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여인이 노래 할 때까지 #15
중년의 회사원에게서 주먹밥을 대접받았을 때와 같은, 운 좋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당시는 그래도 태정의 신색身色이 멀쩡한 편이었으니 그럴 수 있었으리라. 시간이 갈수록 거리의 먼지가 달라붙고, 몸이 땀과 오물로 찌들고 그것이 서로 다시 뒤섞여 어느 샌가 사람들이 기피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예상치 못하게 쏟아지는 소낙비라도 맞으면 말 그대로 땟국물이 몸을 타고 줄줄 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른 시간 공원이나 소학교의 혹은 역사의 화장실에서 손과 얼굴, 그리고 어쩔 때는 발까지 씻는다. 이도 닦고 면도도 가끔 한다. 할 만한 건 다 한다―다만 치약 같은 건 구경한 지 오래됐고, 일회용 면도기는 거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여유가 있으면 아예 웃통을 벗고 몸을 닦은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런데도,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4개월 째. 태정은 겨우인지 벌써인지 모를 시간을 대충 헤아렸다. 그리고 아마도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지금의 모습처럼 되는 것이리라 혼자 납득한다.
“엄마…, 저 사람 봐.”
서너 살짜리 사내아이가 저렇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가리키게 되는, 혐오감을 주는 인간의 모습 말이다. 어머 얘 그러면 안 돼. 저 사람 보지 마. 아이의 엄마는 태정을 완벽하게 외면하면서 그를 향해 뻗은 아이의 손을 잡아챈다. 하지만, 돌아보는 아이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채 태정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그 순진한 얼굴에 태정은 손을 아이에게 슬쩍 흔들어 보인다. 그걸 본 아이 엄마의 얼굴이 굳어진다. 이런… 기분을 상하게 했나. 그러나 저런 것이 정상이고 보통인 반응이다.
이 공원에서 저 아이와 젊은 엄마 외에 태정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전무하다. 대개의 사람들은 태정이 거기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지만 그 무관심의 대부분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손을 흔드는, 지극히 우호적인 태정의 동작에도 저 아이 엄마처럼 즉각 경계하는 눈초리가 되는 것이다. 쿡쿡. 사실, 그런 게 재미있긴 하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조금 웃어준 것뿐인데, 그것을 마치 태정이 그들에게 버럭 달려들 것이라는, 어떤 위험 신호처럼 여기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태정은 그들의 두려움을 우스워 하는 것에, 조금은 가책을 느낀다.
가끔은, 두려움뿐만은 아닌, 동정이나 연민 어린 시선도 태정은 경험한다. 그렇다고 돈푼을 동냥 받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일주일 전쯤인가, 곱게 차려입은 한 노부인이 그에게 1000엔 지폐를 손에 쥐어주었던 것이다.
그날은 아마도, 무언가를 잘못 먹었던 것 같다 (아니, 항상 잘못된 것을 먹고 있다고 하는 쪽이 옳은 말이다. 노상의 생활에 익숙해지면,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이나 도넛이 언제쯤 어디로 버려진다는 것 등을 조금의 노력으로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과일까지) 그때까지는 먹는 것 때문에 어떤 이상을 보인 적이 없는데 그날은 속에 꽤나 위태로운 음식이 들었던 것 같다.
위에 든 것을 모조리 토하고 속이 좀 편안해지는가 싶었는데 시간을 두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더 이상 게울 것도 없는데, 끝났는가 할 때쯤엔 다시 욕지기가 일어 태정은 노란 위액까지 봐야 했다.
「젊은이…, 어디 안 좋은 것 같은데.」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염려의 목소리. 태정은 토해낸 위액에 쓴 입맛을 다시면서 돌아보았고, 본 적 없는 노부인이 서 있었다. 태정이 힘없이 웃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부인은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다 큰일 나겠다 등등, 낯선 부랑객에 대한 걱정을 했던 것이다. 표정과 말에서 그것이 진심어린 우려가 배어 나왔기에 태정은 정말 괜찮다고 먹은 게 잘못된 것뿐이라며 아무 일 아니라고 설명을 하곤, 고맙다고 정중하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부인은 바르게 자란 청년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며 혀를 차면서, 지갑을 꺼내 들고 ‘어디 가서 제대로 된 끼니라도 하라’며 천 엔을―천 엔이나―태정의 손에 꼬옥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총총히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거부도 사양도, 반환도 못하고 돈만을 덜렁 들고 망연자실하게 서서 태정은 그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부인의 뒷모습이 사라졌을 때,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커다랗게 웃었다. 돈을 건네주며 하던 부인의 말에 자신은 진지하게 ‘이것으로 무엇을 먹을까’ 하는 생각부터 했던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그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태정은 미친 듯 킬킬대며 웃다가 우웩, 헛구역질을 하다가 다시 또 웃었다.
* * *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항상 세상이 불공평하다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희상이 녀석은 정당치 못한 구조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또랑또랑하게 눈을 빛내며 말하곤 했다. 결국 세상은 공평하거나 정당한 쪽보다는 그렇지 못한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태정은 그에게 주어지는 호의, 그리고 적의를 그렇게 단순하게 뭉뚱그려 세상을 논하는 말에 귀납시킬 수 없었다.
‘이론적으로’ 사람들의 호의나 적의, 무관심은 수학적으로 균등한 배분을 이루고 있다고 믿었다―세상이 공평하다면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이리라. 다만 그것들은 원할 때에 받지 못하고 원하지 않을 때에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통계를 무시한 균형이나 확률을, 경험에 입각하여 따지게 된다면 어떤 하나로 기우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라는 것이 매일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관심에 대해 공정, 불공정을 논하기 이전에 태정은 그 관심으로부터 되도록 벗어나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없는 듯 있는 것이―주위의 공기와 동화되는 것이―중요했다. 시선을 누구에게, 어딘가에, 무엇에, 줄 것이며 또한 주시하는 시간을 어떻게 적절히 분배하며 조절 할 것인가 하는 요령도 이미 자연스레 체득하고 있었다. 주변의 인간들을 불쾌하게 하려는 건 태정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인상을 줌으로써 그들의 기억에 인상을 지우려는 의도는 더더욱 없었다.
