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여인이 노래 할 때까지 #13
벌써 3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태정이 녀석 말이었다. 말도 없이 사라진 뒤, 날짜를 이제는 개월 수로 따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희상은 녀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감 중엔 면회마저―한 달에 한 번, 딱 한 명만을 겨우 5분 동안 보는 것인데도―일절 거부했고, 그나마 전화 통화가 아주 드물게 되긴 했었지만, 형기를 마친 후엔 그나마 연락도 완전히 끊겨버렸다.
집에도 전혀 소식을 알리지 않는다고 했다.
희상이 태정의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너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냐고, 그 바보 녀석 좀 제발 찾아 달라고’ 희상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태정이 실형을 언도 받았을 때는 ‘이 바보 자식, 바보 자식’이라며 아들의 머리를 마구 후려갈겼던 아저씨였다. 태정의 귀가 날짜가 다가와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심스러운 무심한 태도에 아들 걱정도 않는 무정한 아버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사라진 아들이 걱정되지 않았을 리는―없었던 거다. 비록 ‘바보 자식’이라는 아들에 대한 호칭은 변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태정을 아꼈고, 또한 태정이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그의 누나는 태정이 그런 커다란 사건을 겪는 동안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동안 소재所在조차 파악이 불가능해, 태정의 형사 입건 당시조차 그녀에게 연락이 불가능했다. 뒤늦게―태정의 출소를 몇 개월 남겨 두고―소식을 접했을 때, 태정의 누이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희상은 이제 ‘태희 누나’로서 그녀를 떠올렸을 때 덩달아 일어나던 호감과 친밀감을 상실했다.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느낀 실망이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태정의 행방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분명 종적 묘연한 동생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희상은 딱 잘라 말할 수 있었다.
도대체, 동생 생각은 하고 있는 겁니까?
희상은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태정이 지금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 간에, 그 누이의 변화만은 알지 못하기를 바랐다.
바람은 바람이고, 사실은 사실이다. 아마도 태정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누가 뭐래도, 그의 누나이지 않은가.
그렇게 태정에 대한 생각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희상은 녀석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가족에게까지 소식이 감감한데, 하물며 피도 한 방울 안 섞인 자신에게랴…, 라고 머리로 생각은 하지만, 녀석을 떠올릴 때면 입에선 절로 욕이 나오고 있었다.
무정한 녀석. 못된,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녀석이 출소 날짜를 하루 어긋나게 알려주는 바람에, 희상은 경무와 함께 왼 종일 마에바시前橋형무소 앞에서 어슬렁, 두리번거리면서 그를 기다렸던 것이다. 태정이 너무 늦는다 싶어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며 희상이 형무소에 확인을 부탁하자, 형무소는 수감번호 673039인 조태정이란 수형자가 이미 그 전날 출소했음을 확인해주었다.
명백한 고의로 녀석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을 떠올리자, 희상의 입가엔 쓴웃음이 고였다. 물론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만, 그건 잘못이라 말할 성질의 것이 못됐다. 희상의 잘못이라면 단지 태정을 믿었다는 것뿐이었다.
희상이 태정을 믿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있기나 했었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태정에 대한 희상의 굳은 신뢰를, 그는 그런 식으로 따돌렸던 것이다. 희상은 그때를 상기할 때마다 고개를 내 저으며 푸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태정이 사라진 지 달을 넘기고, 또 다른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이 지나가자, 희상의 화는 십에 구 할이 걱정으로 화化해 있었다. 녀석과 관계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 뒤졌건만, 모두 헛고생이었다―예상했었음에도 희상은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쯤은 기별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응? 조태정.
연락 두절이 아니라, 이쯤 되면 행방불명이다.
희상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런 고려는 잠시 뿐이다. 그런 것이 아님을 물론 희상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태정이 녀석, 자의로 고립을 택한 것이다.
