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28)

Till the Fat Lady Sings #16

사실 길거리에 줄곧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딘가의 장소를 찾아 들어가려나,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차를 타고 가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고토의 등만 보며 묵묵히 따라 가자, 나타난 곳은 우에노 공원의 주차장이었고, 그곳에서도 특히나 눈에 띄는 메탈릭 실버의 유선형의 곡선을 지닌 차가 고토의 차였다. 고토가 파킹된 차의 문을 열며 타라고 하여, 태정은 순순히 그렇게 했다―뒤쪽의 좌석에 앉으려 했지만, 차는 스포츠 카였고, 그런 것엔 뒤쪽 문이란 게 달려 있지 않았다.

스포츠카의 크고 화려한 엔진음을 자랑하면서 시동이 걸리고 차가 사납게 요동치며 출발했다. 몸이 이리저리 쏠려 태정은 창틀 언저리를 붙잡아 가까스로 지탱해야 했다. 일이 분도 지나지 않은 승차만으로, 태정은 이런 거친 운전이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끝나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여전한 건가. 사나운 운전 스타일은 새삼 드라이버의 성격을 떠오르게 했다. 외견상 과거보다 한결 차분해진 듯했지만, 난폭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내 비머 어떠냐?”

“……?”

뭘 묻는지 모르는 태정이 녀석을 그냥 멀뚱히 보자, ‘지금 네가 타고 있는 이 녀석, 이 차 말야’라고 그것도 못 알아 듣냐는 투로 말한다. 그제야 태정은 고토의 차가 비머라는 것을 깨닫는다. 비머라는 차가 있나? 하지만 질문은 이내 사라진다. 끼익하는 급정거와 부웅하는 급진, 익숙해지기 어려운 고토의 운전에 차는 그저 매우 불편할 뿐이었다. 조금 앉아 있으려니 태정은 몸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 공간이 넉넉지 않아, 다리를 구겨 넣고 어깨나 팔을 움츠리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트를 뒤로 더 빼.”

태정이 불편해 보였는지 핸들을 여유롭게 조작하던 고토가 한 마디 한다.

“여자애들은 아무 문제없던데, 아무래도 너한텐 비좁아 보이는군. 좀 더 뒤로 넓혀봐.”

여자들과 비교되는 말에, 태정은 자신이 앉은자리가 고토의 ‘여자’들―단수도 아닌 복수―의 그것임을 인식한다. 그 말은 태정의 불편함을 더욱 가중시켰다. 고토의 말대로 시트 조절을 하여 다리를 좀 더 뻗을 수 있었고, 어깨를 펼 수 있었지만, 편해졌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시트나 공간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태정의 사소한 움직임조차 조심스러웠던 것, 또 몸을 되도록 작게 말고 있었던 건, 옆자리의 고토를 과하게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길거리에선 느끼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하지만 협소하고 폐쇄된 차 안으로 장소가 바뀌고, 고토의 옆에 앉아 있자니 태정은 어색하고 긴장되었다―몸이 굳어 쥐가 날 만큼.

과거 이 조수석에 앉았던 ‘여자애’들이 그랬을 법하게, 태정은 고토를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우, 냄새나잖아.”

고토가 이게 무슨 냄새냐면서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태정을 돌아보면서 고토는 이내 코를 틀어쥐었다.

“이거이거…. 하하… 너, 씻은 지는 얼마나 됐냐? 냄새 나.”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면서 고토가 물었다. 냄새…? 그제야 태정은, 땀과 먼지와 오물에 찌든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역한 냄새를 코에 느꼈다. 그건, 스멀스멀 자신에게서 기어 나오는 냄새였다. 사실 냄새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익숙해서 고토의 지적을 받고 나서야 다시 인식이 되는. 깨닫고 보니, 밀폐된 차 안에는 자신이 피우는 냄새가 꽉 들어차 있었다.

고토가 선루프를 포함해 양쪽 측면의 창을 모두를 완전히 오픈시키자 윙윙거리며 센 바람이 감아 들어와 악취를 걷어간다.

“제길…, 시트에 냄새 배겠군.”

흘깃 태정을 보곤 차를 걱정하면서 고토는 다시 전면을 응시한다. 그가 운전하는데 다시 집중하는 것이, 태정에겐 다행이었다―왜인지 얼굴에 열이 올랐기 때문이다.

많이 둔해졌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혐오스런 시선을 받아도, 바닥에 퉤엣 침을 뱉으며 반감을 드러내도, 누군가 동전푼을 던져주었을 때도, 귀를 붉히거나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토가 혀를 차며 하는 한 마디에 수치심이 되살아난다.

올바른 인간은 수치를 안다는 말을, 태정은 틀리다고는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정은, 고토에 의해서만은 수치를 깨닫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하지만 지금 태정은 창피한 거다.

귀를 막고 무시하면 되는 것이었다. 무지함을 조롱당하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것이라 한마디 냉소를 되돌려주고, 냄새난다 업신여긴다면 씻으면 되는 것을.

그런데 그것이 지금은 되지 않았다.

지금의 태정은, 나약하다. 나약해져 버렸다. 고토를 무시할 만한 힘이 자신에겐 없었다. 강해지고자 했던 과거의 의지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과거의 노력은 대체 무엇이었나.

행여 또다시 냄새를 풍길까 태정의 몸은 또다시 움츠러들고 있었다. 긴장에 긴장이 더해져 간다. 힘이 없을수록 정신은 갈수록 명료해 지는 건가. 신경이 예민해져서는 모든 주의가 고토에게 쏠리고 있었다.

톡톡. 톡톡. 고토가 핸들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들기는 소리에 귀가 곧추선다. 톡톡. 톡톡. 신호를 기다리는 그 잠깐 동안이 지겹다는 듯 연신 손을 놀리는 소리.

“이봐.”

“……?”

열린 창밖의 소음, 엔진 소리 그리고 고토의 손장난 소리에 섞여 들어온 고토의 목소리. 곤두세웠던 태정의 귀가―신경이―움찔했지만, 그 부름에 천천히 고토를 돌아본다. 여전히 고토는 정면을 응시한 채였지만, 반응을 아는 건지 이쪽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운전할 때 말이지…, 흠 그래, 지금 같은 때, 사람들이 무슨 생각하는 줄 알아?”

태정은 그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모른다.

“모르겠는데.”

“섹스, 야.”

태정의 말에 거의 이어지듯, 대답이 흘러 나왔다.

섹스. 태정은 아무 대꾸도 없이 그 말을 되새길 뿐이었다. 이 녀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머릿속에 질문이 떠오르고, 눈앞에선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뀐다. 고토가 차를 출발시키며, 믿을 만한 통계라고, 푸하하 웃으면서 ‘우리들, 남자의 80퍼센트가 그렇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이걸…, 농담으로 들어야 하는 건가?

태정은 가늠할 수 없었다. 고토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배상을 요구하는가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시트 조절이나 하라며 태정의 편의를 돌보다가, 또 냄새가 난다고 태정에게 수치를 안긴다. 그리고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다―웃으면서.

누군가와는 그저 그런 농담이 될 수도 있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상대는 누군가가 아닌, 고토였다. 태정과 그와의 사이에서 섹스는, 절대 농담이 될 수 없었다.

태정이 ‘긴장’을 했던 것은, 고토를 그렇게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 과거의 ‘섹스’ 때문이었다―그 행위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태정으로서는 제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것이,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긴장’은 나약하고 강하고를 떠나, 태정도 어찌할 도리 없이 생겨나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그저 단순한 긴장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기억은 그렇데 놔두지 않았다.

‘섹스’의 기억은 ‘성性적인’ 긴장을 불러온다.

하지만, 긴장은 오로지 태정만의 것이었고, 과거의 기억에 얽매인 것도 한 사람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오히려 그것이 더 다행인지도 모른다. 태정은 물끄러미 고토를 쳐다보았다. 한 쪽 팔을 열린 창턱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매끄럽게 돌리는 고토는 가볍게 드라이브를 즐기러 나온 사람처럼 보인다. 자신이 느끼는 ‘성적인’ 긴장을 느끼고, 그것과 뗄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을 지금, 고토가 떠올리고 있다면…, 그 가정만으로도, 태정은 어떤 조롱과 모욕에도 느낄 수 없었던 견디기 힘든 수치를 느꼈다.

과거에 현재를 저당 잡히는 건 태정 하나로 족했다.

하지만, 이내 태정은 중요한 사실을 잠시 간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순진하게, 고토가 잊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태정이 그의 차에 동승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로 인해 둘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었다.

그 어딘가에 도착하면 저 고토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는 알게 되지 않을까.

“어딜 가는 거지?”

행선지쯤은 알고 있는 편이 좋으리라. 그때까지 태정은 어디를 향하는지조차 몰랐다. 묻지 않았던 것이다.

“파티.”

여유를 드러내는, 아주 짤막한 대답이 돌아온다.

“……파티?”

도쿄의 어떤 지명쯤을 기대한 게 잘못된 것이었나. 태정이 바란 대답을 고토는 좀처럼 주지 않는다.

“그래 파티가 있어. 즐거운, 파티가.”

‘즐거운 파티’란 고토의 말이 태정의 귀를 삭막하게 울렸다.

* * *

차가, 도쿄도東京都를 벗어난 지도 한참이 지났다. 그동안 귀가 심심했던 건지, 잠깐 고토가 음악을 틀었지만, 뭐가 마뜩찮은 건지 마구 버튼을 누르며 이것저것 바꾸다가 아예 꺼버렸다. 결국은 원상태다.

태정의 행선지에 대한 물음에, 빗나간 고토의 대답이 대화의 끝이었다. 차에는 오랫동안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도쿄를 벗어날 줄이야.

파티라고 해도, 태정은 과거 고토와 주먹다툼을 벌였던 오모테산도의 클럽 정도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고토의 파티에 대한 이미지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도쿄 시내 어딘가일 것이라 생각한 추측은 또 한 번 보기 좋게 빗나갔다. 도쿄도의 경계를 알리는 표지판을 지나쳐 차는 나가노현으로 진입해 있었다. 도대체 어떤 파티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전방의 시야가 컴컴하게 변해 있었다. 크고 높은 봉우리를 자랑하는 산들이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서 차를 바라보는 듯하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켜진 후 한동안이 지나서야, 태정은 고토의 파티가, 단어 그대로의 파티를 말하고 있는 건지를 의심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언뜻 언뜻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도로 안내판에는 어떤 휴양지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휴양지와 파티

꽤나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정말 파티가 있는 건가.

안내판의 휴양지는 태정에게도 아주 익숙한 이름이었다.

가루이자와.

다만 귀에 익숙할 뿐 인연은 없었던, 온 적도, 올 일도 없으리라 생각한 곳이다. 가루이자와, 라고 하면 즉시 관광과 휴양을 연상케 했고, 태정에게 그런 말들은 아주 향락적인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목적지가 가루이자와의 어딘가라는 추측은―이번에는―아마도 맞는 것 같았다. 고토의 핸들 놀림이 좀 더 정교해지면서, 길의 갈래 길로 자주 들어섰다. 속도는 여전했지만, 그건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주치는 차가 거의 없다는 것은 길이 특별한 목적지로 뻗어 있다는 것이고, 그건 남아 있는 길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운전 이외에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고토가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휴대 전화였다. 틱. 틱. 고토가 버튼을 누르고, 이내 신호음이 작게 들린다.

“음, 나야. 그래, 다 왔어.”

언제 연결되었는지 고토가 웃으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다 온 건가…. 긴 긴 드라이브의 끝이 고토에 의해 확인되자, 태정은 혼잣말로 그 사실을 음미하듯 되새긴다.

“뭐라고? 푸하하하….”

고토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웃는 소리에 태정의 중얼거림은 묻혀버리고 만다. 상대의 목소리는 태정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 미지의 상대가 궁금할 정도로, 고토의 목소리는 매우 상냥하다―녀석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놀랄 정도로.

“아아, 그래 그래, 마음대로 해. 괜찮아 괜찮아. 알았어 금방 가. 다 왔다니까.”

대답을 두 번씩 반복하다가, 입가에 미소를 남기운 채로 고토가 전화를 끊는다. 금방 간다는 말 때문인 건지 곧 고토가 엑셀을 한껏 밟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속도위반일 차에 가속도가 붙는다.

완만한 산등성이를 한숨에 돌아 오르자, 굵고 커다란, 그리고 매우 오래됐을 법한―나이가 절로 궁금해지는―나무가 서 있었다. 무언가 기다리는 것처럼 가지를 늘이고 서 있는 나무 밑에서 차의 속력이 화악 떨어졌다. 이정표처럼 서 있는 나무 아래로, 오솔길이 뻗어 있었고, 차는 그곳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떨어뜨린 속력으로 진행해 나간다.

각별한 보살핌을 받는 듯이 보이는 오래된 나무와, 현저히 떨어진 차의 속력, 곧이어 자갈이 깔린 길이 나타나고, 그 가장자리는 포석으로 정돈되어 있다. 태정은 차가 사유지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꽤나 긴 커브길의 진입로를 거치자, 불을 밝히고 있는 건물이 서서히 눈에 잡힌다. 화려한 조명으로 안팎을 장식하고 있는 건물은, 집…이라기보다는 별장이라는 말이 확실히 어울린다.

가루이자와의 별장이라.

그리고 그곳에서 파티가 있는 것이다.

