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8)

Till the Fat Lady Sings #12

그건 명백히 조선인 사냥의 재연이었다. 막상 일이 터지고 나니 희상은 오히려 그것이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김영일이 죽다니…. 배지를 국사관고 녀석들에게 빼앗기고 희상을 찾아와 조고의 명예를 실추 시켰다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바로 그 김영일이었다.

대결전에서 설욕을 벼르다가 출동한 경찰을 피하지 못하고 붙들렸다 서에서 하루를 지냈던 김영일이었다. 녀석이 죽었다. 아니 죽임을 당한 것이다. 전해들은 소식은, 오전 8시경 김영일의 시신이 공원에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전문은 충분히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김영일이 이전에 배지를 강탈당했던 그 장소에서, 천황의 탄일이었던 어제, 희생되었다. 태정의 말이 맞았다. 희상이 그럴 리 없다고 외면하고, 부인했던 일이,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다.

국사관 녀석들의 조총련 사냥.

삼펜 중 누구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김영일이 희생양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삼펜은 조고인을 위해 존재했고, 조고인의 안위를 도모해야 할 책무를 물려받고 있었다. 그러나 삼펜은 그들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의무를 소홀히 했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희상이 돌이켜 보자, 엉뚱한 흙먼지만 일으켰던 사실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 흙먼지는 그들의 눈을 가렸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펜 내의 분위기는 침울했고, 어수선했다. 희상은 경무가 사건의 갈피를 어떻게 잡아 나가야 할 것인지, 어떤 대응을 강구해야 할 것인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경무는, 오히려 희상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희상이 너라면 알고 있을 거야 그지…?」

그런 경무의 말에 희상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아마 누구도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경무는 희상이 침묵을 지키자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 녀석…, 녀석이라면 어떻게 할까?」

경무가 희미하게 들먹인 녀석은 분명 태정을 말하는 것이다. 태정의 주의를 간과한 책임이 경무를 짓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지 사건의 초기부터 이를 갈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던 경무가, 눈에 초점을 잃고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의 반응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예측할 수 없는 것일지도… 희상은 경무가 다시금 ‘국사관으로 쳐들어가자!!’라고 소리칠 것이라 생각했다. 커다랗고 뼈아픈 패배를 겪었지만, 이전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명의 희생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희생? 무엇을 위한 희생이었는가? 김영일은 제물이었다) 하지만 경무는 삼펜의 휘장이 수놓인 깃발을 휘날리며 돌격하는 대신―그러기는커녕―자신이 주도해서 퇴진시킨 전대 회장을 뇌까리고 있는 것이다.

‘김영일 말고 또 하나가 있었다’고 경무는 김영일과 똑같이 배지 사건에 연루되었던 다른 한 명을 찾았다. 그 녀석은? 다른 한 녀석은 괜찮은가? 라고, 혹여 국사관의 ‘테러’가 김영일에서 그치지 않았는지를 뒤늦게 점검하는 것이었다. 녀석이 휩쓸리지 않았음을 알고 경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한 명이 희생된 시점에서 ‘다행’이란 생각을 희상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한 명의 죽음. 국사과 녀석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것이다. 비행기 납치나, 폭탄 테러, 인종청소,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는 무의미한, 살육의 피를 흘린 것이다. 누군가는 ‘고작’이라고 할 것이다. 고작 한 명이라고. 하지만 생명의 크기는 숫자로 말해질 수 없다. 하나의 개체가 소멸되었다고, 그렇게 인간의 죽음을 말해야 하는가.

배지 사건은 단순이 조고의 명예와 관련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점점 더 몸집이 불어나 급기야는 조고인의 인명을 앗아갔다. 희상은 진저브레드 맨을 떠올렸다. 굴러가면서 모든 것을 삼키던 그 생강빵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다.

이제는 무엇을 먹어 치울 작정인 것인가…? 희상은 그것에게 묻고 싶었다.

더 이상 먹어 치울 것이 남아 있는가? 그것은 이미 ‘죽음’이라는 거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먹이를 해치운 것이다.

* * *

희상이 태정에게, 김영일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녀석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태정의 일체가 순간 굳은 듯이 보였다. ―돌처럼.

김영일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은 것은 태정이 녀석 같았다. 녀석이 일찌감치 예상했던 일이었고, 경고를 했었던 일이었다. 희상은 태정이 ‘결국…’, ‘역시…’ 등의 한마디를 담담하게 내뱉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딘가 가서 앉자고, 힘없이 중얼거리는 태정은, 충격으로 인한 여파를 희상에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수선한 학교 건물에서 태정을 이끌고 나와, 희상은 그를 적당한 벤치로 데려가려 했지만, 태정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운동장 한 구석의, 몇 대의 차가 주차해 있는 곳에서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더러운 자동차의 타이어에 등을 기대앉아 태정은 힘없이 고개를 꺾어 희상을 바라보았다.

“나 때문이야.”

하아, 저 녀석을 도저히 못 말리겠다. 희상은 태정에게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거봐’라고 하거나 ‘내 말이 맞았다’라는 둥의 말을 해도, 경무나 희상, 삼펜에 비난을 퍼부어도, 그 자격이 충분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비난은 고사하고, 자책이라니.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해도 절대로 태정에게는 아니었다. 그러나 희상은, 태정에게 섣불리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무어라 말할 것인가…? 네 잘못이 아니다, 네 책임이 아니다, 라고 말인가? 희상은 녀석을 위로할 자격이 없었다. 희상은 조용히 땅바닥에 주저앉아 녀석처럼, 그저 몸을 차의 한 귀퉁이에 의지했다.

“긴지테야….”