흔적 하나 없이 그림자마저 감추고, 철저하게, 자신을 없앴다.
녀석에겐, 인적 드문 섬이나 깊은 산의 골짜기가 어울릴 것이라고, 언젠가 희상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땅을 일구는 순수한 육체의 노동을 즐기며, 그 땅의 적은 소산所産에도 대단히 흐뭇해하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단순 고적孤寂한 생활.
그런 삶의 구체적인 모델로 희상은 항상 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태정의 모습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만큼, 녀석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기에 실없이 미소 지은 적도 있었다. 태정에게 자신의 상상을 이야기를 해주마고 다짐한 적도 있건만.
결국 이야길 해줄 기회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런 삶을 ‘멋진데’라고 했을 녀석의 한마디를 들을 기회 또한 없었다.
그런 식으로 숨어버리다니.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건, 태정이 널 다른 사람들이 잊어주길 바라는 거야? 그런 거냐?
희상은 답답한 가슴에 어딘가 있는지도 모를 태정이 녀석에게 물었다.
태정이에겐 2년의 시간도 모자란 거였다. 그리고 태정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태정은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정말이지 화가 날 정도로 제멋대로다. 희상은 녀석이 이렇게 제멋대로인 녀석인 줄 몰랐다.
이 자식, 정말 너를 싹 잊어줬으면 하는 거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그렇게 꼭꼭 숨어 있는 거야. 태정이 너.
* * *
“태정이 그 녀석은…, 고토에 대한 분이 풀리지 않은 거야. 사람 죽인 저 고토 같은 자식이, 아무런 처벌도 어떤 조사도 받지 않고 잘만 살고 있잖나. 게다가 그 새끼, 법대에 들어간 건 알고 있냐. 와세다 학부. 제 아비 따라 들어갔나 보던데. 하하. 나 참. 그러니까 일본 법률이 이 모양 이 꼴인 거지. 줘야 할 놈 벌 안 주고, 태정이 같은 녀석 잡아넣는 거. 모르지, 태정이가 조태정이 아닌, 스즈키나 야마다 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면 상황은 아마 또 달라졌을지도, 거기다가, 우리도 그렇고 태정이도…, 따지고 보면 외국인 아니냐? 엉? 그런데 외국인 수용 시설은 뭐에 쓰느냔 말이야. 쳇, 녀석들한테는 법이, 저희들 내키는 대로 편리하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무기 같은 거라고……. 아무튼 고토랑 똑같은 녀석들이 법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이야. 알겠냐. 후배?”
경무 녀석이, 고교 복싱부 후배를 옆에 앉혀 놓고는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뭔가 처음 이야기에서 많이 빗나간, 그게 아닌데… 라는 느낌의 결론으로 말을 맺는다. 끄트머리에 질문을 달아, 후배의 이해 정도를 확인하지만, 희상이 보기엔 이야기가 어수선해서 후배의 요점 정리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경무야, 태정이 이야길 하고 있었는데 왜 끝은 고토냐? 결국 핵심은 법은 우리한테 불리하다… 이런 거야? 뭐, 그런 거라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냐.”
희상은 불판의 고기를 뒤집으면서, 경무에게 되묻는다. 잘 구워진 고기를 부산하게 입 속으로 집어넣기 바쁘던 녀석이, 고개를 든다.
“아, 맞아 태정이 이야길 하려고 했는데….”
고기를 으적으적 씹어대면서 경무 녀석, 그제야 태정에 대한 화제를 상기한다.
간만에 경무가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해서 나와 봤더니, 녀석은 예기치 않은 동행이 있었고, 그건 조고 후배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권투를 계속하는 경무가 고교 때 황창수 선수의 지도를―비록 아주 드물게였지만―받았던 것처럼, 경무 또한 OB로서 종종 조고에 들려 복싱부에서 코치를 하는 모양이었다.