차량 내부의 시계를 보니, 8시를 이미 훌쩍 넘어 있었다. 세 시간도 더 되는 시간을, 쉬지 않고 줄곧 달려 온 것이다. 세 시간이라고는 해도, 태정은 마치 일본열도를 종단한 듯한 피곤함을 느꼈다.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고토의 난폭한 운전에 풀리지 않은 긴장까지. 머리가 어지럽고 빈속이 메슥거린다. 손가락에조차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이미 꽤 늦었다고 생각되는 시간이었지만, 그건 태정의 생각으로, 별장에서는 지금 파티중이라는 분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살짝 새어 나오는 음악과 건물 안팎을 환히 밝히는 불빛. 파티가 무르익기에 적당한 시간인 것이다.

진입로와 이어진 별장 앞쪽의 평평하고 너른 뜰, 그 한켠에는 이미, 서너 대의 차가 주차하고 있었다. 그래도 넉넉해 보일 만큼 뜰이 넓었는데, 그 차들에 나란히 주차시키지 않고, 고토는 별장 입구에 차를 바싹 가져간다. 차의 엔진 소리와 자갈이 버석대는 기척을 어떻게 알아 챈 건지 차가 서기도 전에 입구의 문이 열렸고, 누군가가 나오고 있었다―누군가는 하나가 아니었다.

차의 시동이 꺼지고 엔진음도 완전히 사라진다.

“내려.”

명령하듯 말하는 고토는 이미 벨트를 풀고, 차의 문을 열고 있다. 차가 서고도 움직일 생각을 않던 태정은, 그제야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마사키―!!”

차 밖으로, 약간의 과장적인 울림을 지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정이 소리를 따라 밖을 보자 정면의 유리 너머로, 고토는 어떤 여성과 뺨과 입가에 키스를 주고받았다. 고토의 팔이 여자의 잘록한 허리를 꽈악 끌어안은 모습은 둘의 사이가 그저 단순한 친구만은 아니라는 암시를 던져주고 있었다. 둘의 주위로는 서넛의 사람이, 오래간만의 재회 같은 ‘연인’들의 진한 포옹의 인사를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달칵.

태정이 차 문을 열자, 사람들의 시선은 소리에 반응하여 태정에게 옮겨졌다. 문의 낮은 위치 때문에 숙이며 나온 고개를 들자 태정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과 눈이 마주쳤다. 절뚝. 태정이 차를 내려서면서 한 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장시간 굽혀져 있던 관절이 굳은 듯, 펴지질 않았다. 다리가 삐걱거리며 바닥을 헛디딘다. 고토를 환영하는 모든 인사가 뚝 끊기고 사람들이 말을 잊은 듯,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비된 듯한 오른쪽 무릎 관절을 짚으며 태정은 엉거주춤 서서, 침묵 속에 쏟아지는 시선을 고루 받았다. 남자가 둘, 여자가 한 명, 그리고 고토와 그 곁에 있는 여성. 태정의 위아래를 훑던 표정들은 하나같이 찌푸려지면서 동시에 의구심과 놀람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눈에는 미세한 경악까지 비친다. 둘러보던 태정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정작 그들은 눈을 피했다. 고개를 돌리며 고토를 보거나 서로 서로 눈짓을 나눈다. 저 사람 누구야? 알아? 아니 모르겠는데. 저런 사람을 왜 마사키는…, 수군거림이 들리다가 웅성임을 집약한 듯, 한 목소리가 고토에게 질문을 던진다.

“마사키, 누구야?”

한쪽 눈살을 찌푸리며 가늠하듯 태정을 쳐다보던 한 남자였다. 목소리가 찌푸린 눈살처럼 태정을 내켜하지 않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조센징, 게스트.”

여전히…, 여전히 태정은 고토에게 조센징에 ‘불과’했다. 가볍게 ‘조센징’이라는 한마디로 태정을 말한다. 태정은 설명과 수식이 생략된 채 이름조차 말소 당하여, 단지 조센징으로 분류될 뿐이었다. 그들이 제각각 이해하는 조센징의 의미와 이미지로 태정은 해체되고, 또 태정의 현재 모습은, 그 단어에 새로운 이미지를 덧칠할 것이다―분명 보기 좋은 덧칠은 못되리라.

고토의 ‘조센징’이란 소개로 태정의 모든 것을 파악한 사람들은, 힐끗힐끗 그를 본다, 태정을 신경 쓰지도, 신경을 안 쓰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분위기였다.

“다른 애들은?”

이들이 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파티 멤버로는 너무 조촐한 숫자가 아닌가. 질문에 고토의 허리에 팔을 두른 여자가, 노는데 정신이 팔렸다며, 들어가 보라고 한다. 자신을 맞으러 나오지도 않는다며 괘씸하다고, 농담조로 투덜대면서 고토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모두에게서, 고토와 동행한 이방인에 대해서는 잊혀진다. 아니, 그들이 태정을 잊는다기보다, 고토에게서 비롯되고 있는 그 어떤 태도로 인해 태정은 무시해도 되는 존재라는 힌트를 얻게 되는 것이다.

모두들 문 안으로 고토의 뒤를 따라 들어간다. 저 무리의 뒤를 따라야 하는 것인가.

“들어와요.”

이방인을 무시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이룬 듯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한 남자가 뒤에 남겨진 태정을 부른다. 마치 손님을 맞이하듯, 손잡이를 쥐고 문을 연 채로 예의 바르게 서 있었다. 친절한 태도와는 다르게, 표정은 상당히 굳어 있다. 유심히 자신을 살피는 시선 같지만 공연한 기분이리라, 태정은 그에게 살짝 목례를 하며 지친 다리를 이끈다.

주인이 없으니까 심심하잖아, 마사키. 어이 마사키 온 거야? 마사키 도대체 뭘 하고 온 거야? 안에서도 고토는 환영 인사의 세례를 받고 있었다. 마사키. 마사키. 마사키. 그들은 고토를 모두 마사키라고 부르고 있었다. 태정에게 고토는 그저 고토인 것을. 웃으면서 친구들을 끌어안거나 하이파이브를 하는 고토의 모습은 아마도 ‘마사키’의 모습일 것이다.

뒤로 문이 닫히고, 최후로 태정이 등장하자, 역시나 문밖에서의 상황―당황과 술렁임―이 비슷하게 재연되지만, 누구냐는 질문에 다만 고토의 소개가 조금 바뀐다.

“아아…, 그거, 우에노에서 노숙하던 녀석이야.”

털썩, 소파에 앉아 양팔을 젖히며 고토는 예의 비뚠 웃음을 지었다.

“에에…? 정말?”

“이번엔 또 뭐야 마사키. 새로운 놀이인가?”

“저거 때문에 늦은 거야?”

고토의 말, 그 반응들은 태정이 안 보인다거나, 이곳에 없는 취급이었다. 그거, 저거…, 사물을 칭할 때 쓰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람에게 붙인다. 그들에게 태정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고토는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편하게 몸을 활짝 뒤로 젖힌다. 눈을 가렸던 선글라스는 이미 셔츠의 포켓에 매달려 있었다. 고토의 두 눈을 태정은 처음으로,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태정의 반응을 기다리듯 고토 역시 그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눈에 수술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변한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딘가 변한 듯한 인상을 받는 건 왜인지…. 날카로운 빛을 띄우는 눈은 여전히 잔인함을 담고 있고, 희게 드러난 이는 상대를 움츠리게 한다. 가장 중요한 눈을 보지도 않고 고토가 변했다고 섣불리 생각하다니.

태정은 눈을 돌렸다. 시선을 피하는 그를, 고토는 집요하게 놓아주지 않았다. 목이 마르다…. 아주 급격하게, 태정에게 갈증이 밀어닥쳤다. 끼니 대신으로 자주 물을 마셨지만, 지금은 공복을 달래기 위한 그런 것과는 아주 다르게 목이 탔다. 마침, 일본식 꽃꽂이가 멋지게 장식되어 있는 자그마한 장식 테이블 위에 잔이 놓여 있었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마치 대기라도 한 듯한 물잔에 태정은 반갑게 한 번에 쭈욱 그것을 들이켰다. 후우…, 입을 닦으며 잔을 입에서 떼지만, 갈증은 그리 해소되지 않는다.

“에엣… 내 와인…?!!”

가까이서 들리는 새된 목소리에 태정이 고개를 틀자 한 여성이 짜증스런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태정과 글라스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태정도 따라서 비워진 물잔을 내려다본다―아니 와인 잔인 건가. 이젠 완전히 비워진 잔을 원주인인 듯한 여인에게 태정은 말없이 내밀었다.

“뭐얏…. 필요 없어요, 그런 거.”

한결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는 여성은 강한 거부감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태정은 반환을 거절당한 잔을 내려다보았다. 술인지 전혀 몰랐다. 물맛이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태정은 술의 향내를 맡지 못했다.

“마사키, 저거 노숙할 때 버릇인가 보지? 먹던 거 먹는 거.”

“하하하.”

“그래서 그런 거야? 크와하.”

이런 거다. 이곳에서 태정의 구실은, 파티를 즐겁게 할 하나의 구경거리인 것이다.

“야, 시게오, 그 접시 녀석한테 줘봐.”

웃음소리 속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소파 곁에 서서 음식이 든 접시를 들고 무언가를 우물거리던 남자가 고토를 본다.

“그거, 저 녀석한테 주라고.”

고토의 집게손가락이 접시를 향했다가 태정을 가리킨다. 접시를 든 남자가 잠시 머뭇거린다.

“아아 마사키, 녀석에게 베푸는 자비인 건가?”

“시게오. 며칠 굶은 얼굴인데 빨리 줘라.”

“으하하…, 시게오, 너 저기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손 안 보여?”

모두들 웃으면서 시게오란 남자를 재촉했다. 요란한 웃음소리에 휩싸여 남자는 스윽, 자신의 접시를 내밀었다.

“아페리티프aperitif를 마셨으니 주요리를 들어야지?”

마치 고토는 자신이 직접 요리를 권하듯 말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재미있어 하면서, 흥미진진하게 태정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고토만은 웃지 않았다. 입에 미소를 걸고 웃는 듯하지만, 눈이 냉랭하다.

태정은 와인잔을 있던 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게오가 내민 접시를 받아 들며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시게오가 아닌 고토에게.

접시는 먹던 음식물이 뒤엉켜 지저분하지만, 태정은 주저하지 않고 손으로―그 외에 다른 도구는 없었다―음식을 집어 입을 벌려 그 속에 넣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얹혀진 접시를 코에 박을 듯이 눈앞에 대고 쉬임없이 접시의 음식을 입 속으로 가져간다. 훈제된 고기를 삼키고 구운 토마토가 이어 들어간다. 꿀걱. 몇 번 씹지도 않고 음식은 목으로 넘어간다. 태정은 아무런 냄새를 맡지 못했다. 냄새 뿐 아니라 맛도 마찬가지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하…, 야아∼ 정말 급한가 보네….”

“어이 천천히 먹어. 누가 안 뺏어간다.”

비웃는 소리들. 하지만 태정은 먹는 것에 집중했다. 고토가 원하는 롤 플레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우스꽝스러운 광대. 접시를 빠르게 비우면서, 태정은 고토를 보았다. 이것이 네가 말한 배상이 된다면. 하지. 고토.

하지만, 냉랭했던 고토의 눈은 잔뜩 가늘어져 있다. 뭔가 마뜩찮은 얼굴이었다. 아닌 건가. 네가 원하는 배상은 이런 것이 아닌가. 무엇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지…?

태정이 접시에 묻은 고기의 기름과, 소스들, 찌꺼기까지 모두 혀로 깨끗하게 핥아먹자 고토의 눈이 더욱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거 먹어도 되는 겁니까?”

태정은 접시를 든 다른 사람을 찾아낸다.

“뭐어… 이것도…?”

“이걸로는 모자랍니다. 며칠 굶었더니….”

“하하……. 그래 여기.”

태정은 혀를 차며 웃는 사람에게서 접시를 건네받았다. 완전히 비워 씻은 듯이 깨끗한 접시 위에 새로 받은 접시를 포개 얹는다. 그러곤 어떤 여유도 두지 않고 다시 먹기 시작한다.

타인이 남긴 음식을 먹는 일 따위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그건 조롱받을 일도 혐오스런 일도 더러운 일도 결코 아닌 것이다.

태정은 그러한 일에 조금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어려움은커녕 감사할 일이었다.

줄곧 먹을 것들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감사’라는 것을 안다. 동정으로 던져지는 주먹밥도, 버려지는 도넛도, 심지어는 상한 도시락까지… 태정에겐 충분히 ‘감사’할 것들이었다.

세상에 내려진 모든 음식들에 감사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그럴 가치가 없었다.

냄새도 맛도 느껴지지 않은 이것들은 그저 입에 넣고 씹고 삼켜야 할 정체불명의 무엇이었다.

“마사키, 너도 뭣 좀 먹어야지…. 저녁 아직이지?”

“아아. 그래….”

누군가 고토에게 늦은 저녁을 권했고, 그에 대답하면서 고토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젠장…, 저 자식 때문에 입맛 다 버렸다. 나 원 더러워서….”

먹을 생각이 없는 듯 말하면서, 고토는 바깥의 테라스로 향했다.

“안 돼 마사키, 그래도 명색이 바비큐 파티란 말야. 조금이라도 먹어. 고기를 올려놨는데… 아앗!!! 고기!! 어떻게 해…, 그릴에 올려놓곤 까먹고 있었잖아―!!”