태정은 자신의 인상을 누군가에게 남기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의 기억에 그의 모습이 남겨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어느 정도 태정은 바라는 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무관심이 발휘하는 효용이란 이런 것이리라.
물론 그렇다고 그가 원하는 대로의 완벽이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 대해 의외로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걸 태정은 실감―체험―하고 있었다. 그 ‘어떤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을 좋아했다.
느닷없이 부딪혀 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예측하기 어려웠다.
지금처럼. 바로 눈앞의 누군가처럼 말이다.
“이시자키, 좋아하나 봐요?”
“……?”
갑작스런 질문을 던져오는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태정은 침묵과 더불어 낯선 상대를 의문스런 눈길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저 다만 호기심에 찬 상대의 눈길을 되돌려 받았을 뿐이다. 그 호기심이 호의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말을 거는 목소리와 눈길이 매우 상냥하다.
푸른 데님 스커트에 흰 티셔츠를 입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은 연신 싱글거리는 눈으로 태정을 직시했다.
티셔츠에는「I ♡ NY」이라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는데, 뉴욕의 홍보 대사를 해도 좋을 법한 상쾌한 미소의 미인이었다.
“……어떻게 안 좋아 할 수 있지요?”
가족이며 ‘누나’인 사람을…?
소리 없는 질문을 삼키며, 태정은 영문 없이 말을 건 상대방에게 굼뜬 대답을 들려준다.
“와우, 정말 대단한 팬인가 보네요. 어떻게 안 좋아 할 수 있냐니…, 나도 이시자키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불가항력적인 매력을 느낀 건 아닌데요.”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연스럽게 태정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치 거리를 가다 반가운 사람을 우연히 만나 동석하게 된 것처럼.
그녀의 동작과 말에는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그쪽, 네 시간 전 그대로 여기 앉아 있네요? 상체를 숙인 포즈도 그대로, 깍지 낀 손도 변하지 않은 채로 말예요. 아, 내가 딱 1시 반에 여길 지나갔거든요.”
여자는 잠깐 가느다란 손목에 감긴 시계를 내려 보곤 이야기를 계속했다. 약속이 있었는데 친구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깼다는 둥, 태정은 보지도 못한 그 친구에 대해 이런 저런 불평을 털어놓는다.
“나처럼 당신도 바람맞았나 했는데, 으으음… 저게 있더군요. 당신, 저걸 보고 있었던 거죠?”
여자는 맞은 편 건물을 커다랗게 장식하고 있는 ‘이시자키’의 음료 광고 패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맞죠?”
뻐기듯 여자는 턱을 삐뚜름히 치켜들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태정의 동의를 요구한다.
여자는 쾌활하고 스스럼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대의 격의 없고 거리낌 없는 태도에 태정은 공연한 의구심이 일었다. 하지만, 도대체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굴 경계해야 한다는 건가.
대부분의 상황에서 경계심에 가득 찬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는 건 태정이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방어벽이 없는 여자의 활짝 열린 태도가 오히려 이상할 수 있는 것이다.
“어 왜 대답이 없어요? 틀려요? 아니면…, 아아, 알겠다. 쑥스러운 거죠? 몇 시간동안 고작 여배우 광고 포스터나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게 사실 뭐,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죠.”
자칫 수다스러울 수 있는 여자의 재빠르게 흘러가는 말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인해서인지 경쾌한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상대의 직설적인 말에는 악의가 없었다. 단순히 솔직한 것일 뿐이리라.
무방비하고 상냥할 뿐인 눈앞의 여성에게 괜스레 경직되었던 스스로가 우습기도 하고 실없게 느껴진다. 낯선이들과의 ‘짧은 교제’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경계라니.
“그래요.”
“그래요…? 뭐가 그렇다는 거죠? 이시자키를 보고 있었다는 거? 아니면, 그걸 보고 있었다는 게 쑥스럽다… 이 말이 맞다는 건가요?”
“당신 말이 모두 맞다는 겁니다.”
태정은 상대의 추측과 지적에 동의를 표하고 일견 겸허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모두 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
“으음…, 이상해요. 대답은 전적인 긍정인데, 뭔가 건성이에요. 게다가 전혀 쑥스러워하는 얼굴도 아니잖아요.”
여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리면서, 그게 아니라는 듯 표정을 약간 찡그리며 석연찮은 심기를 드러낸다.
“그런가요.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지요.”
태정은 정중한 어투와 함께 목례까지 곁들인다.
말이 건성으로 나오는 것은 사실, 힘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르지 못한 취식取食으로 인해 약간의 탈진 증세가 있다고 태정 스스로 진단내린 상태였다.
“굉장히 쉽네요.”
“……네?”
“아까 내 말이 모두 맞다고 그랬잖아요. 다른 사람 말을 가볍게 인정하고, 또 사과도 아주 쉽게 하고요. 사과는 성의 있게 보였지만, 그냥 그것도 건성인거죠.”
태정은 그저 홀로 조용히 쉬고 싶었던 것을―누군가와 이야기할 기력조차 사실 아껴야 할 형편이었다―상대에 의해 멋대로 방해받았다. 그리고 그런 실례를 모르는 상대는, 무례하게 굴었다고 면박을 주고, 그에 대한 사과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비난하고 있었다.
태정이 건성이든 건성이 아니든, 그건 상대가 요구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난 당신 친구가 아닙니다.”
상대가 원하는 건 꽤나 까다로웠다. 모호하고 대단히 주관적인 기준의, 상대가 원하는 그것을 태정이 맞춰 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그녀의 친구에게서 구해야 할 법한 것이었다.