긴지테라고, 태정은 두 번을 중얼거렸다.

긴지테禁じ手.

스모, 장기 등에서 금지된, 써서는 안 되는 수.

희상은 태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국사관 녀석들은 확실히 긴지테를 사용했다. 아니, 사용한 것은 그곳의 우두머리 고토인 것인가? 그런 긴지테를 생각할 만한 녀석은 그 녀석밖에 없었다. 희상은 조용히 태정의 말을 받았다.

“맞아 고토 녀석, 긴지테를 썼어.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무를 수도 용서받지도 못할 최악의 긴지테지.”

그런데 자신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를 표하는 희상에게 정작 태정은 고개를 내젓는 게 아닌가.

“그게 아냐.”

무엇이 그게 아닌지, 희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태정은 희상의 말을 분명 부인했다. 희상은 자신이 했던 말을 돌이켜 보지만, 오류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라니…, 고토 녀석이 아니라는 거야? 아니면…….”

“주고, 받았어.”

“응?”

희상은 도무지, 태정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태정은, 설명 없이 띄엄띄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나쁜 버릇이었다. 뭘 주고받은 거냐고 희상은 차근하게 묻지만, 태정은 꼭 차들 사이에 숨어들기라도 하듯, 주차된 두 대의 차 사이, 비좁은 간격에 몸을 묻고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태정이 녀석,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옆에 있는 희상마저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는 것 같았다. 희상이 자신의 존재를 태정에게 일깨우며, 재차 질문을 하자, 태정은 대답대신, 천천히 움직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받으라는 듯, 팔을 뻗어 희상에게 내밀었다.

희상이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보이자, 그 위로 태정이 건넨 것은 배지였다.

두 개의 배지.

그중 하나는 김영일의 것이리라.

“너 이거…….”

“그래, 고토가 가져갔던 배지야.”

“어, 어떻게 이걸…….”

희상이 말을 흐리자, 태정은 녀석이 그날, 집에 찾아 왔었다고 희상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새로운 사실을 밝힌다. 고토 녀석이, 태정의 집을 찾았다. 그날 희상은, 태정이 말한 그날을 상기해냈다. 고토가 조고를 방문한 날, 녀석은 두리번거리며 태정을 찾으며, 태정에 대해 물었었다. 그때 녀석의 그런 행동이 이상스럽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설마, 녀석이 태정의 집까지 찾았을 줄이야. 그건, 이상한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로 광적狂的이라 할 수 있었다. 미치광이 고토. 희상이 그 미치광이 이론을 녀석에게 적용시켰을 때는 진지함보다는 장난스러움이 더 많이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 녀석의 이름에 ‘미치광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걸 두고 갔어.”

태정은 희상이 손에 쥔 배지를 고개로 가리키며 말했지만, 여전히 녀석의 말은 이음새가 잘 맞지 않았다. 고장 난 지퍼처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고토는 태정을 찾아가서, 배지를 그에게 ‘준 것’이 아니라, ‘두고’ 갔다고…, 태정은 말하고 있었다―찾아간 녀석을 보지 못한 것처럼. 희상이 일의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가 돼서야, 태정의 말은 조금 친절해져서, 이해를 돕는다.

태정은, 고토가 배지를 ‘두고’ 간 의미를 착각했다고, 녀석이 정말로, 끝을 말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긴지테를 써서, 녀석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으응? 태정은 자신이 긴지테를 썼다고 한다. 아니야 태정아, 긴지테는 고토가 쓴 거잖아……. 희상은, 태정이 말을 잘못했거나, 자신이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눈을 끔뻑였다. 그렇게 태정의 말에 집중을 하지만, 잘못 말하거나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긴지테를, 주고받았다…,고 태정이 중얼거리는 것이다.

‘주고받았다’라는 것은 태정이, 긴지테를 썼다는 말이다. 그것도 고토보다 먼저, 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태정의 긴지테가 무엇이란 말인가?

언제나, 두 녀석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만이 가능했다. 고토가 ‘그것을 원했다’고 했던 태정의 기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역시 그랬었다. 그래도 그때는 두 녀석의 말로 미뤄 추측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 것이다. 고토가 원했던 ‘그것’을 순순히 들어주었던 녀석이었다. 희상이 아는 태정은, 긴지테 같은 건 쓸 수도, 쓰지도 못할 녀석이기 때문이었다.

태정은 고개와 몸을 완전히 차에 의탁하고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흐읍…, 후으 하고 숨을 크게 들이 내쉬었다. 무언가에 짓눌린 사람처럼 아주 무거운 호흡이었다.

“그, 냄새 말이야.”

듣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그 호흡은, 마치 냄새를 맡기 위한 것이라는 듯, 태정은 냄새를 말했다. 태정의 코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냄새 이야기였다. 희상은 ‘피냄새’ 가 난다고 했던 태정의 말을 듣고 섬뜩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섬뜩한 느낌은 오늘을 예고했던 것일까…정말 그것은 김영일의 죽음을 알리는 징후였는가…, 과연 죽음과 피 냄새에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 것인지… 희상은 냄새와 김영일을 연계시켰고, 비현실적이고도 황당한 그 논리는, 희상의 머릿속에서, 현실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정작 태정은 그 냄새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그 빌어먹을 냄새가…, 이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아. 도무지.”

피하려고 했는데 왜 피하지 못한 거냐고, 태정은 희상에게 물었다. 냄새를 맡은 건 경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피하려고 노력했는데 노력이 화를 불러 왔다고…, 태정이 빙돌아 말하고 있는 건, 녀석이 말하고 싶은 건, 결국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었다.