처음 고토를 맞이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코맹맹이 소리에서 점차 하이톤으로 올라가더니 급기야는 목소리가 바깥으로 사라졌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고토와 여자를 따르기 시작한다. 그들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혹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린 채로 나가는 것은 여자의 호들갑 때문이리라…. 저 혐오스러운 표정은…아마도 여자 때문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커다란 유리로 이루어진 거실 벽면은 바깥의 전경을 조망하기 좋게 되어 있다. 유리너머의 넓은 테라스에는 파티를 위한 음식들로 보이는 음식들이 풍성하게 널려 있는데, 한쪽에는 고기를 한창 태우고 있을 바비큐 그릴이 설치되어 있고, 테이블과 의자가 가든파티에 적당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잠시 비워졌던 그곳을 다시 사람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가는 걸 바라보면서도, 태정은 멈추지 않고 음식을 씹었다. 두 번째의 접시도 완전히 비우고 그러고 나서 태정은 식기를 내려놓는다.

“당신이…,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거실에 혼자 남았던 게 아니었던가.

태정의 시야가 미치지 않았던 한쪽 벽에 남자가 등을 기대고 있었다. 아까 입구의 문을 잡고 서 있었던 남자였다. 살피는 듯한 시선은 괜한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뭐 하는가…, 남자가 답을 기다리지만, 그 질문은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다. 고토에게 가야 할 것이리라 생각하지만, 태정은 그 생각을 입에 담진 않았다. 다만, 느닷없는 남자의 질문에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나를…, 아는 겁니까?”

그렇다는 대답대신 남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사관에 찾아와 다 보는 앞에서 마사키를 폭행했지요. 그때의 조고 회장 아닙니까. 그래서 형무….”

남자가 말을 문득 끊었다. 태정이 빙긋 웃으며 그 뒷말을 받아 이어 준다.

“그래서 형무소에 갔다왔고요. 그리고 여기서….”

태정은 남자의 물음을 되새긴다. 여기서 자신은 무얼 하고 있는 거였나?

“…그 과거를 배상하기 위해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태정과 고토, 둘뿐인 줄 알았건만, 그들의 과거는 전유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3자의 입에서 자신의 과거를 듣자 태정은, 한 사람에게 지워지는 ‘과거의 무게’를 실감하게 되었다. ‘과거’는 발목의 쇠스랑처럼 계속 따라다니게 될 것이었다. 태정은 힘을 짜내어 족쇄가 채워진 발을 이끌어야 했다.

“과거를 배상을 한다구요? 어떻게 말입니까?”

“모릅니다. 저도 아직은.”

남자의 고개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약간의 시간을 주저하던 남자는, 고개의 각도를 회복하면서 물었다.

“설마… 마사키가… 녀석이 배상을 하라고 하던가요? 당신에게?”

남자의 어투는 조금 의외였다. 배상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토의 요구는, 당연한 거겠지요.”

태정은 고토의 눈을 상기한다. 흔적 하나 없었지만, 이식 수술을 받은 눈인 것이다. 자신이 가했던 폭력이 어떤 형태로 고토에게 자리 잡고 있는지, 분명 태정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을 것이다. 배상해야 할 것은 눈뿐만은 아닐 것이리라.

하지만 남자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여전히 의문을 나타냈다.

“나는 그때―벌써 2년도 더 지났군요―당신이 마사키를 찾았던 이유를 압니다. 당신은, 그냥 주먹만 휘둘렀지만요. 아무 소리 없이, 아주 조용하게.”

태정을 보며 말하던 남자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들어 태정을 똑바로 응시한다.

“……배상을 요구해야 할 사람은, 마사키가 아닙니다. 당연한 거라면, 그때의 당신 행동이야말로 당연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신들의 친구가……, 죽었으니까요.”

지금, 이 남자는 책임을 시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무 늦었다. 하지만, 늦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말이리라

“…2년 전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말이군.”

혼잣말처럼 태정은 중얼거린다.

“그땐 그 모든 걸 장난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장난.”

웃거나, 화를 내기 충분한 말이지만, 웃기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태정은 무감동할 뿐이었다.

처음에는요, 라며 남자가 성급히 말을 덧붙이며 말했다.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했어요. 하지만, 나중엔 모두 무서웠던 겁니다. 겁에 질려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지요.”

남자의 말은 재를 쑤시는 것이었다. 다 꺼진 불의 재는 불쏘시개로 쑤셔봤자, 불은 다시 타오르지 않는다. 다만 먼지가 날 뿐이다. 되살리기 싫은 기억의 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당신을 이해해요. 마사키에게 화가 나겠지요. 아니, 화, 라는 말로 당신의 행동을 표현하기는 부족하지만…. 그때의 그건, 분노였지요.”

남자가 과연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태정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입니까? 그때 내가 고토를 찾아갔던 이유 말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 의문스런 표정이다. 남자가 태정의 이유를 알 리 없다. 남자가 보고, 믿는 것은 남자에게 사실이었다―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하지만, 태정의 사실은 아니었다.

그건 태정 자신만이 아는 이유였다. 태정은 다시금 과거의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태정은 고토 ‘때문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고토‘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 분노는.

그건 태정, 자신을 향해 있었던 거다.

“나는 화가 나 있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분노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남자에게 태정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난 당신이 무섭습니다.”

“무섭다고요…? 내가, 말입니까.”

남자의 말이 태정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무섭다는 것인가. 사실, 남자는 의아할 정도로 자신에게 정중하다. 그건 무서워서인 건가? 설마 그럴 리가. 하하…, 태정은 자신의 추측에 바닥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태정의 웃음은 낮게 울리면서 둘을 감싼 무거운 공기를 가볍게 흔들어 놓았다.

“모르겠어요. 당신의 어디가 무서운 건지. 지금은 확실히 무서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난 지금 숨을 크게 들이 내쉴 수가 없어요. 역시 무서운 건가…. 이런,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남자는, 도리질을 치면서 태정에게, 자신은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남자는 상세하게 설명한다.

“나는 옆에서, 바로 코앞에서 말입니다…. 고토가 당신에게 맞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지켜봤어요. 말리려고 했지만, 말릴 수 없었어요. 아무도, 아무도 못했지요. 그만큼 그때의 당신이 무서웠던 거겠지요.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그때의 당신을 지워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떠올려서 좋을 것이라곤 하나 없는 기억이라고 태정은 말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남자에게까지 사건은 나쁜 기억의 족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도대체 마사키는 왜….”

남자가 혼잣말처럼 말을 하다 또 고개를 흔든다.

“마사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여기 있는 건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남자는 아직도 태정에게 가진 경계를 늦추는 것 같지 않았다. 아직도 무섭다는 것처럼 일렁이는 눈에 일말의 불안이 서려 있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습니다.”

남자의 염려를 누그러뜨리려 태정은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는, 불필요한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태정의 말이 남자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설사 당신이 아무 짓을 하지 않는다 해도….’라며 남자는 태정의 약속의 말을, 단순히 가정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차하면 어길 수도 있다는 것처럼.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인 겁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나에게 있군요…. 알겠습니다.”

비아냥거림은 아니다. 말하면서 오히려 희미한 웃음이 나왔다. 자조였다. 태정은 남자가 고토 쪽의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객관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건인가. 결국 태정은 이곳에 있는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님에도 남자에게 비난받고 있었다. 그러나 태정은, 고토를 들먹이거나 고토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태정이 남자의 말을 조용히, 그리고 고스란히 수용하자, 상대는 머뭇머뭇, 말을 잇지 않다가 약간의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아…. 당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뭔가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마사키가 그쪽의 출소 직후부터 쭉 당신을 살펴 왔다는 건 아십니까….”

짐작은 했지만 역시, 였나. 남자는 태정의 추측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사실이 사실로 드러나지만, 태정은 그 이유를 새삼 상기하자, 의문에 미간이 좁아진다. 녀석이 자신을 찾은 이유와, 동기를 줄곧 배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것 때문인가.

남자는 태정의 표정에 몰랐나보다며, 스스로 판단을 내린다.

“아니, 당신을 주시해 왔던 건 그 이전부터, 계속이었어요. 거슬러 올라가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쪽이 처음 국사관을 찾았을 때부터 말입니다. 아, 전 생도회 멤버였어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랬나요.”

태정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긴 했지만, 그를 정확히 기억해내지는 못한다. 남자는 자신은 항상 마사키와 행동을 같이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기억하란 법은 없지요’라며 어깨를 으쓱인다.

“결국 당신은 마사키만을 알고 있군요. 마사키와 똑같이 말입니다. 녀석이 당신에게 조금 집착한다고는 느꼈지만, 금세 수그러들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벌써 2년을 넘었습니다. 전 마사키가 그렇게 흠씬 얻어맞고 나선 정신을 차렸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오히려 그 반대였지요. 지금 당신이 여기 있다니…, 하….”

남자는 눈앞의 태정이 여전히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한 눈을 하면서 혀를 찬다.

“히로카즈!!!”

갑작스런 여자의 목소리.

둘러보니, 고토가 있는 바깥에서 열린 테라스의 커다란 창을 열고 빠끔히 안을 들여다보는 누군가가 있다. 여자는, 이름을 부르면서 히로카즈라는 사람을 찾는다. 빨리 오라며 손짓을 하는 건 다름 아닌 이쪽을 향한 것이었다. 그제야 태정은 이 남자가 히로카즈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히로카즈는 여자를 흘끗 보면서 약간 귀찮다는 손짓만을 되돌릴 뿐이었다.

“도대체 그런 이상한 사람이랑 뭐 하는 거야.”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소리에 부루퉁한 말투로 불만을 표시하는 여자. 그래도 여전히 남자가 시큰둥하자, 여자는 투덜거리는 중얼거림을 안에 남기곤 바깥으로 사라졌다.

“아, 저 녀석 말은 신경쓰지 마세요.”

히로카즈는, 여자의 무례함에 태정에게 대신 양해를 구한다. 태정은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이상하다고 하는 말이나, 남자가 그더러 무섭다고 했던 것이나, 그 두 가지 모두 태정에겐 아무런 차이가 없는 말들이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또 그녀의 말은 당신이 들으라고 한 말 같은데요. 내가 아니라. 그리고 이상한 사람은, 이곳에 없습니다.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는 거지요. 그녀는 내가 이상하겠지만, 나에겐 고토가 이상하지요. 아, 나와 말을 나누는 당신도 좀 이상해 보이는군요. 하하…, 뭐, 그러니 이상하다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겁니다.”

“…….”

남자는 아무 말 없이 태정을 유심히 응시하기만 한다. 잠시 후 상대가 입을 열었다.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법이군요. 그리고 당신이 사람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태도이고요.”

히로카즈는 어떤 ‘법’과 ‘태도’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 길게 말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태정이 무언가 내가 길게 말한 건가, 라는 의문이 들게 할 만큼, 그 사이 상대는 태정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한 것처럼 말을 한다. 정작 그가 말하는 태정의 법과 태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본인은 알고 있지 못하는데도. 그러나 태정의 의문에 아랑곳없이 상대는 말이 이어진다.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왜 마사키가….”

“히로!”

이번엔 낮고 강한 남자의 목소리가, 히로카즈의 말을 차단한다. 목소리가 고토의 그것이고 녀석이 직접 친구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히로카즈의 태도는 아까의 여자에게 보인 반응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리 오라는 듯한, 고토의 고갯짓 한 번에, 히로카즈는 바로 그곳을 향한다. 하지만 왜인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그의 상체가 흠칫하더니 반걸음 정도 태정에게 다시 돌아선다.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환영하지만, 유감입니다. 당신이 마사키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늦은 인사를 건네는 히로카즈는, 환영과 비환영의 뜻을 동시에 나타내는 묘한 인사말처럼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표정을 지우면서 자신을 부르는 친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유리문 너머의 소란스러움에 합류한다.

이제 정말로 실내에는 혼자뿐이다. 멀뚱히 서 있기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서성거리기도 마땅치 않아 태정은 털썩, 소파에 앉는다. 소파는 매우 편하고 안락하다. 그 가죽은 또 굉장히 부드러워서 태정은 조심스레 만져 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소파에서 고개를 들자 정면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태정은 그 나마의 휴식도 취할 수 없었다.

고토가 불만이 잔뜩 어린 마뜩잖은 얼굴로 히로카즈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간이 거실 안쪽을 향해 날을 간 듯한 사나운 눈빛으로 고토가 태정을 쏘아본다. 그리고 히로카즈는 양쪽 손으로 여러 가지 제스처까지 취하며 설명한다. 그들의 말이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개의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쾅!―!”

두어 번 이쪽을 보는 고토와 눈이 마주쳤는가 싶을 때, 별안간 녀석이 커다란 유리면을 주먹으로 냅다 한 번 내리쳤다. 무방비 상태의 태정은 갑작스런 소리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태정의 어깨가 놀란 것을 보고 고토의 일자로 굳게 다물려져 있던 입매가 느슨해진다. 만족한 웃음. 눈은, 저급한 장난에 즐거운 듯 작아져 있다. 그리고 히로카즈를 불러낸 방식과 똑같은 형태로 태정을 부른다. 몸짓만으로.