“알아요. 물론 그쪽은 친구가 아니지요.”
태정이 짚어낸 사실을 수긍하는 듯하지만, 상대는 ‘아직은요’라는 한마디를 덧붙이며 웃었다. 자신감에 차 있는 그 웃음은 ‘미소’보다는 ‘스마일’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지금부터라도 친구가 될 수 있잖아요?”
이제부터 친구라…, 여자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그거야말로 무엇보다 쉬운 일처럼 보였다.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럼요. 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 모두를 잠재적인 친구라고 생각하거든요.”
대단히 긍정적이고 밝은 사고방식을 지닌, 낙천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자세가 바로 그녀의 지금 모습일 것이다.
상대는 자신의 사고를 뚜렷이 피력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소유한 철학이 옳다는 확신에서 비롯되고 있었고, 그런 확신에 찬 신념이 태정은 매우 좋아 보였고 또 한없이 부러웠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다.
단지 부러움에서 그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을 너무 신뢰하는 거 아닙니까…?”
“으음…하지만 믿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물론, 그렇게 말하면 믿을 이유도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믿기로 한 거죠. 물론 당신도 믿었고요.”
그를 믿었다는 말에―무엇을 믿는다는 소리인가―태정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자, 여자는 생긋 웃으며 설명을 잇는다.
“당신만 해도 내가 말을 거니까 이렇게 상대를 해주잖아요. 처음엔 귀찮아했던 것 같지만. 후훗. 내가 당신을 두려워하거나 믿지 못했다면 처음부터 말 붙일 생각도 못했겠죠. 아무튼,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에요. 이게 내 믿음이지요.”
매끈한 조약돌처럼 여자의 믿음이라는 것은 반짝반짝 빛났고, 상처 없이 매끄러웠으며 의심이라는 무른 구석 없이 단단해 보인다.
“그런 믿음이 빗나간 적은, 없는 것 같군요.”
아마도 있다면, 친구에게 약속을 파기당한 것 정도이리라… 고 생각하며, 태정은 그 흠잡을 데 없는 믿음에 솔직한 감상을 드러낸다. 부러움을 담은 말이었지만, 상대는 줄곧 태정의 말뜻과 태도를 굴절해서 보는 듯하다. 여자는 태정의 말이 왠지 냉소적으로 들린다고 하는 것이다.
“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사람을 믿지 못할 커다란 이유라도 있는 것 같은데요…? 누군가 당신을 속였다거나, 배신했다거나….”
하하… 태정은 고개를 저으며 슬쩍 웃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아니다. 태정은 어떤 누군가에게도 기만당했거나 속은 기억 같은 건 없었다.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나도 믿어요.”
그저 하나, 믿지 못하는 게 있다.
태정은 그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다.
“후우…, 그건… 믿는 사람 표정이 아닌데요. 사람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동의를 해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당신의 그것엔 전혀 의미가 담겨 있지 않군요. 말했다시피, 건성이에요.”
태정은 거듭 상대의 비난을 받고 나서야,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아…, 그녀의 말이 맞았다.
“모든 말에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결국 어떤 것도 긍정하고 있지 않는 거죠.”
모든 걸 부정하고, 아무것도 신뢰하고 있지 않다. 아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믿을 여력조차 없는데 하물며 다른 것에 대한 것이랴.
태정은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자 웃음이 나오려 하지만, 자기 연민을 담은 웃음이란 건 기력을 빼앗길 뿐이다.
“난 당신 말에 또 고개가 끄덕여 지는데…, 그러면 안 되겠지요?”
“푸훗…, 오히려 이제 좀 나은데요…. 그런데 어쩌다 이런 재밌지도 않은 이야길 하게 된 거죠?”
여자는 웃으면서 태정에게 물었다. 그건 오히려 태정이 묻고 싶었던 거다. 태정은 여자는 까다로운 지적과 관찰의 눈초리를 마주하자 혹시 자신이 탐색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느낌이 문득 들었지만, 설마…, 여자의 두 눈 가득한 스마일에 태정은 그저 상대의 호기심이 과한 것이라 치부해버린다.
“글쎄요…, 처음에 난 이시자키를 보고 있었고, 당신이 이시자키를 좋아하냐고 물었죠.”
아마도, 여자의 달갑지 않은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태정이 상대에게 무례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그녀를 뿌리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가만히 상대를 하고 있었던 이유
―그녀가 처음 앉으면서 했던 말 때문이리라.
「나도 이시자키를 좋아하지만….」
그 한마디로 인해 태정은 상대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 했고 그렇게 반응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아! 이시자키! 그랬었죠!! 맞아요. 그랬는데. 그녀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고요, 당신. …으음……, 이시자키가 묘한 매력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좋아하는 거지만요.”
여자는 호들갑스럽게 이시자키를 기억하며, 그들 앞에 있는 광고를 유심히 살폈다. 팔짱을 끼고 목을 늘이고 턱을 세워서는 마치 미술조각이라도 품평하는 사람의 자세를 보이며, 그녀에 대한 평을 내린다.
“묘한 매력이라…, 그게 뭡니까?”
“에엣? 그거야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은데요? 그녀의 열성 팬은 당신 아닌가요?”
“전 팬이 아닙니다.”
태정은 그녀를 좋아해야 할 이유를 수십 가지도 더 알고 있고, 댈 수 있었지만, 그 수십 수백 가지도 더 되는 이유에 여자가 말한 ‘묘한 매력 때문’이라는 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팬이 아니라고요? 그럼 저 이시자키를 왜 그렇게 몇 시간이고 바라본 건데요?”
“……닮았거든요.”
“닮았다고요…? 누구를요?”
여자의 질문에 태정은 답하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말인가. 사실 닮았다는 대답 또한 바보스러웠다.
“흐음…, 닮았어요.”
태정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마치 그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의미심장한 상대의 한 마디에, 이제는 ‘누나’가 누굴 닮았는지 태정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닮았어요. 그쪽을.”