“네가 견뎌야 할 몫이라고…. 태정이 너, 고토와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었어. 기억해? 하지만 이건, 네가 견딜 몫이 아니야. 네 노력이 화를 불러 온 게 아니야.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고토가, 김영일을 죽인 거야. 알겠어? 네가 아니야, 결코 네 탓이 아니라고, 태정아.”

희상은 가슴이 썩는 것 같았다. 왜 태정이 자신을 자책하는 건지, 왜 녀석이 저렇게 어깨가 짓눌린 듯 힘겨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희상이 그를 안타까워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정은 다시 눈을 감고 주먹으로 눈을 비빈다. 피곤한 건가…? 태정은 두 눈을 문지르던 주먹을 두 눈두덩에 그대로 얹어 놓고 있었다. 그것은 태정을 매우 피곤한 사람처럼 보이게도 했다. 또, 마치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 같기도 했고, 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태정은 그렇게 주먹으로 눈을 가린 채로 중얼거렸다.

“맞아, 고토가, 김영일을 죽인 거야. 간단한 거였어. 김영일을 노렸는데, 그걸 왜 몰랐지?”

태정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희상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태정은, 희상의 말에서 자책할 거리를 금세 찾아내는 것이다. 태정은 간단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건 돌이켜서 볼 때에야 비로소 ‘간단한 듯이 보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개 모든 일은 지나고 나서야 ‘아차’소리를 내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것이다. 배지사건과 이번 사건의 희생자가 동일하리라고 예측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지 건이 국사관 녀석들이 과거의 놀음을 재개했다는 이정표는 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다음 계획과 그 계획의 실행 여부, 그리고 그 타깃은 전적으로 별개의 일인 것이다. 배지 사건의 김영일이는 이미 그 시점에서 잊혀진―또는 그런 과정에 있는―과거 사건의 피해자에 불과했다. 곧 이은 두 번째 배지 사건으로, ‘대결전’을 치렀고, 고토가 화해라는 명목으로 조고를 방문키도 했던 것이다. 상대는 간교하고 치밀했다. 그런 고토가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어떻게도 그 녀석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태정은, 막을 수도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희상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태정은 재차 자신의 고집을 세웠다.

“막을 수 있었어.”

태정은 길게 숨을 내쉬곤 또다시 너무 간단한 거였다며 중얼거렸다. 녀석은 평소 중언부언, 말을 반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말을 되풀이하고 길게 숨을 늘이 쉰다. 희상은 그게 녀석의 감정 조절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정조절이라… 아니다. 녀석은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녀석 사인死因은 뭐래?”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문득 태정은 죽은 녀석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물었다.

“아직 몰라,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 공원 나무에 목이 매달려 있었다고는 하지만…,”

희상은, ‘경무 녀석이랑 병원 가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태정은 ‘아니, 볼 수 없을 것 같다’면서 희상의 권유를 거절했다. 동행을 거부한 태정의 말은, 상당히 애매하게 들렸다.

볼 수 없다는 것은, 희생자인 김영일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피치 못할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인지 모호했던 것이다.

“그때 김영일이 국사관 녀석들한테 두 번 당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설마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하핫―. 하하핫.”

태정은 눈에서 주먹을 떼고, 차에 맥없이 기대앉았던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배를 잡고 갑자기 웃어댔다. ―하지만 녀석의 웃음에는 힘이 없었다. 그렇게 웃으면서 태정은 죽은 사람을 되새기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이에 대해 멋대로 잘못을 뉘우치거나 자책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괜찮다’고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태정은 그 죽음에 깊게 관계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저렇게 웃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억제된 감정은 엉뚱하게 표출되는 것이니. 그의 긴지테가 고토의 긴지테를 불러일으킨 것―희상으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을 심하게 자책하는 것처럼, 희상에겐 태정이 크게 웃는 모습이 마치 자학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보였다.

“태정아, 애초부터 그 냄새는 김영일과 아무 관련이 없는지도 몰라. 그 둘이 맞물린 건, 우연의 일치였던 거지. 그건 그냥 단순한 환각이야. 내가 듣는다는 노래처럼.”

희상은, 태정이 자학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냄새였고, 녀석이 냄새를 의식하지 못했더라면…을 생각하자 원인은 쉽게 제거될 것처럼 보였다.

의외로 태정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희상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김영일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빌어먹을 냄새는, 이미 사라져야 했으니까.”

태정은 그것에 대한 역정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냄새는 지워지지 않고, 더 강해졌다고.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희상은 그저, 태정이 네가 좀 피곤해하는 것이라는, 궁색한 말밖에는 어떤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사람은, 피로하거나 몸이 아플 때 더 예민해지잖아? 그리고 어떨 때는 감각이나 지각이 더 날카로워진 것처럼 느끼기도 해…. 태정이 너도 요새 여러 가지로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그 냄새도 더 강하게 느껴지는 거고…….”

희상의 말을 듣고 태정은 ‘그런 건가…’라고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의구심을 표한다. 희상은 ‘그렇다’고 녀석에게 확신을 나타내 보인다. 그러곤, 교실로 들어가지 말고 쉴 만한 곳을 찾아 좀 쉬라고 했다.

태정은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희상에게 대답했다.

“나중에 보자.”

희상과 헤어지면서 태정은 손을 흔들었다.

Intermission

희상이 세타가야 구내의 관할 서로 찾아갔을 때에 태정의 손에는 밴디지bandage가 감겨 있었다. 경무를 통해 주워들은 상식으로, 희상은 그것이 권투 글러브를 끼기 전에 손에 감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글러브를 벗었을 때에 맨손의 위력을 보강해주는 것도 알고 있다. 요는 태정이 작정을 하고 그 녀석을 찾아갔다는 것이었다. 태정은 아주 평온하게 보였고 희상이 찾아갔을 때는 웃고 있었다. 희상이 괜찮냐고 묻자 ‘피곤해’라고 한마디를 했다. 웃는 표정에도 불구하고―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희상은 정말 녀석이 심하게 피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상이 어디론가 가서 쉬라고 했었을 때 태정이 자식, 쉬기는커녕,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직접 행동하고 처벌하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었으리라.