태정은 부름에 순순히 일어나지만, 놀란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었다. 깜짝 쇼다…. 태정은 고토가 깜짝 쇼를 매우 좋아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군. 이런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더 남아 있는 게 있으리라. 녀석의 ‘쑈’ 말이다. 매번 놀랄 수도 없었다. 그때마다 이렇게 놀랬다가는 심장에 무리가 갈 거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정은 피실 웃음이 나왔다.

심장이라니…. 사람이란 생물이 원래 그런 것인가. 아니면, 나란 녀석이 이렇게 몸의 건강을 돌보았던 인간이었나. 도대체 언제부터 그랬었지…. 잇따른 머릿속의 질문에 고토에게 향하는 태정의 걸음은 안정을 찾는다. 뜀박 소리가 귀까지 울렸던 가슴은 모르는 사이 가라앉아 있었다.

* * *

그들이 연 파티가 어떤 성격의 파티인지를 태정이 말할 수는 없었다. 언뜻 들었을 땐 바비큐 파티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산장에서의 바비큐 파티, 그것도 또래들의 여름휴가 중의 캐주얼 파티라기엔 태정에게 사람들이 상당히 격식을 차린 옷차림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멋지게 드레스 업을 하고 있는 여자들의 옷은 현란하고 가지각색으로 다양하다. 나풀거리는, 혹은 몸매의 곡선을 드러내 주는 옷들이 태정의 시선을 잠시 붙들어 놓는다. 남성들은 그에 비해 한결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지만, 두엇은 타이를 하고 있고, 누군가가 여름 재킷을 아직 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 소매와 가슴께의 셔츠 단추를 느슨하게 푸르고 있거나, 웃통을 벗어 던지고 풀장에―그렇다 이곳에 수영장이 딸려 있었다―뛰어드는 녀석들도 처음엔 예의를 갖춘 복장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잔디밭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 처음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옷이나, 음식들, 노는 모습들이 하나 둘씩 태정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태정을 불러낸 고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라’고 했을 뿐이다. 가든 테라스에 배치된 테이블과 의자는 태정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태정 또한 굳이 몇 안 되는 의자에 엉덩이를 댈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바닥과 거의 비슷한 높이의 낮은, 외부로 오픈 된 테라스는 정원과 연해 있었고, 정원은 그 넓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잔디가 부드럽고 고르게 손질되어 있었다. 한동안 공원 생활을 했던 태정에겐 그곳이 아주 적당해 보였다. 비어 있는 그 넓은 공간의 어떤 곳이나 태정이 선택하고 차지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다리를 쭈욱 뻗고 앉아 있으려니 깔고 앉은 잔디의 감각이 실제로 익숙하고 편했다.

가드닝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으슥한 밤이지만 전체적인 수목들의 윤곽과 잔디의 상태만을 보고도 잘 가꿔진 정원임을 알 수 있었다. 정원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듯한 등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다. 점등되어 있지는 않아 서양식 조경의 정원은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지 못하는 듯했지만.

사람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거실에서 나오는 밝은 불빛을 받으며 테라스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풀 사이드에서 노닐거나―아까 전 풀에 뛰어든 인간을 보며 웃고 떠드는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태정의 귀에까지 울리고 있다. 풀장을 조명하는 라이트가 푸른색 물이 넘실거리는 풀과, 그 주변의 사람들 모습을 밝고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빛은 그곳과 꽤 거리를 두고 있는 태정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잔디 위에 덩그러니 자리를 잡은 태정의 얼굴을 은은히 비추지만, 결코 밝지 않은 빛이다.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하여 태정은 주위의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다.

빛의 밝기는 마치 그들과 태정을 비교해 위치와 상태를 보여주는 듯했다. 눈부신 빛을 받으며 아무 거리낄 것 없이 그들은 이 모든 것을―여름휴가, 바비큐 파티, 별장, 넓은 정원, 풀장까지―당연하게 누린다. 태정은 단지 그곳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나누어 받아 그저 한구석에서 지켜볼 따름이다. 빈부격차의 현실은, 풍요롭고 화려한 곳일수록 더 잘 느낄 수 있다.

쿠쿡…. 갑자기 빈부격차라니…. 뜬금없이 날아드는 자기 연민에 태정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최악이다.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여기게 되면 끝인 거다. 좋지 않다. 이곳은.

“…아무래도 좋지 않아.”

생각은 저절로 입에서 반복되어 나온다.

바스락.

낮게 중얼거린 혼잣말과 거의 비슷하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태정이 고개만 가볍게 돌려 뒤를 보자, 사람이 서 있다. 바닥에 앉은 태정의 눈높이엔 여성의 것이 분명한, 매끄럽게 노출된 다리가 보였다.

“저기, 방금 뭐라고 말한 거예요? 그거 일본어 아니죠?”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말에 태정은 큰 각도로 고개를 올려 그에게 말을 거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잔디밭을 밟고 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느새 와 있었던 건지. 여자는 음식을 수북이 담고 있는 접시를 들고 태정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네, 아닙니다.”

태정은 여자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만을 간단히 답해준다. 하지만 여자는 그러고 나서도 무슨 말이 이어질 것을 기대했는지 한 손으로는 접시를 받치고 한 손엔 컵을 들고서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더 이상 태정의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여자는 접시를 내밀었다.

“이거 드시라고요. 이건 깨끗한 거예요.”

여자의 목소리와 태도는 아주 상냥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알까. 그 상냥한 태도와 내미는 접시가 고토가 강요했던 음식과 고압적인 태도와도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사양하지 않으며 여자가 주는 것을 고맙다며 받아드는 자신은 또 뭐란 말인가. 부드럽게 다리를 감싸며 편안함을 주었던 잔디가 돌연 가시방석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여기 물도 있어요.”

여자는 선물이라도 주는 사람처럼 태정에게 컵을 내보였다. 컵에 든 물이 찰랑거린다. 컵을 받아들면 여자가 사라지려니 했지만, 오히려 무릎을 구부리며 몸의 위치 낮춘다. 그러고는 옷을 조심스레 추스르며 여자는 아예 태정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난 제3국인에게 어떤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여자는 태정에게 자신의 입장을 자랑스럽게 표명했다.

“하하…, 그런가요….”

제3국인이라…. 태정은 그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웃으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태정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제3국 같은 곳이 어디를 말하는지도 알지도 못하고 가본 적도 없다. 하지만 가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3국인. 이미 그 말 자체로 편견을 담고 있는 것을, 여자는 모르는 것이다. 그 말의 사용에 대해 논란이 있었음에도 여자는 ‘편견 없이’ 태정을 제3국인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그건 논란이 꽤나 오래 전 일이라서 일까.

여자의 말은 태정에게 음식과 물을 가져다주었던 것과 같은 동일한 성질의 그것이었다. 스스로의 관대함에 도취된 행동, 그리고 말.

“네, 결국 제3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다 같은 사람 아니겠어요.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르다면, 국적 정도일까… 요즘 세상에 그런 게 뭐 문제가 되나요?”

아마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정은 반복되는 여자의 잘못된 말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태정은 그저 접시에 곁들여져 있었던 포크로, 여자가 갖다준 ‘관대한’ 음식을 묵묵히 입안으로 실어 날랐다.

몇 년 만에 보는 커다란 구운 새우를 한 입에 가득 채워 넣는다. 제대로 씹지도 채 삼키지도 않고 태정은 이어 구운 전복을 맛보았다. 그리고 또 맛본다. 갖가지 그릴에서 구워진 해산물과 고기들을.

맛이, 없었다.

“누구나 다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죠. 안 그래요?”

여자는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고개를 살짝 틀어 태정을 곁눈질로 생긋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듯이.

친구라…. 여자는 공원에서 만났던 또 다른 누군가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낯선 이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다 잠정적인 내 친구일 뿐’이라는 거군요.”

“아,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여자는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태정이 정확히 말해주었다며 활짝 웃었다. 태정은, 그가 말한 인용구의 주인을 떠올렸다. 공원의 그 여성은 태정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토의 ‘친구’였다. 사과를 하러 태정을 찾았지만, 그것이 사실을 크게 바꾸지는 못한다. 그녀는 ‘친구’를 들먹임으로 태정의 ‘믿음’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혹시 당신, 고토가 가보라고 해서 이리로 온 건 아닙니까…. 하하.”

공원에서의 일이 상기되자, 눈앞의 상대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가볍게 상대의 정체를 의심하지만, 단지 농담일 뿐이었다. 그래서 웃으며 말을 건넸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여자의 얼굴 근육에 나타난 미세한 경직을 태정은 보았다. 아니라고, 여자는 턱을―더불어 눈도―약간 치켜들면서, 단호하고 깔끔하게 대답을 했다. 설마요 라며 손사래와 함께 푸훗하며 여자는 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에 ‘아 그런 거군’이라고 왜인지 태정은 쉽게 납득하고 있었다. 여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보였던 찰나의 주저는 흔적도 없이 재빨리 사라지고, 대수롭지 않은 거짓말은 슬쩍 무마된다. 그런 정도의 거짓말은, 꼭 지금의 이 여자만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능란하게 구사하는 기술이었다. 태정은 그런 것들에 많이 익숙해 있었다. 속고 속이고….

태정도, 그저 농담이었다며 가벼운 거짓말을 가볍게 넘기면서, 손에 든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어…!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잔뜩 무언가가 있었던 접시는 어느 샌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어머 벌써 다 먹은 거예요?”

엉겁결에 낸 태정의 작고 짧은 탄성에, 여자는 같은 곳에 시선을 주면서 태정과 함께 놀라한다.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 같더니…, 먹는 걸 뭘 그렇게 먹어요? 게다가 그 음식들은 모두 음미하면서 먹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다구요!! 예의가 아녜요. 그건.”

마치 태정이 어떤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여자는 문책하는 어조로 요란하다 싶게 말을 한다. 여자의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태정은 입안에서 떠도는 음식 찌꺼기들을 깨끗이 없애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건 모래처럼 입 속을 껄끄럽게 하고 있었다. 다행히 컵에든 물이 남아 있다. 두어 모금 물을 꿀꺽꿀꺽 들이키자 금세 컵마저 비어버린다.

“예의요?”

태정은 손등으로 물이 묻은 입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네, 공을 들인 아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예의 말예요. 요리에 깃들인 정성과 가치를 알아주고, 또 무엇보다 맛을 알아주어야죠. 그리고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올바른 방법을 가늠도 해보면서 말이죠. 그러곤 천천히 혀를 굴려가면서 먹어요. 혀를 최대한 사용해야 해요. 그렇게 물마시듯 한꺼번에 해치우다니…. 실례예요. 화난다구요. 사람에게 미각이 왜 있겠어요.”

여자는 꽤나 길게 ‘예의’라는 것으로 말을 늘였다. 그런 ‘이념’을 설파하는 것을 미식가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굳이 미식가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식도락을 마다하지 않는다. 먹는 것은 인생의 커다란 즐거움이고, 그것을 태정도 부인하진 않았다.

“요 몇 년 동안은, 오늘처럼 먹어본 적이 확실히 없습니다. 비싼 재료를 쓰고 솜씨를 부려 화려하게 요리를 했겠죠. 저기 식탁 위는 풍성하고 푸짐해 보이고 말입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나는 건, 언젠가 우에노에서 얻어먹었던 주먹밥입니다.”

그때의 기억에 태정의 얼굴엔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주먹밥이라고요?”

여자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되묻지만 입가의 미소는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사람은 웃으면서도 혐오를. 경멸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네, 그냥 편의점의 주먹밥이요. 정말 맛있었어요. 사치스럽고 비싼 음식은 물론 맛이 뛰어나겠지요.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 음식에 알아주어야 할 가치가… 있습니까? 있다 해도, 별로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제게 가치가 있는 건, 주먹밥 쪽입니다.”

“그럼 당신에게 최고의 음식, 최고의 요리는 주먹밥이라는 건가요?”

어떻게 저런 논리를 세울 수 있는 건지…. 또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가를 태정은 잠시 자신에게 묻는다. 하지만 친구의 범위라든가, 제3국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음식이야기가 훨씬 나았다. 그래서인지 여자의 비약에도 웃으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답을 해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물론 저도 화려하고 맛이 보장된 음식을 앞에 두면 눈을 뗄 수가 없고 이미 입에서는 침이 고입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선 감사라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져서요.”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비죽인다. 태정은 잠시 자신이 어려운 말을 하는가 엉뚱한 생각이 들었지만, 물론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여자는 태정의 말을 주의 깊게 귀담아 들을 생각이 없었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만 여기는 것이다. 여자의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느껴져, 태정의 응대는 자연스레 그것에 맞춰 진다

“보통 식사를 할 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잘 먹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 먹지 않습니까? 거의 습관적으로요.”

“네, 그런데요?”

“습관 같은 건성이 아닌, 내가 그런 인사를 정말로 하고 싶은 것들은, 어떤 잔치나 파티의 보기만 해도 배가 찰 것 같은 음식들이 아닙니다. 그저 간단하고 조촐한 것들이죠. 예의 주먹밥이나 미소시루 같은…, 후리가케를 뿌려 먹는 한 공기 밥이어도 감사한 거죠. 주먹밥이 가치가 있다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어요. 흐음… 역시 이해가 잘 안가네요.”