대답은 매우 뜻밖이었다. 여자는 이시자키가 태정을 꽤 많이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농담인가 했더니, 상대의 자세와 말은 진지했다. 아까의 팔짱낀 평론가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예의 날카로운 눈을 하고는 태정과 ‘이시자키’를 주의깊게 번갈아 본다.
“역시 닮았어요. 그것도 대단히.”
여자는 뭔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아래위로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태정은 누나와 함께 엮이어 이런 저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결코 적지 않았다. 피가 섞인 오누이 사이인 것을. 외모나 성격에서부터 시작해 태정이는 이렇고 태희는 저렇네 등의 입방아를 듣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런 말들은 지극히 주관적이었고 또 들쑥날쑥했으며 귀담을 필요없는 시시한 얘기들뿐이었다. 태희도 태정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수한 말을 들었건만.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대개의 말들이 두 남매의 차이와 상이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무언가에 있어서 둘이 비슷하다는 말은 드물었다. 외모나 생김새에 관한 평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아아, 닮았다는 말을 간혹, 아주 가끔 듣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소릴 했던 사람들은, 둘이 남매지간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시자키의 저 눈이요…,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깨끗하고 시원하고… 또… 밤하늘처럼 깊어서 뭔가 신비스럽거든요. 난 저 눈매가 좋아요. 으음, 당신 눈도…. 에? 뭐가 닮아 보인 거지?”
여자는 이시자키와 태정의 비슷한 점을 꼽아 내려하지만, 명확히 집어 내지 못했다. 혼잣말이 그 혼란을 드러내 보인다. 드물게 들었던 ‘닮았다’는 이야기를 생면부지의 인간에게서 들어 놀라 살짝 벌어진 태정의 입술이 상대의 혼란에 그저 조용한 미소로 슬쩍 뒤바뀐다.
“으음… 분명히 닮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말을 잘 못하겠어요. 이상한데요.”
그건 아마 떨어져 있었던 시간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나와 닮았다는 소릴 들었을 때도, 그저 많은 시간을 같이 지내면 사람은 서로 닮게 된다는 속설을 생각했을 뿐이다, 그들이 닮았다면, 서로 함께 보냈던 시간 때문이었고, 그나마의 비슷한 구석이 사라졌다면, 그것 또한 누나를 보지 못했던 때문인 것이다.
이시자키보다 눈이 약간 처져 있긴 하지만 아무튼 좀 닮았다. 웃을 때 한쪽 입가가 패이지 않느냐. 등등 여자는 태정이 듣기에 약간 억지스럽다 싶은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태정이 그저 슬며시 웃고만 있자 여자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죠?’라며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 닮았다니깐요.”
여자가 굳이 우기는 것에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는 것은, 누이와 닮았다는 오래간만의 소리가 듣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말 때문인지, 태정은 새삼 누나가 그리웠다. 눈앞의 누나를 몇 시간이고 바라보아도 누난 그저 ‘이시자키’라는 인물로, 광고 속에 고정된 무기질적 피사체일 뿐이다. 그건 누나가 아닌 것 같았고, 누나가 아니었다. 태정은 문득 두려워졌다.
“……누나.”
그에게 누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이, 착각이 아닌가 순간의 혼미함 속에 태정은 누나를 불렀다.
“응? 누나…라니요?”
여자는, 의아한 눈길로 태정을 바라보다 알겠다는 듯이 딱! 하고 한 번, 손뼉을 친다.
“아아 아까 닮았다는 사람이 누나인 거구나. 그렇죠?”
태정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은, 제 누나예요.”
태정은, 그저 말하고 싶었나보다. 그깟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푸후후후후훗.”
여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에 태정은 정말 누나가 누나가 아닌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말 이시자키가 태희일까. 누나가 그를 알아보기나 할까. 의심에 의심은 더해간다.
어쩌면 나는 누나를 영영 볼 수 없을지도.
“푸후후… 후후… 훗.”
여자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웃었다.
* * *
여자는 그날 꽤 많은 질문을 했던 것 같다.
‘누나’의 이야기에 물꼬가 트인 건지, 태정은 그녀에게 솔직하고 우호적일 수 있었다. 여자의 호기심은 상당히 강해서, 우에노 근처를 배회하는, 한낱 부랑자일 뿐인 그에게 궁금한 게 뭐 그리 많은지 의아스럽고 버겁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태정은 성실하게 응했고 답했다.
「왜 이렇게 살아요?」
여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아직 젊지 않느냐는, 여자의 질문은 이상하게도, 태정으로 하여금 자신이 그녀처럼 어리지 않다, 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여자가 분명 자신과 같은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한없이 어려 보이는 건, 우스운 자만 때문이리라―여자가 알지 못하는 알고, 겪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그래서 세상을 더 잘, 더 많이 알고 있을 거라는 교만.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착각일 뿐이었다.
정말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말이다. 태정은 여자의 쉬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사느냐….
‘이렇게’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혐오를 물론 알고 있지만, 굳이 ‘이렇게’ 살지 않더라도 태정은 그가 받았던 더 지독한 혐오를 기억한다.
그리고 어떤 혐오나 멸시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는 건 살고 싶어서일 거다. 항상 그래 왔듯이.
……다른 답은 없었다.