태정의 밴디지에는 피가 흠뻑 묻어 있었다. 얼핏 주먹에서 배어 나온 피같이 보였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주먹에 맞은 상대가 어떤 모양이 되었을 지는 차라리 상상하지 않는 것이 나을 법해 보였다. 희상과 헤어질 때만 해도 아무런 기미도 내비치지 않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혼자 국사관으로 가서 혼자 고토 녀석을… 말하자면 해치웠던 것이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저 녀석이 덤벼들었다 이유를 모르겠다. 미친 녀석 아니냐’ 이것이 국사관고 녀석들의 증언이었다. 대여섯 명이 한 마디씩 하는 말을 들어보니 녀석들의 회장―고토 마사키―은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간 듯했다. 녀석들은 태정이 미친 듯이,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주먹을 날렸다고 했고, 그러다가 상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같은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미친 녀석 같다고도 했다. 말리는 녀석까지 심하게 다쳐 도무지 떼어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해 고토의 상태가 상당히 심각한 것 같았다. 때리면서 저 자식이 연신 웃었다느니, 피투성이가 된 상대의 피 냄새를 맡고 피 맛을 봤다느니, 국사관 녀석들은 신빙성이 의심되는 진술을 해댔다. 녀석들의 증언에서 묘사된 태정은 희상에게 전혀 낯선 인간이었다.

믿겨지든 믿겨지지 않든, 희상은 왠지, 국사관들의 진술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녀석이 진짜 태정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희상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애매한 말을 던져 버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태정이었다.

희상이 두서없이, 그냥 태정에게 ‘왜’냐고 물었다. 태정의 대답 또한 단순했다. 무모해지고 싶었어. 그 말 그대로 태정의 행동은 ‘무모’했다. 녀석은 어떤 한계를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 그런 한계를 모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무모’를 들먹인 녀석치고는 아주 냉정하게, 태정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태정에게 불리했다. 태정을 제외한다면 현장엔 그쪽 녀석들뿐이라 ‘지극히’ 불리했다. 또한 이전에 국사관고를 배회한 적이 있었고―삼펜 셋이 국사관을 찾아 간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그리고 고토 녀석에게 사과를 했던 전력이 있다. 그 외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계속해서 태정에게 불리한 증언과 사실이 쌓여만 갔다. 거기에 더하여, 이제 갓 청소년 보호 연령을 넘긴 태정이 형사 처분을 받게 된다면, 감화 시설이나 보호 시설에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사회의 모든 범법자를 아우르는 엄연한 교도소에 수감되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에 희상은 답답할 뿐이었다. 초조하고 애태우는 희상에게 걱정 말라고, 태정은, 오히려 나직이 위로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있던 곳에서 잠시 떠나 있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해서 이젠 냄새가 지워졌냐고, 태정이 구치소에 수감되기 전에 희상이 태정에게 물었다. 태정은 지긋한 웃음만 지으면서, 희상에게 질문을 돌렸다. 너는? 지금 노랫소리가 들리니…?

지금? 지금은 들리지 않았다. 희상은, 왜 태정이 ‘지금’을 이야기하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려 했지만, 더 이상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태정은 구치소 내로 이동을 했고, 희상은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거기에 대해 태정에게 물어볼 기회는 영영 없었다.

태정은 2년형을 선고받았다.

Interlude―동면(冬眠)

“여기 좀 앉아도 됩니까?”

공원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태정은 누군가의 질문에 눈을 떴다. 오후의 강렬한 햇살에 그는 두어 번 눈을 껌벅였다. 천천―히, 느리게 뜬 눈앞에는 샐러리맨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사내는 다시 한 번 앉아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 앉으시죠.”

벤치의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어 두 팔은 양옆으로 쫙 뻗어 긴 의자를 홀로 점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태정은 한 팔을 내리고 몸의 중심을 벤치의 한 가운데에서 한쪽 가장자리로 옮겼다.

양해를 구한 사람을 위해 태정이 넉넉한 자리를 내주자, 감사를 뜻하는 것처럼 사내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끄덕이곤, 검정색의 평범한 가죽 서류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앉았다. 가방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회색 수트를 입은 보통의, 흔한, 중년의 샐러리맨이다. 4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회색 양복의 남자는 다른 한 손에 그러쥐고 있던 편의점 비닐 봉투를 무릎께에 올려놓고 손을 넣어 부스럭대더니 주먹밥을 하나 꺼낸다. 아마도 끼니때를 놓쳐 늦은 점심을 지금 마악 해결하려는 듯하다.

성실한 영업맨이군…. 별다른 감흥 없이 상대방의 인상이 한 마디로 정의되고, 태정은 그에게 잠시 빼앗겼던 시선을 돌려 의자에 몸을 바로 하여 기댄다. 사내가 이곳에 와서 말을 걸기 전과 같은 상태로 눈을 감고, 무료하게 햇볕을 쪼이고자 했지만, 그가 주먹밥을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것에 절로 시선이 돌아간다.

피식, 태정은 그 자신의 정직한 반응에 실소를 머금었다.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몸은 정직하다. 끼니를 거른 것은 태정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옆자리의 사람은 주먹밥을 입안에 가득 우물거리면서도 연신 밥을 베어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원숭이나 다람쥐가 두 볼 가득 채우고도 계속 입을 놀리는 것을 연상케 했지만 흉하지도 웃겨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매우 맛있어 보인다.