여자는 태정을 바라보는 여자의 고개는 여전히 갸우뚱해 있다. 딱히 여자의 이해를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태정은 더 이상 보완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을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쿵저러쿵 음식에 관해 장황한 이야기를 했건만, 사실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당신 말대로 그렇다고 해도, 맛있는 음식은 맛있게 먹어야죠. 아까 전의 당신은 마치 뭐랄까…. 으음…기계적이었어요. 무표정하게 씹고 삼키고…. 설마 맛을 못 느끼는 건 아닐 텐데요.”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여자에게 대답은 하지만, 태정은 진짜 문제를 말하지는 않았다. 맛을 못 느끼는 미각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태정의 문제는 후각에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래서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고토가 준 것부터 해서 여자까지… 주는 걸 꾸역꾸역 잘도 먹지 않았는가.

“그저 내겐 이곳의 음식들이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범주의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걸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에 따르면 그 이유가 맛있고 좋은 음식이라서 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

여자의 해석은 태정의 이유와 조금 동떨어져 있긴 하지만, 태정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태정을 보곤, 여자는 그와는 반대로 고개를 내젓는다.

“당신의 사고방식은 뭔가 좀 이상해요. …아무래도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건지…?”

여자는 태정에게 묻는 것도, 그렇다고 혼잣말도 아닌 어중간한 물음을 던지며 빈 접시와 빈 물컵을 챙겨 들었다.

“계속 여기에 있을 거예요?”

물음에 태정이 한 번 고개를 끄덕임으로 어디로도 가지 않은 것임을 내비치자, 그러면 또… 라며 여자는 ‘우리’라고 지칭한 무리들에게로 돌아갔다.

“우리, 라….”

태정은 잔디에 드러누우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깍지를 낀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고 하늘을 바라본다. 여자가 ‘우리’를 말하며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데 잠시 혼자 웃었다. 하지만, 실소할 게 아니었다. 새카만 하늘을 응시하며, 태정은 그에게 있어서의 ‘우리들’을 떠올리고 또 그들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자연스러운 생각이 태정의 머리에 깃든다.

돌아가야지.

돌아가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린 적 몇 번 있다. 하지만 ‘돌아가야겠다’고 의지를 다진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있어야 하는 장소로―집으로―돌아가자.

태정은 아버지가 두어 대 자신의 머리를 후려갈기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희상에겐 미안하다고 해도 모자를 것이다. 그리 유쾌한 상상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태정의 눈은 컴컴한 하늘에 듬성듬성 박힌 별빛을 좇고 있었다. 돌아갈 곳을 생각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줄곧 낯선 곳임을 의식했던 태정의 긴장이 완전히 사라지고 느긋해져 몸이 이완된다.

내려 덮는 어두움은 태정에게 친근한 존재였다. 휴양지의 별장에서, 잔디밭에 편히 누워 이렇게 밤이 주는 포근함을 만끽하고 있으려니 한가하게 휴가를 즐기고 있는 것도 같다. 서서히 눈이 감기려고 한다. 배가 불러서인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먹었으면서도 배는 부르다. 그러나 그건 식후의 포만감이 아니었다. 속이 거북하다고 하는 쪽에 가깝다.

미련하게 먹었으니 불평할 것도 못 되었다. 그리고 불평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음식을 제공한 고토에게? 아니면 또 무언가 잘못된 듯한 자신의 코에게?

“후읍… 하아….”

드러누운 상태로 태정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밤의 내음이 폐부로 깊게 스며들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들이마신 밤의 공기는 더 신선하고 더 차갑게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투둑. 이어 태정은 손에 닿는 잔디를 뜯어 얼굴에 가져와 대어 본다. 습기를 머금은 그것은 태정이 본래 기억하고 있었던 풀의 향기와 같다.

후각의 기능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없는 것 같았다.

다시, 후각의 문제이다.

그러나 태정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그것이 이제 자신에게 문제인지 아닌지조차 모르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오래 전의 그것들은 갑작스럽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불길하고 기분 나쁜 예감을 동반한 악취였으므로 태정은 그것이 ‘문제’임을 쉬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술을 마시면서 물인 줄로만 알았다. 배가 거북할 정도로 무언가를 먹었으면서 그중의 어떤 것 하나 맛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이 혀나 미각의 문제가 아님을 태정은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이제는 그것에 휘둘리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런 결심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냄새는 태정에게서 사라졌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냄새를 못 느낀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예의 그 지긋지긋한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말이다…. 후각의 기능이 잠시 마비된 건, 어쩌면 염려했던 선홍색의 비린 향내가 완전히, 영영 사라진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래 이건 오히려 좋은 징조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태정은 또 한 번 깊은 호흡을 한다. 후우…, 내쉬는 숨과 함께 머리를 가뜩 메우고 있던 문제가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내 먼발치의 풀에서 풍덩거리는 물장난 소리와 남녀의 목소리가 섞여 떠들썩하게 웃는 소리에 주의가 갔다.

그래서였나.

서벅거리며 잔디를 밟고 다가온 녀석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건.

“퍼억―.”

옆구리를 가격한 화끈한 통증에 화악 태정의 눈이 떠졌다. 아으… 절로 찌푸려지는 눈살과 함께 반사적인 신음이 태정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여기서 자면 안 되지.”

시커먼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는 밤하늘을 배경 삼아 고토가 누워 있는 태정을 굽어보고 있었다. 미처 일어나지 못한 태정은 통증에 그저 등을 땅에 비비며 걷어 채인 옆구리를 손으로 문지를 뿐이었다. 풀 쪽의 라이트에서 건너오는 희미한 빛이 있을 뿐이지만 그 빛에 드러난 녀석의 표정은 지극히 만족한 웃음을 드리우고 있었다. 분명 잘못 보거나 착각이 아닌 거다. 퍽―! 녀석의 한쪽 입매가 씨익 올라가는가 했을 때 태정은 또 한 번 발길질을 당했다.

“어서 일어나라고.”

똑같은 곳을 무방비 상태에서 두 번이나 채였다. 통증이 좀 가라앉기를 바라지만, 마냥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녀석이 일어나라고 했으니 일어 날 수밖에. 허리를 찌르르 울리는 격통에 태정은 침을 힘겹게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켜 앉아도 서 있는 고토의 시선은 여전히 높다.

“넌…, 대단히 폭력적이군.”

고토를 올려다보며 한마디를 겨우 내뱉을 수 있었지만 중얼거리면서 태정은 바로 후회했다. 쿡쿡쿡…. 참듯이 목구멍을 울리며 웃는 고토가 무슨 말을 할지 족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크큭…. 그 폭력 때문에 형무소 신세를 진 네가 할 소리는 아니라고 보는데?”

“…….”

태정이 할 말은 없었다.

“너 그거 알고는 있냐? 네가 그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거 말야.”

말이 없는 태정을 비웃음으로 조소하던 고토의 얼굴이 스윽 차갑게 굳어졌다. 그에 따라 말에 실려 있던 웃음기도 사라져 있다. 녀석의 목소리는 지극히 냉정하고 삭막했다.

“……전형?”

“그래, 가해자의 전형.”

의도적인 것일까. 그런 단순한 표정과 목소리의 변화만으로 고토는 자신의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태정은 자신을 내리 깔아 보는 고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귀에는 힘까지 주며 세워서는 그가 하는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가해자는―그러니까 너 같은 녀석을 말하는 거야―머리가 나빠서 자신이 한 짓을 금방, 새까맣게 까먹어 버려. 게다가, 도무지 상상력이란 게 없다고. 그래서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전혀 알지 못해. 생각도 안 하지. 안 그래? 내가 네 녀석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넌 전혀 모르지? 그러니까 고작 옆구리를 두 번 정도 차인 걸로 폭력적이라는 둥 그런 소릴 지껄일 수 있는 거라고. 결국 말하자면, 가해자들은, 아주 뻔뻔하다는 거야. 너처럼…. 어때, 내 말이 틀려? 응?”

“그래서…….”

틀리냐는 물음에 틀리다고 태정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저 쥐어짜내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 구차한 변명을 시도 할 뿐.

“그래서 뭐.”

고토가 태정의 뒷말을 재촉한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말했잖아.”

더 이상 고토의 눈을 마주하지 못해 태정의 시선은 슬그머니 딴 곳을 향한다. 더불어 녀석을 향해 꺾여 있던 고개가 수그러든다. 고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미안하다는 말로 무얼 하려 했던가.

“고개 들어.”

“…….”

“고개, 들어.”

단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이미 녀석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대고 있다. 태정은 천천히 고개를 꺾어 올리며 눈으로 고토의 눈을 찾았다.

“뭐어, 그렇게 눈을 피하는 건 그나마 네가 뻔뻔하다는 걸 스스로가 알고는 있는 거라 생각해주지.”

고토는 만족한 웃음과 함께 짐짓 관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나쁜 건 아냐. 아니 분명 좋은 말이지. 왜냐면 내 기분이 고조되거든. 난 누군가에게 미안하단 소릴 듣는 게 아주 좋아. 사과하는 놈들 모습이란 게 모조리 꼬리를 엉덩이 사이로 말고 낑낑대며 기는 개 같거든. 그런 기분…, 알겠냐?”

태정은 고개를 내젓는다……. 물론 알지 못한다. 다만 낑낑대는 개라고 하는 건 바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 것만은 알겠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 말이야…. 도대체 어떤 기분이지?”

고토는 마치 그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묻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의 가치를 기분을 돋우느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고토의 사고를 따라 갈 수도 없었지만, 미안하다는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은 태정의 머리를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묻는 것인가.

“그런 기분은 때에 따라, 그리고 사람마다 달라지는 거 아닌가. 넌 미안하단 소릴 해 본 적이 없나?”

“하아, 내가 왜 그런 소릴 하는데? 농담하냐.”

설마 했지만 정말 그런 것인가. 누군가에 미안한 기분을 정말 알지 못하는 건 아니리라 생각했건만 녀석은 정말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농담이라…. 태정은 고토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도리’라는 것은 깡그리 무시했던 녀석이었다. 그래서인가. 어처구니없는 고토의 말을 태정은 당연하다싶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태정의 차분한 반응 이면에는 어떤 모호한 허탈함이 깔려 있었다. 실망이다. 이내 어렴풋했던 그 감정이 분명해진다. 하. 실망이라니. 그것이 분명 실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임을 깨달은 태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망은 기대를 전제로 한다. 녀석이 뭔가 바뀌었으리라 그런 걸 기대했던 건가.

“말해봐 그럼. 넌 어떤 기분이었는지….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을 때의 기분 말야.”

고토는 상당히 집요하게 굴었다.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녀석이 무슨 말을 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미안한 것에 관해서라면 한 가지는 확실했다. 미안한 기분 같은 건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태정은 대답을 했다―아니, 해야 했다.

“단지… 후우….”

숨을 무겁게 내쉬고 태정은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말을 너에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기분이라면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헤에, 그럴 줄 알았어. 너, 겨우 그따위 생각으로 나한테 사과를 했냐?”

대답을 듣기 무섭게 고토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면서 시답잖은 뭔가를 보는 표정으로 태정을 응시했다. 그러곤 팔짱을 낀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녀석은 납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태정은 겨우 깨달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순순히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내 사과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말해줘. 다시 사과를 하지.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너…. 아직도 잘못된 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고토의 한쪽 눈살이 일그러진다. 태정은 녀석의 눈이 마뜩찮은 빛으로 잔뜩 채워진 원인을 생각해 본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것’이라 생각했다.

“아, 사과만으로는 부족하겠지. 당연해. 그 보상에…, 대해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어. 네가 만족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할게.”

“흥… 보상이라고? 이봐, 니가 여기 있는 이유를 모르지?”

“보상 때문이…, 아니었나?”

“아니야.”

“그러면 왜 이곳으로 데려 온 거지?”

“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지.”

가장 핵심인 ‘무엇을’ 보여준다는 것인지는 교활하게 빠져 있었다. 자신이 볼 것이, 보아야 할 것이 무언지를 태정은 물어야 했지만 무언가 목에 걸린 것처럼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저 의문을 담은 눈으로 고토를 응시하지만 녀석은 그저 냉랭한 눈으로 시선을 돌려줄 뿐이었다.

침묵이 잠시 흘렀고 태정이 고토와의 사이에 끼어드는 풀벌레 소리를 인식했을 때 고토가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이 좋았지만 태정은 또 스스로 움직이는 짐짝처럼 고토의 말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또다시 안으로. 그리고 고토가 보여주겠다고 한 것을 보는 것인가.

* * *

1층과 2층을 연결해주는 계단을 올라 태정은 방을 찾았다. 고토가 태정이 있어야 할 방을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지정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빈방이 아니었다. 방 한 구석에 배치된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는 것이 여성의 옷가지임을 태정은 식별해낼 수 있었다. 빈방을 생각했던 것 자체가 잘못일 수도 있다. 고토가 쓰고 있는 방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여자의 옷가지가 걸렸지만 그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에 틱, 스위치를 찾아 태정은 컴컴한 방의 불을 밝혔다.

방은 한눈에 모든 것이 들어오는 아담한 방이었다. 아마도 게스트 룸인 듯한 그곳은 욕실이 딸려 있다. 마침, 이라 생각하며 태정은 욕실에 들어선다. 서늘한 공기와 비누의 냄새가 코를 감아 돌았다. 쏴아―세면대의 물을 틀어 얼굴을 씻기엔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꿀꺽 꿀꺽. 물도 손으로 받아 먹어가면서 태정은 얼굴을 씻었다.