경무가 희상을 데리고 온 곳이 바로 복싱부 후배의 집에서 운영하는 불고기 집으로, 전화로는 경무 녀석이 저녁을 산다고 큰 소릴 쳤건만, 자연스레 조고 선배가 후배에게 대접받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저 덩치 좋은 경무가 겁도 없이 양껏 고기를 먹고 있는 걸 보니, 선배를 공경하는 후배의 자세가 아주 잘 잡혀 있었다.
“그래서 내 말은 태정이 녀석이, 왜 아직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느냐!! 하는 거야….”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 이유는 뭔데?”
무언가 경무에게서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다른 이유를 기대하면서 희상이 묻자, 경무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그건 말야, 복수야. 복수.”
“…….”
경무에게 뭔가를 기대한 자신을 탓하며 희상은 침묵했다. 하지만, 경무는 희상의 기막힘에도 아랑곳없이, 곧 신나게 자신의 부연 설명을 늘어놓았다.
“고토에 대한 복수를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는 거야. 우리한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복수 때문에 행여 이쪽에 영향이 있을까 걱정하는 거구. 태정이 녀석, 여간 걱정이 많았냐.”
“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
후배는 경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오오’라는 입모양을 하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희상의 침묵은 더 깊어진다.
어린 후배야 태정을 잘 모른다 치자. 하지만 저―조태정이 복수 같은 걸 준비씩이나 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는 건가…, 경무는? 녀석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으면서도 경무는 아직도 태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복수 같은 것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경무 자신이 아닐까….
‘조고 회장의 국사관 회장 폭행’이라는 커다란 사건 이후 조고인들 사이에서 화제 1순위는 단연 태정이었다. 폭행은 단순 폭행이 아닌 ‘사정없는’ 폭행이었고, 충격적이긴 해도 그 사건은 조고생들에게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던져 주면서 조고의 분위기를 달구었던 것이다. 회장직 박탈을 당한 태정은 조고들 사이에서 삼펜 연혁 사상 최고의 ‘대장’으로 그의 명예와 박탈당했던 지위를 동시 회복했다.
사건 당시엔 입학도 하기 전이었다는 이 조고 후배 녀석조차 태정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정도이니….
하지만, 타이틀이나 유명세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게다가 태정의 그것은 사실 오명에 가까웠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2년여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태정은 드문드문 언급되는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태정을 걱정하고, 기억하는 사람은 단지 세 사람이다―더욱이 그중 하나는 단지 들러리일 뿐.
“그럼, 네 말대로라면, 태정이가 어딘가에 숨어서 몸을 단련하고, 스파링을 한다든가, 그게 아니면 격투기나 가라테 수련이라도 하고 있겠구나. 고토의 동태를 몰래 살피면서 기회를 엿보고…, 이른바 복수의 칼을 날카롭게 갈고 있는 거지.
“……희상이 너, 지금 나 비꼬냐…?”
희상의 말에 담긴 핀잔은 용케 알아챘나보다. 경무의 얼굴이 굳고, 입으로 가던 젓가락은 허공에서 멈춘다.
“그냥 복수란 게 도통 태정이랑 어울리지 않아서….”
“왜? 태정이 고토를 찾아갔던 것도, 녀석들의 사냥에 대한 복수였잖아.”
태정의 행위는 그렇게 이해되고 있었다. 경무뿐만 아니라 아마 모두 그렇게 ‘복수’라고 믿고, 알고 있는 것이다. 희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런 복수가 아니라….”
“아니라?”
희상의 말꼬리가 말려 들어가자 경무가 그 꼬리를 다시 끌어낸다.
“……그냥 태정이 자식이 폭발한 거였어.”
“…………….”
이번에는 경무와 후배의 침묵이 이어진다. 어떤 행위에는 어떤 이유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정의롭고 당당한 까닭을 기대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태정이 그러한 경우의 모범 케이스였다. 억울한 죽음에의 복수라는 명분.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대의를 위한 살신성인쯤 되겠다. 태정에게서 그들은 일종의 환상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중간에 희상이 말을 흐린 것은, 자신이 말하려는 태정의 이유를 녀석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무모해지고 싶었다, 라는 것이 태정의 이유였지….