뭐라 해도 오늘 태정은 찬물을 들이킨 것밖에 먹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젠 아예 시선을 고정시키고 오른 턱을 손으로 괜스레 긁으면서, 태정은 ‘먹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먹거리를 맛있게 먹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왠지 태정의 기분은 좋아지곤 했다. 특히 소박한 음식을 실로 먹음직스럽게 먹는 건 더욱 그러했다.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건 손쉽게 할 수 있지만, 모든 먹을 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고작 편의점의 주먹밥을 먹을 뿐이었지만, 옆자리의 사람에게서 들리는 ‘얌얌’ 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그럴싸해서, 태정의 공복감을 증폭시켰다.

“쿨럭 컥 크흠 큼.”

먹다가 사래라도 들렸는지, 중년의 사내는 입을 가리고 막힌 기침 소릴 내며 목을 정돈하려 했다. 그게 여의치 않자 급하게 비닐 봉투를 바스락거려 캔 우롱차를 꺼내 따더니 꿀꺽 꿀꺽 들이마시고는 후우―한숨을 돌린다.

그 일련의 상황이 왠지 급박해 보여, 태정은 자신의 공복을 잠시 잊고 웃을 수 있었다. 비록 소리 죽인 웃음이었지만 웃는 기색을 숨길 수 없었나보다. 전방의 공원 분수대만을 노려보며 식사를 하던 사내가 태정을 힐끔 쳐다본다. 태정이 빙긋 웃는 얼굴 그대로 시선을 마주하자 상대방이 굳은 얼굴은 적이 멋쩍은 미소로 바뀐다.

“아침도 걸렀거든요. 오늘 처음으로 뭔가를 먹는 겁니다.”

마치 태정에게 무례를 범하기라도 한 것처럼 중년의 사내는 민망해하면서 먹던 주먹밥을 태정의 앞에 흔들어 내보이면서 변명조로 말을 했다.

처음의 인상에서 전혀 오차가 없었다. 성실한 인간. 이 아저씨는 나이도 한참 어린 상대에게 공손한 말투로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넨다. 먹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고, 또 그 모습을 보고 웃은 태정이 오히려 무례에 대해 변명을 해야 옳았다. 하지만 튀어나간 말은 그런 변명이 아니었다.

“그건…, 매실 주먹밥인가요?”

왜 갑자기 그런 물음이 나갔는지…. 질문 당사자임에도 태정은 던져 놓은 물음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하물며 상대방은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주먹밥을 입으로 가져가던 손동작이 멈추고 태정을 바라보는 상대의 눈은 어떤 의혹과 당혹스런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내 주먹밥의 샐러리맨은 손에 든 대상을 재차 확인하면서 ‘그래요, 매실 맞는데…’라며 태정의 질문에 성의 있게 답해준다. 흐려지는 말끝에 서려 있는 의문을 깨닫고 태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궁금했습니다. 하도 맛있게 드시기에 그냥 매실 주먹밥이라고는 믿기가 어려워서요.”

얼버무림이 그럴 듯했는지, 상대는 태정의 말에 허헛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하…. 이건 그저 보통의 매실 주먹밥인데….”

“그거, 굉장히 맛있어 보입니다.”

턱짓으로 주먹밥을 가리키며 재차 맛있을 것 같다고 하자 상대는 허허거리던 웃음을 멈추더니 편의점 봉지를 태정 앞에 내밀었다.

“이거.”

“엇…?”

상대가 내민 것을 얼결에 받아든 태정이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건지…?’라는 의문을 지닌 채로 봉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자, 그것을 ‘먹으라’는 사내의 말이 들려온다. 그제야 봉지 속에 남아 있는 주먹밥이 하나 태정의 눈에 들어왔다.

“그거 먹어요.”

사내는 태정을 재촉하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태도나 시선이 너무 진지해서…, 그쪽도 끼니를 거른 거지요?”

……내가 그렇게 허기진 얼굴을 하고 그를 쳐다 본 것인가? 상대의 말에 태정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렇군.

사실은 사내의 매실 주먹밥이 먹고 싶었던 거다.

태정은 그의 점심을 탐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동시에 상대의 호의를 고맙게 받기로 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주는 먹을거리. 예의상으로, 혹은 체면을 생각하는 한 번 정도의 사양이 따를 법했다. 하지만 현재 태정의 1차적인 식욕은 그런 것을 무시하게끔 만들었다. 태정은 묵묵히 주먹밥을 들어 포장을 벗겼다.

“이건 명태알이네요…. 그, 매실 주먹밥이 먹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남의 점심거리를 얻어먹는 것에 무안함이 없을 수 없다. 그러한 무안함에 태정은 외려 뻔뻔스러운 농담을, 농담 같지 않게 던진다.

“하하…. 다음엔 미리 말해요. 매실을 남겨줄 테니.”

그리고 다행히 상대는 그것을 유쾌하게 넘길 줄 아는 유머 감각이 있었다. 하긴, 초면의 사람이 끼니를 거른 듯하다 해서, 선뜻 먹을 것을 건네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두 손으로 밥을 받쳐 쥐고 이번에는 상대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한 입을 베어 먹는데, 마지막으로 먹었던 그것이 떠올랐다. 24시간이 지나 반값으로 떨어진 주먹밥을 사 먹었던, 1주일도 더 된 기억을 태정은 상기했다. 그때의 주먹밥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벗겨낸 포장엔,「재료에 신경 쓴 고급 주먹밥」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맛으로 태정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맛있네요.”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태정이 느낀 허기는 태정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컸던 모양이다.

