내는지 태정은 바로 이해했다. 이해했지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녀석은, 조센징인 태정을 혐오하는 것처럼, 자신의 눈이 외국인의 그것임에 화를 터뜨렸던 것이다.
무엇에 고토가 분을 내는지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태정은 녀석에게 물어야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고토는, 너무나 모호하게 말했다.
「성의를 보여.」
어떻게, 무엇으로 성의를 보이라는 것인지 구체적인 언급 없이 녀석은 차를 몰고 떠났다. 태정은, 우두커니 서서 차가 사라질 때까지 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다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생각하자고, 태정은 집을 생각했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태정은 노부인에게서 받은 천 엔이 아직 뒷주머니에 있음을 깨달았다. 바보 같았다. 계속 걸으면 언젠가는 집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천 엔을 쓰지 않고 있길 잘했다고, 고작 그런 것에 태정은 뿌듯해하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구깃구깃한 돈을 꺼내들고 펴서 바라보며 태정은 좀 더 집에 일찍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다음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