풀에 차 있는 많은 물을 봐서였나….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았던 몸의 더러움에 눈이 간다. 하지만 방에서 기다리라고 한 고토의 말이 있었다. 그리고 녀석에게 뻔뻔하다는 소리를 또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은 그저 변명일 뿐이었다. 태정은, 고토에 대해서만은, 잔뜩 소심하게 굴고 있는 것이다.

녀석이 무서운 것인가?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지금 그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주리라는 생각뿐이었다. 과거 얼마간 고토라는 인간을 겪지 않았고 또,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더더욱 그래야 했다. 태정은 비누거품을 내어 얼굴과 목과 귀를 구석구석 시간을 들여 씻었다―이왕 씻는 것이니. 이도 닦는다. 칫솔이 없으므로 검지손가락에 치약을 짜서 입 속에 넣어 이빨을 문지르는 것이다. 임시 방편책일 뿐이지만 효과는 꽤나 좋다. 지붕 없는 생활을 했던 기간 동안엔 이것이 꽤나 그리웠다. 치약이 있다니. 이 정도면 매우 위생적이지 않는가. 뽀득뽀득 손가락으로 이를 닦고 얻은 개운함과 청량함을 맛보면서 태정은 욕실을 나왔다.

2층임에도 사람들의 소음은 창문을 타고 꽤나 또렷이 들려왔다. 아니 여름밤이라 소리가 쉽사리 전달되는 것인지도…. 거기에다 태정은 열려진 창문 바로 아래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흔적이 역력한 침대라든가 여성의 옷이 걸려 있는 의자보다는 오히려 푹신한 카펫까지 깔려 있는 바닥이 나았다. 그렇게 구석 벽에 등을 의지하고서 태정은 고토를 기다리지만 단발적으로 들려오는 파티객의 소란은 아직 파티가 끝날 때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설마 밤을 새는 건 아니겠지.

이제 밤도 많이 늦었으니 태정은 그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흘러간 시간이 꽤나 된 것 같은데 말이다. 기다리는 것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게다가 태정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자꾸 감겨 오는 눈을 손으로 부비대지만 눈으로 손을 가져다 올리는 것도 힘겹다.

잠깐 정도는 괜찮으리라.

고개가 자꾸 옆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태정은 자신의 고개를 바로 가눌 수가 없었다.

* * *

태정은 몸을 감도는 한기를 느꼈다. 으음…. 머리가 매우 무거웠다. 어느새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얼마나 잔 거지…? 머리가 마치 무언가가 잡아끄는 듯이 축 쳐져 있어 태정은 힘겹게 머리를 들어 올린다. 마비된 고개가 삐꺽거려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뒷목을 감싸 쥐었다. 불편하게 꺾여 있었던 고개의 통증으로 잠시 손으로 목을 쥔 상태로 태정은 정신을 일깨웠다. 하지만 굳이 일깨울 필요가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방 안의 이상한 낯선 공기…. 눈으로 확인할 순 없어도 피부로 먼저 느껴지는 기운이 분명히 있었다. 태정의 잠을 깨운 것은 신체적 불편, 이상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있었다. 키득대는 사람의 웃음소리와 부스럭대는 소리…. 간간이 뒤섞여 들려오는 나지막한 대화들…. 방은 어두웠다. 그리고 사람이 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둘이다. 그들 중 하나는 고토인가…? 그래 고토이다. 고토가 있음을 태정은 아직 덜 깬 머리로 식별해낸다. 어두운 방 안에서 뚜렷하게 들려오는 인기척은 태정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도 같다. 모른다…? 무언가 이상하다.

태정은 이곳에서 고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이 한 말대로.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고토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렇지만 태정은 그저 숨을 죽이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이곳에 누군가가―바로 자신이―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가를 멍한 머리로 생각하면서….

“…….”

방 안을 채우던 고토의 음성, 그리고 상대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그것은 태정을 긴장하게 했다. 그리고 태정은 매우 곤혹스러웠다.

“아아……. 하아….”

젠장. 미처 쫓아 내지 못하던 잠이 모두 달아났다.

나지막이 오갔던 대화를 대신하여 태정의 귀를 울리는 것은 여자의 젖은 신음 소리. 그것은 각성제라도 되는 듯 태정의 뇌를 민활하게 만들었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 사람처럼 이제 태정의 지각은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주변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태정은 꼼짝 할 수 없었다. 잠이 들지만 않았어도 깨어서 고토를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시기를 놓쳤다. 그 상황에서 졸았던 것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다. 하지만 고토는 그런 태정을 깨우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왜, 무엇 때문인지는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얏…. 마사키 아팟…! 그렇게 깨물면….”

습윤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불현듯 날카로워져 고토에게 불만을 토한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남자의 큭큭큭… 하는, 목구멍으로 웃는 소리다. 만족을 품은 고토의 웃음에 이어 새된 여자의 신음소리가 조금 더 이어졌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좀 더 참아봐…. 자극이 강할수록… 추읍…, 흥분도 즐거움도 비례하는 거니까.”

띄엄띄엄 고토가 말을 잇는다. 말과 말 사이의 간극은 끈적하고 축축한 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듣고 있기가 왠지 거북해서 태정은 바닥에 붙어 있는 엉덩이를 슬쩍 좌우로 번갈아 떼었다 놓는다. 소리 없이 자세를 정돈하지만 그렇다고 머릿속까지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태정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정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물체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모호하게 드러날 뿐이지만, 침대 위 인영들의 실루엣은 섬세하고 뚜렷했다. 한 덩어리가 되어 얽혀 있는 인간의 육체는 마치 형광 물질처럼 시트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살과 살이 부딪는 소리라든가, 손바닥이 피부를 거칠게 쓸어 올리고 내리는 마찰음이라든가―는 밀폐된 방의 고요함 속에서, 아니 그 정적 때문에 더,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조율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행위 중의 소리는 행위 주체들의 흥분을 더욱 북돋게 마련이다. 여자는 한껏 고조된 신음소리를 토하고, 남자는 그 소리가 듣기 좋다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상대에게 감상을 들려준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 그리고 섹스.

고토와 그의 파트너는 섹스에 필요한 과정을 태정에게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리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익히 알고 있는 대로였다. 고토와 그의 파트너는 충실하게 섹스라는 스텝을 밟아 가고 있는 것이다. 친밀하고 은밀한 신체의 접촉으로 상대를 음미하고, 필요한 배경음을―어쩌면 조금은 의도적일 수 있는 신음들을―입으로 변주한다. 점점 뜨거워져 가는 그들의 입김은 행위가 더 노골적이 될 수 있도록 윤활제의 역할을 한다. 단순하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작용하는 것이다.

“흐응…, 마사키, 오늘은 급한 것 같네? 벌써 이렇게….”

“킥, 너도 마찬가지 아냐? 이렇게 젖어 있잖아…. 응?”

하나의 목적.

하반신의 쾌락, 원시적인 욕구의 충족, 요컨대 삽입이라는 것.

제길. 태정은, 그러한 것을 상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불가항력이다. 고토의 차 안에서 긴장한 것과도 같은 긴장으로 태정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성적인’ 긴장.

이곳으로 오는 줄곧 신경의 과민으로 근육까지 뻣뻣하게 굳었었다. 녀석을 심하게 의식해서 유발되었던 것이다. 그 ‘성적인’ 긴장은, 고토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일방적인 폭력으로 이뤄졌던 한 번의 ‘관계’에서 분명 고토는 성性의 대상이었다. 태정은 그 기억을 씻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고토의 차에 오르고 나서야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정은 무엇보다 고토가 그 과거―과오―를 잊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때의 기억이 환기될까 하는 두려움은 긴장으로 나타나 몸이 위축되었던 것이다. ‘성적인’ 기억을 불러일으킬까 하는 걱정으로 태정이 ‘성적인’ 긴장을 느꼈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떠올리기 싫은 사실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더 강하게 각인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치다.

“아, 고무. 고무 있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토가 세이프 섹스를 위한 소도구를 찾았다. 그러자 여자가 마사키는 꽤 철저하다고 하며, ‘혹시 그렇게 날 배려해주는 거야?’라고 묻는다.

그에 고토가 피식 웃었다.

“그런 노래가 있어….”

“노래? 무슨 노래?”

여자의 의문에 고토는 대답 대신 짧게 노래를 불렀다. 가락과 리듬까지 살짝 실어 넣어서.

“뉴 바기나 뉴 바기나를 원해. 대충 이런 노래. 들어본 적 없어?”

“그게 노래라고? 싫다…. 가사가 너무 노골적이잖아. 징그러. 혐오스럽고.”

“그게 재밌잖아. 하하. 또 보컬이 아주 애타게 바기나를 부르짖는데, 그것도 왠지 맘에 들고. 아무튼 나도 새로운 바기나를 원하는데 말야. 너는 뉴 바기나가 아니잖아? 그렇다면 고무라도 있어야 한다는 거지.”

“어떻게 그게 고무랑 연결돼서 그렇게 해석되는 거야?”

태정 역시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진짜 저런 노래가 있는 것일까? 믿을 수 없는 이상한 노래였지만, 고토가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만도 않았다―녀석이 지어냈다 해도 될 법한 노래였으니.

“바기나 뉴 바기나 ……내게 뉴 바기나를 보여줘. 찾아줘. 뉴 바기나가 필요해.”

고토가 즐거운 듯 노래를 계속 흥얼거렸다.

여자가 그만하라고 노래를 막아 보려 했지만, 고토의 바기나 타령은 조금 더 이어졌다.

이상한 노래, 이상한 어두움, 이상한 인간.

갑자기 태정은 그가 있는 공간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아아. 이 모든 것이 이상한 건, 자신이 있으면 안 되는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비현실적인 상황은 오히려―다행히도―태정을 현실로 잡아끌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돼.’

아직 늦은 건 아닐 것이다. 그냥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되는 것을 왜 아직까지 방구석에 앉아 어물쩍 거렸던 건가. 방문까지는 몇 걸음 되지도 않아 보였다. 좋아. 태정은 바닥에 손을 집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켜진 것은.

“고무가….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침대 옆 스탠드의 작은 등이 켜졌을 뿐이지만 방은 넉넉하게 밝았다―침대 위 두 남녀의 적나라함을 보기에는 아주 충분히. 여자의 우윳빛 피부는 아주 매끄럽게 보였고 드러누워 있음에도 봉긋하게 융기해 있는 가슴은 풍만하다. 여자의 몸은 고토의 아래에서 부자유해 보이지만, 흰 피부는 불빛을 반사하면서 보기 좋은 바디 셰이프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군림이라도 하려는 양, 여성의 위에서, 그녀의 허리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고토는 상체를 쭈욱 늘여 머리맡의 사이드 테이블을 손으로 뒤적였다. 부스럭 부스럭.

예기치 않게 불이 켜지는 바람에 방 안을 빠져나가려 기껏 끌어올린 태정의 결심은 다시 유보되었다. 또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 태정에게 고토와 여자의 동작은 태정에게 슬로 모션처럼 비춰졌다. 흘러가는 일초 일초가 그저 정지돼 있는 것처럼 한없이 느렸다. 순간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말이다. 이렇게 꼼짝도 않고 숨죽이고 있으면 그들이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 태정은 요행을 바라는 대책 없는 생각에 소리 없이 웃었다.

“아악!!! …뭐 뭐야…?!!”

무엇이 주의를 끌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피식 샌 웃음을 채 거두기도 전이었으니. 주의를 끈 건 그 웃음이었나. 아니, 아니다. 불이 켜진 상태에서 주의를 끄는 무엇은 바로 태정이 바로 거기에 존재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여자가 태정을 눈치 채기까지는 사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태정과 눈이 마주쳤을 때 여자는 쇳소리가 섞인 아주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유령을 본 듯 눈이 커지고 고토의 팔을 잡아끌면서 태정을 가리킨다.

“사람이, 저기 사람이 있어….”

두려운, 약간의 떨림이 있는 목소리로 여자는 마사키를 부른다. 태정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마사키’는 흘깃, 태정이 있는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듯 극히 당황한 얼굴의 여자는 그저 남자가 어찌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건지 고토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여자의 태도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고토는 아주 침착하다. 태정을 주시하는 눈과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은 침착함을 넘어 흘러넘치는 여유였다.

“일어나 있었군…. 그래,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 큭.”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고토는 태정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줄곧 알고 있었던 것이다. 벌거벗은 채로,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여성과 방금까지 뒹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아랑곳 않고 고토는 태정을 응시하며 씨익, 눈을 빛내며 웃고 있다.

“아, 난 몰랐어. 들어오는 걸 몰라서… 깨보니까….”

태정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려고 했지만, 말이 그리 생각대로 나와주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매끄럽게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한창 행위중인 남녀를 엿보고 있던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미소에, 한쪽 눈썹을 올린 채로 고토는 태정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듣고 있으니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표정과 제스처.

“깨보니까…. 불이 꺼져 있고…, 그… 말을… 걸 수가 없어서….”

태정의 혀가 말할수록 더 굳어지는 것은 고토가 보이는 행동 때문이었다. 일부러 보이기 위한 계산된 몸짓.

찌익―.

의도적인 고토의 쇼임을 알았지만 태정은 당혹스런 얼굴을 수습할 수 없었다. 고토의 손에는 그가 찾던 피임 도구가 어느새 들려 있었고 그것의 포장을 녀석이 입으로 찢었던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손으로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상당히 발기된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자극을 더하며 한껏 고양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토가 입에 붙어 있던 포장의 잔해를 뱉는다.

“마사키이?”