녀석의 이유는 항상 간단했던 것 같다.
“그래…. 뭐어, 복수든, 폭발이든 그 머리 복잡한 녀석이 뭘 생각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 형을 마쳤으면 빨리 집이나 찾아갈 것이지, 없어져서는, 뭐야 이건, 이젠 신비하게 모습을 감추시겠다…?”
제길, 경무가 태정을 향한 욕을 중얼거리면서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깨끗하게 비운 잔을 타악―! 소리나게 상위에 올려놓고는 손등으로 입을 닦는다.
“그 새끼 돌아오면 그냥 콱 멱살을 잡고 정신 들게 한 대 쳐주든가 해야지.”
경무가 태정을 걱정하는 건 희상보다 절대 적거나, 작다거나, 가볍거나 하지 않았다. 복수라는 조금은 황당한 추측을 해대거나, 태정을 향해 주먹을 다짐하지만, 그건 결국 경무가 태정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돌아오기를 전제하는 건, 돌아오길 바라고, 고대하는 것이니.
하지만, 희상은 ‘돌아온다’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돌아올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리희상, 그런 말하면 녀석이 참 잘도 나타나겠다.”
그렇긴 하다. 경무의 말에 속없는 걱정을 입 밖으로 냈다는 생각이 든 희상이 맥주를 찾았다. 언제 다 마셔버렸는지 잔이 텅 비어 있었다. 술을 찾아 희상이 두리번거리자, 후배가 재빨리 술을 들고 희상의 잔에 조르륵, 술을 따랐다.
후우……. 잔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잠시간에, 자신도 모르는 깊은 한숨이 희상의 입으로 길게 빠져나왔다.
“아, 진짜아! 정 그렇게 걱정되면 나가서 전단이라도 뿌리든가!!!!”
젓가락을 거의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면서, 경무가 희상에게 언성을 높인다.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실려 있다.
“아 잠깐, 그래 그거 좋겠다. 어떠냐 후배, 전단지 뿌리는 거?”
경무는 스스로가 별 생각 없이 뱉은 아이디어가 아주 맘에 들었나보다. 그 자신이 흥분해서는, 후배의 옆구리까지 쿡쿡 찌른다. 짜증은 그새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기분의 전환 속도 하나는 알아줘야 하는 녀석이다.
선배들의 대화에 감히 끼지 못하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후배는, 선배의 돌발 질문에 자세를 가다듬어 뻣뻣이 정좌를 하면서 ‘아주 좋을 것 같다’고 뻔한 대답을 한다. 선배가 옆구리까지 찔렀는데 대답은 오로지 ‘예’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람을 찾습니다. 일단 이렇게 제목을 붙이는 거야.”
후배의 지원 발언에 더 신이 난 목소리로, 경무는 아이디어를 확장해 나갔다.
“사진도 넣고, 그 아래는 이름을 써야지. 이름, 세미콜론semicolon 찍고, 조태정…, 아니, 그게 아니다. 반드시 좆태정이라고 표기할 거야.”
경무의 말투는 마음속 깊이 꼭꼭 다짐한 사람의 그것처럼 결연하다. 그 어조에 쿠쿡… 웃음이 새어나온다. 태정에 관해, 이즈음 희상은 웃을 기운도 농담할 여력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녀석이 그걸 보게 되면 어떨까?”
희상은 땅바닥에 흩날리는 전단을 주워보는 태정을 상상해보았다. 적어도 우리가 대단히 화나 있다는 것을 녀석이 알게는 되겠지.
경무는, 태정이 좋아할 거라고 한다.