태정이 그가 가진 유일한 이유를 여자에게 말하자, 여자는 참 단순하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복잡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사실 나도 그런 삶의 나락의 끝자락을 한 번 경험해보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낭만적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낭만적일 수 있는지…, 여자는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의 나락의 끝자락’이라 표현된 것이 그 펄럭일 듯한 말처럼 낭만적일 수 있다면, 그건 여자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태정의 삶에 대한 욕구는 사실, 아주 구차한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 그 무의식 안에서 ‘눈물을 흘리는 조태정’이 바로 그 실체였다. 그건 태정이 꿈에 보았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형무소에서 꾸었던 그 꿈을 태정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곳이야말로 태정으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야 하는 지를 묻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아주 힘이 들었다. 태정은 간신히 붙들고 있었던,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삶에 대한 애착이 그나마도 모두 사라졌다고 믿었다. 지금 죽어도 별 아쉬울 건 없다는 정도가 그가 지닌 삶의 애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것을 애착이라 부를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수형자들끼리의 폭력사건이 터져 형무소 전체의 분위기가 흉흉했던 날―형무소 내 폭행사건은 수위가 높아져가고 있었다, 한 명이 그로 인해 죽었다―태정은 꿈을 꾸었다. 악몽이었다. 그것 꽤나 이상했다. 그 사건에 연루된 것도 아니었는데, 죽는 것은 태정이었다. 벌거벗은 채로 얻어맞아서 태정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살고 싶어서, 살고 싶다고 울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가 왜 그리 살고 싶어했던 건지는 아직도 모른다. 삶의 이유나, 목적, 혹은 미련, 또 그리워하는 것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발가벗겨진 채 수치도 모르고 그저 그는 목숨만을 구걸하고 있었다.
태정은, 꿈에서 꼴사납게 울었던 그 바보 같은 자식을 생각했다. 단지 꿈이었지만, 그건 태정이 억누르고 있던 태정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삶에 집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미처 몰랐다. 태정은 꿈속의 그 멍청한 울보 녀석을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꿈이 희미해져만 갔던 살고 싶은 삶에의 본능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살고 싶어서 울어본 적 있냐고 태정이 묻자, 여자는 깔깔 웃으면서 없다고 했다. 웃으면서 그게 뭐냐고, 왜 우냐고 했다.
「난요, 죽는 걸 알게 돼도 무덤덤할 것 같아요. 음,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주 침착하게 받아들일 거예요. 울고불고 살고 싶다고 소리치고…, 그런 거 좀 볼썽사납잖아요.」
그러면서 여자는, 혹시 당신 불치병에라도 걸린 거냐고 태정에게 농을 걸기도 했었다.
조금은 심각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가 농담을 나누고….
여자와의 대화는 지루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상대는 낯선 사람이었다. 태정은 여자의 이름을 몰랐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통성명이 필요 없는, 단편적인 교제에 불과했다. 단지 하루로 끝나는.
* * *
“오늘도 여전히 이시자키를 보는 군요?”
“어…?”
이틀 전의―아니 3일전이었나?―여자를 태정은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여자는 지금 또 태정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당신이었군요.”
상대를 확인하고, 태정은 오후의 인사를 건넨다.
“뭐, 또 궁금한 게 남아 있어요?”
이전의 만남에서 질문 공세를 편 것을 기억하고 태정은 웃으면서 여자를 반겼다. 하지만, 여자는 웃지 않았다.
“힘이 없어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요?”
태정을 걱정하는 여자의 모습은 그저 한 번 만난 사람이 보이는 표정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안 좋아 보이는데…, 어떻게 해요.”
상대방이 어떻게 할 것도, 걱정할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태정은 그저 허기가 졌을 뿐이고 오늘은 그게 좀 심한 것에 불과하다. 먹으려 들면 그럭저럭 배는 채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싫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근 한 달간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었다.
태정은 오히려 여자가 걱정되었다. 활발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여자의 풍부했던 표정이 오늘은 많이 달랐다. 근심스런 표정. 하지만, 근심에 더하여, 뭔가… 불안한 얼굴이다.
“미안해요.”
불안한 얼굴이 의아하다 싶더니, 여자는 영문 모를 사과를 했다.
“네…?”
“미안해요. 사실, 오늘은 사과를 하러 온 거예요.”
여자는 다시금 태정에게 곤란한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아, 아깐 여자의 얼굴 표정을 잘못 읽었던 건가…. 여자는 불안했던 게 아니라 미안했던 거다. 그것보다, 여자가 왜 미안해하는지 태정은 어리둥절했다.
“사과를요…? …저한테?”
“그래요 당신한테 미안한 짓을 했어요. 조오 상.”
조오 상.
태정은 그게 무엇인지 금방은 깨닫지 못했다. 낯설게만 들렸던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이름을 말 했었던가요?”
던질 필요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지러운 머리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빈속 때문에 현기증이 이는 건지, 여자의 말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조오 상. 여자가 미안한 건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넘치는 호의와 이상하다 싶은 호기심은 그것 때문이었던 건가?
여자는 태정을 알. 고. 있었다.
“물론, 당신은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가 말해 줬어요.”
“……그가…, 누굽니까?”
태정은 뜸을 들이다가, 느릿하게 여자에게 물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지만, 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당신도 알고 있어요.”
여자는 그라고만 언급하고 있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회피한다.
그? 태정이 알고 있다는 그를, 태정은 모른다. 다만,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 때문이었군요. 내게 말을 걸었던 이유가.”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여자가 그의 시선을 애써 피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태정에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였다. 상대는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를 했다.
“오늘은 적당한 날이 아니었는데….”
그리고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적당하다는 건 또 무엇에 적당하다는 말일까. 마치 여자는, 태정에게 사과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를 내러 온 사람 같다. 사실, 태정은 여자가 ‘뭔가’ 그에게 미안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저렇게나 미안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뭘 미안해하고 있는지 조차도 태정에겐 뚜렷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당한 날이라…, 오늘 당신이 이곳에 온 건 역시 어떤 이유가 있다는 말이군요. 그런 겁니까?”
그렇다고, 상대는 난색인 얼굴을 하면서도, 태정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시인했다.
“하지만, 걱정이 돼요. 당신 얼굴색도 좋지 않고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보여서요…. 이럴 줄은 몰랐는데.”
푸후…, 태정은 힘없이 웃었다. 그 또한 여자의 얼굴이 그리 좋아 뵈지 않았는데, 서로가 상대의 얼굴색이 안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당하지 않다는 겁니까?”