여자가 하이톤의 목소리로 의문을 표시하지만, 고토는 그녀의 부름에 반응이 없다. 녀석은 가랑이 사이의 곧추 선 자신의 물건을 손으로 부여잡고 그것을 위아래로 세게 훑어 내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후우 훅…, 조금 거칠게 토하는 숨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에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태정을 응시하며 찐득하게 시선을 떼지 않는 녀석의 눈은 의기양양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내 고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거침없이 발기된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마사키! 뭐 하는 거야? 지금… 지금 하겠다고?”

거듭된 여자의 물음. 지금 고토의 행동이,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어투다. 고토는 그저 웃으며 고무의 주름을 천천히 공을 들여 페니스 위에서 펴 올린다. 빈틈없이 성기와 밀착된 것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확인하고 나서야, 고토는 그녀에게로 허리를 굽혀 나직하게 답을 해주었다.

“그래, 할 거야.”

의지를 꺾지 않겠다는 고집에 찬 말을 고토는, 여자의 귓가에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이어 녀석은 여자의 귀를 깨문다.

“아얏,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리가. 마사키 난 싫어.”

뒤늦게 몸을 가릴 생각이 든 것인지 몸 아래에 깔린 시트를 끌어당기지만, 여자의 몸 위에서 고토는 꿈적도 않았다. 여자의 시도는 당연 무위로 돌아간다.

“누군가 보고 있으니까 더 흥분되잖아 안 그래?”

궁여지책으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려는 여자의 손목을 잡아 고토는 부드럽게―하지만 힘있게―위로 들어올리면서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들이밀곤 삼킬 듯이 가슴을―유두를 빤다.

“싫어. 싫다니까. 당신, 당신은 뭘 보고 있어? 빨리 나가. 나가라곳!!!”

고토가 자신의 뜻대로 해주지 않자 여자는 곤두선 목소리로 태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

태정이 반응한 거라고는 그 한마디뿐이었다. 하지만 정신이 든다. 여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태정이 취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바보같이. 눈앞의 상황에 멍청해져 있었다. 태정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시선을 정면으로, 문을 향해 돌리면서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되도록 침대를 향해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태정은 얼굴 가득 조소의 웃음을 흘리는 고토가 자신의 걸음을 주시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거기 서.”

멈칫. 문의 손잡이까지는 두 어 걸음. 하지만 그것에 채 못 미쳐 방해를 받는다. 후우… 태정은 한숨을 쉬었다. 멈춰 선 자신의 발끝이 내려 보인다.

이곳에선 줄곧 이렇다. 있어야 할 곳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날 봐. 여길 보라고.”

발끝을 향하던 태정의 시선은 고토를 향한다. 마사키―! 여자가 입을 벌리며 다시 부르지만, 쉬잇!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듯 고토는 검지를 세워 살짝 여자의 입에 올려놓았다. 놀랍게도 그것만으로 고토는 손쉽게 여자의 항의를 저지한다.

“거기 계속 서서, 보고 있어. 나갈 수 있으면 나가도 되지만. 뭐어 그때는….”

“알아.”

태정은 고토의 뒷말을 잘랐다. 녀석은 녀석의 말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 태정은 그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알아?”

“그래, 알고 있어.”

“아, 알고 계시다…?”

고토는 드러난 어깨를 으쓱이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일그러뜨린 한쪽 눈썹으로 인해 애매하게 비틀린 웃음을 지을 뿐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태정은 어렴풋이 느끼지만, 그런 석연찮은 냄새는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만다. 고토가 바로 코앞에서 여자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드러난 허벅지를 혀로 핥는 것이었다. 행위를 재개를 뜻했다. 하기 싫다고, 나중에 하라는 상대 여성의 의사를 무시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난 지금 굉장히 땡긴다고. 녀석은 신경쓰지 마. 아니 그래, 이건 그냥 적선이야. 저 녀석, 몇 년간 여자구경도 못한 놈이라고. 구경 정도는 얼마든지 시켜줘도 좋겠지. 안 그래? 그런 너그러움도 없어? 어차피 녀석은 너한테 손끝하나 못 댄다고. 나하고 섹스하는 건 변하지 않는 거야. 뭘 이런 것 가지고 까다롭게 굴어? 색다른 재미일 뿐인데.”

고토가 변설을 늘어놓으며 여자를 설득하려 들지만, 여자에게 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느냐며, 자신은 이런 취미 없다고, 마사키가 이럴 줄을 몰랐다며 고토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린다. 설득을 가장한 궤변을 기껏 늘어놓았으나 통하지 않자 고토는 쳇, 하고 입을 비죽이더니, 아무 망설임 없이 물리적인 힘을 행사했다. 여자의 어깨를 한 손으로 눌러 움직임을 봉쇄하고 허공으로 올라간 여자의 다리를 더욱 크게 벌려 어깨에 걸친다.

“하윽!!! 마사키!! 그렇게… 갑자기 넣으면….”

고토가 자신의 허리를 어슷하게 끼워 여자의 비소에 성급하게 밀어붙이자, 여자가 앙다문 잇새로 신음을 내며 고토를 노려보았다. 시간의 여유를 두지 않고 합의되지 않은 욕망을 무리하게 강요하고 나서, 아주 뻔뻔스럽게도 고토는 여자를 달랬다. 여자의 이마와 머리를 연거푸 쓰다듬으며 아프게 한 것 같은데 괜찮냐고 부드럽게 묻는다. 화내지 말라고, 화내는 게 더 자극적이니까 화내지 말라고 농담을 한다. 하지만 앵돌아진 여자의 표정이, 쉬이 화가 풀릴 것 같지 않다.

“계속 이래선 곤란하다고.”

상대의 화를 풀어주려는 노력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녀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일방적으로 다시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아… 앗. 싫… 으읍….”

신음을 흘리는 여자의 입을 깊은 키스로 막으면서 허리를 더욱 깊숙한 곳으로 짓쳐 올린다.

“너라서 그런 거야. 너니까 이런 것도 같이 즐기고 싶은 거라고. 난 널 즐겁게 해주고 싶어. 서로 즐겁게 끝내자고. 응?”

키스를 끝내고 귀에 속삭이는 고토에게 여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화 풀었어? 풀었으면 키스해줘. 자, 빨리.”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고토는 키스까지 요구하며 여자를 내려다본다. 기다리고 있잖아. 고토의 말에 그때까지 완강했던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체념이었다. 여자의 가느다란 팔이 고토의 목을 휘감았고, 녀석은 그가 원하는 여자의 키스를 받았다. 저항을 포기한 여자는 이제 고토의 어깨를 꽈악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는다. 고토의 허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섹스가 끝나자마자 여자는 고토를 밀어냈다. 여자의 뜻을 뒤늦게나마 존중해주는 녀석이다. 천천히 허리를 빼며 의외로 순순히 여자를 풀어준다.

“짜악―!!”

갑작스레 여자의 손이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고토는 얻어맞은 뺨에 엉겁결에 손을 댄 채 여자를 쳐다보지만, 여자는 고토 쪽은 보지도 않는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의 옷가지를 주워 입을 뿐이었다.

“…아―아야∼∼”

시간을 두고 흘리는 신음. 과장되고 인위적인 냄새가 아주 짙었다. 그런 고토를 여자는 물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여자는 급하게 걸친 원피스의 뒷 지퍼를 올리지도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아씨, 거 되게 아프네….”

고토는 부은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화장실을 가려는 듯 그쪽을 흘깃 보더니 침대를 내려오려는 듯 가장자리로 몸을 옮긴다. 하지만 정작 일어서진 않고 다리를 처억 벌리고 앉아서 자신의 다리를 내려 본다. 사타구니 사이에 걸리는 것을 그제야 의식했던 모양이다.

“어이, 숨 쉬라고…. 킥킥 그렇게 꼼짝도 않고 숨소리도 안 내고… 아주 열심히 보던데? 킬….”

녀석은 고개를 흘깃 들어 낄낄대면서 태정에게 말을 걸었다. 어깨를 들먹이며 웃으면서, 태정과 자신의 사타구니를 번갈아 보면서 콘돔을 벗겨 낸다. 널찍이 벌린 다리 사이에 성기는 힘없이 시들어 있었고 그것을 감싸고 있던 불투명한 막은 지금까지 빠지지 않은 것이 이상스럽다. 고토는 내용물이 들어 있는 콘돔의 입구를 어렵지 않게 한 번 감아 비끄러맸다. 녀석은, 작은 주머니 같은 그것의 끝을 잡아 대롱거리면서 흔들어 보이면서, 고토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고 서서 태정을 마주 보았다. 목운동을 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비트는 태도와 태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건들거린다.

“이게 그렇게 고단백 식품이라잖아. 너한테 필요할 것 같은데?”

고토는 피식 웃으며 태정의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잡아끌어 올렸다. 흠칫.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하지만 고토는 강하게 손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억세게 끌어당긴 태정의 오른손 위에 자신이 주물거리고 있던 주머니를 살며시 올려놓는다. 마치 그것을 떨어뜨릴 새라 태정의 손을 감싸 주먹을 쥐게 하면서―고토의 행동은 마치 우에노 공원에서 만났던 어떤 상냥한 노부인이 태정의 형편을 안타까워하며 천 엔을 손에 꼬옥 들려주었던 모양과도 같았다.

“영양 보충이라도 해. 아마, 맛있을 거야. 하하….”

입을 크게 벌리고 크게 웃으며 고토는 욕실을 향했다. 한쪽 엉덩이를 긁적이며 걸어가는 고토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지만 느슨하게 주먹 쥔 오른손의 감촉에 그제야 태정의 신경이 고토에서 멀어진다. 불현듯 손에 느껴진 그것은 습하고 또 약간은 뜨뜻한 것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해서 태정은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당연하다. 손안의 그것은 고토가 방출해낸 엄연한 배설물이다.

태정은 미간을 좁힌 채 주위를 둘러보지만 딱히 그것을 버릴 만한 곳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 화장실. 마땅히 휴지통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돌아본 곳엔 고토가 들어간 화장실. 그 문은 절반쯤 열린 채로 환한 빛을 이쪽으로 방출하고 있었다. 상관없겠지…. 별 생각 없이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일을 보고 있던 고토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본다. 놀랬나.

“뭐야 이 자식 사람 있는 거 몰라?”

“이거 버리려….”

“빨리 못 나가?”

고토의 험악한 기세에 태정은 뒷걸음을 쳤고, 쾅―!! 하고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태정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한 녀석. 전혀 개의치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민하게 군다. 여자와의 행위를 보여주고, 그 부산물을 태정에게 넘겨주며 처리를 맡겼다. 게다가 성기 또한 거리낌 없이 드러내던 녀석 아니었던가. 화장실이라 해서 별 다를 리는 없었다. 고토가 내다버린 듯한 수치나 모럴 따위를 화장실에서 갑자기 깨달은 건 아닐 터.

고토가 보이는 모순을 생각하며 태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덜컥. 험악하게 닫혔던 화장실의 문은 그때의 에너지를 뿜어내듯 기세 좋게 열리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흰색의 짧은 욕의를 걸치고 고토가 나왔다. 녀석이 무언가 걸쳤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태정이었다. 그와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고 아무래도 벌거벗은 상태의 상대와는 정상적인 대화가 무리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행이라 생각한 건 단지 순간이었다. 가운의 허리끈은 엉덩이까지 늘어져 걸치듯 느슨하게 매어져 있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게 벌어져 고토의 신체를 나체일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고토에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인 것으로 녀석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한쪽 구석에서 지켜보고 있는 태정에게도 말이다. 고토는 몸을 구부려 바닥의 옷을 들더니 포켓을 살펴보았다.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고 주물러보다가 또 방 안을 휘휘 둘러 살핀다.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다. 침대 옆의 테이블 서랍을 난폭하게 여닫고 휘젓는 모양이 물건을 찾지 못해 짜증내는 기색이 역력하다. 뭘 찾는 거지.

궁금증은 이내 풀린다.

“어이 거기 화장실에 담배 있나 살펴봐.”

담배였나. 명령조인 고토의 어투에 태정은 어깨를 그저 으쓱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것이 있길 바라면서. 녀석의 성질이 더 치솟기 전에 담배를 손에 들려주는 게 나으리라.

다행히 담배가 눈에 띈다. 동시에 휴지통도 눈에 띄었다. 그제야 태정은 아직까지 손에 고토의 체액이 담겨 있는 콘돔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길…. 태정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휴지통에 그것을 던져 넣었다. 손이 왠지 뜨겁고 끈적이는 듯하다. 하지만 밖에서 들리는 ‘있냐?’고 담배를 묻는 고토의 목소리에 손을 씻을 여유는 없었다. 라이터와 포개져 있는 담배를 함께 가지고 나오면서 그냥 태정은 손을 바지춤에 쓰윽 쓱 문지를 따름이었다. 고토가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기다리고 있다.

고토에게 다가가 태정은 찾은 물건을 내밀었다.

그런데, 받지 않는다. 고토는 그저 빤히 태정을 쳐다볼 뿐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태정이 여기, 하고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지만 고토가 한쪽 눈을 치켜뜨면서 태정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거, 불을 붙여줘야 할 것 아냐.”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를 했다.

당연하지 못한 요구를 타인에게 당연스레 요구하는 것은 태정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당연치 않은 요구를, 당연한 태도로써 수용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것은 그리 쉽진 않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이다.