“하하핫….”

이번에는 태정이 먹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상대가 웃음을 터뜨리는 아까와는 반대의 상황이 돼버렸다. 잠깐 씹는 것을 멈추고 웃는 남자에게 의문스런 표정을 내비치자 그 이유가 밝혀진다.

“거기 턱에 밥풀이 묻어서…. 하하.”

“아…. 그런가요.”

지적을 받은 태정은 수염으로 꺼끌꺼끌한 턱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행동에는 쑥스러움이 묻어 나오고, 더불어 손에는 흰 밥알이 묻어 나왔다.

밥알을 손가락으로 튕겨내자, 언제 그곳에 대기하고 있었는지, 발치에서 살찐 비둘기가 콕콕, 방금 주어진 먹이를 쪼아댔다. 그것을 다 해치우고 나서도, 부스러기가 더 떨어지지 않나 뒤뚱거리며 주위를 맴도는 비둘기의 모습에, 일순 수치가 몰려들었다. 옆자리의 사람에게 자신이 저렇게 비쳐진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는 것이었다. 태정은 순간 얼굴이 벌개져서 일체의 동작이 정지돼버렸다.

“저 비둘기 때문에 앉을 곳이 없어요. 이 넓은 우에노 공원에 멀쩡한 벤치 하나 찾는 게 힘들다니 이해가 갑니까?”

태정이 비둘기를 응시한다고 생각한 사내는 화제를 비둘기로 향했다. 고개를 절래 흔들면서, 자신이 처음 이곳에 자리를 내어달라는 양해를 구한 까닭이 바로 비둘기에 있음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곳에 비둘기가 좀 많긴 하죠.”

태정은 상대의 말에 응수해주며 동의를 표했다. 비둘기 때문에 멍해진 정신이 그것을 화제로 삼은 덕에 일깨워진다.

“좀 많은 게 아니라 비둘기 천집니다. 사방에 비둘기잖아요.”

사내의 말에는 비둘기에 대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태정이 비둘기를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그렇다. 이 사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태정이 수치를 느낄 필요는 없었다. 주먹밥을 준 것은 동정이 아닌 순수한 호의였던 것이다.

아직 허기가 풀어지지 않았나. 혼자 쓸데없이 예민하게 생각하고 반응한다. 후우…. 태정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비둘기가 없는 이 우에노 공원도 상상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저 새까만 비둘기 떼나, 덕지덕지 벤치에 하얗게 말라붙어 있는 녀석들 분뇨들은…하…,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그러고 보니…, 이 공원만큼은 변한 게 전혀 없어요.”

공원을 새삼 주의 깊게 둘러보자 태정은 자신이 왜 이곳에서 하릴 없이 볕을 쐬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으음…? 그럼 공원 말고 다른 건 뭐가 변했다는 말 같은데….”

고개를 기우뚱, 의문에 찬 사내는 그렇다면 변한 건 뭐가 있냐고 한다.

태정은, 그렇게 맛있게 먹던 주먹밥을 한 입 성의 없이 베어먹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뭐가 그렇게 변한 거였나?

자신은 뭐가 그렇게 낯설었던 건가.

“……사람들이요.”

“사람들…이라?”

네, 라고 태정은 간단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낯설었다. 그들은 대단히 변해 있었다. 잠시 떠나 있는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로지 태정만이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몇 년 전과 다름없는 이 칙칙한 공원처럼.

“그 우롱차 남았습니까?”

주먹밥 때문인지 생각 때문인지 목이 답답해져서 태정은 사내에게 음료수를 청했다. 아까 전 비둘기를 보며 느꼈던 수치는 온데간데없다. 얻어먹은 김에 아예 음료수까지 부탁하기로서니 뭐가 나쁘랴…, 라고, 태정의 생각은 금세 바뀌어 있었다.

다 마시라면서, 사내는 캔을 태정에게 넘겨준다. 무심히 받아든 캔을 마시려다, 태정은 또 하나 변한 것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 캔만 해도 변했네요. 이렇게 생긴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중얼거리듯이 말하다가, 꿀꺽, 태정은 고개를 들어 음료수를 입에 털어 넣는다. 겉모양은 새로웠지만, 내용물은 기억 속의 그것과 동일했다.

“하하…. 한참 젊은 사람이, 하는 소린 어째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 같아요. 아, 거기 턱밑에 음료수 흘렀어요. 하하.”

이런, 황급히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훔치자, 턱밑에 흘린 음료수가 묻어 나온다. 아깐 밥 부스러기가 붙어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또 한 번 음료수가 흘러내리는 칠칠치 못한 꼴을 연달아 보인다. 한동안 방치해 두어 멋대로 자라난 수염 때문이었다.

“그런데….”

태정이 두어 번 턱 옆과 아래를 쓱쓱 닦아 내는걸 웃는 눈으로 응시하던 남자는, 잠시 말을 흐리다가, 혹시…, 라고 운을 뗐다.

“혹시, 어디 갔다 왔나요?”

“네? 어디라니……? 무슨 말씀인지?”

사뭇 놀란 태정의 눈이 절로 크게 떠졌다. 이 사람이 아는 건가? ‘어딘가’라고 할 만한 곳을 분명, 태정은 갔다 왔던 것이다.

“에, 그러니까 여행이나 어디 먼 델 갔다 온 사람 같아요. 이건 바뀌고 저건 바뀌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게다가 분위기도 뭔가 다르고.”

여행.

먼 곳.