“그래요.”
태정은 여자에게 뭔가 고맙기까지 했다. 그래도 상대는 그를 염려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이 적당하지 않다면, 미루면 되지 않을까요.”
여자는 이곳에 온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태정은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여자가 미안해하고 있는 거라면, 계속 모른 채로 있는 게 아마도 나을 것이었다.
“미룰 수 있는 게 아녜요.”
이미 늦었다고 여자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의 말을 듣고 있다는 시늉도 없이, 태정은 벤치의 등걸이에 손을 짚고 천천히 몸을 세웠다. 이대로 여자와 같이 있으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미루고 싶습니다.”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한다. 이미 4개월 동안 피하고 있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헤어질 때의 인사말도 생략하고, 태정은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소용없음을 깨달았는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아랫니로 입술을 깨물면서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를 뒤로 한 채로 걷는다.
태정은 몇 걸음을 옮기다가, 멈칫했다. 그렇게 곤란한 얼굴을 하지 말라고, 내게 미안해하지 말라고 여자에게 말해줘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지만, 아니다. 태정은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사과는 자기만족적인 구석이 있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또다시 ‘이유를 가지고’ 그를 찾았다고 했지 않은가.
그녀는, 처음 태정에게 모든 걸 긍정하면서 결국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결국 똑같은 것이다. 여자는 미안해한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않고 있었다.
태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방향도 없이, 목적지도 모른 채 움직이는 발은 물속에서 헛발질을 하는 것처럼 무겁게 질척였다. 진창을 걷는 듯한 느낌에는 날이 습하고 더운 것이 한몫 거들고 있었다.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듯, 막바지 더위가 기승이었다. 거기에 더해, 삼일 간 뭔가를 찾. 아. 먹는 데 게을렀기 때문에 몸은 축축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족쇄를 채운 듯한 발이 더욱 느려지는 건, 여자가 언급했던 ‘그’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그’인가?
‘그’는 여자에게 태정의 이름을 알려주면서, 여자를 이용해 태정을 탐색했다. 그리고도 무언가 부족한 건지, 또 여자가 나타났다. 말하자면, ‘그’는―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자신의 소재를 알고 있었고, 그렇다는 건 태정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불가해한 짓을 할 인물을, 태정은 많이 알지 못했다. 아니, 그런 인물은 하나를 떠올리기도 버겁다.
하지만, 설마…, 정말로 ‘그’인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태정은 묻고 고개를 설레 내젓고 또다시 묻기를 반복했다.
골똘히 ‘그’에 대한 생각에 빠져, 그저 걸었다.
퍼억―! 앞을 보고 걸었음에도 마주 오는 행인을 뒤늦게 깨닫고는 태정이 피해보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누군가와 되게 부딪쳐 버렸다.
휘청. 태정은 크게 반 바퀴를 돌며 기우뚱한 몸의 균형을 가까스로 잡았다. 세게 부딪친 팔과 가슴 언저리가 뻐근하다. 뼈가 시큰할 정도의 충격이 예사롭지 않았다. 태정은 아픈 팔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고 머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아……. 저, 죄송합니다.”
숙인 고개를 들어 보니, 잔뜩 찌푸리고 있으리라 예상했던 상대는 웃고 있었다. 상당부분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상대의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입만은 확실히 웃는 모양이다.
“넘어지진 않는군.”
고의적인 충돌이었다, 라고 남자가 말하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게 아니었나. 상대가 돌진하는 듯한 기세라 느꼈던 건, 그저 태정의 느낌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눈을 끔벅이며 태정은 그저 황망히 남자를 응시했다. 언뜻 눈에 비치는 남자는 의도적으로 사람을 치고 지나면서 시비 걸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두어 발짝 떨어져, 태정을 마주하는 상대의 비뚜름한 고개는 한쪽 꼬리만 치켜 올라간 입술과 마찬가지로 태정을 비웃고 있었다. 드러난 이가 매우 가지런하고 희다는 엉뚱한 잡념이 끼어들지만, 슬쩍 보이는 흰 이빨은 경멸을 나타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상대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말은, 남자가 어떻게, 무엇을 보는지, 태정은 알 도리가 없었다. 상대의 눈을 차단하고 있는 선글라스로 인해, 태정은 매우 불편했다.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물리적, 심리적 불편은 불안으로 이어진다.
쿵. 쿵. 쿵.
불안은 가슴의 드세어진 고동으로 나타났다.
한 손의 엄지를 진즈의 같은 쪽 허리에 걸고는 남자는 한 걸음, 두 걸음 태정과의 거리를 좁혔다.
쿵. 쿵.
다가온 남자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태정에게 바싹 들이댄다. 선글라스 밑으로 노출되어 있는 남자의 입술에 줄곧 매달려 있던 조소가 지워진다.
쿠웅―.
무거웠던 심장의 널뛰던 박동은 이것을 감지해서였을까.
짙은 색의 렌즈는 여전히 남자의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태정은 그 너머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있을 눈을 알고 있었다.
“……고토.”
미안하다는 여자의 말은 이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미룰 수 없었다.
태정은 줄곧, 그를 마주 볼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있다. 본다는 건 만나는 것을 전제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상에 지나지 않았다.
태정은 고토를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키타무라처럼. 키타무라는, 죽었지만.
눈앞의 고토가, 태정은 현실 같지 않았다. 출소 후 누나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말이다.
“오랜만이군.”
코앞에서 그 고토가 인사를 했다.
‘그렇군, 오랜만이지’ 정도로 인사를 되돌릴 수도 있으련만, 태정은 입을 뗄 수 없었다. 생각이 정지하면 더불어 얼굴도 입도 따라 굳는 건가.
오랜만, 은 말 그대로의 시간이었다. 태정은 고토를 보면서 동시에 그 시간을 보았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변했다고 느꼈던 시간이었다. 그들과 마찬가지의 시간을, 눈앞의 고토 또한 똑같이 거쳤을 것이고 변화는 당연한 것이었다.