태정은 담배를 꺼내 고토의 입에 물려주고 라이터를 켰다.

“후우―.”

녀석이 눈을 감고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말없이 서너 모금을 더 들이마시고 토해내고, 태정은 가만히 고토의 담배 빠는 모양을 바라만 본다. 담배는 붉게 타들어 가고, 연기는 퍼지고 공기는 탁하고 매워진다. 그동안 고토는 재를 바닥의 카펫 위로 두 번 털어 냈다. 무슨 말을 꺼내리라, 그래서 담배를 가볍게 퉁기는 손놀림에까지―고토의 모든 것에―주의를 주었던 것인데, 정작 고토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배상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자신을 데리고 온 이유라든가를 말해주기 바라는 게 잘못된 것일까. 고토는 또, 무언가를 보여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고토는 아무 말이 없고, 그저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만이 그를 대신해 빨아들이는 담배의 맛에 꽤나 만족하고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화를 내며 날카롭게 굴던 고토의 신경은 이제 가라앉은 듯하다.

“아깐 갑자기 들어가서 미안하다. 놀라게 한 것 같은데.”

화장실에서 고토의 반응은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미심쩍긴 해도 뒤늦게 남아 있는 하나의 이유에 생각이 미쳐 태정은 그것을 언급하며 고토에게 사과를 한다.

“뭐어? 놀라아?”

녀석이 물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떼고는 태정을 쏘아본다.

“내가 놀라게 해서, 화가 난 줄 알았어. 그래서….”

“이 자식, 누가 놀랐다고 그래?”

고토의 목소리와 얼굴에 날이 섰다. 당장에라도 침대 위에서 튕겨 일어나 태정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놀랬다고 생각한 건데 그게 아니었나. 별것 아닌 걸로 놀라거나 제풀에 놀랐을 때 벌컥 울화가 치밀거나 하지 않는가. 그럴 때는 놀랄 만한 것에 놀라는 경우보다 짜증의 강도가 더 거세지는 것이다. 화장실에서의 그 신경질적인 반응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태정은 생각했다. 하지만 고토는 저렇게 목을 굳히며 아니라고 한다.

놀란 것이 아니라 해도 저렇게 으르렁거릴 필요는 없을 텐데.

“내가 잘못 생각했다. 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지.”

“아닌 거겠지가 아니라 아니야. 멍청한 녀석 같으니.”

“그래. 아니야.”

태정은 피식 웃으며 고토의 말을 쉽게 긍정해주었다. 녀석의 절대적인 자신감에는 일말의 의심도 허용되지 않았다. 몇 년을 지나도 변함없는 녀석의 오만함을 상기하자 왜인지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정은 씁쓸한 웃음을 삼킨다.

“그래서 네가 보여준다는 건 이거였나?”

“이거라니, 아아―유카를 말하는 건가? 여기서 한 이 짓 말이지?”

고토는 앉은 채로 허리를 흔들었다. 다리를 활짝 벌리고 섹스 행위를 리얼하게 흉내 내는 고토 녀석은 외설스럽고 천박하다.

“어때 재밌었냐? 너를 위한 특별한 쇼였다고.”

“고마워.”

그저 그 자신의 변태적인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태정은 고개를 까딱하는 것과 함께 공치사를 곁들인다.

“하지만, 이건 그냥 우연이었어. 즉석 공연이라고 할까. 애드리브라고 할까. 왜 연주자나 배우가 흥이 나면 그러잖아. 나도 좀 그랬거든.”

“넌…. 그쪽으로 소질이 아주 남달랐지.”

오늘은 AV의 한 장면을 보지 않았는가. 언제나 생각한 거지만 고토는 천부적인 연기자였다. 태정의 말에 고토가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아,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기뻐해줘. 아직 메인이 남아 있다구.”

태정의 미간이 절로 좁아진다. 녀석이 이를 드러내고 즐거워하는 모양이 포획한 사냥물을 앞에 둔 들짐승 같았다.

“기뻐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

“호오…,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하긴 네 녀석, 아주 멍청하기만 한 조센징은 아니었지.”

“내가 얼마나 멍청하냐를 너한테 평가받고 싶진 않아 고토. 너와 이런 수수께끼 놀음을 하고 싶지도 않고…. 네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면, 그리고 그게 내가 봐야 할 것이라면, 보겠어.”

“…그게 뭔지 몰라도 보겠다…? 흠, 좋은 자세야.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겠다. 뭐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말이야. 그런 건 너한테 안 어울린다고. 조센징이면 조센징답게 굴어야지 않겠어? 으응?”

“난 조센징이지만, 조센징답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그게 도대체 어떤 거지?”

어떤 거냐고…, 고토가 중얼거린다.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녀석은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짧아진 담배의 끝을 잡고 한 모금, 들이마시면서 터벅, 터벅,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태정에게 다가왔다. 태정이 눈앞에 선 녀석을 바라보자, 고토는 폐에 빨아 들였던 연기를 도로 내놓았다―태정의 얼굴을 향해. 매운 연기에 태정은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본분을 잊고 사는 인간들이 많지.”

고토는 태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일깨워줘도 나쁘진 않겠지만 말이야.”

고토의 말과 동시에 태정은 흐읍 숨을 삼켰다. 태정의 손을 고토가 잡는가 싶더니 그대로 손등에 뜨거운 열이 밀려왔다. 치익―태정의 눈이 커지고, 살이 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태정은 손을 뺄 수 없었다. 고토의 손이 담배를 태정의 손등을 꾸욱 누르고 있었다. 태정의 손이 마치 재떨이인양 고토는 담배를 돌려 비벼댔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손은 마치 팔을 다 태워버릴 것 같았다. 태정이 고개를 내리자 손등에 꽂힌 담배가 보였다.

“조금 뜨겁지? 하지만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 차리는 녀석들이 있잖아. 그래서 그랬어.”

태정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담배를 손등에서 떼어냈다. 타 들어간 붉은 살과 담배의 검은 재가 뒤섞여 보기 흉한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걸로 이젠 내가 좀 더 조센징다워질 수 있는 건가?”

태정은 손등의 화상을 고토에게 보이며 물었다. 고토가 삐딱한 눈길로 태정을 훑어보면서 ‘물론 아니’라고 답한다.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겁을 내지도 않는군.”

그러길 바라는 건가? 자신이 화를 내거나 겁을 내길 고토가 원하는 것인가? 태정은 속으로 자문해보았다. 화를 낼 필요도 이유도, 또한 그럴 권리조차 없었다. 고토는 뒤늦은 화풀이를 태정에게 하는 것이었다. 화풀이에 어떻게 화를 내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 가지는 틀렸다.

“고토. 난 네가 무서워. 지금도 겁을 내고 있고. 네가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돼. 이제는 알아. 너의 위치와 나의 위치를.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거였지. 넌 강하고 나는 약하다는 것을. 너는 힘을 소유하고 있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네가 옳고, 나는 틀리다는 것을, …알아.”

태정은 조용하게 고토의 힘을 시인했다. 과거엔 바동거리면서 그 사실에 저항했다. 안간힘을 써서 거부하고 이를 악물고 반항했던 것을 이제는 담담하게 자신의 입으로 말 할 수 있었다.

“흐응…, 알고 있다∼?”

고토는 태정의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만족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고토는 흡족한 웃음을 머금는 대신, 마뜩찮은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태정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그래 잘 알고 있어. 네가 가진 힘을. 그것에 어떻게 겁을 내지 않을 수는 있을까…. 네가 원한다면 무릎이라도 꿇지.”

“그러면 꿇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하다. 고토의 말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태정은, 한쪽 다리를 굽히고 다시 다른쪽 다리를 굽혀 두 무릎을 동시에 바닥에 대었다. 고토의 두 발 앞에 태정의 두 무릎이 가지런하다. 태정은 고개를 들지 않고 가만히 고토의 나족裸足을 응시한다. 깨끗하고 또 매끈해 보이는 맨발은 아주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일견 유柔하게도 보인다. 아름다운 발이야말로 부와 여유를 갖추었다는 증거라 했나. 고토는 발까지도 가진 것과 여유를 드러내는 것이다. 끼어드는 잡념.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두 발이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정이 고개를 들자, 탁자 위의 전화를 들면서 고토가 태정을 향해 말을 했다.

“겁이 난다? 그렇다면 좀 더 겁을 내 보지 그래. 지금부터 전화를 걸 거거든.”

“……전화?”

어디로 전화를 한다는 건지, 왜 겁을 내야 한다는 건지 의미파악이 되지 않은 채 태정은 멍히 고토를 지켜보았다. 티. 티. 티. 녀석은 딱 세 번까지만 숫자를 눌렀다. 세 개의 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번호는 적지 않다. 하지만….

“경찰입니까? 집 안에 이상한 사람이 들어와 있습니다. 무기요? 그런 건 잘 보이지 않는데요. 하지만 굉장히 위험해 보여서 말입니다. 여기가 어디냐면… 가루이자와… 나카구라… 천이백칠십… 입니다. 빨리 좀 와주세요.”

‘설마’라는 의혹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고토 녀석,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이다. 녀석은 목소리에도 그럴싸하게 긴장을 실어 통화하고 있었다. 고작 이런 녀석의 장난을 위해, 그래서 이곳까지 이렇게 와야 했었나.

“좀 억울한 눈빛인데 그래. 뭐어, 도망쳐도 잡지는 않아.”

통화를 끝낸 녀석은, 언뜻 관대한 조건을 내 건다. 하지만 어차피 모두 고토의 손바닥 안인 것이다. 도망치거나 어디로 갈 생각이 태정에겐 아예 없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날 생각도 않고, 그렇다고 고토를 보지도 않은 채로 태정은 묻는다.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듯.

“보여준다는 게 이것이었나.”

“그래, 알고 있다고 했지? 하! 내가 보기엔 너, 아무것도 몰라.”

“그럼 가르쳐줘. 내가 뭘 모르고 있는 건지. 그리고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태정은 겨우 고개를 들어 고토를 바라본다.

“내가 이런 짓을 왜 하느냐…?”

녀석은 나직이 질문을 되물으며 태정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고토의 목소리는 가까스로 성질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고, 가늘게 뜬 한쪽 눈가는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자신이, 매우 잘못된 질문을 한 것을 태정은 그제야 깨닫는다. 녀석의 얼굴에서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지만, 곧 고토의 맨발이 태정의 꿇은 무릎 앞에 멈춰 서는 것을 어찌할 수는 없다.

“가르쳐달라고…?”

차악, 가라앉은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무겁게 내려온다. 잘못 건드린 뇌관이 이미 폭발직전임을 알리고 있었다―아니, 폭발한다.

“안다면서!!!! 엉?!!”

고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앞에 고정되었던 발 중 하나가 허공으로 뜨는가 싶더니, 퍼억!!! 태정의 어깨를 강타했다. 그리고 연이어 녀석의 발이 가슴을 배를 그리고 또다시 어깨를 연타한다.

“가르쳐주지!!”

퍼억, 고토는 왼발로 태정을 가격했다.

“기꺼이!! 가르쳐준다고.”

퍽! 퍽! 퍼억!! 고토는 발을 바꾸어 연달아 가르침을 보였다. 맨발 같은 것, 전혀 위협이 될 성싶지 않았다. 부드러워 보이기까지 했던 녀석의 발이었다. 하지만 한 번 힘이 실리자 단단한 타격 기구로 변해 마구잡이로 무릎 꿇은 태정의 상체를 가격한다.

“무서우면 무서운 녀석답게 굴어. (빠악!! 팍!) 태연자약한 얼굴로 뭐어? 겁이 나? 두렵다고? (빠악!!) 지금은 좀 무섭기는 하냐? 엉? 거지면 거지처럼 조센징이면 조센징처럼 굴라고!!! 네 녀석, 그 주제 넘는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알려주지.”

태정은 고토의 난타에 대비도 안 돼 있었을뿐더러 방어할 신체적 여력마저도 없었다. 몸은 녀석이 쳐대는 방향으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렸다. 아프다. 하지만 태정은 신음을 가까스로 삼킨다. 지금 같은 녀석의 상태라면 아마 신음까지 거슬릴 것이었다.

“엎드려!! 더 엎드리라고!!”

발은 폭군과도 같이 태정을 짓 쳐 마구 밟아 눌렀다. 고토는 이미 바닥으로 엎어져 있는 태정의 상체를―어깨를, 그리고 등을―발뒤꿈치로 콱콱 찍어 내린다.

“쿵!!”

급기야 태정의 이마가 바닥을 찧는다. 고토의 발이 뒷머리를 누르고 태정은 바닥에 얼굴을 댄 채로 고정된다. 그제야 비로소 고토의 발길질이 멈춘다. 녀석은 태정의 뒤통수를 으깨어 버릴 듯, 발바닥에 몸무게를 실으며 말했다.

“이거야. 이런 자세로 무섭다고 하는 거야. 잊지 마.”

이윽고 고토가 발이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태정은 한동안 그렇게 엎드려서 숨을 쉬었다.

석공의 쇠망치와 정이 없어도 충분했다. 고토는 발길질로써 태정을 원하는 형태로 빚어낸 것이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올 즈음, 태정은 몸을 일으켰다.

고토는 가운을 단정히 여미면서 거울을 보고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만족한 모습이 되었는지, 한 번 씨익 거울을 향해 웃고는, 방을 나섰다.

고토가 방을 나가 얼마 안 되어서, 경찰이 태정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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