태정은 그가 한 달 전까지 있었던 곳을 돌이켜 보며, 방금 언급된 두 개의 단어를 결부시켜 보았다. 태정에게 그 단어들은, 막연하고 모호하지만, 어두운 동굴 안으로 비춰 들어오는 입구의 빛들처럼 따스하고 희망을 주는, 플러스의 세계에 있는 무엇이다. 그리고 태정은 바로 그 어두운 동굴 안에 있었다.

그곳에서 나왔다지만, 또 다른 컴컴한 갱도에서 헤매고 있는 느낌인데…, 여행이라니.

“한 몇 년 어딘가 떠나 있던 모양입니다? 맞지요?”

사내는 조급하게 자신의 추측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가늠해 보려고 했다. 질문이 그가 정의하고 생각하는 ‘여행’을 전제하고 있긴 하지만, 태정이 떠나 있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 수염도, 그게 에…, 좀 거칠고 먼 데로 갔다 온 것 같은 느낌이라……. 뭐, 중동이나 아프리카, 딱 그런 분위긴데.”

어쩌다 보니 그냥 내버려 둔 수염이다. 덥수룩이 자라 뺨을 덮어 버렸는데, 상대가 자신의 상상과 결부시켜 하는 이야기에 태정은 슬쩍 웃음이 나왔다.

“이건 돌아와서 기른 겁니다. 길렀다기보다는 내버려뒀다는 게 정확하지만요.”

먹을 때 불편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다시 턱을 만져 보니, 수염을 말끔하게 자르려면 좀 고생을 할 것 같았다.

“아아∼ 내 말이 맞지요? 어딘데요?”

“그게……, 먼 데는 아닙니다. 거친 데라면, 맞는지도.”

태정의 주저하는 대답이 궁금함을 더 유발했는지, 어딜 갔다 온 거냐며, 상대가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호기심이 그리 많은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상대가 보이는 대로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놀랄 일은 결코 아니다. 자신도 상대에겐 먼 여행을 갔다 온 사람처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나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간해선 시간도 없고 여유도 안 나서 갈 엄두가 나야 말입니다. 아무튼 그쪽이 부럽기만 하니, 이야기라도 해줘요.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 좋았는지 나빴는지. 뭐가 좋았고, 뭐가 나빴고, 누구를 만났고…, 뭐 이런 이야기들……. 여행 이야기는 매번 들어도 재밌지 않습니까.”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여전히 호감을 가지고 친절하게 대하는 상대에게 태정은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사실을 말한다면, 그는 분명 당황하거나 곤란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거짓으로 대강 말하는 것은 실례이리라. 주먹밥을 건네주고, 매실을 먹고 싶다는 농담을 시원하게 넘겼던 사람이지 않은가.

“…….”

아닌 사실을 만들어 내거나, 그럴싸한 이야기를 그럴 법하게 들려주는 것엔 서툴렀기에, 잠시 머뭇하던 태정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남자에게 말했다.

“……형무소에 갔다 왔습니다.”

상대의 반응을 태정이 염려했었다는 금방의 사실이 무색할 만큼 건조한 어투였다.

역시,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어버렸다.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미동 없이 다만 눈빛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태정이 한 말의 진위를 가늠하는, 그러나 그 진위를 확인하지 못해 불안해 흔들리는 눈빛.

태정은 입을 떼지 못하는 상대를 대신하듯 계속 입을 움직였다.

“정확히 2년을 있었지요. 지난 달 출소했습니다.”

“에에. 그거……, 정말… 인가요?

가까스로 미소를 띠는 상대가 띄엄띄엄 잇는 말은 불신이다. 하기야, 믿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제 수감번호가 673039번이었어요. 마에바시錢驕형무소에서… 군마현에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태정은 남자에게 묻지만, 남자의 경직된 모습은 대답을 기대할 수 없었다. 태정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전 그곳에서 형무 작업이란 걸 했었습니다…. 말은 작업이지만, 실은 인력 동원이죠. 하루 8시간 이상씩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아, 물론 임금이 지급되긴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면 20엔이 쌓입니다. 전 목공일을 했는데…, 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치수를 재서 짜 맞추고, 유액을 바르고, 그냥 합판이나 나무에 불과했던 게 어느새 의자가 되고, 서랍장이 되더군요. 그걸 보면 굉장히 가슴이 설렙니다. 꽤 재밌었어요.”

사내가 원했던 것은 단지 재미있는 여행이야기였다. 자신이 밟지 못한 세계를, 태정을 통해 그저 살짝 구경하고 싶었을 터, 하지만 그 세계에 형무소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그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었다. 태정의 상세한 묘사와 구체적인 설명을 증거로 받아들인 건지, 상대의 반신반의하는 태도에서 의심은 사라진 듯이 보였다.

“어떻게…….”

이제 상대는 진지하게 그 연유를 묻고 있었다.

어떻게라.

과거를 되새기며 누군가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태정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낯선 인간이, 태정은 편했다.

“폭행 상해죄, 였습니다.”

태정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끌어갔다. 마치 그와는 전혀 무관한 제 삼자의 과거사를 전달하는 사람처럼,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사람을 거의 죽기 직전까지 때렸습니다. 게다가…, 전 복싱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주먹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군요.”

누군가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사실과 생각을 초면인 사내에게 풀어놓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던 기억이, 그리고 감정이, 부력을 지닌 것처럼 홀연히 수면 위로 떠올라왔다.

“그땐,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손에 붕대를 이렇게 감고, 찾아가서, 무작정 몇 대를 내려 쳤습니다."