흘러내린 머리가 선글라스를 슬쩍 스치고, 귀를 덮은 머리가 목 언저리까지 내려와 이리 저리 뻗어 있었다. 비쭉이 세웠던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한결 차분해진 머리가 인물의 이미지를 대단히 바꾸어 놓는다. 위험한 느낌을 벗어버린 고토는 이제 호쾌한 이미지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 보인다. 외형적인 눈에 띄는 것이 아닌 무언가가 말이다. 누나가 누나이긴 누나인데 다른 사람이 돼버린 것처럼, 고토이긴 고토인데 다른 사람의 느낌을 풍기는 것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연이어 안부를 묻는 짧은 인사의 목소리엔 고저나 억양, 어떤 감정 표현도 배제되어 있었다. 고토의 인사는 그저 건조할 뿐으로, 선글라스처럼―아직도 그게 태정은 눈에 많이 거슬렸다―많은 정보를 차단하고 있었다. 처음, 그를 조소한 비뚠 웃음이 걸려 있었던 편이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토의 고개가 위아래로 조금 움직이는 듯싶더니 마치 양해를 구하는 듯한 포즈로, 두 손을 들면서 말한다.
“아, 미안. 쓸데없는 질문을 했어. 어깨로 건드렸을 뿐인데 쓰러질 뻔했지. 너, ……많이 말랐군. 수염은 그것 때문에 길렀나? 뺨은 패이고, 어깨는 구부정하고, 뼈가 튀어 나와 있잖아? 목은 얼룩덜룩, 손도 마찬가지. 손톱 밑은 새까맣고. 이거 가관이잖아?”
태정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며, 고토가 그에 대한 세부 묘사를 한다. 의문이나 느낌을 발하는 말에서조차 평이한 어투를 유지하는 고토의 말은 인사처럼 건조하게 읊어지고 나열될 뿐이었다. 마치 객관적이고 냉정한 서술 같다―하지만, 과장이었다. 태정에겐 그렇게 들렸다.
지금 나를 두고 말하고 있는 건가? 태정은 고토를 의심했다. 과장이라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스스로를 의심해 본다. 자신의 손을 뒤집었다 엎어 보고, 고개를 꺾어 내려 차림새를 스스로 훑고 머리에 손을 대보는 것이다.
그리고 태정은 그의 현재 모습을 처음으로 직시했다.
바뀐 건 고토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만이 변했다고 생각하면서, 태정은 그의 변화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나쁜 건 아니라고 형편없진 않다고,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했는데 이런 꼴일 줄은 몰랐다면서, 고토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직접 보는 건 또 굉장히 다르군.”
그렇다는 건, 간접적인 경로가 있었다는 거다. 그것이 그 여자…였던 것인가? 여자가 뒤늦게 떠오르면서 태정은 그가 떠나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 멀리 오진 않았다. 하지만, 두리번거려도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빈 벤치만이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태정이 여자와 고토와의 관계를 그리고 행방을 묻는 것을, 고토는 ‘헤에, 그 여자가 마음에 든 거냐’며, 해석의 방향을 엉뚱하게 잡는다.
“그녀에게 많은 얘길 했었지? 아주 재밌었어. 그리고 너, 아직도 그런 소릴 잘도 지껄이던데. 그렇게 살고 싶은 거라고?”
태정은, 여자가 거듭 미안하다고 한 이유를 지금에야 확실히 깨달았다. 그가 여자에게 했던 말을 고토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하찮더라도, 그건 태정이 가까스로 의지하는 신념이었다. 그것이 고토의 입속에서 나오자, 산산이 부서져버린다.
“비렁뱅이 주제에 그 혓바닥은 여전히 그대로야. 참 가소롭기 짝이 없어. 이것도 살고 싶은 거라고? 응?”
고토는 한 박자 끊고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이상한 게 말이지, 똑같은 소릴 또 들으니까 짜증이 나서 말이야. 그런 소릴 다신 못하게 만들어 주고 싶더라고.”
고토의 ‘또’라는 말은 옛날 기억을 희미하게 살려 놓는다. 언젠가 그에게 같은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그것을 고토는 머리에 담고 있었나. 후. 태정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다. 그건 단지 구실일 뿐이었다. 구실 삼아, 고토는 위협을 하고 있었다. 아직 고토에겐 끝나지 않은 거였다. 여전히 건조한 억양으로 말하는 고토는, 인상을 쓰고 목소리에 기합을 넣는 어떤 위협보다 더 효과적으로 태정을 위협했다.
고토, 그렇게 위협하지 않아도 돼. 네가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위협 같은 걸 하지 않아도, 태정은 고토의 뜻이 그렇다면 따를 것이고, 마음에 안 드는 무언가가 있다면 고칠 것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분명히 잘못했다. 과거 고토의 행위가 어떠했던가를 떠나서, 태정이 그래서는 안 되었다.
“미안하다.”
“……뭐?”
고토에게 다른 할 말은 없었다. 단지 한 마디뿐이었다.
고토의 되물음에 태정은 바싹 마른 입 속의 침을 삼켰다. 하지만 갈라진 목에 마른 침은 별 소용이 없었다.
“미안해. 너한테 굉장히 미안하다. 그 말을 할 겨를도 없었지. 넌 병원에 있었고, 난 그대로 수감되어서 말을 못했어.”
태정의 사과는 ‘그때 그러지 말걸’ 따위의 후회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과거의 재구성 같은 것도 태정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가슴에 계속 걸렸던 것이다.
“너…, 괜찮은 건가?
“하―!”
어처구니없다는 고토의 짧은 웃음에도, 너무 늦지 않았기를 태정은 바랄 뿐이다. 눈앞의 고토가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기에 물을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과거 그에게 행사했던 자신의 폭력을 돌이켜보면, 어떤 후유증도 없어 보이는 고토의 모습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다, 이상한 것이다. 왜 알아채지 못한 거지.