“헷, 좋아하는 것도 그냥이 아니라 아주 좋아할걸. 그 자식, 그 욕을 좋아했던 거야. 아∼암, 욕먹을 짓을 또 하고 있잖아. 아마 학교 다닐 때 좆회장이란 별명도 맘에 들어했겠지. 왜 그때도 기분 나빠하긴커녕 실실 웃기만 했던 거 희상이 너도 기억나지? 그게 얼마나 사람 뒤집어 놓던지…. 체엣, 어이, 술 좀 더 따라라.”
경무가 혀를 차면서, 술을 요구하자, 착한 후배는 군말 없이 녀석의 술시중을 든다.
“좆… 회장…이라고요?”
후배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것 건지, 손으론 술을 따르지만 전혀 주의하지 않고 있다. 경무와 희상을 번갈아 바라보는 후배의 동그래진 눈은, 선배들의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그때 녀석이 하도 회장답지 못하게 굴어서 삼펜이 모두 그렇게 불렀어.”
“그 모두에서 난 빼줘.”
경무의 정확하지 못한 사실 전달에 희상이 한마디 한다. 그래봤자 오보에 대한 정정 보도는 언제나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 선배가 그렇게 불렸군요. 좆회장이라….”
“어라…….이게 어디서…. 야, 넌 절대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알겠어?! 입에 담지도 말고. 엉?”
경무는 제 자신이 그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사실도 잊고, 애꿎은 후배에게 호된 꾸지람을 한다.
자신은 태정을 그렇게 막 불러 대면서, 다른 녀석이 함부로 그리 부르는 걸 경무는 용납 할 수 없다.
삼펜 당시 태정과 사사건건 의견 충돌을 보이며 회장에 대한 마뜩찮은 감정을 공공연히 과시했던 경무였다. 그러나 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들은 같이 겪고 보았다.
배지 사건과, 국사관과의 결투, 녀석들의 조총련 사냥―김영일의 죽음, 그리고 태정이 의도했던 무모함. 태정의 실형.
태정에 대한 경무의 태도나 평가가 달라지는 건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 변화의 급속한 반전에 오히려 보고 있던 희상이 혀를 빼물 정도였던 것이다.
경무는 나중에 ‘매우 녀석에게 미안했다’고 희상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녀석이 태정에게 많은 말할 수 없는 태정의 구속을 안타까워하고 가장 분노했던 건 바로 경무였다. 녀석이 태정에게 느끼는 감정은 동지애나 전우애와 같은 무엇과도 같았다. 태정이 그것을 알지는 못하겠지만―녀석이 깨달을 시간조차 없지 않은가.
김영일이 사건을 겪으면서 경무는, 국사관 녀석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시비를 걸려고 달려들어서 그 당시 희상은 매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 뒤치다꺼리를 희상이 감당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토를 대신한 히로카즈라는 국사관의 임시 회장의 정중한 제의로 화약을 맺고, 악화 일로를 걷던 두 학교의 관계는 일단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삼펜의 유사 이래 그 당시처럼 국사관과의 관계가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뒤덮였던 때는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돌아오지 않는 건 찾아 달라는 소리인 것 같냐, 찾지 말아달라는 소리 같냐?”
경무 녀석 술이 오른 건지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
“태정이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든 당연히 찾아야 하는 게 도리 아니겠냐?”
“그런데 제 생각으론 그 선배, 찾는다는 걸 알면 더 깊숙이 숨지 않을까요?”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걸?”
“그냥…요. 왠지 그런 스타일인 느낌이라….”
돌연 선배들의 대화에 끼어든 후배를 경무가 다그치자 후배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녀석이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경무도 희상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 태정은 ‘그런 스타일’인 것이다.
“스타일이라고? 흥!”
경무는 일부러 콧방귀를 크게 뀌었다. 거짓부렁 비슷한 그것은 희상과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이상하단 말야. 그 자식이 하면 스타일이고, 딴 녀석이 하면 그건 꼴값이 된다는 거.”