태정은 밴디지를 감는 시늉을 하다가, 눈앞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주먹을 들어 서너 번 절도 있게 허공을 끊어내듯 내려치는 동작을 보였다. 제스처라는 것이 말의 이해를 수월하게 돕고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상대는 태정의 손동작에서, 태정의 입으로, 그의 눈을 떼지 못하고 이야기를 멍히 듣고만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수도 없이 내려친 것 같습니다. 아무튼, 핏덩이를 보고―피가 정말 덩어리 채로 뭉클하게 흘러 나왔지요―그 냄새를 맡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건, 진짜 피 냄새였어요.”

입자를 가진, 명확하고 신선한 냄새였다…, 라고 태정은 기억한다. 흐읍…, 당시의 냄새가 날 것 같은 느낌에 태정은 공기를 크게 코로 들이마시지만, 물론 나지 않았다. 전혀.

사건 이후 코를 맴돌던 냄새는 사라졌다.

이유와 근원을 알 수 없었던 그것은 더 이상 태정을 찾아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결국, 태정은 냄새에 지배당했던 것이다.

“그리고요?”

태정의 심호흡으로 이야기가 잠시 멈추자 사내는 뒤를 재촉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리고 어떠했는가를 태정은 떠올렸다.

“그러고 나서, 이상하게 졸음이 몰려오더군요. 물론 잘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을 죽도록 때려놓고, 자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말 피곤해서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는데 그냥 눕고 싶은 생각만 들더군요. 하하.”

“하…하….”

태정이 자조적으로 웃는 웃음에 장단을 맞춰주듯 사내는 웃음소리를 어설프게 따라냈다.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그런 종류의 시시한 정의감 있지 않습니까. 푸후.”

하지만, 고작 냄새 따위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다.

태정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사내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두어 번 끄덕였다.

“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졸렸던 거겠죠. 사고가 정지되고 판단을 유예시켰으니까요.”

그건 마치 고백과도 같았다.

독백처럼 나직한 목소리는 계속되고, 거의 일방적이다시피 사내를 향한 이야기는 흐르는 물처럼 멈춰지지 않는다.

“하지만, 제겐 그럴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를 단죄할 권리도, 그에게 분노할 권리조차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모든 원인은 제게 있었던 겁니다.”

“……이를테면, 죄책감 아닌가요.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하지만 대가를 치렀으니, 과거에 대한 후회나 죄의식, 그런 거에선 이제 벗어나도 좋지 않을까요?”

낯모를 사내의 말은 아주 올바르고, 정석대로의 유익한 충고였다. 죄책감, 후회, 반성 같은 단어는 사전을 뒤져봐도 없을 것 같은, 그만큼 태정에겐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조차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태정은 생각한다.

그런 건가, 라고.

“그때는 권리가 없었다는 걸 몰랐다지만, 나중에라도 알게 됐으니까 된 거죠. 원래 뒤늦게 후회와 자책이 찾아오는 겁니다.”

사내는 재차 태정이 후회하고 있음을 단언하고 있지만, 태정은 아직 자신의 감정을 정의하는데 힘이 들었다.

판단 정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대해서도, 그에 대해서도 제가 무얼 느끼는지조차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면 미안하지만, 언제 기회가 되면 찾아가서 ‘그’에게 미안했다고 한마디라도 건네도 좋겠지요. 사과라는 건, 되도록 받지 말고, 많이 주는 게 편하거든요.”

사내의 말에 태정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에 대한 의견을 성의 있게 태정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상대가 그의 반응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지만 태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적이 흐르고 그 정적에 태정은 공연히 목이 말랐다.

“꿀걱.”

아직까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캔을 깨닫고 태정은 우롱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하지만 남아 있는 양이 모자랐는지 캔을 비웠음에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부스럭 부스럭.

사내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먹는다는 소모적 행위에서 생산되는 쓰레기를 편의점의 봉투에 주섬주섬 주워 넣는다. 적막한 오후의 한가로움에 약간의 부산함이 가해졌을 뿐인데 태정이 느낀 그 적막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사내는 시간을 보고 잠깐 호의를 베풀었던 인간에게 시간이 다 됐다고, 가봐야겠다며 작별 인사까지 했다. 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고별을 하지 않고 주먹밥에 대한 인사로 그를 대신 했다.

“오늘은 최고로 맛있는 주먹밥이었습니다만…, 제가 점심을 망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뇨, 대단히 색다른 여행기를 들은걸요.”

하지만 이젠 여행을 끝낼 때가 아니냐고, 남자는 떠나면서까지 상대―낯선 홈리스에 불과한 태정―에 대한 걱정을 끝내 떨구지 못했다. 멀리 떠나가는 남자가 한 번 더 태정을 돌아보며 손을 들어 보였고 태정도 그와 같은 동작으로 답을 해주었다.

여행의 끝.

남자의 말처럼 여행이라면 여행이란 것을 태정은 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여행이 왜 시작되었는지도 이제는 희미하다. 그리고 그동안의 사내가 지적했던 ‘감정의 변화’라는 것도 태정은 알 수 없었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아직은 아니라는 것.

이것이 여행이라면 그 끝이 아니라는 것만을 알고,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사내와의 대화, 사내의 충고는 태정을 잠시 일깨운다. 하지만 역시나 이것 또한 ‘유보 대상’이라는 라벨을 붙여 태정은 머릿속 어딘가의 저장고에 고스란히 넣어두게 될 것이었다.

판단 유예, 사고 정지, 라고는 해도 결국 간단히,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는 거다. 공원에서 볕이나 쬐던 것은, 머리를 텅 비운 채로 있고 싶었던 것.

사내에게는 미안했지만, 동면상태와도 같은 태정의 의식은, 실로 잠깐 눈이 떠진 것과 같았다. 그건 마치 겨울잠을 자는 동물의 무의식적인 뒤척임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태정의 의식은, 아직 깨기에는 이른 겨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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