저 선글라스.
태정은 아직 고토의 눈을 보지 못했다.
“눈…, 고토, 네 눈은…….”
그제야 생각났다. 그때가. 눈을 부여잡고 내 눈, 내 눈을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런 외침을 일체 무시하고 태정은 그 얼굴을 더 사정없이 때렸다.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나중엔 고토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디다 대려고. 그 더러운 손을.”
태정은 자신이 고토의 선글라스에 손을 뻗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파악―하고 고토가 손을 세게 쳐내고 나서야 태정은 아픈 팔목을 문지르며, 굼뜨게 자신의 손을 거둬들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빠르게도 묻는다며 고토가 비아냥거렸다.
“내 눈이 보고 싶나? 뭐어, 보여줄 수 없는 건 아니야. 다만, 네 덕에 눈이 짝짝이가 됐어. 병신이 됐다는 거지.”
태정의 손은 허락되지 않는 선글라스를, 고토가 얼굴 위에서 위치를 재정돈시킨다. 고토의 선글라스가 줄곧 거슬렸던 것은 이것 때문이었나.
괜찮은 게 아니었다. 병신이라니. 태정의 머릿속으로 눈에 장애가 있거나, 병을 지닌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모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어떻게라니, 궁금하냐? 말해줘? 왼쪽 안구 손상이 심각해서, 안구 이식 수술을 받았지. 이식받은 눈 색깔이랑 크기가 오른쪽이랑 달라. 눈을 통째로 바꿨는데 당연한 거지만. 아무튼 달라도 보통 다른 게 아니라서 보면, 모두 놀래더군.”
태정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눈을 이식받다니…. 분명 커다란 수술이었을 것이고, 수술을 받으면서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수술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 모든 건 엄연히 자신이 초래한 결과였다. 하지만 태정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미안….”
중얼거리듯 말하며 태정은 고토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미안한 걸로 끝인가?”
태정은 고개를 다시 숙일 뿐이었다. 고토에게 연신 크게 허리를 폈다 굽히는 태정을 지나가던 사람 한둘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흘낏흘낏 보내고 있었다.
“그런 말 대신 네 눈이라도 빼주지?”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빼지.”
고토를 올려 볼 생각도 않고 몸을 굽힌 그대로 태정은 대답을 했다. ……그런데, 끄큭…, 깊이 숙인 허리 위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겨우 참는 듯한 웃음소리다.
태정이 고개를 들어 고토를 보자 킥킥거리던 그가 웃음을 폭발시키면서 커다랗게 웃었다.
“푸하하하. 재밌어, 역시…. 너 그걸 정말, 그대로 믿었냐?”
몸을 어중간히 일으킨 채, 태정이 망연하게 응시하자 고토는 여전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멍청한 녀석. 어떻게 눈을 통째로 이식하냐∼. 그게 진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신경이 한 번 끊어지면 이어 붙일 수 없다고. 무식하긴.”
수술이,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태정은 가늠하지 않았다. 고토의 말을 의심할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생각하면 정말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눈알을 통째로…, 듣도 보도 못한, 그리고 그런 수술을 받았다는 사람도, 받아서 고토의 말처럼―눈이 짝짝이가―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무지함이 만천하에 공개 돼버린 것 같았다.
“그러면, 이식했다는 건…….”
“각막이다. 각막 이식.”
이식 수술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속았지만, 속은 게 나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이식했다는 게 거짓말인 줄 알았나?”
순간의 안도를 알아챈 건지, 고토가 태정에게 비아냥거림이 섞인 질문을 던지지만, 상대의 대답을 원한 게 아니다. 고토는 고개를 한 번 슬쩍 젓고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이면 네 입장이 더 나아질 것 같나? 음…,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데 말야. 거짓말이든 아니든, 내가 이식을 했건 안 했건 간에 넌 나한테 배상을 해야 해.”
“……배상?”
“그래. 손해 배상. 그때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지.”
“그때 일의 책임은….”
태정이 입을 떼자 고토가 바로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곤 태정이 할 말을 대신 했다.
“설마, 네가 형무소에서 형기를 치른 걸로 모든 책임을 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건 엄연히 형사상의 책임이야. 넌 민사상의 책임을 하나도 안 졌다고.”
책임의 종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이 두 가지로 나눠지는 건지도 몰랐고, 그가 아직 져야 할 책임이 남아 있는지도 태정은 몰랐다.
또 농담을 하는 건가? 아까 고토는 이식 수술에 대해 그럴 듯한 거짓말을 꾸며 말했고, 그것을 믿었던 태정의 무지를 비웃지 않았던가. 비슷한 속임수로 자신의 반응을 보려 하는 게 아닌가.
태정은 말을 잃고 고토를 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태정은 다만 고토의 선글라스에는 비치는 사람의 얼굴을 볼 뿐이었다. 실망인지, 낙담인지 포기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얼굴, 그리고 그의 눈은 굉장히 피로하고 지쳐 보였다.
저것이, 나인가?
그것이 고토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태정은 흠칫했다.
“가자.”
다짜고짜 고갯짓을 하며, 고토는 짧게 뱉어내 듯 한마디를 던졌다. 고토의 몸짓과 태도는, 태정이 그 말에 따르리라는 것을 아주 당연시하고 있었다. 다른 말도 없이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것을 태정은 그 자리에 주춤하고 서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몇 걸음을 못 떼고 고토가 주머니에 한 손을 걸친 채 반쯤 몸을 돌렸다. 멀겋게 서 있기만 하는 태정을 보자 고토는 한 손의 손목을 까닥, 그의 진행방향으로 가볍게 꺾었다.
“뭐 해, 따라와.”
간단한 손짓과, 짧은 한 마디로 고토는 태정에게 수행을 요구―명령―한다.
그리고 태정은, 그것을 거역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