“어? 그건 무슨 말이야?”
경무가 의외로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희상이 넌 안 그러냐? 뭐 그땐, 겁쟁이니, 의욕상실이니, 항상 우유부단하다고 내가 태정이한테 대거리를 하긴 했지만 말야. 녀석이 냉소라도 할라치면 꼭 내 머리꼭대기 위에서 혼자 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너 그 녀석이랑 사사건건, 매번 부딪쳤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도통 몰랐는데.”
“이런 걸 어떻게 말하겠냐, 그땐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지. 스타일 하니까 생각나는데, 그 자식이 무슨 황당한 짓거릴 해도, 어이없는 발언을 해도 ‘저건 저 녀석 스타일이니까’라고, 어느 샌가 껌뻑, 내가 넘어가고 있었다는 거야…, 녀석한테. 심지어 이런 어이없는 숨바꼭질도 홀연한 행방불명으로 돼서는 말야, 녀석의 ‘스타일’로 흡수돼버리고 있잖냐….”
경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언제 이런 ‘스타일 론論’을 확립하고 있었는지 꽤나 흥미롭다. 경무는, 술을 한잔 더 들이키곤 아직도 그 할 말이 남아 있는지 잔을 든 채로 손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잔 속의 술이 철렁거린다.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 열 받는 거야. 반론의 여지를 원천 봉쇄하고 있잖아. 그놈의 스타일이라는 게 말야.”
“그렇지. 하지만 주변의 동의가 없으면 스타일이라는 것으로 있을 수 없겠지. 결국은 너나 나나 녀석을 알고 있는 인간들이 그게―그게 뭔지 정확히는 말할 수 없어도 말야―태정이라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거 아니겠냐. 그런 걸 뭉뚱그려서 스타일이라는 말을 쓰는 거고.”
인정하긴 뭔가 억울하지만 대충 그런 말이라고 희상에게 어쩔 수 없는 동의를 표하면서 경무는 술이 남아 있는 잔을 들었다.
“젠장. 스타일이고 나발이고 우리의 좆태정이를 위해 건배나 하자.”
“그래 녀석이 무사하길.”
희상이 경무의 잔에 잔을 부딪자, 전 삼펜 회장을 위해서라며 후배도 따라 잔을 치켜든다.
“아, 그리고 태정이 누님을 위해서도…….”
문득 경무가 생각났다는 듯, 건배한 세 개의 잔 위에 태희 누나를 올린다. 녀석이 태희 누나를 줄곧 동경―연모라 해도 좋으리라―해 왔다는 건 알지만 이 자리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후배는 ‘그 사실’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 누님은 왜요?”
후배가 어리둥절한 듯 경무에게 묻는다. 느닷없이 추가 된 태정의 누이 이름에 희상이 경무에게 주의를 주지만 경무는 별 무신경이다.
“몰라? 이시자키 아야카.”
“물론 알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녀석 누나야.”
“네에? 누나라뇨? 그 이시자키가… 말입니까? 그러니까 조태정 선배의 누나란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후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같은 질문을 몇 번 반복해서 물었다. 경무 녀석은 그 사실이 뭐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냥 ‘그렇다’며 모르고 있던 후배 녀석에게 친절히 되새겨 주고 말이다.
“몰랐냐? 조고 출신들 중에 알 만한 녀석들은 다 알고 있는데.”
“몰랐는데요.”
고개를 둘레둘레 내젓는 후배 녀석의 눈이 왕방울만해져 끔벅끔벅 거리고 있었다.
“그 누님이 조고 재학 시절에 어땠냐면…….”
경무 녀석의 눈은, 이미 먼 곳을 쳐다보듯 초점이 희미해져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 녀석은 그때로 빨려 들어간 듯 이야기를 시작했고, 치켜든 세 개의 잔은 누구를 위해서도 건배되지 못한 채 산만하게 흩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